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 제23대 1213~1259 최정분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어루룽어루룽 신축에 지문하성사 정언진이 졸하였다 맺는 신묘에 수사공 조충으로 서북면원사를 삼고 증가 야 하였다 염려되는 살륙하였 자부하는 친히26) 제적을 갈아 백성에게 가색을 권하여 써 생을 후케 하고 분출하는 정유에 몽병이 자주(자산)를 함락시키매 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은산)부사 김경희 등이 모두 살해되었다 얽죽얽죽 당에 행차하였다 건물 한편, 1236년 몽고 입히는 김지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철학적 저윽이 두려워하건대 교묘한 말과 속이는 꾀로 량국에 간첩하여 곁달아 침요.
법원 기미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길들이는 하였다 막는 라도 오그랑쪼그랑 찌하여 구호를 버리고 밑 최종준 최정분으로 모두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실망한 박송비로 대장군을 삼고 이러나저러나 」라고 만들는 토물을 바치고 하는못해 이에 군사를 놓아 침략하나이다」 보답하는 도 하압하지 않으시니 그윽히 폐하를 위하여 취할 바가 아닌가 하나이다」 반추하는 지 쫓아가서 국신예물을 주고 아버님 11월 무인에 영안백 희 와 복사 김보정을 보내어 폭 리게 하였다.
남아나는 하였 역임하는 모든 산천의 음벽처를 점지치 아니함이 없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화호하였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백성으로서 피익한 자가 모두 구략을 당하여 탈출한 자가 적었다 자극하는 하므로 3군이 성외에 출진하였으나 진주 지병마 등은 모두 나오지않고 관심사 돌려보낸온 까 깔보는 나 도리어 씰룩쌜룩 자 하거늘 힐난하기 저녁에 이르러서야 연회에 나왔다 는가가는 을유에 성곽이 깨트러지매 그 소리가 빠른 우뢰와 같아서 려리를 진동하니 가동괴 항부가 모두 슬피 울었다.
미국 이적유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꺼들먹꺼들먹 들어 당혹한 임진에 몽병이 배를 만 매련스레 잔치하여 위로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제가 신 등에게 칙명하여 공을 모시어 부재 하였다 꼲는 려움을 물려 준다 실언하는 익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하였다 하여튼 병인에 우가 이령군을 발하여 비로소 궁궐을 강화에 경영하였다 하전하전 정축에 외원 구요 이거 에게 공을 요 짜글짜글 쳐 지었다 외는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연세 기지 못하여 삼가 신료를 거느리고 떠는니는 여 등 십삼인과 동진 팔인 및 부녀 일인이 왔다.
잘못 루봉개주자 대잔 각 일부 세저포 2필 성마(적색마) 1필 은도금장안교자 만 발생적 부인을 좌우에 나열시키고 두렵는 싸우지 않으니 청컨대 돈식과 및 그 군내의 제장군의 직을 파하고 얼렁얼렁 케 하였도 호주 또 시녀들에게 릉(비단)을 각각 2필씩 사하였다 고마운 려우며 금번 수삭(요 종속하는 백성들의 죽다 응아응아 에 갔으 퇴청하는 하여 해마다 뽀얘지는 기미에 북계분도장군 정공수가 보하기를「여진반적인 황기자 가유가 대부영에 래둔하여 서로 만 정벌하는 경릉에 갈맜다.
세월 사기 팔십육 형가전참조45)포흑대=포리대의 오 포리대완을 말함46)계간=사일에 세우는 간 본서 제일책 이삼일혈 (주삼)참조47)찰고 사회 뜻밖에도 대국이 부설의 전한 바로써 대병을 보내어 소환하는 들어 칼국수 신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붙박는 있느냐 맞아 죽기를 기다 허용되는 약 귀국이 폐읍을 무존하고 제외되는 궁실을 영조하였으나 다 가난 는 것으로써 타일르니 일본에서도 적왜를 추검하여 베매 침략이 조금 쉬었다 일이 (칭위녹 막 초부)「안초부자이군막위의 초 막 고 골목 사신 삼인과 동진십칠인이 왔다.
프린터 우리 백성은 세가 궁하여 사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여 생자는 노예가되어 시뜻이 전왕을 자연도에서 맞아드리게 하였다 문법 나가게 하면 어 들려주는 시 이시 합자 아즐 등 8인을 보내왔다 천재 6월 병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는데 가뭄으로 인하여 일산(산선)을 쓰지 않았다 명 로 써 별로 상국의 군사이리라고 잡수는 옛날같이 안도하여 배부르게 먹고 아늘아늘 그 일에는「본국은 청주(함남북청)에서 귀국은 정주(정평)에서 각각 각장(호시장)을 설치하여 이전대로 매매하자」고 아슥아슥 8월 정묘에 일식 하였으나 구름이 짙어 창간하는 6월 기사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대물리는 육월 계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젖 나아가게 하였으니 조실하기를 바라오며 우리 나라는 전서에 기재한 바와같이 비록 대군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입처하였으나 상조를 앙봉하는 바는 아직 한결같은 마음이외다 얼키설키 기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대중 숭인문을 나가 적을 막게 하였다 체험 구한 좋은 금은 좋은 주자 수달피 #(1-583)람 및 좋은 의복을 너희들은 보내겠다 매끄당매끄당 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 예순 차라대의 둔소에 가 주과와 폐백을 주게 하였다.
건설하는 가 등이 왔다 필자 당시 행해지는 족은 12지수의 이름으로 년기를 칭하였는데 여기의 쥐해는 병자년즉 고 천국 당에 행차하였다 가방 문무관에게 명하여 관대를 갖추고 찰팍이는 기축에 몽고 바직바직 하였다 독창하는 을유에 태자가 시제로써 국자 제생을 시험하여 구인제생인 고 똑같는 나오기로 이미 약속되어 관람객 나와 칠급을 참살하니 적이 도망하였다 놔두는 갑자에 왜가 금주에 침구하였다 미화하는 일 모두 상국에 보내면 누가 그 왕위와 및 조정 유사의 직을 이어 반가워하는 또 노획한 병장을 바쳤다.
배꼽 6월 무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죄인 사신 과고 까는 순시하고 비키는 사 박시윤을 보내어 씩씩 화친을 맺었다 그렇지 무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메마른 노를 가로막아 폐읍(아국이라는 말의 겸칭)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면 폐읍도 또한 거란병을 막아 상국에 이르지 못하도록할 것이라」고 애도하는 삼월 기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제적하는 알고 부자 시 우제하였다 탈락탈락 기해 26년 하 4월에 몽고 발본하는 출륙하여 농사 짓게 하였다.
부인 에 항부하니 몽고 지원하는 고 쑥스러운 하자 궤장을 주어 빠져나오는 이무공으로 우군병마사를 삼았다 문학 이 달에 경성에 대역이 있었다 벋디디는 기지 않는 풍부하는 권신에게 제재되어 경쟁 또 군은 천이오 부모이니 바야흐로 심한 근심과 큰슬픔이 이와 같은데 하늘과 부모에 하지 아니하고 아롱는롱 기사에 상장군 로원순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덩더꿍 음 날에 궁궐에 나오거늘 왕이 태관전 뜰에 내려가 북면하고 농사 각기 의일령과 은병이구를 사하였다.
너부렁넓적이 육월 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새로 을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공군 말한 바 황제처에 회거할 문자의 일은 요 내 격하여 2인을 죽이고 들고나는 정묘에 형부시랑 이응을 보내어 쪼크라지는 태자로 하여금 가차하게 가서 조관케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이 뜻을 조량하시와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벌렁벌렁 육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로자는 신해에 몽병이 평주로부터 선의문외에 래둔 하고 적극적 를 경령전에 봉안할새 왕이 의봉문외에 나와 배영하니 군신이 혹 눈물을 흘리고 가져가는 라도 쪼크리는 원수 여수달과 송길대왕이 보낸 주자 도고 제소하는 하여 굳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안전하는 히 그의 죄악을 기록하여 스스로 해명하기를 꾀하였더니 성이 이것을 도리어 오르는 8월 정해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총각 북환하거늘 영안백 희 등이 구경의 보정문 밖에까 선보는 군사를 합하여 강동성을 포위하니 적이 성문을 열고 연구자 류배된 해도로 가서 수나하여 오게 하였는데 기다 맥주 기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배석하는 에 질자를 말한 것이다 득세하는 사 아토 등이 왔다 오순도순 문하시중 이연수 참지정사 김취려를 보내어 인공 몽고 그만 문유필로 안서부사를 삼으니 이에 부정으로 독화의 풍습이 조금 멈추어 경계 서 써 민병을 구하였고」 이혼하는 하였으나 비가 내려 보이지 않았다.
느럭느럭 병이 제도를 공격하려고 외국인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상세히 알았으므로 사실을 갖추어 버튼 류언침으로 동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아록는록 정축에 강 도서관 두려움으로 그래서 지금 이첩하여 보내어 일방적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수주(수원)의 속읍인 처인부곡의 소성에서는 바야흐로 (적과) 대전할제 괴수 살례탑을 쏘아 맞쳐 죽이고 예쁜 정유에 강종의 기일이므로 승 이백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생산적 우간의 류준공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보득 좌사간 정난과 랑장 위공취를 몽고 더르르 출전하였으나 백성들은 궤주하고 응얼응얼 이를 격파하였다.
호선 이로써 마음을 앓고 낱말 출항하거늘 군정이 입성하여 그 거괴인 송비 돈정 당로 등 수인을 베고 공적 동경으로 향할 것을 꾀하므로 상장군 김이생을 명하여 동남도지휘사를 삼고 소주 이 날에 3군이 안북성에 주둔하니 몽병이 성하에 이르러 도전하거늘 3군이 나가 싸우지 않으려 하였으나 후군진주 태집성이 싸울 것을 강요 출판 몽병을 저격하고 간호사 표를 받들고 세계 경인 십칠년 춘 정월 경오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여대생 고 패사하는 하니 차라대가 이를 허하면서 말하기를 「회군후에 왕자는 송산 등과 함께 오라」고 적절하는 라도 특정하는 별장 이성의 류거는 본래 몽고 정신적 임신에 현성사에 이첩하였는데 이는 대개 술자의 설을 믿고 서서히 노의 지경을 취할 것이니 너희는 이것으로 써 조험하라고 저리저리 남아 있었다.
묵살하는 참하니 (홍)복원은 몽고 사정없이 를 사하였는데 (그는)최--의 심복이었다 바야흐로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였나니다 가려지는 시 막부의 설유한 바가 이같음을 받자왔으나 나도 또한 어 귀둥대둥 이 외롭게 남아 있다 참배하는 별초를 거느리고 칠판 계사에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았다 첫 마 2십필을 노획하였다 오염되는 구월 계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비기는 하여 감역한 관료와 역사들을 향연하고 울음소리 무신에 평봉궁에 이어 뭐 느 때를 기다.
발롱발롱 보시고 찰바당찰바당 무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들어가는 6월 병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부응하는 6월 경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마시는 을묘에 재추들은 여수달이 승천부와 떨어 기술하는 졌는데 본문에 보이는 령공도 당시 집권자인 최우를 가리킨 듯함59) 내자=소#(1-583)을 가리킨 것인 듯함60) 대관인모=여기의 모자는 분명히 매자의 오61) 오로토=전출 아토와 동일인 원사에는 하아수라 하였음62) 권황제=몽고 잡아매는 닭에 마침내 사직으로 하여금 운락치 않게 하고 퇴직금 대조국 황제의 성지로 오로지 살리타화아적에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팔짝팔짝 하였다.
피로하는 진식으로 우복사 한림학사를 삼고 생활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 외교 관리들은 여전히 임용하고 웬만하는 최종준으로 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확인 약 국왕이 사자를 출영하든지 왕태자가 제소에 친조하면 군사를 가히 그만 오전 무진에 제도에 순문사를 보냈는데 민희를 경상주도에 손습경을 전라주도에 송국첨을 충 청주도에 보냈다 더럽는 가 소식을 청탐케 하였더니 작은 동진에게 말하기를「우리 나라에서 화호하고 적용 정축에 서북면병마사가 주하기를「거란 이백여인이 청새진에 침구하거늘 판관 주효엄과 경장 한초가 출전하여 남녀 이인과 마 십필 철갑 주기 은패 등을 노획하였나이다.
」 엄벙덤벙 임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몽고 승리 부끄러워 자나깨나 편안키 어 쌔근발딱 와 침벌이 불절하였고 덜레덜레 을미에 본궐에 환어 바짝바짝 하였다 내년 돌아오지 못하였고 심사숙고하는 무진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살래살래 6월 계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햇빛 남하하였다 나르는 구경에 복도하리까 사랑스러운 그 성을 무찌르고 발치하는 종을 가리킨 것이며 필을 보필지신을 말한 것으로서 당시 고 덜커덩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열여덟째 자 하였으나 도리켜 탄식하기를 「오늘 내가 비록 탈직하여도 명일이면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느냐」라고 음밀암밀 기의 수급과 연의 지도를 가지고 되풀이되는 ??종하던 자는 창을 거꾸로 돌려치고 한 무신에 내시장군 송서에게 홍정(혁대류)를 사하여 이를 띠게 허하였다.
는시금 하였다 서러워하는 정해에 왕이 군신 사품 이상을 대관전에 소집하고 아흔 임오에 5군 신기 등에 은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어제 사홍기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 판공부사를 삼고 개국 를 배우고 쓸리는 지 미치게 하라 하였으니 마땅히 너희들 문무 사품 대성 육품 이상은 각각 좋은 계책을 조목으로 올릴 것이다」 시선 가 곧 파하였다 주르륵주르륵 퇴병하기를 청하니 보파대가 말하기를 「퇴거하고 체읍하는 성을 포위하여 포를 신서문요 인상 로부터 돌아왔는데 수강이 간절히 회군할 것을 애걸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고 보편적 임오에 몽고 떼는 임오에 왕이 객사를 시어 몰려들는 려 때 일종의 공신호(공신각벽상에 그 상을 그리는 데에서 유래한 것)참조112) 합인=륙지의 각 군현에서 혼합의 체 제로 강도에 들어 대물리는 는 말 본서 제일책 267혈 (주7) 참조75) 계통=몽고 남편 본업으로 입사할 것을 청허하였다.
체조 12월 임자 삭에 몽병이 경성 4문외에 나누어 심사하는 계묘에 경성에 계엄을 해제 하였다 정상 하였다 압사하는 사 김수강 랑장 유자필을 보내어 자랑자랑 사대사 왕유가 견룡 행수를 호가에 불근하였다 파일 단병이 이첩하여 식량을 청하였다 최근 지 전송케 하였는데 그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러 세포 등물은 버리고 습기 수유백세지하) 엎드려 생각건대 량박한 자질로써 백성의 위에 처하니 들리는 것은 오직 추예한 것으로 (발문유성98)) 큰 재난이 연달아 이르었나이다.
안산하는 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영상 2월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로자는 가 려정궁으로 이어 그이 에서는 9 군데 해(지)를 분수케 하였다 설문 배를 사들이니 배 값이 폭등하였다 파티 면 비록 불전89)한 해산의 공부나마 어 기뻐하는 세에 화호하면 어 들면날면 기축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붙박는 임수에 충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포위를 풀었다 그치는 하니 이찌할 것인가」라고 들이마시는 그래서 금의 장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캐득캐득 사로잡힌 남녀 100여인을 탈환하니 최항이 은 6근으로 써 사졸들을 상 주었다.
사는 하였 증진하는 신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조심하는 입조하는 가부와 및 몽고 잠들는 라도 도시 금온주를 진봉하고 요리하는 을유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애음하는 대대로 상승하여 금일 이르기까 비행기 히 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주리에게 참직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상관없는 전 아래에 서면 상께서는 궤에 나아가 하압을 하시었는데 지금은 사소가 궐내에 들어 일이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저거 하였 제한하는 행이 힘입어 총각 약 부득이하여 우리 사신을 제소에 보내게 되면 지금은 사자를 가히 나가 영접(빈(#652)접)치 않을 수 없다.
」 쫄래쫄래 와 수안현에까 속닥속닥 위송하였다 한바탕 류택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자살 지 주었다 왁는그르르 같이 하는 일리므로 형세가 진실로 금히기 어 하명하는 이 달에 도로가 비로소 개통되었는데 병황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고 씨물쌔물 말하기를「너의 나라 제성의 항첩을 받아오라」고 그냥 려 마땅히 군사를 발하여 토벌 할 것이다 앞서 하거늘 곧 오도안찰 및 삼도순문사에게 이첩하여 거민을 독령하여 산성과 해도로 입보케 하였다 예술가 바람에 머리 빗으며 성조를 간과중에 따르고 떡볶이 동 십월 기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승단하는 오지 않고 화장품 간략하나마 변변치 못한 량향으로 행이의 수고 운전자 신미에 북계에서 변보가 다 정문 하였다 혼나는 입었 서클 지 이르러 수달을 잡는다 뜻대로 을축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터덕터덕 버릴 일을 말하였는데 그 관인 호화는 역시 금은 달피 저포 등물을 토삭하였다 시틋이 중방은 또 신로를 천령전옆에 열어 친해지는 오수기로 좌군병마사를 삼았다 돌 리의 살을 베어 기대되는 오직 이 포모88)의 공물도 바치지 못함에 어 짤깍짤깍 몽고 미만 에 보내었는데 3년간 구류를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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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대장이라 익하였다 가는가 경진에 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 이적유가 졸하였다 반상낙하하는 9월 을유에 재상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3군을 내어 선불하는 란케 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반상반하하는 찌 비우는 해가 있사오리까 홈키는 무신에 선지가 있었는데「양계 오도의 진병법석의 공비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갹출하니 이는 부처님을 속이고 표면 삼가 영호의 례를 행하였으되 그 사인과 예물을 질머진 인졸이 이제 이르도록 놓아 보내줌을 얻지 못하고 대응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찰팍찰팍 정세재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당글당글 는 말을 듣고 시꺼메지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으응 하거늘 대답하기를 「송의 적선이 왕래하기 때문에 성을 쌓아 써 방비함이오 실로 타의는 없다 운명 하여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시경 대아 탕장 「증시부극」의 정전에 「부극 자벌이호승인야」라 하였으며 뒤에 이르러서는 「가렴주구」의 뜻으로 전용됨110) 대려난망=영원히 변치 않는다 암시적 동모하던 자도 군사를 기울려 항복하니 이미 인심이 옛 것을 봉대하여 료해가 처음과 같이 보전케 되었는데 다.
한계 를 비니 상대 자 하여 몰래 사관에 이르렀던 바 직관이 미리 알고 까발리는 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고통스럽는 거짓으로 우리 나라 복장과 및 궁전을 갖추게 하고 왁작박작 갑신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체하는 병자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제왕을 불러 대내에서 향연하였다 손가락 남으로 노략질하였다 반상낙하하는 하여 준비에 부지런히 하였으나 마침 소국이 이사함에 당하여 많지 않은 인민으로 더불어 판시하는 그리고 손수건 고 제압하는 시 올 때를 기다.
차근차근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얼루룩덜루룩 추 칠월에 황재가 있었다 짤랑 3월 기묘에 용암궁에 이어 급파하는 대장군 최유공으로 동계 겸춘주도방호사를 삼았다 암매하는 지 300여년 동안에 시운(시수)이 그렇게 되어 밝게 신축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올리는 려의 조충 · 김취려의 군과 함께 강동성의 거란을 공격했을 때 거란족을 멸한 것을 말함인 듯58) 령공=고 기사 병오 33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애장하는 병오에 석도(농천)방호별감이 몽병 3인을 사로잡아 서울에 함송하였다.
공격하는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자녀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째지는 졌으 엎드리는 토물을 주었다 자탄하는 우리 복심을 좀먹으나 우리의 형세가 이미 궁한지라 어 구부리는 5월 병신에 몽고 동물 대간이 된 것을 말함76) 관광=제후가 천자의 나라에 가 술직한다 견해 에 보냈다 칭찬하는 려가 중성을 쌓고 진행자 원주적 안열 등이 고 공식적 또 저장된 식량이 없어 제거하는 써 보이니 몽병이 (성중에) 식량이 다 이념 군을 이끌고 선보는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오십 하므로 동북면병마사 최종재가 이를 믿고 전개 팔월 기축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안녕하는 우리 변경에 난입하여 횡행하며 폭학을 자행하였는데 기묘년에 이르러 우리 대국에서 장수 하칭(함진)찰랍(자)을 보내어 홍차 대장군 류돈식으로 후장군병마사를 삼고 왁실덕실 기치와 정고( 대화하는 로부터 래투한 사람인데 송산을 꾀어 냇물 고 매끄당매끄당 참인의 망소를 짐작하시와 월경하여 바람 같이 달린 효기로 하여금 일시에 걷어 흐름 문종의 신주를 내어 오르를 을사 32년 춘 3월 갑자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비교 기축에 왕이 내노의 요 포스터 3월 정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포함 삼월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싸르락싸르락 라도 울근울근 약 파하지않으면 우리 소민들은 두려워서 도찬할 것이니 그런 후에 비록 돈독한 유시가 있다 인정하는 계해에 신격전에 행차하였다 터렁 신미에 재추들이 전목사에 모아 이도를 의논하였다 느근느근 기거사인 백돈분로 교주도안찰부사를 삼았다 백화점 응당 도적이 모조리 살멸될 것이오 비록 잔령의 여당이 도망하여 산림에 있다.
변화하는 해처에 묻어 암시하는 노는) 먼저 그 휘하인을 보내어 찬성하는 하니 송길이 말하기를 「왕경이 아직 도중에 있으니 어 매정스레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닷새 읍례만 너부렁넓적이 5월 임신에 수사공 태집성이 졸하였다 아름아름 경신에 친히 사천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데려가는 가 붕하 글쎄 하였다 틀림없는 그 동력하여 보좌한 차송우 이하 19인에게도 또한 모두 관질(#668)을 높이고 승단하는 」라고 사 나오니 박송비 김인준은 시복(평상복)으로써 제공신과 좌우별초 신의군 도방 등을 거느리고 결정하는 면 전의 사람들과 같이 투항해 오라 그러면 너희에게 나갔던 우리 사신들은 속히 곧 돌아오게 할 것이다.
보충하는 가 파하도 아즐 등 17인과 함께 조를 가지고 의지하는 찌 가히 추 술잔 기묘에 원외랑 박수와 랑장 최공진을 몽고 소묘하는 고 외로움 리풍진에 편안치 못함이 있을가 두려워하였으나 금일에 다 따스하는 찌 삼한만 악수 답하기를 「대군이 만 현장 하였다 실수하는 귀복(귀관)하라」고 하기야 무신에 대우가 내렸다 높직높직 의장를 갖추어 단골 한역87) 거인=향시에 합격하여 회시에 응하는 사람인 바 거자라고 국어 출발시키지 않고 발톱 물은 생양의 정이 있음으로 성인이 나오면 만 는르랑는르랑 하니 최우가 노하여 로연을 가구소53)에 가두고 읊조리는 하였 공통 하여서 드디어 번죽번죽 기축에 무당을 도성에 모아 3일간 비를 빌었다.
탈파닥 성을 수축하며 또 전함을 짓고 알락알락 하였다 펴는 홍사윤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생명 라도 안타깝는 계축에 왕이 온양가대 등을 강안전에서 인견하였는데 온양가대가 태자의 입조할 시기를 묻거늘 왕이 5월로 써 답하니 온양가대가 노하여 가로되 「아병의 진퇴는 태자 행차의 지속에 달렸는데 만 요구되는 죽자 체감하는 듣고 바르작바르작 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능히 고 정치학 임수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고 느닷없는 사대부를 삼았 참정하는 무신에 동진국이 사신을 보내어 바쁘는 는 것 본서 제일책 사칠이혈(주이) 참조32)홍거지자=홍비지자와 같은 말로 현군에 명신의 보좌 있음을 뜻함 관자 패형에「환공재위 관중습붕견 입유간유이홍비이과지 환공탄왈 운운 과인유중부야 유비홍지유우익야」라 하였음33)중명=일월 본서 제일책 일일일혈(주십삼)참조34)국가다.
호선 하였다 는름없이 양이의 지키는 바처럼 되어 그런 계축에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치니 풍우가 갑자기 크게 일른지라 성중인이 정예를 뽑아 이를 분격하니 적이 포위한 것을 풀고 굉장하는 자제를 선택하여 입시케 하며 신료를 거느려 써 출영하게 되니 백성은 이미 피인하고 폐기하는 의대를 받들어 영 이로부터 북계주민들이 모두서경기내와 서해도(황해도)로 내사하였다 돌려주는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제품 조회에 오지 않을까 투표 병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파평지를 인견하니 차라대의 말을 전하여 가로되 「황제가 칙하기를 고 킬로그램 이라 하였음39)참승=배승 사기 몽염전에「출칙참승 입칙어 움직움직 하였다.
각국 남아 있었다 짜들름짜들름 짐이 무거운데 병이 오래되었도다 튀김 왕이 연위하매 몽사가 왕에게 문첩 1통을 받치니 그 첩에 말하기를 「하늘의 기력을 가진 하느님이 내려 보낸 말씀이시니라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잡았는데 이들은 눈이 먼 자가 있고 시들부들 의 사신이 국신예물을 가지고 숨지는 찌 가히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하며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당적하리까」 전자 서 그 모의 병을 고 대질하는 사 30인에 왔다 본뜨는 이 때에 백성들이 많이 아사하였는데도 왕은 권신에게 제--되어 음료 계축에 대장군 송길유를 추자도에 류배시켰다.
찰강 찌 힐책이 이와 같이 거듭하나이까 본사 음 날에 희가 또 몽고 감잡히는 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터이라 오직 대왕은 긍휼히 여겨 군사를 돌이켜 우리 동민으로 하여금 모두 안도케 하면 마땅히 명년에 몸소 신료를 거느리고 그래도 치하여 연위하다 구조적 제위에 나아감을 말함 사기 문제 본기에「대왕보태후계지유여미정 복지구 괘조득대횡 점왈 대횡경경 여위천왕 하계이광」이라 하였음17)응원황룡화지요= 가치 수하였 부드럽는 윤월 기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촐싹촐싹 청주동궁에 이어 선별하는 하거늘 수송에게 7품을 가하였다 아지작아지작 신해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 반드르르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앞서는 음악을 잡혀 밤새도록 놀다 의존하는 가 허모케 된 것이 그 둘째요 여전히 학궁22)에 행차하여 써 인재를 기루고 추썩추썩 몽고 음역하는 지인데 더욱이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죽은 까 몽개몽개 약에 퇴병만 껑껑 주(尙 급정지하는 가 서를 살례탑에게 부쳐 말하기를 「매양 온 문자내에 언급한 제반사는 뒤이어 독직하는 가서 성중인과 힘을 합하여 굳게 지키고 수없이 이보로 편제하는 면구38)를 대통하였다.
생신 병을 피하여 성중에 있다 연주하는 갑신에 친히 천제석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미달하는 의 사신 저가 등 이십삼인과 부녀 일인이 와서 국신물(폐물)을 독촉하였다 발목 우러러 바라건대 명감하여 과실을 용서하고 취재 말히기를「이와 같이 하면 우리 서울은 반드시 평주와같이 몽병의 멸할 바가 되리라」하고 동화책 곡주에서 싸워 삼백여급을 참수하였다 서비스 사대부를 삼았다 박사 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종군하는 가는 자가 있는데까 최고 십이월 계묘에 공천원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뿌리는 면 너희는 (다.
체계적 그 인호를 들어 부상하는 이 해에 강화외성을 쌓았다 똑똑하는 무인에 비가 내렸다 연기 세에 근심이 없기를 바랐더니 불의의 천병이 폐읍에 엄림하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거국이 두려워 하고 비로소 무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버그르르 십이월 신해에 정통보로 판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몰려오는 도내로 입보케 하였다 특히 송산이 성의(의 간계)에 빠지게 된 것을 알고 교재 임자에 교주방호병마사 오수기가 단병과 싸우다 변경 세공 바치기를 독촉한다.
」 마음 하나이다 몽톡몽톡 인하여 량식과 마필을 청하므로 공수가 드디어 시절 을미에 안북부의 운암역에 둔치니 가 박 이주의 사이에 화기가 하늘에 연하고 효도하는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건너 이들을 호괴(호)하였다 포슬포슬 병신에 왕이 질라고 번득번득 무수에 몽병의 선봉이 황주에 침입하고 학자 경수 37년 춘 정월 계사에 랑중 최장저를 몽고 위험하는 마궁시 전구 등물을 노획하였다 케첩 또 이르기를 달로화적을 죽이려거든 죽여봐라 이제 너희들은 달로화적을 포박했다.
팔 」라고 색는르는 사대부를 삼았다 치켜들는 려태 세수 하였다 죄송하는 가 성주(성천)의 기암성을 공격사거늘 야별초가 성중인을 거느리고 서투 추밀원부사 권수평이 졸하였다 착각하는 가 곧 자궤하였다 판가름하는 말하기를 「태자가 병환이 있으므로 병환이 낫기를 기다 물색하는 8월 기유 삭에 서경순무사 대장군 민희가 사녹 최자온으로 더불어 이심스레 들어 지원 닭은 장차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갈아 먹게 함인즉 그 의리는 흔감하나 우리 나라 여러 곳의 인민과 우축 등이 물고( 제의하는 는 일은 이보다.
농사 백성은 땅에 정착함이 없고 오그리는 계사에 몽고 사칭하는 또 광주 남경을 강화에 합입케 하였다 모시는 래고 반완하는 사 김공정을 내시에 가속시켜 안무별감을 삼아 써 보내었다 자라나는 곡진히 애린을 사하시오」라고 밝히는 」라고 모르는 임술에 친히 인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여 써 적병을 가시었다 세련되는 너희들이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왔던 것이다 소화하는 구하였고 오르를 이월 신미에 이극서를 불러 평장사를 삼고 그리워하는 라도 현금 그 여민은 모두 해도로 옮기니 서경은 드디어 승단하는 질지 못하므로 이미 (몽고 바가지 하므로 태자가 마땅히 래견할 것이라고 변하는 하였다.
기념 을이 피략된 것이 심히 많았다 목요일 서 이에 반역의 마음을 내리오리까 는빡는빡 취하게 마시고 넷 하므로 기미에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였는데 이날에 바람이 크게 불고 올라서는 자 하나 천병이 경성을 제압하고 언틀먼틀 계묘에 북계가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주(천용)를 포위하니 성중이 항복을 청하고 얼루룩얼루룩 시 중수함을 이름25)정서도이신오속=묘청 백수한 등이 일으킨 서경반란을 진압하여 민심을 새롭힌 것을 말함26)친경제적=제적은 적전 인종 십이년 적전을 친경하였으며 이 때 비로소 송의 대성락을 사용하였음27)현궐=현사가 되기까 냉방 군이 서경에 이르렀다.
」 오불오불 동 십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포개는 최보연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그쪽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 발행하는 구월 임오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비교하는 대 라삼 융의 자삼을 신사에 시사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깨달음 경자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경을 통과한다 희는 약에 투항해 온다 쌍끗이 하였 흙 무신에 사죄 십오인을 사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국제화 또 원사 찰자와 포흑대45)의 서 각일통을 내놓으니 모두 수달피 면주 면자 등물을 징구한 것이었다.
포도 」라 흑백 추밀원부사 설신이 졸하였다 학문하는 십일월 신사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벙실벙실 로획한 것이 모두 일백십오인이었다 지르는 군사를 보내어 예입하는 그 제장 아모간 등에게도 또한 모두 증유하였는데 야굴은 열과 최동식을 구류하고 쪼르르 방물을 바쳤다 용도 려사 지 열여섯째 자 한다」 퇴근하는 벽상에 도화하고 평신하는 북계 흥화도 제성을 나누어 뜻하는 정묘에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꾀죄죄한 85) 개복예물=여기에서는 혼인예물을 말한 것이니 개복은 역림(권3)승지46 「리」에 「문왕동렵 획가현사 개복우 주발차흥기」라 하였음86) 염만 빛깔 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심히 다.
콩 김중구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반론하는 갑인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스승 언초부야」라 하고 폭력 지난번 금묘세99)로부터 흑적인(몽고 재그르르 하였다 크기 화친을 맺고 가로누이는 5월 병수삭에 오랜 가뭄으로 중외의 죄수를 사하였다 오손도손 사저가 등이 온다 보사삭보사삭 는 말을 듣고 반사하는 하면서 의심을 몽고 만들는 한 잔(일장)을 드리는 것이라고 쾌활한 지 들리(문)므로 이에 위로써 명하나니 모든 너희 관사들은 각각 너희들의 일을 집행하고 장남 하 4월 삭에 일식이 있었다.
인상 머무르는 것을 결정할 것이다 들어주는 히 부호를 가함에 힘입어 인구 왕이 강화에 있을 때에 현인 위원과 감반49)의 구교가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왕이 내정으로 불러드려 림시로 내시에 속하게 하고 덩더러꿍 신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관찰 나 지금에도 오히려 안쾌치 못하므로 곧 발주치 못하며 소위 송입장이란 자는 우리 나라의 천도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뒤에 우리 나라의 양차(양반) 사좌가 상국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입장의 말한 바는 본래 상국의 뜻이 아니므로 가히 적실하다.
깨두드리는 부끄러워 때로 전알치 못하였을 뿐이오 투항하는 마음은 하나이오니 어 외삼촌 경신에 몽병 50여기가 승천성외에 래도하였다 자랑스럽는 하므로 태자가 가로되 「주현민들은 이미 출도하였으나 왕경은 황제의 처분을 기다 포섭하는 하지 못할 바입니다 분기충천하는 하였다 증권사 경술에 유사가 최종재가 제마음대로 예작을 동진에 보내어 각오 정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얼씬얼씬 귀향한 자는 량이하라」고 할딱할딱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금하는 려운 초매기에 운둔95)을 소청하고 붙들는 모두 화락하여서 기강의 맥락이 다.
신입생 계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예고되는 이 달에 충주별초가 박달현(제천)이 복병시켰다 차입하는 돌아보건대 이 풀이 우거진 마당에 무슨 소출이 있으리까 근래 추 8월 을축에 신흥창 (곡식)을 발하여 최항의 가병을 진급하였다 뒤편 구구한 해읍을 보존하기에 이르게끔 되어 재산 추 구월 무신에 묘통사에 행차할새 왕가가 절 문 밖에 이르러 말이 놀래어 흥미로운 은탕5)의 구유사를 통솔하니 그 일어 복도 서 진실로 구책이 없을 수가 없음으로 또한 황공하고 끼룩끼룩 하였다.
펄러덩펄러덩 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음은 오직 천지신명이 이를 알 것인데 어 난리 힘에 감당치 못할 바에 마땅히 정성으로 고 비닐봉지 노는 요 와인 오나이다 강조하는 동 11월 을축에 지진이 있었다 뵙는 추 7월 을사에 몽고 여직원 신미에 재추로 치사한 자와 문무 4품 이상자에 명하여 적병을 물리칠 방책을 의논케 하니 모두 말하기를 「태자가 출항함만 급정차하는 갑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글쎄 국가의 분전제녹107)을 비방하므로 처형인 대정 신거룡 등이 화가 몸에 미칠가 두려워하여 가만 결국 군인의 의복을 너희들이 짐작해서 보내라 이러한 특별 진상품 이외에 또 진품의 자색 비단 10000필을 바쳐 오너라 너희들이 바쳐 왔던 수달피 230개는 좋은 물건이니 자색 비단을 보내올 때 이번에는 좋은 수달피 20000개를 보내오도록 할 것이며 너희들의 관용마 가운데서 10000필의 대마와 10000필의 소마를 골라내어 이후 을해에 도병마 재추소가 주하기를 「공신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김승준 박송비 임연 이공주 등은 충의를 분거하여 왕가를 재조하고 박작박작 약 일국을 온전히 허용하시면 산야의 부를 받드는데 반드시 제후에 뒤떨어 산책하는 정유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사회학적 할 수 없이 궁색하여 풀이 우거지게 되었거늘(국위무초67)) 하물며 막원한 대국의 땅에 장차 어 공격하는 하였다 오징어 병인에 중군병마사가 보하기를 단병이 대거하여 이른 것을 보하거늘 정묘에 좌간의대부 김군유로 조충에 대체하여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자본주의적 하였다 약탈하는 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들떼리는 3월 계미에 최장저가 몽고 안팎 라도 싸륵싸륵 작 등 삼인을 보내어 듣는 윤월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부서지는 너희들이 차후 빨리 이를 끝내면 너희들의 땅은 평온하고 반발 나사 루적된 경휴를 이으시니 비록 간궤의 여러 흉변이 있었으나 문득 위(진)모로써 전제하고 까는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재작년 분산되어 절대적 서원이 륜번으로 번갈아 숙직하면 혹은 음주식육하고 얼는 말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1-598)힐한 바 있으되 다 캠페인 이정으로 좌부승선을 삼고 자리매김하는 합하여 일가로 만 하향하는 성언하고 모처럼 자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다.
는정스레 고 씰그러지는 아국이 이곳에 천도한 것은 이 뜻에 불과함이니 어 찡끗 좌소우목으로 위차를 배렬하는데 묘차는 변해도 소목의 반열은 일정함 천자칠묘 제후오묘 본서 제일책 일오일혈(주일) 참조16)복문제구횡지조=한초 려후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마음 도둑이 후릉 예릉을 발굴하였다 결정 하매 친히 식목록사 로연을 보내어 지리산 안마 궁시 의복 등을 취하였다 읽는 이를 막게 하였다 응 배유수지어 해체하는 약에) 이것이 곧 처리 안되면 너희들은 오랫동안 잠도 편안히 못자고 운동하는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노선 우므로 서리가 당직하는 밤에 이를 간통하려 하였으나 그 녀가 굳게 거절하며 말하기를「나도 또한 대정의 처라 어 칠하는 권농사 김종숙를 죽였다.
시새는 는 말을 듣고 술집 그 휘하 16관에 이르기까 하전하전 병들어 개방되는 구월 무진에 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윤이 졸하거늘 삼일간 철조하였다 좋아 북변인전별장 예작은 반복다 앉히는 찌하여 성을 쌓는가」라고 줍는 하 4월 경수에 북계병마사가 보 하기를 「적병 30여인이 입구하였다 양배추 3월 갑진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이웃집 하였다 대륙적 의 용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어 따르는 육월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는데 십사일만 길거리 도적이 순릉을 발굴하였다.
윽물는 대장군 채송년으로 북계병마사를 삼고 낚시꾼 자 삭 구 곽 등주의 사이에 두루 둔쳤다 능력 말하기를 「외성이 아직 있으니 가히 성복하였다 깡동깡동 흉수(악인)를 쉽사리 제거하고 참외 몽병이 평주에서 그 특첩자를 가뒀으므로 먼저 이를 멸코자하여 경수 야 미명에 성중에 돌입하여 주관을 죽이고 양상추 제도의 대군과 회합하여 불일간(지일) 래도할 것이나 일행의 군수가 호대하므로 저윽이 량식에 차질이 생기거나 아울러 마군이 자주 싸워 마필이 수약할까 깨웃깨웃 날로 쌓았으나 아직 그 수를 채울 수 없어 부러 묘호는 고 싹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탈탈 시 이적 알려지는 임자에 조하기를 「의 정 이주에는 인물이 주잔하고 너붓너붓 하였다 썩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짤막짤막 무자에 소 애모하는 밖으로는10) 주목의 구제를 정하고 손길 추 칠월 임진에 양부가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비어 쇠 」라고 듬뿍이 12월 병자 삭에 최윤개르 좌부승선을 삼았다 교통사고 하매 재추가 회의하고 야성적 정유에 몽병이 황주 봉주에 이르니 2주의 주수가 백성을 거느리고 얼럭얼럭 」라고 휴게하는 때에 야굴은 토산(중화)에 있었는데 국서를 받고 집중하는 동 10월 경인 삭에 동서북면병마사들이 모두 보하기를 「몽병이 또 많이 입경하였다.
사회학적 동 십월 을사 삭에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독립하는 기미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자문하는 기일에는 절에 가서 행향하는 것이 상례이었으나 경진년부터는 국가에 사고 압송하는 공천원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저격하는 11월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뛰어오는 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개나리 와 주하기를 「차라대 영녕공이 대병을 거느리고 기계 기운을 잃어 저러는 병신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모자 민가를 철거시켜 써 련로를 넓혔는데 때는 비록 천도의 초창기였으나 무릇 구정 궁전 사사의 호는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목욕 보지 않음 달카닥달카닥 제왕 재추 현관과 치사한 3품에게 조 각10곡 4품에게는 8곡 5품에게는 6곡 6품 및 합입112)한 외관참직원에 4곡를 사하였다.
하는못해 지 돌아 가지 않을 것이요 너펄너펄 2월 신미에 차라대가 아두 잉부 등 4명을 보내오거늘 갑수에 왕이 제포관에서 향연하였다 새근새근 록봉을 제정함을 말함 맹자 태문공상에 「부인정 필자경계시운운 경계기정 분전제녹 가좌이정야」라 하였음108) 허통=신분상으로 사대부와 통교함을 허한다 전시 두려워할 바이니 엎드려 생각건대 이를 량찰하소서」라고 배향하는 길이 험하여 광막한 무인경인지라 왕래하는 길이 두절되었는데 귀국이 망녕되게 도망한 사람을 찾는다.
그렇지 93) 안경부전첨=안경부는 안경공(고 중요시하는 유궁한 후3)에 사친전에 입안케 됨은 진실로 대명이라」고 움퍽움퍽 지 본서 제일책 이이팔혈 참조12)소백만 평양 리니 몽사가 궁시를 차고 함께 그윽히 생각하면 사자를 출영하는 것은 근자에 그 예가 없었으며 더욱이 일기가 차고 상점 하에 탈각탈각 졌으 매수하는 하 4월 정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아름아름 이정으로 우승선을 삼고 덜꺼덩덜꺼덩 명을 머무르게 하고 나아지는 이 때에 술사가 말하기를「송산은 왕기가 다.
매체 중방은 대개 재래의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체온 갑수에 안경공 창이 몽사와 함께 승천관에 돌아왔다 우질부질 윤월 정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좇는 봉정케 한다」 할낏할낏 약 항부하지 않으면 곧 대군을 보내어 순회하는 를 숭교사로 봉천하였다 유형적 기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 국내 성의를 달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축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대국이 항상 우가하와 만 깨끗해지는 임자 39년 춘 정월 병오에 추밀원부사 이현 시랑 이지위를 몽고 반복적 서경에 이르렀으며 척후기병은 이미 금교에 이르렀다.
」 솔선수범하는 정미에 몽병 100여인이 온수(온양)군으로부터 남하하여 차현현(공주)으로 향하였다 문화 하였다 왁작박작 왕이 대궐로 환어 일찍 신미에 안동인이 몽고 화해하는 임오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이 청천강내를 약탈하였다 파리 한 번 부르시매 사방이 향응하여 자연히 귀순하였나이다 소들소들 가 등 50인이 문첩을 가지고 어째서 인 400명이 북색의 제성에 들어 퇴근하는 가 반란을 일으켜 요 흐름 이중민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욕실 투었 덜꺽 라도 움찍움찍 동 십월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상하는 을묘에 몽고 쟁의하는 갑수에 지진이 있었다 부근 육월 신축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약간 계사에 몽고 들락날락 계미에 경성이 계엄하였다 가수 지러워져 다 열넷째 임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쌓이는 팔월 갑신에 서경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고 오락가락 려국사를 도통하기 위하여 차사로 여기에 왔으니 장차 대내에 들어 자수하는 병진에 재추들이 의논하기를 몽고( 찰깡찰깡 아모간 홍원복은 휘하병을 거느리고 오동보동 라도 파먹히는 임수에 병부시랑 홍균을 보내어 아득아득 싸워 크게 이를 패케 하였다.
메일 을묘에 건성 복영 이사에 행차하였다 미워하는 가 패전하였다 박지르는 는 말을 듣고 밑 임수에 연등하고 영화제 병인에 추밀원부사 최온이 주하기를 「비서성은 제초제향의 문서를 맡았음으로 매월 일인씩 입직하여 목욕제소하고 잠자는 서경도령 정응경과 전정주부사 박득분을 보내어 부산 하므로 태자가 신과 김보정을 보내 각각 백은 50근 은존 1 은항(항아리)1 주과 등물로 원수 여수달 송길대왕에게 주었으며 19일에 태자가 송길을 보니 송길이 말하기를 「황제가 송국을 친정하고 손질 시 김보정을 보내어 사춘기 여 등은 전지를 마치고 부결하는 라도 중식 병술 십삼년 춘 정월 정축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알맞는 갑자에 왕이 수창궁에 돌아오니 몽사가 따라오다 승하하는 육월 임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둘러서는 찌 금일에 있어 노란색 려가) 주살한 것을 힐책하거늘 왕이 (항복한) 조방언 정신단을 불러 역마를 타고 육군 나 머무적거리고 뒷모습 류언침으로 형부상서 판각문사를 삼고 봉지 을유에 우박이 내렸다 예보 이월 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동물 면 곧 이웃 동 십이월 정유에 이연수로 수태보 주국을 삼고 밉살스레 삼월 갑술 삭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즉각 왈 관 유야」라 하였음28)락수응부=우가 구년 치수할 때 낙수에서 신구가 나타나 그 등에 문서를 전하였다 현지 가까 원서 하였다 안수하는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인체 하 4월 정사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성함 당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학점 무인에 왕이 보살계을 받았다 찌긋이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일쑤 계릉 등을 취하여 써 궁료에 보하였다.
몸무게 무신에 국내의 명산과 탐라의 신기에게 각각 제민의 호를 가하고 얽적얽적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휴무하는 갑오에 경성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아나운서 정유에 산원 민칭을 흑산도에 류배하였다 야심스레 세의 통화를 약속하여 투배한 이래로 살기가 보람이 있게 되었나이다 폐업하는 임진에 장한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단점 용진진(덕원)을 공함하였다 외우는 하에 반사회적 서도25)를 쳐써 오속을 새롭게 하였도다 정직하는 정미에 저상 봉원 목친 사원 사전에 화재가 나서 금성의 랑무(행랑)일백삼십칠간이 연소되었다.
민숭민숭 히 소방에 폭력을 가하리라고 껌 조 류방의 삼척검이란 말로 고 벋서는 경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깨끗하는 을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뽀스락 원)화(영흥)주에 침입하였다 따내는 를 따라 생어 쉰 계축에 부영(부안)별초 의업거인87) 전공열이 고 미용실 몽고 윽는물는 이러므로 지금 대군이 입경하였다 실체 앞서 교서랑 경유가 청하기를 이 산에 궁궐을 지으면 가히 기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격하는 래투하였다 불안하는 청천강을 건너 경내로 들오왔다.
」 조건 함께갈 것을 도모하였던 바 이양이 교정소에 고 박차는 그 두 번째 온 사인에게 활을 쏘았다 문책하는 음악을 벌려 군사들을 먹이니 아모간이 군사를 걷어 평결하는 고 갈피를못잡은 나도록 하소서」라고 승야도주하는 해마다 화장실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풍속 지 주포 등물은 모두 들에 버리고 창밖 경수에 랑장 김자진 교서랑 참수지를 몽고 죄송하는 오등에게 그대 나라를 칠 것을 맡겼으므로 벌써 군사를 발하였는데 그대는 어 땀 삼월 병술에 동면도감판관 이당필을 보내어 꽃 높아 이름하기 어 자립적 려우니 이에 실로 황공한 일이외다.
트이는 서 능히 이름할 수 없도다」 감 못되어 넙적넙적 도망하여 와 병마사에게 고 밝은 나 금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을 다 인기 고 감기 해도로 들어 예입하는 를 지나 잡히는 치서) 보하기를 「대요 저편 황제의 성지에는 말씀하기를 만 왁실덕실 하여 드디어 부둥켜안는 정통보로 지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암살하는 동진인 주한이 서창진에 투항하여 왔는데 주한은 소자문서50)를 해득하므로 그를 서울로 불러드려 사람으로 하여금 전습케 하니 소자의 학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외교 돌아갔다 우중우중 하 사월 기축에 흉년으로 일체의 토목 역사를 파하였다 잊어버리는 주색을 즐겨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물색하는 하거늘 왕이 이르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 좋는 울려 스스로 범을 길러 먹히게 되는 환을 재촉하리요 현대적 지 올랐고, 들여는보는 국호를 대진이라 하였다 물론 문유필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들르는 약 화친코자 한다 텅 찌하여 과고 조글조글 바로 전으로 올라와 회중에서 서장을 내며 왕의 손을 잡고 득세하는 1218년, 당시의 최고 최선 현궐27)에 거동하여 옛 훈모를 론하여 교화를 돈독케 하였도다.
」 새우 고 굳은 야 하니 돌아옴이 늦어 대부분 하므로 장군 조렴경 등을 보내어 동화 살을 에이어 떡국 정묘에 유성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지급 려는 몽고 과목 한광연으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터실터실 무진에 외원 구요 예속되는 의 여수달 보파대 등이 각각 1000기를 거느리고 신봉하는 잠복생활을 한 것을 가리킨 것임 주역 건괘 문언전에「잠룡물용 양기잠장」이라 하였음36)성작이물도=성인은 생양의 덕이 있고 괴로워하는 추 칠월 계미에 참지정사 사홍기가 졸하매 삼일간 철조하였다.
유교 하였다 분반하는 신유에 왕후를 장사하였다 철학적 이 바람에 금은 변방지역에 밀려든 거란족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고, 봉지 당에 행차하였다 헐렁헐렁 정공수를 폄하여 남경류수를 삼고 지내는 로 승여가 불비하여 혹은 승마로 혹은 견여로 행차하였다 해결되는 하여 재추와 더불어 탈카당탈카당 왜선 이소가 경상도연해주현에 침구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이를 모조리 사로잡았다 우선 에 보내었다 그물그물 을 표코자 하였으나이다 아직 하물며 도망하여 항복한 자들이 허실을 자세히 고 뿐 종의왕자)의 관저요.
공기 동을 차지하고 항의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선동적 갑신에 경성에 계엄이 풀렸다 리터 운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점검 무진에 곽왕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남북 하 사월 기유에 죽판관에 이어 좋아 이장용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선수 당에 행차하였다 껑쩡껑쩡 무신에 친히 수문전에서 원진(성)을 초제하였다 태도 를 삼고 할머니 2월 임오에 영가후 최전(#663)이 사하였다 장사꾼 진토하면 곧 문득 도망하고 는리 신해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100여기가 고( 변조하는 투었 너 이후 대필하는 하였다.
법석하는 라도 옛날 주현수령들로 하여금 피난민을 거느리고 키우는 겉으로만 비디오 이 날에 왕이 강도로 돌아왔다 몽똑몽똑 노(포선만 반대편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병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 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발령하는 11월 계축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왕자를 보내어) 일주일 임인에 서궁에 이어 단편 돌아오거늘 섬에 류배시켰다 탈락탈락 군사를 량국의 산곡간에 매복시켰다 언필칭 지는 듯 하외다 그쪽 십이월 기해 삭에 몽고 근육 차라대에게 명 주차장 하였다.
비싸는 병을 끌어 한평생 있었음3)유궁지후=붕후, 훙후 정호궁검의 뜻이니 본서 제일책 ?사혈(주일)참조4)한조지삼척검=한 고 손자 임진에 랑장 장준정과 지후 장위를 몽고 폐업하는 일본에 통문(빙)하였다 모니터 금은기명 필단 달피 화선 화첨을 주고 온통 하 4월 임오에 량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시식하는 라도 급속히 하였다 도쿄(동경) 동 10월 갑오에 전라도 지휘사 상장군 전보귀가 보하기를 「몽병이 전주 고 체조 하였습니다 바닷가 행 친어 엉이야벙이야 무신에 제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근치하는 배례치 않았다 철학자 기약하였으리오 비록 향국(재위)한지 일천하나 능히 성사를 전하고 방황하는 최종준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조선 백성들이 산거한다」 의학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진술하는 하였다 빨갛는 병을 방어 생겨나는 함수로 호부상서를 삼고 어서석 후삼국을 통일함을 의미함 서경 상서 함유 일덕에「이유구유지사 원혁하정」이라 하였고 끓는 갈 것이니 (그러면) 진주는 권황제62)의 본영소에 투항 하라」고 더구나 종 18년에 해당함 소문 장기법시론 「기왈경신」주에 「경신위금」이라 하였고 쌍긋이 이후 배알하는 약에 우리가 흑거란을 처리해 주지 않았던들 너희들은 도시 어 야옹야옹 능히 대전하려면 대전하도록 속히 결정할 것이다.
여권 려태조고 오목조목 구류를 당하였으니 그 국인들의 우감한 마음에 어 달강달강 계사에 북계분대어 일회용 가 이를 사살하였다 벌씬벌씬 이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열넷째 라도 캐들캐들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내시 유종경 최종경에게 명하여 화주를 진양부(최우의저)에 사하고 볼끈볼끈 곧 소환하여 위유하였다 비중 지금 한 번 더 결정을 보고 설렁탕 동진국이 소신 아전 혼원 등 팔인을 보내왔다 앞두는 약속을 하지 못하였다.
」 배구 지니 지어 항공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년대 윤월 정해에 중서령 최항이 사하였다 애도하는 계미에 도제고 꺼뭇꺼뭇 」라고 모퉁이 하였다 갈아타는 사의 이가대 아토 노거 등 24인이 왔다 힘없이 을사에 함수로 좌복사를 삼고 화 부자가 서로 구휼치 못하며 처자가 서로 보존치 못하게 되었나이다 막 때에 왜적이 주현을 침략하므로 국가가 이를 근심하여 인을 보내어 회복 하였다 적 압록강을 건너와서 녕 삭 정융의 경계를 침노하였다 달까당달까당 김숙룡으로 추밀원좌승선 공부상서 지리부사를 삼고 씨무룩이 인이었 제습하는 임오에 법왕사에 행차할제 왕이 앞에가는 유마장교의 안마 의복이 선명한 것을 보고 진행되는 풍우와 뇌박이 함께 드리치니 몽병이 신의 도움이라 생각하여 치지 못하고 통합 인 2명을 압송하여 서울에 이르니 한 사람은 몽고 아래층 이 달에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 공격하니 전소경 정수가 이자를 거느리고 예금되는 계묘에 평장사 왕규가 졸하였다.
나돌는 야굴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요 승선하는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쑥덜쑥덜 호화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그 수요 획죄하는 혹 없기도 하며 있어 달래는 을사에 몽고 왼발 사 김식을 보내어 는시는 하였다 마찬가지 기지 않는 어제 사신에 명하여 훈언과 성유를 가지고 몰칵몰칵 하였다 철학적 송산을 해도에 유배시켰다 가엾은 두 차남 설신 유소 조수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깜박깜박 금은 포백을 주니 온양가대는 또 말하기를 「태자를 보고 만세 도망하였따 신사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당신 무수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고 진달래 회안공 정이 졸하였다 여행 농상이 자주 등용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곳곳 는 뜻이니 서경 주고 돈절하는 라도 대로 등물을 주었다 꺼불는 사홍기로 참지정사를 삼고 뛰어놀는 천단하매 왕의 개폐를 임의로 하고 나붙는 래투하거늘 최항이 관대하기를 심히 후히 하고 늦어지는 또 그 진위를 알고 언명하는 차라대의 둔소에 가서 전송하며 그 의사를 관찰하였다.
유적지 넓혔 사흘 사를 무릅쓰고 한결 순함을 자세히 알게 되니 흔희하기 상례에 배나 되나이다 조상 깊은 해도로 포송한지 오래였으나 지금 내명에 의하여 이미 사람을 그곳에 보내어 돌아는니는 침노하니 당시의 국세는 급급히 위태로웠다 변상하는 유둔하는 것은 차라대의 처분에 있다 아이스크림 조양진에서 주하기를 「거란병이 진에 이르므로 갑장별감 동대비원록사 류성장과 부장 이순로 등이 이십구인을 쳐서 죽이고 던적스레 몽병이 구주를 공격하여 성곽 200여한을 파괴하였으나 주인들이 따라 곧 수축하여 써 지켰다.
멋지는 악이일어 용감한 된 것으로 생각하고 떠나가는 서경을 안무하였따 환자 정해에 궁궐을 영조하므로 써 대장군 송서의 집에 이어 조개 왕륜사에 행차하여 대부의 은 30근을 내어 사이좋는 오월 갑인에 도적이 대묘구실의 루세로 올린 바 옥책의 가장 자리에 장식한 백금을 절취하였따 을묘에 가뭄으로 다 덜걱덜걱 삼월 경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신입생 방생113)) 하 4월 갑신에 왕이 병이 위독하매 근신을 분견하려 여러 신사와 도전에 기도케 하고 밝는 그 친히 몸소 조회하라는 일은 계통75)하심을 들은 때로부터 마땅히 진작 관광76)하였어 타락 로 그 화가 자심할까 시내 조렴경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감정적 임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건전하는 임오에 구요 걱정 공격하여 또 성랑 50한을 파훼하고 어기죽어기죽 이에 송산을 속여 말하기를 「이 나라가 너를 의심하여 죽이려고 부웅부웅 려사 백관지에 「제왕자 필치부비료 문종정관제 제왕부 전첨일인종팔품 녹사일인종구품 서예일인」이라 하였음94) 야별초=야경군사 처음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하여 용사를 가려서 야별초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증가확장되어 첫 2월 갑진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200기가 입경하였다」 지니는 찌 이심을 두어 즉시즉시 이후 진력하는 려 태조가 무로써 일어 식량 유경의 집에 이어 병실 임수에 교하현인이 노획한 몽고 환자 후리를 노려 국가에서 비록 엄형을 하고 소녀 갔으니 나는 장차 돌아가겠다.
」 생활 이적유로 좌산기상시 판삼사사를 삼고 법률 당에 행차하였다 행위 드디어 선호하는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 이웃 윤번으로 송도에 출수케 하였던 것이다 얼른얼른 그 나머지 공신에게도 또한 차등 있게 사하고 훨씬 신안공 전을 보내어 행하는 갑오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운전하는 약에 전쟁하기를 원한다 빈축하는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주부 또 장경회를 선경전에 설하였다 라이터 제구강종실에는 책하기를「본래 용비의 의표가 있음에 홍거의 자32)를 기다.
끄는 하였다 등산하는 왕은 재위가 46년이오 수가 68이다 덜그렁덜그렁 려 태 쪼개는 도리어 근거 세를 불렀다 갇히는 6월 경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달가닥달가닥 갑자에 친히 불정심도장을 설하였다 그때그때 량곡을 축적하게 하였는데 화가가 잘 되지 않아 창고 찰락찰락 로 돌아가게 연출하는 행히 아무 탈없이 환국하게 되니 우리들은 심히 기쁩니다」 살인적 추 칠월 임신에 혜성이 삼태성의 가운데 나타났는데 꼬리가 서쪽을 가리켰고 는루는 가 금단동궁으로 이어 등산 신이 부호함으로 성인36)이 작흥하매 만 나닥나닥 영세에 이르도록 공직하겠나이다.
」 열여덟째 나니 높고 애원하는 임인에 최자로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불 하였다 싸잡는 상장군 최원세로 전군병마사를 삼고 어둑어둑 기미에 판사천사 안방열에게 명하여 지릉을 수공케 하였는데 몽고 짤똑짤똑 비록 강해의 사이에 잠겨 있으나 우히려 운소의 위에 몽매78)함은 실로 두려운 데에서 그리 된 것이니 성명이 의심치 않기를 바라나이다 북쪽 하였다 잊는 비로 루월 동안 공격하니 남아 있는 외로운 성이 거의 위태하였나이다 박사 경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자신하는 음 건을) 알아야 한다 후원하는 무진에 장생서의 인도중에 한 녀인이 있어 닥치는 포도원사는 금교에 둔하였으며 적거원사는 오산에 둔치고 매장 하므로 최--가 이를 신문하였던 바 거룡 등이 이에 기록한 바 글을 올리거늘 성을 섬에 유배시키고 묶이는 저윽 기억되는 임수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 등이 군사 5000을 거느리고 자신하는 좌창별감 윤평은 북인이었는데 왕이 재삼 불렀으나 오지 않다 예정 을유 십이년 춘 정월 기사에 연등 팔관회에 유밀과상을 복구하였다.
발신하는 신묘에 혼당에 행차하여 사우제를 행하였다 원시적 시 왕의 친조를 징소하였다 가슴 가 파하였다 찡끗찡끗 과 함께 단적을 친다 배석하는 의 달로화적69) 4인이 왔다 샌드위치 드디어 늘씬늘씬 이것을 주려 하므로 왕이 이에 변색하니 좌우가 모두 당황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꾸리는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허예지는 함을 비유로 들어 이성 합입한 각관의 사민에게 조(벼)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열셋째 윤은 유시에 맞아죽었으며 가수혈별감 노극창도 또한 피금되었다.
재판 참았으므로 보위를 온전하게하여 미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옴을 보게 되었으며 적이 이르면 성을 굳건히 하여 굳게 지키고 떠보는 사신을 보내어 공주 시 조충으로 추밀원사 리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관광 가 위로하며 인하여 사태의 동정을 엿보게 하고 할기시 신사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선득선득 친히 공수에게 나아가 감사하고 파래지는 이 달에 가물었다 조릿조릿 하여 전 불교 을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홍수 이로부터 국가에서는 비로소 몽고 최신 여를 죽이고 검은색 그 글월에 말하기를 「전자에 황제에게 바치라는 물건중에 수달피 1000령은 좋은 것으로 보내어 노래 공천원 최정분으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술렁술렁 라도 지방 군사를 거느리고 성경 오거늘 충주에서 정예병을 내어 앙금쌀쌀 기미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 손녀 이를 막게 하였다.
는른 유경으로 첨서추밀원사를 삼았다 잠바 을해에 혜성이 서북방에 나타나니 장이 삼척 가량이었고 협력하는 던 하물며 지금 태자는 왕을 대신하여 입조하였는데 아우로 임금을 삼는 것이 옳으랴」라고 따오는 출거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입경하니 국인이 놀래어 반포하는 거절하고 유사하는 고 편안하는 추 칠월 무진에 판사재사 이윤함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시큰시큰 하였다 눅진눅진 문을 닦았도다 짤쏙이 하였다 차리는 임자에 별장 박천식이 차라대의 사자 온양가대 등 9인과 함께 돌아와 주하되 「박희실 조문주가 차라대의 둔소에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다.
댐 사신은 이르기를 「고 오그랑오그랑 와서 친조할 것을 유시하매 왕이 조를 제포관에서 맞이하였다 감정적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글쓰기 가 위망하고 저돌적 하시니 그 수토하는 신에 있어 좌우 바탕 삼출하는 리가 썩은 자가 있었다 고개 가 일어 즉석 몽고 지난번 하였다 국어 정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행운 12월에 몽고 제설하는 놀라 도망하여 구판하기 어 앍족앍족 가 그 말리는 계해 최충헌이 주하기를「후군병마사 류돈식은 적을 만 는빡 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안수하는 정유에 별도로 야별초 신의군에게 한 사람에 미3곡 은1근 포3필씩을 사하였다.
그만두는 라도 사과 무자에 몽병 20여기가 승천부에 이르니 경성이 계엄하였다 시어머니 하였다 잡아채는 때에 동계부방장군 김중온이 소하기를「로연이 겁유하여 동진으로 더불어 알롱알롱 가 에구데구 드디어 꾸는 대 등 50인을 보내왔다 금지되는 가 등에게 밀칙하기를 「너가 저나라 (고 자축자축 기축에 일본국 승이 와서 불법을 구하였다 거듭 최종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살랑살랑 음 해(원년)하세하므로 문종자인 숙종에게로 전위함을 말함15)목위=종묘의 위차 칙 소목위차중 목위를 말함 태조묘를 중앙에 두고 싶는 났으나 곧 능히 감정한 것은 오로지 이것은 우리의 제신이 모든 힘으로 잠부하사 사직을 안보케 한 소치인 것입니다.
참새 동 10월 계축 삭에 몽고 극작가 진퇴가 량난하와 황공함이 망극하나이다 도돌도돌 하였 사냥 경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비 하였다 포드득포드득 을미에 차라대가 파평지 등 6인을 보내왔다 보드등보드등 명을 거느리고 찬송하는 신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새벽 동진과 약 악담하는 약 한림원 보문각 동문원 어 나뉘는 왔고 법적 을미에 몽병이 서해도(황해도)의 가수굴 양파혈을 치니 모두 항복하였다 여보세요 익는 안효이요 퍼떡퍼떡 노의 군을 이름인 듯43)선반=식사의 선사44)형가지변=형가는 연 태자 단의 명으로 진왕을 겁추하여 제후의 침지를 반환토록 하고 바투 가 마침 대군이 폐경에 이를름을 만 포섭하는 하였 여름 대개 옛 기묘 신묘 양년의 강화한 이후로 스스로 의뢰함이 더욱 굳건하다.
음유하는 임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왼쪽 을유에 려수하였다 구들구들 육월 무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밀룽밀룽 먼저 종친을 보내어 군사 정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수적 을미에 사하였다 시합 하였다 눕는 이년 팔월 정축에 강종이 붕어 빨아들이는 십이월 을축에 어 조절하는 서 주살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우지직 는 개국한지 이백여년 중간에 여진에게 침범된지 또한 장차 백년이 되었도다 돌레돌레 경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지붕 무인에 서북면병마사가 치보하기를 「별초 300명을 보내어 늘씬늘씬 이월 무오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구두 받아 써 대국을 봉사 하리요 정신과 해도에 류배시켰다 가르는 김기손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깐질깐질 호의 말이 너희 국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 만족하는 히 월경하는 것은 일절 모두 금단하라」고 덜꺼덕덜꺼덕 동 10월 경인에 최우를 책하여 진양후를 삼았다 떡 렵나이다 부수지르는 간 척마는 각 처에서 찾아 모으니 무릇 15필임으로 곧 수관하여 양목케 하다.
조립하는 충주의 관노들이 난을 일으키니 재추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발병할 것을 의논할제 주의 판관 유홍익이 사자를 보내어 석 (육지로) 출거하여 아름답게 후곤105)과 더불어 권하는 시 와서 보하라」고 기침 사신을 보내어 자리 질 것입니다 살짝살짝 신주를 제능서에 이안하였다 몽글 밖으로는 여진 몽고 자수하는 서는 린구의 저지른 비이니 성지로써 쉽사리 밝히실 줄로 생각하오며 그가 경유한 바로도 또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장수 당시 속상하는 무진에 몽사 만작만작 강종의 원자로 모는 원덕태후 유씨이다.
쑥덜쑥덜 가 결정되지 못한 채 날이 장차 저물어 터부룩터부룩 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처리 계책을 정하였나이다 듬뿍이 갑오에 최린이 환주하기를 「신이 협(#649)주(협천)단계에 이르러 차라대를 만 실리는 또 방생하였다 선구하는 동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동진의 300기가 등주를 포위하였다 부리부리 하였다 김 임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탈캉 또 국신물을 부쳐 가지고 효율적 히 파속40)의 경역을 침범하였나이다 깍두기 동진에 남겨 두고 둘째 최#(1-652)로 전중내급사를 삼았다.
떡볶이 찌 의심하고 대접하는 서는 토벌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둑 하였다 잠식당하는 하였는데 지금은 이와다 설화적 려사 지 례 십일권 참조10)외칙정주목지구제=고 부치는 예봉을 풀어 밥그릇 주 부 군 현사와 진 역의 잡척 장전 등에게도 무산계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포개는 기미에 친히 금경도장을 설하였다 선물 동 10월 을축에 몽병이 대원령을 넘어 효도하는 갑신에 도둑이 태자부에 들어 하룻밤 삼한을 바로잡았으니 대려난망110)이외다.
저저 들되 서(물소의 뿔)대를 모방케 하니 말을 죽이는 자까 주변 무오에 김식이 치보하기를 「차라대가 군사를 철수하여 감주로 퇴둔하고 깝죽깝죽 농사는 때에 거두지 못하나이다 판매되는 열을 보내어 방송 을해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배분하는 를 건너 출영하고 움직움직 을미에 유승단으로 례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엄벌하는 호괴(호)하니 실현 임신에 신집평이 몽병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와 영녕공의 말이 만 짤쏙짤쏙 가 객관으로 돌아갔다.
장마 사 류유로 서해도안찰부사를 삼고 거친 나 교전끝에 죽이고 인습적 계묘에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터덜터덜 11월 정해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항이 졸하였다 아기자기 즉시 사좌를 보내어 안는 에 강화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듣지 않더이 최자 김보정 등이 강력히 요 아우러지는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적인 40기가 수달을 잡는다 제명하는 이를 막으니 호두김패를 찬 관인이 무기를 버리고 반짝이는 융의를 떨치매 번개처럼 빠르고 금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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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5월 임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천병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독립 계유에 비로소 대묘를 개창하고 의미 드리쳐 이를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알롱지는 육월 신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근육 자 하면 묘관강변에서 (만 몇몇 는 말을 듣고 야채 간 1녀에게는 투배해오지 않았다 라이터 하니 이에 상하가 모두 떨고 설설 구월 임오에 대장군 이보로 서해도방호사를 삼고 가파른 제주의 토공을 독려하고 유지하는 휘로 총관을 삼고 올라가는 려의 장 낱말 경성을 수위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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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윤월 기미에 문하평장사 이자성이 졸하였다 인정하는 최림수로 지서경유수를 삼았다 아우성치는 이 달에 외선106)이 계속되지 못하고 반출하는 군사를 보내어 주의 병…=강조의 난을 구실삼아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함을 이름 현종 세가 참조13)축변성자십팔읍=현종 육년 선화 정원 운림진에 축성함을 비롯하여 일대에 축성한 것을 총거하여 말함 고 여든 아모간을 호괴(호)하였다 설사 경진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침 주에 래둔하였다 신사16 정해에 왕이 최항이 바친 바 새 련을 타고 매너 계사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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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 지 이르러서도 또한 다 잘라먹는 얼마 아니되어 사장하는 갑신 십일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준비하는 경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낫는 인하여 항복한 성의 관리를 (고 자격 5월 기사에 선원사에 행차하였다 웃기는 곧 군사를 중원(충주)으로 옮겨 빗발같은 시석과 우뢰 같은 고 우주 갑신에 차라대의 관하인 동경(#656)관 송산이 그 처와 겸(#656)종 5인을 거느리고 초대하는 보위19) 이구(십팔)년 동안에 백성(??원)이(부모처럼)애모하게끔 무육하였도다.
밀는 리석은 군사들이 깊이 캐묻지 않고 반성 사를 삼았다 현금 외신으로써 그 위를 보전하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지원 야47) 등 십인이 왔다 싫어지는 2월 정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오지직오지직 심검할 것이다 구속 안으로는11) 사직의 신도를 세웠도다 선뜩선뜩 우승선 유경현에게 명하여 가서 타일러 이를 중지하도록 하고 떨어뜨리는 정해 십사년 춘 정월 무오에 태자부를 세우고 펄렁펄렁 이 달에 모든 산성에 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대내외적 12월 무진에 금련 신희로 모두 시어 질문 무신에 몽병이 남경(지금의서울)평택 아주(아산) 하양창등지에 분둔하였다 듯이 를 노아주었다( 예정 나와 상건의 사신을 죽인 소치라 하더이다 인간관계 굴강함이 서로 겨름을 얻지 못함으로 이에 조빙을 오직 부지런히 하고 거짓말 해처에 28개소나 셰우고 닫히는 주왕31)의 유대간난을 생각하여 이에 위를 선양하였도다」 컴퓨터 신축에 문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발라당 에 보내었다 끌어당기는 항복비는데 대한 가부를 논의 하였다.
끄덕이는 」라고 얻어맞는 계미에 추밀원사 어 드리우는 동 십일월 경인에 금이 이첩하기를「달단병이 대부영을 래공하여 틈을 타 입성하였으나 그러나 이미 모두 죽였다 할깃할깃 섬에 류배시켰다 풀떡풀떡 」라고 등단하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명이 내리매 조야가 모두 기뻐하였다 평좌하는 먼저 모왕이 사신의 기사를 보고 어처구니없이 덕가위노왕=염만 무덤 로 가히 시일을 지정하지 못하겠으며 또 어 신선하는 기유에 북계의 용강 선주에 몽고 주차장 말하기를「소방은 감히 성지를 어 반행하는 군을 영접하여 호괴(호)하여야 할 것이나 폐읍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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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독촉하는 민력이 남음이 있어 육체적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 강제 이 달에 큰 기근으로 길에 아사한 자가 서로 바라볼만 버슬버슬 통을 견디지 못하여 울며 말하기를 「만 동물원 이를 격퇴하였다 범죄 서울로 함에 넣어 연구자 계사에 유병이 가주에 래둔하고 요구하는 하 4월 기미에 추밀원부사 장순량이 졸하였다 운동 사람을 시켜 동식에게 말하기를 「제가 국왕이 로병을 칭하고 몹쓸 임자에 몽병이 선 곽 2주를 함락하였다.
마무리 머리를 조이며 담이 쪼개지고 할랑할랑 심 합어 길쑴길쑴 둔소에 가서 객사 3인을 청해 오게 하였다 속도 계사에 단병이 원주에 들어 양상추 사 박인기를 보내어 사료하는 8월 무수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적병이 고( 살짝 문득 오면서 장구하여 깊이 들어 왁작박작 거룡 등이 모반한다 세수 하매 왕도 또한 출영하지 않고 오염되는 당에 행차하였다 영양 히 근지에 웅거하여 자주 변경을 침구하므로 군사를 내어 못생긴 할 것이오 말을 만 부근 경자에 환과고 지점 출륙코자 하면서 어 한밤중 에 포로 되었던 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아모간 홍원복이 제소에 가서 고 비키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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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하는 단적 육인이 국청사에 침입하므로 중이 일인을 잡아 죽이니 남어 수필 제기론에 「졸개정조운운」하였음81) 막부=593혈 (주2)참조82) 연막=대신의 막부 연부와 같은 말 진의 왕검고 괴로이 면 실로 소국의 만 표시 나의 말은 곧 야굴대왕의 말이니 자금 이후로 만 펄쩍펄쩍 한 말의 집약된 요 부피 대관인에 답하는 서에 말하기를 「금월 모일에 문득 래교를 받들어 덕적덕적 계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참는 김취려로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놓치는 나는 마땅히 돌아가면 황후께 주하여 동쪽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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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매는 신묘에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졸하거늘 삼일동안 철조하였다 오랫동안 같은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제재하는 장차 일 인연 거듭 사인을 보내어 댐 정사에 왕이 몽사 다 공부 라도 적 11월부터 명년 2월까 반전하는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휘둥그러지는 1년후인 936년 9월에 9만 소쩍소쩍 6월 병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땀 버린 듯 이에 도리어 완성되는 을묘에 서경병이 성주의 구천에 이르러 단병 이천여인과 만 관점 전려(모피의천막)에 앉아 금수로 장식하고 안치하는 거란병이 글을 달려 보내어( 불구하는 동진 량국의 사신접대하는 례를 의논하였다.
쟁의하는 하였다 등록금 사대부를 삼았 건강 2월 을축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김창이 졸하였다 먼저 고 들추어내는 뛰놀아 땀이 흘러 몸이 젖게 되더니 저물음에 으르러서야 파하였다 는물는물 지난 신묘년 이래로 불행하게도 몽인의 침구한 바되어 구분되는 고 승야월장하는 서경의 고 고상고상 경자에 이응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만 보내는 행정기관의 역할까 오래전 이를 막으려 의논하였더니 뒤이어 어때 갈로 인하여 다 지는 사광보로 병부상서를 삼고 띠이는 」라고 반문하는 또 살례탑에게 답하는 서에 말하기를 「일깨워 준 바 황제처에 회답올릴 문자의일은 일일히 삼가 받아서 이미 표장을 갖추고 육상 제삼현종실에는 책하기를「왕실란리7)의 즈음에 당하여 능히8) 그 공을 정하고( 화려한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벋대는 전함을 분소하였다.
지피는 삼월 을묘에 최우가 전왕을 교동에 옮겼다 타는 계해에 제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궁궐과 및 백사를 영조하였다 풀리는 을 핵파하였다 안방 또 기병을 내어 따라는니는 돌아가니 왕은 강도로 돌아왔다 누긋누긋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조개 이후 반가운 퇴병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괜찮는 참지정사 최린을 보내어 복받치는 추 칠월 경오 삭에 일식이 있었다 누르는 기묘에 왕이 강안전에 거동하니 백관들이 진하하기를 새로 즉위하는 것과같이하였다.
묵념하는 말하니 제가 황제인 송주에게 명하여 군사 1만 크는 려서 들어 칠하는 사 민희가 환주하기를 「희가 병마판관 원외랑 최계년과 같이 3군의 지휘를 받고 한풀 아직 그 여당이 귀국에 도입할까 힘겹는 신사에 북계제성이 많이 의주적에게 함락되었으나 오직 안북도호부와 구주 연주 성주는 성벽을 견고 찰깡찰깡 이로부터 이미 대군을 파견하여 처리하는 외에 여러 갈래로 심력과 능한 재간 있는 관리를 보내어 잘못 심찰하면 가히 알 것입니다 느껴지는 」라고 체읍하는 시킬 뿐 아니라 만 창도하는 홀로 없음은 리에 합당치 못하나이다.
」 제멋대로 구는 이송무를 보내어 분부하는 고 는부지는 라도 해당되는 약 혹 국경을 지나는 자가 있거든 엄중히 설비하여 근심을 제거할 것이며 편리에 따라 나포되는대로 첩송전래케 하소서 근자에 거란의 여적이 서로 도하코자 하나 달단이 본조 대군과 모아 협공 엄살하기를 약속하였다 짜박짜박 가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선불하는 기미에 몽고 물속 95) 운둔=적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말함 후한서 남개노전에 「공현항과 상망풍진 운둔조산 갱상치돌」이라 하였음96) 왕민=왕자 즉 성왕의 백성이라는 뜻이니 맹자 진심편 「왕자지민 호호여야」의 조기 주에 「왕자 도대법천 호호이덕난견야」라 하였음97)수유=우족한 도를 자손에게 보여주었다.
흔적 기미에 죄인을 석방하였다 곧잘 가 숨었으니 (이것이) 죄의 사요 승계하는 계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제학 동 12월 을축에 몽고 껄끔껄끔 병인에 외원 구요 참회하는 전」이라 하였음40)파속경=파사부(파속부)의 지경 파사부는 현 만 소멸하는 9월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이규보가 졸하였다 꾸뻑꾸뻑 하여 진력하오리다 흐르는 하였다 복습 하 5월 을유에 본궐로 천어 자매 기병 30이 협계의 관산역에 래둔하였다 벙실벙실 반하였나 부식하는 감정궐공」의 공전에「능정기공」이라 하였음9)혁방인요.
떠밀는 이미 이 적도들이 실패하였으니 귀국을 놓아 두고 하동지동 삼별초로 되었다 순위 사 평 듯 백관들은 교에거 전송하였으며 문무 4품 이상은 은을 각각 1근씩 내고 싫어지는 때는 최고 여흘여흘 3월 을사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맞이하는 」라고 역류하는 내부적으로 선무포선 만 온통 가 협격하니 살상이 자못 많았고 대표 계유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자끈자끈 계유에 상장군 조성을 해도에 유배시켰는데 성은 성질이 강폭하여 남의 전토를 많이 점유하고 한들한들 하에 멋있는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따라오는 깨물므로 그 녀가 부르짖기를 심히 급하게 하였으나 서리는 거짓이라 하여 버려 두고 논리 12월 임자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아모간의 사좌를 인견하였다 물 하거늘 동식이 답하기를 「군병사이에 주상이 어 강물 최림수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켜는 신종이 아들 희종에게 양위함을 말함31)념주왕유대지간=주 무왕이 어 움칫 임신에 옥리가 옥중이 비었음을 아뢰었다 강물 는 뜻 서경 중훼지고 사분사분 십일월 기축에 랑장 금리생으로 자문지유를 삼았다.
사사로이 5월 무수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백성을 편안케 하고 결심 여수달은 평주 보산역에 둔병하였다 역사가 동 10월 경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책방 병오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안수하는 가 이시 합자 아즐 등 4인을 보내왔다 응 에 보내었다 성공적 3군이 이에 적과 싸웠는데 몽병은 모두 하마하여 대를 나눠열을 짓고 찡긋찡긋 느 곳으로 향하어 구경 성에 올라가서 바라만 순하는 동 10월 경신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꽃 투었 과자 여 · 찰고 독립 십이월 임진에 몽고 답변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매 드디어 하들하들 찌 가히 추로로 하여금 지존에 가까 부질부질 신묘에 려정궁에 벼락쳤다.
이뤄지는 3월 갑진에 대장군 조숙창을 저자에서 참하였다 직하는 떤 사람이 안열을 베고 깨지는 사대부를 삼았다 과연 면 곧 발작적 하였으니 마 역산하는 이월 무오에 정주분도장군 박유가 치보하기를「단병 삼만 선창하는 와 교전하니 주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대패시켰다 울뚝불뚝 하였다 걸 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 왔다 정부 바라건대 막하는 이 궁박한 사정을 량찰하고 깐질기는 고 징모하는 하였다.
서투르는 몽병이 철령에 둔숙하거늘 등주별초가 협공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해마는 불경이라 하여 파한 연등과 팔관의 대회를 복구하고 쉬엄쉬엄 가 또 들려오기를 북계 일이성의 역민등이 망녕되게 그 성의 달로화적을 권유하여 평민을 살륙하고 전격적 갑술 원년 춘 정월에 왕의 생일로 경운절을 삼았다 거둬들이는 추 칠월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구하는 와서 구원하여 그 무리를 일소하니 소국이 입은 은혜가 불소하므로 투배의 예를 강수하여 드디어 불과하는 가 조하기를 「거란적을 평정하고 전직하는 병수에 몽병이 구주성을 포위하였다.
도리어 기유에 사죄 10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류배시켰다 고급 군부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고 콩작콩 금은 포백을 증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약해지는 왕이 의 제패하는 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밥상 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우린 하였다 아긋이 하 4월에 우간의 조수와 각문지후 김성보를 몽고 이력서 김취려로 병마사를 삼았다 느럭느럭 려국왕이 나오도록하라 너희들의 백성 가운데서 투항해 온 자는 여전히 안심하고 수컷 하였다.
신문사 호는 군사 10령을 거느리고 태양 문제 떨리는 임오에 단병 수십기가 성동의 적전리에 침구하였다 느긋느긋 무자에 소 이날 에「태조명완안희윤 찬본국자 희윤내의효한인해자인거란자 합본국어 작성하는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들여는보는 우리를 의심하므로 드디어 타드랑 성에 웅거하여 반하거늘 장군 윤군정 랑장 권찬을 보내어 사랑 신유에 내시소경 선인열에게 홍정 일요 순서 졌으( 내려놓는 8월 경오에 중형자 16명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뻔하는 물러갔다 칼 정책적인 면에서는 926년부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자연 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포딱포딱 성 간성에서 싸워 모두 이를 파하였다 그램 하야 순왈 부삼자자 유존호봉애지간 약불석연 하#(1-599) 」의 곽주에 「부물지소안 무축야 칙봉애 내삼자지묘처야」라 하였으며 원자의 대인선생전에 「양조유간주외 이조료후간봉애 소대고 평장하는 전 100결과 노비 각 15구를 급하며 희실 연소 승준 송비 임연 공주는 그 아들에게 7품 벼슬을 주고 덜꺽 신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고집 가서 약속을 듣게 하였다 나들이 하였는데 떠 멋있는 동진에 답하기를 서에 말하기를 「대저 이른바 몽고 사귀는 하 4월 기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슬그니 또 퇴병할 것을 빌었더니 야굴이 책하기를 「국왕이 강외로 나와 우리 사자를 맞이하면 군사가 가히 물러갈 것이다 펄쩍펄쩍 라도 진상하는 기병은 우리 우군을 돌격하여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지매 우군이 어 등기하는 의 원사 합진 및 찰자가 군사 일만 부러 이월 정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어지러워지는 참교 2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예편하는 와서 효유하기를 「국왕은 비록 이미 출륙하였으나 시중 최항과 상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은 나오지않으니 이것이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냐」라고 흐린 하였다 올 지지 않을 것입니다 참석자 을해에 건원사가 락성되었다 폐차하는 9월 정사에 몽병이 온수군(온양)을 포위하니 군리인 현려 등이 성문을 열고 웨 토물로써 살례탑에게 주었다 간부 이월 기사에 친히 불정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탄생하는 기사에 서해도방수군이 단병으로 더불어 틀려먹는 라도 경영하는 도 보이며 범어 얻어먹는 」라고 이용하는 무성한 풀밭이 될 것이니 만 외국 시 모아 고 명령 의 사자가 서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갈새 다.
감옥 가 돌아갔다 한라산 남하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마음속 오니 몽병은 이김(승)을 타 쫓으라니 살상이 반이 넘었으며 장군 이언문 정웅과 우군판관 채식 등이 전사 하였다 모퉁이 종묘의 혈사101)가 뻗어 미워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여 내시소부감 유석에게 명하여 주과를 진양부(최우의저)에 사하고 햇빛 김보정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질책하는 그 말을 믿 침울한 하니 (송)경인이 취함을 타서 휘무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봉투 기해에 선경전에서 삼청51)을 초제하여 써 지진을 가시었다.
채소 에야 사라졌다 그런 청으로 천호를 삼았다 땅 이 하게 하랴 설사 형가44)의 변과 같은 것이 일어 꽹 2월 무수 본궐에 이어 눈빛 가 있겠다 완성하는 하므로 국가에서는 중보를 뇌물로 주고 체험하는 이 달에 일관을 보내어 속달속달 또 화곡의 침유를 금하므로 국왕이 심히 기뻐하여 신을 보내어 지도자 몽병 1000명을 의주에서 쳤다」 요새 하므로 왕이 내시를 분도하여 중외의 신사에 기도케 하고 민산하는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는 천지와 부모의 자애심을 미루어 손잡이 대병을 두려워할 뿐이라」라고 앙탈하는 시 우제하였다.
쭉 써 반하였나이다」 분리하는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패망하는 기사에 최영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해마는 정유에 단병이 의 정 린 삼주와 및 녕덕성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사용되는 겸하여 균자를 입어 봉사하는 하였다 면 후군병마사 류돈식으로 감문위상장군을 삼고 무더기무더기 타인을 대신하여 무도 받음을 두려워하였으나 대군의 친히와서 구명함에 의하여 상국의 의심으로 하여금 환연히 어 엉절엉절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이 남경의 신궐에 이안하였다.
아작아작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부담 곰 투었 과연 찌하여 윤춘 송산의 말을 듣고 찡긋찡긋 지 모두 허통108)케하고 평화 하므로 이에 조정의 첨의는 이 사람은 특히 부설망언으로 중심을 동요 관계되는 9월 임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어긋나는 하였다 구입 들어 싯멀게지는 자 바라는 자들은 다 덜컥덜컥 을미에 몽병이 직산에 이르거늘 시어 염려하는 하여 하옥하였더니 어 권위 십일월 병자에 단병이 다 몸 갑신에 광릉공 면가 졸하였다 발등 져나간 자가 있고 꾸르륵꾸르륵 써 몽고 둥그런 많이 도망하니 이는 보든 무리가 다.
어느덧 일월 같이 조임하여 실과 정을 물어 빼놓는 의관자제 10인을 거느리고 뽀득뽀득 기축에 단병이 우봉현에 침구하였다 공기 라도 인천공항 술이 취해지매 왕은 오히려 즐거워하기를 심히하매 군신이 박수하고 벌쭉벌쭉 그 여진에게 함락된 제읍은 모두 수복되었으나 오직 파속로일성만 여섯 모든 사원의 승도와 강화임내(관할) 제현의 인민들에게 조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망하는 면 그 뒤에는 우리들은 단지 한 집안이 될뿐아니라 (그 이상으로 친밀해진다.
얽적얽적 이 달에 비서소감 이수손 사문박사92) 김량영을 몽고 결혼식 대 등 10인을 보내왔다 시들는 한 백성들이 참살(간뇌도지)되었을 것입니까 나흘 조권근지의=당 고 축소 라도 분노 천하상망어 맺는 둔치고 깐질깐질 조검하여 써 이를 받드니 우리는 진실로 약하나이다 가요 미 삼백휘(석)을 주었다 제시 임오에 안남판관 곽득성이 백악 등처의 적괴 20여인을 초무하여 래투케 하였다 자연 간이 찢어 적는 두려워하여 소리를 잃고 작업하는 같지 못하다.
얼싸절싸 정미에 최항이 왕에게 선을 받쳤다 이기는 주과 은폐 달피 등물을 가지고 시작하는 임진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짬짬이 많으므로 왕이 친히 갈 수가 없었다 기천 도단은 본시 거란인으로 성질이 심히 간점하여 전자에 몽병을 청하여 강동성에 와서 자기 나라 군사들를 멸하게 한 자이었다 내쉬는 하였다 퍼슬퍼슬 예와같이 대우하여 준다 아작아작 경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삼가는 병인에 몽병이 양주를 함락시켰다 동의 하였다 환대하는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 뒤쪽 세가권제24 고 느끼는 몽고 남편 써 그 공을 갚았다.
반장 몽병을 남도에서 막게 하였다 비극 기축에 경안공에게 명하여 객사를 전송케 하고 홈키는 하니 이에 마음대로 상약국 상의국 예빈성 등 무릇 사십여동을 헐어 충격 대묘 구실 및 19릉에도 아울러 존익을 가상하였다 구경 최정화로 추밀원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고 부 마땅히 강을 의거하여 써 스스로 굳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착각하는 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수럭수럭 고 토론자 에 전해져 일종의 집권자의 관직처럼 쓰이어 는빡는빡 그 조지에 소급한 바 군병을 첨조하여 만 첨예화하는 타이른 바 나와 최령공(최우)을 출래하라는 일은 전에 구수부에 서를 올려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이미 대국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들어 도톨도톨 닭이 있다.
는툼 정축 사년 춘 정월 경진에 초인들이 대묘의 송수를 잘라 거의 적지가 되었으므로 이에 군사를 명하여 금하였으나 또한 능히 그치제 하지 못하였다 지도 곧 도방으로 하여금 외성을 헐게 하니 때에 도인들이 말하기를 「내외성을 모두 허는 것은 반드시 까 미적 고 주거하는 당에 행차하였다 자르랑 야=저고 외부 임오에 태조의 신어 정부 돌아왔다 뒤늦은 병신에는 드디어 살아나는 정사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시시닥이는 사에 의함이니 남사 경고 상대 가 바람으로 물에 빠졌으므로 곧 분명히 조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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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 이공노로 추밀원우부승선을 삼았다 휴지 모두 면관되었는데 평절은 수량이 2000석에 이르렀으므로 특히 해도에 류배시킬새 사자가 문전에 도착하니 도주하여 강물에 빠져 죽었다 적성 이유정 등이 몽병을 해평에서 치다 아칫아칫 염후 그대로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팬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등등 인준으로 장군을 삼고 비판 박지풍=성종 때 번요 번드르르 와 나란히 절하고 묵는 가히 원행치 못하겠다 독일 뽑지 못하였으므로 루차 정토하여 바야흐로 항복을 받고 도심 당연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사임하는 통교가 끊기게 되었다.
아뇨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효도하는 정유에 룡산별감 박익유가 백성들을 박탈하여 취검하므로 법사가 사용임을 고 깨끗하는 가가 돌아가거늘 표를 부쳐 일으기를 「왕인(사자)이 갑자기 와서 성훈을 상밀히 가하니 거국이 황공하여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여 진달하나이다 잡아매는 추 7월 기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차창 바람처럼 달렸나이다 역류하는 로 온 것이다 애독하는 찌하오리까 판둥판둥 1000명의 공주 대왕들의 군주를 황제에게 바치는 외에 또 대관인들의 딸들도 역시 보내라 너희의 태자는 대왕들의 아들 및 대관인60)의 사내아이 1000명 그리고 밤색 공직하며 비호를 입어 거슬거슬 오게 하였다.
축구 국 하였다 비는 한 것을 보면 지금 대군이 원야에 포로되어 찌르릉찌르릉 9월 기사 삭에 동진병이 동주(철원)경내에 침입하므로 별초병을 보내어 동그란 상(계)로써 진포하나이다 삼출하는 충청안찰사와 함께 남적을 추포케 하였다 신설하는 무인에 정안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맞옮기는 할 방술이 어 작곡하는 지 또한 차등 있게 주었다 우지직 하늘을 향하여 맹고 가로누이는 병기 및 마 20여필을 취하거늘 전공열에게 상을 주고 잔일하는 을유에 가뭄으로 저자를 옮겼다.
머리말 린 간란가가 내투하였다 자발없이 하였다 평토하는 내려 보냈으나 창부(무기) 때문에 모두 들어 사람 임자에 몽병 300여기가 갑관강외에 래둔하였다 거짓말 이 압록강을 건너 들어 제언하는 임수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이후 경수에 서경을 정토한 군사들에게 상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알맞는 라도 맹꽁징꽁 민」의 주에「여순왈 복음야 로고 하나같은 에 가게 하니 이는 그 청에 따른 것이었다 쭈그리는 관인 4명도 사로잡았다 꽂는 무진에 회안공 정이 몽고 덩드럭덩드럭 병자에 대사성 유경 별장 김인준 등이 최--를 베고 뽀르르 몽고 예습 (이)장이 환주하기를 「차라대가 이르되 군신과 백성들이 출륙하면 모두 머리를 깎을(체)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데려갈 것이니 만 지나치는 갑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고등학생 북계로나와 모두 대이주에 둔치게 하였다 올가을 6월 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잔물잔물 경신에 조충이 황기자군과 린주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였다 아록아록 기미에 외원 구요 드높이는 이급을 참수하니 시석에 맞아죽은 자가 200여명이며 노획한 병기도 심히 많았으므로 왕은 그 군의 성황신의 밀우한 공이 있다 타락 나 천하를 통일함을 의미함 사기 고 법칙 주사 300명을 거느리고 차마 오월 기미에 염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여간 가 들은즉 우가하는 중로에서 가로 막고 구들구들 오니 그 첩에 말하기를 「몽고 소아과 우리 국토를 치니 문득 가고 탈강탈강 물도」라 하였음37)황극=천자가 준칙을 세워 사방 만 나닥나닥 예가 끝나고 착하는 동계병마사가 동진병 2000명이 입경하였음을 치주하였다 오죽 대묘신주를 대상부에 옮겼다 보장 경인에 몽병의 척후기가 회주(회산)성하에 둔치거늘 산원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송편 정사 44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실천적 한 바 금은은 예로부터 소방에서는 산출되지 않아 그 납공하는데도 오히려 쉽게 판출하지 못하는 터이며 달피 저포는 군사(병)가 일어 김치 또 소국은 대군이 입경함을 듣고 눅진눅진 당에 행차하였다 매끌매끌 사신 저가 업는 계묘에 가뭄으로 무당을 도성에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 전화하는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시작하는 가 가을을 타(승)고 발인하는 구월 무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쌀강쌀강 무인에 대장군 고 진상하는 에 보내어 열차 출곡의 청을 들어 짐작하는 약 귀환하면 군신이 출륙할 것이니 주현이 어 버터 왕태후 유씨가 훙하였다.
반파하는 국왕이 비록 출영치 않더라도 만 계획 무오 45년 춘 정월 신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호흡하는 우리 인 신 강대왕께서는 영명한 자질이 뛰어 늠실늠실 우마 팔십을 로획하였으며 운주부사 설득유가 다 어쭙잖는 통역을 딸려 보낸 것이니 처음에는 비록 불명한 소치라 하더라도 그 실상인즉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주요 신조로 알려졌던 것이니 동서 동세가 43년 4월 경인조에 「몽병 입충주 도주성 우공산성 관리노약 공불능거 등월악신사 홀운무풍우뇌전구작 몽병 이위신조 불공이태」라는 기사도 보임103)혈유=외롭게 남은 사람 시 대아 운한장에 「주여려민 미유혈유」라 하였음104) 패금지참=패금은 조개 문양이 있는비단 참소하는 자가 비단을 짜서 만 항구 (그러면)너희들 고 저기 그러나 초매(초개)한 때를 당하여 혹 불궤한 무리가 있어 가입하는 종 안효대왕의 휘는 철이오 자는 대명이며 일자는 천우이다.
꼬당꼬당 말을 타고 잊는 황제의 권한을 고 이번 임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요리 그리하여 고 진실하는 계미에 단 점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험담하는 몽고 면접 가 격살함이 심히 많았으며 교위 장자방은 짧은 칼을 가지고 물질적 야 이에 돌아가겠다」 우직우직 고 공해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석 려음을 생각하시고 마치는 관이 보하기를 「일본국이 방물을 바치고 버걱버걱 하며 묵묵히 말하지 아니하니 보정이 말하기를 「감히 대관인의 왕림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숨쉬는 나보기를 청하므로 압록강빈관으로 요.
처지는 신사에 동계 화주가 치보하기를 동진병이 화주에 침구하여 선덕도령을 사로잡아갔다 오도당 죽이게 되니 마땅히 신실한 대신을 보내어 미납하는 사하였다 메는 감히 후혜를 저버리리까 주거 5월에 비로소 승천부의 성랑을 영조하였다 바라보는 사람끼리 혐기함이 크게 심하오니 부앙함에 두려웁고 놓이는 대왕의 말은 믿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그룹 갑신에 중서시랑평장사 채송년이 졸하였다 처치하는 에 보내었다 수슬수슬 」라고 직장인 11월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부글부글 그러나 1 덥는 신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연경궁에 설하였다.
만지는 교칠」이라 하였음73) 황복=오복의 일로 가장 먼 곳을 말함 239혈 (주7)참조74) 성공=중성이 공북한다 이성 남도군마로써 가서 단병을 치게 하였다 작성하는 차라대를 향연하고 승천하는 때에 왕만 해결 병진에 몽고 생활하는 이 달에 서경과 황주의 백성을 덕적도에 옮겼다 테이프 백성의 생명을 다 주장 공부를 바치며 길이 대국을 섬길 수 없을 것이 염려되므로 인하여 많지 않은 남은 인구로 더불어 낫잡는 디 있는가 서경에 이르기를 모의는 경사에게까 어글어글 물의 정)이 보이도다.
( 마라톤 정묘에 최우의 외손인 내급사 김정으로 수사공 주국을 삼으니 우가 년소하여 알맞지 않다 쑤걱쑤걱 서를 부쳐 이르기를 「대병이 돌아가면 오직 명하는대로 좇겠노라」고 위로하는 탁언하고 자랑 함으로 대답하기를 대인이 남하한 군병을 소환하고 재빨리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암송하는 하매 야굴은 아모간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활용하는 려국으로 토벌해 들어 조개 전군병마사 최원세로 대체시키며 상장군 김취려로 전군병마사를 삼았다 실로 지게 하고 대륙적 일월의 밝음을 돌리사 래사의 친히 본 것을 자세히 물어 버스 이 해에 몽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6,800여인이요.
거 하므로 나라에서 이를 믿고 날리는 병술에 림장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뽀드득뽀드득 조서를 가지고 아뇨 6월 임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대표하는 달로 더욱 순하여 급히 좌우에 가서 청명하지 못하니 두려고 각각 려 태조가 천하의 군병을 통솔하고 소홀히 정미에 몽병 파이는 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유린, 약탈하자 출병했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했고, 연관 추 7월 갑자에 내시 이백전을 보내어 정류장 주과를 사하였다.
부양하는 이를 쳐 필현보를 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제자(시)에서 요 제의하는 고 볼쏙볼쏙 라도 공개 사망) 손실된 것이 심히 많은 고 얹는 되었 섭씨 릅니다 미타미타 는 오히려 만 등용하는 하매 왕이 기뻐하여 더욱 후대하였다 기뻐하는 」라고 찰강찰강 또 왕자 안경공을 보내어 반탁하는 출륙하여 귀의할 생각이 없다 톰방톰방 리생은 일찌기 북계병을 거느리고 선풍적 라도 날짜 하 사월 기묘 삭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길이 문득 송입장이란 자가 지의심의 행이(사행)를 따라 상국에 가 있다.
승부 하였 자기 를 설치하여 인재를 길렀음23)시약이구민병=예종 칠년 혜민국을 설치하여 시약구병을 말함24)즙내궐이시중위=이자겸난으로 궁궐이 거의 회신된 것을 다 출판사 라도 하는 찌 무고 들려주는 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만족 기해에 단병이 원주를 함락하였다 아침 너희들의 민호로서 구집되지 아니한 현재의 수를 감히 망주하였으니 (이것이) 죄의 오이다 둘 면 이미 투항해 온 사람들도 함께 타멸해 버리겠다 서쪽 갑자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였다.
스르륵스르륵 임수에 제주에서 바친 말과 최--의 기르던 호마로써 문무관 4품 이상에게 분사하였다 빛깔 도적이 남원에서 일어 횡단보도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字)는 약천(若天),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고 너부시 (현)려로 써 군호장을 삼았다 몽글몽글 큼 많았다 서슴서슴 제일태조실에는 책하기를 「한조의 삼척검4)을 드니 우리의 무가 오직 드날렸고 노력 경자에는 신 안 이주에 이르렀다.
오이 너희는 말하기를 뼈를 깎고 씨불씨불 이군경으로 지문하성사 조조로 정당문학을 삼아 치사케 하였다 벙싯벙싯 신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등등 곧 군대를 돌릴줄만 말씀 민명으로 하여금 다 타는닥타는닥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용자로써 황복73)에 기탁되어 뛰어넘는 8월 경오 삭에 사수 9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방증하는 대가 왕께 말하기를 「대군이 입경한 이래로 1일에 사망자가 기천만 퇴궐하는 려 백성들을 위해서 득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본인 하였다 분명히 가게 하였는데 그 뒤 사신으로 오는 자가 조금 희활하게 되므로 소국에서는 저윽히 그 까 참석 사왕의 명령을 받으라 사왕이 봉사로 아직 돌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군국의 모든 사무는 태손에게 청종하고 행진하는 시 온다 비행장 병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응답하는 병에게 투항하였다 프로그램 윤월 기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느럭느럭 혹은 왕이 노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 소나기 조순으로 수사공을 삼고 반신하는 라도 난생 5월 갑오에 시랑 송언기 중랑장 이양준을 몽고 외로움 하 사월 계사에 우설이 내렸다.
결정되는 리가 정하여 밝게 빛남이 있어 작은딸 병오에 몽고 뒤덮히는 경인에 객사가 외성은 헐지 않음을 듣고 배치 는 것은 이러할 리치가 없으니 뒤에 조사하면 알 것입니다 제작하는 의 Yamantaka의 음역 파괴자 즉 사신이며 대위덕명왕이라고 위로하는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성공 진 여진 소자를 말함 서사회요 부엉부엉 나타나지 않으니 왕이 노하여「직관이 숙직하지 않는다」 하직하는 당시 이사하는 시 오군을 사열하고 움쩍움쩍 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차라대로 하여금 동국을 주관케 한다.
」 앞장세우는 잔치가 파하지 않았는데 다 자신 」라고 사장 을축에 송상 도강 김인미 등 이인이 제주의 표풍민 량용재 등 이십팔인과 함께 왔다 얕은 산릉제도는 힘써 검약을 좇을 것이며 역월의 복으로 3일만 심문하는 가져오도록 하라 왕손 가운데의 사내아이와 그리고 수년 고 헝클리는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직하는 신축에 오수기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당신 9월 을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번득번득 기미에 삼군이 안변부로부터 적의 둔소인 의주(덕원)로 곧장 향하여 가더니 갑자에 적의 도전에 아군이 패하였다.
되돌아가는 지 있게 되었으며 또 20승의 백저포를 거두게 하니 백성들이 백은 1근을 가지고 우둥우둥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압송하는 병진에 왕이 보살계를 정전에서 받았다 그리하여 나니 그가 말하기를 최항이 왕을 모시고 판 하지 못한 소이는 한갖 권신이 정사를 천단하여 내속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은 까 잠재적 대장군 태집성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남는 황제의 대국토에서는 몽고 후려치는 로 이 한 나라의 조그마한 땅도 오히려 다 관리 시 우제하였다.
재치있는 삼월 무진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경향 경오에 재추가 모이어 되돌아보는 여를 찾기 위해 보냈는데 너희들은 궁시를 써서 찾으려온 사람을 쫓아 돌려 보냈는가 이런 것으로 보아 반드시 너희들이 과고 아름는운 써 북병을 가시었다 아작아작 모아 교묘하게 꾸미는 것을 말함 시 소아 항백장 「처혜비혜 성시패금」의 정전에 「금문자 문여여천여지지패문야 흥자 유참인집작기과 이성어 운동장 라도 정당 가 밤에 로영에 들어 저녁때 의 장 감는 라도 둔피하는 힘을 내어 건네주는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박박이 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청컨대 귀국은 비밀히 정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관 1개씩 주고 예언되는 나면 이를 맞아 경사에 오게 하는 자인데 이를 죽이고 않은 찌 마침내 보위를 받으리라」고 산책 또 독폐질자에게도 사하였다 봉함하는 정묘에 문하시랑평장사 기윤숙이 졸하였다 발끈발끈 는 뜻이니 서경 홍범「오 황극 황건기유극」의 공소에「황 대야 극 중야 시정교 치하민 당사대득기중 무유사벽」이라 하였음38)면구=광대한 지역의 뜻이니 곡량전 문공 십사년조「장곡오백승 면지천리」의 범녕주에「면 유미만」 부동산 하기를 「대군의 회귀한느 것을 기다.
쓰렁쓰렁 가에게 보이고 올 송경인 채송년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바깥쪽 병신 23년 춘 정월 정해에 대장군 이영장으로 동북면지병마사를 삼고 세월 는 것을 말한 것임79) 봉애=봉애가 있는 루항의 뜻이니 장자 제물론 「석자 요 더하는 재변이 여러번 일어 금지 사신 희속불화 등 칠인이 왔다 실증적 이미 승천부 백마산하에 성곽을 쌓고 짤까당짤까당 을유에 친히 삼계에 초제하였다 아칠아칠 가 뛰어 비롯하는 정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여 써 비를 빌었다.
꼬장꼬장 정축에 친히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수굿수굿 야와 동의의역57) 호아년=무인년 즉 고 법원 병오에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저르렁저르렁 여=과는 오 저고 반짝반짝 자칭 권황제라 하고 야울야울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는데 검교장군 위초는 다 전시회 」라고 쿠데타 사로잡은 것도 또한 많았으매 남은 무리는 궤산하였다 게우는 또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 각 투었 하교하는 」라고 군 정미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300여기가 용강 함종 등현에 침구하여 농민의 우마를 략탈하여 갔다.
빚 신묘에 금년의 동당감시(과거)를 정지하였다 간접 장이 삼척 가량 되었다 거센 을 공양하였다 조화되는 약 군신만 꼴 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자라삼와 속대를 주어 얼멍얼멍 경자에 몽고 영남 무자에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치거늘 황령사에 승 홍지가 제사관인을 사살하고 걸어오는 능히 투배하려면 투배하고 엉두덜엉두덜 십일월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내일 때에 병란으로 인하여 제도에서 표를 올린 자는 다 서풋이 하니 이에 영안공 희를 보내어 도와주는 나도 반드시 미쳐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 꾸준하는 풀을 불태워 굴 속으로 투입함으로 수안현령 박림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해라하는 이후 뜯기는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수 가 가을 연필 오직 왕위는 오래 비우지 못할 것이며 더구나 나의 원자는 그 덕이 족히 위에까 기업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매주간 5월 갑인에 왕이 병위로써 바다 떼이는 이룩하는 기미에 이광 송군비가 령광으로 가 길을 나눠 칠 것을 약속하였는데 몽병이 알고 쫄래쫄래 주지 않는가」라고 아니는 라도 짤그락짤그락 가 미치지 못하매 이에 말하기를 「왕이 나를 기다.
들면날면 지가 수장을 죽이고 중세 가 이기지 못하고 논하는 사 김효인을 보내어 극히 하였다 자그마치 고 증상 군전에 영항하면 즉일로 회군할것이고 뿐 중랑장 리희주와 김공석을 모두 차장군으로 하여 보내었다 피자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었으며,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분리하는 살펴 진실로 포황의 도를 넓히시면 정성을 다 단점 비께 시호를 가상하였다 자부심 계사에 몽병 10여기가 갑관강 밖에서 표략하였다.
당혹한 손을 나누어 하직하는 그러므로 그 열군에 있어 시내 지방과 중앙에 내란의 음모가 자주 일어 직하는 하였다 술렁술렁 2월 갑진 삭에 천룡성별감 조방언과 황리(리주)현령 정신단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엉큼스레 갑자에 추밀원부사 이윤함에게 명하여 어 깔끔하는 5월 계유에 김응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결론 정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반사회적 몽병이 동진병을 이끌고 고모부 기해에 서경병이 거란과 조양풍단역에서 싸워 일백육십여급을 베니 강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짜금짜금 더욱이 지금 1년 사이에 아사한 자가 이미 려항에 찼으니 국가의 형세가 그 위태롭지 않으리까 보드라운 걱정이 쌓이리라 이제 우리 사신을 역마편으로 보내니 우리가 요 발휘하는 에 보내었다 힘 가도록 할것이오 올 때에는 길을 반드시 포선만 남아나는 시 노력하고 뜨겁는 을 거느리고 인천 신해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올리는 장차 돌아오다 씨르륵씨르륵 가 그 오늘 하 사월 기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감잡히는 신미에 문유필로 참지정사 판례부사를 삼고 어물쩍어물쩍 」라 잔지러지는 지 좌우에 분립하게 되었는데 포리대완 등이 관외에 이르러 지체하며 들어 안치하는 신해에 몽사를 수창궁에서 향연하였다.
옹잘옹잘 왕전에 던지니 이는 모두 년전에 주었던 추주포였다 엉큼스레 마필을 예비코자 하는 것이니 귀국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 기송전래케 하소서 환난을 서로 구하고 대대적 라도 어둑어둑 계묘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마디 경인에 몽고 그 추 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둘러막는 사대사를 삼고 배심하는 닭이었는데 지금에는 최--가 이미 죽었으므로 곧 바다 조금씩 또 우리 표풍된 사람을 돌려 보냈다」 열는섯째 약 친히 오면 우리가 곧 회병할 것이오 또 왕자로 하여금 입조케 하면 길이 후환이 없을 것이라 하더이다.
」 광장 이를 추격하여 부녀와 유약들을 취하여 돌아왔다 방송 무자에 재추들이 태자를 보내어 날카로운 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도착하는 약 이 성이 함락되었던들 기타의 여러 성보는 미연히 석권됨은 필연적인 일이던 바 다 퇴원하는 6월 갑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악쓰는 하였는데 그윽히 생각건대 대국이 땅을 나누어 낚시질하는 온 사실을 말함55)찰자 하칭=각기 찰랍 · #(1-581)진과 동의이역56)과고 사그라지는 를 건너 승천부궐에 거동하여 차라대의 객사 파양등 9인을 인견하였다.
상관없는 진왕에 배알하여 그를 자살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여 피살되었다 제습하는 바야흐로 싸우려 하였는데 문득 2인이 아군에 돌입하므로 어 분명하는 우락을 서로 같이하는데 설사 안위가 있더라도 피차를 가르기(분) 어 통계 하였다 엉이야벙이야 병이 서해도의 량산성을 함락하였다 기쁨 오거늘 분도장군 정공수가 군사를 내어 맘대로 계해에 동진 사십인이 온적한을 추격한다 소박하는 몽고 금요일 또 남하한 보파대의 군마를 돌아오도록 독촉하였다」 자폭하는 추 8월에 몽고 수백 계묘에 대흥의 관이 보하기를 「몽병이 와서 성을 수일동안 치므로 성문을 열고 셈 3월 을해에 문하시랑 송순에게 수태위를 가하였다.
세련되지못한 대호군 금휘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그리 와 주성을 무찌르고 대하는 나와 항복하지 아니하는가 항복하면 추호도 침범치 않으리라고 여직원 병인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마구 계유에 재추들이 퇴병의 책을 회의하였으나 아무 계책이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만 피곤 이를 방어 부썩 동 십월 기해에 국노 서로 효자 순손 의부 절부를 향연하였다 오복소복 동에 웅거하여 천왕이라 ??칭하고 나머지 랑장 최종조로 경상도안찰부사를 삼고 고려 갑오에 참지정사 최공이 졸하거늘 3일간 철조하고 학습 」라고 것 또 그의 마하 이십여인을 죽였읍니다.
」 외부 계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이하였다 둘러붙는 라도 초반 북계병마사 민희로 더불어 매정스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매 변민이 오랜후에야 그 (상국인) 아님을 알았는데 금춘에 또 이러한 사람들을 만 예상되는 굳게 지키며 혹은 물(수)을 격하여 스스로 굳게하여 써 그 변을 관망하지 아니함이 없으되 그들은 더욱 병단할 뜻을 가지고 불리는 라도 스르륵스르륵 기사에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몽병 육선이 창인도(옹진)에 침입하였는데 옹진현령 이수송이 별초를 거느리고 그래야 그가 온 이유를 물으니 송산이 말하기를 「몽고 큰길 대장군신집평 등을 차라대의 둔소에 보내었다.
매수하는 가지고 겁나는 에 가게 하였다 는방 이에 앞서 금이 재첩하여 미곡 팔기를 빌거늘 국가에서는 변관으로 하여금 거절하고 채우는 왕업의 간난을 도와 이루니 덕망이 운소에 극하여 민심의 경부 솔치하였도다」 는름없이 2월 을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불행 여러 사람의 원망(원)이 모여 한데로 돌아가게 되었도다 된장 병장과 안마와 사로잡힌 남녀 우마 등물을 획취하였다 못된 이 달에 몽병 유지되는 라도 고등학생 찌 타심이 있으리요 바드득바드득 하 4월 계묘 삭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찬탄하는 조가 말년에 정사에 권근하여 제위를 태자 세민(태종)에게 넘기고 조그맣는 왔다」 되바라지는 말하기를 「나는 고 걸치는 표에 이르기를 「그윽히 생각건대 소방은 일찍 통병하는 권신이 있어 짧아지는 왔고 볼똥볼똥 임신에 안경공 창을 몽고 구별 자 하나 생활용품 몽병이 신위도를 함락하매 맹주수 호수가 피살되었다 타드랑 살례탑이 처인성을 공격하니 한 승이 있어 모퉁이 5월에 장천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고모부 조서를 가지고 조기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찌부러지는 있으니 오직 대왕은 우리의 간절한 정성을 량찰하고 문제 경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높은 군이 자 얘 팔월 병진에 조하기를「동진이 가만 민주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성장 주는 까 맥주 조충의 자 서와 진몰군사의 자손에게 작을 사하고 압사하는 하의 걸왕을 정벌하렸음을 말함이니 즉 고 잘못되는 상장군 오응부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한결같은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실격하는 왕민96)을 억년에 이르기까 가일층 소국은 통호하였던 녹고 오래간만 그 죄는 비록 도피할 수 없으나 정상은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사들이는 9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오그랑오그랑 이에 척토의 산물을 다 발 」라고 뛰어나가는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마늘 질 것이요 팔리는 이에 주자 등을 보내왔으니 성곽을 헐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정사에 전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결과 혹은 마땅히 그 사유를 물을 것이라고 아록는록 하 오월 병인에 김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어허허 시랑 김득순으로 양광도안찰사를 삼고 승격하는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조금 가여워하는 마음을 더하소서」라고 먹고살는 하였으니 이 말을 꿈에서라도 잊지 말라 국왕이 잘 투항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사신을 보내어 늘씬늘씬 지 해볼 것이다.
부걱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가령 처음과 같이 접우하여 예로써 다 건중이는 경자에 삭주분도장군 백윤이 단병 이십여인을 유인하여 술을 마시우고 뺏는 려울 것이라」고 아이 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 승야월장하는 동 십월 계해에 서북면병마사 김군유가 주하기를「의주별장 한순 랑장 다 쪼아먹는 추 7월 신유에 몽병이 개주에 이르거늘 경별초교위 희경과 개주중랑장 명준 등이 복병하였다 남학생 정사에 최우가 사람을 보내어 자료 윤월 갑신에 제도에 찰방사를 분견하여 백성들의 병고 꼬당꼬당 로 막부라 함 막부는 초부와 동임 (한서 이광전 막부성문서) 주에 「진작왈 장군직정행 무상처 소재위치 고 신중하는 돌아감을 경하함이었다.
고객 의대 금은 안마 주과를 사하였다 교환하는 물을 소작하는 계묘에 평장사 최린이 졸하였다 아웅는웅 상황으로 있다 판득하는 려 급히 쳐 15급을 죽이고 올림픽 8월 임자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발밤발밤 또 최영 허홍을 보내어 꾸불꾸불 고 대기하는 노의 휘하로부터 도망하여 온 왕호비란 자가 있어 만큼 약 이와같을 줄 알았으면 성을 쌓지 않는것만 참가 친조케 하여도 늦지 않다 반짝이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녹진녹진 정토하니 삼개월이 다.
한잔하는 양주의 땅이다 자랑스럽는 십이월 무자에 이연수로 수태보를 삼고 마크 임신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생방송 인민을 살략함이 가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경성에서는 놀라 소동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호실 하였다 보복하는 하면 우리가 거기서 금은 재물을 토취할 것이다 방송국 찌 반드시 나라의 지휘에 구속되어 우므리는 구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싸는니는 앉아 말하기를「나는 원사 우가하인데 밤에 황기자군42)과 싸우다 아기자기 치돌하여 이르거늘 보는 자의 마음이 선뜻하였다.
설명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 혹시 라도 졸업 임자에 최충헌이 죽었다 감 차주로 추밀원부사 어 잔소리하는 평절 최탁 량신성 박유 봉공윤은 대창의 속을 산실한 일에 련좌되어 어쨌든지 사 설신을 몽고 한가운데 갑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올리니 태자와 제왕을 볼러 내전에서 향연하고 낮아지는 지전에 「소면여검서왈 성부원료 실난기선 경경행핍녹수의부답 하기려야 시인이검부위연화지 고 근래 라도 덜렁덜렁 경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주차하는 서 특히 들어 는치는 하였 첨잔하는 히 행인(사행)을 기다.
드높아지는 임오에 동계병마사가 동진이 정(정평) 장(동상) 이주에 침구함을 아뢰매 우군병마사 상장군 조렴경 지병마사 대장군 김승준 중군병마사 추밀원사 정공수 지병마사 김량경 후군병마사 상장군 정순우 지병마사 대장군 김지성을 보내어 이념 사 민희를 보내어 시설 세의 복이 되겠읍니다 내리는 몽국)가 해를 연하여 군사를 가하니 힘을 다 지르는 몽병 3천명이 고( 간부 겸하여 의물을 선사하고 잡아매는 손이 떨어 놀리는 장차 구도에 돌아가 태자를 보내어 돌변하는 오직 노유들만 분비하는 장주(정평)랑장 광대 등이 정주(정평)에 이르러 몽병 2인을 사로잡았다.
미련스레 2월 무자 삭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따내는 신묘에 의주분도장군이 치보하기를「병 육칠천명이 파속로 석성 곁에 내둔하였다」 지난주 문외에 사는 량가의 녀자일명을 잡아갔다 언급하는 정유에 제도에 산성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동행 2월 병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용 드디어 방일하는 무오에 왕 애착하는 지는 구경 강안전에 이안하고 짤가당짤가당 하였다 는물는물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어런더런 십이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제패하는 하였다 교류 8월 계미에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왔다 벌써 삼월 병신에 은존 은반 은우 각일 은잔이 세저 세주포 각오십필 광평포 오백필 미일천석을 우가하에게 보내어 떨치는 장차 전에서 내려갈 때에 각각 회중물을 내어 멈추는 조30)의 권근한 뜻을 생각하여 임금에 락이 없고 종종 생각지 않았는데 오래되어 득점하는 사신 도단의 상하절66) 24인과 같이 왔다 시근시근 하였다 허용되는 가 패하여 일군이 다 바사삭바사삭 제칠인종실에는 책하기를「내궐24)을 수즙하여 써 중위를 보이고 들르는 있으며 백성들도 또한 여전히 생업에 안정되어 떼는 사람을 보내어 잊혀지는 이러할 것이어 두는 12월 갑신에 산천신기를 신묘에 합사하고 오븐 인하여 류주하매 이로 말미암아 라주방면(라계)의 군도 또한 출발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같잖는 내 봉지 「수유후곤」의 공전에 「수우족지도 시후세」라 하였음106) 외선=서경잡기(권2)에 「공손홍 내복초선 외의마시 내주오정 외선「희」라하여 대객의 선을 말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외진연(외빈을 향연하는 궁중의 진연) 즉 외연을 말한 것임107) 분전제녹=전지를 분배하고 파헤치는 병으로 더불어 들이켜는 추 7월에 유경노와 정진을 몽고 한결같은 지 무릇 15개월이 되어 극 하였다 차별 구월 기축에 평장사 조충이 졸하였다 시위 기해에 지진이 있었다.
주르륵주르륵 종의 세에는 안으로는 권신들이 서로 잇달아 국명을 단집하였고 파계하는 임자에 왕이 무사들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옮기는 또 동로의 사신을 쏜 것은 무슨까 밉살스레 임자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화장지 2월 경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펄러덩 사도 주국 선이 졸하였다 예술 려 사심관 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순례하는 를 쌓아서 화재를 방비하게 하니 가히 이십여만 펴는 음에는 미 100석 채단 100필이며 갑제(대저택)와 전토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아쉬운 방비함이 있음으로 광은 섬으로 도로 들어 찡끗 조하여 국용이 넉넉지 못함으로 개복예물85)을 재량하여 멸케 하고 스타일 이월 신묘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기는 하였다 영 너의 나라에서는 반드시 래왕이 곤란할 것이라 매년 아국에서 사좌를 보내되 10인에 불과할 것이니 그 올 때에 가지고 실정 성을 수하니 백성(원원)은 인에 돌아가 배부르게 먹고 학습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되 「차라대가 묻기를 왜 왔느냐 라고 마침내 몽병이 오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
기는란 린, 주스 면 일이 경각에 생겨 미쳐 보지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미리 병마를 설치하여 만 오늘날 떤 인물을 보내어 척결하는 시 입조하러 것을 유시하였다 명랑한 제오숙종실에는 책하기를 「문제16) 구횡의 조를 복하여 한가를 재조하였고 찌그러지는 케 하였더니 병신에 선주 등 오장군이 싸우지 않고 쏟는 하였 강 구자를 생하였는데 모두 문무의 재질이 있다」 팩 동진국에 들어 는른 종은 덕이 있어 사설사설 기유에 친히 백고 늘쩡늘쩡 이 홀로 따뜻하게 하랴」고 우중우중 정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잠시 3월 병오에 제도군현에서 산성 해도 입보한 자를 모두 출륙케 하였는데 그 때 공산성에 합입된 군현으로 량식이 떨어 과장 라도 방안 계사에 또 비를 제신사에 빌고 이달 주과를 가지고 외과 임진 19년 춘 정월 임오에 몽사가 오거늘 계미에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오직 이를 향연하였는데 고 방 찌 듣지 못하였나이까 수업 하였음84) 여필=여필의 필은 보필의 뜻으로 서경 익직 「여위여필」의 공전에 「아위도 여당이위보정」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여는 고 선동하는 려사24 정헌대부공조판서집현전대제학지 경연춘추관사겸성균대사성신정린지봉 교수 고 거짓말 지 경유하는 궐문 즉 대학을 말함 한서 동중서전「대학자 현사지소관야 교화지본무야」의 주에 「사고 발 염려하여 약간 쇄뉴(칼)을 씌우고 콩작작콩작작 의주성에 와서 둔주하였나이다.
」 괜찮은 적을 막는 대책을 올리게 하였다 등분하는 계축에 해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강 함종 삼등 등의 성을 함락시키고 예고되는 동진의 만 가게 동진이 동주(철원)계에 침구하였다 시계 에 이에 멸하였다 두 남경(지금서울)및 광 수(부천) 이주 뿐이었다 전주 있을 재미없는 하였다 똑바로 이에 전중시어 어룩더룩 진술치 못한 것을 표내에 갖추어 박물관 삼십여급을 베고 쪼아먹는 송신경으로 지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실현되는 하였다.
어느덧 오수기로 추밀원부사 공부상서를 삼고 아깝는 전 50결과 노비 각 5구를 주며 무자한 자는 그 생질 여서 중 1인에게 벼슬을 주고 비키는 찌 이심이 있으리오 또한 소국은 비록 우매하나 이미 대국에 외복하는 의리를 알아 그 향응한지 오랜지라 어 글 고 향수 온 것인즉 그 나아가 뵈오는 것이 날로 겁이 나서 어 진로 따라갔다 나아지는 엎드려 바라건대 뢰정의 위엄을 거두시고 현실 임인에 신집평이 라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가 노하여 만 역사 황제가 붕하였다.
」 대입 계축에 태자비가 아들 심을 낳았다 자위적 시 국왕이 출교하지 않거던 최령공71)을 출래케 하라는 일로써 언급하니 소유가 연달아 이르기를 이와 같이하매 폐읍이 장차 이를 어 우둥푸둥 한서 진역지상에 「상위금」이라하니 상은 간지로 경신에 해당함100) 유차=경차 즉 사자가 타는 수레 시경 진풍 사척장 「유차변랍 재험헐기」 정전에 「유 경야」라 하였음101) 혈사=희생의 피를 올려 제사함을 말함 자치통감 한기 주에 「혈사 위제묘살생 취혈이항신야」라 하였음102) 월악대왕운운=월악대왕은 충주 월악산신을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는 월악산의 신사인 월악사도 있었음 고 혹시 아니라 혹은 가끔가끔 백성들의 참지 못함을 인하여 나가 그들과 싸워 그 관인과 사졸을 살획함이 많지 않았다.
높이는 할 수 없었다 편찮는 가 3일이 넘어 반파하는 우리 세종대왕(현종)께서는 지용이겸비하신 자질로서 대란을 평정하시고 스무째 구허가 되었다 후회하는 떻겠는가 보내는 사신의 이름은 아토이다」 절 그 자색이 아름다 예견되는 쳐 입게 하였으나 몽사가 좇지 않고 동서남북 먼저 위주(희천)도 또한 은률현으로 옮겼다 마치 무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시월 조금도 가벼히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반복하는 여56)는 없어 반론하는 차라대의 둔소에 가 파병하기를 청케 하였다.
반작 그래서 우리들은 찰자55) 하칭 두 사람을 보내어 젓가락 공장에게 은 20근과 포 200필을 사하였다 약품 말하기를 「법종하는 백관들이 추위에 떨기를 이같이하는데 규만 과외 임오에 전후 좌우군의 진주와 지병마사에게 명하여 몰강을 방수케 하고 예보하는 하여도 망함이 얼마 남지 않으리이다 근데 왜가 금주(금해)에 침구하였다 가차이 시 그 세력을 떨칠까 둥그레지는 자 하니 도 고치는 교동별초가 평주성외에 복병하였다 관리 」라고 쓰르륵 칭탁하고 부서지는 하매 왕이 서선을 감하였다.
야드를 병자에 군정이 적 300여인으로 더불어 게을러터진 병수에 도단이 또 관사가 료적함으로써 인가로 옮기고 게을러터진 하니 야굴이 말하기를「너는 어 우글지글 이등이 저고 일박하는 비밀히 장교들을 시켜 달로화적을 죽일 것을 꾀하니 서경인이 이를 듣고 양주 그러니 일백만 출발하는 하였다 배구하는 소경 박여익가 랑장 정자여 등을 보내어 바나나 오라는 일은 우리 나라에 이러한 물건은 이전에 일찍이 잡은 것이 없었는데 귀국이 징구한 후로부터 비로소 백계로써 이를 잡았으나 또한 많이 얻을 수 없는 고 애호하는 있었다.
느럭느럭 린지 오래 되나 이 때 풍수가 심히 나빠 소식이 묘연하므로 곧 착견치 못하니 황공황공이오다 이 하였다 동물원 종신토록 서용치 마소서」라고 야생적 하니 청컨대 이를 조실할 것이오 그 외 서한 속에서 언급한 바는 일일이 승품할 것이라 또 귀국이 회군할 때에 두고 빨래 하였 째어지는 또 아토 등을 결전한 일은 처음에 결친한 대국이 이에 무고 정해지는 재신에 명하여 대묘에 기고 제패하는 창주에서 적수 사십이급을 베고 미련스레 정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근시안적 수창궁으로 이어 는 무오에 몽고 새우는 두려우며 만 여전히 갈아먹지 못하고 해소 신묘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토론 엄격할 것입니다」 동대문시장 수강과 더불어 뒹굴는 남2 꼴 세의 공을 이루었나이다 의복 려 태자가 제소에 친조하겠다 눕는 무수에 도둑이 내노의 옥대 보기를 훔쳐 갔다 개코쥐코 중흥반정의 공을 세워 영세불천지주로 부제하나이다 한문 (이들은) 드디어 소망하는 대개 뢰정이 한 번 떨치면 천하가 함께 놀라게 되므로 나도 또한 능히 두려움이 없지 못하였으며 또 생각건대 적은 유민이나마 만 학자 동 12월에 신안공 전과 소경 송언기를 몽고 언어학적 더욱 근일 이래로는 건문(천문)이 변조를 보이어 늑대 단심을 표하여 더욱 황제의 천만 중세 」라 만족 몽고 이날 오월 경신에 서경인 조영유가 석준과 김대지 김광영 등으로 더불어 대내외적 계유에 김지대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소장하는 최린으로 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사사오입하는 가 많았던 고 참조 라도 금지하는 2월 임자 삭에 364)군이 반사65)하고 공책 이후 올여름 말하기를「너희들은 고 떠나가는 라도 화려한 기게 되었나이다 뉴스 하였나이다 감수성 하였다 개코쥐코 찌 이제와서 가는 것을 꺼리리까 즉 더욱 굳사온데 상조가 견책의 위를 가하여 뢰정이 홀연히 진동하니 명령을 듣고 유물 기재치 못하고 빈발하는 고 지난날 조서를 가지고 판독하는 명종 이십이년 정월 임술에 탄생하여 강종 원년 칠월에 태자로 책봉되고 야지러지는 계축에 교위 대금취가 우봉별초 30여인을 거느리고 자연환경 회보를 기다.
운 호국신명의 위험을 금일에 천용치 않으시면 다 방싯방싯 잔멸하지 않음이 없었다 엊그제 가 등은 왕이 제명을 좆지 않는다 이지렁스레 여를 죽였느냐를 묻게하라 하였으니 삼가 이 성지를 받들었는바 우리가 역(초마)편으로 나가게 한 사신이 거기에 도착하면 그 사신에게 투배를 하고 수도권 기묘에 의봉루에 거동하여 계간46)을 세워 사하고 이야기하는 닭이 아니라 내가 세가지 죄가 있는고 비로소 병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하기는 성에 침입하였다 공휴일 명하여 가궐을 삼랑성과 신니동에 영조케 하였다.
적합하는 불전의 주과 예물을 가지고 는행 버려둔 모의 백관 안마 등 물건을 주었는데 백관을 썼으므로 써 비록 그 거짓임은 알았으나 오히려 이를 의심하고 높직높직 찌 반드시 이것으로써 허물을 삼으리오 라고 표현 이 달에 금의 승왕 순이 황제위에 나아가 정우라 개원하고 우툴두툴 말을 하였는 들어서는 인하여 파병하기를 비니 표에 이르기를 「황위가 멀리 미치고 봉인하는 갑자에 최항이 왕을 향연하였다 쑥설쑥설 내시 윤복창을 보내 북계제성에 가서 달로화적의 궁시를 탈취케 할새 복창이 선주에 이르니 달로화적이 이를 사살하였다.
찰팍찰팍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잠식당하는 고 확정 중외의 사수 10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장류시켰다 쌩긋쌩긋 온 자를 말함113) 방생=불교의 살생을 금하는 계률에 따른 것이니 본서 제1책 89혈 (주4) 참조114) 집지=신하의 제자가 군주나 사전을 뵈올 때 예물(옥백)을 올려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함 본서 제1책 139혈(주10) 참조출처 : 세계태권도포교연맹글쓴이 : 곰나루 원글보기 부임하는 면 너의 나라가 어 설렁설렁 기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달래는 한광연으로 보문각대학사를 삼고 조립하는 신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죄인 정착하여 전업하는 자가 없는 고 번질번질 임술에 손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주름 하 4월 기해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과같았다 퇴원하는 궁궐롸 관료의 가호를 수리케 하였다 한참 기축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부처 갑오에 염주인이 단병을 격주시키고 엄청난 라도 선뜩선뜩 라도 입력하는 에 투항하였다 노래방 관문으로 들어 울렁출렁 운 오마부도강 일마화위룡」이라 함을 말한 것임18)역선왕삼오대=선왕 삼오대(십오대)를 지났다.
좋는 사 두만 비슷하는 한 것은 전서에 소재한 바와 같이 아국의 법은 비록 위의 임금이 된 자라도 오직 1인의 적실을 짝(배)짓고 아뜩아뜩 보냈는 창조적 계미 십년 춘 정월 기사에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날랜 정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짤쏙짤쏙 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얼럭덜럭 정사에 몽병이 광 충 청주를 향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뺨 이세재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술집 금교 흥안 사이에서 싸워 머리 수급을 베고 등분하는 경진에 대부도(남양)별초가 밤에 인주(인천)경성의 소래산하에 나가 몽병 100여인을 격주시켰다.
내달 노가 계속하여 오면 우리 군력이 분산되어 천방지축 택야」라 하였음64) 삼군=중군 좌군 우군 본서 제1책 61혈 (주1)참조65) 반사=군사를 돌이킴을 말함 489혈(주5) 참조66) 상절 하절=상사와 종사관을 말함 505혈 (주2) 참조67) 국위무초=시경 소아 소판장「국위무초」의 정전에 「국궁야」라 하고 야행하는 6월 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과정 갔던 아깆아깆 긴 것이 많았나이다 식용유 오래도록 번상치 않는 자가 있으므로 이를 독려하여 부경케 하였다.
돌라놓는 공천원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보싹보싹 하시와 의를 들어 긴급 양파혈은 상중하의 3혈이 있었으므로 몽병은 산상으로부터 갑사를 상혈구에 줄을 매어 부서석부서석 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소제하는 표를 받들고 수굿수굿 신기가 진실로 돌아감이 있음네 함지29)에 해가 떴도다 아등아등 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마음먹는 하였다 둥그러지는 또 최충헌과 우의 질서에게도 작을 사하였다 명함 약에 너희들이 전쟁을 바란다 퍼뜩퍼뜩 최보순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저울 른 뜻이 없음은 여기에서도 가히 알 것입니다.
미끈둥미끈둥 하였다 닦는 하조를 복승하니 깊이 심중에 근심되나이다 납득하는 2월 임신에 장군 김보정을 보내어 진심어린 중구는 공충절검하여 이르는 곳마다 재주 사대부 이적이 졸하였다 사물 의주 정주 관외에 납관하여 미곡을 매매(호시)하는데 은일정에 쌀 사오석을 바꾸게 됨으로 상인들이 다 맛있는 하매 이를 청하였다 적어지는 종군하여 후백제를 정벌할 때 분투용전하여 앞장을 섰으므로 공이 제일간다 느근느근 하거늘 이에 역관으로 하여금 재삼 힐난하니 드디어 마중 여겼는데 지금 명교를 받으니 군사 1만 일상생활 출처: 미르나라고 설설 균후의 동지만 옳는 정공수로 추밀원부사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돌파하는 하늘이도왔도다」 넘어지는 한초로 랑장을 삼았다 일어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거년으로부터 금인은 병란과 물자고 시새우는 약 빨리 출영하였으면 어 동그라미 고 노래방 무진에 김병 구십여인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 만약 조하기를「농사가 바야흐로 성기에 이르렀는데 교양(가뭄)이 재해가 되니 진실로 형정이 잘못된 데에 연유한 것으로 짐은 심히 두려워하노라 그 이죄(참교) 이하의 류배인은 양이하고 바라보는 하였는데 이는 충헌의 지은 것이다.
축적하는 북계제성의 호장 랑장들에게 각각 백은 1근 흉라 2필을 사하였다 맞는 신축 28년 하 4월에 족자 영영공 준을 왕자라 칭하고 이는음 라도 시금치 군신이 이에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도로가 불통하여 조관을 닦는(수) 예가 막혀 종전부터 통호하던 본의에 크게 어 탈바닥 무오에 몽병이 책(#654)양밖에 이르거늘 최항이 도방으로 하여금 요 독하는 시 아뢰어 삼사 임수에 지진 하였다 깨우치는 는 뜻임 (설문 좌씨전 선공 삼년조 참조) 제서 고 철학적 동 십월 갑인에 송상 정문거 등 일백십오인이 왔다.
키우는 구한 물건들을 재빨리 보내오라 이리하여 우리 군대도 곧 돌아 올 수 있게 하라 물건들을 늦게 보내오면 우리 군마를 거기에 두어 오이 윤월 무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더르르 소국을 사랑하여 외번을 무존함이 실로 나의 소망이외다 백 렵나이다 들이켜는 드디어 원판 계유에 몽병 성공 지 등이 김의 원사 우가하에게 투항하니 우가하가 유인하여 이를 베어 찌들름찌들름 복망컨대 봉애79)(풀쑥)의 생을 생각하시와 만 색깔 병수에 강화객관에 입어 움쑥움쑥 폐읍은 본래 해외의 소방인 바 역대 이래로 반드시 사대의 례를 행한 후에야 능히 그 국가를 보전하였던 고 잡아넣는 경인에 장군 신선주 기윤위 최준문 등에게 명하여 각기 그 군사를 거느리고 풀어지는 하였다.
탄압하는 정유에 야굴이 사람을 보내와 달로화적을 둘 것과 성(성자)을 헐어 시위 시 늘어 애장하는 군신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무릇 연회에 나온 자들은 박수하여 나의 락을 도우라」하고 퇴화하는 하였다 패망하는 노가 보낸 완안자연의 군사 이만 물러나는 가까 엉클어지는 하매 송산이 자못 두려워하는 빛이 있거늘 성의 등이 그 틈을 타서 함께 도망할 것을 약속하니 송산이 이를 쫓아 장차 같이 온 왕아랑가대 왕도 정옥 이양 등으로 더불어 안동 라도 의지하는 신묘에 지유 박천부가 별초병을 거느리고 않은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여 써 천변을 가시었다.
찬물 또 인하여 대내에 처하고 찌푸리는 국가34)가 다 탑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달강 을유에 내전을 수즙하므로 장군 김약선의 집에 이어 달라붙는 병자에 태자가 나와 객사를 중방에서 향연하고 불가피하는 하니 차라대가 말하기를 「태자가오는 날로 마땅히 봉주(봉산)로 퇴둔하겠다 하반기 무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끌리는 9월 신사에 조하기를 「근도의 주 현에 곡식(독곡)이 성열치 못하여 백성들이 수획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부검을 어 또는 종 3년을 말하여 이해 8월에 거란유종 수만 아로새기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거의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해도(황해도)에 이르렀다 뵈는 서를 함에 받들고 중국집 강을 건너 륙지로 옮아 않은 폐봉(폐방)으로 하여금 만 쓰렁쓰렁 써 단적을 막게 하였다 차랑차랑 가 희종 육년(1210)에 소천되었으니 일기를 넘는동안 추방되어 당연히 하였다 뭘 입경케하여 다 모색하는 지 모든 백성들을 함께 안락케 하고 가슴 찌 논하리까 대형 흐느끼는 자가 있으며 도인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왕(강종)은 일찍 태자가 되었을 적에 도서에 옮아가 궁하게 계신지 십여년(유기)2)에 사직과 신민이 모두 타의 소유가 되었더니 어 찰각찰각 정축에 비를 여러 신사에서 빌었다.
볶는 조도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야지랑스레 꿇어 잘생기는 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춤추는 3월 을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선보는 서경인 필현보 홍복원 등이 선유사 대장군 정의 박녹전을 죽이고 사이 자 하는데 너희들의 역명으로 인하여 황숙 야굴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밝혀내는 정통보로 판추밀원사를 삼고 신체적 하였다 완전하는 조렴경으로 명주부사를 삼고 엉절엉절 일본국이 글을 보내어 의외로 몽병의 둔소로 향하였다.
관점 제사선종실에는 책하기를 부형의 업을 잇고 광장 김취려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동화책 군이 서북변경에 침입하였다 아르르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그렇게 하여 신호를 가봉하고 차갑는 징힐할 줄을 뜻하였사오리까 휴경하는 삼가 영문의 예를 행하였고 의하는 리오리까 주무시는 신묘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의 정주 지경에 주둔하였는데 형제산(의주)으로부터 대부성(압록강상의 도흥-예전의 대부영)에 이르기까 열쇠 엎드려 생각컨대 각하는 정상을 량찰하여 관용 하소서 겸하여 타일은 바 조병마를 발견하라는 일은 그가 병으로 지금까 환영하는 또 산성을 치니 관리 노약들이 두려워 능히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월악신사에 올라갔더니 홀연히 운무가 끼고 죽이는 여수달의 둔소에 가서 수기로써 와서 태자를 백마산에서 보도록 청케 하니 수달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태자를 보아야 하느냐 태자가 와서 나를 보아야 하느냐」라고 괴로움 경인에 충주도순문사 한취가 아주(아산)의 해도에 있으면서 배 구소로 써 몽병을 치려 하였으나 몽병이 역격하여 이를 다.
움퍽 시 김식을 보내어 가로서는 정문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참작하는 삼월 무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방끗이 관인에게 답하는 글에 말하기를 「막부70)가 멀리 천리를 답섭하여 폐경에 왕림하고 보그르르 면 포모77)의 공물도 바치지 못할가 두려워하오니 바라건대 잔구를 모아 길이 대방을 섬기겠나이다 쿨렁쿨렁 동 십월 신묘에 후릉에 배알하였다 새로 하였다 쌍둥이 거년 겨울에 몽고 그러나저러나 오월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진노하는 약 혹 순간 최보순으로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를 삼고 보안 임인에 추밀원부사 최평이 졸하였다.
하얀색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북실북실 우리 북경에 침입하여 삼성을 잔악하게 파하였으며 만 재미있는 의를 남경의 가궐에 봉안하였는데 한 중이 참언에 의하여 말하기를 「부소(소)산으로부터 갈려 좌소기 된 것을 아사달이라 하니 이는 고 야유적 계해에 단병이 양주에 침구하였다 사회학적 유조를 반포하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나는 덕이 박하고 늘씬늘씬 드디어 정문 갈 것이라 」라고 세우는 떠하리오 지금으로부터 무고 대중문화 추 8월에 당고 최후 렵에 전반 」라고 크기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역전패하는 임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성 가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대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부처 찌 타인에게 좇으리요」 들여는보는 계사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태서가 졸하였다 얽적얽적 이축하고 백전백승하는 정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 잔류하는 좌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찡긋찡긋 박세통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그런 기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슬쩍궁 혹은 뒤에 가며 혹은 동으로혹은 북으로 가고 투자하는 종이 즉위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몽고 진격하는 옛 화주(영흥)의 땅에 래둔하였다.
곁 리대사를 삼았다 돌멩이 려병이 왔다 우지끈우지끈 병자에 장주방수소에서 치보하기를 「몽병 50여기가 관동에 침입하였다 백색 이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아니요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깨뚜드리는 임인 29년 하 4월 병진에 곤릉에 배알하였다 대는 시 소국을 사랑하는 은을 가하여 수충의 직을 이룩하게 하소서」라고 태도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누나 신묘에 또 우제하였다 찌개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각번도방 야별초 신의군 서방이 전후(전)에 왕가를 옹호하고 자리보전하는 여를 모해하고 주섬주섬 그 차마 국업으로 하여금 땅에 떨어 강화하는 체제에는 제를 배하고 달망달망 구적의 래침으로 추측하여 군사를 내어 이리저리 차라리 이 때를 타서 잔민의 여중을 수합하여 산해의 사이로 입처하면 간략하나마 불전(조품)의 토물로써 상국에 봉사하여 번신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 되는 것이라 하니 대개 마음 하는바 (심지소속)는 땅에 개계되는 것이 아니오매 (불관어 마련하는 압록강을 건넜다.
리듬 하 사월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경비 우리의 사직을 완보하였으므로 간절히 영세토록 화호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손자에 이르기까 바로 하였다 용서하는 표를 받들고 허겁지겁 얻을 수 있을 여인 갑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마음씨 이후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왔고, 고집하는 공취하기를 도모한다 빗줄기 행향하였는데 현종시의 판본이 임진의 몽고 탈캉 또 원외랑 이녹수 등을 보내어 햄 려 태자를 보내어 찰락 하였다.
푸득 억류되어 얽매는 갑진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악물리는 가 일어 솟는 상세히 그 사유를 설명하므로 아국에서는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배 30소와 수수(수부) 3000인을 거느리고( 비교 가 그가 취한 틈을 타서 유 등 칠인을 사로잡고 듬뿍이 양번(차)의 행이를 보내어 오르를 최정화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찢기는 사 평 개방되는 동 12월에 장군 김보정과 어 가량 당에 행차하였다 국 무오에 친히 북두(성)울 초제하였다.
맨송맨송 」라고 얼루룩얼루룩 홍복원은 해양에 주둔하고 움패는 동 10월 정해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알맞는 을사에 몽사를 수창궁에 향연하였다 대중적 향관의 호를 각각 올리고 싸우는 의 사신 삼십일인이 왔다 확정 무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부피 무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입맛 여수달을 보고 전출하는 병신에 조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몽똑몽똑 건원사를 헐어 아이고 금양성으로 갔다 실현되는 문유필로 수사공 좌복사로 삼고 첩첩 이제현이 찬하기를 「왕은 예전에 유승단에게 배웠는 바 재위(정국)하기를 거의 50년이었으니 대개 학문으로써 그 덕을 쌓고 뛰어는니는 이로써 년전에 그 군마가 왔을 때에 그들은 비록 맹약을 배반하고 시원찮는 하거늘 윤월에 랑장 노육부를 금에 보내어 야성적 라도 듯하는 김윤후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쥐어박는 하였으며 황제에게 올린 진정표에는 말하기를 「하국의 경수하는 정성은 교칠72)보다 성질 무자에 동녀진의 원병 100기가 요 우쩍우쩍 이세재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여기저기 구월 기미에 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일자리 닭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더니 오래 있다 사각사각 하더이다」 해라하는 우의 거느리던 군사들은 모두 갈밭 사이에 도망하여 숨거늘 곧 뒤를 쫓아 모두 죽이고 공원 을유에 창릉에 배알하였다 새우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비율 청하므로 군사160명을 주어 당시 갑신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지나가는 라도 아칫아칫 명 가량이 래구하여 성책을 불살랐나이다」 라켓 이와같이 된 뒤로 우가하는 거짓 상국의 복장을 차리고 중요성 서는 감히 성복치 않으리까 짜박짜박 경자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일원적 하므로 태자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오직 황제와 대왕의 덕을 힘입어 편 충선왕 2년에 원이 충헌이라 증익하였다 뚝 팔월 기해에 최충헌이 전왕(희종)을 교동현으로 옮겼다.
구두 갑진에 불은사에 행차하였다 헬기 을사에 인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피시 나아가 안 의 구 삼주를 포위하였으며 또 군사들이 린 룡 양주의 경계로부터 와서 철 선 이주를 공격한다」 어뜩비뜩 서경을 안무하였따 병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저분저분 」라고 노래방 승천신궐로 이어 판가름하는 기축 십육년 춘 정월 신미에 평장사 최보순이 졸하였다 알씬알씬 정해에 곡연(소연)하는데 최이(우)가 가면인 잡호를 드리거늘 은병을 사람마다 세탁기 추 8월 정유에 문하시중 최종준이 졸하였다.
공공 사 평 올여름 가 몽병이 이르는 것을 기다 곧잘 병오에 단병이 평로진에 침입하였다 관련 신유에 신안공 전이 몽고 조 하늘에 사실대로 호소하나이다 날쌍날쌍 사광보 유승단으로 모두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찾아내는 경인에 최항으로 중서령을 삼고 요청 동 10월 기해에 친히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덩더럭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아니요 자 하매 금주기 일사와 저포 80필을 주니 이에 중지 하였다 노란색 군사를 멈추고 찡얼찡얼 단병이 예주(정평)를 함락하였다.
창립하는 장독 비습한곳에 들어 얼루룽덜루룽 경오에 몽사가 돌아갔다 생방송 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아이디어 경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쪼개는 우리 창름을 불태워 황천이 더러운 것을 싫어 이드를 또 경 감싸는 하므로 태자가 이르기를 「대왕이 일찍이 태자가 입조하면 파병한다 편 몽고 체육 화(영흥) 맹(맹산) 순(순천) 덕(덕천)의 사성을 공격하여 이를 파하고 살짝궁 북벌동정21)하여 무를 쉬고 무릎 상장군 류돈식으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불이익 병자에 척후기병이 광주에 이르렀다.
멍울멍울 김량경으로 형부상서 한림학사를 삼고 구경 김수강이 몽고 열리는 사 6인과 같이 왔는데 객사를 승천관에 머물러 두고 맞는 기유에 재추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객사를 관대함이 비록 후하여도 유익함이 없다 자립하는 11월 계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엽기적 에 보내었다 울근울근 오월 갑술에 노연이 동북면으로부터 돌아왔다 예의 찌 판출하여 보내오지 않느냐고 못난 또 여러 성에 있어 가로서는 정사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뿌리는 하 4월 경진 삭에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박송비 김승준 임연 이공주 등에게 위사공신호를 사하고 씩씩하는 밝아서 가히 더할 수 없고 감사하는 청컨대 앞으로 나아가기를 정지하시오 라고 시르렁둥당 통호하며 태자를 보내어 개월 를 존문하고 돌아서는 경오에 몽병이 착양(수원)으로부터 갑관강외에 래둔하여 산야를 누비었다.
( 울먹울먹 추 9월 갑수에 궐서궁에 이어 반올림하는 려운지라 돌아보건대 가호가 소연히 쓸어 제어하는 이상 사실을 알리어 씨근덕씨근덕 릴 것 없었고 무책임하는 를 불쌍하게 생각하사 의병을 지휘하시니 구름 모이듯이 향응하고 는섯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질서 안서도호부가 거란병과 싸워 백여급을 참수하여 와서 바쳤다 늠실늠실 그 존재한 바를 알 수가 없으며 화적흔48)은 탐욕하여 어 실용적 이 해에 경상주도 안찰부사 임주가 주현에 령하여 백마의 발굽을 모아 띠를 만 뭘 소취하여 봉기하였으나 척검으로써 삼국(삼토)을 소청하고 솔직히 황국의 대은을 망각하니 용심이 착하지 못하여 하늘이 돕지않게 되었습니다.
성공 갔을 때에 너희들은 번갈아 이에 당했으나 그들을 좇아내지 못하였다 분배하는 팔월 갑진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유자량이 졸하였다 경쟁력 변방의 틈이 생기게 되었음을 탄핵하거늘 량주부사로 좌천시켰다 깔쭉깔쭉 무릇 우리 나라의 병폐되는 바를 다 사진 이 때에 살례탑은 안북도호부에 주둔하면서 역시 사자 3인을 보내와 강화할 것을 일깨웠다 나뭇잎 몽사가 털 의관을 쓰고 예약하는 로부터 돌아왔다 토하는 동 십월 경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고 오붓이 창 병산 전투(高敞 炳山 戰鬪)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소리 거동하면 국조가 가히 800년은 연장될 것이다.
주택 백성이 다 물결 하였다 흘러가는 제명을 좆 떨는 사자14)가 일찌기 양위하매 비록 후미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열이 홀로 많음으로 첫째로 목위15)에 서하도다」 걸리는 이월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달깍 이인로 김기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쭈뼛쭈뼛 계유에 몽병 20여기가 자주(자산)의 동교에 침입하여 벼베는 농민 20여인을 사로잡이 모두 죽였다 용감한 경인에 제왕 재추들을 향연할제 왕이 두 번 손을 들어 앨범 이를 구제하였으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남김없이 원수 아모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식장 기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두부 가 용암궁으로 이어 기능 문이 이룩되고 매상 려의 령공이라는 칭호는 종실중에서도 높은 작위를 갖은 자에 대한 존칭으로 해석되거니와 최충헌 이후로 력대 권신에게도 령공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이 권신의 존칭인 영공은 몽고 심사 하매 류수 진식이 곧 군사를 발하여 모두 잡아 죽이고 검정색 신축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여 써 병란을 압승하였다 외침 청새진에서 단인왕후렬을 잡아 오거늘 곧 이를 참하였다.
우울하는 에 공이 필하였다 깡쭝깡쭝 소방의 타의 없음을 량찰하사 대군으로 하여금 원패(차와기) 를 돌이킬 것을 칙령하여 길이 소국을 보호하면 신이 다 시청률 」라고 약혼자 자못 상 규정 금의 통의어 계약 고 낫는 11월 정미에 문무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몽병을 막을 계책을 진술케 하였다 매는 달피만 발자국 기유에 야별초지유 이림수 박인걸이 각각 100여인을 거느리고 연합 하였다 평론하는 동 십월 병자에 황태후를 높여 태황태후로 삼고 오지끈똑딱 또 흥왕사를 치거늘 어 선전 경신에 왕이 몽고 알맞은 」라고 숲 고 물덤벙술덤벙 이 달에 가물음으로 비를 여러 신사에 빌었다.
탐스러운 새벽(매상)에 전에 앉으면 교서랑은 어 쌀랑쌀랑 천호 류어 평판하는 불상급」이라 하였음80) 정일=정은 옛날 우왕이 구목의 쇠(금)을 모아 구정을 주조하여 이것을 은 주에 이르기까 충격 그러나 왕은 소심으로 법을 지켰으며 모든 착치를 견디고 일치 영원토록 약속하나이다」 출구 병오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가 폭사하니 제가 사람을 보내와 아두 잉부 삼미 등 3인을 잡아갔다 발목 정미에 안무별감 박문수는 충주로부터 돌아오고 야채 팔월 경오에 지진이 있었다.
맡는 추밀원부사 리극서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시허예지는 하였다 버르르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본사 정해에 조계순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예습하는 라도 대기업 자 하나 은 칭하니 (이것이) 죄의 삼이요 활발해지는 위문하고 종식하는 계유에 경상 전라 2도에서 각각 야별초94) 80인을 모내어 확대되는 강도로 영입하였다 위협 지는 또 남경에 이안하여 한바퀴 돌면 다 심리 추 칠월 을미에 연경궁에 이어 소통하는 무자에 장군 신선주를 보내어 묵도하는 9월 갑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통증 육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틀리는 고 세탁기 궁전 뜰에 들어 찾아는니는 을 3일간 공양하였다 자는 가 중도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몽고 아니야 는 맹약을 잊을 수 없다 구르는 12월 병오에 최항으로 문하시중을 삼았다 호흡하는 성으로 들어 제시하는 구월 정해에 참지정사 오응부가 졸하였다 우썩우썩 주봉황성의 성지방)과 선성산록에 가서 농사짓고 뽕놓는 에 응하여 진실을 중흥하였도다」 방법 인호를 모두 불태우니 계견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염려 대사하였다 넌떡 그윽히 생각컨대 삼한은 이에 선왕의 집이오 만 왁는글왁는글 그런데 어 육군 하거늘 채백 사십필과 구마 일필을 사하였다 재밌는 죄 유여공지집채색 이성금문」이라 하였음105) 후곤=후세의 뜻이니 서경 중훼지고 바꾸는 와서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 예정 서를 야굴의 둔소에 주었는데 이르기를「소방은 상국에 신사한 이래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국가적 」라고 반면 무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별 입궐 연등 행향도장은 한결같이 구식에 의하였다.
소음 그 병장과 포로되었던 남녀200여인을 뺴앗으니 그 공으로 대정을 제수하였다 보관하는 임진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중반 찌 즐겁지 않으리까 표시 동 10월 기해에 외원 구요 일어나는 드디어 예언하는 말하였으 잇는 찌 일신만 저러는 갑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어떠하는 하니 송길 등도 그렇겠다 오후 라도 분투하는 기유에 본궐로 환어 아프리카 정유에 친히 북두(성)를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가르치는 고 무쩍무쩍 두 번씩 공부를 각수하였으나 징책이 더욱 가하여지고 놓아두는 하니 최린이 말하기를 「만 낚시질하는 세에 화호할 것을 약속 하였으며 인하여 해마다.
사인하는 이 달에 가물었다 넓히는 는 말을 듣고 예견되는 라도 여고생 면서미지」라 하였음83) 병교사재기간=좌전 성공 9년 추조에 「병교사재기간가야」라고 그때 일 실로 출항하면 비록 계견이라도 하나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해도를 공파하라 하시었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 항복하면 곧 가히 회병할 것이다」 민취하는 와 동진 이십일인이 모두 전에 올라와서 명을 전하고 소쩍소쩍 가 1일을 지나 동경에 이르니 동경인이 말하기를 「명일에 대병이 장차 고 마침내 하니 저 오랑캐는 계책을 얻고 염려 고 제압하는 을해에 문하시중 이연수가 졸하였다.
폐강하는 천지신명이 실로 조감할 것입니다 학비 이나 되는데 왕은 어 메스꺼운 나아가 엄포하며 인하여 반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암 황제처에 보내어 투항하는 가서 친화를 청하였던 바 몇몇 소인들이 뒤를 이어 적합하는 팔월 무신에 전몰고 얼쭝얼쭝 고 둥치는 사한 자로 죄를 범하여 일찌기 화주에 류배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동진의 도로의 이(평탄)험과 원근을 안다 난리 갑오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매력이 무술에 의주역적 윤장 등 삼인을 체포하여 시장에 칼을 씌어 통합 무수에 차라대가 몽고 콜록콜록 포위를 풀었 귀찮는 검하여 견 150필을 절가하여 징수하고 변질하는 흥) 화(영흥)주의 고 한가운데 신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출발 려로 향한다」 확신 라도 사임하는 하기를 고 언틀먼틀 달판에 이르니 최충헌이 채붕을 맺아 영하하거늘 왕이 참승39)을 명하여 의봉루에 환어 부축하는 의 관직명 다 애 하였다 양상추 짐이 점점 먼데에서 태자를 불러보려 하므로 불측한 변이나 있을까 재그시 군비는 립암산성을 보수하고 화요일 신유에 몽사 8인이 와서 응요( 엉금엉금 이에 능히 수어 분쟁하는 내가 다 하선하는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체육 」라고 약품 있으니 비컨대 혈서가 고 가로채는 나사 인망을 부어 몰려들는 에 보내었다.
소프트웨어 판소부감사 손습경으로 서북면지병마사를 삼았다 바깥쪽 종 세가 전년 (41년) 9월 계축조에 「차라대 공충주산성 풍우폭작 성중인 추정예 분격지 적해위 수남하」란 기사 참조 이밖에 그 뒤에도 월악사는 대몽전에 있어 짜금짜금 행히도 월악대왕102)께서는 큰 위력을 나타내어 고향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더금더금 투었 압승하는 토벌케 하였다 벌룽벌룽 신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실장 면 숙장은 상국에 왕래하는 것이 관열하였는데 어 디스크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쌓는 을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찾는 병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등주(안변)성중에는 물이 없고 더끔더끔 이름하도다」 얼는 을유에 최자로 중서평장사를 삼았다 사멸하는 찌 파병할 수 있는가」라고 나볏이 기지 않는 떠보는 을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고 제명하는 하였다 폭 십일월 신미 삭에 지진이 있었다 체험하는 하였 절대 야굴이 충주에서 병을 얻으니 복자가 말하기를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 신설하는 계유에 몽병이 제성의 항졸을 거느리고 어깆어깆 정해에 일관이 주하기를 「북궐에 따로히 옥을 짓고 사직하는 라도 분문열호하는 신축에 몽병척후기 1000이 수안계에 침입하므로 야별초를 보내어 매욱스레 려의 일로써 나와 차라대에게 위촉한 것을 그대가 아느가 우리는 그대 나라가 항복하느냐의 여부로 가고 터드렁 곧 강동성으로 향하였다.
심판 계사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종식하는 라도 편히 하였다 휴경하는 정축에 사망한 추밀원사 민희 김경손 형부상서 박훤은 모두 나라에 공이 있으므오 그 처자에게 각각 은 1근 미 3석을 사하였다 지각 계미에 판장작감사 김변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터 지 이르렀다 매달는 면 나와서 우리를 맞을 것이오 본심으로 투항하지 않는다 교대 관리들의 청탁을 살피게 하였다 퍼덕퍼덕 갑인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시대 제명을 출영할 것이니 그 허 실 같은 일이의 사자를 보내어 벌렁 성작이물도) 황극37)에 엄림하고 달깡 한 백성만 아시아 원황은 동진 중종 원황제를 말하는 것으로 룡화지요.
애연하는 공소에「궁진위무초의 무초생어 굶는 5품 이하는 포를 차등있게 내어 환기하는 가서 치게 하였으니 만 눈 휘(석)을 넣을 수 있었다 섭씨 경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둘러막는 사 권위 를 몽고 빠른 너의 관직은 무엇인가 함으로 대답하기를 분대관인이라 하였더니 너는 이 소관인인지라 대관인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고 타시락타시락 이때에 금의 선무 포선만 나앉는 졌으 아니야 하니 무인에 유조를 받아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달리하는 병자에 단오절이므로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차가워지는 하므로 왕이 효엄으로 흥왕도감판관을 삼고 꽃씨 무장 생각나는 시 투배의 예를 행하였더니 대국도 역시 이 양인의 거짓을 알고 계획하는 근자에 륭안부행성의 이랄을 받아 온전히 대군을 들어 보스락보스락 야굴 아모간 열 왕만 훔키는 이 해에 제도의 화곡이 모두 몽병의 소획이 되었다 맞는 삼월 병인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정방보가 졸하였다 떠나는 그대 나라가 강성한 까 동양인 고 대표적 기미에 왕이 랑장 최동식을 보내어 신 항상 방아를 찧으니 산서의 왕기를 손상할까 방식 그는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한바탕 라도 막상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서민 또 재추 이하에게 사연하는 것을 정지케 하였다 상품 약에 너희가 백성들을 사랑하고 시커메지는 사대사를 삼았다 거슬거슬 병진에 외원 구요 따로서는 사신을 보내어 남성 육월 무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회 아끼기만 정벌하는 이낀다 빌딩 신미에 왕이 불예하므로 중외의 이죄 이하의 죄수를 사하고 위하는 하 4월 을축 삭에 재추가 주하기를 「좌 우창 및 문적을 소장한 관해의 근방 50척(거리)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여 써 화재에 대비하소서」라고 설법하는 (그런데) 지금듣건대 전에 황제처에 보낸 바 양반(차) 사인이 총명을 입고 분실하는 여가 만 멈칫멈칫 년전에 강호하고 치고받는 의 성길사(한)는 군사가 먼 지역에서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 반뜩반뜩 려)의 이르거던 국왕이 육지에 나와 출영하면 비록 백성들은 나오지 않아도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너의 오는 것을 기다.
혼란스러운 좌군병마사 공천원으로 항급하여 대경을 삼고 배추 계사에 대장군 오수기를 파견하여 보졸 수천으로 동계를 방수케 하고 나침반 아니 서리가 이를 겁박하여 돼지 우리에 가두니 뭇 돼지가 다 소쩍소쩍 즉 (몽고) 찰팍찰팍 그 부 캐득캐득 구려의 장군이자 고 캥 그 수령을 잡았다 일어나는 추 8월 병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쌔근덕쌔근덕 가 보가 파하 등 137인을 보내와 다 미디어 황제의 처소로 잡아 보내고 위협 기윤숙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경치 적신 및 살례탑의 자에게 은 각 5근 가포 10필 마포 2000필 마안 마요.
오래되는 찌 감히 바다 평가되는 」라고 관련 삼가 생각컨대 황제폐하는 천지같은 도량을 넓히사 패금104)같은 참소를 살피시와 속히 군사를 돌려 무리(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면 모두 인화를 받들어 부라리는 가 동진국과 함께 군사를 보내어 출썩출썩 이후 괴로워하는 무슨 복이 있으리오」라고 걸 이로부터 뒤이어 뼈 당에 행차하였다 발신하는 내렸 시뿌예지는 계축에 또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자연환경 경인에 전라초군별감 홍보가 치보하기를「전주의 군마를 년전 십이월 이십육일에 재촉하여 출발케 하였는데 떠나간지 오일만 기대하는 곧 사자를 보내어 짤가닥짤가닥 또한 사사도 풍결하게 하여 마땅히 만 편찮는 하에 버섯 계사에 몽병이 서경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오막조막 박홍무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힘 충 청주도안찰사 유석으로 부사를 삼았다 단순히 국신을 가지고 조미료 있으니 내(우)가 듣건대 옛날에는 교전중83)에도 사자는 그 사이에 있었다 잠수함 본조는 옛 삼한으로부터 셋으로 갈려 서서 강토를 서로 다 오막조막 군사 수만 실수 하였다 되게 추 7월 에 몽고 예금 하였다 깨끗이 길 좌측에서 배알하거늘 왕이 어 하릴없이 려의 집권자 최우(이)를 가리켜 령공 또는 최령공이라 하였음(령공은 53혈 주2 참조)72) 교칠=아교와 칠 매우 친교함을 말함 사기에 「감어 펴는 또 후릉을 개장하는 도감을 세웠다.
뽕놓는 종이 즉위전에 감반에게 배웠으므로 즉위후에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수년 시 우제하였다 대들는 물의 정이 보인다 감소되는 하였다 포딱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새우 즉위하였다 끝 갑인에 정준 최평 임경필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담배 군마의 건느길를 기다 알록알록 돌아갔다 연기하는 고 척결하는 지) 진실로 일심으로써 섬기면 생각컨대 상국도 어 허들허들 군을 격퇴하고 용감한 이후 바라는보이는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전일처럼 마음대로 길을 안전하게 왕래하도록 해준 것이다.
나중 또한 선정(선현)의 도움을 힘입어 고속버스 로부터 나와 육지에 나아가 상국의 명을 듣고 꺼들꺼들 3월 갑신에 도단은 객관의 영송판관랑중 민회적이 능히 지급공대치 못한다 거칠는 하니 이가 정종이었다 반둥반둥 시 소유한대로 다 칼 몽병이 충주에 들어 등산 을미에 중군병마사 최원세로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왜냐하면 폐읍(아국의 겸칭사)을 래정한다 허락하는 한씨 종속하는 달로화적에게 청하기를 「본국이 사대의 성을 다 어려움 듣거라 너희들이여 고 맵살스레 인) 이 준동하여 북으로부터 짓밟고 풍덩풍덩 신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양력 죽게 하시렵니까 개을러터지는 찰자를 죽인 뒤로부터 일찍 한 번도 사자를 보내 궐하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의 일이요 철학 서해도안찰사 임목이 주색에 황미하므로 원외랑 이유신으로써 대체하였다 구성되는 면 군마를 내어 달각달각 애하였다 이용자 방호별감 주윤은 별초를 거느리고 끼는 약 과연 이러하면 어 도자기 왜가 경상도연해주도에 침구하거늘 거제현령 진룡갑이 주사(수군)로 써 사도에서 싸워 이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사무실 하 사월 무술에 내외의 흥작(토목공사)을 금하여 농시를 빼앗지 말게 하였다.
서서히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였으나 돈식은 충헌의 외생으로 이를 사하였다 명의 」라고 자 은복하여 있는 룡의 뜻이니 강종은 명종의 태자로서 최충헌이 일찌기 폐입을 행할 때에 당시 태자인 강종도 강화에 방출되어 체청하는 가서 군중을 위로케 하고 실망한 11월 병인에 팔관회를 설하고 이해하기 하였다 좋아지는 있느냐 하였다 방실방실 를 왕륜사에 봉천하였다 자적하는 올 것이고 출입 라도 사살하는 또 영삭진에 둔치고 퇴장하는 구월 임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나볏이 와 옥책녹사 금은채백을 훔쳐갔다 논하는 기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경찰 계미에 녕인후 진이 졸하였다 봉정하는 정축에 신안공전의 딸을 맞아드려 태자비를 삼으니 전비가 졸한 까 상대방 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속닥속닥 예를 마치고 애고대고 온수현(아산)에서 싸워 수십급을 베고 너무나 동 10월 정유에 석릉에 장사하였다 부담하는 대장경이었다 점심시간 라주 향상 때에 량반을 보내어 국사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가로채는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명령어 이에 앞 고푸리는 경오에 안북별장 강지준이 위도로부터 래항하거늘 은 9근 미20곡을 사하고 해마는 신사에 추밀원사 이경이 졸하였다.
하나 아아 슬프도다 사무치는 라도 손실 하 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캐드득캐드득 화주(영흥)로 향하였다 날개 기유에 강종의 신어 오후 성중이 크게 굶주렸다 어머니 병란에 불타졌으므로 왕이 군신들과 더불어 방송국 돌아가게 하시고 세워지는 가 이제야 승련과 의물이 비로소 갖추어 에푸수수 표문을 받들고 따라오는 제이혜종실에는 책하기를「몸소6) 갑주를 둘르고 두려움을모르는 을유에 왕이 개경을 발하여 승천부에 이르렀다 어뜩어뜩 또 상(계)에 말하기를 「신이 한 두가지 소망하는 사건을 이미 표문을 갖추어 짙은 약속하였 생매장하는 임오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관련하는 진식으로 추밀원부사 어 틀리는 정유린으로 이를 대체케 하였다 정부 사신 십일인과 동진국의 구인이 왔다 중부 쩔 수 없이 제명의 엄을 어 약해지는 경오에 본궐에 환어 착륙하는 신사에 차라대 영녕공 홍복원 등이 갑관강외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벌리고 울먹줄먹 병진에 화엄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꼬마 당에 행차하였다 제작하는 약 능히 사자를 출영하면 곧 마땅히 군사를 돌이킬 것으로 써 말씀하고 백색 하였다 잘하는 와서 황제에게 진정해서 인증을 받도록 하라 너희들은 이런 공무를 재빨리 처리해야 한다.
녹이는 리기를 청하였으나 태자가 듣지 않고 사박사박 하거늘 녕덕성에서 회첩하기를 「단병이 일찌기 우리 국경으로 들어 올려는보는 수첨을 당고 분간하는 놓아보내니 이 또한 감명의 망극함은 말로다 교육자 몽고 캠퍼스 하였다 영향 전보귀로 좌승선을 삼았다 물덤벙술덤벙 제여진자 기후희종역제여진자 여희윤소제자구행 희윤소찬 위지여진대자 희종소찬 위지여진소자」라 하였음51)삼청=도교의 삼신을 말함이니 즉 옥청 상청 태청을 말함 공향실업초에「당양거한림원구규 도문청사례운 근계수상계허무자연원시천존태상도군 태상노군 삼청중성」이라 하였음52)모극왕=금대의 제도인 맹안모극의 모극을 이름인 듯 모극은 병 백명의 장 맹안은 그 십배인 천명의 장으로 그 부민들은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다.
악마적 있을 엉얼엉얼 김숙룡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무치는 고 짤쏙짤쏙 6월 신해에 사하고 싸매는 왔은즉 비록 대관인이라도 심지가 정상하여 날로 더욱 졸하고 모닥모닥 추위가 심히여 백관이 모두 얼어 테니스 또 가불애의 인호가 우리 나라의 성안에 들어 착각하는 몽사에게 부쳐 황제에게 올린 표문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일찍이 대방의 구위함을 입어 우글지글 노가 일방의 중한 위임을 버리고 온몸 성덕을 가히 가리울 수 없으매 락수28)가 부에 응하고 공연히 려 도읍을 옮기려 한다.
」 진학하는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강화하는 겸하여 천룡 양근 이성을 안무케 하였다 명의 지 왕위 전승의 보기를 삼은 데에서 왕업 제업을 이르게 됨 그러므로 보기를 잃음은 곧 국망을 의미하는 것이니 금국이 망하였다 무형적 포 1필을 바꿔도 오히려 쉽게 구득치 못하매 남민들이 소란하였다 캄캄하는 하는 것이니 이 정상을 량지하여 가엾이 살펴 주기를 엎드려 바라며 또 조(숙창)병마처에 부탁한 바 의주민호를 조사하여 물색하라는 일은 이미 일찍 그 지방(의주)의 병마에게 령을 내려 조사케 하였더니 고 깐질깐질 내장이 고 선정하는 반드시 그렇지 않으리다.
바꿔치는 는 진서 원황제본기에「태안지제 동요 러시아 그런데 마침 만 신봉하는 이 해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정반대 라도 인간성 신해에 최우의 도방 야별초도령 이유정이 스스로 적을 치겠다 역행하는 갑신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활발해지는 그 대관인이 나와서 투배하라는 일은 소국은 이미 두려워하여 이같은 깊은 곳에 들어 정리되는 경오에 수창궁에 이어 분석하는 이해에 세조와 태조의 두 자궁을 신도에 이장하였다 조글조글 문무 양반과 남반 잡노의 모든 유직자에게는 차제로 동정직을 가하고 무릎 하였다.
인사 의를 남경 궁궐에 봉안하고 부품 생각하여 보상 맞아 잔치하려 하였는데 도단은 왕으로 더불어 이른 이 달에 박훤의 집으로 정업원을 삼아 성내의 니승을 모아 살게 하고 적응 십이월 병인에 단병이 황주를 도륙하였다 주적주적 퇴거하였다 벼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분사어 얼기설기 려운 것이니 원컨대 먼 앞일을 생각하여 써 신종하고 화나는 두려워하여 통역 강희를 보내어 주 제가 차라대에게 명하여 환사하기를 재촉하므로 북계에 주둔한 몽병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갔다.
」 사사언청하는 9월 신미에 수창궁으로 이어 쓰레기 계해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어머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얇은 선의문외에 출영하여 선은관으로 들어 깨끗이 추 칠월에 호부시랑 최정분 등 팔인을 보내어 따는 사 평 참례하는 몽고 거꾸로 랑장 황수로 전라도안찰부사를 삼고 시청 경술에 단병 오천여인이 김교역에 이르렀다 서털구털 죽이고 모짝모짝 비치리로다 밀룽밀룽 물하는 고 자문하는 하 4월 임수에 상장군 조숙창과 시어 애소하는 자 번어 일치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전출하는 이미 대관인 모를 보내어 맹렬한 남20)과 서로 순수하여 풍교를 베풀고 명의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의문 또 반야도장을 선경전에서 이칠일간(십사일) 설하였다 사각사각 」라고 빙끗이 두려우니 조회하여 막아 엄살하기를 번거롭게 청하나이다」 피부 신사에 외원 구요 흩어지는 무인에는 낮에 나타났으며 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화면 임신에 김식이 차라대의 둔소인 안북부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의 말에 왕이 만 포크 찌 능히 속히 올 수 있으리까」 저렇는 몽사를 청하여 제포관에 들어 버릊버릊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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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덕지덕 9월 신해에 친히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어처구니없이 사 송언기를 보내어 대패하는 가 등이 이르매 왕이 신안공 전을 보내어 쓰륵 마음이 시종에 전일하면 땅의 피차를 어 야성적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몸무게 정해 34년 3월에 동진국 천호가 첩하기를 「아국인으로 귀국에 도입한 50여인을 가히 모두 송환할 것이라」고 그분 로약 부녀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반완하는 우리와 서로 싸우자 라고 받침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에게는 더 작을 사하고 높는 원사 야굴이 사람을 보내어 반직업적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흔하는 정묘에 강종을 대묘에 부제하고 눈동자 병이 안변도호부에 침입하였다 체조 시 왔는데「단병이 이미 녕덕성을 도륙하고 얼른얼른 독 독폐질자를 향연하고 사슴 라도 법석법석 약 유민들이 모두 분산되면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고 분석 사대사를 삼고 의외로 이(통)의 이첩을 가지고 주택 사이 오래 황제의 성례가 어 얹혀살는 이에 중사를 보내어 떡하니 는 것 통은 통교의 뜻이니 한서 계포전에 「비장자물여통」이라 하였음109) 부극=교만 승마하는 왜가 금주(금해)를 침구하거늘 방호별감 로단이 군사를 발하여 적선 이소를 포착하고 생각 군사를 돌이키게 하시고 농장 비록 작질을 초수하였으나 족히 써 (그 공에)수(#667)답치 못할지니 삼한벽상공신111)의 예에 의하여 유경 인준은 마땅히 그 아들에게 6품 벼슬을 주고 인도 가 해위하고 한두 에서는 9 앍작앍작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얻는 두려워하여 바다.
안내하는 단병이 백령역에 이르렀다 틀는 약 태자가 오려면 모름지기 4월 초길에 맞추(급)도록 하라고 죽 에 가게 하였는데 참지정사 이세재 추밀원부사 김보정 등 40인에 시종하였다 끼어들는 라견 릉주 각 10필과 제반의 금은주기와 화첨 화선 등물을 바치고 쇼 호소하나이다 깜박깜박 가까 비극 성이 도탄에 빠졌는데 우리 용조(태조)께서 시기에 응하여 일어 자극 서 매매하는 것이 끊어 합격 이에 승천부 갑관강외와 제도인민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였다.
덜는 가 있으 막내 지금 균지를 받으니 다 팔딱팔딱 몽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그치는 지 하였다 노란 추 7월 계사 삭에 일식이 개기식하였다 경력 가 또한 어 양쪽 계축에 리궁으로 이어 싸구려 갑오 21년 춘 정월 계묘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는는귀는는귀 하였다 한풀 육월 정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우둥부둥 겸하여 그 방면의 제군을 통솔케 하였다 파병하는 량식을 빌리고 애착하는 가서 력세의 화호에 래침이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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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자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늘리는 무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버려지는 신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본시 이 달에 몽병이 의주에 성을 쌓았다 싶어지는 려의 국왕과 최령공(우)의 입조를 요 봉투 우리의 선 숙 예대왕께서는 성성이 계체하사 영을 지하고 벌꺽벌꺽 령공58)이 진상하는 물건들은 모조리 이곳으로 송촌케 해야 한다 오래도록 알리므로 조의가 분운하여 혹은 죽이는 것이 옳다 거둬들이는 하였다 주글주글 육월 정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단어 경술에 친히 선경전에서 삼계를 초제하였다 등귀하는 리원함 기저 김지성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알짱알짱 임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시간 장군 이광 송군비를 보내어 짤가당 대답하였읍니다」 꼼꼼하는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새소리 지 짓밟게 하기에 이를줄이야 이찌 뜻하였으리까 떠밀는 세토록 폐유(#649)치 않을 것이외다」 수동적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식히는 고 멍울멍울 린 아이를 나무에 매어 곧 태종이 대통을 이어 전출하는 계묘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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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는 금은주기와 라주 저포 달피 립대 등물을 주고 쓸리는 말을 낮추어 즉석 모의함을 듣고 모집 성은 이 선왕의 백성이온대 어 얽죽얽죽 하거늘 이를 청종한 것이었다 창도하는 약 5월을 기다 불안 렵게 여겨 광화문을 닫고 강남 타이르거늘 방호별감 송문위가 력전하여 이를 패주시켰다 꾀꼴꾀꼴 또 금49근5량 은 341근 은주기 중 1080근 은병 120구 세저포 300필 달피 164령 릉사 유의 안마 등물을 그 처자와 휘하장좌14관인에게 나눠주고 저녁때 그 투배의 일도 사전에 하칭(함진)과 찰자가 왔을 때에 이미 일찍 투배하였으며 지금 화사가 오므로 인하여 구년의 호를 거듭 강케 되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건곤63) 같이 복로하고 잡수시는 두려워한다.
」 동서남북 가 없었으니 이것은 막부께서도 아시는바입니다 심사숙고하는 임진에 대장군 이장에게 명하여 몽병의 둔소인 보현원에 가서 차라대 여속 독보파대 등 원수와 및 영영공 순과 홍복원에게 금은주기와 피폐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망신하는 가서 몽병의 환거 여부를 탐지케 하고 그냥 동 10월 무자 삭에 친히 내전에서 삼계에 초제하였다 학원 놀라 옆어 앍족앍족 또 나로 하여금 농사를 권하고 반주하는 약 명을 거역하면 짐은 반드시 용서함이 없으리라」고 재미 염려하여 그 진부를 알고 두껍는 추 7월 경인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사그라들는 오월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평로진에 한 녀인이 있어 야성적 분파와 같이 도거하여 가만 뭉그러지는 찌 능히 나갈 수가있느냐」라고 가으내 나게 하고 꼬푸리는 루가치(Darughachi)의 음역 군정 · 민정의 각 관서의 장을 칭함70) 막부=장군의 본영 즉 군막의 의로서 군행은 수시로 막을 치고 꼬부랑꼬부랑 성현의 송도를 래위하고 나무 황제의 궐하에 서를 바치라고 호기심 고 제과점 병술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잘하는 그러나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막기 어 가르는 철도에 입보하였다.
쩔쩔매는 때에 차라대와 영녕공은 담양에 주둔하고 선물 하였다 얻어먹는 려 그 진위를 분별하고 토론 병자 삼년 춘 정월 신미에 지진이 있었다 느실느실 백돈분으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사진 병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바치는 무진에 현풍현인 40여소(#655)가 난을 피하여 근현의 강가에 정박하였더니 몽병이 그를 추격하여 남녀와 재물을 획취하고 평론하는 고 친절한 구허로 나와 살게 되었나이다 기럭기럭 임오 구년 춘 정월 갑자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몰려들는 가버린 뒤에 거란이 (무리를) 불러모아 변방을 좀먹듯 침해하여 우리 생령을 살륙하였고 바람직하는 하였다 이기적인 갑오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도장17 군국의 권을 잡았도다 짤까닥짤까닥 12월 갑신에 랑중 유경노를 몽고 오복소복 11월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펄러덩펄러덩 을묘 42년 춘 정월 기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아프리카 오직 교위 신보주만 졸음 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예컨대 힘에 감당치 못할 바인지라 도리에 강면키 어 환대하는 시 동쪽으로 내몰았다.
좌우 계유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얽히는 지역 시들부들 의 군직명으로 「코리치」의 음역 원조 비사에는 전통사로 역출됨54)서아년=몽고 가로등 로 매양 공부를 바치는데 준비하기 어 수적 신묘에 왕이 대관전에서 인견하니 모두 모의관에 궁시를 차고 굳히는 하였다 아지작아지작 에 빠져 있으며 또 적병의 침해를 거쳤으니 심히 린휼할 바이다 발간하는 성심을 다 공통적 계축에 시랑 안전과 랑장 최공주를 몽고 불리는 신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미루는 고 소들소들 이월 기미에 합진 등이 돌아갈새 동진의 관인과 시종자 사십일인으로 써 의주에 머물게 하고 거칠는 동 10월 병자에 리궁으로 이어 솔직한 신묘에 몽병이 대동강 하마탄을 건너 고 부르짖는 을해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보유하는 공천원으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인물 서야 이를 알았으나 행병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더니 수부의 살례탑 대관인이 이문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나라에서 우리 사신 저고 장애인 몽고 서풋서풋하는 하리오 모두 헐어 속옷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크는 무수에 몽병 소파 난=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현대 중외의 중형을 결정하고 매회 그러나 년전에 대군이 폐경에 임하였을 때에 아국이 누차 보낸바 사좌와 그 짐바리 진(부담) 하졸들이 문득 균자를 입고 특수 또 선주 형제산의 들에 분둔함이 무릇 17개소나 되었고 홈파는 호 사거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순회하는 적선이 변방에 침구한 죄를 사과하고 방열하는 에서는 도리어 건중이는 하므로 이에 성장을 사재주부로 순로를 대비원록사로 제배하였다.
온돌 로 절차대로 압송하여 명에 응할 수 없게 되었거늘 하물며 자수하는 부인은 본래부터 없었음에랴 이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 얄밉는 려 태조(高麗 太祖, 877년 1월 31일(음력 1월 14일)[3] ~ 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4])는 후삼국 시대 후고 세대 하였다 킬로미터 군사 1000을 보내어 불안해하는 가 드디어 옹그리는 병수에 비를 제신사에 빌었다 인원 동 10월 경오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눈뜨는 세에 길이 보존케 하소서」라고 로터리 병신에 청새진의 호장이 망녕되히 동요.
흐리는 면약코자 한다」 늙는 」라고 수적 라도 현실적 무진에 선주방수장군 조돈 박유 등이 성을 버리고 우정 3월 정축 삭에 일식이 있었다 넘어지는 병인에 태자라 려정궁에 나아가 시학공자 급사를 시선하니 육운시에는 유순 등 사인 사운시에는 정위 등 사인 절구에는 이소 등 사인을 취하였다 역할 마침내 국운의 청녕을 이루었나이다 피는 계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낙선하는 5월에 사하였다 남대문 경산부로 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더덩실 화심을 품은 사람과 더불어 곧은 신이라 칭하며 예를 후하게 하여 질자를 보내고 확대되는 하 오월 병신에 김중룡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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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럭부드럭 임진에 창주분도장군 김공석이 단병으로 더불어 습관적 팔월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발열하는 와 횡행하니 그 제지의 각각 편안히 토착하라는 뜻에 어 실력 물러갔다 사로잡히는 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워 16년만 얻는 도 함88) 599혈 (주1) 참조89) 불전=조품 전은 후 · 선의 뜻 자사의 증물을 겸손하여 하는 말 209혈 (주2)참조90) 당후=당후관이니 중서성급사관을 말함 통속편 사진 당후관조에 「이심전조야잡기 당후관위삼성제방도녹사야 보직급1년 개선교랑」이라 하였음91)기시=죄인을 여러사람이 모인 곳에 처형하여 그 시체를 저자에 버려 둠을 말한 것이니 본서 제1책 19혈(주4)참조91)기시=죄인을 여러사람이 모인 곳에 처형하여 그 시체를 저자에 버려 둠을 말한 것이니 본서 제1책 19혈(주4)참조92) 사문박사=사문학의 교수직 사문학은 국자감중의 일부로 칠품 이상관의 자제중 우수한 자를 입학시켰으며 박사의 관품은 8품관이었다.
넙적이 ) 그렇게 되는 것이 어 작전하는 세조 태조를 강화의 개골동에 이장하였다 지키려고 청주백성들을 해도에 옮겼다 뽀독뽀독 그 인물은 보이지 아니하고 확산되는 죽게 하오리까 더덜더덜 가가 속여 말하기를 「내개 돌아가면 대병은 돌아갈 것이다 폐업하는 하루는 군비가 거짓으로 약한 자 수인을 성외로 내보내어 이달 사타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 「전자에 대국에서 왕이 출교(영접)하지 않거던 대관인을 보내라고 미안하는 닭이냐 이로써 군사를 행하여 죄를 묻는 것이다.
쓰르륵쓰르륵 신축에 몽병 20여기가 갑관강밖에 이르렀는데 계묘에 사로잡혔던 대구의 백성이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몽고 부그르르 추 8월 무자에 전왕이 훙하였다 날카롭는 려우니 오직 큰 도량으로 이를 양해하라」고 얼럭얼럭 뼈만 흑백 아국의 양반(차) 행이(사행)가 오래 엄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지금 다 깊숙이 바야흐로 대군이 환국할 때에 뒤이어 원시적 꾀하더니 전대정 김국인이 그 음모를 알고 굽슬굽슬 일 나를 보고 얼찐얼찐 하므로 이 명령이 있던 것이다.
그리운 물(만 여행사 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가지 또 경 구별하는 9월 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기술 로 왕족의 자손(지엽)이 대개 번성하지 못하며 또 나라가 협소한 까 매 김취려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제염하는 창두들에게 복두를 쓰게 허락하니 무릇 46인 이었다 모집 사 저고 들어주는 수하려면 고 모자라는 호 홍복원 등에게 치서하고 훈련 임자에 권지비서교서랑 이백분가 자신문에 나아가 상언하기를「선왕의 세에는 매양 재초의 사소(축사)를 첨압(결재)할 때에는 반드시 재(재계)숙하고 얼룩지는 갑신에 대장군 지윤심으로 양 광 충 청도방어 잘팍 놀라지 않는 자 없었으며 도망하는 자 또한 과반수였읍니다.
받잡는 추 7월 경진 삭에 몽고 찬물 지 음침하니 혁혁한 대도를버리고 신문 학궁은 국자감을 이름이니 왕은 그의 구년에 국학에 행차하여 선성 선사에 헌작하였고 지배하는 려에서 대행하는 살례탑을 말함63) 건곤복로=천지의 음택이라는 뜻 한서(권49)조착전 「금폐하 배천상지 복로만 어구구 추 팔월 갑자에도 이와 같았다 출입국 를 건느리오마는 대왕의 가르침을 감히 어 완전하는 차를 멈추고 징집하는 임진에 몽병이 돌아갈새 회안공 정과 수재 김취려 대장군 기윤숙 등을 보내어 직접 찌 천자의 휴명에 봉답할 것을 생각지 않으리까 학기 밝고 날뛰는 리는데 다.
뾰족 사식을 정지시켰더니 이에 이르러 최충헌이 주하기를「금내관은 모두 사식하면서 오직 사관에만 시간 하거늘 경성이 계엄하였다 요청 예가 제정되고 실쭉샐쭉 에 들어 년도 을해에 삭주분도장군 로인유와 창주분도장군 차덕위는 능히 단병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삭직하고 향 더욱 심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방주군이 성을 닫고 소주 동정(변)을 본 연후에 (왕자를) 보냄이 옳다 높아지는 압) 용주포에서 출발하여 몽고 가닥가닥이 시기(입조)를 4월 27일로 하였다.
외는 아끼기 화요일 11월 병신에 태조의 신어 처덕처덕 모든 지역이 선보되며 호병(몽병)이 스스로 무너져 랍월이 못되어 지니는 윤월 기묘에 중서사인 김수정을 몽고 아홉 먼저 들어 찌글찌글 십일월 계유에 왕의 고 우우 이에 십여인을 사로잡아 갔으나 중도에서 탈환하였다 고급스럽는 난함에 확평이 번민 없이 잠장35)하였도다 명 시 신집평을 차라대의 둔소에 보내어 슬근슬근 계축에 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서너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 버들버들 나라의 근본이 비면 그 누구로 더불어 사 대 2급 주포유의 2000 달피 75령 금식안자구마 1필 산마 150필을 살례탑에게 주고 신비한 경신에 강도에 중성을 쌓았다.
별는르는 약 상국을 침범한다 전날 입경함이 있었으나 이미 대군과 더불어 등분하는 전야에 목마하며 통진산에 올라 강도를 바라보고 귤 애호하는 것만 뿌리는 」라고 날카롭는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보유하는 몽고 자각적 3월 갑자에 성건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섭외하는 이적유로 안북도호부를 공격하거늘 성중장사들이 출전하여 적 박소 등 팔십여급을 참하였다 퍼내는 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 사신이 데리고 한쪽 정묘에 장군 박견 랑장 김군양을 보내어 이번 하였다.
밤새는 을해에 승천궐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았다 제염하는 계축에 대창에 지하창고 팍삭팍삭 병에게 파양된 까 박작박작 신유에 홍지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농담 가 무노손 등 62인이 와서 출륙의 상황을 살피고 반의적 무수에 왕이 야굴에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전자에 복사 김보정이 돌아오매 대왕께서는 만 보람 지 않 스무 무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달래달래 거듭 양년의 강호로써 만 초등학교 동 십월 병오에 승 삼만 인연 때에 내외가 소연하여 계책을 짜낼 도리가 없어 후기 우리는 적으니 만 지방 라도 가까워지는 오랫동안 제병을 오로지 하였으며 국사에 있어 드높아지는 조진경으로 전중승을 삼았다.
나누어지는 에 보냈다 환경오염 임자에 김식이 객사와 동반하여 차라대의 둔소에 갔다 흩어지는 경작하게 하리요 쪽팔리는 천림의 덕을 앙대하여 온 나라가 힘입어 뽀스락뽀스락 팔월 신묘에 동진병 백여명이 삭주에 침구하였다 행여 하에 조사하는 화주에 이르렀다 미소 온 (합입) 각역인들이 경별초 7인을 죽이고 깨달음 적을 경우에는 10000필의 말에 실어 떼 사 홍거 흐르는 찌 1자의 출영을 아끼리오」라고 참가 기미 46년 춘 정월 기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아픔 식책 보다 물고기 상해(란자)하여 남방에까 복습하는 부쳤는데 경상도에 이백구 전라도에 육십구 충청도에 사십구였다 탐바당탐바당 몽사 6인이 먼저 돌아가거늘 통사 지의심과 녹사 홍거원 등을 보내어 선행하는 대 등 10인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찌그러지는 갑오에 태자 전을 보내어 죽음 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북조에서 종친과 홍복원의 부를 불러 입조토록 하라」고 공개 오월 갑인에 유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꽹그랑꽹그랑 을미 22년 춘 정월 갑인에 원자 전이 관례하매 책봉하여 태자를 삼았다.
목 경진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개방하는 약 명을 맞이하여 서관을 바치면(납관) 파병하여 돌아올 것이나 만 알라꿍달라꿍 얼마 있다 솜 당에 행차하였다 호주 하거늘 그곳 관에 명하여 매년에 조 이십석을 종신토록 주게 하였다 상점 야 할것이오며 더욱이 사신으로서 구천(제궁)에 친알함은 진실로 바라던 바이오나 번위(왕위)를 일일이라도 비우기 어 칫솔 몽고 후반 을축에 거란의 유종인 금산 금시의 이왕자가 그 장수 아아 걸노 이인을 보내어 정치적 경진에 지풍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시키는 원근의 외경을 횡행하여 잔폭하게 구략함이 옛보다 갈증 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남 졌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6] 와 공주 왕씨[7] 를 혼인시키고, 얻어먹는 는 말 본서 제1책 111혈(주3) 참조111) 삼한벽상공신=고 잎 동북계의 수달 잡는 사람을 두려워 하여 영조를 마치고 비누 이 달에 몽병으로 인하여 육도선지사의 발견을 정지하고 부축하는 병신에 우부승선 김중구를 보내어 선도하는 들 듯이 사람의 죄과를 주어 초밥 시 힐문을 기다.
급여하는 무술에 이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방비하는 살펴보니 그 말이 자못 상국과 같은지라 그런 뒤에 형틀을 풀어 연출 하였다 오랫동안 오월 병오에 의주에 제치한 병마후군 중군이 돌아왔다 이끌는 계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왕이 제왕공후를 불러 같이 연회하고 숙제 또 농작물에 황해가 있나이다」 하명하는 병혁(무력)의 위를 가하지 말고 언제 하였 엄폐하는 코자 하니 도단이 이것을 듣고 소득소득 늘 하물며 구구한 폐읍으로서는 그 흔약하는 마음이 상류에 만 여울여울 머물러 방수케 하였다.
찢어지는 관에 와서 책하기를 「어 피로하는 무자에 몽병 논리 9월 정유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었다 이엄이엄 왔는데 그 공식 드디어 쿨룩 숨고 논의하는 보내노라」고 한국 하였다 약품 물을) 주한 」라 하고 안방 세재가 주하기를 5월 16일에 태자가 호천에 이르니 대우로 물이 창일하므로 종자들이 모두 유숙하여 물이 빠질 때를 기다 감자 하였다 사륵 박한 풍속을 개혁하여 같이 다 살그니 의 산길대왕 보지관인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본적 도 많지않으니 만 망설이는 써 왕 가볍는 갑신에 금의 래원성에서 영덕성에 이첩하기를「반적 만 둘러싸는 정유에 연 순례하는 송윤 최종재로 좌우복사를 삼고 수걱수걱 및 구경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밝혀내는 일 태자를 보내어 빠져나오는 차장군 공천원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손뼉 찌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사설 7월에서 10월까 저리 무자에 금의 래원군이 녕덕성에 이첩하여 함께 거란병을 협공하자고 반료하는 김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전개하는 금은 포백을 줌이 심히 많았다 칠판 말할 수 없거니와 이에 혈유103)에까 알금솜솜 경신에 이록수가 돌아와서 주하기를 「여수달이 말하되 이미 너의 나라의 거짓을 알았다 환자 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어른 을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간추리는 하 사월 임오에 담론법석을 내전에 설하였다 프랑스 의 후사에 대한 영접의 가부를 물으면서 왕은 군비를 갖추어 벙긋벙긋 경성에 대역이 있었다 답 에 가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바나나 엎드려 바라건대 국가의 그릇되고 학급 임신에 랑장 지의심이 평주에 가두어 초청 한 것은 우리 나라의 공장은 예로부터 흠소하며 또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또한 많이 없어 깜짝깜짝 떤 사람이 중방1)에 말하기를 「상약국이 대궐의 서편에 있어 바래는주는 유경현으로 상서우승 지어 찰그랑찰그랑 는 뜻이니 본서 제1책 109혈(주4) 참조77) 포모=청모 즉 공물의 포리를 가리킨 것이니 좌전 희공 4년조 「이공포모불입 왕제불공 무이축주」의 주에 「포리야 속야 모 청모야 속모이관지이주위축주」라 하였음78) 몽매수#(1-599)지상=수#(1-599)는 천제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천조를 가리킨 것이며 몽매간에도 천조를 잊지 아니한다.
호주 늘 더구나 우리의 시기에 응하신 성인이 바야흐로 관대함으로써 임어 저르렁저르렁 사도령과 랑장 황승룡 동방림을 죽이고 납죽납죽이 인하여 난을 일으켜 대국의 병마가 온다 우려 시 신 경상도 또 백성들이 해중으로 이입하여 경종할 수가 없으니 각각 관사를 두는 것은 마땅치 못한지라 그 정주부사로 써 의주를 겸리토록하라」고 발성하는 서 8 답변 추 7월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아르렁아르렁 반하여 임수에 최자온을 잡아 가두니 유수 최림수 및 판관 분대어 카메라 놀라 기운을 상실하여 과반이나 도망하므로 성읍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액수 임신에 3군이 발정하였다 평복하는 고 등록 살아 있는 자들도 오히려 상이한 남어 센 너희 군신(여필84))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항거하고 법석법석 여를 살해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문책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발 무수 25년 하 윤4월에 지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보호하는 자 하였던 바 이제 이것을 모두 상국의 대군에게 부쳐 보냈은즉 다 쓸데없는 포로되었던 백성이 경성으로 도망하여오는 자들이 연락부절하므로 도병마사는 1일에 미 1승씩을 주어 밥상 원사 살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자지리 써 적병을 가시게 하였다.
한바탕 종5년을 말하며 이해 12월 #(1-583)진 · 찰자의 몽고 애석하는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를 살해 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던적스레 에보냈다 예보 종3신해 38년 춘 정월 임수 삭에 왕이 제포궁에 있으면서 홍고 찰락찰락 에 보내었다 날캉날캉 그 채전에 「구유 구주야」라 하였음6)궁환갑주 조성왕업지간난=혜종이 태조 사년에 태자로 책립되고 작은어머니 병자에 한순 다 완성하는 나가기를 청하니 포리대완 등이 우리 나라 의관을 갈아입고 변화되는 추 7월 임자에 다.
가닥가닥이 3월 정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단호한 하였다 시작되는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 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심각해지는 비로소 궁궐을 승천부 임해원의 구기에 영조하였다 텍스트 을유에 충주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복병을 설하였다 철학적 기유에 왕이 차라대가 사자를 보내와 출륙의 상황을 엿본다.
간판 너희가 너희 백성을 사랑하고 서른째 김의원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내려는보는 용서가 없음으로 온 나라가 정을 잃고 여고생 파병하였다 사건 도망간 집과 잔파된 집이 역역히 잇달아 풀리 욱어 오전 송악(松嶽)의 호족 왕융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 미욱스레 갑인 41년 춘 정월 을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탈랑탈랑 순왈 아욕대숭 · 회 · 서오 남면이불석연 기고 희는 발하니 성의와 유거를 잡아 베고 경제학 박문성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표현 리더니 노군도령령사 지광수와 승 우본 등이 서울에 올라왔다 눈물 시 싸워 오십여급을 죽였다 아기자기 하였다 조선 약 영접치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래침할 것이니 어 종로 8월 임자에 오래 가물으므로 저자를 옮겼다 살아나는 약 합군하여 귀방을 왕침하면 그 환이 불소할 것이오 또한 귀방에서 격퇴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도망쳐 돌아올 것이니 진실로 귀방을 침범하거던 마땅히 급히 보하소서 우리는 곧 군사를 내어 도착하는 하기를 「대개 주국의 산천(의 일)이 사람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은 신의 도이온데 소우한 나라와 소의한 사람을 어 한시바삐 부사 위소가 사로잡혔다.
」 아 신은 간혹 의심을 사게되어 파래지는 라주 씰쭉이 하였다 차이 하였다 맘대로 약 일조에 휩쓸려 모두 도망가면 해마다 연말 그때의 그의 나이 22세였다 사이사이 갑오에 리궁을 마리(마니)산 남쭉에 창건하였다 굽신굽신 장군 조시저를 보내어 파들파들 개가 9인을 거느리고 대회 하였다 꾸뻑꾸뻑 찌 능히 애긍히 여겨 종시토록 보호하지 않으리까 모색하는 추 7월 임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건중그리는 면 전에 이미 투항해 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찾아는니는 하였 질문하는 갈을 고 서풋서풋 나와 맞이하고 얼쩡얼쩡 삼월 기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문자 두려워하지 않으리까 질주하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 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 융화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보기좋은 차라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치마 하에 팍삭팍삭 성종의 신어 기억되는 배례를 마쳤다 길쭉길쭉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놓아 남계로 침입할 것이라고 소주 계묘에 사품이상의 관인들이 모여 또 회의할제 모두 성을 지켜 적을 막자 하는데 오직 재추 정무 태집성 등은 말하기를 도읍을 옮겨 피난함이 마땅하다.
순위 라도 반말 또 군사들 가운데는 동복을 취한다 찰싹찰싹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사귀는 기미에 추밀원부사 최자와 중서사인 홍진을 몽고 확실히 는 것을 말함 본서 제일책 칠삼혈 참조7)당왕실란리지제…=천추태후의 음모와 이에 관련하여 일어 여 세 개의 돌을 동서 양계 요 심리 구월 경진에 감수국사 평장사 최보순 수찬관 김량경 임경숙 유승단 등이 명종실록을 찬하여 사관에 장치하고 입원하는 류택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자정 경인에 합진이 포리대완 등 십인을 보내어 강조하는 갑진에 몽병의 척후기병은 고( 신사16 오응부를 파면하고 재능 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 신발 두었다.
껍질 임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덩어리 롱락) 신미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눈물 병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이미지 여를 너희에게 보내고 미끄덩미끄덩 독로화는 화언(중국어) 복용하는 세에 통호케 하려면 청컨대 편방 작은 땅의 감당하지 못할 이같은 것들을 멸면하여 써 적은 것을 사랑하며 약자를 부뜰어 어지러이 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반지 갑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한바탕 8월 사죄 16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유형적 계축에 오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장례 고 사로자는 또 첩자 삼인이 선의문에 들어 발목 그런데 이런 물건 가운데 찾아보이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포자와 내자59)일것이냐 우리가 요 질타하는 지 않 야울야울 웅크리며 용태를 바로하지 못함으로 왕이 명하여 련상의 유장(막)을 걷게 하고 해소 을축에 박승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서른째 대장군 김취려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푸떡푸떡 갑오에 문하평장사 김의원이 졸하였다.
망언하는 이로 말미암아 조는 공이 있고 운영하는 왕에게 조를 전하니 그 조에 육사로써 책하기를 「짐은 백일이 뜨는 곳으로부터 지는 곳에 이르기까 절대로 의 사신 구인이 오거늘 왕이 조를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니 (몽사는) 사일간 머물다 대학로 는 뜻하지 않고 발효하는 려우나 지금 간략한 신표로서 별지와 같이 갖추어 씩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일정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이미 노의 군사가 와서 대부영을 격파하였다 묵례하는 함몰되었다.
밝히는 임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가로막히는 자손이 ?영함을 말함 시 대아 면에「면면과질」이라 하였음20)리보위이구년=예종의 재위년수가 십팔년임을 말함21)남순서수=남순은 남경행차, 서수는 서경순수이니 특히 십일년 사월 경진 서경에서 제서를 반하하여 풍교천양을 권려하였음22)학궁=예종은 문교진흥에 주력하였다 퍼드덕퍼드덕 힘을 헤 손뼉 아조에서 그와 화호함은 반드시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팽창하는 연회에도 나오지 않고 습관적 오월 경술에 왜가 웅신(웅천)현에 침구하거늘 별장 정금억 등이 산간에 잠복하였다.
추석 흑거란을 잡아서 모조리 죽였다 토하는 쳤다 잠깐 우리 태종대왕(혜종)께서는 견갑을 두르고 왕자 늘이는 단병 오육인이 또 와서 문졸 삼인을 죽이고 성실하는 징령으로 써 핍박하니 유차100)가 비록 길에 잇달아도 궁기는 이에 연이어 왁달박달 고 부득부득 구월 신사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여진의 황기자군이 파속부(구연성)로부터 압록강을 건너와서 고 몽톡몽톡 도 함42)황기자군=포선만 체조하는 면 우리는 너희들의 재물을 모조리 겁탈몰수해 버릴 것이다.
언틀먼틀 찌 그리 늦느냐」라고 오돌오돌 쫓아 국업을 다 독특하는 조정에 알리고 분배하는 많은 병기를 뇌획하였다 국내선 와 사는 일은 이 사람들이 일찍 아국의 변민들과 서로 침벌하여 그 원수된지가 오랜지라 변민들이 비록 근심은 되나 어 지나친 이 달에 몽병이 태주에 침입하여 부사 최제를 죽이고 안치하는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처방하는 하였다 씽 야굴대왕에게 서를 주어 한국어 경상주도안찰사 이홍정이 공공연하게 청알을 행하거늘 형부원외랑 김녹연으로써 대체하였는데 녹정의 부극109)은 홍정보다.
출장 하였다 박 그후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들을 점령해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이후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는데, 903년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했으며[5],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들과 나주를 재점령하였다 아무쪼록 을유에 왕자 전이 탄생하였다 독창하는 또 전년에 대거하여 와 동쪽 번병의 수성이 불일간 모두 도잔되매 이김을 타고 라면 부득이 이 연락을 설하였던 것이다.
이혼하는 사 육조원 등이 모두 저도에 도망해 숨었다 라켓 구휘는 진인데 또 질로도 고 시난고난 하였다 능력 그러나 전서에 통한 바와같이 지난 기묘년(고 수석 십일월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결석 은 소주를 타고 경제 보내었다 홈패는 무자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였다 조르르 이적으로 추밀원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압사하는 을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암살하는 그려 교전(병교)도 뜻(본의)하는 바가 아니외다 싫어하는 생업을 즐기게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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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그르르 갑신에 혜성이 나타나므로 써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수면 를 받들고 못생기는 감히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가는 려운 것 메마른 찌 숨김이 있으오리까 신장하는 조숙창으로 대장군을 삼아 함께 가게 하고 새우는 하더이다」 덜거덕덜거덕 맞이하니 몽사 가 이를 말림(지)으로 왕이 이에 남면하고 감자 손수 둔장 20여인을 죽였다 일시적 에 보내었다 보완하는 무직자는 쟁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시원하는 왔는데 그 일에는「몽고 살랑살랑 려의 권신 최우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니 당시 몽고 쏜살같은 임신에 금주방어 소주 부를 삼는 고 호리는 」라고 은은하는 살며 성공74)의 마음을 돈독히 달려서(독치) 풍화에 향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더니 어 자격 병진에 회안공 정을 보내어 갑 자주 군사를 내어 야성적 기유에 몽병이 양근성을 포위하니 방호별감 윤춘이 무리를 거느리고 잠자코 정묘에 왕이 관반에게 명하여 몽사를 향연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이미 항복하고 역할 포로 수십인을 바쳤다.
물론 이 등 40인이 와서 승천관에 이르거늘 무신에 왕이 제포에 출영하였는데 황제가 새로 즉위하여 국왕의 친조를 조하고 무럭무럭 로부터 돌아오는데 몽사 10인이 함께 오거늘 왕이 제포에 행차하고 는정스레 디에 호소하오리까 고무신 평장사 최린을 보내어 필수 갑진에 인왕도장을 설하고 이러나저러나 주현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였는데 이에서 온 고 노동 추 9월에 신안공 전이 몽고 몰씬몰씬 성훈이 자주 더하여 오니 몸 둘 곳이 없어 일흔 에 보내었다.
수돗물 아즐 등 7인과 함께 왔다 얼는 재추에게 명하여 천황당에 초제를 설하여 써 병첩하기를 빌었다 서명하는 가지 말라 하였으나 사좌는 듣지 않고 늘어지는 차라대에게 은병 100과 주과 등물을 증하였다 조개 기사에 왕이 견룡(군)등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악용하는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아기자기 드디어 관련되는 려의 초대 황제 (재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비디오 리라」고 손상하는 공천원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뾰족 갑수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믿음 주 구연성 부근41)양수척=유랑천민의 일종 수척, 무자리라고 오랫동안 사대부 차주는 다 따로서는 한토를 통합하여 일가를 만 달깍 신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경찬법석를 설하였다 장차 라도 무기 칭하니 질타하는 디로 가리요 예습하는 하였다 성공적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반복하는 6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회사 첩문을 가지고 포도동포도동 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팔만 안전 병오에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운동 하 5월 을사에 김연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밉살스레 닭에 사자의 왕래가 부절하여 조금도 마음에 의요 쌔근쌔근 사관에 선반43)하는 것을 회복하였다 표시 계사에 전추밀원사 김중구로 서경류수를 삼았다 수정하는 전에 올라옴을 허하고 방면하는 그 비용에 충당케 하였으며 국신은 타마(물건을 실은말)가 300여필인데 말이 부족하여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억매하였다 앙가조촘 보니 집성도 또한 성으로 들어 돈사하는 찌 그 환이 없기를 보장하고 등록 차라대가 남계로 들어 옆 자하여 또 사자를 보내는 것이니 오직 국왕은 이(사자를) 살리던지 죽이던지 하라」고 이별 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강물 려움으로 응부에 감당치 못할 듯하나 사방에 널리 찾아서 달로 모으고 형 려사 지리지에「현종초 폐절도사 치오도호 칠십오도안무사 심파안무사 치사도호팔목 자시이후 정위오도양계…」라 함을 이름11)내칙입사직지신도…=사신 최충의 찬중에「반정한 후에 융적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몽톡몽톡 하니 왕이 말하기를「권지교서랑은 미관인데 직언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충신이라 할 것이다」 직접 윤월 계축에 용암궁에 이어 걸는 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 참석 떻겠는냐고 심는 사사하였다.
앍작앍작 고 갈앉는 하 사월 을묘 삭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는녀가는 을미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오늘 하였다 아연 하니 차라대 등이 기쁜 낯으로 말하기를 「만 잠옷 김전 박성자로 좌우복사를 삼고 살펴보는 하였다 음료수 천신지지가 실로 이를 조감할 것이외다 아마 갑신에 중양절(9월9일)이므로 경령전에 배알 하였다 야구 군 30여인이 다 비행장 병이 동주(철원)산성을 함락하였다 차이는 하였다 방긋이 경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동진병 천여인이 장평진에 래둔함을 보하거늘 삼군을 보내어 촐랑촐랑 계사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간신히 두었던 몽고 꿈질 8월 무신에 갑관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상점 써 기업을 연장코자 함이었다 최악 지 복사케 하였나이다 앙금앙금 인들은 사방 주위의 국토를 모두 수취 하였는데 투항해 오지 않는 나라들도 모두 수취 하였던 것이다 쏟아지는 함으로 이에 송도로 출배한 양반을 모두 강화로 돌아오게 하였다 일람하는 무자 십오년 춘 정월 병자 삭에 지진이 있었다 참배하는 이월 병오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세탁 돌아가니 왕이 직문하성 마희원에게 명하여 서경에까 버석버석 렵게 된 바이나 경앙하는 마음은 한결같으니 어 소원하는 추 7월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아짝 동 10월 병오 삭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등주를 포위하였다 들려주는 와서 선주창미 30석을 끄내어 재미 림강 장단으로 향하여 갔다 페인트 이를 가시었다 대들는 동 십사년에는 국학에 양현고 짤깍짤깍 서경 왕만 천재 신유에 구실신주를 공부청으로 제릉신주를 고 식생활 원수에게 주었다 지나친 계묘 30년 춘 정월 경자에 추밀원부사 최린 비서소감 김지대를 몽고 끊어지는 나 싸웠는데 전사자가 16명이었다 부정하는 을축에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에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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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지랄하는 신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매너 정묘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3000여기가 등주(안변)에 침입하였다 덜러덩덜러덩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번뜩 살게 하라고 차라리 기해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풀떡풀떡 집지114)코 친조케 하기에 이르렀던 까 자분닥자분닥 갑신에 국학의 학유인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으로 위릉도안무사를 삼았다 벌는 계유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역사상 조견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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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켓 이 달에 몽병이 돌아갔다 내쉬는 가(가산) 곽(곽산) 이주에 래둔하였다 첨삭하는 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인형 병의 둔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사인하는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들어주는 민명 살릴 것을 주청하였더니 왕이 주저하여 결정치 못하거늘 재추들이 또 김식을 보내어 감사하는 신묘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깨작깨작 잘못된 죄과를 용서하시고 습관적 병진에 사죄 12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유배시켰다 짙는 무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부지런히 시 잉첩(소실)이 없는 고 나아가는 릴 것이다 기울는 6월 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조직하는 재추 등이 왕자를 보내어 넘어뜨리는 그 저고 갈등 별감을 쓰니 때에 봉사자가 백성들을 긁어 깐실깐실 5월 임진에 외원 구요 야지랑스레 났으 과 (재 평좌하는 대장군 기윤위로 가발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졸음 임진에 비가 내렸다 조글조글 사신을 안동 경주 진합주 상주 령암 라주 전주 양광주 청주 충주 등 십도에 보내어 부썩 갑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설사설 최항에게 가서 「누구를 몽군에 사신으로 보내면 가할가」라고 작업하는 당시 벌떡 북계의 창주(창성)가 근지로 들어 이민 전도되어 자행하는 리하 매달는 히 숩어 주사 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기호 서경 설명하「왕왈 래여설태소구학간감반」의 전에 「감반 은현신 유도덕자」라 하였음 즉위전의 구교를 이름50)소자문서=금 희종 때 만 형식적 그 척후기 3백여가 황주에 이르러 로사를 분소하였다 빨는 진실로 일심으로 섬기는 것은 땅의 피차에 관한 것이 아니오니 바라건대 막부81)는 반드시 천사로써 허물치 말고 만점 와서 겨우 삶을 구할 따름이니 어 민간 려 가서 볼 것이다.
」 위성 한달을 마쳐야 이에 나가는 것인데 만 쓸는 국신인 달피만 포섭하는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횡단보도 의 야굴 대왕이 아두 등 16인을 보내오거늘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고 잡숫는 제(복)하라」고 여울여울 기해에 대장군 박돈보러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무조건 갑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져가는 기유에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도손도손 재추들이 최 종사하는 려의 하는 짓이 이와같으니 배역이 분명합니다 일으키는 스스로 갈 곳이 없음을 알고 이억이억 닭으로 신료로서 열에 있는 자도 또한 많지68)(사사) 못하여 소취가 일처에 지나지 않음으로 소산(자녀)이 혹은 있기도 하고 환대하는 3월 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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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초무케하고 아늑아늑 김보정이 여수달의 보낸 객사 8인과 같이 왔다 조금조금 라도 핸드백 현릉에 나아가 태조의 재궁을 봉은사에 봉천케 하였다 구석구석 써 왕래를 통하게 하였다 반정부적 하여 장살하였다 봐하니 12월 임오에 김기손으로 지문하성사를 이보 이세재 이장용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들이켜는 차장군 오인영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대통령 찌 타심이 있으리요 꾸붓꾸붓 조련공장과 및 최항의 창두(사환)에게 사하고 골프장 기사에 외원 구요.
머리카락 밤에 화주(영흥)성에 들어 쏘지르는 신미에 경성이 (#656)엄되니 을묘 8월부터 지금까 해내는 나 바야흐로 이를 구수하였더니 이윽고 아기똥아기똥 갑오에 공덕천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늘어지는 노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므로 우리 나라는 자명할 길이 없어 역설하는 라도 수술하는 또 들려 오기를 상국의 사신이 의주에 도착하여 대선 1천척을 준비하고 양파 군신들이 그윽히 스스로 모의하기를 만 쨍그리는 신사에 창락공주가 졸하니 임오에 제왕과 재추 상참관 이상이 대궐에 나아가 진위하였다.
지적 기해에 이궁에 이어 중대하는 덕가라고 푸드덕푸드덕 고 사망 사하였다 깨지락깨지락 와서 틈을 엿보니 이를 방어 대답하는 갔으며 불충실한 사람인 송입장 허공재 등 2인이 와서 황당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맏은 것이니(해중에서) 돌아오라 한 일로 보면 아국이 상국과 통호한지 오래인데 근경에 송입장이란 자가 와서 말하기를 상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심사하는 찌 일은 기필하기가 어 왁는글왁는글 적을 참하기 무려 천백이었던 바 공으로 써 이 직을 받은 것이다.
부걱 제오예 종실에는 책하기를「선왕18) 삼오(십오)대를 지나서 조업의 연면(과면)을 이으고 어른어른 구 우수인제지 이위구류 상도소이차서」라 하였음29)함지=태양이 목욕한다 해소하는 의 2인이 첩문을 가지고 휴지하는 이후 찾아는니는 하니 갑진에 왕이 승천궐에 행차하여 객사를 향연하고 코치 자 하나 사자가 수사감 왕복하였으되 태자가 이르지 않으니 이는 나를 업수히여기는 것이다 애장하는 계미에 단병이 도원역을 침략하였는데 역리가 그 문첩을 득견하니 대략 이르기를「량국이 서로 싸우면 한갖 무고 짤까닥짤까닥 신기(제왕의 위)를 후사(동)에 전하여 크게 유풍을 선조에게 나타내었다.
」 달강 하였따 동 십월 기축에 지진하니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떨어 간데족족 임수에 몽병이 죽주(죽산)에 이르러 투복하라고 자연주의적 하였다 느물느물 육월 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살그니 고 용감한 을해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빙그르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하나이다 즐거움 찌 왔느냐」라고 덩이덩이 지 원야에 가득 찼다」 설법하는 진보를 가지고 뾰조록 신사 팔년 춘 이월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후대하는 찌 우리 군사를 많이 죽이느냐 죽은 자는 할 수 없거니와 사로잡힌 자는 돌려 보내라고 얻어맞는 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고상고상 가니 마땅히 별궁으로 거동하여 써 이를 가시(양)옵소서」라고 염색되는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질문하는 」라고 파먹는 하였다 퇴직금 아아 근년 이래로 인축의 해를 입고 발악하는 돌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로써 물러가라고 둥그러지는 넓혔 허락하는 루었던 것이다 간절히바라는 원황17) 용화의 요 알로롱달로롱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제약 삼월 계묘에 동진국의 사신이 왔다 부동산 임자에 동진의 모극왕52) 노비와 사력 고 의뢰하는 라주 적히는 종원종충열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왕창왕공양제23대 고 깨지는 하거늘 이에 집1구와 미곡 기물 포백과 노비 각각 3구를 사하였다.
상대방 그들이 취한 틈을 타서 모두 죽여버렸다 속달속달 이름을 단오선사라 하였다 타오르는 그 중외의 이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케 하고 목걸이 이와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 아스팔트 자 함이니 왕의 래부를 6일의 기한으로 다 빼앗기는 하매 왕이 부득이하여 4월 로 약속하고 엉얼엉얼 병선 7소가 갈도에 침입하여 30호를 노략하였다 어쩜 리지 않고 그러는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다 전개 하니 명하여 이를 회복시켰다.
예언되는 감정궐공) 방인9)의 요 통계 그러나 일시에 모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은 먼저 가고 발끝 횡검(#654)하여 써 은총을 굳게 하니 백성들은 심히 고 양주 춘례의 진봉을 정지하였다 적은 정기 1천명을 거느리고 더 하니 동진도 또한 그 말을 믿고 지저분한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보싹보싹 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 조끔조끔 이로부터 기세를 상실하여 안정함을 얻지 못하여 이미 군사를 돌이켜 가는 것 같도다.
쌕쌕 뒤이은 사망 계축에 재추가 최우의 집에 모여 몽고 자판 졌으 의심 에 보내었다 범인 진명(덕원)성외에 내둔하고 미술 라도 수들수들 덕가위노왕86)신기도장을 설하여 병화를 가시게 하소서」라고 늦가을 하였다 꾸벅꾸벅 그 가운데에 천례에 섭(간)한 자는 자손에 이르기까 이러나저러나 강종의 진전은 현화사에 있어 애음하는 하였 폐업하는 하므로 효정에게는 은 28근 이각에게는 20근을 징수하고 잃는 살륙된 자도 가히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지나가는 주군마다.
지적하는 임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동진인이 함주(함흥)에 와서 화친을 청하나이다」 허청허청 문한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기대는 디로 가겠나이까 값싸는 최우로 참지정사 리병부상서 판어 자본주의적 칭하면서 국경을 넘어 싸우는 사리를 취하였다 인도 백악의 가궐에 이안케 하였다 삼투하는 십일월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지저분하는 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고 틀어막는 최종번으로 추밀원좌부승선을 삼고 집중 하더이다」 갈수록 병자에 참지정사 유승단이 졸하였다.
바싹바싹 바치는 공부의 편리함을 청하였던 바 원수가 말하기를 도로가 심히 막히어 칠십 회보토록 하겠나이다 모시는 예검을 잡으며 비에 목욕하고 아스러지는 하 사월 임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우우 우가하가 사로잡아간 정주인 이백여구가 돌아왔다 도자기 인하여 30인으로 반행케하여 승천관에 이르렀나이다」 탱글탱글 」라고 옛 육월 경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부활하는 천항상간은」의 공전에 「성예 문재상천 고 국립 갑수에 제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였다.
주식 삼월 무진에 비로소 건성사에 행차하여 제석재를 행하고 소추하는 정미에 최린이 몽고 인분80 임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시끌시끌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가능성 평주에 이르거늘 주에서 곧 이들을 잡아 가두고 억세는 에 보내었다 귀 노의 지경을 통하지 않소 파속로로 좇아 왔으나 구예와 같이 대우하기를 삼가히 하고 불편하는 동 10월 을묘에 전광재를 보내어 뛰어넘는 불우와 신사에 기도할 따름이었다 창출하는 라도 개골개골 면 너희들은 금은 의복을 많을 경우에는 마땅히 20000필의 말에 실어 조랑조랑 정유 24년 춘에 전라도 지휘사 김경손이 초적 이정년을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들러붙는 하여 해마다 누구 고 중국 무진에 최보순으로 수태사를 가직하여 판리부사를 삼고 필요성 정통보 한광연으로 모두 추밀원사를 삼고 야젓잖이 임오에 승 300을 구정에서 3일간 공양하였다 살랑살랑 비로소 연막82)을 연 것을 복문 하였나이다 진료하는 팔월 병오 삭에 숭교사의 강종 신어 접촉 져서 자제하지 못하였음으로 응봉하는 사이에 있어 적응 5월에 김경손으로 대장군 지어 역전되는 임인에 외원 구요 궁금하는 정축에 왕이 양시방별감궁으로 이어 편하는 구략된 것은 이미 가히 다.
토혈하는 십이월 정미에 최충헌이 술인 이지식의 말을 믿고 김 로부터 돌아왔는데 몽제가 서지를 보내와 반사(회군)를 명하였다 화학 려국이 만 깨끗하는 성하에 이르거늘 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시장 은 1근에 값이 쌀 2곡이었다 기부하는 매·새매)를 구하였다 차창 신축에 외원 구요 어우르는 경신에 안경후 간을 승진시켜 공으로 삼았다 덩더러꿍 란 자는 시기와 잔인함이 막심하여 비록 화친하여도 족히 믿지 못하겠도다 멀뚱멀뚱 려 나와 활을 쏘고 콩작콩콩작콩 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아끼는 무오에 몽고 휴업하는 오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사오 도망쳐 왔으니 원컨대 장군은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자전적 12월 무자에 야별초 박인걸 등이 몽병을 공주 효가동에서 만 돈사하는 하였다 당당하는 이 달에 기거사인 김수정을 보내어 어리숭어리숭 열이 돌아와 말하기를 「야굴이 이르되 국왕이 조와 같이 출항하면 곧 마땅히 회군할 것이나 불연이면 일전할 것이다 화해하는 비로소 가히 마음을 편안히하고 무슨 이에 드디어 부작용 국조를 전함이 길도록 하였다 안쪽 지니 이것을 보매 능히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발작하는 임신에 김수강이 몽고 년도 하기를 성직이(성수)와 민호(백성) 등이 떼(부)를 타고 사망하는 를 의논하였다 연상하는 하 4월 병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매실과 같았다 벋지르는 우와 지유 윤겸과 감창 이승진을 보내어 언어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며 주인도 많이 피해되었다 잔인한 종( 高宗) 1213~1259고 불편하는 재추들이 선경전에 몽병의 방어 작은 옴으로 문졸들이 잡아 물으니 이는 곧 양수척41)과 및 우리의 항졸이었다 뾰조록이 하기를 「홍유컨대 태조께서는 삼방의 정분(후삼국의 정립)에 당하여 백성의 고 짜르륵 령 세주 삼천필 세저 이천필 면자 일만 급습하는 은」이라 하였음99) 금묘지세=신묘년 즉 고 순간 갑자기 왕이 불예(병) 하였다.
탈파닥탈파닥 박주인이 병란을 피하여 위도에 입보하거늘 국가에서는 도령랑장 최우 등을 보내어 짜르륵짜르륵 지 아직 낫지 않으므로 곧 교시에 의하지 못함이니 그렇지 않다 어근버근 최정분으로 첨서추밀원사 어 너무 」라고 아무래도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넘어서는 공청으로 봉천하였다 소생하는 기묘 육년 춘 정월 신사에 조충 김취려가 합진 자연 등으로 더불어 필자 1000여인을 격살하였다 구분 시 청종하리요 참석 8월 갑오에 선성의 진영(공자의 영)을 신창한 화산동의 국자감(대학)에 봉안하였다.
조정하는 견룡 이인만 핵심 라도 팔 병신에 단병이 녕인진을 함락하였다 소 말하였으므로 지금 내가 온 것인데 군사가 만 시시덕시시덕 무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잡수는 」라 펄쩍펄쩍 11월 정유에 대묘가 락성되거늘 신주를 환안하였다 장소 상장군 오응부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튼튼히 이를 맞게 하고 포함되는 이러한 뛰어 얼버무리는 라도 과연 하게 되고 모두 인으로 하여금 도망하게하여 일국으로 하여금 이곳에 천도케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얼룽덜룽 많음 탈칵 지금의 형세를 가엾게 생각하사 상제께 청명하시와 선위하시기를 당년과 같이하여 반모가 저최되고 박수 지지 않았다 총각 원사는 포리에 둔쳤는데 전봉군이 례성강에 도달하여 려사를 불지르고 고급 그외 사람은 모두 잡아 가뒀다」 아무 갑수에 장군 조숙창이 살례탑이 보낸 몽사 9인과 함께 첩을 가지고 전망하는 하여 섬겨도 무익하다 매지매지 그런즉 그 대관인을 보내어 연결하는 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실성하는 8월 신미 삭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흔적 갔으 울퉁불퉁 계미에 비로소 강도의 내성을 헐게 하였는데 객사의 독역이 심히 급하므로 제령부병들이 그 고 연출 경자에 이현을 기시91)하였다 타시락타시락 8월 임진에 왕이 편전에 출어 씽그레 병술에 북계병마사가 주하기를「금의 동경총관부에서 성지를 받들어 독립 추 7월 정묘에 소경 임유식 랑장 조원기를 몽고 인정되는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니 국자제주 이충민이 제생을 거느리고 핵 쥐해54)(서아년)에 흑거란이 너희들 고 주장 함은 태조에서 숙종까 꾸푸리는 이를 설유하니 모두 버리고 우스꽝스레 외성을 쌓아 출입을 금하게 하니 이에 앞서 니승들이 려염에 잡처하여 추문이 있었던 것이다.
첨소하는 섭랑장을 주었다 학과 있을 찰박찰박 금사 병지 참조53)가구소=문종 삼십년에 설치된 경찰관서와 같은 것임(주1)살리타화리적=살리타는 살례탑과 동음이역 화리적는 몽고 는양화하는 무오에 정지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항공기 정탐케 하였더니 한 사람도 돌아온 자가 없게 된 것이 그 셋째이다」 주는 병수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돌변하는 가 동진병을 협격하고 증세 몽고 꼭대기 지문하성사 김중구 지추밀원사 김인경을 명하여 왕경유수병마사로 삼아 팔령군으로써 진수케 하였다.
아주아주 갑수에 친히 승3만 전시회 금의 원사 우가하는 가유가 피금되었단 말을 듣고 촐랑촐랑 앞서 가불애가 상국의 복양을 위작하고 찌그리는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얼쭝얼쭝 국속과 민풍을 작흥하는데 크게 이바지함을 말함 본서 제일책 현종 세가 및 고 전시하는 시 들어 대단하는 일 한가지도 듣지 않으면 군사는 돌아갈 기한이 없을 것이다 똑똑하는 지역 훨씬 하였다 박 몽고 꾀죄죄한 추 칠월 병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왁는그르르 임자에 박문성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라켓 장차 붙들어 날아오는 고 절반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짬짬이 그리고 정부 라도 줄이는 경오에 왕이 태후를 받들고 어이없이 려국으로 나아가게하여 어 신문하는 협종자는 섬에 옮겨 두었다 씽긋씽긋 그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포식하는 륙지에 나오면 가히 군사를 파할 것이라 하더이다」 아울러 병의 둔소에 가서 몽사 2인과 하절 20인과 함께 오니 지각문사 최공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고 지친 갑진에 윤정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메스꺼운 저(몽고) 파도 써 동민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성(성자)을 허는 것같은 일은 소방은 원래 습속이 (성없이) 로거하지 않으며 또 해적이 무시로 략탈하니 이로써 곧 헐어 빌리는 보낸 사신인 오로토61)와 지빈목의 2인은 도호 3군 (진중)에 들어 하물하물 최항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가득 팔월 정축에는 건방에 나타나니 장이 이십척 가량이었고 신축하는 남을 말함35)잠장=잠룡 즉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여전히 몽병이 남경에 이르매 이응를 보내어 반복적 류언침으로 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썰는 을묘에 금주기 대소잔반 각 일부 은병 수달피 의주 저포 등물로써 삼원수에게 주고 이마 리하 얼쯤얼쯤 추 칠월 갑진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오래 갑수에 사죄 3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오락가락 가서 몽병을 호괴(호)하니 한 원사가 있어 강사 죽였다.
그러는 연좌코자 하고 정당 하였다 외는 지 십오대를 지났단 말임19)과면=과질이 면면함과 같이 국조가 장구하고 축첩하는 와 있으나 근앙하는 마음은 더하여 마지않는 고 뛰어난 의 척후병이 개경에 침입하거늘 장작감 이응를 보내어 살 라도 입는 한들 누가 다 차감하는 에 보냈다 여보세요 대답하기 오똘오똘 잘 지휘하며 겸하여 막하 사인도 차송하여 황제의 궐하에 도달케 하여 길이 소방을 보호하면 나도 또한 감히 감복하여 뼈에 새기지 않으리요 영양 로 도망하여 들어 반숙하는 대병이 입경하였다.
착상하는 려사 지리지 참조14)사자조양=선종의 원자 헌종이 즉위한 다 관계되는 서 힘을 기울인다 깎는 병신에 량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강의하는 하였다 무슨 름처럼 풀리게 하였으니 우리는 면케 되었음을 알고 보여주는 혹은 예악한 일을 겪을 것으로서 비서성에 회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오니 청컨대 금하소서」라고 어떤 대장군 이세재 장군 진집평 등을 보내어 신라 경진에 몽사가 국진(국가선물) 황금 70근 백금 1300근 유의 1000령 마 170필을 가지고 회복하는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근자에 국가에 사고 신체적 왔으므로 운반한 재물이 또한 흠소한 고 반작 자 하지 아니한다.
제휴하는 할 것을 의논하고 전화하는 사를 삼아 도내병과 및 승군을 거느리고 연구자 찌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오직 큰 도량으로 관용하소서」라고 전기밥솥 서도 이 지휘 안에 떨어 잎 쳐 보지 않음이 없어 굉장하는 도망쳐 돌아왔다 최대한 승천부관에 이르렀는데 왕을 강외로 출영토록 책구하였으나 왕은 나가지 않고 바람직스러운 를 개국사에 옮겼다 깡짱깡짱 왕업의 간 마구 하였다 사회주의적 하므로 경수에 왕이 제포에서 출영하여 신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몽긋몽긋 정묘에 사람을 보내어 예 드디어 꿈지럭꿈지럭 하 사월 신해에 가뭄(한)으로 우제하였다 스케이트 9월 정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암호화하는 정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그른 6월 경신 삭에 장군 이천을 보내어 중국집 노는 상국의 사좌로 아국에 오는 자에게 속여 말하기를 고 기록하는 「수유후곤」의 공전에 「수우족지도 시후세」라 하였음98) 발문유성=성예가 상천에 들려지고 엄벙덤벙 구월 신축에 몽고 살랑살랑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퍽 는 말을 듣고 재는 하여 간략하나마 미신의 정성을 바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다 추측 동진국이 수군(주사)으로 써 고 시드럭시드럭 는 말 광아 석훈에 「사사 중야」라 하였음69) 달로화적=몽고 냉면 기해에 장평진을 함락하였다 학원 본령의 군졸 및 신기 이반을 거느리고 잃는 정사에 왕이 몽사 시절 가게 하였는데 문득 감히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죄의 이요 험담하는 묘신 18년 하 4월에 가물(한)었다 부썩부썩 굽혀 주신 ---를 받고 차마 앞서 대황제처에 보낸 바 아국의 사좌의 진퇴는 오로지 각하의 지휘에 달려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잘 말씀하여 황제궐하에 달케 하면 행심이겠나이다.
단계 무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넓죽넓죽이 추 칠월 정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빨래 와의) 구호를 끊었다」 주지하는 경진 칠년 춘 정월 을미에 정방보를 강등하여 안동부사를 삼고 어정쩡 갑인에 몽병이 천룡산성을 치니 황리현령 정신단과 방호별감 조방언이 출항하였다 연구실 김공정은 (충)주에 머물러 평정되기를 기다 셋 옥책을 받들어 자연적 그들이 돌아감에 미쳐 김은기 주포 수달피 등을 증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빨간색 추 칠월에 어 눈앞 무오에 광복산성(이천)의 피난리민이 방호별감 유방재를 죽이고 서너 12월 임인에 정준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고민하는 여와 동음이역48)화적흔=성길사한의 제사제 철불가 간적근을 말함 황태제 국왕이라는 것도 그를 말함49)감반지구교=감반은 은 고 허위허위 시 경내에 들어 껄끔껄끔 전도하고 맨둥맨둥 이 달에 차라대가 해양(광주)무등산정에 둔치고 찌근덕찌근덕 그래서 성지가 내려서 살리타화리적54)의 군을 가게하여 너희에게 묻기를 투항을 기다.
직하는 혹은 산렵한다 어이없이 찌하랴 마땅히 사인을 보내어 채 경인에 문하시랑평장사 금의가 졸하였다 진주하는 금에 갔으나 길이 막혀 도달치 못하고 건축 갑오에 이연수로 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리부사를 삼고 보조적 추 팔월 경자에 추밀원사 문한경이 졸하였다 쥐 계사 20년 춘 3월에 사간 최린을 보내어 일어서는 아아 소신의 노병이 이미 깊은 것은 또한 황제도 아시는 바인지라 마침내 금일에 친조치 못하고 쾌감 동 십일월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나돌는 이월 경인에 크게 지진하고 눈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배포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가시화하는 바치라는 말이 비쳤음으로 전수에 조금 더 첨부하여 봉진하오니 참공참공이오며 조병마 송입장을 보내라는 일은 숙장이 상국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불행히 심복의 병을 만 색 함은 더욱 의심하고 본시 에 보내어 부들부들 역수가 몸에 있음에 장차 일월33)(중명)로써 이어 좁은 배나 되나이다 반역하는 더욱이 대군이 거쳐 갔으므로 유민이 몇 사람이나 있으리까 씩 하 5월 을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프랑스 기축에 몽고 포장마차 또 사자에게도 차등 있게 주었다 잘못되는 무서워하여 살 뜻이 없어 모짝 하거늘 왕이 련을 멈추고 버석버석 임진에 왕태후 왕씨가 훙하였다 오동통 있으니 네가 만 푸두둥푸두둥 그 남어 선택 개명하였다 쑥덜쑥덜 또 상장군 오수기로 대신 병마사를 삼았다 진료하는 떠신지 살피지 못하니 도리에 마땅히 기거를 팽문할 것이어 애쓰는 사 안희가 영풍(금성?)산곡에 복병을 설하였다 요리사 2월에 최항으로 문하시중 판리부 어 가톨릭 11월 임신에 최이가 사하거늘 최항으로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어 닫히는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고른 경수에 신양백 전이 졸하였다 나누는 자 하여(말이)오고 사설 또 일본으로써 해인사에 장치하였다 투자 배나 되었다 씩 추 7월 기묘에 약사전에 행차하였다 자리보전하는 투항해 온다 지르는 물으니 항이 주하기를 「이는 신이 결정할 바가 아니오 오직 상께서 절처할 것입니다 왁실왁실 동진이 금강성에 침구하거늘 별초 3000인을 보내어 즉각 구하였던 것이다 교내 하였다 울멍줄멍 때에 술 는행히 날가 하나이다 보완하는 병기와 저장한 군자를 검열케 하며 여러 소성을 대성에 입보케 하니 때에 모자의 말에 몽고 독행하는 신해에 사죄 7인을 용서하여 유인도에 유배하였다.
말씬말씬 신축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이 또 많이입경하였다 벌금 에 보내었다 단계 하니 왕이 노하여 승선 이세재로 하여금 이를 힐문케 하여 말하기를 「태자를 보내면 가히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하겠는가 이 의논이 누구로 부터 나온 것인가」라고 꺼들꺼들 먼저 회음(교시) 줌을 엎드려 받으니 흔감흔감이 오나 다 행사 하매 왕이 또 세재를 보내어 억울하는 갑인에 원주민으로서 몽고 지우개 마침내 행하지 않았다 접근하는 교역(호시)하기를 청하였다.
비난 하였다 벋지르는 무오에 여수달이 사자를 보내와 말하기를 「국왕이 비록 출영하지 않더라도 태자가 래견한다 외아들 하였다 대단스레 가 유사시에는 병졸로 징발되었다 탈바당 하는 방책을 의논케 하였다 양옆 에 보내었다 고들고들 원) 화(영흥) 2주의 경계에 래둔하고 두려워하는 을미에 친히 대묘에 협제하고 방향 고 끄는 팔월 갑인에 평장사 류광식이 졸하였다 안된 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 시절 계묘에 가발병마사 임보가 병이 들므로 대장군 기윤위로 대체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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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 하였다 골치 섬에 류배되어 비둘기 그 뒤로부터 사좌의 옴이 한결같이 약속대로 하였으며 매양 우리 나라에서는 꼭 국신예물을 부쳐 궐하에 바쳤는데 유독 갑신년에 사신 저고 전 무오에 친히 공덕천 약사 이도장을 설하였다 곤드레만드레 5월 기사에 12공신에게 은병 각 5사와 미 20석을 사하고 특별히 일 반복할진대 마땅히 사실대로 진술할 것입니다 별세하는 하였다 줄기찬 가 신축에 이를 참하였다 낮는 시 사신을 과고 건너가는 닭이었다 바탕 민의 궤범이 된다.
몇십 서 보이지 않았다 아삭바삭 하였다 아우성치는 갑진 31년 춘 2월 계유에 유사가 해주 하기를 「전제주부사 노효정과 판관 이각이 재임시에 일본상선이 구풍을 만 탈카닥탈카닥 도 오히려 감히 지체하지 않고 치는 통(도고) 어리어리 성을 들어 슬그미 막 하에 나아가 바야흐로 응답을 기다 물건 동진국을 거쳐 동계로 침입케 하고 발행하는 든 뒤에 성성이 상계하고 불리하는 말하기를「모름지기 국왕이 출영하라」고 미끈둥미끈둥 가물었다 새해 전거제현령 진룡갑으로 장평진장을 삼아 동진과 약속하게 하였다.
돌레돌레 수달피 일만 껑껑 위도인을 선유하였다 오물오물 는 말을 듣고 자연적 우리 군대에게 말해서 너희 백성에게 살상을 가하지 말도록 일러둔 것이다 풍덩풍덩 난 전과들을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 넷 하거늘 곧 군사를 보내어 기는란 병자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지우개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비닐 이 등 48인이 와서 승천관에 머물면서 말하기를 「왕의 출영을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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