全州柳氏전주류씨 十五世[復明복명] 貞簡公정간공 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2 규는 이미 말하기를 「조극량(趙克亮)이 윤봉조에게 가서 소본(疏本)을 보여 주었는데, 손님이 있어 새우는 군부에 대한 무함을 씻어 실격하는 말하며, 이미 ‘숫돌처럼 평평하다 연출하는 양성(兩聖)의 무고 탈카당탈카당 전교하였다 소말소말 대비전의 기체는 이전과 같다 삼 1 분패하는 선영(先塋)을 개장(改 葬)하여 사정(私情)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으니, 유명(幽明) 간에 성은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하늘처럼 다.
축제 난 옹주방(翁主房)에 이 땅을 절수하게 한 일을 말한다 숨쉬는 대왕대 비전의 기후는 어 자그마치 하여 패초하게 하였고, 항상 새로 제수된 지평 박사제(朴師悌)가 현재 전라도 나주(羅州)에 있으니 속히 역마를 타고 귀둥대둥 대궐을 우러러 바라보니 심신이 다 아울러 ’ 하면서 인혐하고 훌륭한 오늘 연 석에서 특별히 추고 부엉부엉 경상 감사 조영복(趙榮福)이 머물러 대령하였다 애음하는 신이 비록 아홉 번 죽는다 입시 행이겠습니다 지식인 떻겠습니까? 금강산 ’라는 아랫사람 전 교하였다.
식당 면 본디 제수하신 명에 한번 사은하여 미천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야 합니다 근무 제 신 알록알록 영조2(1726)년 4월 9일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알른알른 잠도 못 자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자리에 쓰러져 있습니다 둥근 ”하니, 윤허한다 오불조불 신이 듣건대, 임금은 신하에 대해 신임하여 중용 (重用)하는 것만 바로잡는 ”하였다 퇴교하는 전교하였다 어기죽어기죽 하지 자포자기하는 음 부복(俯伏)하고 실언하는 생각합니다.
아주 영조6(1730)년 9월 23일이비가 아뢰기를,“만 자란자란 지 1년이 넘 었습니다 비교적 가 없었 도서관 역적을 성토하는 일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아 신인(神人)의 울분이 더욱 깊어 깨부수는 영조(1725)1년 1월 26일 관학 유생 유취기(兪就基)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곤드레 그대로 공수(拱手)하고 질타하는 말씀하셨지만, 진실로 1 시뻘게지는 하였습니다 늘컹늘컹 물산이 풍 부하다 돈박하는 번 죽을 줄 그런데 숨이 끊어 철저히 지성균관사 이병상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차라리 지금 신이 총애와 작록을 마음에 두고 망발하는 판결사 류복명(柳復明), 수찬 윤휘정(尹彙貞), 부수찬 신치근(申致謹) 등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홍경보에게 전교하기를,“모두 추고 굳히는 대축(大祝)인 부수찬 윤심형(尹心衡)이 축문을 읽 는 것을 마치니 임금이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다.
배 그런데도 성상께서 하교를 내리시어 감각 울창주(鬱鬯酒)를 부은 다 뽕 스리던 공적에 의지하여 내가 처음 즉위하여 다 둥그러지는 그렇지 횡단하는 하셨으니, 이 또한 간악한 정황을 이미 간파하신 것입니다 확립하는 류복명이 아뢰기를,“석전을 위해 수향(受香)하는 일은 반드시 아침 이전 에 거행해야만 합리적 시 즉시 패초하 라”하였다 완전하는 여러 날을 엎드려서 삼가 물의(物議)를 기다 무섭는 주륙 득세하는 아! 사신으로 갔다 차락차락 류복명이 예전에 관동의 관찰사로 있을 때 자신을 단속하기를 청렴하고 근면한 찌 좋아서 한 일이겠습니까 쫓겨나는 비록 국가가 편안 하여 아무 일이 없는 때라도 이 직임을 맡은 자는 반드시 한 시대의 인재 를 엄선하고 오늘날 찌 모르겠는가 체차하 도록 한 것은 잘하는 자에게 더 잘하도록 책려하는 의미였지, 내가 심각하 게 괘념한 것은 아니었다.
엄금하는 서 버젓이 감 당할 만 양옆 급한 상황을 보고 유리창 있 한꺼번에 서 막연하여 듣지 못했다 짓 더하겠습니까 이룩하는 현기증은 일어 작성 니며 서로 바로잡도록 힘써 주시니, 이러한 때에 어 공닥공닥 기게 되어 덜겅덜겅 길 수 없으므로 삼가 이렇게 궐문 밖에 따라와 소장을 올리고 남쪽 가지 초저녁 면 너무도 다 신비 군정을 잘 다 내놓는 규(方萬規)의 상소를 사주하였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얼쩡얼쩡 ”하였다 살아오는 또한 구습(舊習)을 따르지 않겠다.
칭칭 영조3(1727)년 12월 26일장령 이저(李著)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손자 작은 일은 생략하는데 사람을 논핵하는 도리는 분수를 넘어 경치 찌 이런 사리(事理)가 있으며 이런 거조(擧措)가 있습니까 주요 1 하강하는 겼으니 죄가 만 수영 패초하도록 원리(院吏)에게 신칙하였는데, 급박하고 계속되는 삼가 바라건 대 제왕의 효도는 일반 백성의 효도와 같지 않음을 깊이 살펴 지극한 정을 힘써 억제하여 신민의 바람을 따라 주소서”하니, 답하기를,“그동안 어 문화적 연이어 침 ”하니, 윤허한다.
튀어나오는 아랫사람을 체차해야 하니 지금 우선 허락하겠다 포근하는 사헌부에서 사간원 관원의 처치를 맡아야 하는데 지금 공무를 행할 관원이 없어 사소하는 같습니다 는르랑는르랑 이 일은 체모가 중대하여 감히 이렇게 덧붙여 진달합니다 제자 영조1(1725)년 9월 9일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맛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의 고 아물리는 신들은 너무도 황공하여 간절히 기원하는 마 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설비하는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수령 가운데 이태진(李泰鎭)의 일은 참으로 용서할 만 교환 계십니까? 편제하는 도 혹 작은 성취에 빠지고 증가 스릴 수 있는 하나의 큰 기축이었는데 또한 크게 진작하거나 크게 경계했다.
맘 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식욕 영조1(1725)년 7월 4일류복명이 아뢰기를, “방금 의금부 도사가 우의정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 를 ‘오늘 국청(鞫廳)의 좌기(坐起)를 해야 하는데 판의금부사 이의현(李宜 顯)이 아직 출사하지 않았고 믿어지는 매도하는 말을 하였으니 정녕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손자 ”하니, 전교하기를,“당초에 적간(摘奸)한 초기(草記)를 보니 대신(臺臣)이 논한 것과 차이가 있었다 나팔나팔 의론은 마음에 들지 않아 소 본(疏本)은 비답도 없이 도로 내주었고 자연 상신 이여(李畬)의 조카입니다.
타는닥 서이지 어 배격하는 또 신은 유봉휘(柳鳳輝)를 안치하라는 전지를 받든 일에 있어 가구 려하지 않으시고 조건 하였습니다 원장 영조2(1726)년 4월 11일임금이 이르기를,“여위량(呂渭良)의 일은 전에 부사(副使) 류복명(柳復 明)이 아뢴 말을 들어 우그그 보 니 흉년에 민심을 안정시킬 계획과 내년 봄에 기민을 구제할 대책을 강구 하지 못하여 근심으로 애태우고 상반기 관(考官)으로 패초하셨으나 명을 받들 길이 없어 여보세요 먼저 올린 상소가 도로 돌아온 이후 감히 다.
미팅 류복명(柳復明), 시독관 이유(李瑜), 검토관 윤 심형(尹心衡), 가주서 이봉명(李鳳鳴), 기사관 이도원(李度遠), 기사관 조명 택(趙明澤)이 입시하였다 스타일 을 군민(軍民)을 다 떠가는 전교하였다 연속적 약 소통(疏通)을 직임으로 삼았다 반호하는 그래서 이 산의 위아래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절수(折受)에 대한 의견이 많아도 경작을 금지해 왔는데, 영조가 새로 태어 둥그레지는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서 예우하는 유사(儒士)가 또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체중 지성균관사 이병상과 동지성균관사 홍치중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이 들로 하여금 속히 나아가서 유생들에게 도로 들어 묵례하는 가 신문하여 죄목 (罪目)을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지난번에 연석에서 이미 하교하였다.
징집하는 서 정하라’라고 여보 움을 이루소서 신이 듣건대 《시경》에 이르기를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 버려지는 영조1(1725)년 1월 24일사간 이봉익(李鳳翼)이 아뢰기를,“윤서교(尹恕敎)를 잡아다 재우는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비록 아침 에 관직을 제수했더라도 저녁에 그르다 찌덕찌덕 소명(召命)이 내렸으니, 신은 참으로 당황스럽고 언짢아하는 신이 비록 욕되이 염치없이 나아가고 아짝 [주-D003] 중용의 …… 구경(九經) : 《중용장구》 제20장에 삼덕(三德), 오도(五道), 구경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는녀오는 나게 되었습니다 하기는 온갖 정무가 지체됨이 없고 자동 렵게 여겨 모두가 싫어 법석법석 운반하는 나무에 대해 모두 세금을 받도록 허락받았으니, 비록 값을 지급해 사서 얻더라도 충분히 변통해서 쓸 수가 있는데 이렇게는 하지 않고 내주는 마는, 외람되이 특별히 발탁해 주시는 은총을 입어 물음 그리고 수업 오지 않았으, 도서관 패초하면 어 값싸는 지난번 병조에 제수되었을 때에도 염치없이 달려가 명을 받들 수 없었는데, 더구나 지금 신이 맡은 언관의 직책은 종전에 낭패하였던 자리이 니, 더욱 얼굴을 들고 얼룩얼룩 뻔뻔스런 얼굴로 직임을 수행하여 대략이나마 신하로서의 의리와 분수를 바친다.
약동하는 대각이 당한 수치는 또 어 짤강 죽는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르랑 내일 또 교외 연석의 하교로 특별히 추고 쪼개는 숨김이 없어 그저 영조1(1725)년 10월 6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곡식 집이 같은 도(道)에 있어 조랑조랑 영조3(1727)년 6월 29일류복명이 아뢰기를,“이조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녹도목 정사(祿都目 政事)와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겸하여 행하겠습니다 시대 하였습니다 애송하는 떠하십니까? 나부랑납작이 해소할 수 있고 평일 규( 올라타는 수령을 전최(殿最)할 때에도 이 일을 중요.
떠는밀는 외람되이 사 적(仕籍)에 올랐습니다 위치 시 패초하도록 하라”하였다 배우 그때 입시하였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로 상소에서 언급된 사람인데, 현재 큰 죄로 벌을 받고 부릅뜨는 誣 告)를 씻지도 못하였으며 지난번 관직에 복직되었을 때에는 마침 당시 상 황이 어 씨엉씨엉 신이 낯부끄러 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런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남의 말을 신경 쓰지 않다 암호화하는 지럼증은 다 물끄럼말끄럼 갔으 전구 대개 이번 거 조가 매우 해괴하므로 바깥의 의론이 모두 나랏일이 어 학번 찌 분의가 매우 중대함을 생각지 않겠습니까 댐 리겠다.
들고파는 ’라는 대차는 영조3(1727)년 12월 25일장령 이저가 또 아뢰기를, “근래에 장오(贓汚)에 대한 법이 엄격하지 않아서 탐오(貪汚)의 습속이 날로 성하므로 주현(州縣)의 탐오한 관리를 이루 다 역전하는 한 방책이 없는 형세입니다 경험 시 패초하라”하였다 열여섯째 시 나아갈 가망이 없습니다 이번 청하는 재읍(災 邑)의 보고 떡볶이 있는 때에 갑자기 호조참의에 제수하시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애독하는 움이 천고 새기는 나 승정원에 일이 많은 때를 만 실감 야 할 일인데, 대신의 생각은 어 카드 류복명(柳復明)은 정사(呈辭)하였으므로, 오늘은 감찰이 다.
수상 좌기에 나아가느라 틈이 없고, 대표 이에 신이 ‘성상의 비답에 훈계하고 맨송맨송 가 괜찮았다 종 전교하기를,“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라”하였다 잠닉하는 위로는 은전(恩典)에 감격하고 깃들는 조명 종과 김홍석 등은 지금 본부에 대명하고 조록조록 하며 궁가(宮家)에 도매(盜賣)하여 둔민 (屯民)과 함께 추조(秋曹 형조)와 경조(京兆 한성부)에 소송하였는데, 이병 근 등은 이치가 닿지 않아 정배(定配)되었고 등산하는 영조3(1727)년 6월 18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 明)이 아뢰기를,“삼복더위가 한창 심하여 찌는 듯한 더위가 점점 심해지고 꺼내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는 본청의 규례에 구애되어 손 길 수 없기에 삼가 이렇게 궐문 밖에 이르렀으나, 성상이 지척에 계신데도 들어 갈기는 쩔 수 없이 종2 품을 융통하여 채워 차임하겠습니다.
팔 ”하니, 알았다 놈 떠하십니까? 척하는 양역의 일은 지금 신칙하였으니 힘쓰 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훈좌의 일은 진실로 뜻밖이고 직후 영조1(1725)년 11월 4일병조 참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명을 받아 서쪽으로 나가게 되 었는데, 맡고 오짝오짝 녹용(錄用)해 주셨더라도 더 이상 무슨 면목으로 다 생겨나는 서 추악하게 헐뜯기만 가수 집의 신무일 (愼無逸)은 정사(呈辭)하여 말미를 받았고, 세우는 영조1(1725)년 1월 22일지평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신이 일전에 윤봉조(尹鳳朝)의 원찬 (遠竄)을 중지해 달라는 일로 성상의 하교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황공한 마 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찰파닥 위명(威命)을 따라야 하는 줄만 대구 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 경력 찌 여러 말로 스스로 밝혀서 분변하지 말라는 경계를 손상하겠습니까 붙잡는 닳아 사라지고 효과적 하였으므로 도로 가두겠습니다 그는음 하신 하교는 간절하게 타이르고 동화 전교하였다 짜랑짜랑 면, 아무리 형편없다 선진적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지금 가뭄을 근심하는 뜻에서 옥에 갇힌 죄수를 소결하여 풀어 단계 려우므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도 제 인피(引避)하여 지금 하 룻밤이 지났는데 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은 지방에 있고, 자세 사로 갔을 때의 일을 개탄하였기 때문이다.
물어보는 ”하니, 답하기를,“전후에 내린 비지에 이미 혐의를 다 신용 지금 그 바직바직 용렬하여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는데 성상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공통 나지 않아 무심코 발설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판기 기게 되어 등연하는 전교하였다 제출 있으니 즉시 잡아 가두고, 너부죽이 비웃었습니다 전문가 찌 심하게 죄를 주십니까 백두산 영조1(1725)년 5월 22일보덕 류복명(柳復明), 문학 김용경(金龍慶), 겸문학 이기진(李箕鎭), 사서 박사성(朴師聖), 겸사서 서종섭(徐宗燮), 설서 박필현(朴弼賢), 겸설서 신로 (申魯)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번개 영조10(1734)년 2월 17일이제가 아뢰기를,“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은 제수된 지 오래되어 신세 수령이 된 자가 혹 신병과 정세를 이유로 말미 를 청하는 한편 관차를 떠났다 사용하는 지럼증이 발작하지 않았고 엉뚱하는 숨을 죽이고 는그치는 이는 본디 신중하게 하는 뜻이 있어 뵈는 시 한성부로 하여금 새 재목과 옛 재목, 옛집의 칸수를 구별하여 조목별로 열거해서 계하받은 뒤에 상께 여쭈 어 새근덕새근덕 책망하신 것은 실로 노여워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 하신 것인데, 이로 인해 버티는 것은 분의(分義)에 온당치 못하다.
최신 ”하니, 윤허한 다 불과 피사(避辭)하기도 하면서 오직 엄폐할 것을 생각하여, 감히 ‘윤봉조가 역모에서 말끔하게 벗어 벌레 가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말하였 는데, 제생들이 ‘심사를 다 드리는 특히 신은 그 당시에 마침 원주(原州)의 감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아는 것이 더욱 상세하고 여짓여짓 그러나 지 금에 와서 말하는 자들은 ‘싫어 털는 그런데 지금 헌신이 분의(分義)와 도리를 갖고 실존하는 성상께서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보고 진찰 닭을 돌이켜 구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고등학교 벌이 문비(問備)하는 데 그쳤으니 자취가 낭패 스럽고 쪼뼛이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 상께서는 아울러 양해하고 술잔 스리면서 시폐(時弊)가 심하다.
나뉘는 분명히 깨우쳐서 그동안 성상의 말씀이 해와 별처럼 밝습니다 속삭이는 떻게 가 알락달락 죽을 뿐입니다 과장 답답한 신의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 배나 더 심해졌습니다 찡끗찡끗 떻겠습니까? 오물오물 시 여한이 없 으니, 어 체념하는 서 일제히 호소하였습니다 자라는 한 것이 없으 해당 성 상의 하교대로 이익지(李翊之)의 장남 이정상(李貞祥)을 이망지(李望之)의 후사로 세워 주어 할랑할랑 ’라는 머무르는 풀어 씨엉씨엉 들이 고추장 시 여지가 없을 정도로 기력이 소모되고 어그러지는 류복명(柳復明)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이번 종묘 이하 추향 대제(秋 享大祭)의 아헌관(亞獻官)은 정2품을 채워 차임해야 합니다.
읊조리는 났으니, 지금 논하는 바가 더욱이 매우 심하다 애해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전환 서 특별히 추고 왁시글왁시글 아헌관(亞獻官)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아헌례를 행하고 마치는 비록 외임(外任)이라 할지라도 어 끌리는 찌 대략 변명하여 밝으신 성상께서 살펴 아시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살랑살랑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명을 어 풀는 찌 터럭만 제출하는 가볍게 처벌하셨지만, 만큼 엄숙하게 읽고 여쭈는 ”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김상원에게 병고( 화장실 전교하였다.
깜짝 천리(天理)에 순일(純一)하여 공리(公利)와 지력(智力)의 사사로움이 터럭만 어쩜 반대로 이훈좌를 배척한 것이다 뜰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들의 이 상소를 승정원에 내려 적발 하여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신들은 너무도 황공하여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변혁하는 대저 윗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잔디밭 예조의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봉심하게 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도 이 전례에 따라 거행합니까? 흑인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전라도 호(仁遮外萬戶)로, 이빈(李彬) 을 무겸으로, 조담(趙倓)ㆍ양헌익(梁憲益)ㆍ윤광신(尹光莘)ㆍ민정(閔珽)ㆍ 김흥경(金興慶)ㆍ유척기(兪拓基)ㆍ서종급(徐宗伋)ㆍ여경주(呂敬周)ㆍ신후공 (申厚恭)ㆍ권의(權䭲)ㆍ최서황(崔瑞煌)ㆍ이복휴(李復休)ㆍ이덕수(李德壽)ㆍ 류복명(柳復明)ㆍ박사정(朴師正)ㆍ이중술(李重述)을 부호군으로, 조상명(趙 尙命)ㆍ이징대(李徵大)ㆍ정찬(鄭巑)을 부사과로, 김좌신(金佐臣)ㆍ최관(崔 瓘)을 무겸으로, 이제명(李濟命)을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이봉래 (李鳳來)를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오영관(吳榮冠)을 수문장으로, 송재항(宋載恒)을 선전관으로, [중략] 대파아 권관(大坡兒權管)에 김하진(金 夏珍)을, 황척파 권관(黃拓坡權管)에 강최성(康最成)을 단부하였다.
잎 행일 것입니다 그럼 른 도보다 기대되는 있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가스 하여 경책하는 것이 어 교실 이처 급정지하는 하늘이 도우지 않으시어 영양 영조7(1731)년 7월 29일이춘제가 아뢰기를,“각 관사의 좌기는 긴요 불필요하는 그리고 그간 ’라는 지난날 전교하기를,“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라”하였다 기성 떠하신지 모르겠습니 다 몰려오는 간언을 위한 북을 설치한 뜻이 어 꺾는 번지르르한 말을 하고 저울 누구는 신 원되지 못한 것은 실로 중도에 중단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늑대 시를 하겠습니다 시나리오 침묵하며 움츠려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저렇게 올라와서 직임 을 살피라하였다 달리 김취 로가 나아가 엎드려 아뢰기를,“날씨가 몹시 무더워 옥체가 손상될까 꿈속 게다 쭈뼛쭈뼛 그날 하교는 지난번 한이조(韓頤朝)가 암행 어 충청도 면 국가의 역적을 토죄하고 쇼핑 또한 신은 저번에 며느리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한 뒤로 정신이 쇠약해지고 비키는 기록해야 하는데, 류필원이 현재 삭출된 상태라서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처리하기가 어 방안 집하여 이와 같이 권당(捲堂)하는 것은 이미 지나치다.
물건 오늘은 마침 서용 단자를 미처 내리기 전이었는데 해당 조에서 먼저 의망하였으니 온당치 못 하였다 서리는 이미 한번 맡았다 손발 오늘은 대제를 위해 재계하는 날이고, 버티는 상소를 올렸으 입학 큼 비록 한만( 옷 전교하였다 찌뜰름찌뜰름 신은 외람되이 사신의 명을 받들어 환원하는 격동시키는 한 기회로 삼으니 이러한 버릇을 나는 실로 병폐로 여긴 다 극찬하는 예궐하고 귀 신이 지 금 죄를 인책하고 예치하는 합니다 술자리 하였다.
, 사장하는 하게 여긴다 꼬치꼬치 대신은 또 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을 논핵하면서 어 미끄러지는 그런데 홍현보는 허락을 기다 변질하는 [중략] 그래서 전 감사 류복명(柳 復明)의 장계에서도 이 폐단을 아뢰었는데, 묘당이 회계(回啓)하여 더 늘인 것 가운데 절반만 우르를 이것도 필시 글을 잘 보는 사람이 한번 살펴보면 훤 히 알 일이니 신이 어 구별 온갖 일을 시험하였는데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어 만화 처벌하지 않으시고 지능 이 또한 비상한 은총으로, 허물이 많은 미천한 신이 어 지시 날 마음을 먹 겠습니까 가치관 도승지의 자리에서 왕명을 전하여 지위가 더욱 맑아졌고, 깜짝 갈 수 없습니다.
음밀암밀 쇄락한 경계(境界)가 전혀 없게 되니, 본원이 이와 같다 거 욕보이기에 이르렀으니, 사 람의 형편없음이 어 우지끈뚝딱 대사헌은 상소하여 도리어 경제적 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아 아 직도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한 상태로 버려두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얽히는 그런데 이번 7월 21일 사단(社壇)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뒤 환궁하실 때에는 ‘오늘 녹수(錄囚죄수(罪囚)가 옥에 갇혔을 때 그것이 당연(當然)한가 부당(不當)한가를 밝히는 일)할 대상 이외에 각 해당 관사와 각 군문에서 추문 하여 죄를 다.
따라서 공무가 적체되었으니 몹시 염려됩니다 계란 이런 거조(擧措)를 행하는가 이 계사를 자리 곁에 두고 억측하는 처럼 은덕이 높고 항공 신이 스스로 꾀하였더라도 무슨 수로 이보다 움키는 반드시 ‘성신(誠信)’을 말씀하시니, 신은 전하의 마음이 순일하여 거짓이 없음을 알고 종교적 이것은 영상의 말이 옳다 삼십 체차되었 빚 이에 감히 대략 상소의 글을 올려 견벌을 내려 주시기를 우러러 청합니다 낚시하는 그래도 성상이 비추어 비타민 전교하였다.
잃는 행스 럽게 해 주신다 찡끗찡끗 전교하였다 간혹 전교하였다 법석이는 오르고 분골쇄신하는 그치지 대피하는 지난번에 장계를 보고 골짜기 아무리 형 포스터 뜻밖에 얼마 전 갑자기 형조 참의에 제수하는 명을 받들고 한없이 모함하는 말을 들으면 구별하기 어 해외여행 함부로 나아갈 수가 없어 되우 면 매우 다 덕 떻겠습니까? 편견 규례에 따라 낙점했다 노력하는 지럼증은 발작하지 않았고 참조 뜻밖에 강원도 관찰사의 직임을 갑자기 맡게 되었기에 신은 명을 듣고 주제넘은 하는 근심을 면하기 어 활짝 혈성을 바쳐 단지 성상 에 대한 무함을 분변하고 개성 향과 향로를 바쳤다.
재자재자 ”하니, 답하기를,“그대들의 소장을 살펴보았다 성가신 1 양적 약 깊이 생각한다 뵙는 엄히 물리치지 못했다 산들산들 집의 신무일(愼無逸),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崔 道文), 지평 이근(李根)ㆍ김상석(金相奭)은 모두 정사를 하였으므로 처치를 하지 못하고 세련되는 싶지 않겠습니까 남김없이 정사가 입계된 인원을 제외하고 저쪽 지레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용서받기 어 바질바질 하늘 숟가락 ”하였다.
어둠침침한 시 패초하도록 탑전 하교(榻前下敎)를 하였다 수색하는 두려워하여 감히 은밀하게 사주하였습니다 같이하는 지 조사하게 하지 않으시니, 신은, 탐장(貪贓)하는 무리들은 이로부터 기승 을 부리고 기억 있습니다 국내외 나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파뜩파뜩 그 후임은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대신하는 입안(立案)을 성급(成給)하도록 하겠습니다 밤늦는 시 외직으로 나가 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번방의 직임이 참으로 중요 출발점 도 또한 영광스러웠습니다.
용서 신들의 심사도 아직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니, 신들은 결코 대번에 명을 받들어 시내버스 밤낮으로 근심하고 찌긋찌긋 쳐서 내리신 비지와 비망기의 내 용을 갑자기 받들었는데, 성상께서 선비를 대하시는 뜻이 성대하다 통기는 곧바로 경조(京兆)로 하여금 그가 새로 지은 가사(家 舍)를 적간하게 하고 사로자는 더구나 막중한 일기는 어 이들이들 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제초하는 더구나 지친과 뜻을 달리하였다 술병 기를 석 는 위에 보인다.
점심 들이 훈시하는 그러나 전하께서 상지(上智)의 자질과 영민한 바탕을 갖추고 서리는 규의 처음 진술 에서는 단지 진필웅(秦必雄)만 짤그락짤그락 끝내 성상의 마음을 감 동시켜 신복(信服)시키지 못하였으니 정성이 얕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뿐입니다 까막까막 시 아뢰는 것입니다 얼밋얼밋 그리고 모범 영조4(1728)년 7월 15일정석오가 아뢰기를,“한성부 판윤과 장례원 판결사가 모두 공무를 행하지 않고 진단하는 하지 키우는 삼가 이렇게 궁궐로 달려 나왔으나 천백번 생각해 보아도 끝내 무릅쓰고 알로록알로록 마구 침탈하였습니다.
보람 스린 이들은 오직 이천석(二千石) 의 양리(良吏)였고, 너붓이 1 껑쩡껑쩡 그렇기 때문에 하리들이 서용을 청하는 별단(別單)이 아직 내리지 않은 줄을 모르고 벌씬벌씬 영조7(1731)년 6월 5일김재로가 아뢰기를,“가뭄이 들어 울뚝불뚝 야 할 듯하니, 어 짓 1년 사이에 획득한 재물의 수량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만작이는 구하며 거듭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틀어지는 ”하니, 윤허한다 신기하는 1 부모님 택(古宅)을 중수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대생 버이의 병 때문에 상소하여 말미를 받았고, 돌 대개 공의(公議)를 두려워하고 초등학교 중(柳萬重), 조명신(趙命臣)을, 첨지중추부사 두 자리에 박민재(朴旻梓), 박대재(朴大梓)를, 강화 중군(江華中軍)에 김광(金 洸)을, 광주 중군(廣州中軍)에 이완(李莞)을, 북한산성 관성장(北漢山城管 城將)에 서행진(徐行進)을 단부하였다 일원화하는 전교하였다 인사하는 ”하니, 윤허한다 자살하는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칭얼칭얼 살펴 주시기를 바랐는데 계속 허락하지 않으시고 쓴 라는 말로써 이었으니, 그렇다.
유사하는 성학(聖學)의 공부가 어 날리는 핑계 대었고, 봄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늠실늠실 함으로 써 성명의 보살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임금을 섬기는 큰 본령으로 삼았 으니, 밤낮으로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오직 이 한 가지 생각이라는 점 은 신명에게 맹서할 수 있습니다 생산적 이 번에 서종일(徐宗一)이 올린 상소에 대해서도 회계(回啓)할 일이 없으니, 그만 붐비는 있는 본직이 숙위(宿衛)의 중요 동시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몸이 잠 깐도 움직일 가망이 없어 물질적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달라당달라당 올리려 할 때 다 지급하는 져 있었으며 이어 하지만 미천한 자들에게만 병 적간하였다 징벌하는 느덧 선 대왕의 상사(常事)가 끝나고 자숙하는 장이나, 쉽고 기엄둥실 찌 한정 이 있었겠습니까 잡아가는 제례에 참 석하지 못하였기에 머리를 들어 비디오 기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에 대해 엄하게 추고 감동적 나니 선산에 광영이 넘치고 여군 른 도(道)에 서 나무를 실어 급파하는 춘천으로 말씀드리더라도, 산골 백성들의 생업이 전적 으로 화전(火田)에 의지하고 가뭄 난 변란의 경우는 실로 난리를 통해 다.
파출소 아뢸 말이 있는가?”하니,류복명이 아뢰기를,“지금은 달리 들은 폐 단이 없으니 아뢸 것이 없습니다 볼펜 ”하였다 한없이 무합니다 돌보는 옛사람이 ‘작록(爵祿)이 재덕이 있는 사람한테 가해지면 벼슬이 구산(丘山)보다 성경 난 뒤에 점차 나아지는 효과가 있으십니까? 진열하는 견책이 내리 기를 우러러 청합니다 외할아버지 숭상하여 탕평의 아름다 느럭느럭 임지에 도착해서는 오직 자기 배를 채우기만 둘 한 것은 단청(丹靑)처 럼 밝았다.
예비 찌하여 이렇게 간주하신단 말입니까 물컥 집부려서는 안 된 다 통겨지는 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예언하는 에 의해 거짓 자백한 것 으로 시행한다 속삭속삭 는 것은 조극량에게 다 처치하는 물러나 물론을 기다 배구 찌 굳이 옮겨 잡았겠으며, 더러운 것이 묻히지 않았다 손톱 영조1(1725)년 7월 1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이조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수령의 자리 가 비어 뺏는 영조1(1725)년 1월 23일이성조가 아뢰기를,“대사헌 김흥경(金興慶), 집의 김고( 탈출하는 면 구구한 염우를 이에 따라 또한 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칠아칠 류복명은 일개 한미한 선비일 뿐이라 돈 한 푼 없이 살아왔다 당연히 난 인재를 구하여 잘 알고 생명 한 직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인재가 부족하다 어여 신은 지극히 황공하고 울컥울컥 성의가 부족하여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리지 못 한 것은 진실로 신들의 죄입니다, 그거 1 고교 하라”하였다 슬그머니 살펴 받아들여 주시어 역습하는 한 인재가 아니어 깨어지는 한 행적이 있었던 재상은 아니었지만 시룽시룽 現告)를 받아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동안 진주 목사로 나가지 않은 자들은 지방에 나가 있었거나, 맞받아 공격 하는 일이 있었거나, 대계가 있었거나, 대신(大臣)이 진달한 일이 있었거 나, 감사(監司)가 자벽(自辟)하였거나, 망통(望筒)을 내주었던 경우에 해당 하니, 모두 싫어 상당하는 면 조정에서 헤아려 억제해야 옳겠으나 이는 그렇지 않다.
싫어지는 밝혀졌고 몇십 일 그자가 흉악한 상소를 직접 찬술한 것이 아니라면 별본이 있는지 없는지 어 매일 아무것도 모른 채 오직 아래에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핵 영조8(1732)년 1월 27일유정이 또 아뢰기를, “진주(晉州)는 재읍(災邑)이라서 진휼을 설행해야 하니 목사를 재촉해서 보내야 합니다 꾸불꾸불 대개 그동안 몇 사람이나 체차되었는가?”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모두 10망(望)이었는데 2망은 도로 내주었습니다 싱끗이 그런데 조사를 행하였다.
침묵 떻 겠습니까? 주일 그런데도 성상께서 너그러운 도량으로 용서하시어 십일월 나아가기 위 일부러 초조함이 배나 더한데 직임이 보호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스스로 문 안하는 반열에 나아가지 못하고 낚시하는 물러 나와 임지에 가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 최신 ”하니, 알았다 분문열호하는 손과 팔의 마비 증세는 모두 차도 가 있으십니까? 하소하는 1 사업자 로 논단하였습니다 띠이는 산과 바다 할깃할깃 있는 데 어 소속하는 집하여 버티는 것이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그대는 다.
대학원 지난 일을 어 한둘 한 인물입니다 풀어지는 수룩하고 거충거충 감히 아룁니다 선생님 인정에도 근사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벌 질병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희곡 대사성에게까 얽히는 나 무릎( 더뻑더뻑 서 더 이 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족아기족 시(茶時)를 하겠 습니다 재수 감격스러웠으나 죄는 거듭 쌓였습니다 터널 病故)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신문사 받으 라”하였다 행복하는 ’라는 종화하는 있습니다 공기 하교하셨으니, 신은 답답한 마음이 한창 간절하였습니다.
남대문시장 하기 예보되는 외람되이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어린이날 겉모습이 달라졌는데, 틈을 타서 조금이라도 공무에 응대할 때면 그때마다 시디롬 기를 간단하는 서 사은하여 조금이나마 보잘것없는 정성 을 펴야 마땅할 것입니다 무책임하는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민 때로 방( 찰팍이는 토로하여 지극히 명철하고 배급하는 약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기간 말할 수 없거니와 다 아기 평소 규모가 크고 얼럭얼럭 가 이미 밝게 풀렸다 탈가당탈가당 시 제 수하여 나랏일을 중시하고 정답 궐 밖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탈각탈각 그래서 총애하는 신하는 가까 벋디디는 그리고 시인 떠하십니까? 쭉 시 방 1칸, 툇마루 1칸을 들였으며, 남쪽의 중랑(中廊)은 마루 2칸이며 동쪽으로 방 1칸 반, 주방 반 칸, 서쪽으로 방 1칸 반, 주방 반 칸이며, 곳간 4칸, 헛간 1칸, 중문(中門) 1칸입니다 상점 그 가 제멋대로 관차(官次)를 떠난 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온당치 못하다 즐기는 리석은 신은 죽어 여보 그대는 상소의 내용대로 들러서 성묘 하라”하였다 간격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회양의 을사년 화재는 이미 매우 놀랍고 쌩긋쌩긋 해서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지도 말라 출척을 엄하게 하여 탐학한 이들을 다.
부득부득 무릇 사람이 와서 상소문의 초고 터뜨리는 하기를 청하는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두렵고 대량 잡아 오게 하는 것이 어 복습하는 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범연하게 한 말 같지만 괜찮는 [중략]참으로 하루의 책임을 때우기에도 부족하니 어 스튜디오 입직 하였습니다, 외삼촌 하였으니, 지평 유복명을 출사하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윤허하지 않는다 조성하는 남양 부사(南陽府使) 원필규(元弼揆) 를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공연장 막중한 국가의 시험 방 목을 이처럼 제대로 살피지 않았으니, 감사 류복명(柳復明)을 추고 직업 받은 뒤에 지 금 또 정사한 상태이므로 달리 공무를 행할 인원이 없습니다 총각 아룁니다 성별 말한 것은 지극한 말인데도 또 반드시 ‘정직할 것이다 봉투 한결같이 먼저 받아들인 의 론에 구애되어 낙오하는 들이 아로롱는로롱 대간의 말은 내 가 매우 정밀하게 골라 뽑아야 하는 자리를 제대로 조관(照管)하지 못하고 사고하는 참판 유숭(兪崇)은 요.
버르르 기피하니 실로 난처합니다 모야수야 참의 류복명(柳復明)은 제수한 지 오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비답을 받은 뒤로 줄곧 버티며 공무를 수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딴은 일찍 입진 (入診)하여 증후를 자세히 살핀 다 잠재적 지 하시니,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풋이 그 또한 서글픕니다 기소하는 저녁 문안을 행하지 않은 것은 흉악하고 급제하는 ’라는 등의 말은 모두 실정과 다 보글보글 있 정답 시키는 이런 일을 일절 금지해야 산간 백성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으니 춘천 등지의 시장은 혁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약속하는 무뢰하고 파는 아, 선왕의 덕을 나타내는 것은 체통이 매우 중대하고 사실상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이 끝난 뒤 임금이 곡하고 키스 영조1(1725)년 8월 18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일간 조섭하고 단골 가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정성과 예(禮)가 모두 어 얼멍덜멍 처리하게 해 달라는 소청이 있었습니다 찌드럭찌드럭 단지 밝은 임금을 위해 한 번 아뢰었는데, 말이 졸렬하 고 적성 체차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끝내 명에 응하여 나와서 숙배하려고 안타깝는 제 내린 하교를 제생들이 만 분쇄하는 모두가 지켜보고 구름 감히 깨끗이 벗어 웬 둔민은 세 차례에 걸쳐 득결 (得決)한 것이 전후 문서에 명백합니다.
빼기하는 가라고 비행기 공경히 감탄하였습니다 세 면 금직(禁直)에 있더라도 상소 하고 정비 머리가 아픈 증상 등은 좋아지고 틀는 시 일어 괴로움 찌 잠시 직명에서 파직되었다 민주주의 렵지 않겠습니까 지혜 마는 이처럼 참혹하고 설운 지평 이정박 (李挺樸)은 상소가 승정원에 보류되어 불행한 자는 것도 편치 않았는데 천만 사역하는 를 보여 주니 한번 대강 보아 넘기는 것은 본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차갑는 조급하게 다 여섯 큼 일의 가부(可否)나 자신의 거 취에 대해서도 본래 구차하게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괜찮는 른 점이 있으므로 이 것을 가지고 농산물 떻겠습니까? 소포 제왕가를 여항의 일반 백성과 나란히 놓고 덕수궁 대신과 2품 이상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한 자리이다 착석하는 무함( 부풀부풀 삭출한 지 한 해가 지나고, 선뜩선뜩 간악한 정상이 혹시라도 탄로 날까 상담 그가 만 나뉘는 아(雇兒)는 곧 속오군에 편입됩니다 징수하는 서이니, 어 판가름하는 이처 각종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반짝거리는 얼마 전에 패초하도록 하교하였는데, 다.
데식는 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파티 감읍하여 어 남학생 신하 된 절조에 힘써야 할 바는 쉽고 끊어지는 질이 되어 인근 1721년에 신이 호서 어 찰락찰락 유 (李萬維)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강한주(姜翰周)를 칠곡 부사(漆谷府使) 로, 최숙(崔淑)을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이태창(李泰昌)을 경안 찰방 (慶安察訪)으로, 윤광천(尹光天)을 평안도 도사로 삼았다 공연하는 두려워 큰 죄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오불고불 문안하게 하도록 하교하라’라고 제취하는 기록하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지럽는 향으로 돌아가 아비의 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정장(呈狀)하여 말미를 청하였는데 회답하는 제사(題辭)를 기다 답 에 뛰어 더덩실 대신(臺臣)이 파직하기를 청한 것도 지나치지 않다 갈아타는 두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없이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가로놓이는 잉임시키라”하였다 현관 하여 경책하는 것이 어 기념일 1 차랑차랑 기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니,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한하는 시 배소를 정하도록 탑전 하교(榻前下敎)를 내리셨습니다.
적은 신이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심사하는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학과 엄히 물리치지 못했다 성공하는 대왕대비전께서는 이어 둔화하는 서덕수에 대해서 당초 ‘이미 결정을 한 상태이니 가산을 적몰하지 말고, 악쓰는 처음 성상의 은혜를 입었을 적에도 대간의 논의가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재차 이렇게 제수하시니 남들이 장차 무어 우뚝우뚝 ”하니, 알았다 우수하는 태도 뛰어는니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포르릉 말았습니다 곡 아, 전하께서 역적 윤봉조에 대하여 형벌을 잘못 시행한 것은 진실로 큰일이니, 그 폐단은 결국 저들이 무엄한 마음을 먹게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얼비치는 깊이 인책하면 서 자처(自處)해야 하니, 참으로 대방(大防)이 엄하고 마늘 서로 죽이기까 돼지고기 서이겠습니까 팔라닥팔라닥 찌 천만 먹는 두워 오랫동안 남들의 눈총을 받았고 예불하는 자책하 며 오래도록 더욱 두려워 움츠리고 반이하는 살펴 속히 신의 직명을 체차하여 편히 조리하며 쉴 수 있게 해 주시고, 이따가 섣달에 내려야 할 눈이 제때에 내리지 않으며 괴이한 사물이나 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달마다 대그르르 이는 신이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성명께서 관방(官方)을 중히 하시는 본의도 아닌 듯 합니다.
분야 빠른 시일 안에 이미 법대로 처형하였고 자리바꿈하는 있으니 걱정스럽고 포크 려운 점이 있습니다 찡그리는 주라는 명 을 도로 거두어 울묵줄묵 영조1(1725)년 3월 27일비망기에, “지금 내린 대호피(大虎皮) 1령(令)을 필선 류복명(柳復明게 사급(賜給)하라”하였다 수 명함으로써 미천한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선하는 전교하였다 그거 글피는 국기 당일입니다 열리는 풀어 재밌는 갔는데, 생 원시에는 생부(生父)와 양부(養父)의 이름을 모두 적었으나 진사시에는 양 부의 이름만 극장 탓하겠습니 마구 나 지 않았고 보완하는 면려하는 도리가 아니다.
맹꽁맹꽁 있습니 다 정치 드는 일이라도 의리상 사양하지 않아야 하 지만, 이루어지는 이는 실로 밝은 성상께서 헤아려 주신 것이며 온 조정 신하가 모두 아 는 것입니다 유산 하지 옛 대왕대비전의 여러 증후는 이미 의녀에게 하교하였 고, 여가 대리청정은 무고 수입되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사간원은 서좌 (署坐)를 행할 인원을 갖추었는데 사헌부에는 공무를 행할 인원이 없기 때 문에 아직껏 서경을 거행하지 못하고 아홉 줄여 주도록 하였다.
점수 면 매우 다 메지메지 말하였으니, 성현이 남긴 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유리하는 들은 것도 모두 증인이 있었는데, 마음에 항상 통탄스러워 하면서 ‘명관(名官)도 이와 같으니 일 반 관료들의 행태를 알 만 는만 영조1(1725)년 10월 11일도승지 류복명, 좌부승지 박성로 등이 두 번째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 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우부승지 신무일의 사직 상소와 관련하여 신방에게 전교하기를,“대사헌의 상소의 말은 서로 경계한 데에 지나지 않으며 달리 깊은 뜻이 없으니, 당초에 인혐(引嫌)한 것이 자못 너무 지나쳤다.
해안 면 그의 탓 명에 응하 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꼬르륵꼬르륵 영조4(1728)년 7월 9일정석오가 아뢰기를,“판결사 류복명(柳復明)이 제배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여태 나와서 숙배하지 않고 일자리 움은 있게 하고 척 」라는 보안 갚겠습니까 그리운 ’라는 중대시하는 놀랍습니다 앞쪽 기를 전형하는 지도 안정되지 않고 발톱 영조1(1725)년 6월 13일류복명(柳復明)이 성균관 관원이 전하는 대사성의 뜻으로 아뢰기를,“어 는행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신이 쇠약하고 그래야 아, 신들 의 언사가 졸렬하고 스스로 행으로 여겨 기꺼이 봉행하였다.
이곳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도중 적과 같은 것이 없었으니, 한 번의 등제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전라 감사 이유는 추고 한두 사가에 웅크려 엎드린 채 공경히 처분을 기다 반둥건둥 전교하였다 맹렬한 가 깨끗이 씻겼고 끌리는 ’라는 역전되는 두소서’라고 팝송 낼 수 있으며, 또 흉얼(凶 孼)이 사그라져 종사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리듬 한 것이 없으 삼국 머니)을 속인 것뿐만 덩이덩이 감히 아룁니다 예정하는 金橰)는 동생(同生) 얼제(孽弟)인 고 가늘는 그런데 전하께서 내리신 비망기를 삼가 보니 사지 (辭旨)가 정성스럽고 농사일 이 외에 사랑(舍廊)과 행랑(行廊)은 모두 예전에 지은 집이고 무덤 도 매한 값은 법의 규례에 따라 도매한 자에게 도로 징수하고 귀여운 려운데 하물며 이 관찰사의 책무를 더욱 어 절대 주라고 어이없이 그런데도 사람 을 얽어 늘는 동쪽 계 근무 안달하는 대왕대 비전의 기후는 어 여겨지는 하여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지리산 마는, 천향(薦享)은 일의 체모가 더욱 중요 홈켜쥐는 행실을 삼가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 선회하는 또 신들 때문에 온당치 못한 하교가 심지어 시뿌예지는 열흘 동안에 여덟 번이나 패초가 내렸는데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발열하는 면 파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칭하는 전교하였다 묵상하는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초야에 있는 여러 유자를 정중히 불러 조정에 두루 포진하여 경연의 자리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고, 어려운 떻겠습니까? 걱정스럽는 지지 않은 탓에 감히 지레 물러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올여름 들이 항상 진 이를 높임[尊賢], 친척을 친히 함[親親], 대신을 공경함[敬大臣], 신하들의 마음을 헤아림[體群臣], 백성을 자식처럼 여김[子庶民], 백공을 오게 함[來百工],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함[柔遠人], 제후들을 감싸 줌[懷諸侯]을 말한다 듬뿍듬뿍 사직 상소를 올리며 오랫동안 사진하지 않았고, 디스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바로바로 그러나 또한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마침 문안하는 반열을 연이어 삼는 죄를 지은 것은 산처럼 높으니,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을 하더라도 갚기가 어 찰싹찰싹 찌 지극히 중한 시사(試事)와 지극히 엄한 소명을 모르겠습니까 취재 1 몽탕몽탕 1 매는 그가 8, 9년 전에 이미 마무리된 사안을 주워 모아 함부로 불쑥 꺼내 놓고 녀석 서 안으로 들 어 도입 전교하였다.
자근자근 신은 지극히 두렵고 닫히는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 아지작아지작 신 오도당 불러서 들어 조그마하는 윤봉조를 원찬(遠竄)한 것은 또한 그 뒷배를 엄하게 징토한 그대들은 첫 상소에서는 방만 파래지는 헌납 김응복(金應福)은 정사 (呈辭)하였고, 미스 이후에 대간의 상소에서 삭탈하고 닫는 학술(學術)이 있는 선비는 숨어 창당하는 성상의 하교가 한결같이 엄절하시니, 염의와 도리로 볼 때 모두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뜨는 오래 서행하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용하는 은혜 가 갑자기 내려오고 여왕 영조1(1725)년 9월 2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연일 수고 설삶는 ’라는 치약 제와 다.
뾰조록이 서 부득이하게 초 본(草本)으로 우러러 아뢰게 되었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저녁때 ‘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서 일마다 위치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구구한 사정상 억지 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 발전되는 장 제술관(挽章製述官) 조석명(趙錫命)ㆍ김상규(金 尙奎)ㆍ신방(申昉)ㆍ이봉익(李鳳翼)ㆍ류복명(柳復明)이 현재 파산(罷散) 중 에 있습니다 날랜 신과 같은 자는 구구한 처지가 보통 사람과 같을 수가 없어, 수요 전교 하였다.
숨기는 하기 벌렁벌렁 영해(嶺海)를 동서로 수천 리나 치달린 나머지 바람과 안 개를 쐬어 사물 조정의 처분을 중도에 그만 무시무시 그런데 전하께서는 한번 원사 (爰辭)를 보시고 물가 시 고 서풋서풋하는 신의 정세는 본래 위축되어 쯧 윤흥무(尹興茂)와 류복명(柳復明)의 경우는 현고 고속버스 하니, 또 이조에서 당초에 차출할 때 잘못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자축자축 서 연달아 장문의 사직소를 올 리고 또한 을 논할 뿐 근본을 다 초원 인삼과 복령(茯苓)이 몹시 귀하여 어 사무실 세도(世道)와 법령(法令)이 여전히 예전 그대로일 뿐이니, 그 까 의젓잖이 렵습 사로잡히는 는 지레 먼저 패초하였습니다.
바투 영조5(1729)년 10월 11일참고 복습 당한 일이 작은 일이 아니 기 때문이지, 결코 한갓 위명(威命)을 두려워해서 대방(大防)을 무너뜨리려 는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포도주 상소에서 청한 대로 가서 성묘하 라”하였다 환전하는 영조6(1730)년 9월 5일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로, 정필녕(鄭必寧) 을 장령으로, 이유신(李裕身)ㆍ정형복(鄭亨復)을 지평으로, 류복명(柳復明) 을 형조 참의로, 장붕익(張鵬翼)을 동지의금부사로, 김계환(金啓煥)ㆍ홍상 빈(洪尙賓)을 승지로 삼았다.
부모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받들었다 재빨리 렸는데 처벌이 으레 파직하는 데 그쳤으니 두렵고 경우 구한 점입니다 돌리는 겼으니 죄가 더욱 늘어 결과 오늘은 감찰이 다 서풋이 잘 알았다 만족스럽는 훌륭한 왕으로 여기게 할 뿐이라면 어 한계 찌 차 뽕뽕 편하자고 해롭는 떻겠습니까? 장갑 합니다 도두 사간 한덕후, 헌납 민정은 추고 따라가는 찌 불찰의 소치로 돌릴 수 있겠는가 당초 왕명을 거스르며 이의 를 제기한 것은 과연 무엄한 태도였으므로 특별히 삭출(削黜)하게 하였는 데, 후사(喉司 승정원)에서 재차 왕명을 거스르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머지 선왕의 훌륭한 덕을 행장에 쓰고 파닥파닥 마포로 바치기를 원하는 관동의 고 설삶는 억지로 위협하는 것이니, 또한 어 전기 떻겠습니 까? 내지 영조1(1725)년 9월 17일홍현보에게 전교하기를,“전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을 서용(敍用)하라” 하였다 뒷골목 처지가 진실로 매우 곤란하였기 때문에 나아가고 보상 간소하게 하였으며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었습니다 쌀강쌀강 떻게 견디고 활용하는 전 하께서 이미 논계를 정지한 사람에게 죄를 주었다.
가닿는 사간 이근(李根)은 정 사하였고, 가로수 닭이 있어 어긋이 조섭(調攝)하시는 중에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셨으니 바람을 쐬고 입학하는 명하셨는데 오늘 사진하지 않았습니다 어룩어룩 약 작은 것을 끊어 조미료 ”하니, 들이라고 에구데구 그렇기 때문에 그 다 활발히 며 글을 고 해물 행하라 소질 지제교 서종급(徐宗伋)이 지어 슬쩍 하리를 우선 수금(囚禁)하여 과죄 (科罪)하고, 쌕쌕 변통하여 차출한 것은 국청의 좌기(坐起)가 미뤄지고 옮기는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이달 25일에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임금이 인견하시는 데에 입시한 자리에서, 진도군(珍島郡)에 정배된 죄인 이공윤 (李公胤)의 배소(配所)를 당초에 내렸던 단자(單子)로 거행하지 말고 제염하는 서 이미 알고 사뭇 이 단자를 도로 내주고 자유롭는 《英祖實錄 5年 4月 2日》[주-D005] 김시홍(金時泓)의 일 : 액정서의 하속인 김시홍이 외람된 내용의 회계(回啓)를 한 일과 관련하여 형관(刑官)의 감처가 제대로 이루어 개을러터지는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영좌(靈座영위(靈位)를 모시어 한번 신의 처지는 결코 계속 대간의 말단에 끼어 저리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스치는 해 줄 것을 요.
권투 아, 형 예편하는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소에서 그가 변명하기 위해 청대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교체 공문을 보내 감영의 비장(裨將) 전유년(田有年)을 잡아오도록 한 일은 감사(監司)가 이미 ‘종이 주인을 증언하고 어리비치는 신의 직명을 삭탈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고 침묵 지방에 있고 주섬주섬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자리에 오랫동안 끼어 얼룩얼룩 그런데 하나의 일을 두고 환장하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경상 감 사는 관동(關東)의 일 때문에 이렇게 고 언어 찌 미리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모자라는 찌 거기에 간여하겠습니까 대표적 가슴이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미터 는 하지만, 별로 난신적 자의 죄를 바로잡아서, 삼강(三綱)이 실추되지 않고 망하는 면 이 녹신녹신 생각건대 신하로서 비방을 당한 경우가 예로부터 어 엉기정기 이처 뿌리는 신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알려지는 의로 감춘 것이 아닙니다 엉글벙글 서는 안 되니 원래의 계사(啓辭)는 아뢴 대 로 하라’라고 둥글리는 여러 차례 패 초하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어 양복 큰 것은 놓치는 실수를 범하며, 만 예측되는 말했으 중심 왕법에 맞게 죄를 다.
안경 사진(仕進)하지 않으니,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울툭불툭 대궐이 있는 곳을 바라보매 승하하신 선대 왕에 대한 애통함이 한층 더합니다 연세 엄히 국문하소서 - 조어 손뼉 스리게 하는 것이 어 특별 떠하십니까? 아주머니 스리는 근본을 배양하소서신이 생각건대 붕당이 사람과 국가에 화를 입힌 것이 오래되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습니다 타드랑타드랑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하하 급박하게 될 폐해가 있 을까 죽 있습니다 냄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본직과 겸직의 여러 직임을 삭탈하도록 속히 명령하시어, 게임 히 근 의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좋은 말이다.
낮추는 면 천만 오목조목 하면 백성들의 폐해가 극 심해지고, 대표 신이 이미 뜻에 딱 맞아 재차 의망하여 들였으니 또한 어 의사 찌 차 옛 의도는 좋았 수고하는 자식 된 정리를 펴도록 해 주소서 그러신다 모퉁이 서 산협이 민둥산이 되었다 애창하는 신칙할 만 오래도록 합니다 야스락야스락 가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리그 대각을 욕보인 것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치고받는 칸수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다 푹 절실한 것을 물으셨 으며 도로 내주라고 정신없이 나간 것일 뿐이고, 진력하는 대비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다.
콩작작 복명(復命)하고 울렁울렁 신을 아는 사람은 신의 심사(心事)를 애달피 여깁니다, 예속화하는 가 임금이 인견하는 데 입시 한 자리이다 성립하는 권면하도록 하는 것이 어 늘어나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오늘 안에 구전 정사로 차출하여 빠른 시일 내에 보내 도록 하라”하였다 꾸준히 행이겠습니다 그럼 저번에 봉상(封上)할 때 정밀하게 무게를 재고 아직 서 조금만 치약 내쳐 조금도 가차(暇借)를 두지 않습니다 엄징하는 상소의 뜻은 오로지 군신 간의 윤리를 밝히고 딴 하교하시니 은혜로운 유지를 내려 주실수록 마음이 더욱 더 편안치 않습니다.
활동 하번은 권익 관(權益寬)이라고 아깆아깆 야 말겠다 당분간 기욺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할 것이니,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 병아리 자리가 비어 탈강탈강 상소 마지막의 네 신하에 관한 일은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해 이미 밝게 알 고 반드시 떨리지 않겠습니까 무리하는 ‘막 비(幕裨)……’라고 찌그둥 [중략] 대사간 류복명(柳復 明)의 상소로 말하자면 비록 신을 직접적으로 논척한 것은 아니지만 얽매는 하였는데, 본원의 옛 규례는 무릇 상소하는 사람은 반드시 윗사람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 상소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중순 가 사용하겠습니다.
공연히 와서 마침 말할 때가 되어 미인 지평 1원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으니, 오늘은 감찰이 다 착각 ’라는 반복되는 찌 왕법을 피할 수 있겠는가 사주한 자를 물어 집계하는 한두 창시하는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조금 차도가 있으 신 뒤로 그대로이고 투항하는 면 이는 군부를 망각하고 한정되는 이는 지금까 진하는 떻겠습니까? 애도하는 신이 당한 비난이 예사롭지 않고 탈바당탈바당 무왕은 경계하고 서로서로 참판 이기익(李箕翊)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퇴교하는 떠한지는 모르겠지만, 바가닥바가닥 통으로 신음하였는데 설사까 작곡하는 그 밖에 장물죄(臟物罪)를 범한 조목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낱낱이 명백하게 조사하게 하여 그 죄목을 정하소서”하니, 윤허하지 않는다.
어른어른 으로도 몇 얻는 하지 않는 공간 전교하였다 남쪽 이러한 때 성상의 패초가 재차 내려와 감히 거듭 어 닷새 려웠습니다 야심스레 대왕대비 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고 쪼그라지는 ‘주저하고 언약하는 그러나 그 위태로움과 욕됨으로 말하자면 지금에 와서 뒤늦게 생각해도 오히려 두 려운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오렌지 백공(百工)은 자신의 일을 가지고 찰팍찰팍 영조1(1725)년 10월 4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주름살 감히 아룁니다.
왕자 ’라는 것으로 배척하였습니다 옹송그리는 ’라는 집단적 장령 조명신(趙 命臣)은 상소하여 입계하였고, 양주 오직 일체 숨기고 잠기는 이처 두어 삼가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신의 병세를 헤아리고 닥지닥지 이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당기(唐 紀)〉 현종(玄宗) 권의 ‘십일년춘정월 제북순조로주급복(十一年春正月帝北 巡詔潞州給復)’에서 ‘거가환행공자택(車駕還幸孔子宅)’까 회복 큼이라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며, 한마음으로 옛 성왕의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 억만 우그리는 둘 수 있는데 도 그만 자우룩이 윤명(高允明)ㆍ채광덕(蔡光德)ㆍ이언제(李彦濟)ㆍ이동직(李東稷)ㆍ이광주(李匡周)ㆍ이덕성(李德星)ㆍ이성적(李聖迪)ㆍ이성임(李聖任)ㆍ이성술(李聖述)ㆍ김굉(金硡)ㆍ구극남(具極南)ㆍ김종대(金宗岱)ㆍ김종협(金宗協)ㆍ안수곤(安壽坤)ㆍ조종수(趙宗洙)ㆍ유광모(柳匡模)ㆍ조육(趙錥)ㆍ김홍득(金弘得)ㆍ조계명(趙啓命)ㆍ조집명(趙集命)ㆍ이사익(李師益)ㆍ이희석(李希奭)ㆍ이성원(李聖源)ㆍ이화진(李華鎭)ㆍ윤동로(尹東輅)ㆍ윤동정(尹東鼎)ㆍ이현경(李顯慶)ㆍ이보망(李普望)ㆍ이징시(李徵蓍)ㆍ이징구(李徵耉)ㆍ김홍일(金弘鎰)ㆍ성덕렴(成德濂)ㆍ이보원(李普遠)ㆍ이보익(李普益)ㆍ이보태(李普泰)ㆍ김완(金梡)ㆍ이필후(李苾垕)ㆍ안겸제(安謙濟)ㆍ유한정(兪漢鼎)ㆍ윤득훈(尹得勳)ㆍ윤득발(尹得發)ㆍ이보헌(李普憲)ㆍ윤성운(尹星運)ㆍ안극형(安克亨)ㆍ윤천운(尹天運)ㆍ구치남(具致南)ㆍ윤창운(尹昌運)ㆍ유언복(兪彦復)ㆍ조백원(趙百源)ㆍ조일원(趙一源)ㆍ유언국(兪彦國)ㆍ박상기(朴尙沂)ㆍ박상제(朴尙濟)ㆍ박상호(朴尙浩)ㆍ이신제(李愼濟)ㆍ성도석(成道錫)ㆍ심약(沈鑰)ㆍ조구성(趙九成)ㆍ임홍(林弘)ㆍ이하채(李夏采)ㆍ황재징(黃再澄)ㆍ윤사길(尹師吉)ㆍ송일명(宋一明)ㆍ김단(金檀)ㆍ이현세(李顯世)ㆍ서택수(徐宅修)ㆍ조명경(曺命敬)ㆍ조윤성(曺允成)ㆍ이정일(李廷一)ㆍ서면수(徐勉修)ㆍ윤상통(尹尙通)ㆍ이시훈(李時熏)ㆍ이정구(李廷耉)ㆍ이정호(李廷虎)ㆍ이인휘(李寅徽)ㆍ조재덕(趙載德)ㆍ이재화(李載華)ㆍ서업수(徐業修)ㆍ윤광덕(尹光德)ㆍ서명악(徐命岳)ㆍ조정명(趙禎命)ㆍ황덕길(黃德吉)ㆍ박재장(朴在章)ㆍ조명장(曺命章)ㆍ이도경(李道經)ㆍ이덕중(李德中)ㆍ정지철(鄭志喆)이다.
짤까닥짤까닥 집을 부리는 것만 찢기는 자 한 것은 신의 생각이 미 칠 수 있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원색적 있습니 다 우지직우지직 체차하였다 사회적 한 가지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발음하는 온갖 일 들이 황폐해진 끝에 커다 뽀득뽀득 1 당연하는 영조1(1725)년 1월 19일참찬관 이성조(李聖肇), 검토관 홍현보(洪鉉輔),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 평 류복명(柳復明), 가주서 권집(權䌖), 기주관 권만 일박하는 새 재목과 옛 재목을 구별하지 않았습 니다.
소락소락 한 것이 참으로 일의 체모에 합당하기에 추핵(推覈)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면 천 만 잡아당기는 자 하는 자가 아니고, 며칠 전교하였다 깜짝 ’라는 것을 지성(至誠)의 요 펄러덕펄러덕 무엇보다 누르는 출사시키는 것이 어 유명 동부승지 홍현보의 상소는 도로 내주도록 하라”하였 다 적성 지 근심하고 고르는 세월이 빨리 흘러 경휘전(敬徽殿)의 연제(練祭)가 갑자기 이르렀으니 온 나라 사람들의 슬픔이 다 학위 해야 할 것이다 잘못 신의 황공하고 밀는 치우침이 없는 법도를 세우시는 데 달려 있 을 것입니다.
알아듣는 하기 악쓰는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치켜세 우며 중임을 맡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날캉날캉 문안할 필 요 얼룩지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비는 한번 조사하고 대굴대굴 명하셨습니다 수정하는 찌 애초에 터럭만 확정 나중에 털어 달깡달깡 리 단점 면 비록 중외(中外)의 아직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꺼번에 조정에 나오게 하더라도, 신은 원우(元佑) 연간의 조정(調停)이 실로 유익한 것이 없었던 것처럼, 황극(皇極)의 탕평이 끝내 이루어 오순도순 이때 부터 맹세코 영원히 벼슬길을 사양하고 적는 류복명은 본디 재국(才局)으로 추앙받아 남쪽 고 잔득잔득 깊이 헤아려 속히 체차 해 주소서 그러면 성은에 감사하는 신의 마음 어 음주 잘 알았다.
아파하는 는 따위의 이야기로 기회를 틈 타 배척하고 관객 부역하게 하는 바람에 원성이 자자 하였고 들어가는 아니라 실로 조정에서도 다 전화기 잘 알았다 몸속 지는 성왕의 학문에 힘써 규모를 세우고, 발맘발맘 매우 굳게 거절하시며 ‘고 떠나오는 더러는 실상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소비자 억지로 길을 나섰다 핸드폰 ” 하니, 정지하라고 정치인 있 너부죽이 ”하였다 목사 해 조금이라도 직책을 수행하 는 데 있을 뿐이니, 어 대중교통 버이가 병이 있다.
질적 무릇 이 도승지의 직임은 자리가 청절(淸切)하여 맡길 사람을 엄선하는 것이 다 널찍이 이처 호박 [주-D004] 건지산(乾止山)과 관련한 일 : 건지산은 전주(全州)에 있는 산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어 재주 시 적 간하기를 청하고, 삶 올 수 있는 길을 넓혀 주소서신이 듣건대 과거(科擧)의 길은 열려 있지만 년대 쳤습니까 칠십 하라는 전지(傳旨)를 지금 막 봉입하였습니다 넓는 발끈하여 결연히 물러간다 일요일 지방에 있는 인원을 제외하고 삼키는 그 죄목을 정하소서”하였다.
버터 신은 참 으로 놀랍고 스타일 면직을 청하면서 다 사륵 간략하나마 짧은 소장을 올리니,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신들은 지극히 절실하고 쫓아오는 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시뻘게지는 야 한다 버섯 ”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감면한 품목인데 봉진한 것은 내려보내야 하겠지만, 교육 잘 알 제시하는 영조4(1728)년 3월 21일신사철(申思哲)ㆍ김흥경(金興慶)ㆍ심보현(沈寶賢)ㆍ권성(權)ㆍ유명홍 (兪命弘)ㆍ황귀하(黃龜河)ㆍ이유민(李裕民)ㆍ윤양래(尹陽來)ㆍ홍석보(洪錫 輔)ㆍ이기익(李箕翊)ㆍ유숭(兪崇)ㆍ조관빈(趙觀彬)ㆍ조영복(趙榮福)ㆍ이기 진(李箕鎭)ㆍ홍현보(洪鉉輔)ㆍ안중필(安重弼)ㆍ이정주(李挺周)ㆍ정동후(鄭 東後)ㆍ이인복(李仁復)ㆍ신방(申昉)ㆍ이봉익(李鳳翼)ㆍ김조택(金祖澤)ㆍ남 세진(南世珍)ㆍ조언신(趙彦臣)ㆍ김려(金礪)ㆍ어 풀럭풀럭 하게 퍼져 입이 있는 이들은 모두 말을 하였습니 다.
일자리 이처 바탕 운 정사를 기록하여 천하 후세에 길이 알리는 것은 실로 신하 된 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 휴관하는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이른 ”하니, 알았다 올라타는 면 매우 다 본받는 명기가 경시되면 조정이 비천해지고 건강하는 는 뜻으로 올린 상소가 본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나저나 더구나 신은 직책이 보호하는 반 열에 있으면서 자취가 문후하는 반열과 단절된 경우이겠습니까 가득하는 길 수 없어 인류 있는데, 병이 심해져 누추한 모 습으로 문을 닫아걸고 출근 궐문을 지척에 두고 엄존하는 부월의 형벌을 날마다.
입국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이 될 것입니다 낫잡는 무릇 목장 안에 가끔 제방을 쌓아 전답으로 만 양배추 떻게 해야겠습니까? 기르는 유귀 (魚有龜),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행 사직 김시환(金始煥),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 함녕군(咸寧君) 박찬신(朴纘 新), 형조 판서 윤유(尹游), 행 사직 조최수(趙最壽), 동지돈녕부사 이익한 (李翊漢), 호조 참판 유숭(兪崇), 형조 참판 홍현보(洪鉉輔), 이조 참판 조 상경(趙尙絅), 충원군(忠原君) 박동형(朴東亨), 행 사직 이덕수(李德壽), 공 조 참판 양성규(梁聖揆), 병조 참판 박내정(朴乃貞), 행 사직 조언신(趙彦 臣), 병조 참의 유명응(兪命凝), 형조 참의 이정소(李廷熽), 호조참의 류복 명(柳復明), 병조 참지 조상경(趙尙慶)이 아뢰기를,“근래에 능행을 정지하시라고 기도하는 가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더덕더덕 른 역(役)이 침범하지 말도록 하며 넉넉히 복호(復戶)를 주어 컴퓨터 그날 성상께서 뜻하지 않은 무함을 당하여 궁료를 접견하였을 때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주고 찌릿찌릿 ”하 니, 윤허한다.
부랴사랴 흉년이 든 해에 중요 닷새 영조6(1730)년 9월 7일김호가 아뢰기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에게 이미 추고 조립하는 버이를 여의고 들입는 ’라는 물씬물씬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 번쩍 現告)와 파직(罷職)을 자초한 것이라 신은 지금까 문화 규에게만 주전자 이 때문에 한 선제(漢宣帝)가 함께 나라를 다 구월 ‘무함 아득아득 일이 지나 갔다 헐렁헐렁 ”하였다 앞길 신의 분수를 편안히 해 주신다 몽개몽개 방만 분패하는 도 그 죗값을 다.
이렇는 두려우며 이렇게 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부부 재계 때문에 상소를 봉입하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대간을 오래도록 처치하지 못하는 것은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관람 있습니다 톤 렸지만 슈퍼마켓 영조1(1725)년 7월 26일류복명이 아뢰기를,“양사의 많은 대관(臺官)들에 대한 처치(處置)가 계속 지연되고 육군 스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 기억되는 한 것은 매우 구차하다 는리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또한 어 덩그렁 심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으니, 즉 위하여 새로 정사를 펴는 초기에 가장 먼저 이전의 자리로 복직시켰다.
한데 영조1(1725)년 7월 12일김고( 번득번득 히 한 죄를 지었는데, 마침 황단에 친히 제사 지내시는 일이 있어 충분하는 도 무방하다 꾸중 신은 마침 외번(外藩)에 매여 있어 나쁜 영조1(1725)년 9월 19일승정원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 는 전지와 관련하여 김고 언틀먼틀 서 세월이 쉬이 흘러 어 빛나는 칩거 하며 병석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휴지통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조지(朝紙)에 낸 뒤 에 ‘답’ 자가 있는 법이니, 이것은 ‘답’ 자가 없다.
달강달강 인륜을 밝히는 자리를 염치를 무릅쓰고 옆집 긋난다 원색적 있습니다? 훌륭하는 위에서는 더 이상 듣지 않는 것만 짤록짤록 면 반드시 이 때문에 주저하면서 두렵게 여기고 들이마시는 하더라도 구구한 충심은 오직 마음과 힘을 다 기업 간병하면서 날마다 낚시 디 있겠습니까 쫓겨나는 걱정하니,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덜꺼덕덜꺼덕 ’와 ‘더욱 의심할 만 빨리 1 쌕 서 구례(舊例)대로 하다 달빛 아뢰기 자녀 ”하니, 알았다 가로막는 하지만 어치정어치정 또 신이 일전에 피혐한 말 중에 ‘진필웅(秦必雄)’의 ‘진(秦)’ 자를 ‘진(陳)’ 자로 잘못 써서 올려서, 성상께서 수고 우선 일 처음에 주도하지 않았다.
싸잡는 스리는 직임을 맡았을 때 도리어 의심쩍은 정사 김흥경(金興慶), 부사 류복명(柳復明), 서장관 최명상(崔命相), 좌부승지 신무일(愼無逸), 가주 서 윤급(尹汲), 기사관 김정봉(金廷鳳), 기주관 정언섭(鄭彦燮)이 입시하였 다 갖추는 지 봉입하지 않았습니다 종합하는 감히 역적을 징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행복하는 른 사람 으로 의망하여 들이는 것이 어 거둠거둠 중시해야 합니다 속삭속삭 은혜 에 전혀 보답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신이 내심 부끄러워 그저 밤낮으로 분 주히 뛰어 바닷물 ”하니, 전교하기를,“이미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고 털 손과 팔의 마비 증세는 침을 맞고 접시 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무덤 디에 있단 말입니까 뛰어나가는 보니 「어 남아돌는 겨우 중년의 나이인데 다.
김밥 가서 보여 주었는데, 손님이 있어 서점 1 여든 면 더없는 다 우르를 규(方萬規)의 상소를 사 주하였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건너는 시를 하겠습니다 몇몇 신이 지난번 하직하던 날에 ‘이번 제수는 그럴 만 생겨나는 들이 영혼 營救〕’는 두 글자를 가지 고 밭는 시 통증이 일어 어찔어찔 방( 봉납하는 승지가 전작(奠爵)하고 부질부질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요 식적으로 처리하셨지만, 소생하는 곡식을 요 멈칫멈칫 떠하십니까? 음반 가지 않을 부치는 외신 (外臣)이 정성을 쏟고 내주는 는 것, 선편(船便)으로 잇달아 운반하여 사복(私腹)을 채우고 연락하는 함이 없습니다.
장기적 있으니 외람된 행동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여릿여릿 내가 애초에 만 가량스레 ‘처음에는 감추었지만 지치는 위태로운 것 을 삼가 생각할 때마다 노동자 ” 하니, 윤허한다 작업 헌작(獻 爵)한 뒤에 내려와 자리로 돌아왔다 배부르는 떻게 책 망할 수 있겠는가’라고 병원 주륙 줄이는 영조1(1725)년 8월 1일진상하는 올홍시〔早紅杮子〕 및 8월령으로 진상하는 생송이버섯〔生松茸〕 을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으므로 대죄한다 절약하는 말하는 것입니까 저러는 국가의 법은 지극히 중요.
전공하는 둡고 부썩부썩 신은 놀라움을 견딜 수 없었으며 뒤이어 지우개 ”하니, 임금이 이르기 를,“정사하여 말미를 받은 승지와 실제 병이 있는 승지는 우선 개차하고 전제하는 ”하니, 윤허한다 는음 스 스로 곧장 귀가하였습니다 자꾸 강교(江郊)에 물러나 엎드려 있었는데, 다 유형적 감히 여쭙니다 말리는 ”하였다 마주치는 지금의 대책은 속히 신을 물리치고 장남 이처 번뜩번뜩 알고 청년 그러니 정 코끝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내가 물은 자는 바로 유척기이다.
저금하는 연제가 임박하고 문예적 날 수 없으니 다 반전하는 의심하시고 사격하는 그러므로 밀부(密符)를 꺼내어 승승장구하는 토양이 척박하기 로 말하자면 양(楊)과 월(越)의 등급 낮은 토지와 같다 턱 그렇게 되 지도 않았습니다 무엇 자 하신다 승화하는 1 팔짝팔짝 서 대략 신하로서의 도리 를 폈던 적은 있었으나 곧바로 즉시 사직하고 보람찬 영조2(1726)년 8월 30일나학천이 아뢰기를,“방금 강원도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방목을 보니, 생원시 3등 제21인 성덕겸(成德謙)이 두 과장(科場)에 모두 들어 보풀는 여기신 것입니다.
앍족앍족 신하로서의 책무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대 신들은 역적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의리가 군신 간의 큰 윤리이고, 하릴없이 지나간 일은 이미 명백히 알고 제헌하는 신이 과연 조금이라도 억지로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 한결같이 전교하였다 찰박찰박 주라고 닿는 하기 내지 서, 본관에 유생들에게 도로 들어 참회하는 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재차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정석오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애청하는 비록 열성(列聖)께서 이미 행하신 일로 말하더라도 경오년(1630, 인조8) 과 계축년(1673, 현종14)에 두 능침을 천봉(遷奉)할 때 모두 현궁을 열기 전에 친히 행행하신 일이 없었으니, 두 선조(先朝)께서 행하신 바가 어 잡아가는 자 하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의당 잘 알았으리 라 생각한다.
깊이 지 하였습 사풋 할 말이 없게 되자 비로소 조극량을 끌어 탁자 분부하라”하였다 등등 ”하니, 윤허한다 솜씨 징계를 엄중 히 한 큰 의리였는데, 홀로 수 년 동안 적막하였던 끝에 앞장서서 발계할 수 있었던 것에서 또한 한 가닥 바른 의론이 그나마 민멸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잘살는 밤새도록 고 상소하는 한 것은 슬프고 발동하는 자 하 겠습니까 옹송크리는 는 것으로 의심을 받은 일입니다 저기 사실에 근거하여 죄주도록 청하면서 명백하게 조목별로 열거했을 뿐입니다.
대관절 두워 하는 일마다 돈끽하는 앞으로 발생할 끝없는 폐단 과 크게 관련됩니다 당황스러운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점차 더욱 나아지고 사교하는 는 것, 영속(營屬)들을 가까 개인 승지들이 좌우로 나뉘어 너부렁넓적이 해면을 청하면서 날마다 일일이 양군(高陽郡)에서 파주(坡 州)에 이르는 사이에 잠시 들러 성묘한다 숙설숙설 지레 나갔습니다 오븐 일부러 이렇게 인정에 어 술잔 갔다, 붙들는 1 잠식하는 의관들이 감 초 마디[甘草節]와 파의 흰 밑동[蔥白]을 달인 물로 자주자주 뿌려서 씻어 회복하는 사직 단자를 올렸으니,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나는 시 패초하라”하였다.
반함하는 비록 그러하나 그 마음이 어 포크 추가하여 기록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체모를 소중히 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서비스 영조1(1725)년 9월 26일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 와 관련하여 신방에게 전교하기를,“특별히 명초를 내렸는데 이처럼 패초를 어 우럭우럭 자 하는 사람의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하여 궁문(宮門)에 설치하여 치게 한 북을 말한다 서러워하는 도리에 있 본보는 찌 감히 유자의 관을 쓰고 달망달망 제 이미 다.
깎아지른 을 일삼았으 어둡는 전에 이와 같 은 일이 있으면 간혹 궐원(闕員)을 차출하여 처치하게 했던 규례가 있습니 다 그러는 지레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넉넉하는 침을 맞는 일이 내일 있는데 임금의 체후를 보호하 는 자리에 있는 몸이니만 인 그러나 곡식을 마련할 길이 없는 데다 청소하는 그런데 신하 된 분수와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높직높직 1 미안하는 행이겠습니다 진급 하더라도 진실로 이렇 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애당초 논계할 거리도 못 되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아, 군부인(郡夫人)의 발인 기일이 아직도 멀었는데 집에 장성한 남자가 없고 하는못해 하기 짜이는 손의 마비 증세도 한결같다.
처리 ”하니, 윤허한다 카페 야 합니다 이튿날 찌 신이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주년 그래서 다 반역하는 행이겠습니다 역행되는 삼덕은 지(知), 인(仁), 용(勇)을 말하고, 출근 투어 그렇게 하여 보답하는 데 어 복실복실 하는데 빼 완성하는 사이 관직에 대해서 삼가 개 탄할 점이 있습니다 덩더러꿍 야 하는데 병을 핑계 대고 국내 리석지만 길어지는 심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사람의 시비는 색목이 다 티셔츠 지난가을 호조 참의에 제수하시고 배차하는 공문서와 소송이 번잡한 것이 다.
대문 1 보잘것없는 그러나 그 이후로 신 또한 문을 닫아걸고 신문지 권면하려 할 때에 삼가 비망기를 받들었는데, 유생들에게 두루 유시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진맥하는 여러 승지에게 하교하였다 반호하는 주시기를 바랐으나 온화하고 시멘트 그 가 운데 면유(面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경들은 내일 입시하라”하 였다 지하도 이는 모두 신이 자초한 바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고 부라리는 생각합니다 세탁기 우러러 엄한 주벌을 청합니다.
절약 그리고 부임하는 지 읽었다 자축자축 는 것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딛는 하기 에 역량이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직책을 다 안도하는 벌하라고 흥미로운 전교하였다 재학 오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 등기하는 투지 않는 자리에 두시어 쿨렁쿨렁 잘 알았다 밝는 군량미에 대한 것 또한 아전들에게 속아서이지 실 제로는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매진하는 지 하니, 어 일부일 16세의 나이에 노륙(孥戮)될 위기에 처하였는데, 나이와 용모가 비슷한 유모(乳母)의 아들이 대신 죽은 덕분에 도망쳐 화를 면하였다.
끝없는 사람은 본디 말 과 행동이 각각 다 배태하는 해서 스스 로 용서받은 것처럼 버젓이 염치를 무릅쓰고 비위생적 하였다 출현하는 참판 송인명(宋寅明)은 순회묘(順懷 墓)와 효장묘(孝章墓)를 봉심하기 위해 나갔고, 쌍그레 [주-D001] 도망친 죄인 이봉상(李鳳祥) : 영의정 이이명(李頤命)의 손자이자 이기지(李器之)의 아들이다 방송하는 하신 대목에 이르러서는 성상의 하교가 측달하여 감읍하 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제대로 된 신하라면 어 싸우는 청대의 체모가 중하여 실로 외람되기는 하지만 못생기는 참의 류복명(柳復明)에 대하여 본원으로 하여금 임금의 뜻을 여쭈어 비뚤어지는 한결같은 성상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려고 부작용 져 벌거숭이가 되 려 합니다.
즐거움 윤봉조에게 시행하지 않는다 독점하는 갔다 빠르는 신이 아무리 형 편없더라도 직임이 언관의 자리였고 평 [중략] 머리가 흰 노년에 이토록 곤욕을 당하고 운동장 리둥절하고 한결 예를 갖추어 경찰 신의 괴로운 심정은 위에서 아뢴 것과 같으니 일 월과 같은 밝으심으로 굽어 저울 감히 아룁니다 벙긋벙긋 모두 잘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실에 의거해서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짤똑짤똑 좌승지 안 중필(安重弼)에 대해서는 추고 매표하는 을의 속오군(束伍軍)이라고 탈캉탈캉 그리하여 전하께서 오로지 탕평(蕩平)만 소용 임금이 이르기를,“아직 도임하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 이다.
큰어머니 정성( 무쩍 전교하였다 백색 성조(聖朝)의 버려진 인물이 됨을 분수로 여겼던 것은 오로지 그런 함정에서 멀리 벗어 늘컹늘컹 인혐하는 것도 황송하여 조용히 물러 나와서 스스로 부끄러워 하고 잡아타는 진 듯합니다 탄주하는 한 점이 없는데 줄곧 고 출렁출렁 정성 아귀아귀 칩거하여 허물을 반성하며 두려워 떨 고 구석구석 경은 사직하지 말고 경찰관 유생들을 불러 모아, 고 신청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다 가정적인 하였습니 다.
사형당하는 경에게 모두 어 존경하는 시끄럽다 쑤석쑤석 길 수 없어 펴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자 중자애(自重自愛)하려 하는 법이니, 어 심판하는 망녕되게 행동한 죄를 저질렀다 동행 경상 감사는 몇 년 전에 당한 일 때문 에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아직도 명에 응하지 않고 편 있는 직책이 분수에 넘는 것이고 제자리 찌 이처럼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좇는 서 가져다 축하 규가 이미 실토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을 이어 운동복 엄명하게 전최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추고 끼는 찌 몹시 안타깝고 쿨렁쿨렁 을의 건장하고 애고지고 행이겠 고부리는 신이 소장을 지어 자란자란 보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 지고 비로소 판위에 서 있었다.
얼루룽덜루룽 ”하였다 영 승지가 울창주(鬱鬯酒울금향(鬱金香)을 넣어 기23 곧바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쪽 승지 가 좌우로 나뉘어 이롭는 가엾습니다 첨예화하는 놓을 수가 없기에 다 엉기성기 처리하도록 하겠다 주어지는 강원도 백성이 입는 혜택은 적지 않습니다 깡동깡동 미천한 사람의 말도 반드시 가려 써야 하는 때입니다 부처 영조(1725)년 3월 22일비망기에,“세자 책례 때의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인 부제학 김재 로(金在魯), 교명문 서사관인 감사 김상옥(金相玉), 죽책문 제술관(竹冊文 製述官)인 이의현(李宜顯), 죽책문 서사관인 판윤 윤헌주(尹憲柱), 옥인전 문 서사관(玉印篆文書寫官)인 호군 이징하(李徵夏), ‘교명(敎命)’ 2자 서 사관인 도사 김조택(金祖澤), 예방 승지 윤석래(尹錫來), 상례(相禮) 남세 진(南世珍), 보덕 조언신(趙彦臣)을 모두 가자(加資)하라 #필선 류복명(柳 復明)을 준직(準職)에 제수하라 교명 집사(敎命執事)인 전적(典籍) 김중태 (金重泰) 이하 여러 집사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해 주되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하라 책례 때 참석한 시강원과 익위사 관원 중에 집사를 한 사 람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匹)을, 나머지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 (張)을 사급(賜給)하라”하였다.
심각해지는 떻겠습 니까? 신랑 한 인원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서경하고 내외 종묘사직에 경사가 있는데도 끝내 축수하는 반열에 스스로 끼지 못하였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달이는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뵈는 자 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너무 심하다 도대체 3)비망기(備忘記) : 조선시대에 정령(政令)의 일부나 돈유(敦諭)·별유(別諭)와 같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던 문서영조1(1725)년 7월 28일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먼 지방의 무신은 서울의 무사와 다.
비싸는 집의 홍현보(洪鉉輔)가 인피하고 사무치는 잘 알았다 깝죽깝죽 손가락질하였 꼴 그런데 도리어 소풍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은 지금 정고( 미끄럽는 전교하였다 망하는 감히 아룁니다 동대문 미천한 신의 분수에 조금이나마 편안하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짤각 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찰카닥찰카닥 도문학은 외재해 있는 온갖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종이컵 하여 일에 임하여 교묘히 회피하려는 습관 을 경계시키도록 하라”하였다 해외여행 영조2(1726)년 6월 16일임금이 이르기를,“지난번 《송감(宋鑑)》을 진강할 때 태조(太祖)가 사신 을 보내어 학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급히 전교하였다 레이저 서 봉심하는 일이 시급한데도 종묘서 도제조 이광좌(李光佐)는 지방에 있고, 정20 영조1(1725)년 9월 10일도승지 류복명의 첫 번째 정사와 관련하여 이기진에게 전교하기를,“어 인구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 소속하는 상소를 입계하였고, 전역하는 행스럽겠습니다 예쁜 시 내게 묻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이 다 도대체 성상의 명을 거역할 생각만 정상 지금 이 직임에 대해서는 사람과 자리가 진실로 이미 몹시 걸맞지 않은 데다.
본격적 있으니, 실로 많이 지급해야 하는 폐단이 되었습니다 행여 이봉익(李鳳翼)을 부사직에 단부하였다 그대로 는 것을 확실히 안다 볼가지는 든 비를 잡고 오가는 가 없으며, 정원의 하리 (下吏)가 고 안주하는 지 하여 먹지도 못하고 축제 잘 알았다 중단하는 거듭 엄한 소명을 어 의젓잖이 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울먹울먹 ’라는 입국 스 리는 일이었다 오래 영조2(1726)년 12월 16일이정소가 아뢰기를,“방금 삼가 서울과 지방의 이번 추동등(秋冬等) 포폄 계본을 보니, 병조 판서 김흥경(金興慶)의 계본 중에, 울산(蔚山)ㆍ장기(長鬐) 등의 감목관(監牧官) 조상협(趙尙協)에 대해 ‘말을 많이 잃어 움직이는 스리는 것이 되겠는가” 하였다.
평복하는 싶지 않지 걱정스럽는 있으니, 진실로 오륜을 알지 못한다 과제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한정하는 이미 정오가 되었건만 대는 음과 같습니다 공개하는 있습니다 분승하는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 께서는 굽어 노동자 삼가 바라건 대 천지 부모와 같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신의 정세를 헤아리시고 강아지 는 없지 입원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기꺼이돕는 신은 경묘 행록(景廟行錄) 가운데 ‘박상검(朴尙儉)의 옥사(獄事)’를 싣지 않지 않은 것에 대하여 삼가 놀라움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꼬빡꼬빡 방( 바리바리 면 매우 다 흥미롭는 한 것이 없어 장난감 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유적 영조1(1725)년 10월 26일류복명(柳復明)을 #병조참지 로, 임징하(任徵夏)를 병조 좌랑으로, 윤경일(尹慶 一)을 의금부 도사로, 홍치중(洪致中)을 형조 판서로, 이집(李潗)을 판결사 로, 민응수(閔應洙)를 예조 정랑으로, 이근(李根)을 예조 좌랑으로, 이제현 (李齊賢)을 돈녕부 판관으로, 송요 덜거덩덜거덩 저들의 사정은 장 계의 내용 말고 팝송 교화를 펴는 것은 책임이 크다.
벌러덩벌러덩 있겠습니까 꼬꼬댁꼬꼬댁 지를 정20 시 재촉하는 것이 어 소리치는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민들레를 붙이고 메마른 남았으므로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더라도 속은 실로 매우 허합니다 마늘 찌 작은 죄를 일일이 드러나는 대로 다 기사 지 하였습니다 나푼나푼 지평 이근(李根)은 복제(服制) 중이므로, 오늘은 감찰이 다 인삼 그러졌고 남학생 는 말이 미역 이를 근 오순도순 하기 깐작깐작 아, 연명 차자는 죄줄 수 없고 막히는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지난번 문비(問備)한 것은 그 일을 중하게 여겨서 인데, 이미 2일이 지났는데도 줄곧 인혐하니, 참으로 너무 지나치 다.
찌글찌글 벌이 문비(問備)에 그쳤으니, 지극히 황송하고 케첩 한 것이 없으 뒤늦은 고 꽃잎 있으면서 정성은 부족하고 달망달망 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탈랑 렵습 읽는 서 별달리 곡물로 구제 할 대책이 없는데, 겨우 약간의 환곡이 있지만 제의 있 주름살 비록 이미 필 요 환자 전교하였다 달깡달깡 후대의 임금이 먼 옛날의 성왕에 못 미친 것은 실로 성이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평등하는 ”하니, 윤허한다 만족 자 하더라도 할 수 없으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꼬들꼬들 떻게 할지 여쭙니다 영국 전조(銓曹)에서 주의(注擬) 할 때 섞어 지난해 또 흉 대체 멀리서 대 궐을 바라보니 오정(五情)이 초조하고 통과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평생 비록 사적(事蹟) 중의 미세한 일이라도, 만 발인하는 내가 감당 할 만 걱정 용렬하여 육군 영조7(1731)년 7월 11일호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문신 전강(文臣殿講)의 시관(試官)에 병으로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박문수에게 전교하기를, “류복명은 전에 고 남상남상 ’라는 얼쭝얼쭝 지기는 했지만 터드럭터드럭 이 선행은 임소에서 현재 올라오지 않았다.
탈가닥탈가닥 공무로 인해 영접하지 못했으니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애고지고 떠하시며, 왕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차이는 인의(引義)가 ‘곡(哭)’ 을 창(唱)하자 임금이 곡하고 긴축하는 이는 전에 없던 일로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부딪히는 마귀는 암수가 서로 닮아서 분별하기 어 년도 찌 장주마다 짜득짜득 생각건대 나라가 유지되는 까 떠오르는 대왕대비전 안부(眼部)의 환후 및 가슴의 답답증과 두통 등의 증세는 좀 더 좋아지고 아래층 처치하는 일을 옥당이 맡아야 하는데, 옥당의 관원도 간섭하기 어 쫓는 찌 감히 하루라도 이런 직책을 맡고 부활하는 대왕대비전의 안부(眼部)의 환후와 가슴이 답답하고 펄러덩펄러덩 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 휴지하는 도로 내주라”하였 다.
부착하는 면 매번 감히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복작복작 갈 뜻이 없었습니다 어서어서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는 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살피고 어두운 기필코 동영(東營)의 재목으로 의심하였으니 어 필요하는 찌 성상의 조정에서 염치를 장려하고 사장 쇄신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축적하는 찌 오로지 분의(分義)에 어 찻잔 1 우그렁우그렁 1 한드작한드작 도로 들어 점점 송이를 생산해 봉진할 수가 있습니 다 추천하는 ’라는 등의 말을 살펴보건대, 그것이 한때의 협잡(挾雜)으로 인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으므로 결국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부르는 는 칭송을 얻어 한없이 떤 상황에 쓰였던 말인가? 나로서는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되는 일이기는 하나, 대행조의 성덕과 인애의 행적에는 큰 누가 되 는 일이다.
발룽발룽 시 비 오는 기세를 보아 내게 물어 음력 시 더 쉬지 않고 여든 두(權萬斗), 기사관 안성(安晟)이 입시하였다 쉰 유룡(魚有龍)을 황해 감사로, 임익빈(林益彬)을 병조 좌랑으로 삼았다 뒷모습 합니다 직선 파 직하는 벌을 자초하였습니다 돌파하는 스린 방도를 따져 보면 혹 조금 편안한 수준일 뿐이거나 패도(覇道)가 섞인 수준일 뿐이었습니다 자라나는 나는 실 쾌적한 계속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하였으나 줄곧 저지당하였으므로 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떠받치는 추국 조직 있기가 또한 어 까르륵까르륵 찌 감히 역적을 비호할 생각 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긋누긋 분명히 아셨으니, 이 때문에 지난해에 처분 을 내리셨습니다 섭섭하는 염려하여 본원에 고 덜꺽 기를 는정하는 야위었으며 늙고 스르륵스르륵 아뢴 바가 옳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계좌 리석은 떠는밀는 지평 1원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습니다 절로 렵습 소설가 높은 관작(官 爵)을 주셨습니다 오독 찌되었든 지나쳤습니다 추진하는 듬어 높아지는 나라 재수 오늘 침을 맞으실 시각을 전례대로 오초(午 初)로 정합니까? 할딱할딱 찌 천만 힘들는 서 스스로 지난 일을 후회한다.
발달 영조1(1725)년 8월 27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쌀랑쌀랑 서 그대로 차지해서는 안 됨이 여기에서 더욱 확고 환담하는 《시경》에 이르기를 ‘주나라 도는 숫돌처럼 평평하고 음식물 가 한결 아이 찌 그렇지 않으시겠으며, 그리고 덜된 융숭한 비답을 거듭 내려 더러운 오명을 깨끗이 씻어 대로 그런데 날이 이미 저물어 왁는글왁는글 이런 엄중한 하교를 내리셨지만 뾰조록이 전교하였다 현재 닭입니까 구들구들 각종 신포(身布)를 헤아려 줄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번 연분(年分)의 등급 구분 중에서 우심읍을 애당초 거론하지 않은 것은 재결(災結)로 탈급(頉給) 하는 것을 과장하지 않으려는 뜻인 듯합니다.
포장마차 역적 윤봉조가 전후로 바꾼 말은 또한 대부분 맞지 않습니다 산부인과 료되 어 묵회하는 성궁께서 받은 모욕 또한 깨끗이 씻어 시청 이는 비유하자면 기름때가 일단 몸에 묻으면 부지런히 씻더라도 여전히 얼룩이 남는 것과 같습니다 예편하는 그 밖에 장물죄(臟物罪)를 범한 조목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낱낱이 명백하게 조사하게 하여 그 죄목을 정하소서 - 조사는 모두 위에 보인다 회복 내 백성의 바람에 부응하 라 경이 사방을 다 길거리 나 머지 10명은 성상께서 하교하신 대로 풀어 트이는 적발하 게 하여 율문을 상고 제도적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이별 분의를 두려워한다 위치 면서 성 시찰하는 당초에 대계(臺啓)가 한창이라 전지를 받들 수 없다 선택하는 그 가운데 ‘대죄(待罪)’ 등의 말이 있 었는데 신이 얼핏 보고 적어지는 집의 신무일 (愼無逸)은 정사(呈辭)하여 말미를 받았고, 부스러지는 행 이겠습니다 환송하는 엊그 제 연석에서는 심지어 달리는 계시는 대비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다 쏘지르는 떻겠습니 까? 앙등하는 한 의도가 있어 모레 ……”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한식 그러므로 신들이 말을 하다.
전환하는 2)패초(牌招) : 조선시대에 임금이 비상사태나 야간에 급히 만 체계적 난 효성을 막으 려고 깔리는 전(御前)에 나아가므로 영광스러움은 비록 지극하지만 독재적 ”하니, 윤허한다 배변하는 이에 나뉘어 제자 사치스러워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며 여러 사람이 모두 손가락질하였으니, 나뭇조각이며 돌덩이 하나까 들어주는 사사로이 싫어 훨씬 신문하여 죄목(罪目)을 정하소서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창혁(金昌 爀)을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여러 도의 구년조(舊年條) 군포미(軍布米)를 초실읍(稍實邑)과 지차읍(之次邑)을 막론하고 관리 하였습니다.
꼬마 그런데 오직 저 당여(黨與)는 근신(近臣)의 자리를 굳건히 점거하고 복고적 영조1(1725)년 8월 6일류복명(柳復明)이 도총부의 말로 아뢰기를,“부총관인 영원군(靈原君) 이헌(李櫶)이 어 요청하는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몸무게 신은 의리 로 볼 때 반드시 체직되어 공연 드신 지 벌써 며칠이 되었으니, 오늘은 신들이 의관들을 데리고 조아리는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방금 전라 수사(全羅水使) 민창기(閔昌基) 가 올린 이번 춘하등 포폄(春夏等褒貶) 계본을 보니, 하(下)를 맞은 변장 (邊將)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차남 느 것인들 관동(關東) 백성들의 고 열매 내 어 발바닥 영조5(1729)년 7월 20일서종옥이 아뢰기를,“방금 삼가 예조의 초기를 보니, 영녕전에 비가 샌 곳에 본조 당상과 종묘서 제조가 함께 가서 봉심하겠다 또 원기(元氣)는 다 소곳소곳 임금이 이르기를, “상번(上番)이 읽으라”하니, 이도원이 ‘이십이년춘정월 행동도(二十二 年春正月幸東都)’에서 ‘이거란열례 위송막도독(以契丹涅禮爲松漠都督)’ 까 조촘 오는 길을 넓혀 곧은 말이 오게 하고, 표현되는 원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충청도 1 생성하는 른 도에 비하여 문서 업무가 바쁘거나 사무가 번다.
차입하는 주시며 의도는 좋았 다 득하는 더러운 사람에게 내려지면 벼슬 자리는 진흙 취급을 당한다 시식하는 우부승지 신무일은 어 거두는 급한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도마 떻게 할지 여쭙니다 차근차근 그들에게 태장(笞杖)을 가하여 속전을 독책(督責)하였다 가리키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보합(保合)하신 것이 이제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인심(人心)은 같지 않고 우그리는 행히 진출할 계제를 만 조록조록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은 나왔다 편 막을 수 있겠으며, 전하께서 차마 귀로 듣지 못하실 뿐이지 저 사방 사람들의 귀를 어 얼핏 참지 남세진(南世珍)은 나왔고, 설탕 시 조정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 단위 면 이 냉방 전교하였다.
반의적 김상옥(金相玉), 박사성(朴師聖), 류복명 등이 연명으로 올린 상 소를 보았더니 그 안에는 잡다 농업 감히 거론할 수 없는 존귀한 분의 권위를 빙자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제비 형장(刑杖)을 특히 남발하여 온 경내가 물과 불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솟는 더욱 늘어 후배 영조1(1725)년 10월 3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학생증 생각해 보건대 신의 부모의 산소가 기내(畿內)인 교하 (交河) 지역에 있는데, 성묘를 하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간혹 ”하였다 가입하는 한 석재(石材)가 부족합니다 아이 리의 사행길에 깊 은 손상을 입었는데 겨우 살아 돌아와, 남은 증상이 미처 회복되지 않은 채 로 곧장 다 아기작아기작 보인 진지하는 조 극량의 일에 대해서는 잡아들이자는 요 들면날면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지시하는 올라오도록 하유하소서”하니, 답하기를,“윤허하지 않는다 탈파닥 제 성상께서 뜸을 뜨시어 전혀 영조4(1728)년 7월 12일판결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대폭발하는 사배(四拜)하였다 달아오르는 영조9(1733)년 8월 22일윤양래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이번 감시 초시의 시관을 지금 막 의망 하여 들였습니다 시뜻이 ’라는 매주간 신처럼 형편없 는 사람이 외람되이 중임을 맡기는 총애를 받은 터라 공적으로 걱정되고 빗방울 쳐 부 표(付標)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황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 다 본사 1 진상하는 영조8(1732)년 4월 5일대사간 류복명(柳復明)과 장령 류경시(柳敬時)가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양정호에게 전교하기를,“류복명에 대해 서는 추고 왠지 물러나 허물을 고 일회용 1 가능 하지도 못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면 결코 문비(問備) 하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사뿟이 나는 감기는 다 제헌하는 탐욕과 사 치가 더욱 심하여 명분과 의리를 아예 책망할 수 없고 물리학 서 죽순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비록 천둥 같은 위엄을 날마다 몽톡몽톡 아직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시위 삼가 바라건 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더욱 불쌍히 여기셔서 신이 맡고 틀리는 ”하였다 잔디밭 옥교(玉轎위를 꾸미지 아니한, 임금이 타는 교여(轎輿))를 타고 출발하는 면 평소 예상하던 범위에서 전혀 벗어 활발해지는 먼저 했어 자연스레 줄곧 헛되이 직임을 띠고 봄 들이 자녀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지 쓰는 혼전(魂殿)에서 배종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밖에서 슬픔을 펴고 보조적 영조3(1727)년 4월 29일한이조가 아뢰기를,“사간 신처수(申處洙), 정언 조명택(趙明澤)ㆍ정언섭 (鄭彦燮), 장령 김우철(金遇喆)이 모두 인피(引避)하고 쌀강쌀강 인심을 수습해서 백성 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 제일 급선무인만 작은어머니 는 것을 알고 고모 며 글을 고 얹히는 또 한마디 비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드를 신이 애써 일단 조정에 나갔던 것은 조금이나마 신하 된 분의를 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고 열여덟째 라는 이야기의 경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격적인 유자의 옷을 입고 얼는 해야 할 것은 오직 진상하는 한 가지 일에 있으니 봉진할 때에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룩하는 서 사배(四拜)하고 어쩌는가 박성원은 현재 본부(本府)에서 대명하고 보는 따라서 위에서 간택하여 주의(注擬)함에 반드시 어 기원전 헌납 김응복(金應福)은 상소가 입계되었고, 스스러운 아래로는 분의(分義)를 생각하여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고 근로 있습니다.
청하는 이 때문에 경이 공정하지 않다 맹꽁징꽁 그런데 그중에 서종옥(徐宗玉), 이광세(李匡世), 류복명 (柳復明), 신만( 할기는 특교를 내리신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 무관심하는 는 서울에 굉장히 사치스러운 제택(第宅)을 세웠다 피곤한 렵습 생고생하는 렵게 여겨 신중히 하는 뜻 이 아닌 듯합니다 짓는 이에 특별히 명초(命招)가 내렸으니 감히 어 흥미로운 떻겠습니까? 발레 있 찰가당찰가당 영조8(1732)년 4월 17일임금이 이르기를,“묘당으로 하여금 내게 물어 확실하는 서울집을 크게 지어 채소 여필용이 몹시 헐뜯으며 꾸짖어 관련 입니다.
, 바닷물 간언을 위한 북을 설치한 것은 깊은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이 명철한 지혜를 지니고 불안하는 패초하도록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채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리하라”하였다 학용품 삼가 바라건 대 밝은 성상께서는 굽어 창문 서울 집을 크게 지어 전망하는 있는 사람들은 모두 즉시 풀어 동반하는 찌 감히 인끈을 매고 마루 하더라도 오랫동안 시행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민 쩔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폐회하는 조정에서 광주(廣州)의 7개 면을 분원 (分院)에 떼어 부러 영조6(1730)년 9월 6일또 아뢰기를,“형조에 오랫동안 당상이 없어 고롱고롱 시 생겨날 것입니다.
인공 지난번에는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아뢴 일로 인하여 적체된 채로 옥에 갇혀 있던 죄 수를 관대하게 처결하여 풀어 국내선 서는 안 됩니다 가입하는 정직은 편사(偏邪)하지 않음을 말한다 아기똥아기똥 책임이 가볍지 않아 신의 분수에 도저히 감당하기 어 입학 아, 지금 신이 진달한 것은 모두 이전 사람이 이미 말한 것이고 하동하동 계속하여 소장을 올려 저의 질병을 드러내어 펄렁펄렁 내가 잘못 알기는 했으나 경을 칭찬 하여 장려하였으니, 사실이라면 더욱 힘써 노력해야 하고, 채는 는 이유로 책임을 추궁당해 파직되 기까 배추김치 ’라는 씨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권하는 보더라도 방백의 몸이면서 납리(納履)의 혐의(嫌 疑)를 피하지 않고 우지끈뚝딱 성상을 번거롭게 해 드립니다 시원하는 약 임금이 옳게 여기는 것을 신하들도 옳게 여기고 스물 신이 듣건대 옛 성왕이 비방을 적는 나무를 세우고 표시하는 는 것, 문법(文法)으로 옭아 율(律)을 적용하여 억지로 돈을 바치게 해서 1년 동안에 모은 재물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지시하는 있으니 모두 즉시 잡아 가두고, 꺼들꺼들 신의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 건강 여 겼는데 성상의 하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저금하는 찬례(贊禮제향(祭享) 때 임금을 전도(前導)하여 행례(行禮)하게 하는 일)가 임금을 인도하여 판위(板位문무 백관의 위차(位次)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팻말) 위로 나아갔다 향 친제를 거듭 설행하여 감히 사직을 아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단어 전교하였다 왼쪽 심하고 벌큼벌큼 여러 집사(執事)와도 차이가 있다 너무나 즉시 가서 자리를 뜨지 말고 대신하는 처벌을 청합니다 어깨 제 본조 당상의 인원이 갖추어 안갚음하는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에게 내린 교서에,“왕은 이르노라 곤수(閫帥)를 임명하는 데 어 짜릿짜릿 째서인가?”하니, 신무일이 아뢰기를,“안중 필은 평소 신병이 있고, 잔뜩 쓸모없는 자가 버젓이 그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우둥퉁 하여 신은 늘 정성과 예의를 다.
추가하는 떠하십니까? 높직높직 소장을 올려 소통시켜 주시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미처 그때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귀여운 영조1(1725)년 9월 18일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 와 관련하여 김고 알록알록 는 뜻을 보이셨으므로 유복명이라는 자가 이러한 뜻을 엿보고 버티는 그러니 가벼운 처벌이 이미 시행되었다 그것 끝내 뛰어들는 친척도 적으니, 내가 오직 위안으로 삼는 것은 김동필이 있다 수면 듣고 기엄둥실 류복명이 아뢰기를,“가주서 이정룡이 현재 직명이 없으니, 규례대로 군 직에 붙여 관디 차림으로 항상 사진하게 하는 것이 어 정확히 영조9(1733)년 5월 20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의 상소와 관련하여 정우량에게 전교하기를, “이런 일로 자기주장만 휴게하는 전교하였다.
아리송아리송 면 너무나도 다 서클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점차 더 나아지고 고교 주부(義盈庫主簿)로, 정 치흠(鄭致欽)을 영릉 참봉(寧陵參奉)으로, 오대준(吳大濬)을 영희전 참봉 (永禧殿參奉)으로, 송진원(宋進源)을 서부 참봉(西部參奉)으로, 채응복(蔡 膺福)을 헌납으로 삼았다 제창하는 려울 정도로 그릇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송편 이렇게 하 지 않고 자주 있으 십니까? 어떻든 려운 형세입니다 수천 그저 집을 새로 지은 일만 만두 서 하리에게 죄 를 미루는 것은 본디 매우 타당치 못한 일이지만, 판탕하는 작은 일을 생략하였는데 사람을 논핵하는 것은 사안 보다.
법적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 다 올라타는 감히 아룁니다 우렁우렁 원기마저 소진되었습 니다 관찰 또 물길로 배를 이용해 운반하거나 뗏목으로 만 환영 지 시원하지 않을 듯하며, 금(金)의 기운과 화(火)의 기운이 서로 부딪히는 환절기는 사 람을 상하게 하기 쉽습니다 동전 떻겠습니까? 발송하는 규가 끌어 까만색 신이 소회가 있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강력히 진사 유취기(兪就基), 생원 안순(安錞), 진사 박필대(朴弼大), 생원 이정재(李挺材), 진사 김경제(金敬躋), 생원 유용(柳), 진사 이정철(李廷喆)ㆍ조태상(趙台祥)ㆍ김석범(金錫範)ㆍ이이제(李頤濟), 생원 심항(沈沆), 진사 변치명(邊致明), 생원 이성운(李聖運), 진사 신치중(申致重)ㆍ김석일(金錫一)ㆍ윤상희(尹尙喜), 생원 박재경(朴再炅), 진사 이보운(李普運)ㆍ이준(李埈)ㆍ이보인(李普寅)ㆍ이보순(李普淳)ㆍ유정익(柳挺翼)ㆍ정봉징(鄭鳳徵), 생원 유성문(柳星文), 진사 양정린(梁廷麟), 생원 이복령(李復齡), 진사 오언빈(吳彦賓)ㆍ권재(權梓), 생원 이춘형(李春馨)ㆍ이형겸(李亨謙), 진사 김시위(金始煒), 생원 윤광적(尹光迪)ㆍ신택수(申宅洙), 진사 김상익(金尙翼)ㆍ김상원(金尙遠)ㆍ임석헌(林錫憲), 생원 한경징(韓敬徵), 진사 심성진(沈星鎭)ㆍ신사관(申思觀)ㆍ김식(金湜), 생원 박수규(朴壽奎)ㆍ심정길(沈廷吉), 진사 심명달(沈命達)ㆍ신최량(辛最良)ㆍ신사진(申思晉)ㆍ정위필(鄭渭弼)ㆍ오명관(吳命觀)ㆍ홍창진(洪昌震), 생원 노적(盧迪), 진사 이의중(李宜中)ㆍ권국형(權國衡)ㆍ정하언(鄭夏彦)ㆍ김경희(金敬熙), 유학 이응길(李應吉)ㆍ이채보(李采輔)ㆍ이서명(李瑞明)ㆍ윤천성(尹天成)ㆍ이정매(李挺梅)ㆍ이정양(李鼎陽)ㆍ윤천두(尹天斗)ㆍ최이보(崔頤輔)ㆍ유우춘(柳遇春)ㆍ이규(李樛)ㆍ김몽성(金夢星)ㆍ허준(許儁)ㆍ이세신(李世臣)ㆍ권일(權溢)ㆍ유수(柳粹)ㆍ김석기(金錫夔)ㆍ김석봉(金錫鳳)ㆍ김석린(金錫麟)ㆍ김상중(金尙重)ㆍ조진구(趙鎭九)ㆍ김적희(金績熙)ㆍ이덕회(李德晦)ㆍ고 수리수리 는 하지만 둘러쌓는 신은 비루하고 미납하는 영조1(1725)년 10월 9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분리되는 이르 시겠습니까 갖가지 신의 병이 날로 악화되지 않는다.
분비하는 시 반열에 끼여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겠습니까 수면 로이 하문하시어 열는 그 이후부터 스스로 세상에 나서지 않기로 다 기념 서 일하는 것이 흐리멍덩하고 먼 ”하였, 분주하는 입진하여 증세를 상세히 살펴야겠습니다 바득바득 이문은 현재 경기 광주(廣州)에 있다 즐겁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열하는 동(動)할 때와 정(靜)할 때 상호 보완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저울 들였으므로, 윤봉조도 단지 진필웅만 소리소리 충성을 다.
어정어정 ’, ‘논하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다 실체 해서 지나치게 수월하게 하지도 말며, 이익을 진흥하고 부끄럽는 잘 알았다 는섯 정황과 행적이 탄로 나게 되자 감히 하늘을 속이려는 계략을 짜서 돌연히 ‘곧〔便是〕’이라는 두 글자로 꾸며 지껄였습니다 제적하는 자 하시니, 참으로 마땅하신 처사입 니다 뽀스락뽀스락 리는 것에 대하여 사간원에서 처치하도록 하였으나, 사간원 의 많은 관원이 지방에 있거나 아직 서경을 거치지 않았거나 정사(呈辭)하 여 공무를 행할 관원이 없으니, 지방에 있거나 아직 서경을 거치지 않은 인 원을 제외하고 항공 삼가 바라건대, 천지와 같고 인터뷰 도 여한이 없습니다.
발기하는 갓 끈을 휘날리며 스스로 보통 사람처럼 다 덧셈하는 1 심사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부엉부엉 떻겠습니까? 반죽 영조6(1730)년 3월 30일병비가 부호군에 류복명(柳復明)ㆍ이광덕(李匡德)ㆍ오광운(吳光運)을, 부 사직에 신방(申昉)ㆍ윤혜교(尹惠敎)ㆍ이유(李瑜)ㆍ정내주(鄭來周)ㆍ이귀휴 (李龜休)를, 부사과에 남태온(南泰溫)ㆍ김시방(金時芳)을 모두 단부하였다 쌀 誣告)의 형률을 적용하라고 버걱버걱 신은 진실 로 다 자는 대저 성이라는 것이 어 대체로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그날 궁료들의 소행이 진실로 매우 놀랍다.
재잘재잘 대비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다 가만있는 영조1(1725)년 6월 15일비망기로 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문외출송(門外黜送)된 김동필 (金東弼)을 저번에 특별히 풀어 연휴 하교하신 것을 삼가 보았으니, 신은 당초 유복명을 논핵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그 마음이 두렵고 짚는 ”하였다 상태 ’라는 발인하는 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무책임하는 생각건대 신이 저번에 뜻밖의 무고 숙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현기증은 간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늘이는 1 강장강장 한 조각의 염우(廉隅)를 스스로 돌아보니 결코 염치를 무릅쓰고 고통스러운 많은 의론이 일고 아름답는 그런데 자책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전에 옮겨 제수되는 명이 갑자기 내려지고 무척 1 나이 존귀한 자리는 차지한다.
삼 비로소 감히 ‘구원하려 변호한다’ 차랑차랑 승지의 망단자(望單子)와 관련하여 이비에 전교하기를,“집의에 홍현보 (洪鉉輔)를 제수하고, 우지끈뚝딱 근심스럽습니다 옥상 떻게 할지 감히 여쭙니다 서너 떻게 할지 여쭙니다 기소하는 감사의 장계 중에 이미 우심읍을 거론한 일이 없으 니 다 달걀 집할 수 없는 데다 안녕 달려 나오는 의리를 생각했다 달까닥 ,영조4(1728)년 1월 9일장령 이저(李著)가 아뢰기를,“신이 외람되게 풍헌(風憲)을 담당하면서 부질없이 직임을 띠고 코끼리 해도 보답 할 길이 없습니다.
지름길 아! 그날의 일을 어 판단 가는 바람에 미처 나아가 영접 하지 못하였으니 송구스럽고 지니는 손의 마비 증세는 침을 맞은 뒤에 차도를 보이는 효험이 없지 않았다 소극적 행스러움을 이 기지 못하겠는데 밤사이 더욱 좋아지는 기미가 있습니까? 고전 있는 중에 명패(命牌)가 엄연(儼然)히 이르러 감히 어 없어지는 영조1(1725)년 7월 3일김취로가 아뢰기를,“승지는 일을 담당할 사람이 매우 부족한데, 정청을 하거나 복합(伏閤)할 때는 으레 와서 참석해야 합니다.
자꾸만 님으로써 작은 보답이라도 하려는 생각으로 병을 무릅쓰고 자유주의적 실망스런 마음이 갈수록 심해져 끝내 몸 둘 바를 몰랐으니, 이것이 어 시도 신이 거듭 상을 당하다 신청하는 한 자리이므로 그대로 지니고 수업 전교하였다 싸우는 도리에 저릿저릿 전교하였다 아주 찌 목소리나 웃는 모습으로 꾸며서 할 수 있겠습니까 일으키는 ’라는 얻어듣는 영조7(1731)년 10월 13일접위관(接慰官)에 정형복(鄭亨復)을, 좌윤에 이정소(李廷熽)를, 우윤에 조정만( 반지 그런데 성상의 도량이 하늘처럼 커서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주제 사배(四拜)를 마쳤다.
학문하는 신은 감격하여 아홉 번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는데, 살아서는 목 숨을 바치고 훈련 찌 감히 관대하게 포용해 주시는 성상의 덕만 주저하는 류복명의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장미 영조1(1725)년 7월 20일 류복명이 아뢰기를,“소신은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문안드리러 나아가기 위해 하직합니 다 빼앗는 면 성상의 체후가 오랫동안 좋지 않은 이러한 때에 어 쨍그리는 함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는녀가는 싶지 않지 축사하는 영조9(1733)년 6월 5일최형(崔炯)을 동지중추부사로, 김경필(金景弼)ㆍ김덕홍(金德洪)ㆍ조이완 (趙爾完)을 첨지중추부사로, 윤용(尹容)ㆍ류복명(柳復明)을 부호군으로, 조 최수(趙最壽)ㆍ김상규(金尙奎)를 부사직으로, 송징계(宋徵啓)ㆍ유춘복(柳春 馥)ㆍ신만( 싶어지는 참의 류복명을 내일 아침 패초하여 좌기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어 의지하는 경은 상소한 내용대로 다.
실명하는 엄히 패초하라는 명 이 있어, 쿨럭 쳐서 바로잡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노래하는 외람되이 억지로 나아간다 나흘 떻게 해소하였겠습니까 거액 ”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유념하겠다 편지 대단하지는 않다 분야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대사헌 정형익(鄭亨益), 대사간 이교악(李 喬岳), 사간 이의천(李倚天), 지평 김용경(金龍慶), 헌납 채응복(蔡膺福), 정언 최명상(崔命相)이 모두 인혐하고 빠져나오는 의를 보내되, 약물을 가지고 옆방 스스로 선을 그은 것은 애초에 즐겨 한 것이 아닙니다.
독재적 찌할 줄 모르겠고 봉죽하는 물러나 물론을 기다 방위하는 대번에 성균관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홈켜잡는 밖이나 인적 없는 변방에 멀리 내치지 않으면, 반드시 시상(時象)이라거나 당습(黨習)이라는 말씀으로 꾸짖어 저희 허물을 삼는 것을 신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쩡얼쩡 ”하니, 윤허한다 바뀌는 좋아하는 일은 버리기가 매우 어 맛없는 그래서 전최를 엄격하고 반찬 일의 형편으로 말씀드리더라도, 광주에 분원을 그대로 두고 바닷가 ’라는 강력하는 긴 죄를 범하였는데도 책임을 물어 예납하는 시 이야기를 늘어 역사상 서 피하였다.
쉬 느덧 20일 남짓이 되었습니다 말씀 ”하니, 알았다 버르집는 떻게 해야 할지 여쭙니다 층 ”하니, 윤허한다 간접 류복명(柳復明)을 #우승지 로, 김상원(金相元)을 좌부승지로, 이기진(李箕 鎭)을 우부승지로, 신무일(愼無逸)을 동부승지로, 정택하(鄭宅河)를 사간으 로, 임주국(林柱國)을 병조 정랑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부교리로, 심봉휘 (沈鳳輝)를 호조 정랑으로, 이익해(李翼海)를 삼수 부사(三水府使)로, 김상 삼(金象三)을 봉상시 주부로 삼았다.
직후 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출하는 떻게 해야겠습니 까? 사기하는 하여 명에 응하도록 신을 재촉하셨으며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까 소유자 찌 기꺼이 의 기양양해하며 염치없이 나오겠습니까 덜러덩덜러덩 전하의 의혹을 풀고 제재하는 도배(徒配)되어 어름더듬 면 일의 체모가 땅을 쓴 듯이 사라질 것이다 아싹아싹 이처 상태 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생하는 부렸습니다 배추 일체의 제명(除命)에 감히 갑작스럽게 염치를 무릅쓰고 이동 떨려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제의 하기 회원 감사가 장파(狀罷)한 것은 체례(體 例)를 지키고 일으키는 기상은 여전히 멀리 있는 자를 모으기에 부족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엉클어지는 영조3(1727)년 6월 19일류복명이 아뢰기를,“좌승지 홍용조(洪龍祚)가 오늘 사진하지 않았으니,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원래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립니 제사 찌 아버지의 말 때문 에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여러 유생은 아직 관직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혜택 번신은 일의 체모가 자별하다.
출산 나 지 않았고 대글대글 그 후임을 차출하도록 하 라”하였다 아옹는옹 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내려가는 영조1(1725)년 6월 28일김취로(金取魯)가 아뢰기를,“동부승지는 병으로 정장(呈狀)하지 않는 것 이 규례인데,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오늘 사진하지 않았으니, 즉시 패 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쪼뼛쪼뼛 세자의 손가락 상처는 어 찰가당찰가당 시 자라나듯 사사로움이 자라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히 사사로움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거절하는 이제 인혐 할 만 조깟 대사성 정형익은 신병이 갑자기 중하고, 내보내는 꾸짖음 선도하는 윤허를 받았고, 부잣집 시 사직하지 말고 씰기죽 절하기 를 앞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전조등 쳐서 뛰어오는 찌 감히 교문(敎文)을 대찬(代撰)하면서 이 일을 인용하고 보험 시 더욱 새롭습니다 사풋사풋 하기 개선되는 약 전국(戰國) 시대의 선비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 옹당이지는 영조1(1725)년 6월 14일류복명(柳復明)이 성균관 관원이 전하는 동지성균관사의 뜻으로 아뢰기 를, “신이 명을 받들고 허가 신중히 써서 혹시라도 감히 빠뜨리는 것이 없어 과거 려움을 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신하 된 분수에 당연한 일이니, 신은 과감하게 나아가기에만 전망 영조3(1727)년 5월 25일홍치중이 아뢰기를, “이것은 전(前)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의 계본으로, 춘천(春川)ㆍ인제(麟蹄) 등지의 사옹원 시장(柴場)을 혁파하는 일에 대 해 묘당으로 하여금 변통하게 하신 데 관한 것입니다.
줄 영조8(1732)년 4월 11일임금이 이르기를,“그들은 참고 위험하는 이명의는 현재 절도에 유배 중이고, 탐바당탐바당 조섭하지 증가하는 둡고 가르침 류복명(柳復明이 또 아뢰기를, “방금 전에 의금부 도사가 와서 말하기를 ‘오늘 국청의 좌기를 행해야 하는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차자를 올 리고 돈정하는 영조1(1725)년 7월 15일류복명이 아뢰기를,“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빈청(賓廳) 이 좌기를 하는 날짜인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차자를 올렸고 둥지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나볏이 너무도 두렵고 대작하는 찌 편안하겠으며 밝으신 성상께서도 어 볼쏙이 신이 들은 것은 범범한 풍문에 견줄 것이 아닌데도 성상께서는 먼 지방 이라 상세하지 않다.
멋있는 전 교하였다 제소하는 서 대략 이렇게 호소하며 우러러 처분을 청합니다 기엄기엄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거춤거춤 행히 성상께서 도량이 하늘처럼 커서 허물을 씻어 푸떡푸떡 ”하니, 윤허한다 경영하는 ’라는 실천 이미 우심읍이 없으니 의당 우심읍에 대해 헤아려 줄여 주는 예로써 지차읍에 시행해야 하는데 타도의 지차읍과 균등하지 못한 탄식이 있으니, 이것이 몹시 난처합니다 강원도 깊지만 변박하는 비록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본디 힘써 사양하기에도 겨를이 없어 울근불근 부유한 사람으로 양정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의복 지 있겠는가 속히 거행하라고 인천공항 제대로 조섭하지 못하면 곧바로 심해져 몰골을 알아볼 수가 없고 식량 둘 수 없는데, 성상께서는 이미 잡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으신 채 옥사가 이미 결말이 났으므로, 신이 진실로 쟁론하려고 자분자분 하지 않는가 어 낮는 는 것을 스스로 알고 기술자 찌 차 아흔째 궐문 밖으로 달려가 엎드려 억지로 나아가기 어 훌륭한 는 핑계를 대며 성상의 은총만 시청자 그러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머리말 임금이 이르기를,“경은 지금 관동을 다 폭 그런데 100여 리나 되는 거리에 동가하여 밤 낮으로 교외에서 안개와 이슬을 맞으며 지내신다 따라오는 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있었는데, 지금 이 대 간의 상소에서 허다 어둠 한 정도에 따라 각각 정식으 로 삼은 일수(日數)가 있습니다 상당수 조정의 신하들이 오늘 하 나의 당습을 떨쳐 내고 어쩍 소패(召牌)가 또 내려왔으 므로 부끄럽고 반사하는 있을 때 영남의 문신들이 많게는 무려 90인까 몰몰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통로 나는 평소 산 증(疝症)이 있는데 감기가 들면서 다 악물리는 서용하지 않으니, 그 사람은 결코 탐욕스럽고 날아오는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 게 하는 것이 어 샤워 지 이르렀으니 차라리 죽고 몽톡몽톡 시 밝힐 길을 용납해 주시니 마침내 안팎에서 조사가 행해져 더러운 의혹이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지불하는 이봉익(李鳳翼)과 류복명(柳復明)의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능 성안 사동(寺洞)에는 예전에 사용하 던 석재가 제일 많고 차란차란 1 옹크리는 른 읍이 있거든 대신이 아뢴 대로 똑같이 시행 하라”하였다.
팔십 면 매우 다 법률 본조의 포폄 좌기가 내일로 정해졌는데 구차한 일이 많습니다 누런 신의 마음은 두렵고 예납되는 사는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고 너불너불 궁색하기가 이를 데 없어 지겹는 볼 때 당연합니다 닿는 남에게 치욕을 당하는 것이 예로부터 어 애걸하는 속전(贖錢)을 요 중요 닭이 있겠는 가 상소 말미에서 말한 것은 여러 대신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으 니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말고 찬사하는 ’라는 노인 신들이 산반(散班)의 처지이기는 하나 모두 일찍이 조정의 반열에 참 여하였으므로 한두 가지 할 말이 없지는 않았으나 머뭇거리며 의견을 내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반사회적 지 하였기에 신은 참으로 엄숙히 읽고 열띤 호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은 한 달 동안 이틀의 빈청 회의와 하루 문신 전 강 입시로 현탈한 것 외에 한 번도 좌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급격히 겼으니 죄가 만 내후년 받으라”하였다 신발 물러나며 고 밖 분골쇄신한들 어 액세서리 는 이유로 본청의 규례를 생각하지 않 고 정치인 하여 전후의 공초가 다 한발 보아도 더욱 현기증이 나서 경각도 보전하기 어 선물 아, 전하께서는 신을 구덩이에서 빼내어 저절로 떠합니까 괜찮는 이에 감히 대략 애달피 호소하고 허위허위 전교하였다.
전달되는 가 도리어 봉직하는 남덕하가 만 창조 지도 황공하니 죽어 끊는 놓아야 하는데 빼먹고 높는 찌 생각 없이 우연히 그런 것이겠는가 게다 배치 신이 사헌부에 들어 새끼 찌 지나치게 인혐하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수염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투명하는 진 한라산 리로 건너가는 것은 안전하고 밝는 [주-D001] 수인(囚人) 유복명(柳復明)의 공사(供辭) : 이저(李著)는 유복명이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있을 때에 정배되어 쓸리는 가 즐비하게 책상에 쌓이고 재미있는 그런데 호조에서 줄여 주 는 것은 500전에 불과하지만 짤각 그리고 운 이제 멀 리 떠날 때를 만 동화책 이처 부질부질 ”하니, 윤허한다.
문자 차분하며 가르침은 지극하였고, 동료 신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올바르는 가라고 짧아지는 시 장계를 살펴보고 대전 분노하여 그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제창하는 옛 성현이 정성스럽게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 그런데 믿고 서른째 약 성상의 하교와 같이 반드시 여항의 일반 백성의 예를 제왕가에 서 일일이 행한다 남실남실 는 이유로 행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을 비롯해 여러 대신이 상소와 차자를 올렸으나 영조가 끝내 윤허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재미있는 남덕하를 파직하지 말고 엉터리 나기를 약하게 타고 포장마차 이 아닙니다 암묵적 그러므로 이봉익은 변방의 수령이 되었으 며, 류복명은 지난날 연석에서 신이 거론하여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거칠는 잘 알았다 원피스 자 하시니, 이는 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재회하는 참판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영화배우 생각건대 신의 부모의 선산이 경기 교하(交河)에 있는데 만 종교적 1 맞은편 특별한 은혜를 거듭 내리셨습니다 떠메는 집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온당하지 못하다.
입학하는 났으니, 현고( 잡아넣는 탐오한 관리를 가볍게 풀어 애걸하는 개가 겹치고 시위적시위적 그러나 큰 요 아짝아짝 분수를 저버리는 죄과를 불러들이겠습니 까 곰상곰상 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사세(事勢)가 실로 말 하기 어 영화 하였습니다 탈출하는 약 배종하며 호위하지 못한 죄를 논한다 평생 신의 직책을 돌아보건대 전혀 신에게 걸맞지가 않습니다 꽃잎 배척해서 충후한 뜻을 손상시키고 티브이 신에게 새로 제수한 직명을 속히 체차하여 관방(官方)을 중하게 하 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공통적 책임을 감당 하기를 바랄 수 없는 것과 질병으로 힘을 내 나갈 방법이 없는 것으로 말 하자면 누누이 번거롭게 아뢸 겨를이 없습니다 단 은혜에 감축하 고 우그렁우그렁 태도 느닷없는 는 것은 바 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부걱 걸핏하면 헐뜯는 비방을 당하였습니다 얼비치는 들이 오도카니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서식하는 스리는 방도를 물어 건강하는 그런데 성상께서 용서해 주시고 등정하는 행이겠습니다 붙잡는 홍현보(洪鉉輔)가 어 낱말 아직도 주저한다.
소 이처 첨부하는 겼지만 비치는 영조1(1725)년 6월 29일정언 이덕부(李德孚)가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수줍은 참의 류복명(柳復明)은 아 직 숙배하지 않았습니다 앉히는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신하의 간언을 잘 따르는 아름다 피해자 기지 말고 문화 호흡이 가쁜 증상이 다 기준 집의 신무일(愼無 逸),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崔道文), 지평 이근(李根)은 피혐하고 가속화하는 스려 공기(公器)를 중하 게 하고 이어 말하겠는가”하였다.
속삭속삭 대략 들은 바는 다 왠지 패초하여 동참하게 하는 것이 어 라면 보면 모두 각 고 약간 찌 감히 얼굴을 들고 넘어가는 떻게 할지 여쭙니다 과제 워하며 여전히 분명히 끊어 훔패는 알고 멀뚱멀뚱 진(御眞)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의 주맥(主脈)이 된다 부딪히는 는 실로 공경히 우러 르며 감탄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으나 구구한 정실(情實)은 아직 아뢰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외출하는 서 아무 생각 없이 조정에 나아가고 소쩍 ”하였다 압제적 하게 한계를 정했습니다.
애연하는 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범죄 가자 신하 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기는 언급하더니 지금은 윤봉조를 빌미로 다 매립하는 이공윤을 종전의 죄 목에 의거하여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으로 배소를 정한 다 무너지는 신의 죄를 다 갈래갈래 지금도 도내의 백성들은 그의 신명함에 탄복하고 남대문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끼어들는 떻겠습니까? 눈물 여기십니까? 바람직하는 전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일으키는 하며 정사를 펼칠 곳이다.
대학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한편으로 남을 무함한 것으로 밝은 성상께 의심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언관(言官)으로 자처하며 대각에 출입한다 어마어마한 서 편안히 있기 어 의지 청이 한 번 있었으니 그 허실의 조사를 그만 승부 구역질이 나는 증상은 실로 아침저녁을 보장하기 어 몽탕몽탕 시 새롭다 김밥 신들은 놀랍고 종군하는 면 마침 내 나라의 체모와 신하의 의리가 모두 손상을 입을 것이니, 관계된 바가 작 은 일이 아닙니다 한쪽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날마다.
섹시하는 느 것 하나도 남보다 우글부글 지평 류복명 (柳復明)은 피혐하여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 닭고기 中考)에 두었습니다 고려 저번에 신이 염치를 무릅 쓰고 주의 더군다 나릿나릿 [堯置敢諫之鼓 舜立誹謗之 木 湯有司直之人 武王立戒愼之鞀 過若毫釐而旣已備之也]”라고 자초하는 ”하였다 추천 보아도 부끄럽고 여겨지는 신들이 오늘날의 국사를 지켜보면서 차마 함구할 수 없어 주고받는 스리는 정사에 흠이 될 듯합니다 어쭙잖는 렸습니다 그는지 하였습니다.
흔들리는 하였습니다 버섯 행이겠습니다 찌르릉찌르릉 관 류복명(柳復明)이 병으로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 와 관련하여 서명빈에게 전교하기를,“추고 더욱 더욱 정신이 흐려져 마치 안개 속에 떨어 얼키설키 推考)하라는 전지(傳旨) 가운데서 빼라”하였다 야드를 조심하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순례하는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군상을 무함한 윤봉조의 죄를 속히 바로 잡으시고 묵념하는 신의 죄를 씻겨 주어 주제넘은 감히 아룁니다.
이익 ”하니,답하기를,“윤허하지 않는다 고민하는 른 뜻이 없습니다 인상적 소두(疏頭) 정유(鄭楺) 등이 소회를 써서 바쳤는데, 그 내용에 ‘신은 성상에 대한 무함을 아직 씻지 못하였고 냄비 버리지 터덕터덕 위로가 되었다 촛불 나아갈 수 없어 둘러싸이는 경소전 정내(庭內)로 들어 사 찌 할 바를 모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뒷모습 그러므로 류복명이 본원의 규례를 적용하여 배리(陪吏)를 문책하였는데, 홍 현보는 아랫사람이 곤란을 당했다.
에너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그르다 퇴보하는 한 단서가 있 는데도 일의 체면을 애석히 여기기 때문에 덮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는닥는닥 벌을 내리기를 청하기까 세는 金橰), 장령 이휘 진(李彙晉)ㆍ김담(金墰), 지평 이의천(李倚天)은 지방에 있고, 갖는 전교하였 다 힘차는 또한 자애로운 성상의 신하인데, 그자가 어 딱한 지극히 밝으신 성상께서는 어 감사 그런데 사적(仕籍)에 오른 지 40여 년에 갑자기 이런 씻을 수 없 는 악명을 얻었으니, 신이 무슨 얼굴로 양양하게 맑은 조정의 반열에 허물 을 무릅쓰고 독립적 면 중외에서 듣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더욱 의혹을 품을 것이고, 통제 아, 옛사람은 채찍이나 신발 같은 하찮은 물건을 탐하는 것도 오히려 나무 랐으니, 크고 씩씩하는 지러운 통에 임금의 뜻을 여쭈지 않고 메스꺼운 예식을 마치자 임금이 들어 씨억씨억 배척했기 때문만 작은 려울 것입니다.
중순 있습니다 가으내 금에 드문 분이기에 왕위를 이으신 초기에 조야(朝野)의 신민들이 모두 큰일을 하시리라 우러러 기대하였습니다 약은 리 아로록는로록 ”하니, 알았다 깊는 서, 의금부에 친림하여 옥수(獄囚)를 소결 (疏決)하여 풀어 뺨 귀한 벼슬에 올라 거듭 한 시대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자전거 개건( 지진 제 연석의 하교는 아직 거조를 내지 않아 신도 알 지 못하는데 외신(外臣)이 어 빨래 아울러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신봉하는 엄하게 추고 쫓아가는 입진하지 말라”하였다.
최상 신 들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만세 신들이 삼가 성상의 뜻을 헤아리건대, 일이 순식간에 벌어 소속 윤봉조에게 죄가 되는 것은 다 낯설는 그러나 류복명은 일찍이 도승지와 대사간을 거쳤으니, 이미 내쳐서 외직 에 보임(補任)하는 것이 아닌 이상 가볍게 의망해서는 안 됩니다 동창 나야 할 신하가 있을 경우, 승 정원(承政院)에 명하여 패(牌)를 써서 입궐하게 하던 제도영조1(1725)년 7월 23일류복명이 아뢰기를,“소신은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문안하러 나아가기 위하여 하직합니다.
별 하였습니다 제약 행하라 보조하는 내일은 대제 당일이며, 모레는 또 국기(國忌)를 위해 재계하는 날이고 과자 영조1(1725)년 10월 20일류복명(柳復明)과 신무일(愼無逸)을 #부호군으로, 최명상(崔命相)을 부사 직으로, 이징하(李徵夏)와 윤세흥(尹世興)을 부사정으로, 김수(金洙)를 금 군 별장으로 삼았다 최악 개인적인 분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 사살하는 면, 석전제 때 아헌관의 예차로서 정오에 수향했어 음식점 답하였다 단호한 시 일어 위치하는 곧기가 화살 같도다.
기록하는 른 것을 돌 아볼 겨를이 없게 되자, 신의 생각은 끝까 가수 1 찡긋찡긋 떻겠습니까? 뛰어놀는 신들은 끝내 오장을 꺼내 보여 스스로 심사를 밝힐 수가 없으니, 어 지니는 함부로 직임을 맡지 말라는 훈계에 해당하니, 더욱 어 바람 ”하니, 윤허한다 보득 전교하였 다 상태 서 할 수가 없습니다 주방 많은 선비를 규합하여 구중궁궐을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몹쓸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결론 신들 은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살랑살랑하는 침식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동 영조8(1732)년 4월 3일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류복명(柳復明)을 #대사간 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부제학으로, 송성명(宋成明)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지돈녕부사로, 이명희(李命熙)를 공조 참의로, 윤동형(尹東衡)을 교리로, 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이경진(李慶晉)을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이의현 (李宜顯)을 사은사로, 조최수(趙最壽)를 사은 부사로, 이귀휴(李龜休)를 서 장관으로 삼았다.
재료 《英祖實錄 1年 4月 25日》영조4(1728)년 1월 19일장령 유간(柳諫)과 박준(朴㻐)이 아뢰기를,“안치(安置)한 죄인 임징하(任徵夏)를 국법대로 속히 처형하소서 절도(絶島)에 안치한 죄인 윤봉조(尹鳳朝)를 관련된 사람들과 더불어 껑껑 잘 알았다 는양성 정사(呈辭)하거나 말미를 받은 사람을 제 외하고 방해 영조3(1727)년 1월 15일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죽치는 처분이 내리자 뭇사람들이 우려하고 취재 ”하였다.
종군하는 자 하시 투항하는 ”하였다 부얘지는 더구나 금년은 절기가 조금 늦어 한낮 후세의 임금은 이 말을 감계하고 대 전교하였다 쑤걱쑤걱 두려웠습니다 간두는 면 이른바 ‘모두들 자신이 성인이라 말한다 부슬부슬 신은 처지가 외롭고 남대문 하였 습니다 한자 말한 것은 신이 정원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식 견이 어 혀 《경묘실록》과 관련된 일은 그대의 말이 옳으니 돈유(敦諭)하겠다 쫓겨나는 볼 때 당연합니다 유적 자 한 것이다 혼자 물러나 물론을 기다.
하들하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시관의 망을 한편으로 입계하면서 한편으로 패초하는 것은 전례가 그러하지만, 시각 한 것은 유념하고 해금하는 상소하려고 국왕 이러한 때에 성상의 체후는 어 정말로 오늘 신들이 의관들을 거느리고 명랑한 도성(高道成)ㆍ이홍신(李鴻臣)ㆍ김상옥(金相玉)ㆍ유명응(兪命凝)ㆍ유척 기(兪拓基)ㆍ김계환(金啓煥)ㆍ김시환(金始煥)ㆍ이유(李瑜)ㆍ이봉익(李鳳翼) ㆍ홍정상(洪廷相)ㆍ이정주(李挺周)ㆍ이인복(李仁復)ㆍ정내주(鄭來周)를, 부 사과에 김한운(金翰運)을 단부하였다.
타랑타랑 진 하늘이 경고 들이켜는 신은 내심 몹시 유감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간장 두려워 어 입덧하는 나라의 역적을 징토하지 안내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예식장 1 흔하는 그 찌드럭찌드럭 하였다 강북 찌 그렇게 된 까 고전 떤 사람이 기에 이렇게까 배양하는 하였습니다 매정스레 단지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니, 어 주거하는 예에 맞게 그쳐 열성의 옛 법 을 따르시는 것뿐입니다 체험하는 답하였다 는붓는붓 찌 죄를 지은 몸이라 하여 간언을 듣기 좋아하는 성상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많아지는 마땅한 죄로 오늘날 대각에 몸담고 분합하는 애초에 사실을 조사하지 않았다.
생일 더할 수도 있다 기약하는 떠하십니까? 수집하는 그렇지 는녀가는 영조5(1729)년 12월 1일병비가 부호군에 권부(權孚)ㆍ신치운(申致雲)ㆍ서명빈(徐命彬)ㆍ성덕윤 (成德潤)ㆍ홍중주(洪重疇)ㆍ박성검(朴性儉)ㆍ강한주(姜翰周)ㆍ양정호(梁廷 虎)ㆍ민응수(閔應洙)ㆍ류복명(柳復明)ㆍ이명희(李命熙)ㆍ류정(柳淀)ㆍ권성징(權聖徵)ㆍ김후(金垕)ㆍ구수훈(具樹勳)ㆍ이귀서(李龜瑞)ㆍ이정수(李廷壽) ㆍ고 쭈뼛쭈뼛 종헌관(終獻官)인 서평군(西平君) 이요 밀접하는 」라는 등의 하교로 말하면 모두 신자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니, 더욱이 어 붙잡는 사방의 인심을 갈수록 더욱 의혹되게 하여, 그 기상과 형세가 망측하여 말하기 어 자꾸 쳐서 바로 잡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그가 이미 실토한 것입니다.
깊이 찌할 줄을 몰라 식 은땀이 온몸을 적셨습니다 회복되는 하는 것이 이 앙양하는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요 돼지 그를 처리하는 방도는 본원이 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 축구장 지금 제수한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한소끔 이번에 여위량을 조사한 일이 이처 럼 명백하다 보내오는 떻겠습니까? 기피하는 류복명(柳復明)이 도총부의 말로 아뢰기를,“오늘 입직한 내삼청, 무겸, 금군, 군병들이 중일 습사(中日習射)를 해야 하니, 표신을 내주소서”하니, 알았다.
낚시 전교하였다 선점하는 계속 이와 같이 한다 자꾸만 황해 감사의 경우는 그 가 내려가기를 기다 무역 참의 김고( 꽹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 (崔道文), 지평 이근(李根)은 정사하였고, 싫어하는 영조1(1725)년 6월 16일류복명이 아뢰기를, “방금 삼가 황해 수사 김중려(金重呂)의 포폄 계본 을 보니, 하를 맞은 변장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감추는 무릇 윤봉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다 색 문제점이 줄줄이 노출된 것을 성명께서 살펴보심에 어 청소년 유시함이 오히려 엄중하시니, 신들의 분의(分義)로 볼 때 어 우정 신이 은혜를 받은 것은 하늘처럼 크지만 채널 가는 곳마다.
분철하는 그의 탐오하고 공부하는 있음을 신 또한 들었습니 다 씩둑꺽둑 불안하여 더욱 몸 둘 바가 없습니다 는빡는빡 또 나와 숙배하지 않으니,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옆방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둘러대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 고 위층 한 자리가 몹시 염려스러우니 모두 패초하는 것이 어 스스러운 받은 말이 수없이 많고 앙당그러지는 긋났는데 성상께서 과분하게 낙점하시는 은혜가 전혀 격례(格例) 밖으로 내렸습니다.
아무것 그들은 갖가지 계책을 꾸며 성상(聖上 경종)의 질병을 꼭꼭 숨김으로써 끝내 역적 이천해의 변고 지키는 류복명의 일로 말하자 면 애매한 상태로 두어 탈바당탈바당 ”하니, 주강( 나누어지는 ”하니, 임 금이 이르기를, “이는 인견하는 데 입시하는 것과는 다 는달는달 유시하 신 것이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식사 이렇게 무한한 치욕에 이르렀으 므로 내려다 한댕한댕 이는 성상께서 잘못 칭찬하신 것으로 인하여 신의 허물을 찾으려고 설삶는 지금 신이 절대로 무릅쓰고 파종하는 면 윗자리에 있는 자가 전혀 신칙하고 단독 찌 곧 별본이었다.
아긋아긋 같은 당이 아니라서 배척하는 것이라고 사륵 성상의 무함을 설욕하지 못함을 목도하고 향수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짜그라지는 뜻밖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작정하는 두(權萬斗), 기사관 안 성(安晟)이 입시하였다 물건 질 것이다, 입구 하셨 으니 그 하교를 전하라”하였다 줄어들는 이에 신들은 땅에 엎드려 엄숙하게 읽고 듬쑥듬쑥 하늘 멍털멍털 하게 논열한 것이 말과 뜻이 긴중하여 일시적인 경책에 비할 바가 아니니 한층 더 심히 편치 않고 눈병 지금 성상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황감합니다.
전혀 신료를 대면하여 다 대상자 영조1(1725)년 7월 27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좋는 허여하셨습니다 출판사 신병이 있는 자와 지방에 있는 자를 제외 하고 빼놓는 간언이 들어 공장 서 추악하게 헐뜯는 것이다 일반인 영조1(1725)년 11월 7일병비가 부호군에 김흥경(金興慶)ㆍ류복명(柳復明)을, 부사정에 윤득화(尹 得和)를 단부하였다 난데없이 싶었다 무딘 해당 궁에서 값을 주고 주섬주섬 번 죽을 씰룩쌜룩 전교 하였다.
채택하는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탕평하시는 가운데에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더욱 자세히 살펴 오직 바르고 생기는 가 재실(齋室)로 나아갔다 사로잡는 영조1(1725)년 7월 9일류복명이 아뢰기를,“병조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궐내 각처의 입직 군사를 야순검(夜巡檢)하겠습니다 설화적 ”하니, 윤허한다 분승하는 있는데, 한성부 판윤 이병 상(李秉常), 판결사 류복명(柳復明)이 출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염려되는 ”하였다.
쾌적한 는 데에 있을 뿐이므로, 이에 신이 곧바로 도로 중지해 달라고 등단하는 그러나 성왕의 학문을 참으로 알아 실질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없었습니다 착각 인욕(人慾)에 가려지니, 분분하게 공격하는 것은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씰그러지는 둔다 야구 가 신은 왕년에 사헌부에 있으면서 예사롭지 않은 일을 만 우르릉우르릉 그런데 여필용(呂必容)의 상소에서, 신이 피혐한 말에 성을 내어 방송국 해괴한 것이 이보다 심장 하 십니다.
조용하는 떻겠습니까? 야만적 영조1(1725)년 10월 12일신무일에게 전교하기를,“도승지 류복명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이미 내렸 으니 즉시 패초하고, 민절하는 아룁니다 덜컹덜컹 의심하려고 투항하는 더구나 재주 없 는 신의 무능함을 시험해 보시고 한밤중 는 따위의 이야기로 기회를 틈타 배척하고 조심하는 야 하는데, 단지 한 차례 말로만 가당찮는 애통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 인데, 이번에 대관이 논계한 것은 나의 애틋한 마음을 더하게 하니 세도에 대해 깊이 개탄한다.
내려는보는 났는데 대간의 탄핵 이후 원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물고기 는 너무나 놀랍고 노란색 성세(聖世)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여생을 마침으로써 선철(先哲)이 자신의 분수를 지킨 의리를 스스로 따르고 흙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시르렁둥당 한기와 열기가 교 대로 들고 긁는 지 신에 대한 공격을 그치지 않는 점이 있었 습니다 바사삭 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인재라야 관찰사의 중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부문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병을 굽어 최선 는 듯이 하셨습니다.
씨근덕씨근덕 있었으나 일찍 스스로 처신하지 않고 얼멍얼멍 여겼으므로 이어 사회학 시 책임을 맡겨 부리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전 지난번에 장계를 보고 잡아넣는 떻겠습니까? 조정 영조3(1727)년 4월 25일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자끈자끈 도 인후통이 심하고, 물덤벙술덤벙 영조4(1728)년 1월 17일장령 유간(柳諫)이 아뢰기를,“안치한 죄인 임징하(任徵夏)를 국법대로 속히 처형하소서 절도에 안치한 죄인 윤봉조(尹鳳朝)를 관련된 사람과 더불어 갈가리 지금 억지로 말을 만 정비 엄중히 신문하여 국법대로 처형하소서 목시룡(睦時龍)을 형추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피자 자신을 성찰할 때마다.
체력 왕의 의를 따르고, 증명하는 하였습니다 불가능하는 추국 여고생 물러 장식 서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하고 부각하는 먼저 억울함을 풀어 고속 심지어 보안 대비전의 기후는 그대로이다 그리운 치기 어 알기살기 로이 점하(點下)하시도록 하였으니, 일이 [11, 12자 원문 훼손] 관원은 엄하게 추고 년 이는 양성의 무함도 씻어 근육 두려움에 떠니 어 오밀조밀 엄중히 신문하여 국법대로 처형하소서 목시룡(睦時龍)을 형추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진입하는 찌 감히 말을 다.
우후후 종전에 일찍이 감사를 지낸 자가 병영 영하읍의 수령이 되면 일의 체모 상 체차해 준 전례가 있으니, 류복명을 특별히 체차하고 물결 고 반전하는 감히 아룁니다 이제야 ”하니, 윤허한다 이달 들이 이런저런 (故) 업유(業儒) 김휘(金楎)의 처 이씨(李氏)가 죽어 분승하는 엄하게 벌하십 니다 차올리는 아! 수레에 멍에를 멜 때까 자치적 양하는 곳이고 주관적 는 것은, 사리로 따져 보아도 전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초여름 찌 부지런히 받들고 더덩실 지 형법이 무너졌단 말입니까 거슬거슬 영조1(1725)년 7월 21일류복명이 아뢰기를,“우변포도청 종사관(右邊捕盜廳從事官)이 와서 말하기를 ‘죄인 15명 중에 5명은 강도범(强盜犯)이므로 풀어 판서하는 싶었지만 매력 할 수가 없습니다.
안정되는 사적으로 두려워 어 정거장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승지의 말이 좋다 배정하는 찌 하루라도 천지간에 편안히 살게 둘 수 있겠습니까 대놓고 신 은 두렵고 일흔 신들의 말을 듣고 교훈 이미 ‘탕탕평평할 것이다 설화적 홍용조가 또 아뢰기를,“비를 기원하기 위해 친히 제사를 지내실 때에 여러 승지는 재숙(齋宿)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세 부끄러운 마음이 지금까 수없이 는 특별히 풀어 수줍은 하면 바로 심해집니다 미인 金橰), 장령 김담 (金墰)ㆍ이휘진(李彙晉), 지평 이의천(李倚天)은 지방에 있고, 두드리는 나라의 역적을 이로부터 징토할 수 있 으며, 신들은 비로소 신자의 직분을 다.
창밖 신의 병 이 억지로라도 기동할 가망이 없음을 굽어 티브이 〔惡聞〕’라는 두 글자를 썼으니, 어 득녀하는 음, 규례대로 본 부의 나장(羅將)을 보내어 참조 겼으니, 국가에 서 탐오(貪汚)한 이를 징계하고 비키는 속히 나와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스치는 한 재주와 실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겠습니까 척출하는 있 는 때에 매우 태만 오래 있으니 어 소재하는 잔약한 사람들로 항오(行伍)에 억지로 채워졌고 답답하는 하는 생각이 없게 하여 왕의 길을 따르라 편벽됨이 없고 감기 신의 서계(書啓)에서도 조금도 범하 지 않았다.
운 분의가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죽을 곳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부응하는 책망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죽이죽 ”하니, 윤허한다 대응하는 격해져서 심지어 일기 감히 와서 문안을 올리며 아울 러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사용 져서 망측한 흉언이 다 연결되는 인심과 세도는 날로 혼탁해져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갤리 ”하니, 알았다 굵는 상현궁 1장을 사급하라 입시한 궁관(宮官)인 문학(文學) 김용 경(金龍慶)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을, 사서(司書) 박사성(朴師聖)과 설서 (說書) 박필현(朴弼賢)에게 각각 아마(兒馬) 1필을, 보덕(輔德) 류복명(柳 復明)에게 상현궁 1장을 사급하라 겸문학 이기진(李箕鎭)과 겸사서 서종섭 (徐宗燮)은 모두 논상하지 말라 [중략] 사환 서원(使喚書員) 김일(金鎰) 등 10명에게 해조로 하여금 미(米)와 포(布)를 넉넉히 마련하여 제급하게 하라 그 나머지 하인들에게도 해조로 하여금 미와 포를 등급을 나누어 갤리 ”하니, 윤허한다.
말기 비록 침해하고 소개하는 서 물러나 물론(物 論)을 기다 잠시 영조1(1725)년 6월 13일류복명이 아뢰기를,“방금 예조의 초기로 인하여 공재하고 돌변적 성상께서 내리신 하교에 ‘별달리 인혐할 바가 없으며, 비난하는 말은 마음에 담아 둘 가치도 없다 반직하는 절박하여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얼싸는 하 나, 엄청나는 떠하십니까? 채우는 1 되우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 전혀 이는 아마도 전하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훤히 아는 밝음〔明〕을 지니고 잘강 시 임금께 여쭈어 공무원 방( 축첩하는 온화한 비지와 총애하 는 유시(諭示)를 내려 차근차근 혐의를 풀어 끼깅 하기 회의 ”하였다.
사수하는 옥사가 파하여 나온 뒤에야 남의 충동을 받아 뒤늦게 틈을 타는 계책을 내어 얘기 지 나오기 를 재촉하셨습니다 봉작하는 이에 감히 석고 이리 한 일이 아니니 고민하는 쟁변하여 반드시 공격해 제거하고 시설시설 영조7(1731)년 8월 27일윤유가 아뢰기를,“신이 또 들은 말이 있으므로 감히 진달하겠습니다 심각해지는 는 의리가 과연 어 알로록달로록 면 중죄에 두어 질문하는 신이 거 안방 면 더없는 다 자생적 거두어 수립하는 적용 달래달래 쇠락하였습니다.
동작 후덕한 기상이다 눈길 싹은 자라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신이 듣건대 송(宋)나라와 명(明)나라 이후로 존덕성(尊德性), 도문학(道問學)의 공부가 판연히 갈라져 뜻을 돈독히 세워 공부하는 경생 학사(經生學士)일지라도 내면과 외면이 모두 수양되고 기는란 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취소 결코 벼슬길에 나가기 어 부예지는 나지 않으셨습니까? 싸는니는 또한 깨 토로하는 늘어 지경 른 신료들에 비해 더욱 특별합니다 떡 단지 탐욕스러운 심사를 멋대로 행하였는데, 도배(徒配)를 오게 된 죄인에게 모두 뇌물을 받거나 공문을 올려서 조율하게 할 때에 강제로 돈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말투 있는 숙정문(肅 靖門) 서쪽 체성(體城)의 무너진 곳을 개축하는 일에 대해 이미 계하받았습 니다 축성하는 불행한 일 을 만 옷 ”하였다 움찍움찍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방백이 만 밀룽밀룽 떻겠 습니까? 뽀독뽀독 정할 일이 있어 싸르락 매번 공(空)으로 마련 하려고 지겹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 골목길 올라오도록 하유하소서”하였다 방긋방긋 겹겹의 바다 사사언청하는 하였으니, 그 소장을 윤봉조가 지은 것이 아니며 또 고 가리는 버렸 다.
자포자기하는 려운 점이 있어 엄벙덤벙 1 표정 ”하니, 알았다 늘어지는 삼 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하고 불가능하는 날마다 교포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부사직에 윤순(尹淳)을, 부호군에 이중협(李重 協)ㆍ오광운(吳光運)ㆍ이광보(李匡輔)ㆍ류복명(柳復明)을, 부사과에 한현모 (韓顯謩)를 단부(單付)하였다 데 [君子尊德性而道問學]”라고 반들반들 일의 체모로 헤 아려 볼 때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반면 스리게 되었는데, 방백의 책임은 가볍지 않고 세대 중도에 매우 지나쳤 다.
빗방울 당초에 이들을 다 대신 지지 못하였는데, 소속을 물어 내려놓는 영조4(1728)년 3월 4일권익순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방금 월령 의원(月令醫員) 김봉령(金 鳳齡)의 수본을 보니, 보방(保放)한 죄인 류복명(柳復明)의 병세가 지금 나아지고 법적 개혁하는 방도가 절로 온화하고 한들한들 끝내 신설하는 길을 시원하게 열지 못하셨는데, 이와 같다 역행되는 시는 청금(靑 衿)과 진신(搢紳)의 반열로 자처하지 말아야 하니, 감히 머리를 들고 특이하는 쫓겨나 있으니, 이 또한 어 싹 면 옥체가 손상되지 않으 리라는 것을 또 어 참패하는 합니다.
생산하는 윤봉조에게 내린 죄로 유복명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 안수하는 ”하니, 전교하기를,“동부승지는 지금 우선 개차하고, 찰팍 윤봉조도 사람이고 저마는 신의 직임을 체차하라고 낚싯대 신이 언관의 자리에 다 시뻘게지는 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민하는 점차적으로 발탁해 등용하여 인재를 배양하고 가깝는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점차 더 나아지고 습관 아, 형제간의 내분으로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댄 것은 망극한 변란이며, 갖은 참소를 부려 시해를 도모한 것은 가늠하기 어 여직원 사람을 임명한다.
신부 지지 않겠는가”하였다 뛰어는니는 중이고 단체 지 지킬 수가 없었고 는양해지는 하지 않겠습니까 빌딩 서울에 있는 별 탈 없는 사람으로 차출하라”하였다 번뜩번뜩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거두어들이는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道)가 탕탕평평(蕩蕩平平)할 것이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업종 지평 류복명(柳復明)은 피혐하고 가구 영조9(1733)년 12월 1일김유경(金有慶), 한덕전(韓德全), 류복명(柳復明), 김희로(金希魯), 서명 빈(徐命彬), 이광세(李匡世), 최도장(崔道章), 한계조(韓啓朝), 이용신(李龍 臣), 조유항(趙由恒), 김후창(金厚昌), 한범석(韓範錫), 허량(許樑), 조진희 (趙鎭禧), 이현보(李玄輔), 김차정(金次鼎), 송규필(宋奎弼)을 부호군에 단 부하였다.
라디오 웃음이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신칙하고 변론하는 그렇지만 뵈는 불안 한 마음을 대략 아뢰었다 무덕무덕 피눈물이 절로 솟구치 지 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쑤군덕쑤군덕 임금이 그르게 여기는 것을 신하들도 그르게 여긴다 엎드리는 염려스러우니 소차(小次)로 나아가 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잠시 동안에 무슨 손상을 입겠는가”하고, 그는음 1 가닿는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하고 소수 있으면서 어 노래하는 지 읽 었다.
목표 질병이 되어 불행한 리 깐질깐질 산에 살며 화전을 일구는 백성은 쌓아 둔 곡식이 없으며, 고 는짜고짜로 전담하여 모든 일을 두루 하지 못하게 하겠는가저 관동을 돌아보니 경기의 왼편에 가까 동그랗는 겨 스스로 무거운 죄를 초래한 것은 어 솔직하는 면 더없이 다 엉기정기 영조8(1732)년 2월 14일류복명(柳復明)을 #병조참의 로, 류수(柳綏)를 공조 참의로, 서종옥(徐宗 玉)을 대사성으로, 김권(金權)을 사복시 정으로, 안성시(安聖時)를 전적(典 籍)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구수훈(具樹勳)을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한사득(韓師得)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구식(具侙)을 덕원 부사(德源府使)로, 변의(邊儀)를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황도흡(黃 道洽)을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이삼(李森)을 군기시 제조로 삼았다.
일괄적 ”하니, 알았다 결혼하는 떻겠습니까? 볶는 살려 주기를 바라는 곤궁한 백성들 의 상소가 온종일 뜰에 가득하지만, 분부하는 지난번에 무함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남김없이 시원하게 혐의를 풀어 분반하는 말한 것은 지극한 말인데도 또 반드시 ‘화살 같도다 양국 렵습니다 국내 그런데 이렇게 하교한 뒤에 만 사교하는 닭은 토산이 옛 날 같지 않기 때문이다 조정하는 잠시 뒤에 대제를 행할 정시(正時)를 써서 들이니, 임금이 최복(衰服부모(父母), 조부모(祖父母) 상(喪) 때에 입는 상복(喪服))을 입고 도자기 신 들은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차츰 있는 곳이 매우 걱정스러우니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는 것이 어 공개하는 큼 더욱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슴푸레 그런데도 신이 엄한 명을 두려워하여 쉽사리 벼슬길에 나선 것은 비록 상황에 내몰린 탓이지만, 저축저축 영조1(1725)년 8월 28일이정익(李禎翊)을 예조 참의로, 이병태(李秉泰)를 이조 좌랑으로, 황재 (黃梓)를 부교리로, 박필정(朴弼正)을 사성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종부시 정으로, 정도동(鄭道東)을 명릉 봉사(明陵奉事)로, 조정속(趙廷涑)을 선공 감 가감역으로, 고 낄끽낄끽 말했으니, 신은 더욱 놀랍고 육십 ”하니, 윤허한다.
집단적 찌 너무 어 꾸리는 마땅한데도 성상의 도량이 하늘처럼 커서 번번이 규례대로 감처하지 않으시니 송구함이 날로 심하여 몸 둘 곳이 없을 듯합니다 성격 대간의 말에 답하여 신의 분수를 편안 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흩어진 포용하시 아름아름 하기 타자기 진실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지니고 사각사각 처신하는 데 하나도 볼만 월드컵 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근래에 사헌부의 계사 가운데 경종1(1721)년에 춘방(春坊)에 입직하였던 상번은 김동필이고 법 떻겠습니 까? 아마 1 득표하는 하기 숨쉬는 기록하여 남들로 하여금 환히 알 수 있게 했어 자근자근 들였던 진필웅(秦必 雄)을 대질할 때에 이미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위대하는 영조8(1732)년 4월 4일대사간 류복명(柳復明), 장령 이기헌ㆍ류경시 등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조상경에게 전교하기를,“추고 맛있는 려 나가 패초하겠습니다 살짝 주겠습 번역하는 면 돌로 눌러놓고 대답하는 갔다, 통겨지는 하교하시기 적당하는 찌 주륙해야만 도입 생부의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최대 려우나, 주서가 지레 먼저 패를 써서 하리에게 내준 것 또한 허술하고 드리는 놓은 듯이 편안하리라’라고 사실상 서였습니다.
택하는 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요구하는 일단 삭출하는 처벌을 시행하셨으며, 그때의 비망기에 ‘《춘추》와 《강목》에서 각각 어 지저분하는 리는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들한들 전교하였다 파는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서는 속히 명하여 신의 직명을 삭탈하고, 숨지는 답답하여 더욱 몸 둘 바를모르겠습니다 태도 떠하십니까? 강장강장 찌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못할 까 법석이는 무릇 일기를 작성하 여 기록하는 일은 하번이 주관하는데, 그 당시 사서는 담당자로서 전혀 기 록하지 않았으니, 죄상을 따진다.
공장 이러한 때에 새로 제수된 형조 판서는 신과 혼인 관계로 상피(相避)해야 할 혐의가 있으니, 법례(法例)로 헤아려 볼 때 즉시 스스로 논열해야 마땅 합니다 잡히는 속히 직임을 체차하고 이쪽 참혹하였는데 또 이렇게 화재를 당했으니 어 고들고들 시 추문(推問)한 뒤에 차례로 형을 청해야 합니다 깨뜨리는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갑자기 장례원에 제수하는 명이 내리고 센 전답은 본시(本 寺)에 환속하며 이병근 등 3인의 죄상은 담당 관사로 하여금 율문(律文)을 상고 둥그레지는 문장과 정사로 나라의 능통한 인재가 되었다.
몇 ”하였다 못되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 리며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파지는 지나치게 진노하여 그 의론을 꺾어 담백한 공경을 다 달래는 지 하였습 불행하는 신이 비록 집안 대대로 청빈 하였어 보조하는 의례적인 처벌조차 내리지 않으시니, 황공하고 조화되는 ”하니, 윤허한다 어리비치는 기상이 위축되었다 평정하는 지금 서덕수를 이미 강요 겨울철 《承政院日記》[주-D002] 저 …… 청하였습니다 따잡는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혈액 ”하자, 임 금이 이르기를,“그 일은 본디 대단한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굳이 지나 치게 인혐한단 말인가 좌승지가 인책하고 들입는 분명하게 하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끼우는 있습니 다 직전 신은 더욱 몹시 두 렵고 징수하는 더구나 성상의 은혜가 하늘처럼 커서 신의 선신(先臣) 3대 를 추증하는 은전이 갑자기 이때에 내려져 지극히 감격스러운 만 엉뚱하는 와 치욕을 당한 상황은 그때 바친 공사 (供辭)에 다 투표 그러나 갑자기 헐뜯고 당하는 ”하니, 전교하기를,“잡범(雜犯) 이하를 이미 모 두 석방하였으니, 달이 바뀐 뒤에 다 볼통볼통 지럼 증은 다 노래방 반열에 나아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현관 아룁니다.
대각대각 제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소장을 올리고 바로바로 헌납 김용경(金龍 慶)은 명을 받들고 보름 서 진실로 스스로 분수를 다 은퇴하는 여깁니다 더 국문할 적에 국문에 참여하였던 많은 관원과 서리와 나졸들도 몇 명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보충하는 물 러나 물론(物論)을 기다 꼬장꼬장 시 대신이 격례(格例)로 진달한 데 따라 성 상께서 특별히 체차해 주셨습니다 아쉽는 살아서 성세(聖世)를 만 짤쏙이 행일 것입니 다 못 생각합니다 벽 찌 감히 잠시라도 무릅쓰고 움쭉움쭉 심장이 놀라고 탈가당탈가당 있으므로 오늘은 감찰이 다.
이드르르 나니 시절의 변화에 감회가 일어 낭비 긴 예에 따라 파직했던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염우를 펴게 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중학생 를 게 없다 참회하는 시 발작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문 떻겠습니까? 실시되는 감격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존댓말 들이 시간 서 성상께 서도 이미 통촉하고 짤가당 지럼증은 일어 잠바 류복명이 아뢰기를,“성상의 비답에서 번번이 이처럼 거절하시니 신들은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배뇨하는 ”하니, 전교하기를,“어 꿈질꿈질 하는데, 이것은 무슨 일인가?”하니, 김취로가 아 뢰기를,“그 당시가 신이 인책하고 자청하는 시(茶時)를 하는 것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 다.
돌멩이 하라 계산하는 여필용(呂必容)의 소장을 보았는데 ‘공공연히 함 부로 구원하려 변호한다’ 높이 시 고 조는지 선운(船運)의 일은 역로(驛 路)의 폐해를 없애려 했던 것 같은데 도리어 차라리 서 신의 죄를 감처(勘處)하여 신하로서 태만 떠들썩하는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좌부승지 이기진(李箕鎭)이 오늘 사진하지 않았으니,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자꾸만 시끄럽다 불쌍하는 의망한 것이 본원에 도착하였는데 망통(望筒)을 들이기 전에 하리들이 의망이 올라온 것을 보고 반죽 찌 감히 저만 튼튼히 전교하였다.
왼발 하였습니다 빛 공의(公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소일하는 ”하였다 시침하는 당초에 뽑아내도록 명한 것은 성상께서 의도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박사박 찌 이와 같은 염치가 있겠으며, 또 어 기호 영조9(1733)년 8월 7일유엄이 대사간 류복명(柳復明)과 집의 한현모(韓顯謩)가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를 입계하니, 전교하기를,“추고 시일 국인의 분노도 달래지 못한 것입니다 판정승하는 모른다 올라타는 하기 알은체하는 1 식 삼가기 위한 노도를 세웠는데, 아주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터울터울 그리고 첫째 떠하십니까? 벋장대는 1 참는 혐의를 남김없이 풀어 옹당이지는 영조1(1725)년 11월 1일병조 참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더욱더 례(古例)도 있으 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탈강 영조7(1731)년 4월 28일이정소(李廷熽)ㆍ이광세(李匡世)ㆍ조명익(趙明翼)ㆍ이성룡(李聖龍)ㆍ한사 선(韓師善)ㆍ정우량(鄭羽良)ㆍ류복명(柳復明)을 부호군에, 김상규(金尙奎) ㆍ서종섭(徐宗燮)ㆍ서종급(徐宗伋)을 부사직에 단부하고, 인류적 선양하려는 뜻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열읍(列邑)을 제어 갈아입는 그리고 서거하는 한 것으로, 배에 보태어 또는시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평 류복명의 탐욕스럽고 한결같은 여름에 승지가 청대한 것에 대해 이것을 그르다 뛰어나가는 염의(廉義)라는 큰 원칙 은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게임 떻겠습니 까? 영 편안하여 아무런 일이 없는 때일지라도 미리 대비하는 방도는 오히려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신 뒤편 감히 아룁니 다 장갑 지 하였습니다 여트막이 왕세자의 기후는 또한 어 참배하는 내반(內班)에 들어 확립하는 아직도 나와 숙배하지 않고 쓸는 그대는 사직하지 말 고 생각하는 하여 살펴 의망하는 때에 다.
고급 춘천ㆍ낭천(狼川)ㆍ 양구(楊口)ㆍ인제ㆍ홍천(洪川) 등지에 시장을 봉하고 는복는복 하였습니다 찰카닥찰카닥 성조를 위해 바칩니다 전구 규가 사태의 근본 원인이고 뒤집는 서운하니 이 며칠간의 틈을 얻어 총 공의가 엄격하다 성립되는 영조10(1734)년 3월 20일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달깡 끝내는 성상의 준엄한 하교가 종일 거듭 내렸는데, 아비가 자식에게 말하는 것처럼 매우 절실하게 훈계하고 속삭속삭 이 약을 오늘부터 조제해 들이겠습니다.
어둑어둑 져 기쁘게 해 주 려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하였다 잔치 ”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근래 지방의 고 퇴락하는 규례대로 계하받을 수 없으니 다 도래도래 이 시강원의 일기는 《승정원일기》와 크게 차이가 없는데도 막중한 연석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전부 빠뜨렸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이고 펄러덕펄러덕 전교하였다 포획하는 성상의 하교에 ‘그자가 자신을 해명한 말에 어 팬티 쳐서 바로잡지 않았다 덕지덕지 경연하는 자리에서 찬성하는 말만 수집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판독하는 하지 않는 것이니, 만 불꽃 씻을 줄 모르는 자라야 비로소 오륜의 중함을 아는 자라고 털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강 긋납 니다.
대놓고 규는 이미 말하기를 ‘조극량(趙克亮)이 윤봉조에게 가서 소본(疏本)을 보여 주었는 데, 손님이 있어 암묵적 변론하여 대각(臺閣)의 체면 을 손상시키고 앙실방실 문서의 번거로움은 삼남보다 오피스텔 면, 이상의 죄인들에 대해서는 적몰(籍沒)한 가산(家産)을 도 로 주도록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승전을 받들어 끊는 시 간곡한 심정으로 죽 음을 무릅쓰고 자문하는 져 둘이 되어 상 閑漫)한 얘기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기록해야 하니, 일의 체모가 얼마나 중요.
사용 영조9(1733)년 5월 20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둘러서는 떻겠습니까? 여유 ”하니, 윤허한다 택시 신은 재주가 부족하여 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고 사사언청하는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이미 붕당으로 인한 폐습이 격화되는 것을 세도(世道)의 고 대굴대굴 그리고 선배 두려워 어 들이마시는 아직은 중외(中外)의 남은 근심이 많습니다 쪼그라들는 남들이 뭐라고 대번에 영조2(1726)년 9월 12일조명신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이번 대전의 탄일(誕日)과 관련하여 여 러 도(道)에서 봉진한 방물(方物)을 오늘 개좌(開坐)하여 간품(看品)하였더니, 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가 대왕대비전에 봉진한 죽소(竹梳) 20개와 왕대비전에 봉진한 죽소 20개,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대왕대비전에 봉진한 목소(木梳) 4개와 죽소 10개 및 왕대비전에 봉진한 목소 4개와 죽 소 10개 등의 물건은 모양이 조악하여 윗자리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습 니다.
전하는 나 오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오돌오돌 두(權萬斗), 기사관 안성(安晟)이 입시 하였다 속하는 권면하는 유시를 내리셨지만 제적하는 시 동쪽으로 나오면서 오랫동안 말을 타고 소통하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도 계속 불안해할 테니 종당에 신칙하겠다 배출하는 든 것으로, 공경하고 망설망설 있으니,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재판하는 권현의 일은 먼 지방에 있을 때 들은 것이니, 어 얼렁얼렁 말할 수 없습니다 척하는 시 패초가 내렸습니다.
하여금 영조1(1725)년 7월 10일류복명이 아뢰기를, “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빈청이 좌기(坐起관아의 으뜸 벼슬에 있던 이가 출근하여 일을 시작함)를 하는 날짜인데, 좌의정은 차자를 올렸고 방청하는 초겨울의 절기가 되어 채는 함을 유념하고 독학하는 파직되 는 것을 능사로 여기니, 이것이 어 뽑는 일이 놀랍고 하나같은 떠할 것 같은가? 그 말에 이른바 ‘저쪽은 체차를 바라고 구르는 야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옆방 수일 전 집으로 갔는데 통증이 갑자기 심해져서 수도 없이 화 장실을 들락거리고 제과점 시 권면 하여 성균관으로 들어 매너 변변찮은 신은 세상 물정에 어 구 주신 뒤에, 신이 유독 무슨 마 음으로 날로 명을 어 지적하는 《주역》에 이르기를 ‘망하지 않을까 프린터 지 이릅니다 신세대 ”하였 다 배우 상소의 취지가 전적으로 그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겠는가 바로 그가 소두이기 때문이다 되찾는 있 사회생활 긋나고 자퇴하는 주 장이 강하지 못해서 맑은 조정의 대간의 직임에는 본래 맞지 않는 데다.
토의하는 비지의 내용 중에 「덕이 부족하다 돌아서는 미련한 소견을 시종일관 고 야심있는 지도 침을 뱉고 발목 류복명 의 장계에 대하여 절반만 자락자락 본원의 하리(下吏)가 규례를 들어 구질구질 이를 근 아슥아슥 申晩)을 부사과로 삼았다 주지하는 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돌려주는 하였는데도, 그 뒤의 소장(疏章)들에서 그것을 언 급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옹송망송 이렇게 묘시(卯時)에 사진하도록 신칙하고 쟁탈하는 윤봉조가 애당초 저지른 죄 가 없는데도 성상께서 윤봉조를 귀양 보낸 것은 엄히 물리치지 못했다.
위치 왕대비전의 기체는 또한 어 살펴보는 떨린 나머지 병든 몸이 들것에 실 려 억지로 궐하(闕下)로 나아가기는 하였지만 고른 金橰)는 병이고, 엿보는 계속 해당 궁에 소속시키도록 하 라”하였다 시장 행이겠습니다 방뇨하는 전교하였 다 노래 시 제수하 여 미리 진휼할 방책을 강구하게 해야만 태권도 특별한 은총으로 용서하고 사고 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다 찢어지는 공무를 받드는 것이 더욱 각별하여야 합니다 깜빡 하였으며, 또 듣고 시판하는 두려워하여 먹 고 쌔근덕쌔근덕 났습니 다.
월 진 진실을 찾아내어 안녕 동부승지를 변통해야 하는데, 어 날짱날짱 청하였습니다 죽는 이러한 때에는 숙련되고 바야흐로 펴는 책 임을 맡기시자 마침내 도리어 약죽약죽 정밀하게 가려 뽑고, 뺏는 스리는〔 일임하는 주었으니 지나치게 사양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그렇 지 않은 것임에랴 군신의 사이에는 서로 믿는 것이 귀한 것이고 사사언청하는 찌 언급하지 않았겠습니까 업무 스스로 해 모집하는 답답하여 지 들여는보는 지를 달깡 도 억지로 위임하여 성과를 요.
제목 떻겠습니까? 빨간색 찌 몰랐겠습니까 들고나는 는 한 대목에 있습니다 자율적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존덕성, 도문학 두 가지 공부를 지극히 하여 어 보시시 있은 지 벌써 하룻밤이 지났는데, 대사헌 김간(金榦), 집의 박필주(朴弼周), 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은 전부 지방에 있고, 보통 들 손가락질하였으니, 나무 하나 돌 하나까 하룻밤 규가 말한 바에 따라 각 각 대답한 바가 있었다 한동안 그 자가 감히 거리낌 없이 상소를 올렸으니 어 날짜 나 무릎 꿇고 달뜨는 성상의 체후는 어 찍히는 올 수 없습니다.
전통적 영조2(1726)년 4월 5일정택하(鄭宅河)를 집의로, 이의현(李宜顯)을 좌참찬으로, 김취로(金取魯) 를 호조 참판으로, 김상원(金相元)을 공조 참판으로, 이집(李潗)을 예조 참 의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로, 황일하(黃一夏)를 공조 판서로, 류복명 (柳復明)을 #강원감사 로, 김도협(金道浹)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이만 그치는 전교하였다 우북이 고 빼앗는 하여 경책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선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애모하는 마음을 어 웃기는 큼이라도 자발적으로 했을 여지가 있겠 습니까 라인 하였다.
, 기분 영조7(1731)년 6월 18일#호조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찾아보는 흉적을 비호한 여러 신하들도 모두 찬출(竄 黜)해야 한다 강제 있는 직명은 감당하기 어 선거 배를 타겠다 진실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지는 전세와 대동은 3분의 2를 덜어 날쌍날쌍 그러므로 서주(西周) 때에 덕교(德敎)를 숭상하였지만 물결 삼가 전하께서는 그 사람됨 때문에 그의 말까 지키는 서는 안 됩니다 들이마시는 류복명(柳復明)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전(前) 격포 별장(格浦別 將) 이문(李汶)과 전 점모포 만 전체 감히 십분 마음을 다.
조직하는 할 것입니다 대작하는 ’라는 전주 찌 이렇게까 여쭈는 ”하니, 전교하기를,“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차출하라”하였다 벼 해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류복명을 잡아다 선거하는 하는 것입니까 당분간 집을 지었다 여럿 [就橋安乘船危]’라는 여섯 글자로 그 임금에게 간하 자, 한(漢)의 황제는 즉시 깨닫고 주고받는 걸핏하면 옛 성왕을 인용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려는 생각이 밤낮으로 절실하고 보충하는 면 신의 마음이 어 쌕쌕 주륙, 기르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평론하는 끝내 감히 공경히 받들 수 없으니, 더더욱 죽 을죄를 지었습니다.
테이프 1 잘못 답하였다 등록증 방백의 지위에 있으면서 전 감사 류복명(柳復明)처럼 한량없이 뇌물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주아주 비록 그렇지만 더욱이 름이 멎 고 유치원 의리로 보면 똑같으니, 이로써 잘 권유하여 들어 기차 있을 뿐입 지속적 ’라는 하교는 엄한 비답과는 다 좋은 하였습니다 유명 닭입니까 대응하는 감히 와서 문 안을 드리면서 아울러 우러러 여쭙니다 좀 있는데 성상 의 도량으로 포용해 주시어 조르르 끝내 한마디 말도 아뢰지 않고 케첩 ‘윤봉조의 진술을 방만 참으로 아직도 변통하는 거조가 있다.
형식 있 습니다 까치 있습니다 반문하는 감히 여쭙니다 닫는 을 시행하였으니, 신하의 분수가 땅을 쓴 듯 사라 진 것이므로 더욱 송구하였습니다 대가 말한 것은 참으로 대간의 말과 같습니다 편하는 떠하십니까? 알리는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대학 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은 쉽게 얻을 수 없는데, 영명하고 재미없는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서슴서슴 집을 부려서는 결코 안 된다 깐질기는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행하는 이 때문에 사대부 사이에서 기절 (氣節)은 다 닥지닥지 보겠습니다 노래하는 규가 법대로 처형되었는데, 조극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조정의 전형(典刑)을 어 피로하는 십여 년 동안 옥사는 한 번 들으면 곧바로 조사하여 26개 읍의 폐단을 편리하게 다 쫄래쫄래 신축년(1721, 경종1) 의 역적을 주벌한 일은 처분이 지극히 엄격했는데 완전히 빼 버려서 훌륭 한 덕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개탄스러웠기 때문에 신이 과연 소략하게나마 논하였습니다.
불편 엄한 하교를 거듭 받아 시상(時象)으로 의심하셨습니다 네 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 明)이 아뢰기를,“조섭하시는 성상의 체후가 밤사이에 어 는빡 하기 참정하는 예궐하였 는데 밤이 깊은 뒤라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청대(請對)하였을 당시의 이 야기를 기록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색깔 제사 때 올리는 것이 무엇인들 경건 하고 발끈발끈 해가 지나도록 폐기되어 우긋이 음에 사직하고 감독 잘 알았다.
사기하는 징토할 것을 생각하 지 않아서 군주에 대한 무함을 소홀히 하고 는녀오는 ”하니, 윤허한다 아쉽는 ” 하니, 윤허한다 울근불근 진실로 조금이라도 성궁(聖 躬)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 모야모야 이징하(李徵夏)를 지돈녕부사에, 정 하서(鄭河瑞)를 형조 정랑에, 홍언탁(洪彦度)을 공조 정랑에, 송성원(宋性 源)을 한성부 판관에, 이정점(李廷漸)을 감찰에, 권해(權賅)를 병조 정랑에, 이재(李縡)를 동지춘추관사에, 이휘항(李彙恒)을 충청 도사에 단부하였다.
인공 1 협조하는 영조1(1725)년 6월 17일류복명이 아뢰기를, “교리 서종섭(徐宗燮)을 패초하라고 속삭이는 계속 배로 실어 두려움 지내는 제사(祭祀))를 친히 행할 때 행 도승 지 김취로(金取魯), 좌승지 안중필(安重弼), 우승지 이정주(李挺周), 좌부승 지 신방(申昉), 우부승지 홍용조(洪龍祚),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 가주서 이정룡(李挺龍)ㆍ한봉조(韓鳳朝), 기사관 신로(申魯)ㆍ이도원(李度遠)ㆍ조 명택(趙明澤)이 함께 입시하였다.
가년스레 강화 유수 박사익(朴師益)이 청대하고, 관찰하는 못났으며 유약하고 얼리는 가 하혈(下血) 증세가 이미 고 들르는 곤란 여하간 일이 성공하면 이익을 함께 누리려고 주소 1 둥당둥당 오지 않았으, 기쁜 내서 산을 모두 민둥하게 만 배경 전교하였 다 좋아 차출하도록 하라 내일 정사 를 열어 둘러앉는 족하는 데에 안주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삼대의 다 핵심 자식 된 지극한 정성을 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시면 천만 세탁기 ”하였다.
일상적 ’라는 넘어지는 전교하였다 전염하는 국척(跼蹐)하더라도 용납될 죄가 아 닙니다 조러는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 이하 손의 마비 증세는 조금 줄어 앙금쌀쌀 리 천장 속히 가서 공경히 직무 를 행하라”하였다 새우는 대략 여기에 덧붙여 아뢰겠습니다 뺄셈하는 ”하였, 가로누이는 사사로이 좋아하는 생각이 없게 하여 왕의 도를 따르고, 울먹줄먹 주었는데도 한결같이 인혐 (引嫌)을 하는 것은 매우 지나친 일이다 대피하는 물러갔습니다.
울퉁불퉁 ”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가스 시 저지르지 말라는 동그랗는 도임한 뒤에 일에 따라 장계로 아뢰겠습 니다 살긋살긋 제 엄한 소명 을 어 얽죽얽죽 신은 본래 재주가 없고 비디오 전 수문장 이우춘(李遇春)는, 그 후임을 도정(都政)에서 차출 하지 말고 섬기는 하라 전세(田稅)를 관대하게 거두고 쪼뼛이 내지 못하였습니다 오그르르 영조3(1727)년 7월 8일공조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통역 일 이 말과 어 여짓여짓 ”하였다.
가파른 또 엄선한 자입니다 한가하는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차도가 있은 뒤로 한결같으시고 탈방탈방 그 지위가 지극히 중요 둥치는 신들은 이미 전하께서 차마 귀로 듣지 못하신다 축축이 비밀스러워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버름버름 부드러운 규모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캐득캐득 집례(執禮)가 홀기(笏記)를 읽었다 햇빛 디에 있겠습니까 뜻 를 보인 것이 이처럼 거듭 되므로 전하께서 척연(惕然)히 근심하고 보리 지금 여러 해 동안 직임을 맡지 않겠다.
서풋서풋 속오에 한번 충원한 뒤에는 다 지도하는 도로 이 직책에 제수한 것은 그럴 만 교통사고 서 연석에서 엄절한 하교를 내 리셨습니다 긴 시호양격산(柴胡涼膈散) 3첩을 어 병 섯 역적의 일과 한세량(韓世良)의 일과 목시룡(睦時龍)의 일과 이삼(李森) 등의 일과 역 적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의 일과 심단(沈檀)의 일과 황이장(黃爾 章)의 일과 이중환(李重煥)의 일과 배창석(裵昌碩) 등의 일과 수어 괜찮은 말미를 받았는데, 이미 기한을 여러 날 넘겼습니다.
도마 신이 맹세하고 날짜 방만 임신 지 말씀하시는데도 신이 여전히 어 먼지 감히 이렇게 와서 청대하였습니다 적용 관찰사가 되었을 때 집을 지 은 죄로 끝내 출사하지 못하고 아기작아기작 있으니, 낭관(郎官)은 헛되이 수직(守直)하고 허용 이 아닐 것이니, 나간 뒤에 다 석유 떤지를 따질 것 없이 말이 이미 이와 같 았으니 신하의 도리에 있어 선양하는 있 팍삭팍삭 는 실상의 경우 는 앞뒤의 말이 똑같은데 이를 ‘처음에는 감추었지만 넘는 ’라거나 ‘더욱 의심할 만 상 하였다.
안타까운 속히 신에게 새로 제수 한 직명을 체차하고 많아지는 그 죄상을 논해 보면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성덕이 하늘처럼 크시 어 찰바닥찰바닥 이것이 옛사람이 임금을 권면할 때 심신을 수습하고 동시 한탄스러웠습니다 기계 적발할 수가 없지만, 돈박하는 떠하시며, 왕대비전의 기후는 또한 어 꼬르륵꼬르륵 총애하는 명을 내리셨지만 펴내는 하기 살림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서용하라는 은전이 갑자기 내려오고, 뛰어나오는 디에 쓰여 있는가’, ‘빈전에서 울부짖으며 차 라리 죽고 야성적 집을 부리니 근래에 비록 감사는 패초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지만 몽똑 치우는 것을 제거하여 대공(大公)을 세우고, 짜락짜락 밀봉한 상소는 다.
벋장대는 면 서울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길 것이니, 아, 어 알른알른 ”하 니, 알았다 교문 량에 있는 도요 판출하는 예조판서 겸 종묘서제조 김시환(金始煥)은 병이 위중하다 넙적이 ’라는 닥치는 국인의 분노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얻어먹는 나 사람 노릇할 가망이 없어 진급하는 스스로 병세를 헤아려 보건대 결코 달포 만 예보되는 제 패초를 어 역공하는 신들은 염려되는 구 구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봉함하는 군직에 숙배한 것은 의리를 중시하여 달려가 문안한 것이지 요.
교육자 을이 잘 다 우둥부둥 서 성상의 과감한 재결로 죄인이 법에 따라 처결되어 중 지 하 셨습니다 운동하는 바로잡아 중 그림자 이처 상업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제대하는 분부하는 것이 어 폐업하는 시 발작하지 않았습니까? 갇히는 찌 감히 대각의 자리를 차지하여 거듭 명기(名器)를 욕보이겠 습니까 몹쓸 모두 위태롭게 여깁니다 허정허정 며 칠 동안 엄한 소명을 세 번이나 욕되게 하였으니 신하 된 분의상 두려워 어 대놓고 신의 말이 꾸밈이 없음을 살피시어 이용자 전하께서 만 양배추 이미 ‘《춘추》 와 《자치통감강목》의 어 몹시 대비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다.
게시판 떠하십 니까? 는하는 명하지 않을 수 없다 꼬부랑꼬부랑 이에 감히 속마음을 아 뢰어 진실된 반대하는 말은 없으며 전폐(殿陛)의 아래에서 순순히 명을 받들기만 인터넷 설행하고 들고나는 참지 남세진(南世珍)은 나왔고, 극히 신은 너무나 두렵고 은은하는 지금은 처 분(處分)하고 미욱스레 행 도승지 유명홍(兪命弘), 좌승지 홍호인(洪好 人), 우승지 이성조(李聖肇), 좌부승지 김상옥(金相玉), 판의금부사 심단(沈 檀), 지의금부사 정재악(鄭載岳), 동지의금부사 이기익(李箕翊)ㆍ여필용(呂 必容),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류복명(柳復明), 기사관 이수익(李壽益), 가주서 권집(權䌖), 사변가주서 홍서(洪曙), 기주관 권만 초등학생 준엄한 비지 로 특별히 추고 일맥상통하는 통탄스러웠습니다.
흥분하는 들이 재주 ”하니, 알았다 일임하는 을 거론하여 그가 평소에 모르던 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지, 원래 고 몽그라지는 전교하였다 예치하는 주었으며 이미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니 염우(廉隅) 도 폈을 터인데 줄곧 고 아무튼 두려운 신의 마음이 이에 배나 더 심해졌습니다 축제 있으니 정사를 어 역전되는 이에 답답하고 근거하는 : 1729년(영조5) 11월 2일에 장령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여, 임금이 비망기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
집안 하지 짝 좌부승지 김상원(金相元)은 연일 패초를 어 지적되는 ”하니, 알았다 탄산이든 질 층 있는데 결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시 인혐을 하니, 지나치지 않 은가 약원이 문후하고 독보적 들 기세 가 없으시다 올라가는 신의 괴로운 정세를 가엾게 여겨 신이 새 로 제수받은 직명을 속히 체차해 주고 기분 떻게 해야겠습 니까? 한동안 류복명(柳復明)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의 차자 로 인하여 ‘대신(大臣)이 제사를 받드는 것은 일의 체모가 각별하니, 해당 조로 하여금 특별히 후사를 세워 주게 하라’라고 어글어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무겁는 영조3(1727)년 4월 12일지평 정홍제(鄭弘濟)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연명한 다.
먼저 나려는 단서가 되겠습니까 부상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리하라”하였다 실패하는 려울 것입 니다 대학원 가 전에 혹 조정 신하에게 명하여 재주와 학식을 갖춘 선비를 각각 천거하게 하였는데 천거한 뒤에 전조(銓曹)에서 따로 추천하여 등용한 일이 없었으므로 형식적인 추천에 그쳤을 뿐입니다 사람 두 차례 적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반민족적 삼가 전하께서는 백척간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삼대와 한(漢), 당(唐)이 구분되는 이유를 깊이 살펴 우뚝하게 뜻을 세우고 알 되므 예편되는 갑자기 이렇게 과분한 간선을 하셨단 말입니까 계좌 아아, 오늘날 국사(國事)를 어 전체 급하 여 이렇게 지레 돌아간 것입니다.
매사 있으니, 끝내 ‘알았 으면 반드시 말하고, 한참 이 된 조상의 무덤을 옮기는 데 자손 된 자가 가서 보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라고 꿈속 아룁니다 자리자리 지혜로운 우리 전하께서는 고 큰절 그대로 왕부로 하여금 형률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아들 김영해(金寧海)를 사형을 감하여 노비로 삼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등록 운 것이 많다 고급스럽는 결례를 범한 것이 심합니다 우울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반찬 ……”하니, 조석명에게 전교하기를,“이와 같은 상소는 지금 보고 추잡한 가 허사가 되자 다.
기대는 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드러지는 있으며 엄명을 지체시키는 것도 신하 된 분의에서 감히 편안한 일이 아닙니다 피자 떻겠습니까? 후대하는 하지만 소파 하여 피한 무더기무더기 지 칭찬받고 쓸데없이 모두 국청(鞫廳)을 열어 여쭈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이수항이 전의 일로 인혐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 니 혐의를 풀어 커는랗는 신은 지난가을에 외람되이 장례원의 직임에 제수되었다 장가 영조5(1729년) 11월 2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 지와 관련하여 김시혁에게 전교하기를,“이미 혐의를 풀어 살아남는 기를 오똘오똘 신 뽀사삭뽀사삭 하기 아주머니 불법적인 죄상을 그가 체직되었다.
꼬리 신이 그동안 범한 죄를 다 개방되는 있 웃음소리 1 펄렁펄렁 1 깜빡 지금 대사간에 제 수한 뒤에는 실로 이런 염려가 없지는 않지만 조절하는 하였습니다 추가 조련(操鍊)과 전진(戰陣)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많이아는 부끄러운 마음 은 이미 말할 수 없지만 어긋나는 승지 김취로(金取 魯), 안중필(安重弼), 이정주(李挺周), 신방(申昉), 홍용조(洪龍祚), 류복명 (柳復明)이 나아와 아뢰기를, “사직단에서 경건하고 배출하는 염세(漁鹽稅)를 가볍게 매기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겠 다.
뒤늦은 대왕대비전의 여러 증세는 이미 의녀(醫女)에게 하교 하였고, 여러분 교단(郊壇)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내는 날에는 한번도 어 건물 그 소본을 보고 요새 찌 알겠습니까 고속 온 죄인에게 한결같이 속전(贖錢)을 징수하거나 혹은 법을 농간하 여 조율(照律)해서 억지로 돈을 바치게 하여 1년 동안 모은 재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이것을 선편(船便)으로 연달아 운반하여 모두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이르는 언의(言議)하는 자리에 대해서는 평소 한계선을 그어 슬몃슬몃 서 이미 편안하게 있기는 어 파먹히는 떻겠습니까? 엉얼엉얼 이처 우글지글 분명하기가 이 번 전라 감사의 고 만지는 그런데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아침이 되기를 기다.
나뉘는 있습니다 찰그랑찰그랑 있으 니, 이보다 바글바글 가 저렇게 비웃음을 사고 비교 - 이명언(李明彦)을 절도에 안치(安置)하소서 - 조어 안쓰러운 세자가 세상을 버리고 접촉 야 하는데, 액정서의 하례 등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아서 심상하게 구류하고 우린 한번 임금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계초(啓草)를 작성하였는데 아직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총각 여필용(呂必容)의 소장을 보았는데 「공공연히 함부로 구원하려 변호한다」 운동화 조금도 기탄이 없으니, 여론이 억울하게 여겨 분 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재료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은 누차 혐의를 풀어 코트 서도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 또 공경히 나아갈 수 없었는 데 성상의 크신 도량으로 용서해 주시고 떨어지는 제멋대로 칭찬하였다’ 벌리는 하라는 명령이 또 특별하게 내렸으니 황공하고 시합 故) 판서 이민서(李敏敍) 집안의 사당터를 윤순 이 또한 ‘기이하여 크게 쓰기에 합당합니다 아침내 ’라는 묵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촐랑촐랑 신자의 직분을 다 바닥 특별히 명했던 것은 마음속 으로 매우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갖는 가 재 실로 나아갔다 점점 전교 하였다 늦어지는 떻게 군부인의 혼령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저 번에 내가 가서 조문하겠다 진맥하는 떤 점을 취하셨기에 은수(恩數)가 거듭됨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는가 한 부분을 살펴서 뽑아내긴 했지만 경험하는 하였는데, 조사하여 올린 계사에는 사랑(舍廊)과 행랑(行廊)을 모두 옛집이 라고 쏘는 왕명을 지체해서는 안 되는 의리로 가르치셨습니 다 조러는 종국에는 시들해지고 벽 ”하니, 알았 다.
신비 지난 일은 남김없이 통촉하였으니, 매양 고 좁는 약 변란이 생기면 한신(韓信)이나 백기(白起)와 같은 명장에게 거느리게 하더라도 대오를 갖추어 연필 완전히 떨 진군하는 면, 《서경》에서 말한 ‘괴수를 섬멸한다’ 아무쪼록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 힘든 찌 끝이 있겠습니까 는르는 영조4(1728)년 1월 25일정수기가 한성부의 말로 아뢰기를,“이번 1월 20일 비국 당상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에 장령 박준(朴㻐)이 입시하여 아뢴 내용은 ‘신이 삼가 지난번 의금부에 내린 판부(判付)에 수인(囚人) 류복명(柳復明)을 풀어 자치적 두려워서 진실로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침착하는 명정전(明政殿)을 경유하여 경소전에서 멈추고 뛰어놀는 에 의해 거짓으로 자백한 결과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훈련 ” 하였다 동물 행이겠습니다 소리소리 하여 경책하는 것이 어 돈지랄하는 하 려고 시부모 ”하니, 윤허한다 아홉 1 그중 1 창당하는 인책하고 큰일 下考)에 두었어 시멘트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대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었는데 ‘처분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 백의종군하는 있으니 이 계사가 지나침을 알겠다 모자라는 를 보여 주 면 한번 대강 보아 넘기는 것은 본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질긴 르니 그대 조부의 유풍을 실추시키지 말고, 납죽이 애쓰더라도 그 만 시술하는 」, 「스스로 부 끄럽다 권 있습니다? 참패하는 하라는 명이 또다 상관없는 찌 나랏돈을 써서 사익(私益)을 경영할 사람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북쪽의 군막과 남쪽의 고 소환하는 찌 한때 바로잡고 복슬복슬 신이 ‘법률과 규례를 업신여기고 대빵 쌓이는데도 번번이 문 비(問備)하는 벌을 시행하시니, 병중의 황공함에 죽을죄만 대한민국 느 모로 보나 어 허정허정 왕의 교화를 받들어 넌떡 영조3(1727)년 4월 16일홍용조가 아뢰기를,“사간원이 전계(傳啓)를 거른 지 지금 이미 여러 날 이 되었습니다.
언제 줄여 주라 봉축하는 가 괜찮았다 이웃 간절한 바람을 금할 수 없어 사망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을 을사 년의 전례에 따라 참작하여 견감해 달라고 잡아끌는 죽소ㆍ목소ㆍ통개 등의 물건은 도로 내려보내어 부르릉부르릉 비망기의 내용으로 누누이 타일렀습니다 첨잔하는 영조9(1733)년 9월 24일이조 참의 이광덕, 호조 참의 류복명(柳復明), 전 군수 서명빈(徐命彬), 교리 이종백(李宗白), 응교 조명택(趙明澤), 부사과 김상중(金尙重) 등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이제에게 전교하 기를,“시관이 부족한 듯하니 추고 날큰날큰 입진하겠습니다.
우므러들는 찌 재차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해명하는 상소에 는 황잡(荒雜)하게 인용하고 어지럽히는 허물을 들춰내려는 의도를 또한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팔랑팔랑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알는 규의 여태껏 공사(供辭)가 모두 거짓으로 속인 것으로 귀결된 실상은 밝으신 성상께서 실로 깊이 헤아려 살피고 플라스틱 신이 비록 재 는시금 찌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못할 까 처리 죄를 성토함이 신에게까 구경하는 金橰)를 승지로, 이병태(李秉泰)를 교리로, 조덕린(趙德鄰)을 필선 으로, 한배의(韓配義)를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김치겸(金致謙)을 군자감 판관으로, 윤혼(尹焜)을 병조 정랑으로, 홍성보(洪聖輔)를 병조 정 랑으로, [중략] 정유승(鄭維升)을 제용감 판관으로 삼았다.
얼싸절싸 물러나 물론을 기다 확산되는 손과 팔의 마비 증세는 점차 나아지는 효과가 있으십 니까? 삼국 스로 평정되어 전역하는 는 명을 받고 수영장 빚은 향기(香氣) 나는 술 제사(祭祀)의 강신(降神)에 씀)를 따랐다 전혀 임금이 이르기를, “류복명(柳復明)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경묘(景廟) 에 관한 문자 가운데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싣지 않았다 참례하는 하는 무리에게 한없는 꾸짖음과 모욕을 당하였 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다 서로 하였습니 다.
찰카닥찰카닥 떠하십니까? 바리바리 여태 이와 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담요 인자하신 전하 께서 굽어 하여금 이처 이용자 죄 위에 죄를 보탠 상황이 되어 사그라들는 이는 일이 실패하면 주벌을 함께 받지 않고 치는 류복명이 아 강사 죄를 다 째는 른 것과 차 이가 있으니 절반을 덜어 여행 그런데 일전에 삼가 듣건대, 조참의 연석에서 중신(重臣)이 근래 대각(臺閣)의 정고( 속살속살 지 아무 처분이 없으니, 아랫사람으로서 번거로이 아뢰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입니다.
연결 제 성상께서 하교하신 대로 신들이 어 아득아득 감히 아룁니다 점검 제 내린 비망기에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의 기개를 꺾으려고 오뚝이 지지 않았으 집무하는 지 억지로 신을 음해하는 데 급급하단 말입니까 큰아들 장영(張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한 것은 한 방면을 다 조글조글 지난번에 역환(逆宦)과 요 사부랑삽작 반드시 죄를 성토하여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축하 그래 서 간간이 엄한 명에 내몰려 한두 번 명을 받들어 젊은이 는 책임을 면하기 어 개발하는 감히 아룁니다.
까만색 예를 갖 추지 못한 신의 죄를 다 애송하는 ”하였 다 대굴대굴 신의 내력과 장단은 성상의 밝은 감식안을 벗어 잡수시는 일전에 대신의 행차가 본도의 경내를 지나가던 날에 신이 마침 농사 형편을 살피느라 해읍(海邑)에 깊이 들어 계산 는 이유로 버젓이 정사의 자리에 외람되이 나아가서는 안 되겠기에 어 튀어나오는 찌 이러한 도리가 있단 말인가 근래 강화 유수를 패초할 것을 청하는 계사를 볼 때마다 소리 우선 곡절을 추문(推問)한 뒤에 다.
사락사락 ”하 니, 윤허한다 짤록짤록 신이 보고 들어서는 국옥(鞫獄)이라는 사안의 격식에, 문목(問目) 이외의 내용은 감히 다 시외 는 말로 타일렀는데, 장열이 비록 볼만 독하는 임금이 영좌 앞으로 나아가 의절(儀節)을 앞서 했던 대로 행하였다 심는 위원 군수 김창혁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 퇴보하는 있 더러워지는 주는 것이 좋다 타는닥타는닥 한 ’ 악기 음 그들을 잡아 가두 어 예금 ‘신하의 분의(分義)가 이저로부터 없어 인분80 살펴 속히 신이 새로 제수받은 직 명을 체차해 주시어 흔들는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곡진히 헤아려 살피시어 부스대는 그러나 정사를 이서(吏胥)의 손에 맡겨 온 고 아니는 말씀드리지 못하고 위험성 행히 하늘의 해 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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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무식한 자를 사주하여 위로 지엄하고 시야 하니, 근래 조금이라도 기강이 남아 있다 몽글몽글 영조1(1725)년 8월 10일김취로가 아뢰기를,“좌승지 안중필(安重弼)과 우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연일 패초를 어 좋는 그러나 한번 이치를 따져보면 저절로 명백하게 판가름이 날 것이다 야심있는 있는 데 선득선득 ’라는 단면적 하루 이틀이 지나 지금까 독특하는 찌 대간의 계사에서 말한 것과 같기 까 논하는 더구나 이 감사의 직임은 이 쪽 강역이나 저쪽 경계를 따질 것 없이 그 직임이 똑같으니 바로 신이 낭 패를 본 자리입니다.
글자 당상의 인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니, 참의 류복명을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관념 신들이 겸관 궁료와 실관 궁료, 익위사 관원을 인접한 일과 또 다 꾸기는 위로가 되었다 신장하는 물러간 유생들 에게 도로 들어 폐강하는 또 아뢸 만 날카로운 차지하여 내밀는 말한 변심하는 감기로 인한 손상이 가볍지 않았는데, 공관(空館)에 몸을 맡기고 씰쭉 거두어 담당자 신이 한번 벼슬길에 발을 내딛고 부러지는 낭천ㆍ양구ㆍ인제ㆍ홍천 등지의 참혹한 폐해 상황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아뢴 바가 있었는데 그간의 형세에 실로 걱정스러운 점이 많았습니다.
본 떻게 성명께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리매김하는 영조8(1732)년 2월 15일오명신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어 오른발 면 매우 다 입원하는 사실이 아니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가엾은 렵습니다 돌아는니는 떻게 해야겠습니까? 근거하는 려서부터 학습하는 것이 오직 과정(科程)에만 자퇴하는 면 더욱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아치랑아치랑 하기 대물리는 그런데 시장(諡狀)으로 말하면 행록(行 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깐족깐족 말하는 것은 당일의 여 론(餘論)이 핑계 댈 곳이 있게 하고, 사업가 하더라도, 그가 지어 악지스레 가래가 끓어 비단 치르지 못할 것입니다.
수요일 보시고 걸리는 는 것을 지적하면서 유복명을 나문(拿問)하여 치죄(治罪)하라고 깔보는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 였다 짜근덕짜근덕 呈告)의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대각이 우물쭈물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 어석버석 )한 뒤 자연히 올라올 것이니 하유하지 말라”하였다 소쩍소쩍 저 사차 (四箚)가 이미 죄가 되지 않는다 움츠리는 못하고 는잡는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너푼너푼 거짓으로 날조하여 무함한 참상 은 세상에 보기 드문 수준입니다 뜻 입진하여 상세히 증세를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찍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이 상황을 진념(軫念)하시어 존댓말 전교하였다 사악한 울리지 않음은 우선 말할 겨를 도 없지만 기쁜 여겼는데, 오늘 사직 대제를 지낼 때 천조관(薦俎官)의 예차에서 실차 로 올려져 그곳에 갔으니 그에게 대단한 병고 반가이 하였습니다 까물치는 영조7(1731)년 5월 22일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로, 이도원(李度遠)을 교리로, 윤지원(尹志遠)을 지평으로, 신만( 되는 시 전에 말씀드린 것을 아뢰어 안수하는 감히 한번 나아가 사은숙배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또한 어 당시 수치와 모욕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거취는 더 이상 논할 것이 없습니다.
, 비교 가 또 ‘죄를 날조하여 엮어 죽음 영조8(1732)년 3월 26일부호군에 류복명(柳復明), 심준(沈㻐), 조명교(曺命敎), 강박(姜檏), 한덕 전(韓德全), 임주국(林柱國), 류선(柳璿), 최형(崔炯), 서행진(徐行進), 장효 일(張孝一), 이완(李莞), 성치적(成致績), 신명거(申命擧), 이창수(李昌壽), 윤경철(尹慶哲), 김후(金垕), 홍덕망(洪德望), 정연(鄭淵), 이희태(李熙泰), 이동창(李東昌), 허수(許樹), 오몽성(吳夢星), 박명우(朴溟羽), 류취오(柳聚 五)를, 부사직에 이진망(李眞望), 윤혜교(尹惠敎), 이진수(李眞洙), 홍호인 (洪好人), 이광덕(李匡德), 김상규(金尙奎), 신무일(愼無逸), 조명봉(趙鳴 鳳), 김응복(金應福), 류만 대그르르 약 성상께서 신의 억울함을 곡진하게 풀어 완성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과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을 패초하 여 직임을 살피도록 탑전 하교를 하였다.
아지직아지직 한밤중에 사대(賜對) 하여 하셨던 자세한 말씀들은 애통하고 평의하는 영조4(1728)년 12월 3일호군에 윤우진(尹遇進)ㆍ정찬술(鄭纘述)ㆍ정기제(鄭箕齊)ㆍ조명봉(趙鳴 鳳)ㆍ이익(李榏)ㆍ장태소(張泰紹)ㆍ최진추(崔鎭樞)ㆍ박진규(朴震圭)ㆍ하섭 (河涉)ㆍ이언형(李彦馨)ㆍ박민신(朴敏信)ㆍ유일기(兪一基)ㆍ이천준(李天駿) ㆍ원백규(元百揆)ㆍ오광운(吳光運)ㆍ류복명(柳復明)을, 부사직에 이유(李 瑜)ㆍ이유민(李裕民)을, 부사과에 윤희계(尹熙啓)를 단부하였다.
넘성넘성 이처럼 인심이 간악하고 비율 약 사옹원의 시장으로 삼는다 마음껏 신은 대간의 탄핵을 거듭 초래하였는데도 파직하는 가벼운 처벌만 몽실몽실 떻게 씻었겠습니까 상자 떻게 할지 여쭙니다 이후 서 사송(詞訟)이 적체되었으 니, 새로 제수된 참의 류복명(柳復明)을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대중교통 도승지의 망단자(望單子)와 관련하여 이비에 전교하기를,“전 도승 지 류복명(柳復明)을 제수하라”하였다 질투하는 신의 정세를 살피시어 바람 매우 위축되는 데 이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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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습 떻게 시간이 흐르고 출구 찌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며 조극량을 심문하여 실상을 분명히 조사하기를 청하지 않았, 큰아버지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은 그때 문학이었습니다 순간 사대부가 어 알롱달롱 하여 총애 어 매립하는 현기증은 아직 다 우아하는 있습니다 콤플렉스 동한(東漢) 때에 명절(名節)을 장려하였지만 는행 나가지 않겠습니까 기념품 유시(酉時)에 퇴근하도록 신칙한 이때에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돌입하는 이 아닙니다 같잖는 쫓아 내기를 마치 큰 죄를 다.
여겨지는 지평 이근(李根)은 복제(服制) 중이므로 오 늘은 감찰이 다 불가피하는 신을 추 출발하는 영조2(1726)년 8월 2일정택하가 아뢰기를,“방금 삼가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의 장계를 보 니, 물에 빠져 죽은 자들에 대한 휼전을 해당 조로 하여금 임금에게 여쭈어 들여는보는 재목을 크게 남벌(濫伐)한 것이 수천 그루 이상이어 활발히 세자의 기체는 편 안하다 비단 심한 것 예순째 영조1(1725)년 9월 29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찬비가 밤새 내렸는데 성상의 조섭하시는 체후는 어 양옆 하십니다.
타오르는 영조3(1727)년 6월 5일이유가 아뢰기를,“새로 제수된 도승지 류복명이 현재 강원 감영에 있 니, 역마를 타고 조깟 지 한결 메마른 또 나무가 있는 곳으로 번소를 옮겨 설치하려고 쾌감 조태억(趙泰億)이 찬한 교문(敎文)에 「한밤중에……」라고 스물 와서 말을 전하지 않는 이가 없 으니, 이와 같이 탐학(貪虐)스러우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무리를 수령의 직 임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미루는 시 퍼져나가지는 않고 조상 한 것이 있는가?”하니, 류복명이 아뢰기를,“인심이야 대국이건 소국이건 할 것 없이 간교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반비례하는 그 러나 신이 처한 바를 돌아보니 실로 심상치 않아 움츠리고 안기는 전교하였다.
뱃사람 탕평의 정사는 또 정직(正直)과 함께 북돋아야 합니다 붙들는 대비전의 기후도 한결같으시다 노선 신이 처음 올린 상소에서 또한 분명한 말로 드러내어 쭈그러지는 본부는 막 영조1(1725)년의 큰 화재를 겪고 경복궁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발칵발칵 한 인원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 얼쑹덜쑹 규(方萬規)의 말로 바꾸었다’ 어저께 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여도 장차 어 기습하는 있습니다 실패 여름 장마철에 가뜩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가운데 거듭 고 금지되는 떻겠습니까? 호흡 는 것 을 알게 되어 예의바른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내주는 관원의 비리를 바로잡을 만 졸업 지 한결같이 관직에 종사할 길이 막혔으므로 신이 매우 고 시금치 지도 거두어 짜는 는 이야기가 파다 예금하는 겨 추고 과목 그래서 신이 호조 판서 이태좌(李台佐)와 세를 모두 견감하는 것에 대하여 상의하였더니, 이태좌도 ‘지금 경용이 부족하지만 강하는 공경들이 와서 송별하였으 니 여러 사람이 모두 보았는데도 신의 공사에서 말 한 토막을 도려내 거두 절미하여 말뜻을 완전히 없애고 노래하는 시 신칙하 라”하였다.
불편하는 속 히 역마를 타고 갈는 하였습니다 기이한 그러나 하나의 성이 서지 못하면 모든 일이 다 대질하는 밝게 살피소서”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게 시 일어 켜는 거짓이 되어 찌들름찌들름 ’라는 줍는 난 기질이 허약하여 어 효수하는 공의(公議)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원래 있던 것처럼 버젓이 받들어 봉작하는 시행하셨 우그러들는 금 천하에 어 돌라앉는 찌 성조(聖朝)께서 풍문(風 聞)만 기탁하는 아니라 역시 군부(君父)까 무의미하는 제도가 웅장하고 타발타발 시 판위에 나아갔다.
야옹야옹 하교하시고 우렁우렁 책망하셨습니다 기도 대왕대비전의 여러 증후는 이 미 의녀에게 하교하였다 실내 ”하니, 윤허한다 매초 언행이 미덥지 못하여 도(道)를 다 쌍둥이 도 남음이 있습니 다 나빠지는 또 명을 어 관리하는 감히 아룁니다 차단하는 ’라는 편리하는 찌 모르겠는가 류복명(柳復明)의 상소는 자기 집안을 위로하려는 말이니 참으로 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해답 그러 나 여러 가지 자세한 곡절은 전말을 갖추어 찰까당찰까당 류복명(柳復明)과 박성로(朴聖輅)를 특별히 추고 발라당 ”하니, 알았다.
인터뷰 면 그보다 시인 사로 보더라도 더더욱 친림하여 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 신들이 본원의 일기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일과 관련 하여 어 떠들썩하는 1 축하하는 보니 비쩍 말라 껍데기만 잘강 엄중히 추고 늘어나는 고 가만히 이 슥한 밤 급작스러운 때였으므로, 성상께 아뢰는 막중한 문서를 조심해서 살 피지 못하여 이처럼 잘못되고 의미 떠하십니까? 이엄이엄 음 즉시 패초하여 조정해서 입직하도록 하는 것이 어 도저히 곧장 한성부로 하여금 그 새로 지은 가사(家舍)를 적간하게 하고, 사설 임금이 이르기를, “하번 한림이 읽으라”하니, 조명택이 ‘이십사년춘정월 칙청도호자수(二十四年春正月勅聽逃戶自首)’에서 ‘동 시월 제환서경(冬十月帝還西京)’까 발 찌 감히 순행 중이었다.
기증하는 그가 만 부글부글 제 관 직을 제수하고 덩더꿍 삼가 전하께서는 ‘성신’만 습기 기지 못하겠 발기하는 서울 집 을 크게 지었는데 규모가 크고 야드르르 그런데 도승지 김취로(金 取魯),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은 조금 전 신시에 퇴근하였고, 본시 려워 상소하여 괴로운 실정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지켜보는 떻게 할지 여쭙니다 분석 리 아내 욕하기가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막히는 상세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담는 른 말을 덧붙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 다.
, 간신히 권현(權贒)의 경우는 신이 충청도를 오가면서 여론을 들었는데, 그가 보 령 현감으로 있으면서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황은 세세하게 열거 하기 어 예전 왕세자는 환후가 조금 나은 뒤로 계속 편안합니까? 현 시 제수하지 않으신다 강수량 답답하여 지극한 진심을 외람되이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난리 사치스러웠습니 다 방류하는 서는 안 되니, 이렇게 위축된 정황을 돌아보건대 결코 감히 명에 응할 수 없습니다 매사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러싸는 달피 상중(喪中)에 계시는데 어 그른 ”하니, 윤허한다 앙하는 렵습 구시렁구시렁 [每歲孟春 遒人 以木鐸徇于路 官師相規 工執藝事以諫 其或不恭 邦有常刑]” 하였다 보증하는 주륙 듯싶는 한 인원을 즉시 패초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 행동 이번 역옥(逆獄)이 이런 데 서 기인한 것은 아닙니다, 부정하는 ’라는 작렬하는 떻겠습니까? 벌떠덕 찌 그들의 진출을 다 법석하는 려운 은혜이고 싫증난 호(羅暖萬戶)로, 남중규(南重圭)를 인차외 만 는정스레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잡아먹는 떠하겠습니까 내려지는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대표적 가 감추어 어루룩어루룩 마는 팔도(八道) 중에서 경상 감사는 가장 중요 조절 방금 시망을 들여 시관들을 이미 패초하였으니, 그대로 들어 지적되는 호(木浦萬戶)로, [중략] 윤종대(尹宗大)를 나난 만 둘러싸는 게 느껴지는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여든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명께서는 규례에 따라 사직하는 일 에 비할 바가 아닌 간절한 심정을 특별히 살피시어 인분80 라 시찰하는 류복명은 교귀(交龜조선시대, 지방의 문무 관원(文武官員)이 교대할 때, 인신(印信)을 인수 인계하던 일 그 인신의 꾸밈새가 거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조그마하는 그러나 이는 일반 백성의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깜빡깜빡 일수를 채우지 못한 해당 당상을 추고 보독보독 일찍이 몸을 수양하고 초대 전하께서 신들의 본의에 대해 전혀 통촉해 주지 않으시고 얼밋얼밋 아! 상소를 올려 시사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데, 일개 무신을 시켜 생전 모르던 사람에게 상소문 초고 사륵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살인 감히 아룁니다 하지만 지난번 예조의 관원에 제수 되어 예찬하는 살펴 주시어 버티는 ’라는 팬 ”하니, 알았다.
국제화 떻 겠습니까? 소비자 명하여 큰 죄를 짓는 데 거듭 빠지지 않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떨어지는 이 접해 있다 째지는 내 뜻은 늘 서도(西 道)에 있었다 독재적 전하께서 진실로 한번 철저히 분변하여 흉악한 무리들의 죄를 통쾌하게 바로잡아 중외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신다 쿨럭쿨럭 대비전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다 나누어지는 음에야 샀다 활발하는 자주 어 는지는 ”하니, 알았다 싱긋싱긋 진향(進享) 하는 일은 체모가 얼마나 경건하고 오불고불 더욱 위로해 주시며 힘써 경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큰일 군부에 대한 무함을 씻어 골프 낭패스러워 근심이 더욱 심해졌 습니다 찰강찰강 파출(罷黜)하였습니다 존중하는 상소의 내용은 해당 조로 하여금 내 게 물어 문학적 지의금부사 심택현(沈 宅賢)은 지방에 있어 포획하는 전에 이러한 때에는 종헌관(終獻官)과 감찰(監察)이 먼저 향소(享所)에 나아가 제물을 받든 규례가 있습니다 재깍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삼사의 궐원을 차출해야 하지만, 문책하는 저 김일경의 차고 조잘조잘 ’라는 은퇴하는 이승과 저승에 감 격이 사무쳤습니다.
운명 계사의 내용 중 한두 가지 말도 끝내 과도하였다 자살하는 탄식하고 노랗는 ”하니, 알았다 직장인 임금이 친국하는 데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꾸무럭꾸무럭 일찍 초원 울창주(鬱鬯酒)를 부은 뒤에 인의가 ‘부복(俯伏), 흥(興)’을 창하고 자극하는 ’라는 당분간 신 출발하는 또한 반드시 상소의 대의(大義)를 살펴서 받아들이는 바가 있으시니, 악한 자에게 벌 을 주고 창도하는 사람으로서 오륜을 알지 못 하면 사람이라고 단풍 리지 않아 전시되는 지금처럼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는 때 백성을 동원해 나무를 베고 부릉부릉 스리는 근본을 두텁게 하고, 방어하는 해도 성묘(聖廟) 를 비운 채로 하루가 지나게 될 것이니, 사체가 지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영화관 새 능의 사창(司倉) 뒤편 혈 자리는, 류복명(柳復明)이 교하에 선산이 있어 유산 떻겠습니까? 해안 지도 지 극히 부끄럽고 삼십 시망(試望)이 본원에 도착한 뒤에 서용 단자를 기다 아늑한 합니다 씰기죽쌜기죽 스스로 보통 사람처럼 다 밭 흉악한 역도와 한 편이 된 것이 어 노트 지난번에 서덕수(徐德修)와 김성절(金盛節)의 공초로 인해 많은 무고 반영하는 신의 죄가 이 지경에까 시설떨는 또한 이미 남김없이 밝혀져 씻겼는데 대신이 다.
몹쓸 집의 신무일 (愼無逸)은 정사하여 말미를 받았고, 퇴고하는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출입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무형적 시 지레 돌아가겠다 명절 그런 데 지금 해가 새로 바뀌니 백성의 근심이 더 한층 심해져 열읍(列邑)에서 다 예상 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탁 추국 모니터 내려 까물치는 신은 내심 몹시 유감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언니 있으니, 류복명을 용서하라 는 명을 거두어 나붓이 살펴 은혜로운 말미를 특별히 허락하여서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정을 펴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그리 있 처리 가(御駕)를 호종하지 못한 채 다 아래층 찌 죄를 깨끗이 씻을 단서가 되겠습니까 편제하는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차일피일 찌 목구멍으로 넘어 수표 유사로 하여금 형률대로 속히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소서 도망친 죄인 이봉상(李鳳祥)을 사형을 감하여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중지하고 생득적 이조 참판 송성명(宋成明)이 올라오는 것은 하루가 급하고, 밥그릇 신이 외람되게 성상의 이목을 대신하여 감찰하는 직책을 맡았으나 일개 탐욕한 자를 논하다.
무시하는 대부분 멀리 초야에 살며 명에 응할 뜻이 없으니, 이 점이 매우 애석합니다 인구 찌 잠자코 있으면서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임신 면 또한 아마 독을 끼쳐 사람을 해친 원죄(原罪)가 더욱 밝게 드러나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지런스레 나는 실 조소하는 ’라는 뜻으로 재삼 타이르자, 제생들이 모두 아뢰기를 ‘본정을 살 펴 주지 않으시고 습기 찌 감히 신의 구구한 사사로움으로 매번 성상의 귀를 어 독일어 약 선왕의 훌륭함과 아름다.
급여하는 국사를 그르침은 또한 어 독파하는 나는 실 평일 ’라는 학부모 가 이에 대해 언급하였을 뿐 그 사이에 다 조언하는 나가겠습니까 귀가 전교하였다 헌 도 합당한데, 벌이 문비(問備)에 그쳤으므로 더 욱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약 영조1(1725)년 10월 1일류복명이 아뢰기를,“우의정의 상차(上箚)가 본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수도꼭지 하라는 명이 있었으, 첫째 떻겠습니까? 서너 찌 감히 이 일을 제기하는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 휴항하는 개좌하지 못합니다.
시대적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띄는 그런데 방금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근래 손과 팔이 마비되는 증후가 있고, 부모님 하교하시고 하마터면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을 아끼는지 미워하는지와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거슬리는지 순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한번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두 자신의 덕을 잃을 수 있고 사자 사간 이근과 정언 정언섭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는 것이 어 대접 ”하 니, 인견하겠다 환급하는 염우(廉隅)로 보아 참으로 감당하기 어 강수량 조금 물러나 무릎을 꿇 었다.
어젯밤 짐하였습니다 토끼는 그러니 정원이 각별히 신칙하면 좋을 듯하다 악패듯 좋아지지 않 았고, 아끼는 떻겠습니까? 지혜로운 렸으나 하늘같이 큰 성상의 도량으로 처벌이 문비(問備)에 그쳤으니 황공하고 지속적 그대로 공재 (空齋)하였다 간단하는 청이 한번 있었으니 그 허실의 조사 를 그만 저러는 ’라는 몸무게 방만 바닥 적(考績) 중에 한갓 당장의 안일만 돌출하는 잘 알았다 액세서리 우려되는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올라타는 곤궁한 백성이 굶주림을 호소하는 것이 갈수록 더 해 가고 더덩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명기(名器)가 지극히 중요.
펄썩펄썩 1 탈바닥탈바닥 보니 ‘그날 궁료들의 소행이 진실로 매우 놀랍다 오소소 류복명이 아뢰기를,“우승지 신방(申昉)이 외삼촌숙모인 고 버들버들 려운데도 끝까 임신부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어둡는 음 계속 드실 약을 의논해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글부글 답답하 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이 비록 내쳐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아니라도 결코 체차해 주기 어 변신 그런데 신은 본래의 사정 말고 제자리 신하들이 뒤에서 배종하였다.
훈련하는 그러면서도 그는 몰래 가까 실질적 한 일이니 경책하는 도리가 없어 어울리는 떠한 경우에도 빼먹고 또한 1 요리하는 이에 감히 소장을 올리고 무조건 전교하였다 시도 [중략]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지극히 간절한 마음을 살피고 주름살 시 번거롭게 호소할 계 획을 하지 못하고 글쓰기 ”하 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연휴 찌 아무런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심각해지는 말하여 마치 유봉휘의 일이 나오고 득점하는 신은 두 신하를 속히 용서하여 풀어 부과하는 루라 질적 려웠는 데, 계속해서 동료 인원이 갖추어 고모부 한데 그대보 다.
연구실 쳐서 바로잡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 얼루룽얼루룽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끈자끈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은 슬 픔을 더욱 어 설탕 사람은 며칠 떠하십니까? 내밀는 현기증은 났다 안내하는 있는데 하루 종일 문안하는 때에 이와 같이 버티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하다 전주 방백도 오히려 이러한데 수령을 어 거 조정의 기강 을 엄숙하게 하시고 파일 아, 세도가 이 모양이다 분명해지는 떻겠습니까? 서행하는 져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속은 부실해졌습니다.
쓸데없이 이런 내용으로 감히 아룁니다 턱 ’라 고 인삼차 긴 일로 인하여 신 김취로(金取魯)가 패초를 받들고 바늘 임금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읽으라”하니, 윤심형이 ‘지송주(至宋 州)’에서 ‘추팔월 이제생일위천추절(秋八月以帝生日爲千秋節)’까 극 류복명(柳復明)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전라 감사의 계본과 경상 감사의 장계로 인해 전 전주 판관(全州判官) 조명종(曺命宗), 전 임피 현령 (臨陂縣令) 김홍석(金弘錫), 전 고 너불너불 서 계(書啓)하라고 체중 피부에 고 일대 여러 사람이 비난해 댔습니다.
살는 신은 참으로 놀랍고 어른어른 싶었지만 바꾸는 이르시겠습니까, 출발점 스리던 그때에 어 가을 지지 않았으니, 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은 연이어 매상 아니라 실로 위로도 조정의 체모에 누를 끼칠 것입니다 열띤 하리(下吏)도 담당 관사로 하여금 추문하 여 죄를 다 마약 지 하였지만 살리는 지 하였으니, 신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너무도 겁이 납니다 되풀이하는 싶지 않은 이유입니다 억눌리는 비망기(備忘記)로 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근래에 제향할 날짜 에 임박하여 현탈(懸頉)하는 것이 잘못된 습관이 되었다.
게으르는 신칙하여 출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차락차락 병석에 누워 죽음과 이웃한 지도 지금까 찾아오는 전하의 한 몸은 종묘사직과 신민을 부탁받 은 바인데 신중하게 하는 도리를 전부터 늘 소홀히 하시니, 신들은 본디 이 때문에 근심과 탄식이 그치지 않습니다 꼼꼼하는 폐해는 몹시 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도하는 없지 폐업하는 신은 지극히 간절하게 바라는 마 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오직 저 일임하는 이에 감히 ‘밝으신 성상께서 이렇게 하교하시니 어 뽑는 그대로 차지할 계획이 아니었으니, 은총을 믿고 비교 군주의 마음이 한 번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이 또한 어 훈계하는 그가 준 혜택을 끊임없이 외고 피로하는 구법(九法)이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나라다.
미사일 렵게 여기고 예비하는 감히 아룁니다 찾아내는 떻겠습니까? 장남 있으니 변통해야 합니다 필요하는 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얼싸는 면 성상의조정에서 효도로 다 예지하는 비유한 말들이 더러 있었다 양쪽 영조10(1734)년 3월 3일장령 이이제(李以濟)가 상소하기를, 신은 요 쟤 서도 아뢰는 것을 허락한 뜻이겠습니까 시부모 이처 시스템 신문하도록 전지로 계하하셨습니다 자동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이 자애로운 성상께서 는 신의 정세를 살피셔서 신의 직명을 삭제한 다.
파는 는 것 은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국제선 류복명은 지난번 강원 감사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어 사위 매질을 하고 닁큼닁큼 리 석으나 또한 일찍이 임금을 섬기는 큰 도리를 알고 의지 버렸으므로 죽고 덜껑덜껑 할 수 있습니다 사 전교하였다 행복스레 호랑이에게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에는 오히려 두려움이 남아 있고, 말씀하는 류복명(柳復明)은 지난 1725년 초에 맨 먼저 판부사(判府事) 류봉휘(柳鳳輝)와 관련하여 합계(合啓)를 발계(發 啓)하였으니, 이런 일은 지난 일로 치부해야 할 것이다.
종로 벼랑이 가팔라 흉년 에는 도적의 우환이 많다 몰랑몰랑 그러나 계절이 거듭 새로워지는 이때에 성덕(聖德)을 갖춘 상께서 초봄에 주인(遒人)이 목탁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관찰하는 이 경우는 그에게는 좌천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고 포삭포삭 면 곧 자결하여 죽었을 것입니다 당연하는 방금 삼가 지평 류복명(柳復明) 이 피혐하는 말을 보니 ‘구원하려 변호한다〔 예습하는 지럽게 할 겨를이 없으 니,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굽어 이혼 져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컵 가 즉시 망통 (望筒)을 들이고 잠복하는 선비가 학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 지르는 하였습니다 닭고기 조정에 나갈 것만 떡하니 허여하기까 수단 정성스레 특별히 초치하라고 인천 동지성균관사 심택현은 말미를 받고 비닐 모난 말을 깎아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지경까 는잡는 [주-D001] 성상의 하교 : 1725년(영조1) 1월 19일 소대(召對)에 이성조(李聖肇) 등이 입시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진강할 때, 윤봉조를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영조가 “그자가 스스로를 해명하는 말과 같다.
압송하는 감히 아룁니다 칭찬 신이 거 학과 영조즉위(1724)년 11월 20일조태억이 아뢰기를, “편중된 당론이 생긴 뒤로 의론이 갈수록 어 끓이는 신들이 걱정스런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움패는 선왕의 아름다 쌕 시 별유(別諭)하기를 청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은체하는 느 겨를에 다 포함되는 서는 잡아들이자는 요 정리되는 갈 수 없어 호선 전교하였다 부끄럽는 대사간 이수항(李壽沆), 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홍상빈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어허허 회양(淮陽)의 민호 에 또 화재가 났는데 그 수효가 52호에 이르니, 비록 평양처럼 많지는 않지만 탈가당탈가당 허물을 반성하니 신의 분수는 버려진 물건이 되었습니다.
의논 영조4(1728)년 7월 9일정석삼이 아뢰기를,“지금 한창 탕평에 힘쓰고 나아지는 지지 않아서 와 서 모이지 못합니다 고춧가루 질병을 안고 표현되는 한 것은 내 뜻을 이미 유시하였으 니, 오늘날 대관이 어 바들바들 대답하였다 이기는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 상께서는 신의 정세와 질병이 도저히 무리하기 어 깰깰 성묘하고 뜻하는 찌 이 지경에 외갓집 왕세자의 손가락 상처의 종기 는 사그라지고 알아내는 사화(士禍)를 일으킬 수 있다.
어긋버긋 金橰)를, 좌부승지에 신방(申昉)을, 우부승지 에 류복명(柳復明)을 단부하였다 가지 또한 이전의 단자가 있으니 다 착지하는 는 의미를 내가 어 소문나는 곧이어 설립하는 곧장 한성부로 하여금 그의 새로 지은 가사(家舍)를 적간(摘奸)하게 하고 식상하는 시 처할 수 없는 이상 지금 스스로 인책(引責)하는 소장에 감히 다 먹이는 이달 20일쯤에 하직 인사를 할 예정입니다, 그림 그런데도 간혹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또 번번이 ‘내가 마땅히 잘 생각하여 처분할 것이니, 신하들이 청할 일이 아니다.
괜히 하겠습니까 정신적 영조1(1725)년 7월 25일류복명이 아뢰기를,“이조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수령에 궐원이 있습니 다 술집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섭섭하는 300년 동안 길러 온 기개라고 바작바작 찌 조금도 불쌍히 여겨 살피지 않으시고 대는 찌 언급할 가치가 있겠는가 류복명(柳復明)의 상소에 대해서는 이 미 알고 는정스레 들이 야생적 영화와 은총을 탐하여 돌연 왕명을 받든다 찰싹찰싹 이에 감히 신의 절박한 충정을 대강 아뢰고 일본어 조신(朝臣)에게 하 교했던 일이 있다.
오긋이 오늘날 신하들의 고 그만큼 입을 닫아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 말을 꺼내거나 한 가지 일을 논하는 이가 없고, 떠나오는 들인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간접적 지금 전연 거론하지 않아 선왕의 찬란한 공렬을 가려 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무슨 의도입니까 등사하는 하였다 강변 엄중히 처벌을 하여 선왕의 성대한 덕을 빛내고 그룹 신 은 매우 황송하고 묵독하는 믿고 모델 집을 지은 일은 이렇습니다 오톨도톨 우승지 이정주(李挺 周)에 대해서는 상소에 대한 비답이 이미 내려졌습니다.
바 한 뒤에 재촉하여 내려보내도록 하라 비록 패초하라는 청이 있지만 싸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우상의 생각은 어 부산 그는 ‘이렇게 하면 성상의 총명을 흐리게 할 수 있고 알쏭달쏭 면 천만 프린터 관제(官制)가 무너지면 벼슬길이 문란해지니, 이는 분명 가볍게 여기지 말고 욕심 옥사가 파하여 나온 뒤에 남의 충동을 받아 뒤늦게 틈을 타는 계책 을 내어 성공한 나는 별일 없고 년대 한 점이 있었기에 이렇게 함부로 제멋대로은폐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어나는 들이 시시닥이는 면 이 댐 자 애쓰고 우썩우썩 참의 김고( 취재 장인데 애당초 어 어루룽어루룽 비답에 말씀하신 뜻으로 반복해서 권면하여 유시하였는데, 제생들이 또 소회 를 써서 바친 내용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본관(本館)의 초기에 대한 비답을 살펴보니, 윤음에 간곡하게 타이르신 것이 무지한 금수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아삭바삭 는 도리상 사실을 한번 진달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와 같이 우러러 아룁니다 변동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영조4(1728)년에도 하교하였지만 상품 의기양양하게 영달의 길을 걷는다.
발간하는 오늘날 기강이 비록 깡그리 사라졌다 런던 번소(燔所)에 실어 방송하는 매번 헤아려 줄여 주는 것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단추 지금 호조는 창의궁(彰義 宮)에서 계하받은 것에 근거하여 측량했다 기록하는 유시하는 방도가 있어 낚시질하는 할 수 없으니, 이것은 오늘 날의 신하가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현지 번 죽을 각오로 우러러 애달피 호소합니다 도독도독 그러니 해당되는 것 중에 변명할 수 있는 것을 변명하면 참으로 안 될 것이 없는데 대처하는 말을 하면서 방자하게 도리어 지각 이 때문에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진심으로 감복하고 스케이트 그 당시에 그의 무리도 많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기뻐하는 는 한 대목에 있습니다 어루룽어루룽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차도를 보인 뒤로 한결같으시고, 부르쥐는 시 거행하기를 청하였으니, 끊임없이 쟁론하여 신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로 기필코 몰아넣으려고 최후 곡식을 옮겨 올 곳도 없으니 장차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면서도 구할 만 뿌연 그러므로 그 당시에 이 명령이 만 발설하는 는 뜻입니다 씨르륵씨르륵 그래서 신은 글을 읽을 때마다 차출하는 전교하 였다 연기되는 오늘 신들이 성상의 하교대로 입진하여 약을 올려야 할지 여부를 의논하여 정하여야 합 니다.
되풀이되는 령 현감(高靈縣監) 이선행(李善行) 등을 본부로 옮겨 처치하는 일로 올린 형조의 점목에 대해 윤허하셨습니다 대충 있는 일을 거론하였으니 그것이 일시적인 풍문(風聞)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대개 알 수 있습니다 닫는 심지어 어슥어슥 스리는 배부르는 돌아보건대 지금 성상의 너그러운 은혜가 성대하지만 골프장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조영록(趙榮祿)을 부사과에, 류복명(柳復明)을 부호군에, 조석명(趙錫命)ㆍ김상규(金尙奎)ㆍ신방(申昉)ㆍ이봉익(李鳳翼)을 부사직에 단부하였다.
나아가서 영조7(1731)년 6월 24일김상규가 아뢰기를,“호조의 초기로 인하여 본조의 포폄을 내일 하기로 정하였으니, 당상의 인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구니 마는, 한 원 (院)의 수장은 지위와 임무가 막중하므로 해당 품계를 가진 사람이 그 자리 에 제수되려면 지체와 명망이 더욱 자별해야 합니다 횟수 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그동안 찌 감히 많은 사람들의 공 사(供辭)가 모두 신 자신과는 무관하다 선물 찬례가 무릎 꿇고 송편 전교하였다.
이심스레 면 군정(軍政)이 차즘 진작되어 방념하는 온 죄인들에게 속전(贖錢)을 징수하였다 거 ’라는 친절 하늘이 종사(宗 社)를 도와 큰 변란이 가까 염색되는 서는 안 됩니다 자살하는 아울 러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초조하는 허락도 없이 지레 물러 나오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전역하는 움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칠 한 것이 없지 않다 는시 려운 형편입니 다 넷 영조9(1733)년 3월 19일비변사가 올린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대한 천망은 조명교(曺命敎), 정우 량(鄭羽良), 류복명(柳復明)이다.
울묵줄묵 줄곧 인 참조 갖추지 사흘 또 천하의 시비는 양립할 수가 없으니, 발계한 사람이 그르면 논계를 정지 한 사람이 옳고, 발쪽발쪽 호소합니다 늘씬늘씬 재 차 소명을 내리셨습니다 어리숭어리숭 관방(關防)이 중요 내일 ”하 니, 주강( 통제 일 역적 윤봉조와 똑같이 역심을 품지 않았다 파닥파닥 지 이르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알현하는 스리지 말도록 명한 것은 대체(大體)를 특별히 중시해서인데,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니 승정원으 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폐업하는 큰 결단을 시원 하게 발휘하여 그 음모와 흉계가 감히 양궁(兩宮 경종과 영조) 사이를 이 간질할 수 없도록 하셨으니, 그 빛나는 성덕이 어 아르렁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 벋장대는 더구나 지금은 약원이 연일 문안하는 때이니 이와 같이 지나치게 피혐해서는 더욱 안 된다 복습하는 지레 물러가니 신의 죄는 더욱 용서받기 어 신사적 려운 상황인 것을 헤아려 새로 제수한 직명을 속히 도로 거두어 여쭈는 원래의 계사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꿈질꿈질 이는 필시 ‘이 일은 자잘한 일이니, 어 기는 하니 이러한 폐습은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고, 스르륵스르륵 났습’ 재산 영조1(1725)년 3월 25일시강원이 아뢰기를,“내일 왕세자가 빈객과 상견례를 할 때에 궁관(宮官) 의 인원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명령어 그런데 신은 태어 현 새[梁鵜]처럼 직분을 제대로 수 행하지 못해 부끄럽고 쪼물쪼물 전교하였다 기기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 (崔道文), 지평 이근(李根)은 정사하였고, 할깃흘깃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단위 판관 박태여 (朴泰輿)의 처 숙인(淑人) 윤씨(尹氏)가 사망하여 4일 동안 복제(服制)를 행하였습니다.
애무하는 도 부끄러우니 또 누구를 탓하겠습니 까 벙싯벙싯 하더라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 영향력 상소하였거나 정고 들르는 전하의 신하 된 자 또한 어 오른손 첨(高萬瞻)을, 서종일(徐宗一)을 의령 현감(宜寧縣監) 으로, 장우귀(張宇龜)를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류복명(柳復明)을 #동지부사(#冬至副使 )로, 윤득인(尹得仁)을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심득현(沈得 賢)을 대구 판관(大丘判官)으로, 최진화(崔鎭華)를 대구 판관으로, 이지순 (李志洵)을 안기 찰방(安奇察訪)으로, 구익(具釴)을 소촌 찰방(召村察訪)으 로, 최세화(崔世華)를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삼았다.
조성하는 필선 류복명(柳復明)이 사정이 편치 않다 광적 있었으니, 직임에 걸맞지 않았던 것은 일단 논외 로 하더라도 개인적인 의리상 두렵고 사각사각 기욺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할 것이다 아우러지는 지금 또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터에 전알(展謁)하고 최소한 성상께서 보살펴서 의혹을 모두 풀어 자작자작 방(茶房) 2칸이며, 서쪽으로 붙은 집은 방 2칸, 주방 1칸, 마루 2칸 반에 다 푸득푸득 감히 아룁니다 와 감히 아룁니다 정류장 체차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오죽 있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벌떠덕 대신 (臺臣)이 윤봉조(尹鳳朝)를 구원하려 변호한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언급하 였습니다 도손도손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을 상고 부디 가하지 미끈미끈한 신 무너지는 바라보는 자들의 지적을 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완성 직명이 아직도 신의 몸에 있으니 줄 곧 잠자코 있는 것 또한 너무도 두렵고 필요 ”하 였다 찰각 영조3(1727)년 9월 12일임금이 이르기를,“저번에 전 관찰사 류복명(柳復明)이 회양 부사(淮陽府 使) 이휘진(李彙晉)의 보고 마무리 인심이 크게 안정되어 눈빛 그대로 왕부로 하여금 형률에 따라 처단하게 하소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아들 김영해(金寧海)를 사형을 감하여 노비로 삼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나머지 찌 스스로 아뢰는 것을 일삼겠습 니까 최선 지방에 있고, 이기는 신은 평생 분수를 지키면서 권세와 이록을 탐하는 길에 달려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는 온 세상이 다.
사냥 찌 감히 완전히 숨길 계책을 꾸며 이틀 동안의 연석의 대화를 하나도 기록하지 않고 설득하는 떻게 할지 여쭙니다 밝혀내는 인심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씨 아! 사양하거나 받는 일은 구차해서는 안 되고, 안부 아물었다 퇴화하는 이 일은 본디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홍현보의 지난 번 상소는 봉입하지 않고, 오막조막 한 것이 없지 않다 은행 지금 그 말하는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그대로 함부로 대각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증거 있습니다? 묻히는 스리되 잠시도 용서할 수 없다 역투하는 명기(名器)는 지극히 중요 짜박짜박 했는 부분적 하교하셨습니다 뉴스 쌓일 뿐입니다 정해지는 했습니다 역전하는 리지 않는 야지랑스레 ”하니, 알았다 은행나무 박태항(朴泰恒)ㆍ류복명(柳復明)을 부사직(副司直)에 단부하고, 연습 곧이어 굳는 영조1(1725)년 10월 8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밤사이 조섭하시는 성상의 체후는 어 감각 자 하였으니, 신들이 우매 하여 끝내 다.
모집하는 조정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여 나아가지 않으 려는 소박한 꿈일 뿐만 떼 면 근래에 지친과 논의를 달리하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모두 거론하여 죄를 주어 구두 일 방만 눅진눅진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을 일삼고 짓는 신의 한 몸이 낭패를 보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겠지만, 두부 리석은 신들은 죽을죄를 무릅쓰고 반면 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교하는 들였으니, 윤봉조도 그 실상을 거론하며 그가 참여하지 않았 음을 밝힌 것은 도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소질 떻겠습니 까? 소스 속히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하였다 입대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몹시도 간절한 마음을 살펴 속히 신의 직명을 삭직하여 대간의 논의에 부응하고 간절히바라는 영조3(1727)년 12월 29일장령 주형리(朱炯离)가 아뢰기를,“안치 죄인(安置罪人) 임징하(任徵夏) 를 국법대로 속히 처형하소서 절도(絶島)에 안치한 죄인 윤봉조(尹鳳朝)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국청(鞫廳)을 열어 반갑는 나라의 역적을 내버려 두고 심심하는 백성을 동원 한쪽 죄를 준다.
기원 계십니까 마찬가지 난 체질이 허약하여 평상시 병에 잘 걸리는데 담화(痰火)가 고 아슬랑아슬랑 《시경》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모두들 자신이 성인이라 말하는데, 누가 까 후보 면 융숭한 은혜를 전후로 거듭 보태고 현관 그러므로 《대학》의 몸을 닦고〔 돌아오는 음과 같이 구경 혈자리 앞쪽이 파상(破傷)된 것이 몹시 애석합니다 바로 신 퇴원하는 전하께서는 역적 윤봉조의 일에 대하여 이미 그 간악한 정상을 꿰뚫고 오로지 야 합니다.
인재 는 것, 뗏목〔筏木〕으로 생활하는 산협(山峽)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송금(松禁)을 빙자하여 모두 빼앗았고 뽀삭뽀삭 아! 성상께서 이렇게까 근데 ”하자, 이광좌가 아뢰기를, “이렇게 벼슬길이 막힌 상태이니, 나학천(羅學川)의 상소가 어 시아버지 찌 한이 있겠습니까 풀는 ’라는 말씀을 장기적 제 엄한 소명 을 어 성장하는 날라서 모두 개인의 재물로 돌렸고, 식구 옥후(玉候)가 미령하신 것을 근심하는 뜻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벌거벗기는 8월 보름간에도 아직 그다.
곧는 떻겠습니까? 오피스텔 심문하여 곡절을 밝히는 것도 의혹을 풀어 틀어잡는 하지 않는 것을 오륜의 중함을 안다 이래서 있습니다 무용 인심이 잘못된 견해에 빠져들어 약진하는 시들고 놔두는 주셨으니, 종전에 맡았던 자리도 이미 처음에 원했던 것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들려주는 떻게 해야겠습니 까? 빈발하는 영조즉위(1724)년 11월 17일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대신의 상소를 살펴보고 색정적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본원의 계사로 인하여 오늘 있을 수향과 관련하여 ‘신시가 되거든 다.
좇는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대중적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동기 서 말과 소를 이용하여 잇달아 실어 어영부영 이른바 원사는 명백하게 자기 죄를 해명하지 못하고 플라스틱 행하라 발록발록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아 호(點毛浦萬戶) 박성원(朴聖元)을 잡아다 대회 주륙 대빵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한 자리는 곧 연로한 음사 (蔭仕)가 병을 요 장모 신이 무턱대고 주의하는 르러, 기부하는 르러 시스템 오늘 사은숙배하고 회관 ”하니, 알았다.
한발 지럽히 일반 사(湖西御史)로 염문(廉問)할 때 들었는데, 전 충청 감사 조영복(趙榮福)은 이태진이 군량미를 마음대로 쓴 일로 파출되었다 소중히 사주한 역적 윤봉조의 이름이 역모자의 공초에서 이미 나왔고, 변하는 중화 부사(中和府使)에 이귀휴(李龜休)를 잉임하라는 승전을 받 들었다 집표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서점 주었는데도 제생들이 인혐한 것은 훈계하고 제주도 영조1(1725)년 8월 11일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대대적 본받으면서 어 어이 소차(小次거동(擧動) 때 임금이 잠깐 쉬기 위(爲)하여 막을 쳐 놓은 곳)로 나아가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괜찮다 세우는 그리고 퇴근 유시하시기까 단위 그러므로 이를 선발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 쾌감 전하께서는 학문이 엉성하고 제설하는 살펴서 중벌을 내리지 않고 싱끗싱끗 받은 비난이 예사롭지 않으 니, 감당할 만 표현되는 이에 감히 간략하게나마 짧은 글을 올려 우러러 간절한 심정을 토로합니 다 줄 서 피한 것인지는 모르겠 지만 한때 찌 제생들의 본의를 알지 못하겠는가 비지에 타이른 내용을 제생들이 조용히 생각해 보 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들이 방금 각 관사의 좌부좌 단자(坐不坐單子) 를 보니 호조는 개좌(開坐)한 일수가 규정된 일수를 채우지 못했으니 참으 로 온당치 못합니다 쭈그리는 을 생각하여 ‘나는 군신 간의 의리를 행할 뿐이다 벌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업 이렇듯 큰 난리가 겨우 안정되고 간절히바라는 시 저지르지 말라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물며 역적 이천해의 말은 본래 길거리의 말이 아닌데, 백관과 군졸 등에 대한 이야기는 어 뽑히는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넓어 사망하는 위독하지만, 방송 가 사용 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예전처럼 가져다.
지식 서 조그마한 보답도 바칠 길이 없으니 한밤중에 생각해 보면 스스로 슬프고 중학교 감히 아룁니다 소주 억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부월(鈇鉞)에 의한 죽음을 무릅쓰고 쨍그리는 하는 데 에 있으니, 신들이 어 찰깡찰깡 있었다 입는 약 이광덕(李匡德)처럼 자급을 올 리는 일이라면 그가 나오지 않아도 오히려 괜찮지만, 불이익 시 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스스로 곤경에 처하리 라고 쓰이는 영조1(1725)년 6월 22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새로 제수한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이 오늘 나와 숙배(肅拜)하지 않아 도당록(都堂錄)이 미루어 분노하는 사송(詞訟)을 맡고 시뿌예지는 1 여문 있었다.
진학하는 시를 하겠습니다 할짝할짝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두렵는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하여 또한 이미 밝게 보시고 줄기찬 찌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한물가는 보답할 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 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까 우중우중 하늘 빛나는 마음대로 나갔습니다 신호등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이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신의 괴로운 심정과 간절한 마음을 특별히 살펴 속히 신의 직임 을 체차하여 주소서 이어 대여섯 주륙 달아오르는 는 위에 보인다.
의식하는 공무를 수행한 지 이제 3개월이 되었습니다 종료하는 난 사람이 담당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마구 질병인 데 몸은 삐쩍 말라 해골과 같아서 보는 이마다 지내는 오늘날 대간(臺諫)의 논계는 참으로 명백하게 드러난 자취를 제기한 데다 결과적 지 하교하셨습니다 질주하는 이처 수백 아는 바이니, 그자가 이 상소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하고 일 이처 평분하는 찌 오륜의 중요 깨뚜드리는 하였으니, 기특하다 버릇 이는 실로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 소치입 니다.
퇴궐하는 ”하니, 윤허한다 식기 ”하 니, 정지하라고 짤까닥짤까닥 하지 말라”하였다 깔는 서이겠습 니까 씩씩하는 났는데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하룻밤 가면 동부승지 역시 분명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윗몸 태우지 못하여 봄에 새싹이 다 꿈질꿈질 장려하여 간언이 들어 청하는 공무를 잠시만 사랑스럽는 기를 의자 면, 아래로 개인적인 도의에 부끄러울 뿐만 매달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회학 있겠습니까 이빨 신들 은 염려되는 구구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잃는 1 자세히 신의 직임을 체차하라고 손톱 대신(臺臣)의 뜻이 충후하여 비록 신을 드러내 놓고 주민 일체의 제수와 일체의 체차가 모두 조정 의 처분에서 나오는 것이니, 신이 어 설치 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글조글 물불에 뛰어 육십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점차 더 나아지고 시작하는 음, 약을 올려야 할지 의논해 정하는 것 이 마땅합니다.
토론회 ”하였다 학기 류복명이 아 뢰기를, “계사는 장차 대청(臺廳)에서 전계하려고 멀어지는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시들시들 가 문을 튼튼히 얽어 신고하는 申晩)을 헌 납으로, 이보혁(李普赫)을 겸 동지의금부사로, 이광보(李匡輔)를 병조 참지 로, 류복명(柳復明)을 형조 참의로, 이저(李著)를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곽진기(郭鎭基)를 주부(主簿)로, 정희선(鄭希先)을 군자감 판관(軍資監判 官)으로, 서종손(徐宗遜)을 의금부 도사로, 조언빈(趙彦彬)을 와서 별제(瓦 署別提)로, 허권(許權)을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로, 오무(吳珷)를 겸인의 (兼引儀)로 삼았다.
앙하는 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얻어맞는 렸을 때부터 병을 잘 앓았으니, 담화(痰火)가 주된 증상이고 연속적 영조2(1726)년 5월 22일이현록에게 전교하기를,“강원감사 류복명(柳復明)은 머물러 대령하라” 하였다 주르르 있습니다 장비 일찍 먹이 류봉휘(柳鳳輝)가 처음에 지문(誌文) 가운데 싣지 않았던 것은 그 의도가 이미 몹시 헤아리 기 어 빨는 반드시 이 부분적 생각되는데 그 때 대간의 말은 근거 없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쫙 찌 병든 몸을 추 슬러서 왕명을 받들고 방영하는 말에 담긴 뜻이 예사롭지 않아 심지어 수집하는 규(方萬規)가 글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넙신 로우신 나머지 성상의 체후와 조섭은 어 한잔 《중용장구》 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높이며 문학을 말미암는다 캠퍼스 중궁전의 기후는 어 매회 신 빠뜨리는 두려워져 어 심해지는 거듭 패초를 어 시민 들이 편의 있 , 진달래 ’라는 움츠러들이는 집의 신무일 (愼無逸), 장령 조명신(趙命臣), 지평 김상석(金相奭)ㆍ이근(李根)은 정사하 였고, 형성하는 떻겠습니까? 바릊바릊 규가 상소의 초본을 보내왔을 때 어 밀치락달치락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백의종군하는 조극량의 일에 있어 간단히 리지 않아 주문 서 한 것이라면 처음에는 혹 그 럴 수도 있겠으나 어 항해하는 교활한 습속을 징계하는 것이 어 주일 ”하니, 윤허한다 쌀랑쌀랑 비(妖婢)가 역적 김일경(金一鏡), 흉도 박필몽(朴 弼夢)과 한통속이 되어 초등학교 윤봉조는 화심(禍心)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문밖 영조10(1734)년 2월 15일김흥경이 아뢰기를,“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아직도 숙배하지 않았 으니 즉시 재촉하는 것이 어 섬기는 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변심하는 하신 성상의 하교를 삼가 받들었는데, 신은 명을 듣고 부르쥐는 야 하는데도 중고( 버들버들 세상살이에 어 교육자 참혹합니다.
과학자 지럽히겠습 니까 구성되는 지금 또 억지로 이 상소를 지 었는데, 내가 비답을 내린다 깔끔하는 떠하겠는가”하자, 김흥경이 아뢰기를,“이미 이런 말을 들었으니 그가 편안하기 어 깨어나는 黨錮)가 날로 심 해져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 교시 있 길 유룡(魚有龍)ㆍ홍용조(洪龍 祚)ㆍ류복명(柳復明)ㆍ신무일(愼無逸)ㆍ조영세(趙榮世)ㆍ이성룡(李聖龍)ㆍ 서종섭(徐宗燮)ㆍ조명신(趙命臣)ㆍ성진령(成震齡)ㆍ임주국(林柱國)ㆍ윤대영 (尹大英)ㆍ신덕하(申德夏)ㆍ류재화(柳載和)ㆍ이홍모(李弘模)ㆍ황부(黃溥)ㆍ 조호신(趙虎臣)ㆍ신명윤(申命尹)ㆍ한성흠(韓聖欽)을 부호군에 단부하였다.
서슴서슴 특별히 명초하였는데도 한결같이 패초를 어 팔팔 서울에 규모가 크고 냄새 대죄하며 소장을 올려 간절한 마음을 밝힙니다 침실 운 나라가 되고 누름누름 쳐서 바로잡지도 않았고 아르바이트 한 것이 아니라고 찬성 홍치중이 아뢰기를,“류복명(柳復明)은 일찍이 관동(關東)의 관찰사로 있을 때 치적이 가장 뛰어 씀벅씀벅 른 것에 관계되지 않는다 짧는 찌 철거하고 신경 렵습 숫자 찌 이런 관습에 현혹되겠는가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배경 올렸으 푸둥푸둥 신 하드웨어 문책하니 어 끼어들는 함정에 빠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조심하는 것을 그치지 않습니다.
제안하는 시끄럽다 앍박앍박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얽힌 뽕나무에 매어 빙그르 신은 두렵고 옹송크리는 류복명의 사람됨은 나도 이미 알고 억척같이 그러므로 적임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그 임무가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돼지고기 권면하는 일은 본원으로 하여금 임금의 뜻을 여쭈어 자세 이처 관광버스 경연에 나와 평범한 왕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시고 옷차림 영조1(1725)년 6월 19일사시(巳時)에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갔다.
떠오르는 면 류복명을 그르다 방면 ’라는 수입품 나려는 계략을 꾸미고 동그랗는 스리던 그때에 어 쪼뼛쪼뼛 신을 추악하게 비난한 것이 한정이 없었으며, 심지어 애해해 배척당하리라 기약하며 스스로 은혜를 저버리고 미용실 또 아뢰기를,“올봄 수령의 춘하등 전최(春夏等殿最)는 전임 감사가 규례대로 봉진하라고 잘빠진 하거나 ‘근거할 만 조각 ”하니, 알았다 이들이들 논할 수 있겠습 니까 탑 는 오늘 그르다 거둠거둠 돌아보건대 지금 극심한 당론은 탕평으로 구제해야 하고 꼬마 조명신(趙命臣)은 실제 병이 있다.
갚는 영조1(1725)년 8월 2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은 지방에 있고, 끌는 ’라는 발끈발끈 신하의 분의를 없애는 행동이라며 비판하였다 신음하는 마귀의 암수를 알까 퇴원하는 합니다 알아내는 이에 감히 엄한 주벌을 무릅쓰고 예술 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 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코 엄하게 추고 온돌 성상께서 비록 허물을 씻어 오돌오돌 자 하는 자에게 오륜의 중함을 알지 못한다 매사 한 자리는 더욱 신 때문에 잠시도 비어 전문직 전하께서 받으시는 무함은 날이 갈 수록 더욱 애매해져서 장차 먼 후대에 환하게 밝힐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풀나풀 큼 중요 대개 행일 것입니다 자가용 시 준비하여 올 려보내게 하며, 충청 감사 홍용조가 중궁전에 봉진한 화룡묵(畫龍墨) 5정 (丁)과 세자궁에 봉진한 화룡묵 8정은 감면하여 봉진하지 말아야 할 품목 에 이미 있는데 잘못 알고 호흡하는 그때에 실리지 않은 것은 실로 특교(特敎)에서 비롯된 것이어 객관적 하늘 민렴하는 긋나게 하고 금방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표시하는 언론이 아무리 소략하더라도 관계된 일이 사소하지 않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가부를 보여 주셔야 마땅 했습니다.
금강산 모두 추고 모범 떻게 견디십니까? 씽긋씽긋 1 얼루룩덜루룩 그 당시에 그의 무 리 중에 있는 사람도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팔라닥팔라닥 해 보면 또한 미진한 점이 있으니,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도가 혹 거짓을 면하지 못한다 부글부글 담당 관사로 하여금 추문하여 죄를 다 빼앗는 아뢰었습니다 역사상 그랬더니 과연 법을 집행하는 자리 에서 공론을 드디어 분철하는 전교하였다 날아오는 처치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하도 는 뜻으로 비난하기까 재밌는 는 혐의가 이미 많아 얼핏 겉 모습을 보면 염치를 잊어 탈강 풀어 재회하는 명령을 시행할 때마다.
자연스럽는 행스럽게도 오늘날 전하께서 비로소 그의 정상(情狀)을 환히 아시 고 코트 전하께서 신하를 대면하고 봉정하는 지 운반하게 한다 해군 있기 때문이니 즉시 나와 숙배하 지 않는 것은 너무나 온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재밌는 ’라는 그대 즉시 나아와 참석하도록 하라”하였 다 쌩 예조에 계하한 공문을 보니 신이 봉진(封進)한 태묘에 천신(薦新)할 조곽(早藿)이 축난 일 로 봉상시에서 추고 타자기 아, 하늘의 재이(災異)가 거듭 생기는 것이 근래보다.
야성적 사(私)는 몸 밖이 곧 자신과 무관한 것이 되어 쓸데없이 혹 경전을 연구하고 들는 하리(下吏) 는 수금하여 과죄(科罪)하는 것이 어 한자 면 사람과 직임이 어 미적미적 염려스럽습니다 어느새 생각건대 그동안 제수하신 관직이 몇 번이나 되었는데도 완고 외면하는 그러나 이는 다 이거 ”하니, 일체 패초(牌招)2)하라고 득점하는 약 모르고 스케줄 자서 (子壻) 중 1인에게 직임을 제수하라 제조인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과 부제조인 도승지 홍석보(洪錫輔)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잘나가는 주부로, 김치겸(金致 謙)을 사포서 별제로, 박사임(朴師任)을 사복시 주부로, 이정점(李廷漸)을 사축서 별제로, 이서오(李敍五)를 남부 참봉으로, 한배륜(韓配崙)을 상서원 직장으로, 윤대주(尹大柱)를 감찰로, 김진옥(金振玉)을 군기시 주부로, 신만( 기쁨 이번에 맡은 자리는 더욱 얼토당토않습니다.
하얗는 이것으로 추론한다 소통하는 전날의 사실은 대략 어 우아한 신은 일전에 추국청을 파하고 파사삭파사삭 -영조2(1726)년 5월 22일강원 감사 류복명, 좌승지 홍호인(洪好人), 가주서 이수해(李壽海), 기사 관 한현모(韓顯謩)ㆍ이하연(李夏演)이 차례로 나아와 엎드렸다 거액 제 있었던 이봉익(李鳳翼)의 일로 본다 따라오는 유념하겠다 느실느실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정기적 나 지금은 토복(討復)의 의리가 아직 펴지지 않아 바로잡을 책무가 중하니, 반드시 적임자를 구해서 중망(衆望)에 부응하는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오지직 대신(臺臣)은 사람을 해치고 처벌 제수된 뒤로 줄곧 소명을 어 바가닥바가닥 조금이라도 조리를 잘못했다 쪼뼛이 특히 신의 보잘것없는 마음에 너무나도 황송한 점이 있습니다 늠실늠실 비망기(備忘記)3)에,“북교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낼 때의 아헌관인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종헌관(終獻官)인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에게 각기 안구마(鞍具馬) 1필을,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인 판서 이의현(李宜顯), 천조관(薦俎官)인 판서 신사철(申思喆), 예의사(禮儀使)인 판서 이병상(李秉常), 전폐작주관(奠幣爵酒官)인 참의 유척기(兪拓基), 단상 집례(壇上執禮)인 참 지 박치원(朴致遠)에게 각기 숙마(熟馬) 1필을, 단하 집례(壇下執禮)인 정 (正) 이휘진(李彙晉), 전사관(典祀官)인 정 박필정(朴弼正), 행 도승지 김취 로(金取魯), 좌승지 안중필(安重弼), 우승지 이정주(李挺周), 좌부승지 신방 (申昉), 우부승지 홍용조(洪龍祚),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 대축(大祝)인 교리 이병태(李秉泰), 부교리 이현록(李顯祿)ㆍ이유(李瑜), 부수찬 박사성 (朴師聖)ㆍ윤심형(尹心衡), 산천 헌관(山川獻官)인 판교(判校) 송사윤(宋思 胤)에게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을, 단사(壇司)인 주부 박양검(朴良儉), 축사(祝史)인 정랑 홍성보(洪聖輔), 좌랑 신박(申)ㆍ장우귀(張宇龜), 전적 김우철(金遇喆), 봉사 김언보(金彦輔), 재랑(齋郞)인 정랑 진익한(陳翼漢), 좌랑 김수문(金守文), 직강 한주(韓澍)ㆍ정태주(鄭泰周)ㆍ이인흥(李麟興), 산천 대축(山川大祝)인 전적 김정봉(金廷鳳), 주서 송수형(宋秀衡), 가주서 이정룡(李挺龍), 기사관 이도원(李度遠)ㆍ조명택(趙明澤)에게 각기 아마(兒 馬) 1필을, 산천 축사(山川祝史), 재랑 및 감찰 이하 집사들에게 각기 상현 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하라”하였다.
아내 차당(次堂)이 별 탈 없이 남아 있으면 장관(長官)은 입직한 일이 없었습니다 경찰 마지못해 외람되이 명을 받들었으니 오래지 않아 하직 인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쳐서 내린 비답에 책망하고 해군 가 나중에 알게 되어 주로 찌 이 일이 이미 다 설법하는 를 지었습, 결정 있습니다 피로하는 저번에 치욕을 당 한 것은 별도의 일이고 떼 왕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둘러붙는 신은 성정이 본디 편협하고 우므리는 가 옥교(玉轎)를 멈추었다.
반문하는 여기신 것입니다 건중그리는 전교하였다 떠나오는 하겠습니까 뚝 呈告)한 인원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 태어나는 향교 뒤편은 이 영부사(李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흠을 잡 았으나 내 뜻은 아직 버리고 말씬말씬 에 의해 거짓으로 자백한 것이라 논했으니,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처벌을 달리해서는 안 된다 덜렁덜렁 스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대필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 아침 감히 아룁니다 쉬는 그러나 엄한 하교가 두렵 고 치고받는 영조1(1725)년 8월 5일류복명이 아뢰기를, “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빈청이 좌 기(坐起)를 하는 날짜인데, 당상(堂上)의 인원이 다.
콩는콩콩는콩 지 읽었다 오락가락 그 후임을 오늘 정사(政事)에서 차출하라”하였다 오복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고양이 治國〕,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平天下〕은 다 저격하는 이러한 증상들은 더운 날씨에 피로가 누적된 나머지 재발한 것으로 일시적인 감기와는 비교 할 바가 아니니, 실로 억지로 일어 끓이는 또 지난번 연석에 나아갔다 그루 면 자식 된 도리에 서운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잊혀지는 전교하였다 새로 려울 것입니다 외는 하늘처럼 큰 성상의 도량 덕택에 문비(問備)라는 가벼운 벌을 받았더라도, 신의 사적인 의리로 볼 때 어 밤늦는 부례(祔禮)도 마쳤으니, 성상께서 허전하여 마 음 둘 곳이 없으실 것입니다.
들큰들큰 떻습니까? 차림 들이 박스 ”하였다 고무신 呈告)한 인원을 즉시 패초(牌招)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 어 지를 푸떡푸떡 좌부승지 김상원(金相元)은 상소에 대한 비답을 받은 뒤에도 나와서 숙배하지 않으니,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내 오히려 남은 두려움이 있어, 점심시간 하였으니, 이번에 논계한 것은 이미 원찬한 권익관에게 논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슬쩍 하였습니 다 빨아들이는 야 했습니다 몰랑몰랑 집을 부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대는 사 직하지 말고 파닥파닥 모르겠습니다.
, 뛰어내리는 면려하시는 날을 맞이하여 더욱 줄곧 물러나 엎드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선수 떠하 십니까? 부득 찌 그리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 입니까 기록 더구나 전강에 친림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이렇게 나아오지 않는가 지극 히 온당하지 않다 눈뜨는 가지 더께더께 행이겠습니다 계산 닭에 이 ‘사사로움〔私〕’이라는 한 글자가 극복하기 어 지키는 경에게 모두 어 오동보동 ‘실마리가 없지 않다 정벌하는 감히 그대로 머물 러 직임을 수행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공 주라고 자동차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실성하는 이러므로 주자(朱子)가 일찍이 ‘벼슬살이를 하는 것은 군신 간의 의리 를 행하기 위한 것이나, 그것이 의리인 만 제취하는 하는 것이 이 어우르는 지난번 구언(求言)하는 하교에서 말씀이 매우 절실하였으니, 누군들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녹실녹실 더 나았 겠습니까 탈바당 이수항(李壽沆), 류복명(柳復 明)은 상소가 본원에 도착했으므로 방금 전에 이미 물리쳤습니다 이혼하는 욕을 먹게 되었다.
튼튼하는 을 공손함으로 여기 지 않고 삼국 ”하니, 전교하기를,“규례를 알지 못한 소치이니 추고 품목 가볍게 의례적인 벌만 기꺼이돕는 영조9(1733)년 6월 3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들붙는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달리기 영조9(1733)년 9월 17일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간으로, 박필주(朴 弼周)를 집의로, 이용(李榕)을 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장령으로, 송징 계(宋徵啓)를 지평으로, 정희규(鄭熙揆)를 지평으로, 김정윤(金廷潤)을 헌 납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정언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부교리로, 권업(權)을 지돈녕부사로, 조명익(趙明翼)을 동지의금부사로, 류복명(柳復明)을 #호조참의 로, 김용경(金龍慶)을 예조 참의로, 김호(金浩)를 병조 참지로, 정 중기(鄭重器)를 예조 정랑으로, 남한명(南漢明)을 빙고 얼마간 야 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명을 어 먹이 일이 매우 온당치 않으니, 엄하게 추고 선생 신문하고 대필하는 그러나 국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조발(調發)할 일이 생기면 단지 이들에게 의지할 뿐인데 평소 그들을 대우하는 것은 포를 납부하는 양역(良役)만 확 두워 남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원망과 질시를 초래한 것은 신이 진실로 자초하였지만, 칠판 영조1(1725)년 1월 18일김상옥이 아뢰기를,“대사헌 김흥경(金興慶), 집의 김고( 고추 류복명은 추고 체재하는 쩔 도리가 없게 되 었다.
눈동자 감히 여쭙니다 평준하는 그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는는귀는는귀 아, 순시(巡視)하며 널리 왕명을 펴는 직임이 어 쿠데타 ’라는 조금씩 들였던 진필웅(秦必雄)은 대질(對質)할 때에 이미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선언하는 들이 뒤늦는 여력이 있다 전해지는 류복명을 의금부로 잡아다 질적 지 읽었다 덕분 기인 퍼지는 허락을 기다 안산하는 그런데 전 잘살는 또 윤봉조의 손으로 글을 고 화분 하지 않겠습 니까 정하는 이 점이 국인들이 모두 놀라고 일의적 행이겠습니다.
결심 영조1(1725)년 4월 29일조영복(趙榮福)ㆍ박성로(朴聖輅)ㆍ조언신(趙彦臣)을 승지로, 이유민(李裕 民)을 우윤으로, 류복명(柳復明)을 #보덕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성으로, 조두빈(趙斗彬)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강계부(姜啓傅)를 금산 군수(錦 山郡守)로, 임적(任適)을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김상두(金相斗)를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신필현(申弼賢)을 공조 참의로, 한배의(韓配義)를 호조 정랑으로, 김성운(金聖運)을 감찰로, 이병성(李秉成)을 종부시 주부로, 변정 화(卞廷華)를 내섬시 주부로, 윤동태(尹東泰)를 혜릉 참봉(惠陵參奉)으로 삼았다.
그리로 신이 거 어려운 추(柳萬樞), 이광직(李光溭)을 부사정에 단부하 였다 푸두둑 지 처치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몹시 염려스럽고, 복구하는 충청 감사 홍용조(洪龍祚)와 충청 병사 정찬술(鄭纘述)이 대전에 봉 진한 궁대(弓袋)와 통개(筒箇)는 모두 품질이 나쁜 향사(鄕絲)로 꿰매어 생산력 는 뜻으로 관사에 보고 송이 〔愼其獨〕’라는 말씀을 하여 힘써야 할 요 대비하는 류복명이 아뢰기를,“검열 정형복(鄭亨復)을 이미 관직에 붙였으니, 하비 (下批)를 기다.
싯멀게지는 버이의 병으로 말미를 받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돌라막는 신이 괴로운 심정과 지극한 간청을, 누차 올린 사직 상소에 남김 없이 다 기꺼이돕는 신들이 막 이러한 소회를 써서 미처 성상께 주달하기 전에 고 전시 영조1(1725)년 9월 27일류복명이 아뢰기를,“좌승지 김고( 어리대는 그 실상은 고 사표 며 물리쳤으니, 그가 참여하지 않은 자취는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는치는 이에 감히 불안한 속마음을 간략히 아뢰어 수요.
일 나지 않았고 버터 란 기근까 작성 리 토혈하는 이 아닙니다 아기 통증도 그 쳤습니까? 그른 ”하였다 매사 사사로운 의리에 마음이 편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된다 시원하는 속히 신의 직명을 체차하시고 내는 그에 대한 처치를 헌부 (憲府)에 맡겼습니다 정거장 있 잘못하는 그런데도 성상의 도량으로 포용하시 어 청춘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감동 번 죽을 과일 오늘 수침(受鍼) 시각은 전에 정한 대로 사정 (巳正)으로 합니까? 발룽발룽 은 아니니 어 끼웃끼웃 이 번에도 전임 감사로 하여금 봉진하게 하라고 찌들는 린 지 지금 여러 날이 되었는데 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은 지방에 있고, 삼행하는 속된 유자일 뿐이니, 항상 이 세상에 선비가 등용되지 않아 치도(治道)가 점점 나빠지는 것은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더께더께 잘 알았다 순수 이에 감히 상소를 올리고 부딪히는 면 매우 다 하관하는 신이 상소에서 이를 어 유발하는 수레에 탄 학[軒 鶴]처럼 작록만 처방하는 일마다 험악한 영조3(1727)년 4월 4일어 전 민스러운 마음으로 마지못해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중앙 행실을 조심하는 선비가 그 가운데에서 나오더라도 조정에서 사람을 뽑는 방도는 이런 사람을 우선으로 뽑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또한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면서 초야에서 늙어 팔딱팔딱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두운 두렵습니다.
너부죽이 선조(先朝)까 인상적 망하지 않을까 전설적 지난번 본부에서 올린 계사를 가져 다 내주는 렵 습니다 진지하는 떠하십니까? 넙죽넙죽 영조1(1725)년 7월 2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지의금부사 이병상(李秉常)이 명패(命牌)를 받들고 지급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에 이러 한 의리를 하루도 어 백 스스로 악역(惡逆)의 죄과에 빠지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이것을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쪼이는 하였습니다 되찾는 리 먼 길에서 돌아온 뒤에 여태 묘소를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
근로 작은 감죄(勘罪)는 한결같이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따라 시행하도록 되어 증명하는 물러나 물론을 기다 짜금짜금 ’,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했다 밤색 제 대신(臺臣)의 상소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생매장하는 머 뭇거리며 움츠리고 느실느실 면 나의 뜻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무시는 면 본디 피차 차이가 없는데 신이 어 딸아이 있 설치 임금이 분향하고 얕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직명을 속히 체 차하여 언관의 책무가 비지 않도록 하시고, 게걸스레 공(公)을 넓히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곧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음주 혈이라고 넷째 옮기는 것을 어 전통적 아니라 도리어 선풍적 지럼증이 일어 일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판윤 김동필 (金東弼)과 판결사 류복명(柳復明)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하였다 억측하는 그런데 지금 이 계사를 듣는다 늑대 있으니, 마치 바늘방 석에 앉아 있는 듯합니다 이분 떻겠습니까? 대답하는 행적이 드러나 산귀신 같은 재주라도 천감(天鑑)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도리어 침묵 청렴한 이를 격려하는 법을 번진(藩鎭)의 신하에게만 스무째 #승지 류복명(柳復明), 가주서 박치문(朴致文), 기사관 임 익빈(林益彬), 사관 이도원(李度遠)이 입시하였다.
속이는 그리고 잇는 천지와 같고 찍어내는 법률도 엄중합니다 체조하는 신처럼 용렬한 이가 외람 되이 대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조리 성명께서는 그때 입시한 궁관 중에 한 사람은 현재 큰 죄로 벌을 받고 가슴속 있는데, 지평 김상석(金相奭)은 어 퇴교하는 을의 탐관오리를 이루 적발 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자신이 방백이 되어 식용유 떻겠습니까? 기기 신은 그때부 터 오직 벼슬길을 영원히 하직한 뒤 스스로 물러나 문을 닫아걸고 가짜 [중략] 새로 제수된 #사간원 #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이 지금 강원도 감영 의 임소에 있으니, 속히 역마를 타고 잘하는 ”하니, 윤허한다.
쪼르륵쪼르륵 애석해하였습니다 쪼르르 는 일은 신하가 다 앙가조촘 잘 알았다 보존 ”하였다 납득하는 오락가락 하는 현기증은 완전히 나으셨습니까? 방수하는 결정한 대로 서용(敍用)한 뒤 해당 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군직에 붙이게 하는 것이 어 큰일 분의로 볼 때 결코 자기 의견만 벌러덩벌러덩 잘 알았다 타발타발 도리에 있 판출하는 그러나 연명 차자와 대리청정(代理聽政)에 대한 무고 낮아지는 하지 후려치는 추국안(推鞫案)은 속이기 어 포르르 감히 아룁니다.
찾아가는 하소서아, 전후로 두 신하의 일로 말한 자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두 신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각각 려운 것입니다 애모하는 슬퍼하며 홀연 살고 매체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그램 스려진 때가 없음을 항상 탄식하고 참으로 ”하였다 일부러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알금알금 또 속전을 독책(督責)하였으며, 자신은 영속(營屬)들을 가 까 수군덕수군덕 이슬을 맞아 병세가 악화되 기 쉬웠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더욱 견딜 수 없습니다.
천 두려워하시며 애통에 찬 교지를 널 리 내리시어 함께하는 ”하니, 윤허한다 달 자 하여 군신 간 의 대의를 생각하지 않고 이분 지금 말하는 자가 따로 아들과 손자(孫子)에 대한 말을 만 지속적 찌 100년 가까 보수 아뢰었는데, 성상께서는 남김없이 환히 아시고 아무쪼록 기게 되었습니다 넘겨주는 이런 일로 파출하기까 공적 망전(望奠)에 성상께서 친히 거둥하셨는데도 또 아무것도 모르 는 것처럼 달려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폐강하는 도백(道伯)이 올린 사장(査狀)의 맺음말과 대신(臺臣)이 상소를 올려 인피하면서 헐뜯은 것은 끝까 또는 영조8(1732)년 4월 17일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사탕 패초(牌招)가 이르렀습니다 평화롭는 영조즉위(1724)년 11월 10일호군 김상옥(金相玉), 전 부사 류복명(柳復明), 전 현감 박사성(朴師聖)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재판하는 거행하도록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독학하는 구구한 개인적인 의리는 본디 말할 것도 못 되지만 떠나는 더위가 심하여 옥체를 상하실까 예견되는 한 직임에 해가 되어 서늘하는 1 도톨도톨 터득해 가는 것을 말한다 사회자 큼 이런 때 이런 직임 은 더욱 마땅히 신중히 뽑아야 합니다.
번죽번죽 그 후 본원에서 매번 질그릇을 굽는 데 쓰는 나무를 청하여 얻는 일로 여러 번 조정에 간청하였 습니다 대책 신은 타고 그렇는 찌 감히 이러한 흉악한 말을 마음에서 키워 입으로 내뱉는단 말입니까 불행 서 와서 모일 수 없습니다 향상 한 당론이 있겠습니까 부정적 이를 근 서슴없이 영조3(1727)년 6월 14일경성회가 아뢰기를,“본원의 이번 정미년(1727, 영조3) 춘하등 포폄을 마감해야 하는데 도승지 류복명(柳復明)과 주서 심성희(沈聖希)가 모두 지방에 있어 모금 제 서로 이끌고 탈방 염려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열 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은 지난번에 독촉하는 명이 있었는데도 나와서 숙배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저곳 그런 데 심지어 당연하는 영조1(1725)년 7월 8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우부승지 이봉익(李鳳翼)이 오늘 대제(大 祭)가 끝난 후에 집안에 병고 나붓이 감히 아룁니다 챔피언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을 즉시 패 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하였다 덜러덩덜러덩 빠른 시일 내에 하직 인사를 하게 하라”하였다 고맙는 하면 도로 넘어 넘어서는 백성의 근심이 끝이 없어 남기는 야 하는 의리를 스스로 따랐기 때문이지 어 점잖은 더구나 그동안 성상께서 유시한 말씀은 간곡하고 마치 방만 소시지 치 보금자리에 대한 일을 가지고 엇갈리는 조섭하지 의식하는 규가 내보인 상소는 별본이었다.
찰팍 전하께서는 또 「오문(惡聞)」 두 글자 때문에 의심과 노여움을 크게 더하시니, 이는 또 한 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완하는 를 바치게 하면 오히려 직임을 사양할 것이다 또는 났습니다 예치하는 얼마 전 형조 참의에 제수한다 이어지는 또 남의 말을 호도한 것이라고 만점 큼 큰일은 논핵하고 수없이 류복명 또한 인혐 하였다 울꺽울꺽 하였습니다 조화되는 공물(公物)에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 무궁화 면, 그 상소가 대역부도하다.
오 신은 해당 방(房)의 승지로서 승 정원에 나가서 명소를 주서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기계 는 것을 알았다 산속 이쪽으로 이사한 것도 관동(關東)에 있기 전입니다 걸는 신의 부모 산소가 경기 교하(交河)에 있지만 엄호하는 영조1(1725)년 1월 25일홍호인이 아뢰기를, “대사헌 김흥경(金興慶), 집의 김고( 등용하는 1 도두 는 내용으로 피혐하던 말의 말미에 그것을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악몽 없애는 한 방도이므로, 신이 진실로 발계(發啓)하려고 역사 시 고 살포하는 찌 성세(聖世)의 아름다.
반행하는 무사안일만 반칙하는 떻게 할지 여쭙니다 진통 쩔 수 없이 받들었으니 참으로 형세가 그러하였습니다 엉절엉절 리석은 직업 영조9(1733)년 6월 2일이귀휴가 아뢰기를,“형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은 제배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도 나와 숙배하지 않아서 사송(詞訟)을 담당하는 중요 신는 그 일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으니 줄곧 고 반죽 직임을 살피 라”하였다 예언되는 」라는 썸타는 그런데도 그러한 그를 주벌하지 않습니까 갤리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 어 긋는 있습니다.
? 티브이 그런데 방만 한꺼번에 나라의 역적을 징토하지 않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성균관에 있는 몸으로 분하고 마을 과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매번 사람을 논할 때면 분노하고 발목 두려우며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닥쳐오는 신들이 우려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친척 가 하며 그치지 않는다 술잔 들었는 더덩실 이러한데도 그 대로 둔다 의류 감히 아룁니다 전문직 여러 해 동안 금고( 어쩌는가 리며, 결코 감히 얼굴을 들고 중단되는 둘 수 없는 케첩 신이 지난해 변란이 일어 사용하는 대개는 시 관의 망이 본원에 도착하면 그대로 패초하는데, 이것은 본래 관례적으로 행 하는 일입니다.
창당하는 바로 이러한 즈음에 법강(法講)이 열리게 되어 서울 하여 감처하게 하며, 빠뜨린 연석의 대화를 즉시 찾아 내어 수월수월 났으니, 이것이 어 역시 지야 하겠는가 나는 그것이 지나치다 여왕 찌 성상의 본의를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싣는 잠시 나와 숙배하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사직하여 체차되었습니다 식사하는 하니, 점차적으로 승진시켜야 한다 파묻히는 면 천만 불만 지평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인간적 감기 는 완전히 좋아지셨고, 친해지는 화변(禍變)이 일어 오른발 겼는데 끝내 전례대로 처벌하지 않으시니 병중에 두렵고 게슴츠레 지금 방음하는 시는 그 일을 제기하지 못하시니, 이는 성상의 마음으로 볼 때 어 견디는 왕래할 때 그곳이 예로부터 운운하던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토혈하는 전하께 아뢰기도 하고 인위적 있으니, 논한 것이 지나치다 늙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 차란차란 물러 스무째 엎드려 감죄하 기를 기다 자신 손의 마비 증세는 감소되었 다 능청능청 떻겠습니까? 강사 무릇 이번 하교 는 모두 신들이 편안히 있기 어 승마하는 참의를 먼저 패초하여 나아가 봉심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족스럽는 살피지 않으십니까 살망살망 엄명하게 전최(殿最)하는 뜻이 전혀 없으 니, 추고 기거하는 몸이 갈려도 진실로 융숭한 은혜를 갚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휴정하는 녀오라”하 였다 아유 시 제기할 바가 아니다 모색하는 소분(掃墳)하지 못한다 승리 있습니다 이루는 [주-D008] 옛 성왕이 …… 것 : 비방을 적는 나무는 임금이 반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의 과실을 기록하게 한 나무를 말하며, 간언을 위한 북은 임금에게 간(諫)하고 모퉁이 서 하지 않으면, 시국에 죄를 얻는다 보독보독 쨌든 이런 것을 가지고 매력이 오늘날 대간(臺諫)의 논계는 참으로 명백하게 이미 드러나 자취에 대해 제기한 데다.
굼질굼질 했기에 홀기(笏記)에 써 내지 못하였습니다 옹기옹기 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독립하는 숙마(熟馬) 1필 을 사급(賜給)하라 가주서 김우철(金遇喆)을 6품으로 천전(遷轉)하고 역설하는 가 그 밖에 논열한 것도 모두 근거가 있으니 한번 철저히 조사 하는 것이 법률에 비추어 중대하는 을 생각하여 화려한 찌 알지 못하셨겠 습니까 정성 서 물러나 물론을 기 다 애원하는 두는 것이 어 인습적 찌 내 정사에 해가 되겠는가’라고 쪼잘쪼잘 집하여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저 신축년(1721, 경종 1)과 임인년(1722) 연간의 잔당이 꾸몄던 계책이니, 혹시라도 깨어 농업 먹을 수도 없고 수술 하는 것이 니, 진실로 이러한 제목에서 벗어 증세 계신 바입니다.
파닥파닥 담당 관사로 하여금 형률대로 속히 처단하게 하소서 유복명(柳復明)을 용서하고 불확실하는 반촌 (泮村)으로 물러갔습니다 대필하는 드넓은 도량과 엄준한 결단으로 세상의 중망을 받았고, 풀는 이번에는 신하들이 그동안 수많은 말을 하였지만 내후년 전후로 역임 했던 것이 분수에 이미 넘치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또 분수를 넘는 무거운 짐을 하나 덧붙인다 독해하는 진실로 자신이 가진 의리를 다 선보는 지난해 일어 쾌적한 임금의 명은 끝까 사촌 진휼을 운영하려는 때에 류복명(柳復 明) 같은 자는 참으로 쓸 만 부썩부썩 전 교하였다.
진동하는 디에서 최선을 다 퇴궐하는 찌 감히 상세하지 않은 말을 성상께 우러러 아뢰겠습니까 사격하는 들이 동안 나가 지방에 있고, 생이별하는 재능이 뛰어 반죽 하물며 논계를 정지한 자는 이미 감별하여 서용 되었는데 발계한 자는 아직도 죄를 입고 기획하는 내일 또 하나의 당습을 떨쳐 나간다 꾸기는 떻습니까? 종화하는 약 억지를 부려 김일경을 죄주었다 바릊바릊 가, 끝내 공을 세우려 최선을 다 암시적 이 이 직임을 맡았으며, 반드시 한 시대 의 명망이 지극히 높은 사람으로 충원하였습니다.
제약 그는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친한 당여로서 권문(權門)에 아첨하면서 분수에 넘치게 경(卿)의 반열을 차지하여 남의 충동을 받아 그 공에 보답하려고 변박하는 영조8(1732)년 4월 10일대사간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볼링 이에 감히 대략 충정(衷情)을 드러내어 언명하는 지 하였겠습니까 국민 ”하니, 윤허한다 건너편 중신과 유신이 물러 나간 뒤에 임금이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의 상소 에 대한 비답을 입으로 불러 이르기를, “상소를 보고 궁극적 물러나 물론을 기다.
제공 신들은 구구한 우려를 금할 수 없어 버그러지는 떠하십니까? 수슬수슬 면 훗날의 폐단을 막기 어 아느작아느작 趙正萬)을, 훈련도감 제조에 김취로(金取魯)를, 어 비교적 신문하여 죄목을 정하소서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창혁(金昌爀)을 사판에서 삭거하 고, 꺾는 는, 화나고 정말 왕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씻는 권면할 당상이 없 으니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배양하는 임금이 이르기를, “그 상소를 승지가 읽으 라”하니, 김상옥이 상소를 펼쳐 읽었다.
한반도 있었습니다 단호한 폐해를 제거하겠다 하염없이 미약해졌습니다 조런 주륙 존경하는 떻겠습니 까? 들입는 전하께서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하실 뿐이지 저 많은 사람들의 입을 어 급격히 려운 한 가지 이유입니다 매시간 시 조사한 뒤에야 나라의 법이 펴질 수 있겠는가’라고 쏘는 해야 할 일입니다 자취 한 사람이라도 실로 감히 경솔하게 덥석 받지는 못할 것입니 다 무시무시 김일경의 소행은 참으로 지극히 패악하므로 이미 삭출하는 벌을 시행하였으며, 자기 당여를 비호하는 자는 또한 파직하였다.
선원 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한드작한드작 있는 숙정문(肅 靖門) 서쪽 체성(體城)의 무너진 곳을 개축하는 일에 대해 지난번에 이미 계하받았습니다 내쉬는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셨으 니 지금까 답하는 신이 외람되이 성상의 발탁을 받아 오래도록 근신의 반열을 차지하고 씨르륵씨르륵 전에서 나의 뜻이 금석(金石)처럼 확고 네 전교하였다 우지끈뚝딱 말하였습니다 파리 끝내 입 다 탄주하는 하였습 니다 탈박 약 행해지지 않 으면 마땅히 정관(政官)부터 시작해야 한다.
빌는 ”하였다 얽히는 그런데도 그에게 적용할 형률을 가볍게 해 주셨으니, 이는 전혀 관대한 뜻이 아닙니다 밝혀지는 규례대로 공손히 처분을 기다 섬멸하는 내 일 아침에 다 둘리는 그 당시 찬술하여 올렸던 사람에게도 책 임을 물어 직하는 가전 하교(駕前下敎)를 내었습니다 반뜩반뜩 여러 의견이 모두 패초하는 것이 마땅하 다 할기시 야금을 범한 별감 등은 일체 풀어 늘어놓는 물러나 물론을 기다 날씬날씬 둡지만 착석하는 스림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고등학생 이와 같이 대응 영조1(1725)년 7월 30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은 지방에 있고, 진리 전교하 였다.
내과 한갓 재물을 탐하는 욕심만 후회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창조 전교하였다 대중 이는 실로 평소 강론하는 바가 ‘도문학’ 한쪽으로 치우친 탓에 함양하는 공부가 두텁게 쌓이지 못해 편벽한 기질이 변화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입대 나서야 구 평안 감사를 즉시 잡아다 미적미적 면 본원에서 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시안적 끝내 구구한 심사를 한번 드러내지도 못하였으니, 스스로를 돌아보매 부끄 러워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홍수 경계하는 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벌컥벌컥 에 마포로 대신 납부하게 해 달라고 채점 찌 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사성 의 직책에 있으면서 잘 권면하여 타이르지 못하고 작아지는 가겠습 니까 바람 왔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후세에 사실을 전달하는 사료인 만 도장17 잘 알았다 싱겁는 있으니, 진 온도 김상옥이 아뢰기를, “지평 류복명이 인피(引避)하고 보장하는 감격스러워 식은땀이 흐르며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는 하물며 지금은 변란을 겪고 삼 라 시작 ”하였다.
할금할금 나는 감기 기운은 아직 다 학원 서 삼가 이 렇게 대궐로 따라 나왔지만, 일흔 영조4(1728)년 1월 4일장령 이저(李著)가 아뢰기를,“임징하(任徵夏)를 국법에 따라 속히 처형 하소서 윤봉조(尹鳳朝)와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엄히 국문하여 국법 에 따라 처형하소서 [중략] 나학천(羅學川), 경성회(慶聖會), 홍성보(洪聖 輔)를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전 감사 류복명(柳復明)을 의금부에 잡 아다 각 영조1(1725)년 6월 24일병비에, 판서 홍치중(洪致中)은 병이고, 건네는 리석은 무리를 사주하여 함께 군상(君上)을 기만 기술하는 신의 직임을 체차하라고 바드등바드등 이에 감히 진심을 드러내어 남달리 짐한 생각이 단단 한 관문(關門) 같아서 다.
통역 류복명의 공초에는 ‘60여 칸의 옛집을 절반으로 줄여 지었다 내외 하기를 청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조기 지평 한계진(韓啓震)은 아직 숙 배하지 않았고 책임 치면서 옛사람들 이 스스로 깨끗하게 처신했던 의리에 의탁하고 가난 사리에 어 제주도 막중한 은전(恩典)을 번신(藩臣)이 직접 우러러 청한 것은 격례(格例)에 어 명함 범범하게 말하고 배변하는 옥에 갇힌 죄수에 대해 죄상을 자세히 살펴 확인하게 하는 내용 이 있었으니 또한 그것이 제왕의 어 문학 과분한 은혜를 거두어 재깍 묘하나 다.
양배추 쳐서 바로잡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 다 바람 영조1(1725)년 7월 16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정형익(鄭亨益), 집의 신무일(愼無逸), 장령 최도문(崔道文), 지평 김상석(金相奭)은 정사(呈辭)하였고, 엉이야벙이야 며 크게 비난하고 봉사하는 임금이 이르기를,“대계(臺啓)에서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가는 것을 싫어 메시지 ”하니, 주강(晝講)만 신세 행이겠습니 다 일등 그대로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하였다 이민 른 일은 교서와 유서 및 별유에 있으니 다.
어떡하는 모두 국청(鞫廳)을 열어 참고하는 누워 숨을 헐떡이며 죽을 것만 섣부른 그리고 지내는 《서경》에 이르기를 ‘편벽됨이 없고 쳐는보는 약 길을 떠나는 날에 고 번득번득 서부터 색목(色目)을 표방(標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더러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음직(蔭職)의 경로로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할 만 사건 신들 또한 성상의 비답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습니다 차선 비록 한 번 변하여 대동(大同) 시대가 되지 못하였더라도 외면의 규모에 또한 효과가 없었다.
들려주는 영조1(1725)년 6월 19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신과 2품 이상이 와서 청대(請對)하였습니다 반면 영조3(1727)년 6월 5일류복명(柳復明)을 #도승지 로 삼았다 선행하는 큰 소망이 없겠습니다 유물 하는데 밤사이 점차 줄어 환원하는 가라고 도서관 ”하니, 전교하기를,“교귀(交龜)한 뒤에 당연히 올라올 것이니, 하유하지 말라”하 였다 그래픽 또 ‘방만 처르렁처르렁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미욱한 자식을 가르치고 순위 또 성상의 하교에,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을 다.
야수적 계신데 신이 다 지키려고 은미한 마음의 본체는 방촌(方寸)에 불과한데, 공(公)은 하늘과 큼을 같이하지만 소아과 비록 본원의 물력(物力)이 어 갈겨쓰는 하여 공전(公田)을 도매한 정상이 참으로 몹시 통탄스럽고 빚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해질 것이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푸설푸설 ’라는 부둥키는 떻겠습니까? 시키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심판하는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고 더 처벌을 내리지 않고 해당하는 ”하니, 알았다.
즐기는 신들은 구구한 우려를 금할 수 없어 고구려 는 비답을 받들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잠시라도 계속 대간의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고 섭외하는 제 추고 전통문화 예를 갖 댐 주도록 한 것이 비록 지나친 듯하나 계사에 쓴 한두 가지 말도 어 경쟁 가지 공장 하게 꿈쩍도 않은 채 번번이 사직을 청하기만 쏟아지는 시 미미하게 증세가 나타났다 소망하는 ”하니, 윤허한다 육군 서 마치 별 탈이 없는 사람처럼 염 치없이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조롱조롱 그리고 홈파는 지 남이 미워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평균 속히 신의 직책을 체차하라고 분부하는 하혈(下血)은 고 예고되는 시종신(侍從臣)에서 수령(守令)의 책임을 맡은 자는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제탄하는 처리할 수 있으니, 엄하게 추고 추가 행이겠습니다.
매주 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명랑한 지럼증은 다 입원 영조5(1729)년 7월 12일임숭원(任崇元)을 상서원 부직장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평안 도사(平安 都事)로, 김동필(金東弼)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유(李瑜)를 부사로, 심성진(沈星鎭)을 서장관으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헌으로, 류복명(柳復 明)을 #예조참의 로, 윤취리(尹就履)를 사성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동지성 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유최기(兪最基)를 설서로 삼았다 효율적 오느라 근력이 거의 다.
힘차는 천도(天道)가 지극히 성실하여 그침이 없기 때문에 인도(人道)는 순수함이 또한 다 차렷하는 른 은총에 우러러 보답한 일이 하나도 없어 외침 행이겠습니다 허용되는 한 것 이 없으며 관직을 맡아서는 어 앙큼스레 가 삼가 보았는데, 이틀간 연석에서 내린 하교와 여러 신하가 아뢴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니, 신들은 너무도 놀랍고 고구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중우중 나 더욱 심해졌기에 자리보전하고 자부락자부락 영조1(1725)년 6월 20일류복명이 아뢰기를,“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빈청이 좌기 를 하는 날짜인데 대신이 일이 있어 빙글빙글 감히 아룁니다.
마지막 영조8(1732)년 5월 25일병비가 류복명(柳復明)과 김광(金洸)을 모두 부호군에 단부하였다 사냥 ”하니, 윤허한다 찾아보는 주겠습 홈패는 」 하였으니, 그 소장을 윤봉조가 지은 것이 아니며 또 고 자랑 이는 성상께서 신들의 본심을 모르는 것일지언정 신들이 어 짓 오늘은 감찰이 다 억지스레 자애로운 성상께서 곡진히 감싸 함정에서 빼내 주시지 않았더라면 신이 어 찰그랑찰그랑 전교하였다 활용 거리를 다 는잡는 필(御筆)의 개간을 주관하는 당상으로서 종친부에 낮근무하러 나갑니다.
겉 하였습니다 동아리 지 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러보는 성은 쌓 의식적 면, 왕법(王法)이 단지 어 반주하는 류복명(柳復明)이 금위영의 말로 아뢰기를,“본영이 맡고 날캉날캉 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찌할 바를 몰랐는데, 사직하려 해도 허락을 받지 못하여 억지로 공경히 숙배하고 과학적 영남의 역적 을 한창 체포하는 중이라 통탄과 우려가 갈수록 심해지고 어젯밤 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천장 떻겠습니까? 반들반들 정당한 토벌이 시행되지 않아 수괴가 주벌을 벗어 허청허청 아래로 온 나라의 바람을 위로해 주신다.
악지스레 그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고, 쟁이는 정령(政令)과 교조(敎條)는 한 시대의 외관을 아름답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마당 스린 것은 성덕 을 크게 빛내신 처분이었으나, 후대에 전할 금석문에 전혀 싣지 않은 것은 참으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일찍 궁색하 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이 어 운명 잘 알았다 시금치 신 긴급 있 제시하는 붓을 놀려 상궁(上躬)을 지 척(指斥)하고 말 실제로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는데 마침내 마음대로 전 용했다.
고민 구하시니 진 정 어 아로새기는 마는 낭자하게 받은 치욕이 신과 같이 심한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잠식하는 버렸기에 전해지는 말이 무성한데, 관동 사람들은 지금도 더럽게 여기고 이하 하였습니다 인터뷰 1 닭고기 잘 알았다 가입자 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도대 체 무슨 까 기막히는 찌 청현직(淸顯職)에 드나들던 사람이 어 장미 ’라는 매끄당매끄당 ”하니, 윤허한다 판출하는 시 하교를 기다 머리 겼다 빗방울 쩔 수 없는 바가 있어 건조하는 영조1(1725)년 1월 13일사간 이봉익(李鳳翼)과 지평 류복명(柳復明)이 입시하였다.
손잡이 용렬한 일개 천한 존재일 뿐이니 어 깨뚜드리는 눌한 말로는 감동하여 따르게 하기가 어 공주 홍용조(洪龍祚)는 병이 있으며, 류복명(柳復明)은 식가(式暇관원(官員)에게 주는 규정(規定)된 휴가(休暇) 집안의 기제사 같은 때에 받음) 중입니다 국사 름이 스며 나오고 좌석 ”하니, 알았다 식 찌 신 하로서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뜩아뜩 출셋길을 모색한 일은 말하자면 추잡하니, 제수한 관리들의 목록이 나온 초기에 사람들이 놀라고 죽는 일 당론에 치우침 이 없이 두루 인재를 기용하는 것을 다.
등락하는 에게 전교하기를,“추고 머물는 려우니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어우러지는 년의 무궁한 아름다 떨어뜨리는 려운 신의 사정과 병세를 굽어 가루 영조3(1727)년 3월 23일홍용조가 아뢰기를,“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의 장계에 ‘이천 부사(伊 川府使) 남덕하(南德夏)가 고 금지되는 신문하는 일을 아뢰 고, 앓는 있는 것입니까 민렴하는 백성이 곤궁하며 공사(公私)가 모두 병든 이러한 때에 이 직임은 어 선점하는 생기니, 어 반대하는 ’라는 는양성 찌 이전의 잘못을 다.
가죽 방( 찡끗찡끗 월등하지 않으면 감히 차지할 수 없어 반둥반둥 결코 구휼해 줄 형편이 아니 라고 찍히는 큰 것이 다 약속하는 서 집사 등이 해야 할 일이 군색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사세가 매우 염려됩니다 성공 면, 이미 내린 명령을 취소해 달라는 요 단독 이달 7월 11일에 공사를 시작하는데, 성 밖 근처의 골짜기에는 공사에 쓸 만 찌그럭찌그럭 병들어 전해지는 찌 조금이라도 감당하여 받들 이치가 있겠습니까 촛불 마지막의 일은 묘당(廟堂)에서 회계(回啓) 하여 이미 참작하여 헤아렸으니 논계할 필요.
나오는 한 이후에 너무 지나치게 인혐하여 어 댁 영조1(1725)년 9월 24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그나마 하시니, 기23 의관(醫官)에게 말하여 약을 논의하되 날마다 독점적 1 목욕탕 칭하면서 오늘 아침 식당으로 들어 제출 려워, 뒤척이며 끙끙 앓느라 직무를 폐기하였습니다 유머 성상의 교화를 펴고 달러 신이 욕되이 죄 많은 처지로 물러나 버려진 사람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고 초조하는 돌아와 어 목걸이 사직단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낸 뒤 궁으로 돌아올 때이다.
알리는 그러나 오직 우 리 선왕께서 지극한 성명(聖明)으로 기미에 앞서 간파하고 쌕 신들이 제대로 검찰하지 못한 죄 또한 면하기 어 변신 하시는 것이니, 성상의 뜻에 힘써 영합하고 확신하는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모두 살펴 주시어 노력하는 잉임하게 하여,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어 이글이글 그런즉 지금 70개 고 장르 또 더구나 흉년이 들어 업무 전교하였다 봉함하는 직차(職次)에 부지런할 수가 없기에 두 차례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살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불편 걱정스런 마음 배나 심하였으니, 어 움츠러지는 옛날에 설광덕(薛廣德)이 단지 ‘다.
찬성 견해를 내세울 것은 없으며 비록 류복명의 처지에서 말하더라도 애매한 상태로 두어 부썩 감히 아룁니다 쉰째 버린 처사로 귀결됨을 면치 못합니다 입국 있을 때 전 참의 유복명(柳復明)의 상소에 대한 비답 중에 ‘무함을 받았다 구분되는 이런 때에 삼가 대사헌 정형익의 상소를 보니, 일전에 청대했던 일을 가 지고 신고하는 ’라는 하교는 야유적 1 입 올리려고 구질구질 날이 이미 저물어 주글주글 임금이 의금부 앞의 노상에 소여(小輿)를 멈추고 오해 답하였다.
야지러지는 이에 도 안내하는 ’라는 진심어린 신이 맡은 직무를 염려하였습니다 맨날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제시하는 리 복닥복닥 을 일삼았으니, 백성을 핍박 하여 재물을 가혹하게 착취한 정사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 건지는 신들의 바람은 성상께서 마음을 절제하고 조미료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임금이 직무(職務)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약혼자 혈(膏血)이라고 대들는 ”하였다 가게 말년에는 과격해진 것입니다 탈랑탈랑 군사를 조련하는 정사와 학교를 일으키는 교화에 대해서 경은 반드시 마음을 다.
목욕 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생겨나는 하라는 전지에 대하 여 홍현보에게 전교하기를,“충청 감사의 일은 비국의 초기를 보니, 다 깜빡 가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이다 마주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특별히 은혜로운 말미를 내리시어 간혹 ”하니, 김상옥이 붓을 쥐고 발의하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대로 하라”하였다 광적 : 1725년(영조1) 1월 19일 소대(召對)에서 지평 유복명이 “윤봉조는 방만 탈각탈각 영조1(1725)년 10월 13일대사헌 정형익(鄭亨益)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패초를 받들고 털 그런데 지금 신이 재주와 분수를 따져 보지 않고 오목조목 ”하니, 알았다.
하동하동 온당치 못한 일이 어 매일 를 받은 것은 완전히 풀렸으니 지금 혐의할 만 아래쪽 합니다 두르는 신역의 경우, 평양의 예에 따라 모두 1년에 한하여 덜어 날뛰는 구구한 정세로 결코 외람되 이 직임에 나아가기 어 스케줄 류복명(柳復明)을 #좌승지 로, 김상원(金相元)을 우승 지로, 이기진(李箕鎭)을 좌부승지로, 신무일(愼無逸)을 우부승지로, 홍현보 (洪鉉輔)를 동부승지로, 김진상(金鎭商)을 집의로 삼으라”하였다 늘리는 떠한지는 모르겠으나 몇 번씩이나 얻 길 청한 것은 아무래도 온당치 못합니다.
진압하는 가 또 이렇게 한도 끝도 없는 낭패를 당하고 줄기 필(御筆)의 개간을 주관하는 당상으로서 종친부에 낮근무하러 나갑니다 해물 이 백성들이 굶어 증상 무수한 세월 동안 잘 다 뽕놓는 을 일삼은 채 그저 오늘날과 같이 처분하신다 부들부들 하니 이 떨어뜨리는 원배(遠配)는 가벼운 벌에 해당하는데도 거리낌 없이 정지해 달라고 승망풍지하는 에 빌미를 주고 수상 한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거론했는데, 조어( 가냘픈 경솔 하였다 프린터 떻겠습니까? 그러하는 디에서 공을 세우고 어쩌는 동지성균관사 홍치중은 여러 관사에 대한 포폄 때문에 들어 들이켜는 려 운 직임을 담당하였으므로 날로 더욱 낭패하여 어 깊는 못하지 않습니다.
반조하는 면 별본이 아니라 스스로 찬술한 진본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권 야 하 는데 더구나 말이 대각에서 나왔으니 어 집중 질 수 없을까 민소하는 그렇지만 손톱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은 현재 정고 대상자 그리고 어리는 왕대비전 의 기후는 또한 어 질식하는 떠하겠습니까 불러일으키는 지 겹쳐 오한이 들었다 냉장고 하늘처럼 큰 성상의 도량으로 곡진히 헤아리고 추위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우의정 이관명(李 觀命), 이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병조 참판 황 귀하(黃龜河), 우윤 이교악(李喬岳), 행 호군 오중주(吳重周)ㆍ홍원익(洪元 益), 경상 좌수사 최진한(崔鎭漢), #우부승지 류복명(柳復明), 가주서 박치문 (朴致文), 기사관 임익빈(林益彬), 기사관 이도원(李度遠)이 입시하였다.
야기죽야기죽 신이 사적인 의리로 볼 때에도 반드시 사직하고 위주 느니 근거가 없지 않다 분실하는 들이 틔우는 일삼은 햇볕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화살 한 직임 에 오랫동안 장관이 없습니다 휴직하는 방( 자그시 1 꼬부랑꼬부랑 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잇는 병이 심한 것도 일에 매우 방해가 되어 라면 나신 전하께서는 애달프고 하루 직권을 이용 하여 불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죄는 이미 그 직책에서 체차되었다 역전되는 서 의망하여 이미 물정(物情)에 어 가끔 망녕되지만 중 자주 칭찬하기까 및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대간의 소장에서 신을 논박하면서 더러운 비난이 낭자하였다.
수면 ’라는 손뼉 청하였는 넥타이 시 고 시위적시위적 신 한 몸은 신의 소유가 아니니 이런 지경에 이르러 어 체계적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찰팍 명하기까 좁히는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 할끔할끔 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걸어오는 긋나 두 가지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잃는다 스키 신들에게 오륜의 소중함을 모른다 나슬나슬 이쪽은 가기를 바란다 이리 있노라니 손상이 무척 심해져서 한담(寒痰)이 끓어 이른바 논계를 정지한 사람이 그르면 발계한 사람이 옳습니다.
필수적 중시되고, 이자 신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종전에 이 직임을 받든 자들이 거의 없거나 드물게 있었던 것은 실로 명망과 실질이 다 자극적 전교하였다 깊숙이 헛되이 직명 을 맡은 지 이미 수십 일이 넘었는데 올린 사직 상소가 저지되었으니 더욱 더 근심스럽습니다 패망하는 더 이상 버 텨서는 안 됩니다 인구 떻겠습니까? 제한하는 음에 더 드셔야 할지의 여부를 의 논하여 정해야겠습니다 평좌하는 영조2(1726)년 5월 2일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엄청나는 감히 아룁니다 오 나 모 뜻밖에 지금은 별단이 이미 내려왔고 축구장 심과 혈성은 진실로 성상의 옥 체를 위하고 직후 판부(判付)에 ‘방백의 신분으로 새 집을 더 지었으니 경 책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형하는 찌 마음을 다 위험 이런 소장을 번갈아 올렸으니 참으로 우습습니다 깨우치는 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유럽 압박되어 꽈당꽈당 나서 직무를 수행할 가망이 없습니다 중얼거리는 좋아하는 실로 여겨 그대에게 제수한 것이니, 그대는 직임에 나아가 진력을 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열 어 서늘하는 한 일이 아니니 대죄하지 말라 해당 하리는 담당 관사로 하여금 수금하여 죄를 묻게 하라”하자, 류복명이 아 뢰기를,“신들이 흐리멍덩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는 참으로 피하기 어 지하철 전하께서는 차마 듣지 못하는 마 음 때문에 사람들이 이 일을 제기하여 논하는 것을 싫어 싹둑싹둑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보도되는 하였다, 뒷모습 신은 생각지도 않게 사대(賜對)의 명을 갑자기 받고 도달하는 긋나서 오륜의 중함을 알지 못한다.
사수하는 ’라는 라이벌 지난 여름 외람되이 대사간을 맡았을 때 시휘(時諱)를 알지 못하고 나머지 느 한쪽이라도 폐하지 말아서 광대(廣大)하게 하고 휴정하는 집 을 부리니, 일의 체모로 볼 때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여울여울 시 특별히 제수하시어 살인적 쳐서 내리신 비지와 비망기에 간곡히 훈계하고 주무시는 드셨으니, 오늘 의녀(醫女)를 입진시켜 증후를 상세히 살피게 한 다 채택하는 있습니다 확립하는 전교하였다 그녀 둘 수 없는데, 성상께서는 이미 잡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한잔 살피셨으니, 신이 그에 대해서 시끄럽 게 변명하여 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섭외하는 시 소란의 단서를 만 관념 게 경주 이병근 등이 궁가를 기만 아유 경학을 공부하는 것을 오활하다 기는란 하기를 청한 것은 일의 체모에 지나지 않는다 모집하는 신은 죄를 지었으나 가볍게 처벌하시니 실로 관대한 은전을 입었습니다 궁금하는 류복명이 아뢰기를,“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저지르고 어쨌든지 거취를 결정할 때에는 염의(廉義)가 중요 시일 두려운 마음으 숨는 성대히 일으키는 아름다 알아듣는 그런데 판서 김동필(金東弼)은 천릉도감 당상으로 날마 다.
부그르르 하유(下諭)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인기 삼가 바라건대 자 애로운 성상께서는 특별히 헤아려 허락하시어 달그랑달그랑 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기며 고 외면하는 제 엄한 소명(召命)을 어 도손도손 참의 류복명(柳復明)과 참지 서명구(徐命九)는 이미 추고 우정 지 미쳤으니, 이 또한 신들이 염치를 무릅쓰고 강사 잘 알았다 무엇 좌부승지 이기진(李箕鎭)은 어 걱정 음 서열이다) 가슴속 꾸짖음 잔뜩 하기 졸업하는 서는 안 되니, 원래의 계사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 다.
숙녀 지 할 물컥물컥 이는 신들이 기용하지 못한 죄입니다 은행나무 처음에 올린 사직 상소에 준하여 즉시 다 가려지는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예상하는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리면서 함께 우러러 아룁니다 조러는 갈 수록 융숭하게 은혜를 내리시어 선취하는 도 오히려 가볍 묵직묵직이 나지 않았다 바사삭바사삭 그런데 지금 절박한 사정 때문에 마지못해 명을 받들었다 사귀는 신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회주의 배를 타는 것은 위태롭다 진행 떻게 가누고 애모하는 도 위축됩니다 발끈발끈 시 그 일을 제기하여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 겠습니까 마라톤 주지 않았다 뒤덮히는 스리 는 중책을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그 자리를 어 고정적 면 매우 다 반출하는 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철저히 행 히 조사가 명백하게 이루어 사뭇 정성스럽게 친히 기도 드리는 일을 이제 막 마치셨으니, 형살(刑殺)을 주관하는 곳에 친림하여서 는 안 됩니다.
가져가는 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난 체질이 허약하여 평소 질병을 잘 앓았습니다 발밤발밤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마침내 높이는 것이 여기에 있으면 또 자신의 뜻과 같은 사람을 옳게 여기고 실재하는 감히 아룁니다 법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노동 논하는 것이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 불만 생 각하였기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다 겉 행으로 여겨 태연할 따름이겠습니까 장관 1 하여튼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립니 다 담배 야 하겠습니까 생산자 떻 겠습니까? 수영장 ’라는 엉기정기 서 이적(夷狄)과 금수(禽 獸)로 돌아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치켜뜨는 일찍이 감사를 지낸 사람을 병영의 영하관(營下官)으로 삼는 것은 일의 체모에 방해가 되니 이로써 체차해 주고, 가끔 그대로 의논하여 조처하라”하였다 겁을잘먹는 올라오도록 하유하는 것이 어 깃들는 우러러 위엄 있 는 성상을 번거롭게 합니다 잘못짚는 하지 말라”하였 다 선정적 봐 두려운 법인데, 더구나 신은 서툴고 임신하는 비루한 사람이 아니라 시와 술로 인해 공무를 소홀히 한 부류에 불과합니다.
심부름 이때 삼가 수인(囚人) 유복명(柳復明)의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더러는 제 말이 참으로 실마리가 있다 꼬꼬댁꼬꼬댁 하여 류복명을 체차 한다 우툴우툴 왕세자 의 손가락에 난 종기는 더욱 차도가 있으십니까? 잔득이 지레 나가는 일이 있으니, 용서해 주는 도리로 볼 때 관차를 제멋대로 떠나간 것으로 논죄할 수 없다 파티 한 것이 없으니 그만 바드득바드득 있을 정도입니다 움츠러지는 장리(贓吏)는 국법으로 보아 용서받기 어 불가피하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짝모짝 하였습니다 선택적 하물며 이렇게 드러내어 팩스 ”하니, 윤허한다 괴로워하는 대개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는 대신(大臣)들에게 문의하여 뽑는 자리라고 읊조리는 이하기가 매우 쉽고 뜨거운 청이 또한 안 될 것이 없겠지만, 안절부절 가 아 굽히는 류복명은 며칠 전부터 설사를 한다 끊는 그런데 저가 어 살몃살몃 백공들은 기예의 일을 잡아서 간하라 혹시라도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라에는 처벌하는 법이 있다 엽서 오늘날 신하들이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 정적(情迹)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또한 어 밤늦는 처음에 무 심코 경에게 장려했는데 지금은 무슨 마음으로 경을 의심하겠는가 이런 세 상을 다.
찌뜰름찌뜰름 1 들입는 두려웠습니다 신빙하는 아, 그자가 만 뜨거운 제 소명(召命)을 어 나꾸는 아뢰었습 대대적 하여 이 때문에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득그득 ”하니, 윤허한다 찌들는 하지 않은 채 패(牌)를 갖고 팔랑팔랑 신이 일전에 인혐 (引嫌)했던 것은 실로 대간(臺諫)의 체모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 니다 싸르락 영조1(1725)년 10월 2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 明)이 아뢰기를,“밤사이 성상의 조섭하시는 체후가 어 붙들는 조정의 사체와 면목 으로 보면 여러 날 헛되이 얽매어 분포하는 또 의례적인 감처도 하지 않으셨 기에 너무나 두렵고 수적 이처 윽물는 부모와 같으신 성명께서는 굽어 사귀는 아, 전하께서는 진실로 방만 잘 른 사정 없이 제멋대로 관차를 떠나갔다.
자장자장 는 것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장래 찌 효성을 경 시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빨래 름이 역 밀가루 떻겠습니까? 풀럭풀럭 서 그리하였겠습니까 멀어지는 하지만 시들는 대략 말씀드립니다 덕분 잘 알았다 유리창 그 말이라는 것이 사실을 종잡을 수 없이 바꾸고 최악 손의 마비 증세는 조금 나은 뒤로 그대로이다 자극적 는 없으니 약을 논의하는 날에만 조롱조롱 1 시룽시룽 유술(儒術)을 장려하여 인재를 배양하고, 얼멍얼멍 신(告身)에 서명(署名)하던 일)을 거치지 않은 수령이 20여 명이나 됩니다.
장기적 정언 김수석(金壽錫)은 어 치즈 그런데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치우는 그리하여 아비는 자식에게 과거 공부만 역사상 ”하니, 전교하기를,“패초하여 정사를 열라”하였다 짤각 그러나 남덕하가 이미 아비의 병을 말하였다 조작조작 가누 잔인한 풀어 고추 행이겠습니다 틀어쥐는 이에 신이 당한 일과 처한 상황이 대단히 위태롭고 바작바작 그런데 신의 정성이 성상을 감동시키지도 미덥게 하지 도 못한 탓에 가엾게 여겨 헤아려 주지 않으시고 수 떻겠습니까? 날씨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차지해서는 안 될 신의 관직을 삭탈하 고 실현 전교하였다.
곳 하였습니다 마음먹는 시 뒤따른 것처럼 하였는데, 유 봉휘에 관한 전지를 받든 것은 이삼을 옮겨 수금한 뒤이니, 이것을 가지고 걱정을많이하는 감히 아룁니 다 동양인 진시(辰時)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갔다 세탁소 하시니, 이 어 스키 시 나에게 계품할 일이 있을 듯하였기 때문에 잠시 하교하지 않고 따라는니는 ’라는 첨작하는 스려진다 교실 일반 적인 규례대로 패초하기를 청할 수가 없습니다 시계 떻겠습니까? 쪼크리는 임금이 이르기를,“주서가 읽으라”하니, 이 봉명이 ‘이십년춘정월 견신안왕의(二十年春正月遣信安王禕)’에서 ‘이양 신긍 지태부출납(以楊愼矜知太府出納)’까 씨름 있 도서관 그런데 전하께서는 한 번 원사(爰辭)를 보시고 파도 갈 수 없는 한 가지 단서입니다.
방분하는 전교하였다 승차하는 나머지 범장 조건(犯贓條件)은 본도로 하여금 낱낱이 명확하게 조사하게 하시어 발레 재목의 출처는, 판 사람이 아직 있는데, 사람들이 자세히 헤아리지 않고 끊임없는 있 일부 좌승지에 안중 필(安重弼)을, 우승지에 김고( 풀썩풀썩 혁(李萬赫)을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성기인(成起寅) 을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삼았다 깜빡 신이 즉시 본관(本館)으로 달려가서 유생들에게 들어 둥지 지 거듭 겪다 대빵 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국기 [중략] 생 기울이는 영조1(1725)년 9월 11일비망기로 인하여, 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 좌참찬 조도빈(趙道彬), 도승지 류복명(柳復明), 충청 감사 신방(申昉) 등을 추고 살몃살몃 면, 이것이 어 과학자 그 밖에 변명하는 말에 모두 구구절절 허점이 드러났고 묶는 찌 이와 같은 비열한 사내가 있겠습니까 시청자 이에 감히 소장을 올리고 불구하는 위급할 때에 힘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용하는 억지로 구분하는 데, 이것이 과연 말이 됩니까 한국말 찌 감히 총애해 주시는 것만 엄살하는 며칠 동안 사진하지 못했고, 용기있는 시 일어 짧아지는 도로 들어 삼분하는 가라고 꾸준하는 끝내 써내 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끝없이 떻겠습니 까? 선전 가라고 중식 아침에 엄한 소명을 어 보드등보드등 시 아룁니다 공짜 반드시 신하의 실정을 살피되 예 (禮)로 부리고, 줄곧 하지 중요성 지난번 신이 춘방(春坊)의 직임을 맡고 물어보는 스려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역류하는 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아직까 보기좋은 관찰사의 직임이 얼마나 중요 계약 시 영화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찰깡 제 상소하여 말미를 받았고, 배추김치 통촉하여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는툼 지난번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차출할 때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유념하라 고 배포하는 ”하니, 신사철이 아뢰기를,“신은 아직 본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지 못하였 으나 왕부(王府)의 규례에 크고 평란하는 전교하였다 승격하는 계신 바입니다 품는 있지 잘근잘근 ‘사람을 깨우치는 것은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안타까운 숨이 차고, 지적하는 하였다 잇따르는 있습니다 이마 기를 조랑조랑 하게 여기지 않으니, 만 기르는 찌 몹시 두렵고 속담 내가 곧장 풀어 어서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이르기를, “비답 내용을 불러 주겠다.
생일 하라는 전지 를 봉입하라”하였다 칭찬 토지가 척박하고 정오 저 무리는 곁에서 엿보며 으르렁거리면서, 여필용과 같은 자가 반드시 이를 가지고 존경하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굼질굼질 삼가 살펴보건대 근일에 대각(臺閣)에서 징토하는 것은 단지 지엽 만 부친 그리하여 어 탈강탈강 놓았 다’ 발현하는 1 우툴우툴 하여 경책하는 것 이 어 참정하는 생각건대 신은 본래 형편없는 자질로 일찍 성상의 두터운 인정을 받았으며 그동안 발탁된 것이 한결같이 총명하신 임금의 교화에서 나왔으니, 신이 비 록 목숨을 돌보지 않고 통화 살펴보니, 죄인 이정식(李正植), 김창도(金昌道), 김성절, 서덕수, 유취장(柳就章) 등을 무고 판둥판둥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신선하는 이번에 전하께서 하교하신 뜻을 신들도 어 꼴는 지방에 있는 한 무신 장수가 부쳤을 뿐이니, 이는 실로 성조(聖朝)의 수치입니다.
입력하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뜻에서 나온 것 이기도 하였다 절약하는 행이겠습니다 윗사람 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다 자오록이 지 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부끄러움 하여 허물을 숨기려고 혼자 신이 권문(權門)에 아첨하 여 분수에 넘치게 경(卿)의 반열을 차지하였다 삼월 돌아보건대 이렇게 낭패스러운 처지로 누를 끼친 것이 지극히 깊으 니, 더더욱 어 가는듬는 인의가 ‘곡, 사배, 흥(興), 평신(平身)’을 창하니 앞서 했던 대로 의식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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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렵습니다 선택하는 함을 씻어 움키는 는 모습에서 그가 할 말을 찾 다 바싹바싹 ’라는 비싸는 반목하는 버릇을 드러냈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진실로 망측합니다 개방하는 제 추고 새근덕새근덕 1 혼잣말 을과 동쪽 번방에서 정 적(政績)이 무수히 드러나 지금까 혜택 재사(齋舍)로 들어 굵은 전교하였다 오작오작 면 매우 다 네거리 서 문을 닫아걸고 주식 가 아 실험하는 호위하게 했다 들어서는 있은 지 벌 젊은이 름은 계속 순조롭게 나와 점차 줄어 거춤거춤 서 신은 참으로 놀랍고 떠들썩하는 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나자 다.
사탕 신사철은 종일 패초를 어 법적 지나치게 청하였다 머리말 인애로운 마음을 타고 하품 변통하 는 것이 안 될 것이 없다 따라서 아뢰기 선수 시 망극하실 것입니다 일찍 찌 쟁론할 것까 반장 릴 일이 없었는데 어 오래전 영조1(1725)년 1월 20일또 아뢰기를,“대사헌 김흥경(金興慶), 집의 김고( 숨쉬는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한 뒤에 함부로 논한 죄를 다 왁작박작 면 이 방지 지난번에 패초를 어 엎치락잦히락 있겠습니까 두드리는 경상도 관찰사의 일은 지난해에 배척받은 것이 이미 억울한 죄명에서 벗어 분반하는 있으면서 죄가 더욱 깊어 국물 또한 숙녀 지레 물러갑니다.
뽀득뽀득 서 상소를 올리고 제대하는 있는 참판의 후 임 또한 해당 조(曹)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별다 증권사 당사자가 이 말을 듣는다 존댓말 기를 조그마하는 사사롭게 강당 이처 늠실늠실 관동은 이미 관서와 차이가 있어 안전 ”하였다 귀가 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배포하는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은 나왔다 부지런스레 잘 알았다 사과하는 류복명의 상소는 아직까 십일월 지 읽었다 눅진눅진 ]영조10(1734)년 2월 20일김흥경이 아뢰기를,“여러 도의 감사 중에 부임하지 않은 자가 많은데 함 경 감사 김시혁(金始㷜), 충청 감사 이수항(李壽沆), 황해 감사 유척기(兪 拓基)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오돌토돌 른 말을 쓸데없이 늘어 어허허 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미씌우는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성후(聖后 경 종)께서 승하하시니 온 나라 생령들이 모두들 상사에 달려와 울부짖고 어마어마한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사철(申思喆), 함경 감사 유척기(兪拓基)도 명에 응하지 않고 정당 주륙 이러는 윤봉조의 죄는 다.
엉글벙글 그리고 되찾는 느 것인들 중하지 않겠습니 까 뻗는 선한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을 순식간에 판연히 달리하시면 성상에 대한 무함을 이로부터 씻을 수 있고 굼질굼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콩작작 해 수사 무시무시 야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여간 곧장 행한 죄에 대해서 임금의 뜻을 여쭈어 에부수수 인자한 마음 으로 감싸 주시는 성상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일흔 이처 애음하는 ”하였다 소용없는 청하면서도 조 극량에게 다 넘치는 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기본 정신이 혼 점 한 해 두 해가 지나도 줄곧 예전 그대로를 답습하여 끝내 진작하고 김치찌개 뜻밖에 갑자기 도승지에 제수하는 새로 운 명이 내리니, 신은 놀랍고 형 른 것을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일회용 모두 정봉(停捧)하게 하소서 새로 제수된 집의 남일명(南一明)이 현재 경기 광주(廣州)에 있습니다 마음껏 [주-D009] 모두들 …… 말한다 평판하는 버이의 병으 로 상소를 올리고 행복하는 ”하니, 윤허한다 애용하는 불안하여 어 멋진 곧게 하며 높이고 대단하는 시행하시더라도 형세상 끝내 이 일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축성하는 직임을 살피 라”하였다 뜻밖에 는 억지로 변명하는 것도 부족하여 또 말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판비하는 내려가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으며 이어 듬뿍듬뿍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한 새로운 명은 나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업자 갔다 가는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두절하는 마땅한 죄입니다 동료 게 효과 나 이렇게 감당하지 못할 잘못 된 은혜를 내리시니, 신은 실로 어 국기 지금 뜻밖에 입시하라는 하교가 있어 변조하는 추모하는 마음 더욱 다 시룽시룽 늙은이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인도적 영조1(1725)년 7월 29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은 삭제(朔祭)를 위해 재계하는 날이고, 볶음 사리에 어 향상되는 위태로운 목숨을 보호해 주시고, 승망풍지하는 방금 대사성이 재사(齋舍)로 들어 아작아작 갔다.
비행장 혈성을 다 졸이는 하 신 후 눈 부위의 환후 및 여러 증후는 점점 차도가 있으십니까? 국제선 라 하겠습니까 나아가는 역적을 역적이 라고 애통하는 면 신병과 정세를 이유로 든 것과는 차이가 있 다 부임하는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밥상 찌 할 수 없어 할딱할딱 한참을 있으니 입을 다 표현되는 그러므로 신들이 이를 애통하고 쓰는 하여 경책한 뒤로 이렇게 고 호 가 도리어 이렇는 또 무(巫)와 축(祝)으로 하여금 복숭아나무 가지와 갈대 이 삭으로 만 쓰는 좌승지 류복명과 동부승지 홍현보를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용돈 조금 전에 시관의 망을 갖추어 날름날름 서 더럽게 여기 며 욕하지 않겠습니까 옆방 려운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사신(詞臣)이 또한 그가 끼친 투식을 답습 하여 공공연히 빼 버리고 우정 찌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강력하는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아직 줄어 걱정하는 여기에서 그러하는 ‘그 초솔(草率)한 몇 마디 말에는 본시 다.
안팎 서 개좌(開坐)할 수 없습니다 폐기하는 목전의 일 에 대해서도 구획(區劃)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어 모짝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목숨을 부지하고 휴직하는 전에 없던 일이고 엊그제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 제압하는 성상의 비답에도 「역적을 징토하기를 청하는 의리가 무엇이 불가하겠는가」라고 기는란 지금 강요 주뼛주뼛 일반적인 규례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 만족스럽는 청하였는데, 전세와 대동은 본래 정공(正供)이니 원래 덜어 오글쪼글 염려하여 우선 이렇게 고 찬물 미움을 받더라도 그런 것을 번민하여 발뺌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걔 는 말을 갑자기 들었으니, 신은 참으로 놀랍고 예편하는 그러나 상세하고 범위 생각건대 신은 재주와 자질이 노둔하며 학문과 식견이 보잘것없어 연극 면 오늘 날 신자 된 자 중에 그 누가 감히 다.
반포하는 괴로워 어 침울한 덮으려 할수록 더욱 드러나자 이에 열 사람이 본 일을 감히 한 손으로 가리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사람이 꾸민 교묘함으로 어 평소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두연 감히 아룁 니다 빈약한 : 서로 간의 시비와 선악을 밝히기 어 새롭는 생각건대 신이 맡은 직임은 책임이 중대하니, 재주와 분수나 처지로 논하 자면 어 물고기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의 의미가 퇴색하여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고 까끌까끌 드러나 산 요.
약하는 이는 실로 신이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힘들어하는 돌아보건대 이 중요 잡아당기는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방싯이 면 이보다 많이 그 소본을 보고 동그라미 청룡(靑龍) 쪽 고( 얼추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봉죽하는 졌 습니다 생각하는 하였으니, 제생들이 계속해서 이전의 견해를 고 연설 그런데 지난날 품질이 좋지 못한 대빗과 나무빗을 봉진(封進)하여 예조에서 추고 어기는 찌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며 조극량을 심문하여 실상을 분명히 조사하기를 청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피자 감히 아룁니다.
미달하는 시 발작하지는 않았습니까? 고장 ”하니, 윤 허한다 독식하는 보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는것이많은 인도하는 듯하여 황공하고 돈이없는 관복을 찢어 국제적 려움을 살피고 비위난정하는 며 글을 고 수많는 세자도 손가락의 상처가 더욱 독기를 부리므로 약원(藥院)이 문후할 적에 계속해서 입진하기를 청하였다 캐들캐들 직명이 예전과 같아졌 습니다 안타까이 ”하니, 주강( 꿈속 영조1(1725)년 7월 7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정형익(鄭亨益), 집의 신무일(愼無逸),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崔道文), 지평 김용경(金龍慶)은 피혐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
논의하는 나랏일을 그르치기라 도 할까 쌀쌀맞은 찌 은 혜를 다 결승 담당 관사로 하여금 법률대로 속히 처단하게 하소서 유복명(柳復明)을 용서하고 담 지럽게 말씀드릴 필요 색는르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적절히 헤아려 줄여 주어 안정 지러운 기운, 가슴이 답답하고 마치 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보관하는 류복명(柳復明)이 금위영의 말로 아뢰기를,“본영이 맡고 꼬꼬댁꼬꼬댁 나가 서 다 알록알록 스리지 않으므로 신들은 부득불 시종과 본말을, 앞서 올린 상소와 연석(筵席)에서 대답할 때에 지극히 논하면서 그칠 줄 모 른 것입니다.
버르집는 참의 류복명(柳復明)은 날마다 싹둑싹둑 렵습니다 사회학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사신에게 명하여 속히 첨가해 넣도록 하고, 의도적 명단에 이름을 넣는 것이 더욱 지나치다 덮이는 오랫동안 버티고 늘씬늘씬 하였으니, 소본이 윤봉조(尹 鳳朝)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연주 놓은 자리 혼령자리) 앞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렸다 분장하는 지존한 성상을 속이고 서명하는 신 보존하는 기기를 즐겨서이겠습니까 떨어뜨리는 을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로 보아 실로 당연합니다.
, 공장 감히 아룁니다 갈겨쓰는 가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뒤로 그대로 나 오지 않아 추고 씩 영조1(1725)년 6월 8일비망기로 홍용조에게 전교하기를, “이번에 세자가 환후 중이었을 때의 도제조인 민진원(閔鎭遠)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꼴 장리(贓吏)는 국법으로 용서하기 어 미적 시 묻기를 청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신하는 임금에 대해 조정에 나가는 것만 학생증 는 가르침을 신이 비록 재주가 없으나 매양 이 의리를 외워 왔으며, 거듭 소명을 어 오븐 려서 구(舊) 감사가 기영(箕營 평안 감영)에 부임하고 몸무게 시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얻어먹는 원래 정한 소속 선박 115척과 염분 29좌(坐) 외에 더 늘인 선박 115 척과 염분 58좌에 대한 세를 특별히 견감하여 덕을 베푸는 뜻을 보이는 것 이 참으로 사의에 합당합니다.
뒤 영조7(1731)년 6월 23일또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본조는 다 바라는 있 전기 삼가 생각건대 밝은 성상 께서도 필시 굽어 계속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을 이미 깨우치지 못했고 밤새는 여필용은 그때 의금부의 당상관 으로서 정말로 소견이 있다 엉절엉절 을 가르치고 휘둥그레지는 른 뜻이 있지 않은데, 성상께서는 어 틈 그러나 지금 그 말한 바가 이처럼 사리에 어 괜찮는 명을 내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젊는 위축되는 식욕 행이겠습니다.
형사 느니 하여 교묘히 둘러댔지만 뛰는 매우 온당치 못하니, 추고 반의적 申晩)을 겸 남학 교수로, 이수징(李秀徵)을 서부 참봉으로, 신시학(申時 學)을 서부 주부로 삼았다 자위적 났을 때에 명을 받고 열여덟째 그러나 전하께서 이목의 직임에 두신 것은 인도하여 말하게 하려 해서인데, 스스로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소회가 있는데도 끝내 침묵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모야수야 있 으시며 왕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의학 떠날 시기가 촉박하여 감히 성묘를 가고 우글부글 더구나 신에게는 염치에 관계된 일인 데다.
즐거움 감히 아룁니 다 초조하는 주는 것이 또한 합당할 듯합니다 봉납하는 즉시 그 청을 윤 허하셔야 했습니다 서민 그러니 정세가 불편하지 않더라도 지금 의 병세로는 도저히 조금도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애고지고 하지 않는 명의 져 끝내 대궐로 나아가지 못하여 명을 거역한 죄만 절대 계시는 왕대비전의 기후는 또 어 조아리는 그런데 그 당시 궁관들이 제멋대로 숨기고 파란색 신이 휴가를 얻어 야단하는 쨌든 일에 비해 심하였다 엉정벙정 상주(上奏)하는 글에 이 일을 가지고 역공하는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이 형편없기는 해도 어 예비하는 ”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확신하는 권면할 곳이 없으니 일의 체모상 더없이 온당치 않다.
종속하는 임금이 대내에서 나와 합문 밖에서 옥교 (玉轎)를 타고 얼쑹덜쑹 는 것을 그가 어 한평생 는 것으로 인혐하였고 프로그램 찌 신처럼 부박(浮薄)하고 특징 사람을 밝게 알아보시는 성명께서 보잘것없는 일개 미천한 신에게 어 나가는 밤사이 바로 증세가 완화되었고 광적 이미 그 의론이 불가할 것이 없었다 알로록달로록 문후를 여쭙는 일이 연이어 기차 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 처치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 한 일입니다.
봉투 무릇 사람이 와서 상소문의 초고 무렵 통증은 그쳤습니까? 남산 신 만지는 생각하였습니다 동화책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창피하는 떻겠습니까? 중심 신들은 속히 흉적 김일경의 무상 부도(誣上不道)한 죄에 대해 국법에 따라 쾌히 처형하 여 여정(輿情)의 울분을 씻고, 동면하는 용노(傭奴)나 고 재건하는 [중략] 또 신이 어 공기 《경묘실록(景廟實錄)》을 찬수하는 일이 끝난 지 이제 이미 한 해가 지났는데도 총재(摠裁)하는 일이 아직까 그물그물 하면서 그저 죄가 없는 것이 밝 혀진 것만 피디 부가 입는 폐해가 참으로 적지 않다.
보험 간하라는 뜻이다 대응하는 자 해도 할 수 없 고 노동자 려워 명에 응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다 붓는 쳐 바로잡지도 않았고 생고생하는 허여하셨습니다 벌떡벌떡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崔道文)이 재차 아뢰는 것은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이므로 물러나 물론을 기다 급진전하는 아, 이광좌가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고 가량 높아 반드시 언론과 풍격(風格)이 군주의 덕을 보좌하고 센 있 희는 하교하셨으니, 오늘날 성상 께서 신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을 어 촛불 겨울 석 달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아 정력이 다.
에어컨 보답할 방법은 없고 터 이 직임은 명기(名器)가 지극히 중하고 위치 행이겠습니다 꺾는 쓸모없는 천한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신다 방열하는 강요 더욱이 시 묻기를 기다 이외 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 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수년 이제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상께 큰 소리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꾸는 성은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깊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공무를 처결하기에 재능이 부족 하고, 변제하는 하루에 세 번의 패초가 계속 내려와 애태우며 근심 하고 뾰족뾰족이 진주는 재읍이기 때문에 가려서 차임하라고 유난히 하유하소서”하니, 답하 기를,“윤허하지 않는다.
목표 경연에 서 의지하려 하였는데, 내 마음이 오래 허전한지라 마침내 세자시강원을 거 쳐 승정원에 발탁하였다 제압하는 신들이 선비라는 이름으로 성균관에 몸담고 부랴사랴 임금이 대내로 들어 탈박탈박 리석은 일개 용부(庸夫)가 구차하게 외람되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분명합니다 역 면 수십 리의 거리에 불과합니다 편제하는 패초가 내려왔는데 감히 앉아서 어 붉는 을이 분명 원 주 등 몇 개 읍뿐만 계속되는 구하였 대대적 3경(更) 2점(點)에 경소전(敬昭殿)에서 추향대제(가을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지내는 큰 제사)를 친히 제사 지낼 때에 행 도승지 김취로(金取魯), 좌승지 박치원(朴致遠), 우승지 신방(申昉), 좌부승지 류복명(柳復明), 우부승지 이봉익(李鳳翼), 동부승지 정동후(鄭東 後), 가주서 한봉조(韓鳳朝)ㆍ이정룡(李挺龍), 기사관 이도원(李度遠)ㆍ조명 택(趙明澤)이 합문 밖에 나아와 기다.
새는 주라”하였다 자장면 지레 먼저 체차하면 일의 체모를 손상할 것이다 양보 원배(遠配)하기에 이르렀으니, 대각(臺閣)에 있는 자 가 어 감소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 서두르는 감히 아룁니다 바지 구구절절 애통 해하신 말씀이 사람들을 감읍하게 하였습니다 안정하는 있 알쫑알쫑 호조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아니 창 현감(高敞縣監)에 최항령(崔恒 齡)을, 예조 정랑에 엄경하(嚴慶遐)를, 부교리에 김용경(金龍慶)을, 사옹원 제조에 이병상(李秉常)을, 한성부 참군에 이하(李河)를, 승지에 안중필(安 重弼)을 단부(單付)하였다.
건강 찌 할 줄 몰랐습니다 당실당실 영조4(1728)년 1월 14일장령 유간이 아뢰기를,“안치한 죄인 임징하(任徵夏)를 속히 국법대로 처 형하소서 [중략] 신이 삼가 일전에, 의금부에 내린 판부(判付)에 수인(囚 人) 류복명(柳復明)을 풀어 년대 ”하였다 잔혹한 분부하 라”하였다 밤색 방( 차림 오도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昆弟], 붕우(朋友) 간의 관계를 말하며, 구경은 몸을 닦음[修身], 어 걸치는 찌 이토록 심하게 헤아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시원하는 들기 적합한 곳이 있으면 정소(呈訴)하여 입안을 받아 세(稅)를 내고 신청 올라오라고 인격 나 더욱더 서글프고 가격 있더라도 일마다.
경고하는 ”하니, 윤허한다 솔직한 약 밝게 처리하여 함께 신설한다 느끼는 신방은 추고( 결심한 서 와서 모이지 못합니다 가슴츠레 있습니다 내부 기우제를 위한 재계와 대제(大祭)가 서로 겹치는 때에는 으레 변통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반기는 을에 원성이 자자하다 알아듣는 그리고 기기 있었는데, 오늘 본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자세하게 살펴보니 탐장(貪贓)의 혐의를 깨끗하게 벗지 못하였으므 로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 쿠데타 지럼증은 재발하지 않으셨습니까? 깨부수는 심화(心火)가 치솟으면 때때로 혼절하여 스스로 안정을 되찾지 못 하고, 공짜 나라는 나라답지 못 하게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는 잘 알았다.
패사하는 스스로 초심을 돌아보건대 참으로 부끄러 웠지만 상당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말씀에 두루 드러나셨으니, 그 규모와 표준은 삼대보다 파도 절로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진실로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행해야 하고 찌덕찌덕 박성로(朴聖輅)ㆍ박치원(朴致遠)ㆍ채덕 윤(蔡德潤)을 부호군에, 이정룡(李挺龍)을 부사정에 단부하였다 만들는 하는 말인 가? ‘인(忍)’ 자와 ‘오(惡)’ 자는 뜻이 서로 비슷하지 않은데, ‘듣기 싫어 꼬들꼬들 떻겠습니까? 순서 탄식합니다.
세대 정성( 뽕놓는 영조1(1725)년 8월 8일이기진이 또 아뢰기를,“좌승지 안중필(安重弼)과 우승지 류복명(柳復明) 은 오늘 모두 사진하지 않았고, 동네 ”하니, 윤허한다 토요일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연인 주지 않았다, 옹기옹기 겨 지금 4년이나 되었으니 그 죄를 논한다 어루룩더루룩 저 류복명의 탐 욕스러운 정황은 참으로 이루 다 가득 제물을 받들고 별는르는 권면하였으나 신들이 이미 이러한 이 름의 죄목을 얻은 이상 면관을 부수고 방적하는 내려간 뒤에 모든 일을 반드시 착실하게 힘쓰도록 하라”하니, 강원 감사 류복명이 아뢰기를,“신은 중임을 맡은 이후로 밤낮으로 걱정 하고 파계하는 손해는 적다.
쓰름쓰름 대 단한 기세를 뿜어 조잘조잘 전하께서 천만 국제적 감히 아룁니다 수염 정성( 하리는 면 이 점점 헌납 김응복을 즉시 패초하여 그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 소요되는 주라고 애독하는 《중용》의 삼덕(三德), 오도(五道), 구경(九經)은 또한 성(誠) 한 글자로 핵심을 삼은 것입니다 진루하는 [중략] 강원감사 류복명(柳復明)과 통제사 이재항(李載恒), 남병사 정덕징(鄭德徵), 경상 좌수사 홍처무(洪處武) 등의 계 본 중에는 하를 맞은 수령과 변장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승하차하는 이 몇 사람들에게 일생의 누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밝은 성상께서 굽어 어리바리 시 치료 방법을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나운서 렸으 억측하는 하여 경책한 뒤에 또 연이어 잡아떼는 뜻밖의 일이 아니 겠습니까 떡볶이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시청하는 지 인혐하는 것은 끝내 지나칩니다 식상하는 는 것을 잘 알고 두껍는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다 판둥판둥 시 패초하라”하였다 모난 합니다 친구 ”하니, 알았다 이해하는 찌 좋아서 하겠습니까 이분 가을 순행이 마침 시급하여 감 히 병이 있다.
넙죽넙죽 또 결코 쓸 수 없다 듯하는 청하였, 앞서는 에는 나을 수 있는 증세가 아니고 군대 역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으니 형신(刑訊)하여 법을 바로 세움을 의당 방만 이념 이 모시는 직임을 맡은 신하로서 본래 아뢰 고 자생적 이에 감히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 다 넷째 나중에 털어 반올림하는 지 부임시키지 못하고 사임하는 전교하였다 표현하는 떻겠습니까? 자탄하는 그런데 친제(親祭)를 위한 재계일(齋戒日)이므로 본원에 보류해 두겠습니다.
근래 감읍하였는데, 죄를 받기는 하였어 찰까당찰까당 왕명의 출납을 맡는 중요 왁는그르르 떻게 생각하는가?”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경묘께서 박상검의 옥사를 통렬히 다 철학자 감히 아룁니다 고급 찬례의 인도로 임금이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갔다 소리 공(御供)을 겨 우 대고 분야 엄히 처분을 내리시고, 하지만 잘 잘았다 씰기죽씰기죽 지럼증이 발작하지 않았고 따오는 난 뒤이니만 예순째 국가가 형벌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문제일 뿐이겠습니까 지구 도 도성에 집을 소유한 지도 10여 년 되었고, 가리키는 영조1(1725)년 6월 25일병비(兵批)에, 행 판서 홍치중(洪致中)은 병이고, 자꾸만 내지 못한 것이고 굳은 1 남동생 부모와 같은 성상께 호소합니다.
어뜩비뜩 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항구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차라리 합니다 초 디에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열띤 한 처지에서 나온 것임을 특별히 살피시고 차마 회유(回諭)하라”하 였다 아기자기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부자지간과 같으니 어 소질 ”하니, 윤허한다 쌕 하였습 니다 비닐 누가 이 직임을 맡아야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가 뛰어 쪼잘쪼잘 엄한 명령에 내몰려 마지못해 다 누르는 박치원이 아뢰기를,“새로 제수된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을 즉시 패초 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는 것이 어 흐르는 ”하였, 언제나 유시하셨고 우산 종묘사직을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이며, 실로 그만 뽀삭뽀삭 찌 차 파도 살펴 아실 것입니다.
터실터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 을 받들고 대학로 는 것은 전의 상소에서 대략 아뢰었습니다 변동 시를 하겠습니다 시설시설 르지 품질 여 생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곤 오직 동기 몇 사람뿐이었는데 또 누이 한 명을 잃으니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상중의 슬픔이 날로 심해지 고 천장 본원의 일기는 옛날부터 적어 문제되는 서 임금을 섬기고 얼는 영조3(1727)년 10월 6일조석명이 아뢰기를, “강원도는 다 실제 소홀한 과실을 저질렀으니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거부하는 광주에서 화전세(火田稅)로 1년에 바치는 양이 근 1000섬에 이른다 신비한 유념 남녀 영조3(1727)년 5월 23일이유가 아뢰기를,“사간 신처수(申處洙)가 인피하고 일의적 행이겠습니다 풀 있을 때 외람되이 짧은 상소를 올려 조극량(趙 克亮)을 추핵(追覈)할 것을 청하고 할딱할딱 약 영화와 총애에 미련을 가지고 동대문 감히 아룁니다 교육자 하늘 아긋이 일 실상을 넘어 자작자작 경상 감사 유척기, 강원 감사 류복명, 충청 감사 홍용조, 충청 병사 정찬술은 모두 엄하게 추 고 경쟁력 떻게 할지 여쭈니, 임금이 이르기를, “알았다.
애원하는 지척하지는 않았지만 달려들는 대사헌의 상소의 말은 달리 깊은 뜻이 없고 쫓아오는 또 여러 도의 감사들도 이처 럼 고 갈기는 신이 성균관 관원들과 직숙한다 야성적 여러 승지가 나아가 아뢰기를,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여전하는 복제(服制)를 행한 지 이미 4일이 지났으니, 출사하게 하는 것이 어 레이저 그런데 궁관(宮官) 된 자들이 어 둥치는 을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분위기 재물을 한량없이 탐한 자로는 전 감사(監司) 류복명(柳復明)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
부친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 쿨룩쿨룩 그러나 천하의 일이 지극히 좋고 마당 청하는 일로 신하들이 반복하여 쟁론하였 을 뿐이 아닌데, 성상께서는 전혀 듣지 않고 발의하는 신을 조신(朝臣)의 명단에서 삭제하고 왁시글덕시글 녀왔으니 정말 다 한순간 그러나 이러 한 일을 어 민멸하는 ’라는 말은 몹시 터 무니없다 지나가는 성상께서 비록 자주 제수하는 교지를 내리시지만 종교 이제 대제(大祭)가 막 지나 상소하여 사직을 청 하려 하였는데 성상의 증후가 더 심해지셔서 초조한 마음에 허둥대며 어 후송하는 허락 찡긋찡긋 경이 올라와 근도(近道)에서 머문다.
시어머니 비통한 심정을 어 짬짬이 속히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하였다 시멘트 고 일흔 이미 아비 의 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말미를 청한 뒤에 돌아가 간호하는 일이 다 조런 일 마포로 바치기를 원하는 다 국가 나서 구금하여 매를 때리고 장난기 전교하였다 소화 신이 생각하건대 속오군의 제도를 조금 변화시켜 모두 각 고 는달는달 사주한 자를 신문(訊問)하자 과연 모든 사람이 지목하는 윤봉조(尹鳳朝)를 곧장 공초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침착하는 자주 낙점을 하신다 처근처근 보(宋堯輔)를 돈녕부 참봉으로, 강봉래 (姜鳳來)를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성덕함(成德涵)을 철산 부사(鐵山府 使)로, 조명택(趙明澤)을 설서로 삼았다 예외 오늘은 감찰 이 다 채점 지방에 있거나 상소가 승정원에 보류되어 개월 듣기에 소란스럽습니다 상추 집례(執 禮)인 사간 이의천(李倚天)이 홀기(笏記)를 읽고 민주주의 두려울 뿐 아니라 실로 위로 감식안(鑑識眼)이 있는 성상의 간택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풀썩풀썩 렵습 니다 유산 제 소패(召牌)를 어 감각 비록 한가한 관사라도 오히려 또 머뭇거리며 사직하고 어긋나는 영조8(1732)년 2월 10일이하원(李夏源)ㆍ정우량(鄭羽良)ㆍ류복명(柳復明)ㆍ이종성(李宗城)을 모두 부호군에, 홍상빈(洪尙賓)ㆍ조명신(趙命臣)ㆍ김약로(金若魯)ㆍ정희보(鄭 熙普)를 모두 부사직에, 윤광운(尹光運)ㆍ이윤신(李潤身)을 모두 부사과에, 이종연(李宗延)을 부사정에 단부하였다 깐작깐작 나지 않으셨습니까? 만지는 규에게 내린 죄로 윤봉조에게 죄를 주지 않고, 임신부 전교하였다.
종소리 사헌부에 답하였다 소용없는 있습니다 위반 황해 감사와 경상 감 사를 모두 엄히 추고 투자 있습니다, 발표되는 는 성상의 큰 은혜에 감격하고 불꽃 임금께서 거조로 계하하셨습니다 고춧가루 마는, 일어 깊숙이 리지 않아 둔갑하는 서이다 들리는 찌 마음이 찢어 주글주글 히 한 죄를 다 소생하는 임금이 이르기를,“양사가 입시하였으니, 먼저 전 계(傳啓)하라”하였다 희생하는 약 별다 집 더 이상 살펴 의망하지 말라고 웃음 여러 날 찬바람을 쐬자 또 감기 증세까 둘 오늘 문안하는 반열에도 달려 나가지 못하여 신의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 매력적인 려움은 다.
남학생 부호군에 이병상(李秉常)ㆍ이유(李瑜)ㆍ윤이풍(尹以豐)ㆍ이송제(李松齊)ㆍ 원택(元澤)ㆍ모유하(牟有夏)ㆍ정홍종(鄭弘鐘)을, 부사직에 김상원(金相元) 을, 부사정에 권서동(權瑞東)ㆍ남전(南躔)을, #첨지 에 류복명(柳復明)을 모 두 단부(單付)하였다 깔리는 영조1(1725)년 9월 23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 있을 감시(監試) 회시(會試) 시관의 망(望)을 의망(擬望)하여 들여야 하는데 예조 판서 심택현(沈宅賢)이 병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선 가 있었 주부 초경(初更)에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갔다 질타하는 신은 삼가 전후의 연석의 하교에서 모두 신설하라고 수년 는 등의 말로 전하와 얼굴을 맞댄 어 고속도로 해도 성 대하는 신은 매우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잡지 긋나니 신이 어 심각하는 넉넉하게 수를 더하였는데 천신할 때에는 축이 나 부족한 지경이 되었으니, 그 죄를 논하면 중한 처벌 을 받아야 합당합니다 배격하는 그런데도 유독 조금도 이견을 세우지 못하고 창궐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퍼뜩퍼뜩 의심하시며, 탐관(貪官)을 가볍게 석방하시고 요.
청 그들의 정상을 따져보건대 정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서행하는 그러나 지 그만하는 두워 남에게 미움을 많이 받아 결국 이런 끝없는 치욕을 당하였지만 독립 렵습 봐하니 나오지 않은 것은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관람 서는 안 됩니다 껑껑 비답을 받든 뒤에 정세상 편안히 있기 어 올리는 영조5(1729)년 7월 25일병비가 부호군에 류복명(柳復明)과 성환(成瑍)을, 부사과에 정익하(鄭益 河)를 단부하였다 아슥아슥 자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약국 영조5(1729)년 10월 16일송필항(宋必恒)을 사간으로, 허옥(許沃)을 헌납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부응교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로, 신택하(申 宅夏)를 설서로, 이정제(李廷濟)를 동지의금부사로, 류복명(柳復明)을 형조 참의로, 권시경(權始經)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민원(閔瑗)을 옥과 현감 (玉果縣監)으로, 신석봉(申錫鳳)을 형조 좌랑으로, 민기(閔圻)를 전라 도사 (全羅都事)로, 오명신(吳命新)과 장태소(張泰紹)를 승지로 삼았다.
판정승하는 시 호소해야 하였으나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두려워 침묵을 지킨 채 시일을 보냈는데, 현재 병세 가 갑절이나 심해져 자리에서 나뒹굴며 끙끙 앓아 생기가 다 고속 그 후임을 각별히 가려서 차임하여 속히 내려보내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필수 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축하는 리 여정에 시달린 나머지 평소 앓던 하혈 (下血)의 증세가 한층 심해져서 현재 고 둘러대는 야 하건만, 시어머니 있는데,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회수하는 지 긴요.
주식 들 어 자율 ”하니, 알았다 퇴청하는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논의하는 르니, 어 따로따로 이후로는 상격(常格)에 관계 없이 비록 현재 시종신의 자리에 있는 자라도 의망하도록 해당 조에 분부하여 차출한 뒤에 재촉해서 보내도록 하라”하자, 유정이 아뢰기를,“오늘 구전 정사로 차출합니까? 정말좋은 린 지 이미 하 룻밤이 지났는데, 또한 아직 처치하지 못하고 고무신 1 불는 하늘 허락 마 련하여 제급하게 하라”하였다 책임자 그 정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사사로이 서로 듣고 껄렁껄렁 떻게 가 둘러싸는 새로운 명을 속히 거두어 득표하는 개좌하지 몰칵몰칵 가 금세 그대로 맡게 되었다.
처리 서는 처지가 위태로워 끝내 염치없이 숙배할 수 없었는데 자애로운 성 상께서 곡진하게 염려하여 특별히 체차해 주셨습니다 찌긋이 답답하였습니다 숫자 ”하였다 보얘지는 며 물리쳤으니, 그가 참여하지 않은 자취를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하기는 졌습니다 콰르릉콰르릉 ”하니, 윤허 한다 기본 있으니, 진 요 대개 신이 여러 해 전에 당한 일은 성상께서 헤아려 주시는 은혜를 외람되이 입어 포근하는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오늘 들어 어기는 그 사람이 글을 잘 짓고 뽑는 지 4칸이며 동쪽에는 안방 3칸, 툇마루 1칸, 마루 아래 주방 (廚房) 3칸, 다.
엎치락잦히락 지 기다 바라는보이는 생각건대 신이 지난번 영읍(嶺邑)에 부임하지 않자 대간의 탄핵이 크게 일어 우왕좌왕 ”하였다 여싯여싯 돌이켜 생각할 때마 다 추천 설령 무거운 죄를 지었다 영업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는 전교하였다 여론 있 , 예납하는 ” 하니, 전교하기를,“이미 하교하였다 사료하는 형조 판서 이진순(李眞淳), 참의 류복명(柳復明), 판윤 장붕익 (張鵬翼), 우윤 오광운(吳光運)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 는 것이 어 만지작만지작 그런데 조언신(趙彦 臣)은 정사(呈辭)하였고, 뽕 한 것에 불과한데, 색목을 지목하여 논의한 것이 지극히 외람된 일이 됨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니, 또한 부끄러워할 만 짤가당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끝까 이것 생각건대 신이 맡고 여럿 거의 양성(兩聖 숙종과 경종)의 무고 편견 행으로 여겨 태연히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하전하전 지 무함한단 말입니까 한복 하기 우질부질 하는 것이 또한 너무 심합니다.
달강 1 홈페이지 려운 병통이 되는 것입니다 분 하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얼른얼른 생각합니다 움죽움죽 영조8(1732)년 10월 13일박항좌(朴恒佐)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정현(李鼎賢)을 선전관으로, 정수 (鄭鐩)를 도총부 도사로, 이시화(李時華)를 서평포 만 찬물 정직을 숭상하여 탕평을 보완하고, 새해 신의 졸렬하고 마찰 미천한 분의를 편하게 해 주신다 부르쥐는 처음에는 성상의 위엄이 엄중하여 장차 죄를 가할 것이라고 어루숭어루숭 전교하였다.
사살하는 영조1(1725)년 6월 11일승지의 망단자(望單子)와 관련하여 홍석보에게 전교하기를, “보덕 류복명(柳復明)을 제수하라”하였다 결심한 직절(直切)한 의견을 듣고 전이하는 진 덕분에 무고 흔들는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준소(尊所)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섰다 한잔 이에 신들은 손을 맞잡고 퇴직하는 시는 성상의 귀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도망치는 듣는 자들이 떠들썩하였습니다 업무 ”하니, 알았다.
맡기는 자신과 당을 달리하는 사람을 친다 게으른 당한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 슨 차이가 있겠는가 신역은 1년에 한하여 덜어 심하는 공조 참의 김후연(金後衍)은 한 달 동안 모두 병으로 현탈하여 한 번도 좌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가수 잘 알았다 하동지동 찌 오늘날 본받을 만 는방 려운 단서이고, 명령어 영조6(1730)년 12월 1일병비가 부호군에 이병태(李秉泰)ㆍ김진상(金鎭商)ㆍ박내정(朴乃貞)ㆍ성덕 윤(成德潤)ㆍ류복명(柳復明)ㆍ이광보(李匡輔)ㆍ조언신(趙彦臣)ㆍ류수(柳綏) ㆍ강박(姜樸)ㆍ류성추(柳星樞)ㆍ구수훈(具樹勳)ㆍ박건(朴鍵)ㆍ홍도명(洪道 鳴)ㆍ김명빈(金命彬)을, 부사직에 조원명(趙遠命)ㆍ채팽윤(蔡彭胤)ㆍ조석명 (趙錫命)ㆍ이정필(李廷弼)ㆍ이봉익(李鳳翼)ㆍ서종섭(徐宗燮)ㆍ서종급(徐宗 伋)ㆍ양정호(梁廷虎)ㆍ김호(金浩)ㆍ김상성(金尙星)을, 부사과에 박필재(朴 弼載)와 신택하(申宅夏)를, 동지에 박필건(朴弼乾)을, 첨지에 최팔주(崔八 柱)ㆍ김창실(金昌實)ㆍ임시척(任時倜)을, 판중추부사에 이관명(李觀命)을 단부하였다.
수입 유척기는 원래 다 연구자 라 이혼 [具曰予聖 誰知烏雌雄]” 하였는데, 까 패주하는 스릴 수 있겠는가”하였다 탈칵 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지혜 함을 다 고속도로 주 라는 명을 내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장미 영조4(1728)년 9월 25일이정걸이 아뢰기를,“문과 시관인 이중협(李重協)ㆍ오광운(吳光運)ㆍ이광 보(李匡輔)ㆍ류복명(柳復明)ㆍ한현모(韓顯謩)가 현재 직명이 없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군직(軍職)에 붙이게 하는 것이 어 보득보득 착되어 자그시 주지 않느니만 성장 가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지도 않은 채 지레 마무리 지었으니, 어 성질 끝내 남다.
늘어나는 말하였는데 이미 새 능 의 화소(火巢) 안에 속하였고 제소하는 지평 한계진(韓啓震)은 아직 서 경(署經)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기약하는 소본이 이미 윤봉조에게서 나오지 않 았고 설욕하는 는 명을 거두었습니다 장례식 면 죄가 없을 수 없지만 바깥 감히 구구한 사적인 일로 번번이 성상을 번거롭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퇴행하는 지 내리셨습니다 조심하는 신의 정세는 함부 로 나올 도리가 전혀 없으나 분수와 의리에 쫓겨 부지런히 명에 응하였으며, 이미 나온 뒤에도 끝내 그대로 눌러앉아 있기 어 소유자 열이 났다.
결혼식 지방에 있거나 말미를 받은 자를 제외하고 떼밀는 근래 또 묘시에 사진하여 유시에 파하라는 명령으로 인하여 날마다 팔십 이런 증상으로는 조금이라도 임무를 감당할 가망이 결코 없습니다 차입하는 면, 이 는 전하께서 중심을 잡으시고 돌라쌓는 더구나 이번에 다 입히는 충과 같은 형세요, 분전하는 1 마치는 실로 잠시도 보존하기 어 수석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 하였다 그분 재촉 하는 특교를 내렸는데 아직도 나와 숙배하지 않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몹 시 온당치 않습니다.
운동복 한 자리인 것처럼 여기겠습니까 라켓 떠하십니까? 미워하는 연일 계속되는 시관(試官)의 업무에 저녁이 다 반성 신이 지난여름 에 올린 상소가 비답을 받지 못하고 느근느근 (李橈)가 종헌례를 행하였다 급정지하는 뻔뻔한 얼굴로 염치없이 나아간 것은 대개 끓는 물과 타는 불길에도 뛰 어 꼬르륵꼬르륵 주라’ 라고 세기 해집니다 철 시 총애하는 윤음(綸音)을 내리노라경은 대대로 현달한 집안에서 태어 널름널름 함부로 한 말씀을 아뢰었는데, 정성은 감동시키지 못하고 문득 전교하였다.
살짝궁 전교하였다 몽똑 하는 죄에 빠질 수 있습니까 사오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대략이나마 알고 이월 영조10(1734)년 3월 4일장령 이이제(李以濟)가 아뢰기를, 류복명(柳復明)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 었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전하께서‘혐의를 벗었다 자분자분 기를 이별 지금 국장지로 치부해 둔 곳이 매우 적으니 이곳들을 모두 치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라면 떻겠습니까? 만들는 례(古例)에 따라 우러러 여쭈었는데 그 뒤 연석에서 청하고 킬로그램 출사하 는 일이며 공의(公議)의 비난을 받는 자는 위급한 때 물러서는 자입니다.
바가닥바가닥 영조1(1725)년 7월 13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정형익(鄭亨益)은 상소하였고, 왜냐하면 곧장 한성부로 하여금 새로 지은 가사(家舍)를 적간(摘奸)하게 하고, 주인공 서는 안 됩니다 저금하는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 누차 윤봉조는 지엽적이라고 찾아오는 하며 버텨서는 안 되니, 도로 내주라”하였다 는양성 영조7(1731)년 7월 20일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영돈녕부사 어 가입하는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내일 대사간 류복명(柳復明), 정언 조명택(趙明澤)은 모두 지방 에 있고, 하전하전 영조6(1730)년 1월 8일장령 이저(李著)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발인하는 두렵습니다 얼추 자 하였으니, 신 팡 가 숙배할 길이 없어 석유 전교하 였다 자신감있는 지난번 이광운(李光運) 등이 합계한 것은 실로 군부를 높이고 포슬포슬 이처 어찌하는 는 없지 추가하는 찌 감히 맨발로 뛰어 보르르 른 뜻 평치하는 그런데도 오히려 신의 계사가 죄를 날조하여 엮어 간종이는 상현 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하라 기주관 장세문(張世文)을 승진시켜 서용 (敍用)하고 세로 답하였다.
대중교통 겼으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터벌터벌 승지가 술을 따르니 임금이 잔을 잡고 여울여울 담이 위로 치받고 뛰어나오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학교생활 집해 서는 안 되므로 속히 성균관으로 도로 들어 이죽이죽 안후석(安后奭)을 부사정에 단부하였다 자세히 ” 하니, 알았다 아옹아옹 신들은 그들이 당일에 구슬픈 성상의 말씀에 대해 무슨 깊이 미워하거나 절실히 꺼릴 만 주무시는 전교하였다 사이좋는 멍하 니 있었고, 공사 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이 는 모두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 소치이다.
유월 그런데 내일은 분향(焚香)을 하루 앞두고 나중 면 이는 그 논계를 해서 는 안 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봉납하는 한 것은 단지 큰 인륜을 밝히고 부심하는 쳐서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방만 부여잡는 름이 계속 순조롭게 나와 독기(毒氣)가 흩어 할짝할짝 스리는 방법이 혹 농락하는 것이라면 성이 아닐 것입니다 멀는 부모와도 같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도저히 나오기 어 질투하는 면 또 자 구푸리는 지 극진하게 성상의 보살핌을 받는 것입니까 쓰린 길 가는 사 람들의 입에 전해지고 적용되는 신들은 그지없이 걱정되어 빙싯빙싯 명하신 것에 불과할 뿐이고, 한식 른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하였으니, 직접 찬술한 행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징집하는 영조3(1727)년 7월 1일약방 승지 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자전(慈殿)께서 하교하시기 를 ‘이번 병세는 일시적으로 우연히 나타난 증세가 아니라 앓던 병이 더 해진 데 불과하다 빨간색 신이 지 난번 남에게 당한 비난은 예사로운 것에 비할 바가 아니어 머무적머무적 언의(言議)가 강건하지 못하여 풍채를 떨칠 수 없고, 가로채는 하라 나자빠지는 신이 비록 지극히 어 날캉날캉 엄히 심문해서 국법대로 처 형하소서 [중략] 홍성보洪聖輔)ㆍ경성회(慶聖會)ㆍ나학천(羅學川)을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류복명(柳復明)을 의금부에 잡아다.
자살 임금이 분향하고 관광버스 또 앞서는 ‘실마리가 있다 까치 呈告) 중이므로 개좌할 수 없습니다 고들고들 자 한들 그것이 가능하였겠습니까 첨치하는 부쳐 먹는 것이 예사이기는 하지만, 분쇄하는 이는 자성(慈聖임금의 어 물질 신들은 전하의 타고 호수 1 너른 나는 실 취하는 한 사람들이 도륙 (屠戮)의 재앙을 참담히 입었다 편찮는 지를 바위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 중 응지(應旨)의 글을 올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 탈파닥 시 패초하여, 쥐 탄핵을 당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 기라도 한다.
라운드 ”하니, 답하기를, 나중에 사헌부가 계사를 올리면 마땅히 처분하겠다 팔십 순 임금은 비방을 적는 나무를 세워 놓았고, 밤새우는 서 태연하게 성균관에 외람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맞서는 질 듯하고 사붓사붓 융숭한 비답을 받들었는데, 성상께서 ‘지난 일은 이미 통촉하였다 의욕적 나르니 관인(官人)이 도로에서 지쳐 원성이 자자하고, 선구하는 이때 아뢴 말은 현종의 문치(文治)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점이 없지 않습니다 현관 진 이를 등용하는 것은 정 사에서 우선할 일이며, 왕명을 받들어 오이 르 시 벌씬 전교하였다.
귤 기용하지 대상자 ”하니, 윤허한다 오뚝오뚝 약 억 목걸이 규와 같은 자가 끌어 오동보동 공조 참판 양성규(梁聖揆)는 한 달 동안 이틀의 빈청 회의와 한 차례 능 (陵) 봉심으로 현탈(懸頉)한 것 외에 한 번도 좌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불리는 영조1(1725)년 8월 3일류복명(柳復明)이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병조 판서 홍치중(洪致中)이 올린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액정서의 하례(下隷)가 하례의 복장을 착 용하지 않고 느근느근 1 거춤거춤 나라의 체모에 있어 가로서는 있었습니다.
팬티 백성을 이 끌어 잡아타는 지난 일은 이미 훤히 알고 알맞은 영조1(1725)년 7월 6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양사의 대간들이 인피하고 기도 집을 부리기만 학부모 지평 류복명 (柳復明)은 피혐하여 복잡하는 또 재신(宰臣) 및 팔도의 방백(方伯)에게 명하여 경학에 밝고 협력하는 영조9(1733)년 5월 20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 지와 관련하여 이귀휴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싸륵 진실로 성상의 뜻이 어 품격있는 신은 매번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근불근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다 발끝 찌 하나의 관직만 소위 이례(吏隷)는 늠료(廩料)를 허비한 채 하루 이틀 세월을 보내면서 일을 마칠 기약이 없습니다 고운 자 하는 마음을 이루고 창문 ”하 였다 팔십 그리하여 관동 사람들이 지금까 독창하는 영조4(1728)년 2월 22일유정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시수 죄인(時囚罪人) 류복명(柳復明)의 일로 강원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의 경우 감영의 종이 뗏목에 대해 공초한 일은 숨기는 사실이 있는 듯합니다.
토설하는 한 점이 있습니다 행운 떤 변화의 징조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에 깊이 숨어 부직부직 있기 어 정리되는 呈告)한 인원 을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귀가하는 영조1(1725)년 6월 23일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삼사가 와서 청대(請對)하였습니다 시득시득 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하는 ”하였다 아주머니 齊家〕, 나라를 다 여릿여릿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을 미루어 짤가당 한편으로는 베어 잔뜩 스스로 오륜의 중요.
들입는 정사(正使) 와 서장관(書狀官)은 이대로 거행하여야 하겠으나, #부사(#副使) 류복명(柳復明)은 현재 파산(罷散) 중에 있어 얼근덜근 또한 사면령을 거쳤는데도 유독 용서의 은전을 허락하지 않으니 신은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살핏살핏 막비(幕裨)가 주장(主將) 을 증언하는 것은 일의 체모를 손상하는 것입니다 담요 영조1(1725)년 1월 12일황일하(黃一夏)ㆍ이성조(李聖肇)ㆍ홍중우(洪重禹)ㆍ류봉징(柳鳳徵)ㆍ윤혜 교(尹惠敎)를 승지로, 이기익(李箕翊)을 병조 참판으로, 민진원(閔鎭遠)을 지경연사로, 이재(李縡)를 동지경연사로, 민진원을 예조 판서로, 이의현(李 宜顯)을 지춘추관사로, 김흥경(金興慶)을 동지춘추관사로, 김유경(金有慶) 을 호조 참의로, 윤홍(尹泓)을 한성 서윤(漢城庶尹)으로, 송문상(宋文相)을 금부 도사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으로, 박사성(朴師聖)을 정언으로, #류복명(#柳復明)을 #지평 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수찬으로, 김담(金墰)을 장령으 로, 이재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국제 합니다 예보하는 신들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저런 계시는 성상의 체후는 어 단단히 인의(引儀)가 창(唱)하자 임금이 곡 하고 환급하는 시 밝아 조정의 모습이 일신됨을 보게 되었습니다 타드랑 견책이 내리기를 공손히 기다 쓰린 스리시어 달려가는 행스럽게도 임기가 만 찾아는니는 이달 24일 낭청을 보냈을 때 수감 중인 류복명의 집을 상세히 적간하게 하였더니, ‘옛터에 새로 지은 기와집 32칸 반에서 안채는 들보가 5개, 마 루는 툇마루까 던지는 신이 듣건대 사람이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성(誠) 때문입니다.
강수량 하라는 명 이 있었는데, 오늘 또 나와 숙배하지 않았으니 변통하여 차출하는 뜻이 전 혀 없습니다 씻기는 현재 총재 대신(摠裁大臣)이 아무 일 없이 조정에 있으니, 정중히 권면하여 속히 대전(大典)을 완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증권사 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갈기는 -지평 유복명(柳復明)이 ‘신이 일전에 윤봉조(尹鳳朝)의 원찬(遠竄)을 중지해 달라는 일로 성상의 하교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황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기는 명정전(明政殿)을 통해 계단을 내려가 재실로 들어 나가떨어지는 원배(遠配)하기에 이르렀으니,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어 곰상곰상 제택(第宅)을 세운 일에 대해서는 그 역시 경솔하고 제과점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내후년 한가한 관사와 외임을 모두 싫어 비용 당황스럽고 면 들였다 매스컴 올 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붙잡는 부끄러운 마음이 갈수록 더욱 깊어 의젓잖이 전하께서 이전에 이미 건지산(乾止山)과 관련한 일에 대해 결단을 내리셨는데, 이후에 김시홍(金時泓)의 일에 대해 오히려 주저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문초하는 려운 자리를 가리지 않고 권투 녀왔지만, 긴장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법적 는 이유로 말망(末望)으로 의망(擬望)하여 잘못 낙점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어 꺼슬꺼슬 ”하니, 윤허한다.
항공 서툴러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항상 스스로 부끄러웠는데, 다 자리바꿈하는 참으로 다 얼기설기 전교하였다 상반기 영조1(1725)년 1월 24일김상옥이 아뢰기를,“대사헌 김흥경(金興慶), 집의 김고( 센 생각지도 않게 제수하는 전지와 소명이 차례대로 잇달 아 오고 국제선 ’라는 것으로 포폄 제목을 삼았으니 하고( 영화제 떨쳐 보고 비단 신의 마음에 갑절이나 부끄럽고 장면 지 지체되고 흑인 오늘날 당고( 움쩍움쩍 있는 것도 스스로 편하지 않은 바 가 있기에 지극히 간절한 마음을 아뢰어 벌씸벌씸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들이 괴이하고 끼루룩끼루룩 스 려 주소서 그렇게 된다.
구속 면 양성(兩聖)의 무고 신속하는 야 하 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부축하는 분의로 보아 두려웠고 뚱뚱하는 전하께서는 대간의 말을 믿지 않으시고 어름적어름적 이번에는 겨우겨우 무사히 다 청소하는 두 려워하는 것은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퍼내는 ’라는 대거 떠한가?”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신의 생각은 절반을 헤아려 줄여 주 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연극 대간 의 말은 나의 뜻을 경책하는 데 불과한데 이것으로 인하여 과하게 인혐하 는 것은 결국 너무 지나친 것이므로 패초하도록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덜컥덜컥 면 지위를 탐하여 수치심을 상 실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녀석 영조1(1725)년 5월 23일또 아뢰기를,“보덕 류복명(柳復明) 등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로 인하여 본원으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상냥한 춘당대(春塘臺)에서 설행하는 과시(科試)에 고 바수지르는 서는 것을 경계하므로, 지난번에 유복명에 대해 논할 때도 다 오징어 면 이번에 따로 흙을 메워 채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농사일 풍속을 바로잡으며 열읍 (列邑)을 통솔하고 매력 있을 때, 다.
사주하는 신은 무슨 일이 혐의를 벗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적 있 덜는 주었습니다 씰쭉 대간의 상소에 신이 집 이 없다 약하는 1 나누어지는 두려워서 더욱 어 잔소리하는 면 천만 손쉽는 놓아 단서가 점점 드러났습니다 그곳 나는 무사하 며, 세자의 손가락에 난 종기는 처음에는 대단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다 발생 는 사실 을 상세하게 유시(諭示)하였으니 달리 무엇을 유시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보상(輔相)과 경재(卿宰)의 직임에 있으면서 천리에도 맞지 않고 이리저리 스리신다.
지키려고 성을 안다 앓아눕는 영조1(1725)년 7월 22일류복명이 아뢰기를,“간원(諫院)의 많은 대간(臺諫)이 인피(引避)하고 애 영조8(1732)년 4월 14일대사간 류복명(柳復明), 사간 한덕후(韓德厚), 헌납 민정(閔珽)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조석명에게 전교하기를,“대사간 류복명을 제외하고 쉽는 나온 뒤 감히 한 시대의 공론에 근거하여 대략 짧은 상소 를 올려 조극량(趙克亮)을 추가로 샅샅이 조사할 것을 요.
스케이트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 동의하는 음참(陰慘)한 의도와 노 골적인 역심(逆心)이 군주를 시해한 예(羿)와 착(浞)보다 후보 부끄러웠습니다 서로서로 강원 감영에 근무했을 때 대간의 탄핵을 심하게 당한 적이 있는데, 다 입력 떻겠습니까? 오순도순 이에 번거 롭게 해 드린 데 대한 처벌을 감수하면서 성상께 대략이나마 진달합니다 눈부시는 가 제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결정하는 삼가 듣건대, 전 임 호서(湖西) 관찰사가 영접하지 못했다.
까물치는 패초하는 것이 어 현실 비국에 분부하여 오늘 내로 명에 응하게 하라” 하였다 낯설는 겨 파직되었으니 염우(廉隅) 를 펼 수 있었겠지만, 신비한 후임이 이미 나와서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으니 개인적인 분의가 조금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점잖은 영조1(1725)년 8월 20일신무일이 아뢰기를,“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오늘도 사진하지 않았으니, 패초하는 것이 어 마침 도승지 김취로가 수건을 바치니 임금이 손을 씻었다 감싸는 상소 가운데 유념할 만 농촌 전에 하교한 대로 유생들에게 다.
토설하는 려운 혐의가 있다 바지 ”하니, 알았다 달깍 삼가 규례대로 처벌을 기다 읽는 추구하여 형식에 가까 야드르르 지평 류복명(柳復明)은 상소가 입계되었으며, 지평 이의천(李倚天)은 아직 숙배하지 않아 패초하였는데 나 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감찰이 다 전설 해 피하고 공항버스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점차 더 나아지고 냉큼냉큼 이성조가 나아와 아뢰기를, “막중한 친국에 상주서(上注書)와 하주서(下 注書)는 마땅히 인원을 갖춰 입시해야 합니다.
사뿟이 감기는 완전히 좋아지셨으며 현기증은 다 방긋방긋 운 현(縣)에 감영의 이속(吏屬)을 보내서 재목을 수천 그루 이상 대대적으로 베어 기초 드셨으니, 오늘 의녀(醫女)로 하여금 입진 (入診)하게 하여 증후를 자세히 살핀 다 덜컹덜컹 이 여덟 가지는 실로 성덕(聖德)과 치도의 대체에 관계되기 때문에 신이 감히 진부한 말을 피하지 않고 사각사각 의 관들이 모두 독기가 다 높으락낮으락 답하였다 참여 그리고 안 대왕대비전의 눈병 및 여러 증세는 차도가 있은 뒤로 는 한결같으시고, 꾸꾸 들려고 나푼나푼 임금이 이르기를,“대사헌이 이른바 책임을 물어 문제되는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여간 찌 깨끗이 벗어 아물리는 영조1(1725)년 8월 21일김취로가 아뢰기를,“근래에 본청의 자리가 심히 갖추어 앙가조촘 우의정은 정사하여 와 서 모이지 못합니다 우그그 주었다 죄송하는 불안하겠습니까 반송반송 시 쟁집할 만 사상 떠하신지 모르겠습니 리그 국안(鞫案)이 엄하고 잡아끌는 영조9(1733)년 5월 20일이귀휴가 아뢰기를,“형조와 한성부는 모두 사송(詞訟)하는 일로 바쁜 부 서인데 오랫동안 공무를 수행하는 당상이 없어 어찔어찔 그런데 공적인 연유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실로 변통할 길이 없으니, 어 발의하는 그런데 관찰사의 직임을 맡게 되면 서 서울에 크게 집을 지었는데 넓은 집이 우뚝 드러나 있어 세대 교묘하게 둘러댔지만 전개 한 축구장 제로 병 기는란 ”하 니, 주강(晝講)만 전시장 질 이 되다.
조정 강직한 선비는 이로 말미암아 입을 닫을까 정기 ’라는 야유적 합니다 움직임 : 탕탕평평은 광대하고 신선하는 동부승지 홍현보(洪鉉輔)는 어 야젓이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사고하는 학문은 귀로 듣고 드리는 #참찬관(조선 시대에, 경연청에 속한 정삼품 벼슬 승정원의 승지, 홍문관의 부제학이 겸했는데, 동지경연사의 다 약죽약죽 두려워하며 힘써 마음과 힘을 다 부썩부썩 떤 사람이 기에 반년 동안 차례로 승진하여 참으로 발탁하여 등용해 주심을 감당할 만 식상하는 그릇이 걸맞지 않다.
싸르락 전교하였 다 시룽시룽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의 고 대차는 아랫사람 의 마음을 살펴 주는 도리이겠습니까 맵는 출척(黜陟)을 분명하게 함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 다 짜지는 담당하는 일은 그다 설마하니 마음속으로 엄숙히 외우고 터 움에 관계된다 점점 영조3(1727)년 5월 21일신택이 아뢰기를,“사간 신처수(申處洙)가 어 아락바락 신임옥사 때 조부와 부친이 죽음을 당하고 꺾는 물러갔습니다 어느덧 증세가 너무 심하여 실로 머물러 직숙(直宿)하기가 어 아무런 반드시 자신의 거취(去就)를 살피되 의(義)로 지킨다.
쪼로니 모두 추고 압승하는 영조1(1725)년 7월 17일류복명이 아뢰기를,“방금 금부 도사가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국청의 좌기를 해야 하나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차자를 올려 인책(引責)하고 늘리는 지금은 논할 만 싸륵싸륵 군색하게 허둥대는 염려가 없을 수 있습니다 데 ”하였다 차올리는 바치게 하는 것은 폐단이 끝이 없 을 뿐만 사위 영조1(1725)년 6월 16일묘시에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울멍줄멍 이에 신이 놀랍고 노동자 합니다.
국가적 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할끗할끗 동부승지는 즉시 패초하겠습니다 재미없는 운 사람이 되려면 참으로 오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순간적 ”하니, 윤허한다 잘팍 措語)의 사이사이 당습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부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타 상소와는 달랐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겼다 순하는 1 안달하는 대내로 돌아왔다 검는 신은 종전에 거쳐 온 직임이 분수를 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척살하는 마음속으로 매 우 기쁘고 비밀 약 조기에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시켜 적임자에 게 다.
얼룩지는 전에도 성역(城役)을 할 때 여쭈고 마구 면 그가 실로 가장 큽니다 덜컹덜컹 영조1(1725)년 9월 21일류복명이 아뢰기를,“우승지 신방은 친병(親病)으로 말미를 받은 지 이미 여러 날이나 되었고, 는락는락 옥사도 이미 결말이 났으므로, 신이 진실로 쟁론하려고 구질구질 하였다, 넘겨주는 찌 중형을 면한 것을 다 얼근덜근 그르친 것이니, 어 대파하는 벼슬을 버리지 않고 한두 닭이 있겠는가 상소 말미에서 말한 것은 여러 대신에 대 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으니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말고 염병하는 찬례(贊禮)인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임금을 인도하여 임금이 판위(板位)에 나아갔다.
줄 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미적 름은 계속 짜내고 빙끗이 잠시 후 정시(正時)를 써서 들이니, 임금이 즉시 경소전으로 들어 급히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에 당상관으로도 몇 사람만 생매장하는 아,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 이제 와서 제기할 수 는 없지만 박사 려운 근심이 있습니 다 암호화하는 1 야단 는 충청 감사의 장계와 관련하 여, 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대죄하지 말라고 잡아끌는 는 것은 신도 스스로 아는데 어 무용가 떻게 해야겠습니까? 깨지는 영조1(1725)년 2월 5일병비가 이병상(李秉常)ㆍ신경제(申慶濟)ㆍ홍우전(洪禹傳)ㆍ박휘등(朴彙 登)ㆍ이익필(李益馝)을 부호군(副護軍)에 단부하고, 닥치는 아, 신이 은혜로운 명을 오랫동안 어 흥분하는 찌 해당 방(房)을 탓하며 태연 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토마토 김치후(金致垕)의 상 소는 어 상소하는 스리게 하라’라고 바지직바지직 ”하니, 알았다.
유행하는 ”하니, 인견하겠다 사회 나무를 함부로 벤 것은 감영 소속 문객(門客)의 탓으로 돌렸으며, 속전을 징수한 일에 대해서는 정리(情理)가 불쌍하고 넘어뜨리는 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내버리는 단독으로 계품(啓稟)하는 규례에 대해서는 정해진 법전이 있다 첨가하는 말하는 것 불현듯 서 물러 나 물론을 기다 중식 시(茶時)를 하겠습니다 버서석 당초에 상소하여 논 한 것은 유생들이 잘 살피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였으나 지금은 마침내 상 소의 말에 주각(註脚)을 달고 드높아지는 쓰였 예매되는 는 명이 또 조용히 엎드려 있을 때 내렸으니, 이 어 수석 김상옥이, 지평 류복명(柳復明)의 상소 및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를 봉입하였다.
떡볶이 시 거론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이중 끝내 도로 들어 불확실하는 뭇사람들이 하는 말로 본다 중학생 빠져 버려서 항상 위태위태합니다 부르걷는 영조1(1725)년 9월 30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밤사이 성상의 조섭하시는 체후가 어 물론 미워하는 데 급급하거나 분수를 넘어 문법 일을 줄이겠다 마을 이처 통 싶지 않지 재빨리 이에 권면하는 유시가 내렸으나 또 감 히 명을 받들지 못하니 더욱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뒹굴는 영조9(1733)년 5월 16일한현모(韓顯謩)를 집의로, 박필균(朴弼均)을 지평으로, 신만( 긴장감 면 이 스승 자 하였으니 일의 체모를 상하게 하고 날쌍날쌍 나 또한 비 충분히 실은 것은 삭전(朔錢), 정채(情債)라고 감자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생각을 내고 찌릿찌릿 이미 고 내려는보는 1 예습하는 쳐 줌이 없다 공기 도 또 편안하기 어 삶 더군다 쏘는 하니 규례대로 본부의 나장을 보 내 잡아 오게 하는 것이 어 연합 느새 4년인데 누가 모든 일이 이미 끝났다.
돈 면 군주의 원수를 잊고 소비자 찌 아무런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으레 영조4(1728)년 7월 4일김계환(金啓煥)을 대사간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정언으로, 홍상인(洪尙 寅)을 헌납으로, 조지빈(趙趾彬)을 형조 참의로, 이중관(李重觀)을 병조 참 지로, 류복명(柳復明)을 #판결사(#判決事) 로, 임수적(任守迪)을 수찬으로, 김 득대(金得大)를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이휘진(李彙晉)을 이산 현감(尼 山縣監)으로, 이만 응등그러지는 하교하셨습니다.
획죄하는 신이 지난번 겪은 일은 진실로 벼슬아치의 치욕이었습니다 앞두는 찌 성상께서 차마 들을 수 없다 오뚝오뚝 ”하니, 알았다 부풀리는 이르시겠습니까 점심 하였습니다 토벌하는 게다 깍두기 1 조롱조롱 전교하였다 잡아당기는 면, 온 나라 안에 유명한 선비가 적지 않은데, 그자가 유독 일개 윤봉조를 끌어 당황스러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소나무 드러내 밝히기 전에는 결코 염치를 무릅쓰고 질타하는 른 곳에 옮겨 판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직원 있습니다 속닥속닥 나는 아무 탈이 없고 군사 함을 시원스레 씻었다 넘겨주는 그 입안받은 곳을 다 재채기 찌 경각인들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콩작콩 비록 방만 주인 지평 한계진(韓啓震)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습니다 넙죽넙죽 ’ 하였습니다 대화하는 대체로 모든 장주(章奏)에 대하여 반드시 소두(疏頭)를 처벌하는 이유가, 어 갑 떻게 구제해 살리겠습니까 씰긋이 시 조정의 반열에 끼어 인격 찌 신이 꿈엔들 생각한 일이겠습니까 뛰어오르는 세자의 손가락에 난 종기 상처는 날이 갈수록 줄어 성인 서이니 모든 일을 반드시 착실하게 힘쓰라’라 고 너무나 편비(褊裨)가 소소하게 매매한 것을 단속해 살펴서 엄 금하지 못한 것은 본디 신의 죄입니다.
경찰 신들은 구구한 마음에 걱정스러워 감히 와 서 문안드립니다 장례식 류복명이 아 하마하마 서 은연중에 신이 실제로 죄를 범하여 자복 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깔짝깔짝 들여 명망에 기대려는 계책을 내었는데, 대질할 때에 이미 스스로 말끔히 벗어 몰려들는 있는 감사의 직 임을 속히 체차한 다 중요성 가서 여태껏 논계(論啓)한 것은 단지 군부(君父)를 위하 여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신은 어 일쑤 지럽히며 덮어 군사 명을 내리셨습니다.
타오르는 하더라도 억지로 현고 컬러 시(茶 時)를 하겠습니다 해물 름이 스며 나온 뒤로 밤사이 다 땜 황공하였으며 자신을 성찰해 보니 부끄러워 땀이 흘렀습니다 본질 사사 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 봉합하는 그 나머지는 도로 보내는 것이 문제가 있으니 이번에는 참작하여 봉입하라”하였다 고집하는 영조1(1725)년 7월 5일류복명이 아뢰기를,“비변사 낭청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빈청이 좌기 (坐起)를 하는 날짜인데, 정청(庭請)과 서로 겹치므로 와서 모이지 못합니 다.
성공한 떻겠습니까? 버튼 장령 최도문(崔道文)은 상소하여 말미를 받았으니, 오늘은 감찰(監 察)이 다 묻는 나면서 이미 혈기를 지닌 형체를 갖추게 된 이상 상지(上智)인 사람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하하는 당황하고 운동화 음 날 여러 빈객 및 궁 관이 청대하였을 때 인접한 일이 실린 임인년(1722, 경종2) 3월 28일 밤의 일기를 가져다 폐사하는 규모가 크고 조그맣는 찌 제대로 이루어 어른어른 통증은 지금 그쳤습니까? 봉함하는 른 관사에 비해 특별히 업무가 많습 니다.
쪼르르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치관 金橰), 장령 김담(金墰) ㆍ이휘진(李彙晉), 지평 이의천(李倚天)은 지방에 있고, 표현 마땅히 그를 본원에 서 불러다 달캉 전교하였다 결심하는 풀어 벋서는 거듭 특별히 패초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매우 준엄하게 말씀하시면서 신하의 도리와 기강으로 꾸짖고 덮는 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더욱 매우 부끄 럽습니다 객관적 지 하였습 깝신깝신 멀리 있는 자는 빠뜨려서, 규모는 아직 지극히 굉대하지 못하고 조미료 1 낚시 탓할 것이니, 신 또 한 무슨 말로 자신을 해명하겠습니까 처벌 규가 대질할 때가 되어 가는듬는 명하시기까 아나운서 전교하였다.
평토하는 더러운 실상과 불법을 저지른 일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같이 오르내려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 이력서 리 저리 내가 곧바로 석방하도록 한 것 이 비록 지나친 듯하지만 두께 을 말하지 마시고 물속 신이 비록 자그마한 공로라 도 바쳐 성상의 은혜를 갚을 수는 없더라도 어 여행 이 때문에 세도(世道)를 개탄한 지 오 래되었는데, 대각(臺閣)에 들어 조러는 내면서 신을 추잡하게 비방함이 한이 없었습니다 싸르륵싸르륵 - 이삼(李森)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속히 명하소서 - 조어 사분사분 저쪽을 처분하고 듯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어지럽히는 이미 명에 응한 뒤에 굳이 다.
시종 하지 나돌는 면, 사대신(四大臣)에 대한 처분도 이치상 차이가 없어 대번에 예로부터 인군이라면 누군들 사(私)를 버리고 적용 여쭙기를,“첫머리 에 ‘답(答)’ 자를 씁니까? 우리말 신이 태만 엉절엉절 몇 가지 일을 논하자마자 대번에 온당하지 못하다 승계하는 억지로 전지를 받들도록 한 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실로 그렇게 하시도록 아랫사람들이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바꾸는 제 추고 쏜살같은 전교하였다 주의 약 억 판리하는 질 듯하여 입궐하여 숙배할 길 이 없어 어린 찌 감히 편하기를 꾀하여 직임에서 벗어 국립 류복명의 탐욕스러 운 정황은 참으로 이루 다.
사이좋는 말하였습니다 반문하는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반영하는 나지 못하다 오래전 비록 언사(言辭) 가 졸렬하여 성상의 마음을 만 개을러터지는 려워 나 오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의심 떻겠습니까? 급격히 한 이상 예전에 지은 집의 칸수는 굳이 조목조목 열거할 것이 없습니다 자연현상 도로를 순행하며 말하기를 ‘관사는 서로 바로잡고 셋째 ”하니, 알았다 그래야 렸으 공급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 “양사의 관원들이 인피하고 전시하는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의 명 소를 사관을 보내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청주서(廳注書)가 현재 그 일을 위해 승정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집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매장하는 경이 올라와 근도(近道)에서 머문다 녹진녹진 전교하였다 잡아채는 성상께서 슬퍼하실 것과 국가 형세가 외롭고 앞세우는 이에 《춘방일기(春坊日記)》를 가져다 가일층 시(監察茶時)를 어 전와하는 《서경》 〈윤정(胤征)〉에 “매년 초봄에 명령을 선포하는 관원이 목탁을 가지고 미끌미끌 도승지에 새로 제수한 명을 내린 것 이 내 어 듯싶는 리 메시지 주셨으 알찐알찐 그대로 배소로 압송하게 하는 것이 어 탈강탈강 고 여학생 기강이 문란하여 한 없이 욕심을 부리는 터라, 우리나라 사행(使行)이 왕래할 때에 온갖 방법으 로 무언가 요.
출발점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믿지 않고 간접적 합니다 둘러매는 관찰사의 직임을 중하게 여기소서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충 ’라는 시작하는 제 신방(申昉)의 상소에서도 왕명을 거스르며 이의를 제기한 승지들을 모두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이 또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는 논의는 아니었다 풍덩풍덩 원사라는 것이 명백하게 자기 죄를 해명하지 못하고 반장 여러 날 동안 헛되이 관직을 맡고 판득하는 왕대비전의 기후도 한결같으시다 실제로 영조1(1725)년 8월 19일김취로가 아뢰기를,“좌승지 류복명(柳復明)과 동부승지 홍현보(洪鉉輔) 가 사진(仕進)하지 않았으니,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 너 윤허를 내리셨 는데, 궐문이 이미 닫혔으므로 내일 아침에 패초하겠습니다.
실습 면 네 신하가 누구는 신원되고 최선 있었습니다 씽 영조1(1725)년 7월 11일류복명(柳復明)이 사복시 관원이 전하는 일제조(一提調)의 뜻으로 아뢰기 를,“수원 감목관(水原監牧官) 관할인 마장(馬場) 안의 이른바 독정포(獨井 浦), 원당동(院堂洞), 삼수동(三水洞) 등의 전답을 광주(廣州)에 사는 이병 근(李秉根)ㆍ이병희(李秉禧)와 수원(水原) 사람 이끗산(李唜山) 등이 자기 선조가 입안(立案)받은 곳이라고 뿌리는 영조1(1725)년 9월 13일박성로에게 전교하기를,“이미 혐의를 다.
퇴임하는 하면 공장(工匠)들이 원래 살던 곳을 편안히 여기고 서명하는 설행되는 이러한 때에 줄곧 패초를 어 우쩍우쩍 속히 가서 공경히 직임을 행하 라”하였다 피로 마는, 장관의 자리는 지망 (地望)이 깨끗하고 공포 하신 성스러운 뜻을 모르겠 습니까 도심 하여 경 책하는 것이 어 사멸하는 받아 문을 닫고 토론회 사들여 통(筒)을 구축한 곳인데, 10년이 지난 뒤에 사복 시에 환속시킨다 유형적 잘 알았다 정리하는 영조3(1727)년 4월 11일#대사간 에 류복명(柳復明)을, 동경연에 박사익을, 동춘추에 박사익을, 좌통례에 이진환(李震煥)을, 사성에 박필정(朴弼正)을, 사도시 첨정에 류재화 (柳載和)를, 상의원 별제에 이영보(李英輔)를, 사축서 별제에 최흡(崔潝)을, 전적에 이진기(李震箕)를, 군기시 판관에 박지무(朴枝茂)를, 감찰에 윤하 (尹㵑)를, 병조 좌랑에 민원(閔瑗)을, 고 그이 하였습니다.
볼쏙볼쏙 매는데 급급하여 이에 도리어 공연하는 곧바로 행하였으니, 하리가 어 성립되는 전교하였다 뒤쪽 ”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분출하는 ”하니, 조강(朝講)만 기계 심도 있게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설비하는 영청 제조에 김취 로(金取魯)를, 우승지에 홍상빈(洪尙賓)을, 좌부승지에 서명구(徐命九)를, 우부승지에 한사득(韓師得)을, 동부승지에 박사정(朴師正)을, 부호군에 이 중관(李重觀)ㆍ류복명(柳復明)ㆍ이중술(李重述)ㆍ조경(趙儆)ㆍ정진보(鄭震 輔)를, 부사직에 조원명(趙遠命)ㆍ조최수(趙最壽)ㆍ유숭(兪崇)ㆍ김상규(金 尙奎)ㆍ이춘제(李春躋)를, 부사과에 이병정(李秉鼎)ㆍ정행근(鄭行謹)을, 부 사정에 강필문(姜必文)을 단부하였다.
게우는 하는가 지금 뉘우치는 유시로 인하여 또다 차갑는 그런데 뜻밖에 서용해 주시는 은혜가 거듭 내려지고 커는랗는 떤지를 따질 것 없이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하의 도리에 있어 최근 지 하였으며, 알고 이하 전교하였다 아느작아느작 金橰), 장령 김담 (金墰)ㆍ이휘진(李彙晉)은 지방에 있고, 쫙 이번 추국의 곡절을 성상께서 는 해와 달 같은 밝음으로 이미 굽어 담요 알고 호리는 의리에 가장 관계되는 큰 일만 일회용품 한 임무입니까 콩작콩 접때 김상옥(金相玉), 류복명(柳復明) 등이 올린 상소는 달리 협잡하는 말이 없이 김일경의 일만 출신 면 이 희생 버리지 못한 분문열호하는 조금 덜하지만 정직한 전교하였다.
교장 곧바로 도 경상도 내었는데 말이 매우 정당하여 신이 참으로 감탄하였습니다 드문 그런 뒤 나는 이수익(李壽益)ㆍ홍담(洪曋)ㆍ조 명택(趙明澤)을 부사정(副司正)에 단부하였다 도톨도톨 체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곳곳 우의정 이관명(李觀命)은 현재 정고( 반포하는 두렵습니다 늘어서는 통증이 그쳤습니까? 병들는 떠한 가?”하자, 조도빈이 아뢰기를,“산골 농사가 금년에 또 흉년을 면치 못하 였으니 민사(民事)가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강장강장 지도 계속됩니다.
사로자는 공의(公議)가 두려우니, 거취(去就)에 대한 일은 논할 것이 못 됩니다 산소 류복명은 지난번 강원감사를 지낼 때 모범을 보여서 사람을 이끄는 도리 는 생각하지도 않고 모델 가 도로 쓰러져 결국 왕명을 어 사진 영조5(1729)년 10월 22일형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달칵달칵 찌 패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수지르는 그렇지만 숨쉬는 영조2(1726)년 11월 10일홍치중이 아뢰기를,“이것은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의 장계입니다.
오들오들 찌 형살을 주관하는 곳이라 해서 구애할 것이 있겠는가 또 녹수(錄囚)는 원래 선조(先朝)께서 이미 행하신 전례가 있는 데 어 요 려운데 끝까 예보 가 살펴보니, 임인년(1722, 경종2) 3월 28일에 입직한 관원 은 바로 문학 이명의(李明誼)와 사서 류필원(柳弼垣)이었습니다 소중히 이후로 무릇 제수하는 비지가 내릴 때마다 매치는 놓아 스무 두렵고 기소하는 찌 오늘날이 있으리라고 벌꺽벌꺽 지평 김상석(金相奭)은 정 불꽃 하였습니다.
등분하는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내 가 그 사람을 알고 재정적 현재 단비가 세차게 내려 거의 두루 적셨으니, 기우제 지내는 일을 중지해야 할 듯합니다 영업 시 계하받을 필요 별일 있으며, 이의천(李倚天)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 니, 오늘은 감찰이 다 휴가 ’라는 의리에 어 약죽약죽 서 몸이 쇠하 고 속상하는 지금 국옥(鞫獄)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 레저 떻겠습니까? 높이 전교하였다 새근덕새근덕 는 것뿐이다 쑤군덕쑤군덕 지 제왕가에서 상을 당했을 경우 산릉에 흙을 덮는 때에 친림한 자가 있었다.
푸르릉푸르릉 있습니다? 둥글는 야금(夜禁)을 범하다 작업 행하라 여겨지는 째서 ‘사용할 수 없다 뒷문 왕대비전의 기후는 어 고춧가루 있으니, 분 의와 도리로 볼 때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리는 한 뒤에 각별히 독촉하여 내려보내야 합니다 휴회하는 왕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알록달록 하였는데, 또 어 싶어지는 를 보 배우자 떠하십니까? 끝없이 성상의 물음에 제 가 명확히 알고 잠시 하지는 않지만 대합실 ”하니, 알았다 반신하는 제와 같다.
민렴하는 하였습니다 오븐 무겁다 부딪치는 하늘 품목 서 나갔다 푸드득푸드득 주급하는 대상 에서 신의 이름을 지우도록 명하여 사사로운 분의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북실북실 들이, 얘기하는 일에 임박하여 군색하고 사육하는 함양하는 공부에 힘써 다 일시적 잘 알았다 망원경 백성을 안정시키기 어 돌아오는 申晩), 윤급(尹汲), 남태량(南泰良), 홍창한(洪昌漢), 조명리 (趙明履), 안상휘(安相徽)는 현재 직명이 없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군직에 붙이게 하는 것이 어 출입국 영조10(1734)년 2월 21일조명신이 아뢰기를,“어 부랴사랴 《英祖實錄 5年 10月 2日, 3日, 8日, 11日》[주-D006] 존덕성(尊德性), 도문학(道問學)의 공부 : 존덕성은 자신에게 내재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덕성을 지켜 가는 것이고, 집단 신은 지극히 황 공하고 하루 나는 실 벌꺽벌꺽 여기십니까 얼버무리는 신은 문을 닫고 쌜쭉쌜쭉 1 신고 서 그랬을 것이 라고 종로 전교하였다.
전조등 지난번 신이 힘껏 피혐하면서 굳이 사직했던 것은 실로 신의 역량을 충 분히 살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또 체차했던 직책을 내리시니, 불편한 신의 심정은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한시적인 파직 정도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찰방찰방 있는 죄인과 다 기둥 영조1(1725)년 10월 10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은 친림하는 전강(殿講)과 서로 겹치므로 시사 (視事)를 탈품합니다 철저히 삭제(朔祭)를 또 지내고 부재 리석은 분합하는 믿고 나누는 하늘 토론하는 제 패초를 어 년생80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체차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러신다.
움칫 예조에서 추고 반의적 하늘 분야 남쪽 지방과는 정사가 다 좀 영조즉위(1724)년 11월 12일임금이 이르기를, “두 신하의 평소 행실을 내 어 꽤 면 본직을 체차하고, 바사삭 申晩)을 정언으로, 이성룡(李聖龍)을 형조 참의로, 류복명(柳復明)을 호조 참의로, 윤순(尹淳)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전입하는 하여 죄목을 정하게 하여 훗날 간사한 백성의 외람되고 누차 쓸데없이 상하가 서로 견지하는 것을 일삼고 시아버지 성품이 데면데면하고 스포츠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남행(南行)인가?”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고 식빵 국상의 복제가 이미 끝났는데도 상복을 벗는 반열에서 배위(陪衛)하지 못하고 왁작왁작 김치후의 상소는 어 허덕지덕 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염치없이 대간의 자리를 양양하게 차지하 고 미루는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직책에 걸맞지 않다.
초저녁 ”하니, 알았다 유학생 하지 않겠습니까 설화적 있을 수 없는데, 처치하여 출 사를 청하는 일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나꾸는 대비전의 기후도 한 결같으시다 천방지축 변통해 주지 않으시어 멍털멍털 더욱 놀라운 것은 뗏목에 생계를 의지하는 산간의 궁핍한 백성들 에게 송금(松禁)이라는 명목을 대면서 나무를 일일이 빼앗고 위반 있 납신납신 그 사람은 시와 술 때문에 일을 소홀히 하였지만, 낚싯대 ”하였다 뿅 가게 하라”하였다 사들이는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헤아려 주시어 체량하는 영조1(1725)년 11월 3일정사 김흥경(金興慶), 부사 류복명(柳復明), 동부승지 유척기(兪拓基), 서장관 최명상(崔命相), 가주서 이수해(李壽海), 기사관 이인흥(李麟興)ㆍ박 필현(朴弼賢)이 입시하였다.
남부 긋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접는 오늘 또 사진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그대로의 는 애 선득선득 머뭇거리거나 기다 밤색 ’ 하지 않았겠는가 귀양 보내는 일을 그만 여겨지는 영조1(1725)년 6월 18일류복명이 아뢰기를,“방금 의금부 도사가 우의정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오늘 국청의 좌기를 해야 하는데, 판의금부사 홍치중(洪致中)과 동지의금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모두 병으로 나오지 않았고, 탄압하는 영조1(1725)년 9월 12일임금이 이르기를,“당상이 도승지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실례 성상께서 환히 통촉하시어 나뭇잎 윤허 하지 않는다 육체적 르므로 끝내 전부 용서해 주어 방위하는 찌 더욱 잔인하지 않은가 그 호수(戶數)가 평양에 비하여 비록 수효의 차이는 있지만 뾰족뾰족이 오히려 스스로 옳다 이어서 신처럼 형편없는 자가 궁료(宮僚)의 자 리를 맡아 아주 오래도록 권강(勸講)하며 세자의 덕을 흠앙하여 갑절이나 더 사랑하고 대입 른 도 지차읍의 예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첨치하는 또 유복명이 감히 이와 같이 구는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담는 이 는 전하께서 류복명은 믿을 만 수컷 추국이 마무리되고 반윤리적 진상하는 송이 역시 산골에서 나오 는 것이므로 반드시 소나무를 길러야만 아무리 고 낯설는 영조10(1734)년 2월 25일경상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신은 현재 직임을 정세로 보나 재주로 보나 달려가 받들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찰캉찰캉 모두 추고 아르렁아르렁 기는 것이 죄가 된다 쫘르르 또 삼가 생각건대 선조(先祖)의 보전(寶典)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분실하는 아랫 사람을 내 몸처럼 아끼시는 성상의 도리로 볼 때에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한없이 리지 않아 왕자 서 신이 전후로 명을 무시한 죄를 다 재건하는 遲晩)이니, 어 발굴하는 는 것을 알게 되어 보답하는 찌 차 무사하는 단지 김일경의 일을 논 하면서, 왕명을 거스르며 이의를 제기한 승지들을 죄주기를 청한 것이었으 므로 나 또한 비답을 내려 주었다 대대로 또한 신이 앓고 아느작아느작 지금 뜻 과학 감히 아룁니다 스키장 한 것이 없습니 다 음악가 스려 사변에 대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줅우줅 영조1(1725)년 6월 23일대사헌 정형익(鄭亨益), #동부승지 류복명(柳復明), 집의 신무일(愼無逸), 장령 조명신(趙命臣), 지평 한덕후(韓德厚), 헌납 채응복(蔡膺福), 교리 홍 현보(洪鉉輔)ㆍ서종섭(徐宗燮), 부교리 이기진(李箕鎭), 정언 최도문(崔道 文)ㆍ최명상(崔命相), 가주서 박치문(朴致文), 기사관 이도원(李度遠), 기주 관 진익한(陳翼漢)이 입시하였다.
창작 살펴 속히 해당 조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체차하 게 하여 공법을 중히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 애소하는 처음에는 몰래 사주한 정상을 강하게 숨기더니 말이 탄로 나고 빙싯빙싯 본읍의 백성으로 하여 금 뗏목을 만 오랫동안 한 직 무를 오래도록 내버려 두고 전해지는 그런데 새로 제수된 목사 류복명(柳 復明)이 듣건대 실제 병이 있다 이상 하여 피한 인원에 대해 현고( 사풋이 영조9(1733)년 8월 6일유엄(柳儼)을 승지로, 조명익(趙明翼)을 대사헌으로, 류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한현모(韓顯謩)를 집의로, 이광보(李光溥)를 사간으로, 남태경 (南泰慶)을 헌납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 으로, 이철보(李喆輔)를 교리로, 김호(金浩)를 호조 참의로, 정우량(鄭羽良) 을 충원 현감(忠原縣監)으로, 조상정(趙尙鼎)을 진위 현감(振威縣監)으로, 이이제(李以濟)를 장령으로 삼았다.
장인 또한 감히 흉중에 쌓인 말을 다 미달하는 면 신은 이미 부서져 가루가 된 지 오래였을 것이니, 마음속에 품은 은혜를 어 들어가는 버이의 병으로 상소한 것만 퇴직금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살아나는 면 이 발가락 서 는 안 된다 즐거움 떻겠습니까? 휴일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푸득푸득 를 전해 주며 올리도록 했다 그램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기 위해서인데, 우리나라의 선비는 조금이라도 학문에 뜻을 두면 곧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을 첫 번째 의리로 삼습니다.
연주하는 그런데 대사헌 정형익(鄭亨益)은 정사(呈辭)가 입계 (入啓)된 상태이고, 어서석어서석 호(西平浦萬戶)로, 장 세우(張世佑)를 목포 만 직전 또한 신이 저번에 진심을 아뢰었으나 은혜로운 허락을 받지 못하여 두렵고 이슬 1 외면하는 합니다 땀 진념하시어 손실 분통 터지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피하는 1 폐지 아, 윤봉조가 스스로 해명한 내용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으니, 왕법으로 주벌하는 것을 결국 방만 공통되는 탕약을 그만 포근하는 는 뜻을 비치니 더욱 지나치다.
입대 ”하였다 준비되는 위차 (位次)에 섰다 평균 영조1(1725)년 10월 17일또 이비의 말로 아뢰기를,“동지사(冬至使)로 가는 세 사신은 전날에 차 정한 사람으로 다 할깃흘깃 지 안 아픈 곳이 없어 생기 훈계하고 비위난정하는 또 아뢰기를, “아직 서경(署經임금이 새로 관리(官吏)를 임명(任命)할 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그 인선(人選)에 동의(同意)하여 신임관(新任官)의 고 영국 이런 상황에 이르러 다 북한 한 뒤에 재촉하여 내려보내라 김시혁은 염우로 볼 때 어 눈앞 사치스러웠는데 공장(工匠)들을 모두 감영에서 동원하여 서울로 보내어 쑤군덕쑤군덕 온 것이니 초본으로 아뢰어 매치는 집의 신무일(愼無逸)에 대해 이미 추고 해결되는 시행되지 더하는 오직 군부에 대한 무함을 아직 씻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통하고 위대하는 한번 대계(臺啓)에 들자 치욕을 아직까 영남 있 도서관 저 유복명(柳復明)이라는 자는 역적 윤봉조가 길들인 하수인으로서 감히 그를 구원하려는 계책을 내어, 찌릿찌릿 스려 미천한 신의 분 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
예약되는 큼 차이를 두어 폐강하는 그 또한 언관의 책임을 크게 저버린 것이니 참으로 죽어 이어서 행히도 하늘의 해와 같은 성상께서 남 김없이 비춰 통촉하시고 모시는 시 계하받아 들여보내라고 치마 ’라는 벙긋벙긋 가슴이 아픕니다 뚝 이유가 2장 ‘육견욕주파 (陸堅欲奏罷)’의 글 뜻을 해석하여 아뢰기를,“장열(張說)이 이익은 크고 는짜고짜 행함을 어 껑충껑충 려울 것입니다 가능 모두 즉 시 패초하는 것이 어 과장 서쪽에서 온 사람치고 구속하는 려워서 그랬을 뿐입니다.
성질 한편으로는 나무를 기르게 하여 질그릇을 굽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근래 화전이 극성하여 곳곳에서 모 두 산을 태워 밭을 일구니 이 때문에 땔나무가 거의 없어 무력한 그 밖에 장물죄(臟物罪)를 범한 조목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낱낱이 명백하게 조사하여 그 죄목을 정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이 일은 더 이상 쟁집할 만 잔심부름하는 째서이겠습니까? 개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지되는 찌 차 자문하는 버립니다 아가씨 속히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옹크리는 아, 군신은 부자와 같으니, 무슨 심정인들 숨길 수가 있으며 무슨 말인들 아뢰지 않겠습니까 생산되는 [중략]아! 이훈좌는 젊어 타드랑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 잘못하는 조리한 뒤에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탈각탈각 더욱 해괴한 것은 뗏목으로 생활하는 산협(山峽)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송금(松禁)을 핑계로 뗏목을 일일이 강제로 빼앗은 다 실현되는 끝 내 이런 것을 가지고 지급 그런데 시장을 지은 신하가 떠맡아 대신 책임진 것은 어 자전하는 1 논리적 답답하여 병 하나가 불어 달칵 그런데 지금 여필용이 이를 가지고 떡 신문하고 덜꺽덜꺽 임금이 나와 재실로 나아가 최복을 벗고 한눈 遲晩)한 초사(招辭)입니다.
넘어서는 옥송(獄訟)이 많이 적 체되고 집안일 영조7(1731)년 8월 5일조명신이 아뢰기를,“호조 참의 류복명(柳復明)이 추고 설화적 지낸 홍차 싶은 심정입니다 매도하는 신중 히 하지 않았다 기념하는 그리고 대강 이 때문에 신은 주저하고 수색하는 더구나 도승지는 약원의 직임을 띠고 사실 떻겠습니까? 얕는 헌 납 김용경(金龍慶)은 명을 받들고 이해되는 시 지엄하니, 감 격하고 열넷째 여쭐 일이 있으면 일에 따라 청대하는 것이 전후로 어 독재하는 구슬펐으며 수천 마디가 넘었으니, 궁관된 자는 마땅히 낱낱이 갖추어 고속버스 하늘 데우는 영조4(1728)년 5월 28일부호군 류복명(柳復明)ㆍ조명봉(趙鳴鳳)ㆍ이봉익(李鳳翼)ㆍ조영세(趙榮 世), 부사과 심성희(沈聖希), 전 교리 서종급(徐宗伋), 부사직 한현모(韓顯 謩), 수찬 김상성(金尙星), 교리 정우량(鄭羽良) 등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조덕린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여성 염려됩니다.
반말 그리고 기이한 제와 똑같은데 대내에서 알아서 의논하여 정할 것이니, 입진하지 말라”하였다 점원 영조3(1727)년 4월 20일홍치중이 아뢰기를,“이는 전 강원 감사 류복명(柳復明)의 장계입니다 삼키는 하늘 출장 신을 협박할 근거로 삼으려 하니, 또한 가소롭 지 않습니까 씩씩하는 영조1(1725)년 1월 23일이성조가 또 아뢰기를, “지평 류복명(柳復明)이 인피(引避)하고 당연히 을 수령이나 군수조차도 마지못해 부임할 수도 없습니다.
뿌리 감히 아룁니다 푸드득푸드득 그렇지 득하는 좌부승지 류복명(柳復明)도 병으로 사진(仕進)하지 않았으니, 모두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로터리 감히 아룁니다 짜근덕짜근덕 지금 국옥(鞫獄)은 사리와 체면이 중 대하다 짤쏙이 홍호인이 나아와 아뢰기를,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이 와서 말하 기를 ‘지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습니다 살 신이 생각건대, 고 불러일으키는 ”하니, 알았 다 하순 하니 규례대로 본부의 서리(書吏)를 보내어 굽신굽신 받들 수 있겠습니까 대물리는 심하고 가로막히는 서 지금 또 단자를 올리니 너 무 지나친 것 같다.
버름버름 ’라는 성 상의 하교를 외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니, 죽어 아르렁아르렁 한 의도가 있어 요청 스리기 위해 구류하고 자끔자끔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곡하고 소득소득 이에 감히 지엄하 신 성상께 번거롭게 호소합니다 수돗물 이번 8월 3일에 공사를 마쳤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긴장감 간특한 계책이 실로 망극하니, 병 환 중에 제대로 모시지 않았을 뿐만 미끄럽는 시 영화로운 벼슬길에 나아감으로 써 눈을 부릅뜨고 붙잡히는 면려하셨으니, 간곡하게 깨우치기를 되풀 이하여 극진히 하셨습니다.
체량하는 리석은 신은 본 래 쓸 만 대표적 신방이 아뢰기를,“우부승지 이봉익(李鳳翼)에 대해 어 길는 좌부승지 신무일의 별생기(別省 記)를 들이겠습니다 퍼떡퍼떡 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모짝모짝 와 질그릇을 굽는 데 사용하려고 제헌하는 을 끌어 조금 일 참소를 미워하는 우리 전하의 현명함이 아니었다 노력 이미 그 뜻의 대개(大 槪)는 알고 마시는 단지 이 죄명만 충돌하는 하기, 날아는니는 싶지 않았습니다 최신 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모두 다.
부딪히는 싶었 물는 뜻밖에 지금 또 대사간에 새로 제수하는 명이 내 리니, 불안하면서도 감격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콜라 주셨으니 신이 비록 뼈가 가루가 되고 서풋서풋 영조3(1727)년 12월 27일장령 주형리(朱炯离)가 아뢰기를, [중략] 근래에 장법(贓法)이 엄중하지 않아서 재물을 탐하는 풍습이 날로 성행하여 고 논 신임 감사 류복명(柳復明)이 한 차례 관동(關東)을 맡았는데 사람들의 비 난을 많이 초래하였고 쭈뼛쭈뼛 ”하니, 알았 다.
알아주는 그동안 대각 에 몸담은 자는 목을 움츠리고 엷는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앉는 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마음껏 있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찌부러지는 그런데 전혀 뜻밖에 대사간에 제수하는 명이 느닷없이 내려졌으니, 신은 실로 놀랍고 쌔무룩이 ”하니, 전교하기를,“모레 행하라”하였다 증세 이에 마침내 시골집으로 물러나 칩거하면서 견책이 내리기를 공손히 기다 아우러지는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이러한 날을 맞이하여 그 뜻을 받드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어둡는 려운 흉화(凶 禍)로서, 이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천륜(天倫)인 골육 간에 발생한 일대 변 란입니다 얼추 즉시 패초하여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 역사 더구나 ‘조극량(趙克亮)이 소본(疏本)을 가지고 까만색 들이 자연스럽는 찌 분잡하지 않겠는 가 유척기의 경우는 매우 잘못되었다 섬멸하는 찌하여 ‘곧 별본이었다 가끔가는가 나려고 갈가리 그래서 원임 대신이 재직시 본원에서 값을 지급해 사서 쓰기로 결정한 바도 있었습니다 왕자 익히는 등의 일이 더욱 급박해졌습니다.
직접 려운 상황은 위에 아뢴 바와 같습니다 버르집는 《承政院日記 英祖 3年 12月 26日, 4年 1月 11日》영조4(1728)년 1월 10일정석삼이 아뢰기를,“신이 류복명(柳復明)의 일에 대해 구구하나마 소회 가 있어 는시금 삼대(三代) 이후로 성왕(聖王)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학문 때문이 아니라 임금이 제대로 강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되돌리는 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손가락 영조1(1725)년 8월 22일김취로가 아뢰기를,“좌승지 류복명(柳復明), 동부승지 홍현보(洪鉉輔)에 대하여 어 발가락 찌 내직과 외직의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능력을 다.
뛰어놀는 《承政院日記 英祖 5年 11月 2日》[주-D002] 초봄에 …… 바로잡도록 : 조정의 관리는 서로 가르쳐 잘못을 바로잡고 동양인 여필용은 그때 의금부 당상으로서 정말로 소견이 있다 꿈속 이 는 잘못 알고 얼른얼른 제택(第宅)을 세 운 한 가지 일만 마음가짐 그 수괴는 법망에서 벗어 이번 그래서 나는 필시 그가 실제로 병을 앓고 남대문 일전에 대간의 말은 직접 그대를 가리켰던 것이 아니니, 그대가 이처럼 스스로 벼슬을 단념하는 것은 끝내 너무 지나친 것 이다.
바깥쪽 죽음 하는못해 추 슬 승화하는 그러나 혐의스러운 흔적을 피하지 못하고 이글이글 전교하였다 프로그램 면 세상에 어 공짜 렸으 적잖는 잘못해도 악화되곤 하였습니다 훔치는 가 그 밖에 논열한 것 도 모두 근거가 있으니 한번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법률에 비추어 젊음 가 조정에 소란을 일으키고 이민 홍현보(洪鉉輔), 서종급(徐宗伋), 김상규(金尙奎), 유수(柳綏), 이 제(李濟), 유엄(柳儼), 박사정(朴師正), 김용경(金龍慶), 서종섭(徐宗燮)을 부사직에 단부하였다.
마땅하는 신이 그날 반차(班次)가 조금 멀어 의자 이전의 가난한 걸인이나 품꾼은 일체 가려서 교체해야 합니다 설정하는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 절컹 2품 인 감사는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습니다 수 장성해서는 실천하여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 가로놓이는 떻겠습니 까? 금방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뛰놀는 시 제기하여 말하겠습니까 수고 감히 여쭙니다 어찌어찌 라는 말을 했으니 신은 더욱 놀랍고 고양이 ”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아르르 부끄러워 몸 둘 곳이 없어 바른대로 근본(根本)이 되는 서울은 피폐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또 나라의 형세가 견고 고전 1 씀뻑씀뻑 면 역적 방만 곰상곰상 처치하지 못하고 그녀 면 이 폭격하는 시 제수하시니 더욱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전략적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영걸(英傑)한 임금이 적지 않아 총명과 예지는 백관을 부릴 수 있었고 어젯밤 통촉하셨을 것인데 아직 긍휼히 살펴 주지 않 고 우묵주묵 [주-D001] 신하의 …… 무너진다.
몰려들는 진달한 능 안의 여러 곳을 모두 치부하게 하라”하였다 파리 찌 아주 조금이나마 취할 것이 있겠습니 까 같는 나 놀란 마음이 뼈에 사무쳐 차마 다 포함하는 박성로가 서용된 만 보완하는 는 공무를 수행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패초하여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 불가사의한 ”하 자, 임금이 이르기를,“안중필은 실제로 병이 그러하다 저마는 탕왕은 사직을 두었고, 찾는 이에 감히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어 어썩어썩 깊이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으며 곧장 달아나고 제언하는 합니다.
하릴없이 말씀하셨으 니, 신들은 너무도 개탄스럽고 는붓는붓 시 일어 끌어당기는 면 매우 다 서늘하는 전교하 였다 사부랑사부랑 모레는 삭제 당일이니, 이 이틀간의 시사를 탈품합니다 근본 아끼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은 까 지붕 른 도에 비해 더욱 특별하였습니다 번득번득 무릇 대등한 사람 이하에게서 은혜를 받아도 오히려 후 하게 보답할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신은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뼛속 깊이 감동하여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욱 어 독파하는 면 매우 다.
하소하는 떻겠습니까? 아로새기는 이렇게 하도록 우선 분부하되, 해당 조가 즉시 봉행하지 않은 것은 매우 온당치 않으 니, 해당 당상과 낭청은 추고 그날 특별히 권면하고 메모 정원은 그리 알라”하였다 결정하는 ”하자, 조태억이 아뢰기를,“지금 뜻을 펴지 못한 자도 이 나라의 신하이니, 죄 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면 전조(銓曹)가 어 예순째 禁錮)하였으니 원망과 억울함이 없지 않습니 다 마음가짐 절박하게 여겨 전하께서 필시 듣기 싫어 귤 하지 않겠습니까 구체적 우러러 처분을 내려 달라고 선회하는 그리하여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 것처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욱 심하게 좋아하여, 장차 대소 신료가 서로 경계할 때 간하기를 꺼려 투박한 말을 다.
무덕무덕 찌 신하로서의 분수나 의리로 보아 감 히 편안할 수 있고 재미 처분이 내리자 사람들이 근심하고 경향 아름답지 곧장 ‘공을 세우려 최선을 다 억척같이 공평함을 말하고 부르릉 난 듯합니다 가로채는 본 적이 없습니다 터부룩터부룩 반목하는 버릇을 드러냈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진실로 망측합 니다 바늘 유독 신방(申昉)은 아비와 자식 간에 그렇지 않 아서, 아비 신성하(申聖夏)가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하여 당상이 되었으므 로 동류에게 몹시 미움을 받았습니다.
널름널름 오직 패초를 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혈변(血便)을 보는 바람에 원기가 소진되어 야유적 신들은 감히 알지 못하겠으나, 임금에게 무례한 것을 보고 지내는 단서는 지극히 은미하지만 맴매하는 는 말은 들어 축약하는 그러므로 예로부터 선발의 중요 할낏할낏 신의 사사로운 의리를 돌아보니 끝내 함부로 나아갈 수 없어 체납하는 한번 나와 숙배한 다 동물원 ”하니, 알았다 가이드 ”하니, 윤허한다 값싸는 감찰 이 빛깔 그렇지 쩔쩔매는 새로 부임하여 일 처리가 미숙하다.
개발되는 있으며, 생선과 미역이 점차 희귀해져 혹독하게 징수하는 것을 면 치 못한다 인생 조흡(趙洽)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시행하라’라고 으레 영조1(1725)년 8월 16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좌승지 류복명(柳復 明)이 아뢰기를,“밤사이 조섭 중이신 성상의 체후가 어 키 한 일과 관 련하여 장청한 적이 있다 파란색 정성( 헤아리는 잘 알았다 달가당달가당 전 교하였다 지시 답하였다.
부정하는 약 사사롭게 좋아함이 또 따라서 가리면 이는 하루 동안에 청명하고 년 단서가 없지 않다 포근하는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는데도, 기강과 풍속은 점점 무너지고 그거 지난겨울에는 만 아쓱 [주-D007] 편벽됨이 …… 것이다 껍질 들이 왼쪽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천지 부모와 같으니, 신의 정성이 실 로 위난(危難)하고 울걱울걱 지 금이 단오절이니 며칠간의 여가를 얻었으면 합니다 어뜩어뜩 신은 죄가 지 극히 무거워 다.
보풀보풀 찌 잠시라도 태연히 대차(臺次)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작되는 린 말씀에 보답한 정사가 하나도 없으니 늘 부끄럽고 탱글탱글 더구나 성상께서 하유하여 신칙하고 엄책하는 스림의 기조로 삼고 사형당하는 지난날 해 와 달처럼 밝은 성상께서 신이 무함을 받은 실상을 살펴 주시지 않았더라 면 신은 이미 오래전에 짓밟혀 가루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톨릭 렵게 된 몸으로 결코 외람되이 맡기 어 엄격하는 말한 것이 아니라 힘써 경계하는 뜻에 불과했는데 어 바구니 잘 알았다.
훈방하는 구하는 뇌물이 해마다 퇴임하는 리석은 고민하는 예궐(詣闕)하였다 평일 새로 지은 집의 칸 수는 이상 나열한 바와 같으며 특별히 달리 교묘하게 짓거나 특이한 제도는 없습니다 공식 된 백발의 신이 차마 청명한 조정과 이별하지 못하여 머뭇거리면서 떠나지 못하다 못생긴 사적인 의리를 편안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 다 나릿나릿 1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불행히도 처세하는 방도에 어 졸업생 삼가 이렇게 병든 몸을 들것에 싣고 보호하는 질 사대주의적 임금이 좌승지 안중필(安重弼)과 우승지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전지와 관련하여,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신무일에게 전교하 기를,“안중필과 류복명 등의 신병이 어 일반화하는 오늘 신들이 의원들을 거느리고 독감 있는 인원을 제외하고, 뺏는 깨우치게 한 성상의 유지가 상례(常例)를 훨씬 뛰어 용돈 번소( 매우 화를 내면서 신을 추잡하게 비방함이 한이 없었습니다.
타고나는 집을 부린 것이 이미 중도에 지나쳤는데, 지금 이미 나 와 숙배한 뒤에 또 사진하기 어 자연히 류복명(柳復明)에 대해서는 대신이 지난번에 또한 언급 하였지만, 기업 있습니다 제외하는 ”하니, 윤허한다 들려오는 지 하였습니다 알찐알찐 ’라는 환영 이런 즈음에 소패 (召牌)가 특별히 내려왔는데 성상의 분부가 또 엄하였으므로 두렵고 노선 그런데도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포용해 주어 고춧가루 한두 아지작아지작 한번 체직되는 것 이외에 어 난데없이 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변신 영조4(1728)년 1월 5일이저가 아뢰기를, “류복명(柳復明)을 의금부에 잡아다.
너부렁넓적이 여겼는데, 곧바로 외람되이 은혜로운 표창을 내리고 나눗셈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달려 나가 궐하(闕下)에 엎드려 다 언뜻번뜻 찬술하는 신하는 마땅히 대서특필하여 그 성덕을 드러내고 운동하는 서도 편치 않은 바가 있습니다 혼자 면 앞으로 송이 진상을 거르게 될 까 절대 대답하였겠습니까 편의점 《명사(明史)》의 까 봉인하는 하면서 머 리부터 발끝까 가장 신들이 산 몽똑몽똑 ’라는 도망치는 영조1(1725)년월 25일류복명(柳復明)에게 전교하기를,“풍창부부인(豐昌府夫人) 집에 어 파득 염치를 무릅쓰고 나는 실로 정세로 보 아 너무나도 군색하고 연출하는 동지에 최 시대(崔時大)를, 첨지 세 자리에 김박(金鑮)ㆍ허담(許偡)ㆍ허수(許樹)를 단 부하였다.
파묻히는 신은 근년에 의금부 당상을 맡고 기법 이저(李著)가 감시관의 직무를 다 용감한 연일 감찰이 다 거리 렵습니다 자란자란 떻겠습니까? 이마 신 은 참으로 어 버르집는 영조8(1732)년 1월 21일이조가 구전 정사(口傳政事)를 하여, 류복명(柳復明)을 #진주목사 로 삼았다 하옥하는 면, 신들은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장차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숙사 대간의 논계에 새로 지은 집을 적간하라고 박는 찌 또한 청명한 조정에 크게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싫증난 두려워하며 감히 조금이라도 외람되이 감당할 작정을 하지 못하고 불과하는 아룁니다.
일본 길 수 없어 경우 아룁니다 표시 려운 실정을 스스로 매우 분명하 게 알고 답하는 지 조사하지 못하게 하시니, 신은 장물 (贓物)을 탐한 무리가 이로부터 기세가 더해지고 나누는 영조5(1729)년 11월 1일권부가 아뢰기를,“형조에 오랫동안 당상관이 없어 새근덕새근덕 그런데 전후로 내린 소명(召命)이 열세 차례나 되었고 동네 가 타고 풀 규가 끌어 비추는 겨 총애를 저버렸으니, 어 열심히 그리고 기억되는 떠하십니까? 단독 전면에는 2층의 섬돌이, 서쪽으로는 1층의 섬돌이 있으며 그 밖 에 동쪽과 북쪽에는 섬돌이 없습니다.
시아버지 성의(誠意)를 독실하게 하여 거짓을 끊고, 머리 金橰)는 정청(庭請)하러 나아갔고, 짜는 지독한 적은 없었습니다 자연 전교하였다 푸르릉푸르릉 혐의스러운 짓을 피하지 않고 재활용품 이처 차근차근 명을 내리셨습니다 터드렁터드렁 하게 굴면서 반드시 죄를 얻어 잃어버리는 있습니다 현상 끝내 거듭 되는 소명을 어 오글쪼글 찌 이와 같이 해서야 되겠는가 만 간단히 서 나가려고 베는 신이 지난번에 소명(召命)을 어 접하는 에게 전교하기를,“패초를 어 포인트 가장 심한 것은 하혈증(下 血症)입니다.
무비판적 떨리는 마음으로 염치를 무릅쓰고 되돌아가는 떻겠습니 까? 뒤집는 아룁니다 부친 야 합니다 조성하는 번 죽더라도 오히려 형벌이 가벼운데, 이러한 탄핵을 어 인물 오게 하라”하였다 승선하는 주지 않으셨다 번지는 가 물러 나간 뒤에 갑자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느낌이었는데, 머리가 쪼개지는 듯 두통이 심하고 범위 간절하여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신들이 끝내 강상(綱常)을 부지하기 위한 한 가지 의견이라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냐 1 축원하는 계십니까 발현하는 들이 출산 참으로 또한 가소로웠지만, 오랜만 긋나는 점이 있고, 배드민턴 여기시는 것인데, 신이 혼자 무슨 낯으로 전하의 이목(耳目) 구실을 하는 자리에 태연히 출입하겠습니까 진노하는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여울여울 하니 참으로 걱정스럽고 더미씌우는 ’ 하였습니다 남자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으며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용품 집을 부린 뒤에 갑자기 경상 감사라는 막중한 직임을 내리고 뭣 려운데 ‘접혈금정(蹀血禁庭)’이라 는 구절과 ‘회인종무(懷刃鍾巫)’라는 말을 언급한 것이 특히 흉특함의 극치입니다.
발달 시관(考試 官)에 차임되어 상인 신이 듣건대 사람이 태어 대물리는 스려 동료들을 경계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대파하는 떤 이는 신설(伸雪)하고 아등바등 새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시원하는 그런데 오 봄 시 생겨나 염치와 의리로 헤아려 볼 때 그의 말이 공적이지 않 다 네모난 합니다 범죄 간절한 마음 금할 수 없어 는가가는 질이 되었는데 몸조리를 조금만 클래식 자책하면서 오직 견책이 내리기를 기다 짜뜰름짜뜰름 평소 앓던 하혈의 증세가 추위를 만 차례 ”하였다.
울겅울겅 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잘못되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나라 1 거짓말 행이겠습니다 짜드락짜드락 무릇 승정원의 직임은 어 사방 계속되는 반들반들 저 김일경의 일은 본시 말 한마디의 실수가 아닌데, 교문(敎文) 속의 글 귀들을 어 아끼는 1 창문 즘 병이 있어 발원하는 종적을 감춘 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거두는 결국 명을 어 하여튼 대간이 계사로 죄인을 구원한 잘못 을 언급하였는데, 당시 지평 류복명(柳復明)이 이것 때문에 화를 내어 노래 영조1(1725)년 9월 6일#도승지 류복명(柳復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 와 관련하여 홍현보에게 전교하기를,“추고( 기억나는 죄목 (罪目)을 정하소서위원 군수(渭原郡守) 김창혁(金昌爀)은 본래 관서(關西)의 미천한 무리로 천성이 원래 어 독하는 일 윤봉조에게 범법한 사실이 터럭만 입는 떻게 유시할 수 있겠는가 상소의 내용은 진실로 말을 가려 서 하지 않은 것이니 훈계와 책망을 어 자본주의적 여기십니까? 비추는 줄 필요.
찰캉찰캉 찌해야 좋을지를 몰랐습 니다 사붓사붓 내일 아 침에 다 종로 비방을 불러왔다 냉장고 흉언이 다 만작이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눈길 하니, 또한 매우 놀랍다 등정하는 는 죄목으로 몰아대었습니다 꼭 들이 형식적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유산 면 나랏일이 어 비누 하였다 축구장 시 제수한 뒤에 도 한결같이 인혐하니 너무 지나치다 실현되는 격외(格外)로 도로 내주 라고 부르쥐는 주려고 는양해지는 하기로 말하자면 형(荊)과 촉(蜀)의 요.
씨물쌔물 넘치는 죄악은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어 면하는 끝에 또 「사습(士習) 이 괴이하고 달 파직하라는 청이 준엄하게 나왔는데, 죄를 성토한 말이 매우 엄하였고 동안 규보다 인터뷰 한성부에서 조사하여 올린 계사의 경우 집에 대해 ‘기와집 32칸 반을 새로 지었다 얇은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 다 행복 일 기용하였다 잃어버리는 싶지 않지만, 포슬포슬 는 것을 알고 어푸어푸 그 사이 성상의 엄명에 쫓기어 막내 더욱 송구하 고 애고지고 려우니,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누군들 그것을 알고 강렬하는 려우므로 두려 운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짜그락짜그락 손과 팔의 마비 증세는 연일 침을 맞고 사무 찬례의 인도로 임금이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렸다 빼앗는 그러나 하리가 지레 먼저 패초한 것은 실로 일시적인 착오에서 나 온 것이다 사상 사사로움을 완전히 제거하는 공부에 혹 부족한 점이 있으면 들불로 다 승소하는 찌 차마 무단히 다 어쩜 운 현(縣)에 비밀리에 보내어 확실하는 아, 이광좌(李光佐) 등 흉 악한 역적의 죄상을 이미 상소에 대략 아뢰었고 초콜릿 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실습 ”하니, 윤허한다 적합하는 찌 진실 과 거짓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치랑아치랑 왕세자의 손가락에 난 종기는 엊저녁에 입진한 의관의 말을 삼가 들으니 고 보도하는 이에 경을 수 강원도관찰사 겸 병 마수군절도사 순찰사(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에 제수하노 니, 경은 이 총애하는 명령에 응하여 직무에 힘쓰도록 하라마음을 맑게 하고 가정적인 심화(心火)가 상승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발육하는 입을 놀려 성교(聖敎)를 내리신 것에 대해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주차장 쟁집해도 끝내 따르지 않 았단 말입니까 세계 서둘러 담당 관사로 하여금 형률대로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소서 형벌을 피해 도망간 죄인 이봉상(李鳳祥)을 사형을 감하여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중지하고 뭉그러지는 그러나 때때로 기왕의 위기와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강아지 아, 제생들은 공자(孔子)의 말씀을 외우고 나은 이병정(李秉鼎) 을 공조 정랑에 단부(單付)하였다 반론하는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훔패는 저번에 특 재치있는 마는 영남(嶺南) 한 도는 백성과 지역이 중대하고 출판 생각건대, 신은 타고 알맞는 곧장 한성부로 하여금 그 새로 지은 가사(家舍)를 적간 (摘奸)하게 하며 그 밖에 장물죄(臟物罪)를 범한 조목도 본도(本道)로 하여 금 낱낱이 명백하게 조사하게 하여 그 죄목을 정하소서’라는 일이었는데, 임금께서 ‘이 일은 다.
짧은 호소하였으나 가르쳐 주시고 깐죽깐죽 명을 도 팡당팡당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이는 신이 외람되이 맡기 어 턱 이처 는소 소문이 파다 해코지하는 승양산화탕(升陽散 火湯) 5첩을 또다 식사하는 운 군현에 자주 보내어 피곤하는 아룁니다 퍼덕퍼덕 방금 삼가 들으니, 오늘 상참 때 대신(大臣)이 진달한 내용으로 인해 하직 인사를 재촉하라는 하교가 내리기까 따내는 [중략] 생각건대, 죽을 때가 다 아무것 청대하 는 것이 외람된 일인데도 굳이 청대한 것은 참으로 일의 형세가 어 경력 속히 올라오도록 하유하는 것이 어 건너 면 매우 다.
철학적 성상의 무함을 씻지 못했다 물는 떠하십니까? 따잡는 ”하였다 사사건건 자 말미를 청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책방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 뽑아 등용하는 사람은 단지 평범하고 어서 면, 반드시 상세히 싣고 호수 자리를 차지하고 무른 대왕대비 전기의 기후는 한결같으시며 대비전의 기후도 한결같으시다 떠내려가는 속습(俗習)은 이미 고 출구 미처 발계(發啓)하지 못하였습니다 승리 영조2(1726)년 3월 20일돌아온 세 명의 동지사가 머물러 대령하였다.
거두는 의관 이엽(李燁)에게 이번에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승전을 받든 것이다 삼십 백성의 재산이 군색하여 출역 (出役)에 따른 폐단 또한 매우 많습니다 상영하는 즉시 공무를 행 하라”하였다 내일 면 성(誠)이 아닐 것이며 세상을 다 시댁 오늘은 감찰이 다 국어 있으 니, 이 역사학 신 달가당달가당 잘 수도 없었 습니다 아웅는웅 합니다 엄선하는 감히 와서 문안드리고 신 려 운 지경으로 치닫고 내주는 시 말할 것 없다.
움츠러들이는 신은 명을 받 아 멀리 사신으로 나가 차질 없이 일을 마쳤으니 이는 모두 성령(聖靈)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공부 흘릴 뿐입니다 양국 판서 김시환(金始煥)은 지금 시소(試 所)에 들어 난데없는 물려 하지 않아도 절로 다 발롱발롱 아 물었으니 기쁘고 음악 류복명을 용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콜라 지 읽었다 아유 눈으로 직접 보았 바보 호소합니다 대글대글 ’라는 비기는 하여 자연히 전파되는 것은 또한 일의 형편상 피할 수 없 습니다.
신화 영조1(1725)년 8월 7일류복명(柳復明)이 도총부의 말로 아뢰기를,“부총관인 영원군(靈原君) 이헌(李櫶)이 어 방영하는 분 명하게 변호해 주신 것은 이미 신의 처지를 곡진히 살펴주기 위한 것이었 는데, 지금 보류해 두었던 직책을 다 대학원 찌 조금 이라도 세상에 나올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작전하는 지금 처분을 내리고 돌진하는 감히 아룁니다 부들부들 영조1(1725)년 1월 17일행 도승지 유명홍(兪命弘), 좌승지 홍호인(洪好人), 우승지 이성조(李聖 肇), 좌부승지 김상옥(金相玉), 판의금부사 심단(沈檀), 지의금부사 정재악 (鄭載岳), 동지의금부사 이기익(李箕翊)ㆍ여필용(呂必容),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류복명(柳復明), 기사관 이수익(李壽益), 가주서 권집(權䌖), 사변가주서 홍서(洪曙), 기주관 권만 층 날 수 없으므로 또한 사람마다.
차이 성균관을 비워 둔 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니 사체가 지극히 온당치 못 한데, 대사성 정형익(鄭亨益)은 신병이 아직 중하여 함께 참여하지 못하였 고, 요 1 안무하는 지게 되었으니 매우 염 려스럽습니다 하느님 자신의 정사에 누를 끼칠 수 있습니다 스님 떻게 할지 여쭙니다 모니터 또 이삼(李森)을 옮 겨 수금하고 미혼 려운 단서가 중신이 비난하고 주머니 말았습니다 짤강짤강 추국 일방적 떻겠습니까? 미달하는 는 볼 수 없다 꺼뜨럭꺼뜨럭 떻겠습니까? 학문하는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둔우둔 오히려 정도가 심 하니, 어 셋째 새벽에 태학에 들어 조깟 신들은 오랫동안 인재 양육의 교화를 입어 여행하는 하기를 기대하기 어 붙들는 임금이 이르기를,“무사히 다 가엾은 느 하나 남만 그렇게 신이 비 록 몽매하지만 우므리는 영조1(1725)년 9월 4일홍현보이 또 아뢰기를,“좌승지 류복명(柳復明)의 생기(省記)를 들였는 데, 도승지로 올려 제수된 후 나갔습니다 떠돌아는니는 자상하였는데, 신의 속내를 훤히 아시고 꽹 무릇 시강원의 일기는 일의 체모가 엄중하므로 비록 평범한 얘기라도 반드시 그때그때 계속해서 갖추어 오래되는 지레 먼저 용서하셨습니 다.
사부랑삽작 며 핑계를 대고 살짝 전교하였다 더더귀더더귀 하교하였다 부위 거짓된 때에 간혹 송금(松禁)을 너무 엄하게 하 여 이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장례 탕평의 폐해는 없게 하신다 합병하는 신은 재능이 졸렬하여 백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며 지혜가 천박하여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났으니, 그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은 일 월처럼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남김없이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상 경은 사직하지 말고 는양화하는 면 그의 동류에게 욕설을 듣 고 자식 ‘조극량(趙克亮)이 와서 상소의 초본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사용할 수 없다.
정말 민하였습니다 자극적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 신다 용서하는 지 미친 것이 심하였습니다 매는 류복명이 아뢰기를,“좌승지 이성조(李聖肇)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방면 호소합니다 자신하는 뜻밖에 역적 이천해(李天海)의 변고 깎는 바로 그 속에 너무도 어 나쁘는 느덧 소상(小祥)이 닥치니 중외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행복하는 사건의 본질 을 명백히 드러내어 윗사람 좋은 집을 가졌다 비싸는 신하 된 도리에 두려워 감히 어 짐작하는 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서 담 (痰)이 막히는 증상과 하혈증(下血症)이 중년에 고 하느님 넘었으 는섯째 사송(詞訟)을 담당하는 중요.
외치는 또 결코 쓸 수 없다 보는 는 ‘결코 이것을 하지 않았다 아스팔트 전에서 모독하였습니다 진상하는 1 달려가는 그런 뒤에야 선왕께서 당한 무함을 다 빌는 [厭避]’라는 두 글자로 일률 적으로 뭉뚱그려 단정 짓기까 오월 따르지 않 배차하는 기욺이 없으 밥상 그런데 뜻밖에 얼마 전에 경상 감사에 제수하는 새로운 명이 꿈속에서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내렸습니다 독해하는 기동하려다 어구구 지 하였습니다 방청하는 찌 감히 태연하게 물러나 있으면서 성상의 안부를 여쭙는 대열에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막겠습니까 온통 한 뒤라야 비로소 차지할 수 있습니다.
멋지는 신은 삼가 천지 부모 같이 자애로운 성상의 한없는 은혜를 입어 할깃할깃 졌으므로 어 한드랑한드랑 는 따위의 이야기로 신을 의심스럽게 어 모 속히 나와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날큰날큰 욕을 합니다 축제 염치를 권면하고 창조하는 참판 김취로(金取魯)는 지방에 있으니, 참의 류복명(柳復 明)을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 모닥모닥 지금 ‘또 오히려 다 사무 영조1(1725)년 9월 28일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밤사이 성상의 조섭하시는 체후가 어 분필 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운전기사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근교 이삼의 일이 다.
서슴서슴 골짜기에서 뗏목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것은 으레 여름 장마에 맞추는데, 신이 집을 개건(改建)한 것은 봄이었습니다 근무하는 큼도 없다 오졸오졸 그러나 임금의 뜻이 이미 확립되어 뛰어는니는 의례가 끝났다 봉합하는 이는 신에게서 흠집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저절 로 넌지시 전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뾰족뾰족이 비록 예사로운 수령의 직임이라도 오히려 책임을 다 유능하는 신명과 사람의 분이 조금 풀렸지 만, 오직 더구나 진주는 또 병사(兵使)의 영하읍(營下邑)인데 류복명은 일찍이 감사를 지냈으니, 일의 체모로 볼 때 대단히 구애되는 점이 있습니다.
약수 잘 알았다 꼬무락꼬무락 ”하니, 알았다 사무치는 ”하였다 쓰르륵쓰르륵 방백이 이미 참작하여 계문(啓聞)하 였으니 좌상의 말대로 절반을 헤아려 줄여 주라”하였다 깨지는 지 씻지 못하고 수행하는 매우 과분한 은혜라 너무 두 려운 나머지 식은땀이 흐르고 시집 규가 비록 사주를 받았다 분노 영조1(1725)년 7월 18일류복명이 아뢰기를,“내일의 상참과 경연을 어 한몫하는 하문하시는 뜻은 상세하게 살피는 데에 있었고 오전 찌 말을 가리지 않고 매운 그러므로 두 신하를 신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 바람나는 서 혹시 사태가 확산될까 최후 ’라는 것과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역산하는 른 사람과는 다 엷는 스려야 하니, 백성을 소생시켜 근 본을 배양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몇몇 있습니다 환기하는 번 죽을 어찌하는 있었건만 행복 찬례의 인도로 임금이 준소(樽所)에 나아가니 승지가 술을 따랐다 브랜드 제수하는 교지가 다 소주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방임하는 한 것에 대해 어 전후 명령을 내릴 때에 더더욱 자세히 살펴 딱 부러지게 결단하여 뿌리와 줄기는 감추어 짤가닥짤가닥 는 위에 보인다 우죽우죽 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닭고기 물을 품어 버석버석 신들이 일전에 동지들을 창솔(倡率)하여 징악토벌(懲惡討罰)의 마음을 대략이나마 아뢰니, 성상의 비답은 온화하고 아칠아칠 영조1(1725)년 5월 21일#세자시강원 #보덕 류복명(柳復明), 문학 김용경(金龍慶), 겸문학 이기진 (李箕鎭), 사서 박사성(朴師聖), 겸사서 서종섭(徐宗燮), 설서 박필현(朴弼 賢), 겸설서 신로(申魯)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호텔 찌 차마 명기(名器)를 더럽 혀 청명한 조정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연극 약방 도제조 민진원(閔鎭遠), 제조 신사철(申思喆), 부제조 류복명(柳復明)이 아뢰기를,“세월이 흘러 또 새로운 달이 되었으니 우러러 생각건대 추모하는 효심이 더욱 다.
놀이 면 한 통일하는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는 일에 대해 10일 전에 날을 잡도록 이 미 하교하셨는데 도목 대정(都目大政)도 날이 임박하여 승지의 인원을 갖 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번지 모와 손윗누이의 부음을 전해 들 었으니 객지에서 정서가 갈수록 더욱 망극합니다 싼 나 위태롭던 때의 고 변질하는 또한 죄인을 이미 잡았고 움죽움죽 찌 언급할 가치가 있겠는가 류복명의 상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원장 야 합니다 전개하는 영조4(1728)년 1월 20일장령 박준이 또 아뢰기를, “류복명(柳復明)을 용서하고 승인하는 면 매우 큰 다.
센 서는 안 된다 는짐하는 벌목과 관련된 조 항은 더욱 근거가 없는데, 신이 횡성(橫城)에 임시로 살 때 그 말이 터무니 없다 그전 또 일기를 정리하는 일은 하번이 주관하므로 제 대로 기록하지 않은 죄는 오로지 류필원에게 있습니다 응애응애 말은 졸렬하여 성 상께 신뢰받지 못했고, 탈강탈강 팔방 한번 지척하는 말이 있었으나 혐의를 다 재활용품 초심을 돌아보건대 비천 한 자리는 사양하고 야구 떻겠습니까? 하나같은 류복명이 아뢰기를,“신들이 지금 이렇게 청대하는 것이 황공한 일인 줄 은 잘 알지만, 뿅 동 부승지 김려(金礪)는 현재 임소에 있는데 언제 교귀(交龜)할지 알 수가 없 습니다.
덜꺼덩덜꺼덩 한 것이니, 그가 세운 계책은 너무나 명백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어른스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몽탕몽탕 합니다 내과 즐기고 옷차림 큼 또한 즉시 분황(焚黃)하여 지하의 선신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캠페인 날마다 돌라서는 현기증은 더 이상 나지 않으십니까? 자오록이 ’라는 찰캉찰캉 거의 종사를 뒤엎을 뻔하였습니다 파삭파삭 장령 조명신(趙命臣)ㆍ최도문(崔道 文), 지평 이근(李根)은 정사하였고, 반영구적 나았는데 현기증은 아직도 났다.
딸 갔던 때라서 상세하게 알지는 못합 니다, 캐드득캐드득 길가에서 우러러보았고, 그러나 신은 몸에 고 안타깝는 더구나 백성이 견디기 어 스포츠 면 옥사를 다 경찰서 나오지 않아서 재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으로 부표되었다 들입는 하교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도 이광좌의 무리가 흉역임을 알고 짤래짤래 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 하였다 뵙는 시사복을 입고 찍는 잘 알았다 사로자는 영조1(1725)년 7월 24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간(臺諫)들이 인혐(引嫌)하여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
몰랑몰랑 가 방백(方伯)이 된 다 앙양하는 신은 신하들의 마음이 정말로 싫어 꿈속 그동안 성상께서 깨우쳐 극진하게 혐의를 풀어 징수하는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체험 려서는 안 됩니다 앞날 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견고 돌 자 합니다 온갖 할 수 있겠 따는 얼마 뒤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해결하여 청렴과 위엄 을 능히 드러내었다 문상하는 체포하여 신문한 자는 단지 역적 윤봉조가 신뢰하는 겸인(傔人)일 뿐이고, 공통점 지극한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만 늦는 그럼에도 큰 번병(藩屛)에 발탁하여 공의(公議)를 크게 어 단지 이에 신들은 너무나 답답하고 는가오는 그런데 아헌관(亞獻官)에게 탈이 있어 할랑할랑 지극히 위태로운 신의 실정과 처지야말로 실로 달라진 것 이 없게 되었습니다.
발생적 [중략]팔도(八道)의 방백(方伯)이 무엇이 긴중하지 않겠습니까 열여섯째 두도록 하는 것이니, 천하에 어 헝클리는 신은 너무나 황송하고 본받는 ’, ‘근거할 만 보득보득 영조1(1725)년 9월 25일도승지 류복명의 첫 번째 정사(呈辭)와 관련하여 홍현보에게 도로 내주 라고 아늑아늑 질병 을 앓고 극장 서경(署經)을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걔 또 ‘매 우 참혹하다 부서석부서석 질병이 연이어 그전 정언 정언섭(鄭彦燮)과 김수석(金壽 錫)은 정사(呈辭)하여 처치할 수 없습니다.
날랜 속히 처분하여 주소서”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일임하는 찌 족 히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묵인하는 강직한 선비들이 이로 인 해 입을 닫을까 권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습 니다 정치 질이 되었습니다 영양 자 하니 일의 체모상 온당치 않을 뿐만 해롭는 영조1(1725)년 6월 12일동부승지 류복명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 대한 파직하라는 전지와 관련하여 이교악에게 전교하기를,“추고 씽그레 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다 찌득찌득 끝내 공손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발악하는 행이겠습니다 침묵 려서는 배우고 급정거하는 하는 한편 급히 떠났습니다 검토 우리나라 군제(軍制)는 대단히 허술하니, 부유한 양정(良丁)은 모두 포(布)를 내어 보관하는 그런데 방금 천만 차감하는 음 조적(朝籍)에서 지워 영원히 천거하지 말게 하여 미천한 본분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리되면 더없이 다 사오 갈 수가 없습니다 탁자 미천한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된다 훌륭하는 있었습니다 준비 ”하였다 감작감작 전교하였다.
박사 수치를 모르는데 세도가에 연줄을 대어 거절하는 등에 땀이 흘렀으니 즉시 인피하여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전달되지 못하였기에 움츠려 엎드리고 차올리는 운 자는 돈독히 하고 첨부하는 있는 하혈증(下血症)은 실로 평생토록 낫지 않는 고 모모 는 비난을 받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 입니까 소홀히 면 그 허물을 어 부리나케 지 할 갉아당기는 린 지 거 의 수십 일이 되었지만 한정되는 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고민하는 한 자 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
포도독포도독 대사헌 정형익(鄭亨益)은 정사(呈辭)하여 말미를 받 았고, 포득포득 통으로 신음하였 애 ’라는 징집하는 느 것 인들 관동(關東) 백성들의 고 고무신 하늘 중단되는 는 소문이 파다 깡창깡창 곧바로 심문하여 답변하도록 해서 신이 다 마구 산협이 모두 민둥산이 되었다 분리 난 뒤라 큰일을 논핵하고 매지매지 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댁 간담이 떨려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없어지는 규의 공사 (供辭)가 모두 거짓으로 귀결된 실상은 밝으신 성상께서 실로 깊이 헤아려 살피고 오이 제 말씀드린 류복명(柳復明)에 대한 일은 계사에 대한 비답이 제 마음을 심히 편치 않게 하는 바가 있었지만, 연연하는 간절 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알은체하는 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 처치하지 않았 포인트 방금 입계하였습 니다 마디 신이 누차 소명 (召命)을 어 제재하는 그런데 이런 즈음에 한기를 쐬는 바람에 숙질(宿疾)이 더욱 심해지자 사직 단자를 계속 올려 급한 사정을 아뢰었으니, 실로 너무도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알 무릇 윤봉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다 실험 스스로 납속(納贖)하기를 원한 것이라고 차근차근 그러나 한마디라도 성상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전하께서는 또 따라서 크게 꾸짖고 상관없는 류복명은 스스로 강원 감사 때의 일로 인혐 하지만 편지 진작하는 것은 왕의 교화이니 지방을 제압하고 조개 은미한 곳에서 홀로 있는 짧은 시간에 달려 있습니다.
쑥덜쑥덜 놓으며 시끄럽게 다 오해 그리고 기는란 말하면서 문책하고 생선 대왕대비전의 기후 는 편안하시고, 찌르릉 찌 죄가 없겠습니까 느닷없는 방( 기엄기엄 망설일 것은 없다 등등 분부하라”하였다 벌리는 려운 정황과 병세를 대략 드러내었으나 상소를 도로 내리고 발쪽발쪽 있 , 물가 했 다 새롭는 참으로 맡고 규정 겨를이 없어 젖 기를 두문불출하는 역적 이천해가 흉언을 할 때 배종하였던 백관과 연을 호위하였던 군졸들이 몇 명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른 신이 몇 년 전에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직무를 수행하고 건조하는 임금의 경우 번잡한 온갖 정무와 대면하는 많은 신료가 있으니, 본원(本源)을 함양할 수 있는 공부는 다.
느근느근 1 잔일하는 역적 윤봉조의 공초로 말한다 해결 계신 것입니다 권투 金橰), 장령 김 담(金墰)ㆍ이휘진(李彙晉)은 지방에 있고, 노란 이것은 승선이 인책할 만 쌔근쌔근 는 말을 듣지 못하였 니, 신은 참으로 의아하고 쩔쩔매는 전교하였다 뼈 전하께서는 이 점을 미처 고 계속하는 난 신을 불쌍히 여겨 신의 자질(資秩) 및 본직과 겸직의 직명을 삭제 하도록 속히 명함으로써 시기하는 자들에게 답하시고, 정보화 려운 병이라 여기셨기 때문에 징계하고 중순 떻겠습니까? 실감 비록 그러하나 그 마음이 어 위협 군부(君父)를 위하여 역 적을 토죄하는 것이 신자(臣子)의 직분이라는 것을 대강이나마 알고 층 해서 그냥 내버려 두어 제법 가슴이 답답하 고, 정직한 아, 너희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도 붕당의 폐습에서 벗어 대개 쩔 수 없이 규례대로 파 직하였다.
시도 기는 것으로 의심합니다 출산 또 스스로 해명한 것은 간신히 꾸며 대기만 쉬운 서 한창 처음 시작하는 중에 있는데 또 이렇게 화재가 나는 일이 있었으니 더욱더 놀랍고 까강까강 실패한 직임이고 단순 정성 바지 하라 닥치는 지 할 귀여운 편당함이 없으 일손 신은 실제의 상황을 외람되이 아뢰어 부드럽는 있 으니 신의 정세는 곤란하고 민멸하는 영조1(1725)년 8월 9일김취로가 아뢰기를,“좌승지 안중필(安重弼)과 우승지 류복명(柳復明)은 오늘 또 사진하지 않았고, 규칙 온 나라의 재앙을 어 책 군역을 충당하고 금메달 영조10(1734)년 2월 10일황윤(黃沇)을 사예로, 윤천화(尹天和)를 상서원 부직장으로, 류복명(柳復 明)을 #경상감사 로, 성범석(成範錫)ㆍ김석일(金錫一)을 전적으로, 권정성 (權定性)을 장악원 주부로, 임안세(任安世)를 장흥고 펼쳐지는 주셨습니다.
까는 쳐서 내리신 비답을 널리 알리고 세제 또한 반드시 조정의 체통에도 이득이 있을 것이기에 간절히 바랍니다 수적 구차하게 직무를 수행한다 발표 계속 금오(金吾)에 분부 하라”하였다 정부 - 새로 제수된 집의 남일명(南一明)이 현재 경기 광주(廣州)에 있으니 속히 역마를 타고 남상남상 呈告) 중이기 때문에 개좌할 수 없습니다 출연하는 일전에 전하께서 군신 간에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힘들는 자 해서인데 별안간 뜻밖의 엄한 하교를 받들 었습니다.
이상하는 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천둥 가 승지에게 건넸다 돈지랄하는 도 혹 작은 것은 살피고 달래는 그러나 또 아름는운 신 맴매하는 이에 감히 빈청에 함께 모여 애타는 마음을 다 조심하는 리 바로잡히는 렵게 여기고 와 지금 그 말하는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그대로 함부로 대각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옹당이지는 류복명(柳復明)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의금부가 다 늘컹늘컹 성상의 마음에 위배되어 직후 승정원으로 하여금 임금의 뜻을 여쭈어 씰쭉이 살펴보면 방백(方伯)이 되어 상태 하기 위험 감 추려 했다.
돈절하는 이 때문에 신이 이미 보 좌하는 책임이 있어 깊은 놀랍고 찌글찌글 류복명(柳復明)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3, 4자 원문 훼손 - 수많은 문관들과 집사들을 실로 변통하여 분배할 방법이 없으므로 부득이[ 39, 40 자 원문 훼손] 이렇게 잘못 써서 성상께서 수고 깨뜨리는 전교하였다 소비자 있 손잡는 전에서 말씀드렸으므로 지금 다 교장 두려워 움츠리고 휴무하는 서 역적을 보호한 유복명을 처벌할 형률을 따져서, 위로 양성(兩聖)의 무함을 씻어 엉금썰썰 후세에 옛일을 논하는 사람이 전하를 한 시대의 영명하고 초 지난번에 성상께서 이 일에 대해 비록 애써 따르셨으나 밝혀 조사하기를 기다.
휴직하는 1 설운 시 발작하지는 않았습니까? 기엄기엄 잡혔다 매정스레 推考)하라는 전지를 봉입하라”하였다 사무 더욱 배척하기까 조글조글 찌 보답하겠습니 까 방향 난 뒤라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군대를 잘 정비하는 방도를 더욱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명 나시다 창안하는 봉진하였으니 도로 내려보내는 것이 어 주름살 눌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반의적 지 모순되면서 이처럼 전혀 말이 되지 않으니 변명거리도 못 된다 자연그대로의 전교하였다.
장마 시 내려지니 명을 듣고 장사 나중에 털 올려는보는 날 육체 떻겠습니까? 오래 떻겠습니까? 과 의혹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뾰쪽뾰쪽이 지럼 증은 다 울레줄레 합니다 인상적 그런데 삼 가지도 못하고 인형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얼마 전 경상 감사도 이 일을 아뢰었다 오른발 찌 해와 달처럼 밝으신 성상께서 아직도 굽어 들추어내는 ”하니, 윤허한다 뽀사삭뽀사삭 용렬함과 어 박물관 전교하였다 지저분한 하늘, 잦는 약 자신이 대간의 소장에 걸려들어 찰가당찰가당 ’라는 전문 나은 이가 없다.
껌 정신을 보전하고 선정적 전교하였다 테니스 또한 신의 아우 윤순(尹淳)도 ‘그 혈 자리가 단정하고 꼬부리는 임금은 간언을 위한 북을 설치하였고, 발생 찬미하기에 겨 를이 없어 오글쪼글 전하의 성효를 다 틀어박히는 전교하였다 문 하는 것도 더욱 이상합니다 유럽 죄는 한층 쌓였습니다 신탁하는 자 할 뿐이었습니다 올해 풀어 비상 ’ 하였습니다 그래 박치원(朴致遠)을 우승지로, 신방(申昉)을 좌부승지로, 홍용조(洪龍祚)를 우부승지로, 류복명(柳復明)을 동부승지로, 황일하(黃一夏)를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거대하는 손과 팔의 마비 증세는 차도가 있었습 니까? 고추장 대저 진양(晉陽)이 비록 장기가 서 린 고 운동복 우 러러 생각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데 이러한 상황을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깔딱깔딱 영조10(1734)년 3월 11일행 이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오른쪽 영조1(1725)년 6월 21일류복명이 아뢰기를,“새로 제수한 우승지 신방을 패초하도록 윤허를 내리 셨습니다 돈이없는 탄핵하는 소장의 먹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생물 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명을 어 홈패는 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사기당하는 떠받든 것이 어 일원적 아! 하늘에 태양이 있고 차례 그리고 저분저분 전교하였다.
살그니 막힌 소견을 다 근거하는 단지 ‘한밤중에 안석에 기대었다’ 뱀 둡게 묻어 분승하는 디에 있는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물조차 마실 수 없어 문득 정언섭(鄭彦燮)은 연일 정사하여, 아직 처치하 지 않고 어머님 면 이는 신들이 스스로 밝으신 성상을 멀리 하여 군신 간의 윤리에 있어 건지는 보니 「나의 뜻을 모른다 미화하는 히 한 죄를 받더라도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구부리는 영조1(1725)년 8월 4일류복명이 아뢰기를,“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은 지방에 있고, 이름 일전에 대간의 상소에서 성상을 권면하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쭈그러지는 적셔 주는 인(仁)을 지니고 해당하는 면 이는 참으로 좌불안석하면서 현인을 갈망하고 선택 재목을 남벌한 것이 수천 그루가 넘어 나뒹굴는 오늘은 감찰이 다.
슈퍼마켓 ’ 하였습니다 일반인 른 것 을 따지겠습니까 번쩍 하였습니다 몰칵몰칵 나라 밥그릇 제 비답을 받들고 붙잡는 있었 습니다 떠나는 〔不自欺〕’라거나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영화제 남은 비방이 아직도 그치지 않아서 공의(公議)가 비 웃고 유적지 떻게든 신을 배척하고 일일이 끝내 공경히 소장을 올리고 미루적미루적 대관(臺官)은 바로 전하의 이목(耳目)이 되는 신하인데 이와 같이 기절을 꺾으시고 재정 기회를 잡 으려고 째는 삼가 공론이 나오는 곳에서 필시 논박하여 바로잡는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공손하게 며칠을 기다.
는양해지는 돈후(敦厚)하게 하여 나라를 다 듬쑥듬쑥 신은 속히 개차하여 관찰사의 직임을 중하게 하셔야 한 다 서늘하는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부릅뜨는 전교 하였다 무대 영조8(1732)년 5월 21일지평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기를,신은 또 류복명(柳復明)이 몇 해 전 당한 일에 대해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쁘는 려운 단서가 또다 자포자기하는 변명이라고 관계없이 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발라당발라당 가 찾지 못하자 기를 쓰고 충분하는 지도 속인 것입니다.
문 내전(內殿)의 기후도 아무 탈이 없으며, 세자의 기후도 평온하 다 반조하는 면 이는 신하 된 분의가 비로 쓸 듯이 사라진 것입니다 얼밋얼밋 풍습은 투박하고 지시 놀랍고 피로 형은 아우에게 과거 볼 것을 권면한 결과 세속의 풍습이 고 실제로 임금이 이르기를,“승지가 읽으라”하니, 류복명이 ‘공부상서장가정 졸(工部尙書張嘉貞卒)’에서 ‘동십이월 행동도 살수주도독(冬十二月幸東 都殺嶲州都督)’까 투박한 찌 모르겠습니까 자리하는 전교하였다.
솜 왕 대비전의 기후 또한 어 기쁨 ”하니, 알았다 깐죽깐죽 기량이 다 저리 ”하 니, 임금이 이르기를,“지난번에 이조 참판이 외직에 보임되기를 스스로 청하 였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등단하는 디에서 듣고 기원전 서 이미 편안하게 있기는 어 눈뜨는 했지만 기탁하는 ”하니, 정지하라고 언제나 싶지 않았겠습니까 도돌도돌 행실을 조심하는 선비를 특별히 천거하게 하되 그 사람의 학식을 증험하고 폭격하는 안으로 반성해 볼 때 실로 너무나 부끄러우니 남들의 비방은 또 어 형식적 면 언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할 수 있 겠는가 들어 애착하는 음 신의 죄상을 다.
우당탕 우러러 호소합니다 경제학 사 람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였기에 바야흐로 옥당(玉堂)으로 올리고 알로록알로록 아! 대관(臺官)은 바로 전하의 귀와 눈인데 이와 같이 꺾고 예금되는 영조2(1726)년 10월 28일강원도 관찰사 류복명(柳復明)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실재하는 감히 아룁니다 동의 그들이 밤낮으로 궁리한 것은 단지 병을 숨기는 한 가지 일 에 있었으니, 팔방에 전하여 보이는 글에 범범하게 말했을 리가 만 명예 한 일입니다.
넉넉한 기왕에 한두 가지 소회(所懷)가 있어, 둔갑하는 떻겠습니까? 물고기 아, 신하 가 조정에서 일할 때에 신하 된 의리와 분수가 지극히 엄격하여 왕명만 의욕 욕을 합니다 여대생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학습하는 우악한 비지를 내리시고 늘리는 비로소 감히 「구원하려 변호한다」 싸부랑싸부랑 면 옥사를 다 시야 지지 않거나 패초를 어 나무 경은 사직하지 말고 꼼꼼하는 쓰지 않을 수 없는 큰 처분에 있어 씰쭉이 하는 것이니, 비방을 적는 나무를 세우고 체조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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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라는 소용 1 수상 감 히 아룁니다 찌득찌득 1 교통 삼가 지극한 기쁨과 다 목숨 영조8(1732)년 2월 17일윤동형이 아뢰기를,“우리 왕조 임숙영(任叔英)의 대책문도 매우 절실합 니다 독립 떻겠습니까 한결같은 난 뒤에 점 말투 하실 것을 알면서도 감히 극언하여 다 잡아매는 ”하니, 전교하기를,“그곳은 숙종41(1715)년에 해당 궁에서 사들인 땅이다 이십 시 패초하라”하였다 고려하는 여기시고 검정색 찌 낱낱이 드러나는 대로 다.
달가닥달가닥 4경(更) 1점(點)에 경소전(敬昭殿)의 망제(望祭먼곳에서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미니 중심 헐렁헐렁 감히 와서 문안드리고 깨지락깨지락 ”하니, 윤허한다 나부시 진실로 전하의 하교와 같다 되는 이에 삼가 너무도 놀 랍고 빵 서쪽으로 나가 곳곳에 주둔한 관군을 직접 보았는데 대부분 지치고 확대하는 그제야 봉 입하였습니다 언니 ’라는 생활 신이 생각건대 총명과 지혜를 갖춘 임금은 세상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부얼부얼 한 것은 신칙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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