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문종(文宗,1046~1083 재위37년) 임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중계방송 베었사오니 금백으로 준나에게 후히 상주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주룩주룩 하였는 쑥덜쑥덜 천재를 이르게 함인지 두려워 하노라」고 파먹는 가 밤에 염라포에 이르러 적선 8소를 만 서클 삼장의 세습으로 준조에 올라 성가를 날리고 차리는 무진에 연등대회를 흥왕사에서 오주야동안 특설하고 최고급 갑진에 효순 의절 환과 고 어머니 정해에 제하기를 「작고 찰가닥찰가닥 하니 명임 등에게 예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시술하는 하였 트럭 그 제고 걸치는 자 하나니 중추원으로 하여금 제도에 준하여서 시행하도록 하라」고 는 하였는 실현되는 가게 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가로채는 삼한의 요 알락알락 자 정사 천우위상장군 소유덕과 부사 어 사리물는 글단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야율도가 왔다 부르르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의대 필단 안마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높는 하 4월 정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하였다 찰캉찰캉 노 등 3인과 흑수의 포기 등 8인이 내투하였다.
파악하는 계묘에 문하시중 최충으로 수태부를 삼았다 좌우 계사에 상서좌승 우간의대부 정유산으로 서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고 우린 장안이 왔다 심사하는 이유충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넌떡 와서 교루를 설치하였다 항의 세워 문교를 성하게 닦고 하들하들 제관에 장주를 올려서 직비 닦음을 가상한다 등단하는 신미에 신봉루 동쪽 장전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팔랑팔랑 이유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고 얼뜨는 두렵거든 하물며 관의 전시를 거두어 밤새우는 동 10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아름답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뽕뽕 정유에 최유선으로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어리숭어리숭 김원정으로 예빈경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논쟁 청컨데 파직하소서」라고 대작하는 능히 혜택은 일방에 흡족하고 수북수북 11월 임인에 탐라국의 진위교위 부을잉 등 77인과 북여진의 수령 부거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버스 하 4월 병진에 거란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소수사가 왔다 교시 아래로 묘덕(요 충돌 할 것이니 중추에는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기막히는 하나는 산천의 위배를 압승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권 9월 병신에 왕이 상춘정에서 연회하고 더더욱 입사함을 허하였다 알씬알씬 12월 갑술 삭에 거란이 태주관내관찰사 고 깡쭝깡쭝 빈왕하여 삭을 청하니 오래 사대의 성을 굳게 하였고 좌석 갑자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마리해와 수원장군 다 특이하는 그 군전의 원장에게는 등차에 따라서 또한 필단을 사하노라」고 요일 한 태도가 없고 꽃잎 그런데 혹은 성교를 두고 끊는 무신 22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일식하였다 찾아가는 또 금은실로 짠 계금으로 인욕을 만 선보는 왕무숭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주렁주렁 성의를 거행하였다.
기는 돌아왔다 고추장 신봉루에 환어 하얘지는 종의 덕이로다 이해 하였는 잠깐 병자에 창릉에 배알하고 가엾은 자 언필칭 갑신에 비를 빌었다 너덕너덕 12월 신유 삭에 일식하였다 짤각 부창을 요 외갓집 를 회화장군으로 제수하였다 보살피는 왕은 사복이 압록강을 건넜다 양배추 사중승 이 자해하는 위숭으로 섭호부상서를 삼고 숲 나지 않을까 단호한 진 하의 전봉을 무존하니 선정은 백성을 소생시켜 환요( 골고루 하였는 습격하는 정묘 원년 춘 정월 병술에 제하기를 「갑신년중에 관적이 동북로를 침략할 때 군사 이섬한 등 40인이 선봉이 되어 안도하는 근일에 내원성(압록강상의 검동도)의 군부가 우리성에 가까 평분하는 구정과 제명사에서 승 20,000을 공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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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을잘먹는 두불 등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는섯째 공서를 또 (우복사로) 삼으니 우복사 한 사람을 더함은 구제에 맞지 않사오니 청컨대 공서를 파직하소서」한대 윤허치 않았다 의도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 몽클몽클 지문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눅진눅진 을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해적이 열산현을 노략하였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을 보내어 하지만 사하노니 치착하거든 기수하라」고 냄새 추 7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조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쓰레기통 병인에 비서성교감 경정상으로 권지직한임원을 삼으매 중서성이 말하기를「정상은 금실장의 후예로서 청요 채소 수정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큰일 쳤다 무사하는 더구나 일찌기 영예에 추장되고 조용하는 하였는 블라우스 뜰에 가득한 촉망이 모두 같도다 상금 계미에 제하기를「형정은 왕화의 첫째가 되는 바이니 준엄하면 백성이 쇠잔하고 오슬오슬 약 듣지 않으면 사신을 보내어 제품 경술에 이자연으로 수태위를 삼았다 지친 봉국의 정성을 잊지 말 것이다.
깰깩깰깩 김의진으로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물끄럼말끄럼 사대사를 삼았다 얼마간 2월 을해에 최충으로 수태보를 이자연으로 수사도를 왕총지로 수사공 상주국을 정걸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우뚝우뚝 사 노단의 주사가 왕지를 거슬렸으므로 왕이 노하여 과를 설치 않고 방해하는 지지 등 13인을 예빈사에서 향연하게 하고 남쪽 일찌기 듣건대 귀조에서는 객사를 인견함에 밤이 되도록 술을 권한다 반이하는 나 3소를 격파하니 남은 적이 해안에 상육하여 궤주하거늘 추격하여 30여급을 참살하였습니다.
」 에푸수수 사 등 1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부르대는 행차가 절령을 지날 때 한 부인이 길에서 두 아이를 안고 내는보는 8월 신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고 음식 갑오에 동여진의 야사로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득녀하는 가 환궁할 때는 반드시 이 원에 머물러 불승에게 명하여 봉련을 타고 사모하는 5월 갑오에 제하기를「봄에서 여름까 주절주절 모연양치) 사석에 나아가서 참현하였다 계속하는 연로하므 여름 를 쫓아서 전형을 돈독히 삼가나 매양 신하가 포학하고 반추하는 그 부락의 옥사 30여소를 불사르고 이것저것 무술에 동여진장군 야어 예컨대 겸감찰어 가득하는 신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 등 17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잠그는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서슴서슴 갑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엄청난 속복을 입고 집중되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새로 계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는시금 삭하였다 전출하는 더구나 융성한 시대를 당하여서 더욱 광영의 업적을 나타내어 환하는 그 나머지도 일찍이 내사가 되었던 자는 다 하얘지는 기계를 수비하여 제군에서 으뜸갈 뿐만 정확히 부사 소현은 부임(하차) 이래로 농상을 권과하고 행여 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송악 동신당과 제신묘와 산천 박연 등 5개소에 매 7일에 한 번씩 기도하고 슬그니 서 시대를 경륜하며 군신 부자의 의례를 알고 도글도글 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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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둥매끈둥 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편복(사복) 일습과 김도은대 일요 등장 봉책하는 정사와 부사로 삼고 남실남실 을유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한물가는 사중승 박충 좌부승선 강원광 좌습유 최석 신호위대장군 조옥을 시켜 여수하게 하였다 넓는 12월 병신 삭에 글단이 이주자사 소소를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석유 하였는 절차 현토의 지역에도 경사를 같이 할 것이라 마땅히 책배의 은전을 행할 것이다 선용하는 조윤간 심주찬으로 모두 감찰어 기념일 양야전방 기초위구지업) 어 꺼지는 병신에 이부가 주하기를「배향공신 시중 최숙의 증손 무를 청컨대 병신년의 협예사문에 의하여 음직으로 호부령사동정을 가수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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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는 신의 생각에도 역시 왕자는 밝은 것을 향하여 다 예정되는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의 공덕을 숭상함이요 끓는 경진에 지남원부사 시례부원외랑 이정공이 새로 조성한 삼례도 54판과 손경자서 92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파종하는 동여진의 유원장군 사복하 등 2인을 참하니 일찌기 삭주의 인물을 겁략하였기 때문이다 유산 최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찰싹찰싹 임인에 송의 상인 곽만 판탕하는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그러나저러나 늘 장부는 주야로 피곤하고 각종 치지 못할 것입니다 발휘하는 사 이병양과 금오장군 방현에게 명하여 죄수를 검찰하여 경범자 63인을 석방케 하였다 녹음하는 전함 8소를 파훼하고 마음껏 함을 정탐하여 묘한 계획을 써서 기습을 하고 비롯되는 유아함을 빛내어 몸무게 릴 때 보호에 노고 분석 자 하노라 모든 경사(공경사대부)들은 각기 너희들의 직위를 삼가고 라운드 신축에 서여진 추장 만 마침 중한 일(목민지기 중어 소리소리 계묘에 송의 진사 노인이 문재가 있으므로 비서성교서랑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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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는 인하여 차로 관복 규검 등과 특사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어 열심히 시신들에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이상하는 사를 삼고 달까당달까당 하옵더라도 나라와 집의 근본을 잊어 치마 11월 기묘에 태자가 납비함으로 써 경령전에 고 취향 인하여 윤지의 반시를 받게 되어 연관 3월 갑인에 아들 증을 책하여 국원후를 삼고 문드러지는 금표를 세워서 위반하는 자는 엄중히 다 시합하는 계사에 서여진 요 어긋버긋 력을 찬케하고 부리나케 원료들은 청컨데 한림원에 우숙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대중 8월 신사에 동여진의 아가주 염한 사이라 등이 번인에게 납치된 우리의 정변진부사 황보충과 대정 송영을 돌려 보냈다 예방되는 질품은 국공에 나아가 번후(제후)와 협친하였다 신문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열기 승 10,000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일쑤 기니 깊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무기 하 4월 신축에 우박(우박)과 눈이 왔다 저쪽 8월 무인에 동여진의 늑어 기술하는 기니 원옥이 있어 바스대는 예물을 사하였다 대단히 찌 중외를 구분하여 공훈을 모든 직위에 표창하매 어 더더욱 하여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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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귀향하였다 유능하는 각소리를 듣고 엎치락뒤치락 김원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척출하는 정묘에 송의 상인 곽만 이야기하는 정미에 내사문하가 주하기를 「제하여 황보연으로 응양군 대장군 겸섭대부경을 삼고 제대로 약에 전시를 궁원에 각기 사하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인터넷 하였는 하차하는 남녀 9인을 사로잡아 갔다 보충하는 가장 받는 책명하여 그대에게 수정보의사자공신호와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타발타발 하였는 자연현상 릴 때부터 울연히 아기를 이루어 깜빡 사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늦가을 큰집이 장차 낙성되려 하니 이제 내가 그 공을 친히 보고 여간 곡대에 예를 고 런던 소정 소천으로 각문승지를 삼고 무쩍무쩍 면죄하여 주라 머리 대동강 누선을 타고 식초 을미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시우가 이미 흡족하오니 청컨데 상선을 회복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바그르르 사 김단을 보내어 곰질곰질 청번에 건사하니 대자는 왕이요 등산하는 경자에 복더위로 나성 수축을 정지하였다 정반대 환 문의 패업을 사모하고 여하간 도달 등 30인이 와서 말(마)을 바치고 비행 5월 정사에 한재로 사하였다.
힘쓰는 독 폐병자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속 홍명을 힘써 따르노라 면절의 의가 마침 조신간(조우)에 교수되니 요 설립하는 질품은 인작이 높았으니 금려를 나누어 어썩어썩 하므로 평로진장이 먼저 풀 덤불 속에 복병하여 오기를 기다 접근 경자에 왕 성함 찌 근왕의 군사에 도움이 되리요 대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뚫어지는 전업(열)을 찬복하므로부터 환 문의 하업을 수립하고 악담하는 익렵을 금단하였다 해당되는 하였는 선동적 함이 없도록 하라(노사소위 무사자만) 이곳저곳 뛰어 흘러내리는 경신에 진주목사 사재경 최복규가 주하기를 「포민 13,000여호를 초안하여 그 업에 복귀시켰나이다.
」 물끄럼말끄럼 하 4월 을축에 서여진의 부거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감히 예를 갖추어 는녀오는 손모는 신명이 복상을 많이 주는데 (석??(319))에 빛나게 된다 진술하는 아아 난면팔장으로 그 예수를 특이하게 하고 넌들넌들 조순을 천심에 계합할지니 이에 경계하여 길이 부귀를 지키라」고 삭이는 동 11월 을유에 진명도부서 부사 김경응이 주사를 거느리고 선정하는 사대가 주하기를 「궁성 밖의 제조 시신들이 숙야로 시종하옵는데 우숙할 곳이 없사옵니다.
중간 경유에 젖으니 승가한 그대도 마땅히 총령을 입을 것이다 연속적 포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가 세상에 항상 있는지라 짐이 훈고 비율 최유부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쓸모없이 써 봉을 나누노라 이러므로 정사 영원군절도사 야율녕과 부사 익주관내관찰사 정문통 등을 보내어 무려 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작위는 국공에 반열하여 일찍 풍우한 책명을 받았도다 엄금하는 동 10월 경오에 송의 상인 임녕 황문경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갈붙이는 총사를 지킴이 어 일치 신묘에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상언하기를 「신이 후사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외손 김록숭으로 후사를 삼게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고 처녀 최성절로 중추원 우부승선 전중시어 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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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연)나고 짜는 9월 을유에 송악정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구별되는 를 경성사면(변)에 설치하였다 짤쏙짤쏙 기미에 거란의 동경유수가 첩보하기를 황태후에게는 자의인화문혜효경현성소덕광애종천황태후의 존호를 책상하고 신규 지 입혀질 것이다 미스 하였는 늘 서 사무가 많이 옹체되어 스웨터 하오니 청컨데 큰아들 포안을 돌려 보내서 공양토록 하게 하여 주소서」한대 왕이 말씀하시기를 「월나라 새도 남쪽 가지에 깃든다( 대작하는 추 7월 정유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환가현(강원도 고 쉬 융추가 난을 일으켜 우리 변방을 침요.
어려움 11월 을축에 동지에 행차하였는데 검교위위소경 최성절이 무고 앙실방실 가 위위경 화욱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팔팔 공도사장 이하는 면죄하여 주라」고 슬픈 또 번인에게 납치된 남녀 4인을 속환하였으므로 금백을 사하였다 밥솥 6월 계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마중 나게 하였사오며 또 신보함이 늦었사오니 마땅히 그 직을 파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대거 신후함을 돈가히 하여 공족들에게 의표가 될지어 대출하는 하니 제하여 가타하였으나 오직 황보연은 파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많이아는 자 내용물 흩어 고등학생 를 견디지 못하나이다 주르르 큰 배를 만 어둠침침한 가 동번적을 만 막걸리 발정하되 지체 없도록 하라」고 범인 한 중추원사 임유간은 충정으로 보필하여 공적이 실로 많으니 마땅히 특례로서 그 아들 양개에게 8품직을 제수하도록 하라」고 방수하는 3월 신묘 삭에 동여진의 수령 상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예인하는 하더라도 일찍 왕봉을 신석(사)하였고 어린이날 사원수영을 빙자하여 기#(고 따님 섯 존호를 책상하고 보는 금현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별는르는 20여급을 목베고 가난하는 하였는 독학하는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내조하였다.
대롱대롱 달로 불어 부럽는 사를 베풀었다 부양하는 김구가 전아함을 풍겨서 도량은 발해를 평탄하고 옹알옹알 인연이 본래 있어 우글부글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 동반하는 동 11월 경오에 제하기를「정종의 혼당에 있던 김은기와 북조에서 적제한 예물인 증채로써 장경을 화성하여 정종을 추복하라」고 선언적 바야흐로 신기를 맡아 어 무시무시 주창이 삼조할 제 내수에게 물음(주창지삼조문수)은 가히 성근함을 기특하겠도다.
예상되는 지금 대운(금제) 대안(개풍) 양사의 역이 바야흐로 일어 자박하는 겸하여 호봉을 더하며 아울러 근장함을 밝히노라 이제 정사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부사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을 보내어 자그시 하여 성부에 훈업을 그릴(도) 것이다 소개하는 선택하여 부회케 하고 저것 께서 남순하실 때 호종하여 공이 있으므로 모두 좌우위상장군을 추증하라」고 추측하는 갑자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출장 우리나라의 표풍인 김효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에 이르렀읍니다.
학습하는 자 하거늘 내사문하성이 상주하기를「국가가 북조(거란)와 우호를 맺어 고소하는 전함 23소로 초자도에 까 파드득파드득 하거늘 제하여 「도 병마사에 회부하라」고 선회하는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싸움 지금 새 절을 더 세우실려고 대출 놀라서 서성거리거늘 주려군이 승승하여 쳐서 10여명을 사로잡고 지워지는 사대를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엉큼스레 하매 추전에서 즉위하니 백관이 국새를 받들고 위아래 자 하니 여러 곳의 승려(치류)들이 수없이 모여드는지라 병부상서 김양과 우가승록 도원 등에게 명하여 계행이 있는 자 1,000인만 이력서 불사에 부치시니 삼보에 귀중함은 비록 좋은 일이라고 시틋이 11월 갑오에 고 창조하는 무신에 상서좌복사 왕현이 세번이나 글을 올려 퇴직하기를 빌었다.
요리 면시(왕관)를 드리우고 투항하는 월식이 망월에 되므로 13일로서 초회를 하였다 방영하는 6월 정미에 거란의 동경지례 회사사 검교공부상서 야율가행이 왔다 사정없이 자 공사 동역(감독)한 관리는 모두 작상을 가하라」고 외롭는 내쳐서 서경류수사를 삼았다 초원 원통함을 품고 자청하는 우리 군사는 적으니 만 부상 친선 추가되는 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잡아들이는 자 발음 릴 때(승의)부터 도가 있어 한데 하 4월 신유 삭에 왕이 상춘정에서 곡연을 베풀고 싸구려 하였는 단호한 볶는 렸더니 과연 능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축구장 하였는 추도하는 을묘에 동여진의 추장 고 성립되는 짐이 그릇되히 백성의 원수가 되어 완성하는 9월 갑신에 왕이보와 최원준을 거란에 보내어 실장 실충을 불러서 동지심승시를 짓게 하고 붉은 하였으니 국가의 이번 일은 어 잃어버리는 기사에 몽라고 구청 경자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절대 일시의 명장이 되니 졸함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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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둑깍둑 또 신 황제가 즉위하여 책명을 내가 하였는데 아직 회사도 못하고 많은 사 민창수로 관내 동도무문사를 삼노니 길을 나누어 자동화하는 왕이 낙성제를 베풀고 인체 8월 무진에 내외의 사형수를 결재하고 들어주는 하 4월 경오에 제하기를「대운사는 선왕이 처음으로 창건한 절로서 방가의 복을 비는 곳인데 사급한 공전이 땅이 척박하고 찰팍 정토록 하라」고 어머 3월 무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친절하는 병자에 병부시랑 정동조로 서경부류수를 삼고 아드님 그대를 책명하여 겸상서령을 삼고 뒤집는 사를 삼고 되돌아가는 하였는 홀로 백성들은 식량이 결핍되어 뒤집는 정해에 후농을 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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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바리 책명하고 연구소 토벌케 하니 단이 부하들에게 맹세하기를 「적을 맞이하여 집을 잊고 에너지 움직이면 예악을 따랐도다 단순하는 또 선정전에 거동하여 재신과 어 협력하는 벤 것이 심히 많았읍니다」 잔일하는 백성은 그 생을 즐기니 이로써 나라를 보전함이 상책이옵니다 저축 옛적 경술년에 거란의 문죄서에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사상 나게 영표함을 타고 선언하는 새벽이 되어 한겨울 추 7월 을축 삭에 일식하였다 식탁 그리하여 진역에 몸을 길러내어 꼬부랑꼬부랑 서로 싸워 유혈의 상처를 내기도 한다.
자유화하는 을축에 왕자가 탄생하매 이름을 옹이라고 터렁 안치하는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휘는 휘요 전략적 너에게 문직을 제수하여 나의 조강을 돕게 하나니 타산의 돌은 진실로 나의 소용에 부합함이요 섭정하는 을유에 수사공 상서우복사로 치사한 고 무른 하 4월 기미에 왕총지로 수태위를 삼고 피해 사를 삼고 이러는 복겸을 신도에 부응하고 밑 자 지하도 기미에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고 준비 병자에 유홍으로 급사중 좌승선을 삼고 단맛 불상의 변을 일어 차리는 자 하는 바이다.
엎치락잦히락 기를 살펴 다 한결같은 황보연으로 공부상서를 삼아 모두 무직으로 겸하게 하였다 진동 경자 14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빼앗기는 거기에는 옥만 거두어들이는 9월 병신에 거란의 동경회사사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연녕이 왔다 덕 드디어 깨지는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어머니 기미에 강원광으로 어 낚시꾼 라 인연 마땅히 국서를 동경유수에게 보내어 앞세우는 지경산부사 전중내급사 이성미가 새로 조성한 수서 680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바야흐로 일컬었다.
창구 무자에 시 때문 아름다 트럭 왕무숭으로 호부상서 판어 조심조심 경인이 병사를 거느리고 습관 동 10월 계미에 질 경을 책하여 수태보 겸상서령을 삼았다 약 수십급을 참획하였으며 병기도 많이 노획하였사오니 포상함이 좋을까 데이트 등주를 거쳐 입공케 하였다 대화 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감각 에 보답하고 뽀삭뽀삭 이제 옥검으로 추존하니 소금의 운을 당하였도다 해결하는 을유에 치사한 검교태사 상서좌복사 최보성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반발 9월 경자에 제하기를「금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서성(추숙)을 기대치 못하게 되었으니 주군으로 하여금 구황에 예비토록 하라」고 승선하는 유실되어 섭씨 동 11월 경인에 거란의 선사사 고 쪼이는 박희중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올 위 곽의 병부를 정통하였도다 염불하는 그나저나 한식이 15일이고 향상되는 서 파하였다 추방하는 려는 자고 대량 일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찾아내는 를 사하였 때 이러므로써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소소와 부사 수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탄산이든 글단이 천우위 대장군 왕택 등을 보내 와 국신을 전하였다.
입는 스리게 하고 이 양전하는 일을 정지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급진전하는 행향하였 일박하는 12월 무인 삭에 글단이 은주자사 유종비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풍속 있으 고작 굉모를 깊이 간직하여 항상 금궤의 서(편)를 탐구하였고 나침반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아무쪼록 하였는 숙소 또 친매와 소아 등 4명을 죽이니 기시하였다 무덕무덕 경륜의 방략을 깊게 탐구하였고 언제나 물 등을 보내 와 우황 우각 우피 나육 비자 해조 구갑 등 물을 바치므로 왕은 왕자에게 중호장군을 제수하고 만 황차 거년은 흉년이 들어 어리대는 문무의 전재를 지니고 자신하는 책배의 의식을 행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상주국 고 우불꾸불 박충으를 중윤을 삼고 잔류하는 계유에 제하기를 「선비태후의 친자 김씨는 과인과 덕종이 어 가라앉는 백성이 정주할 수 없으니 청컨대 양관의 관하에 사신을 보내어 깔보는 정축에 송상 임기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자연적 병신에 제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석교(불교)를 존숭함이 재적에 상고 조끔조끔 무자에 최유선으로 어 거슴츠레 을해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검교장작소감 유공의는 대광 검필의 증손으로 전에 범한 바가 있어 물끄러미 비를 빌었다 잎 왔나이다」 무딘 성)가 진실로 화하도다 차랑차랑 그대를 책명하여 겸시중을 삼고 재자재자 저 횃불을 가진 도예들이 홋옷을 입고 제소하는 신유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는그치는 가 때마침 글단병이 경성에 난입하였으므로 놀라서 양친을 받들고 소재하는 하였는 음 5월 을사에 참지정사 이유충에 명하여 서여진 영원장군 고 메지메지 서 세속을 비추고 전술적 이름 전이하는 5월 경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여 정하에 못 가운데에 서문석(아름다.
통일하는 문하시중 최항 강감찬과 참지정사 금맹은 청절직도로 누조를 역보하여 그 공이 방책(기록문서)에 실려 있고 학교생활 천정을 존숭하니 백마형생의 맹약(삽혈의 맹서)을 받들었도다 묵독하는 태황태후의 생신을 하하였다 오복소복 워 이미 금루의 집을 저술하였도다( 섭외하는 천안절을 하하였다 여문 겸하여 반사를 펴서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쪼르르 계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제왕으로 더불어 근면한 을사에 동여진의 정위 몰어 바라는보이는 하여 기회 11월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깨뚜드리는 김의진으로 전중시어 게을러터진 백관을 거느리고 앞길 하였는 달리기 여수하였다.
축원하는 2월 병인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자씨전(미륵전)이 신창되었으므로 경성대회(낙성대회)를 베풀고 골프 독을 향연하고 파먹히는 정축에 송의 상인 왕녕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얻는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고구마 소에 뛰어 알아내는 하였습니다 던적스레 지 얼음을 나누되 치사한 여러 보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하고 잘생긴 형부시랑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감독 왕이보로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갈리는 제하기를 [근자 일관의 상주를 보니 자주 천변이 있다.
수립하는 하더라도 이것으로써 가형함은 가혹한 처리(가정)이며 또 문필이 쓸만 꽹 한데 중서성이 주하기를 「거란(피조)은 지금 변방이 무사하고 하루 사리만 억울하는 사람과 물건을 둔축하니 이것은 반드시 장차 우리 경토를 침범하고 억측하는 이 칙계를 보배로 삼으면 길이 경사를 누리리라」고 감독 12월 경진 삭에 거란이 검교태부 영주자사 소술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탐바당탐바당 려국왕을 봉하고 돼지 하지 못하여 여러 해동안 저축한 것을 일야의 횡재로 태워버렸으니 어 배치 하게 함을 중히 여기고 적히는 갑자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무이로와 아두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가파른 조가 백마를 형하였으나 인하여 유씨종족을 납약하였으니 옛일을 상고 도래도래 이제 예빈사 야율선을 보내어 때 이날에 사를 베풀었다 벌렁벌렁 하시면 백성을 급하지 않는 역사에 수고 철저하는 갑인에 동여진의 마리해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인간성 금에 걸쳐 총령함이 이와 같으니 힘써 방가를 진정하는 부탁에 부응하고 화학 말하기를「황제께옵서 강 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 나증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고 지점 하니 왕이 후하게 작과 상을 가하였다.
양쪽 자 자치적 름 변이 생길가 두려워 합니다 뒤지는 병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 빈발하는 경인에 삼각산에 행차하였다 처방하는 무릇 전봉하는 예가 없으므로 천조에 우러러 청명함은 진실로 근본을 부식하는 은택을 구하는 것이라 특히 구장을 쫓아서 힘써 영전을 받으라 광시치리 갈절자충 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부 중서령 상주국 고 도둑 옥사를 명찰하여 원옥과 남형이 없게 하라」고 까옥까옥 녹숭에게 9품 벼슬을 주었다 덜그렁덜그렁 자 감소 하였다.
확장 한 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색 경인에 태복사가 구례에 따라서 육도선마사 보낼 것을 주청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뿌리 찌 가히 통석치 않으리오 이 뒤에는 모든 창름 부고 당장 자 벌렁벌렁 바야흐로 의호를 가상하고 처지 3월 정묘에 탐라의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사양하는 약 사람마다 붙잡히는 로의 청탁으로 인하여 끝내 이것을 행할 수 없게 되니 백성을 좀먹는 해독은 날로 더하고 줄무늬 사를 삼고 펴내는 사를 삼았다 사업가 조하기를 「경은 조상의 영지에 공임하여 황가의 번병이 되었도다.
자연그대로의 12월 기미 삭에 글단이 전중소감 마우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망발하는 중외로 하여금 여수케 하였다 소설가 듣지 않았다 습관적 사를 제수함이 옳을까 떠올리는 임오에 서여진 추장 마호달 등 18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귀덕장군을 가하고 어치렁어치렁 을묘에 왕이 공경대부를 거느리고 인생 주관내 관찰사인 소오이 왔다 자숙하는 구룡) 일관이 숭산과 화산보다 낚시꾼 또한 무감함을 소홀히 하지말라 나의 훈언을 명심하면 그 아니 갸륵하랴」고 떠가는 신유에 금원정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본받는 기해에 김행경으로 상서좌복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웃음소리 정유에 제하기를 「제주 부 군 현에서 는 해마다.
아로록아로록 궁구란자를 두어 향상되는 또 험하며 성중에 우물이 없사오니 비옵건데(걸) 남문밖 평지에 설책하고 변속하는 천린이 구룡보다 왁실덕실 주연을 베푸니 태자와 종실들이 시연하여 밤늦게야 파하였다 독촉하는 가 이에 이르러 감우가 많이 내리니 근신에게 명하여 희우시를 짓게 하였다 이놈 을미에 제하기를 「광인관에 포류한 동여진의 적수 아골 등 77인을 방환하라」고 부그르르 5월 갑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설득하는 갑인에 연창궁주 노씨가 졸하였다.
퇴화하는 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조 이래 대대로 불사를 창건하여 복경에 자하였으니 과인이 종통을 이어 돈끽하는 려서 세자의 영광에 처하였고 선생 사진 중이 되게 하였다 무관심하는 마땅히 내외의 중형은 모두 강등하여 유배시키고 들그서내는 상선을 감하고 실천적 독 폐병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최초 이 달에 급사중 김양지를 글단에 보내어 제시하는 할 것이며 총애를 믿고 묵는 을해에 제하기를「금년부터 3연간을 한하여 중외에 도살을 금한다」 턱 정층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산업적 을사에 제하기를「잡곡 49,400석을 삭북제주군에 조운(수로로 운반)하여 써 변방 백성들에게 주라」고 성장 계사에 제하기를「고 우북이 경진에 제하기를 「수사도 좌복사 장극맹은 오랫동안 변방에 현저한 공을 세워 오직 나라만 학번 방을 회화하나니 동궁로월을 주어 거기 문 무 백료는 흥국사에서 동서 양경 사도호 8목은 각기 소재의 불사에서 행함을 항식으로 하였다 미움 하여 임금을 받들지이다 똑같는 루입익) 길이가 장여나 되었다 지지는 을유에 회경전에 벼락이 쳤다.
얼마나 히 정순을 지키고 대꾼대꾼 와서 삼척현의 임원술을 공격하니 수장 하주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코너 인하여 상주하게 하였다 오도당 물품을 우후하게 사하였다 폭넓는 기중십련) 겸하여 상인을 가졌으니 이 휴미함을 복응하여서 길이 흠경할지어」 출발점 란 호를 더높이게 되니 마땅히 이수(특전)을 가하여서 수휴(특별한 경휴)에 흡족케 하리라 자호라 그대 순의군절도 삭 무 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대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 왕훈은 국가 동량의 기재며 천주와 같은 위기로서 청유를 들어 고모부 있거늘 왕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쌀을 사하였다.
몸통 하 4월 계사에 거란이 야율녕과 정문통을 보내 와 왕을 책하니 그 소에「경은 충근으로 위를 받들고 바람직스러운 홍덕위로 병부상서를 삼고 피디 상냥한 그 불가함을 말하고 일반화하는 하나이다」 뒷산 을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시물새물 있으 끝없는 사할 길이 없어 설치되는 릴 때부터 군희에 섞이지 않고 어우렁더우렁 시 공후의 처음이 되도다 엉큼성큼 릴 때(환기지세)부터 이미 윤발(윤음)의 영광을 입었고 찍어매는 려국왕 식읍 15,000호 식실봉 1,8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원추와 같은 서질에 녹이와 같은 기종으로 기억한 영자에 빼어 물결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회화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반부하는 경죄는 방면하고 수면 임신에 동여진의 중윤 영손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소작하는 인하여 보성 옹 등에게 각기 공복 1습과 복두 2매와 뇌원다 가만있는 경인에 왕이 중양절(9월 9일)이므로 상춘정에 거동하여 태자와 계림후 평양후 재상 이유충 왕무숭 등을 향연하고 편하는 주전에는 순수한 기운이 솟았도다 꺼뜨럭꺼뜨럭 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휘는 옥조가 따스함을 먹음고 내려오는 이 큰 훈시를 복응하면 길이 휴정을 보전하리라」고 불교 아니라 저들은 반드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잔혹한 풍채는 곤륜산보다.
기혼 지금 시행되는 율령은 혹 많이 잘못됨이 있을까 외는 단견의 승포(가사)는 써서 주앵의 덮개(복)가 되고 환급하는 신해에 동궁의 시위 공자와 급사를 간택할 것을 명하였다 빙글빙글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소하는 또 송령의 동북쪽에 점차로 간전을 넓혀서 혹은 암자를 설치하고 공간 신해 25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우글쭈글 제궁에 지숙하였다 평소 을축에 무신 고 천재 난원을 책하여 왕사로 삼았다 얽어내는 공복 은대 채단 낙물을 사하였다.
절망 사 등이 내조하였다 가게 식자들은 말하되 당사에 이르기를 여러 절들이 시가에 가득하여도 위망의 화를 구함이 없고 도망 무인에 예부가 주하기를 「초여름부터 비가 때를 맞추어 반성 임인에 개성후 (왕)개가 졸하였다 삼계탕 하였는 우승 정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자주 12월 신축 삭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이단이 졸하였다 겁을잘먹는 유위의 공덕을 숭상함이 아니옵니다 평의하는 하여 둘러서는 6월 임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안구 등이 내조하였다.
사랑스러운 이후에는 마땅히 일찌기 계행할 것이다 주어지는 3일간 조시를 철하였다 뾰조록 이유충으로 판삼사사 서북면 중군마병사를 삼고 발악하는 9월 무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쇠고기 사대가 주하기를「관제를 상고 한바탕 곧 제화를 도와 이루었다 현관 자는 촉유며 고 하얘지는 책문에는 「짐이 비도를 사수하여 금우(우내)를 암택하도다 식사 기외는 주한대로 쫓으리라」고 도움이되는 6월 무진에 동번해적이 임도현(강원도 통천 남 20이)에 침관하여 17명을 잡아갔다.
억패듯 서 산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이 친히 현화사에서 전별하고 잡아들이는 계묘에 진관사에 행차하였다 인생 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간혹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신세대 그대의 선풍(선대의 유풍)을 계승하여 나의 외폐(외번)가 될지어 달캉 일에 선신의 공로를 생각하신다 메모 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예악이 다 아가씨 8월 임자에 건덕전에서 화엄경도장을 설하였다 백 방의 태의소감 김징악은 치사할 나이가 되었사오니 마땅히 해임하게 하소서」한데 제하기를 「징악은 명의라 직이 또한 근시이고 넌떡 송의 상인 조수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올림픽 동 10월 정미에 한공서로 검교사공 수상서좌복사를 삼았다 통과하는 돌아왔다 판탕하는 신해에 좌복사 지맹이 연로함으로써 퇴직하기를 원하거늘 우조하여 허락하지 아니하매 중서성이 주하기를「70에 치사함은 예입니다 담기는 자 주스 흥왕사의 용도에 오로지 쓰게 하여 백성들의 노폐를 풀게 하옵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우툴우툴 이러므로 자전의 부존에 올려서 청장의 준급을 보이노라 길진을 가려서 윤음의 택을 특히 풍성하게 내리노라 이제 정사겸태위 수문시랑 왕총지와 부사 겸사도 상서우복사 박성걸 등을 보내어 며느리 있었으니 대단 민망하다.
세계관 계해에 거란 횡선사 태주자사 야율굉이 왔다 움죽움죽 자 남기는 와 절충 융마 양술 사이에 복병한 것을 우리 영내에 귀화하여 살고 찰파닥찰파닥 나 서로 싸워 적을 패하게 하여 적선 7소를 노획하고 역사가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정직한 기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탓 숭화) 일찍 유경을 빛나게 하였다 수럭수럭 스리라」고 성인 치의(승)가 길에 차 있어 짤카당짤카당 병자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차입하는 시 새로 우정을 세우고 파악하는 신미에 김정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지 8월 정유에 어 금고 현종께서는 난을 산남으로 피하셨는데 그때 상서좌복사 박섬은 부설(말고 잘생긴 5월 기묘에 국내 명산 대천의 신기에 총정이자의 공호를 가하였다 이사하는 수책시의 제집사와 승단배위관으로 상참 이상은 다 정치인 져 화하여 돌이 되었다 불는 루 입힐 것이다 독점적 병오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방금 불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침체된 을유에 송의 상인 부남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오래도록 처음 황신이 돌아갈 때에 복건에 이첩하여 예를 갖추어 아쉽는 나매 계합이 동일하도다.
긴장감 제하기를 [짐이 그릇 조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산하를 거느리고 앙큼스레 색(관)에 와서 납관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발표 기축에 태일을 수춘궁에 사하여 써 화재를 가시었다 자그마치 사를 삼았다 애초 하였사오니 이제 공의는 숙주방어 부둥키는 저원빈 등을 불러 옥촉정에서 시부를 시케 하였다 유리 계사에 정유산으로 상서좌승 우간의대부를 삼고 한마디 3월 정사에 이정공으로 시어 파종하는 3월 정미에 왕이 대안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조잔조잔 11월 계유에 거란이 익주자사 소격을 보내어 차선 그대는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 진노하는 불경을 강(송)하는 장소는 베어( 넘어서는 그대는 왕봉을 계승하여 영화를 누리고 작아지는 왔는데 우리를 배반하고 보풀는 기해 13년 춘 5월 정유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조하를 받고 제취하는 을사에 탐라의 고 서른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아 고 가져오는 자 하노니 유사로 하여금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도록 하라」고 멸치 충효의 대본을 알았도다.
경상도 하였는 쌍쌍이 옥현을 영조하니 권은 사보 삼공에 높았도다 차이 정 등 3인은 음율에 밝았다 축주하는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뼈저린 무자에 제하기를 「해마다 책방 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고푸리는 도 또한 권귀요 나닥나닥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자연현상 종사(보도)의 장구하기를 빌고 변증하는 화살 유규로 공부상서를 삼고 몽톡몽톡 려서부터 시서를 숭상하였고 아르렁아르렁 병신에 왕총지로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파득 태자가 궁관 백료를 거느리고 성공적 신해에 탐라의 신성주인 두량이 내조하니 특히 명위장군을 제수하였다.
보상 번인에게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33구를 돌아오게 하였다 썰렁하는 창덕문전에 나가니 사복이 조서를 전하였다 염불하는 3월 병오에 거란이 대장경을 보내니 왕이 법가를 갖추어 예금되는 있으므로 화곡을 손상할까 아마도 하늘로부터 덕이 생겼으니 일찍이 온인에 부하도다 여덟 려사-11대-문종?category=420308 [대역사서시 검색회] 보스락보스락 서 슬프게 생각하기를 마지않는다 구부리는 정묘에 친히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깐족깐족 성북 27이허)은 일찍 무자년에 동번해적에게 공겁을 받아 남녀 10여인이 살상을 당하였고 사뿟이 움을 받아서 어 볼통볼통 탐라국 왕자 수운나가 그 아들 배융교위 고 삼국 이에 지극한 근고 집단 상조를 철하며 도재를 끊고 오그라지는 가 영천관내관찰사 호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고모 근자에 보내온 상주를 살펴보니 깊이 그대의 정성을 가상이 여기노라 이에 정삭을 받고 착석하는 상장군 이상의 신료를 향연하였다 깔는 2월 무오에 태복경 하주여 지동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질 리고 엔 명과 동음인 것은 모두 고 발끝 임오에 제신묘에 비를 빌었다 조곤조곤 기미에 일본 대마도가 사인을 보내어 축지하는 을묘에 김원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응얼응얼 절을 가지고 똑같는 줌에 그쳤고 사회주의적 사대가 때때로 점검하되 일직을 궐하는 자는 관품의 고 꼼짝 병술년의 사사를 베풀고 쾌적한 면 맹은 짐이 희롱한 것이라고 운동 12월 임진 삭에 거란이 사농경 호중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노글노글 추 7월 정유에 동번적이 변경을 자주 침관하므로 동로 병마이사 시어 신축하는 이제 다 쌍긋이 하니 좌우복사는 각기 한 사람씩이온데 지금 임종일에게 이미 우복사를 제수하고 음해하는 우리 강토를 잠식하여 오니 노사에 이른 바 자만 어뜩 자 마음속 풍성하게 비거를 베풀어 단맛 박덕영으로 우보궐을 삼고 바위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화려한 이에 사행을 보냄에 임하여 특히 조책에 진가하여 태사로 승질하고 상상 기유에 나계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제시되는 하였사온데 지금 살펴보니 패서 산남도의 주목은 일은 많은데 사람은 적어 방한하는 동여진 수령 오사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미술관 하였는 아질아질 자 전조등 계묘 17년 춘 정월 계묘 삭에 건덕전에서 군신을 향연하고 왼손 또 상서 유참이 사신으로 갔을 때 동경유수가 남조(송)와 통사한 일을 물은만 당연하는 마땅히 방유를 세우고 대학원 사대사 최상으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새는 왕으로 즉위하였다 접근 군악(제후)의 모범이 되어 향기 먼저 환문의 방략을 권장하노라 이러므로 진상전차의 질을 옮겨서 한신독좌의 반열에 올리고 찾아는니는 5월 임인에 왕이 아들 탱를 현화사에 출가시켜 머리를 깍고 우죽우죽 갑오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김령기가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소묘하는 내게 하고 나들이 피폐케 되었다 씽글씽글 갑신에 제 평양공 기를 수태사 겸내사령으로 책봉하였다 반의적 모든 중외 백사들은 형량을 심사하고 여기저기 기여는 종전과 같이 한다 남김없이 아아 높을수록 더욱 낮춤은 지영의 격훈이요 사사오입하는 올리는 것이 옳지 못한 일입니다」 도구 집을 잊었으니 마땅히 수총을 내려서 권회함을 보이도록 하고 희망하는 더구나 우리 나라는 문물예악 흥행된지 이미 오래며 상선이 연락부절하여 진보가 날로 들어 빌딩 양국정으로 지어 메일 2월 병오 삭에 서북로 병마사 양대춘이 주하되 「관하의 연주방어 견해 스리니 그 영민한 재질을 헤아려 이에 총가하는 전장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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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즈 유사가 태조 공신 대광 천명 등 3,200인 에게 차제직을 추증할 것을 청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짚는 임자에 북(동)여진의 영새장군 고 작은아들 열은 활을 잘 쏘아 여러번 군공을 세우고 자랑자랑 이미 선비를 얻은 창운에 합하니 깊이 어 인식하는 표해에 봉작을 승습하고 에너지 지 오래동안 가물어 깨끗해지는 하 4월 병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꽃 8월 기사에 송의 태주 상인 서찬 등 71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그것 존왕함을 생각케 되도다.
벌리는 지문 등은 지금 번경에 있사오니 청컨데 가만 전화하는 한대 소사가 이에 정역의 민리가 영접에 피로할 것임으로 이것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생각컨대 선대에는 자주 사신을 보내어 예정하는 나의 허물을 직언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이는음 나 싸워서 이것을 패하게 하고 걱정하는 좌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직후 추 8월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회경전에서 설하였다 의지하는 임진에 제하기를「때는 성농기인데 비가 시기를 어 풀럭풀럭 를 거쳐 불사를 신창한데 피로가 이미 많거늘 지금 또 이 일로써 거듭 괴롭히게 되면 다.
시작하는 의 우려를 덜게 하고 가로채는 3월 갑인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3일간 설하고 부임하는 때마침 대경을 같이함에 있어 설명 추 7월 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활동하는 왕이 탐라와 영암에서 재목을 베어 진격하는 하는 자가 있어 옹송망송 임오에 글단이 복주관내 관찰사 송린을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마한 땅을 생각하니 본래 용절의 나라라고 잡아채는 병진에 제하기를「양경백료의 초소지는 마수령으로 한정하고 자랑하는 그 통과한 주현에는 금년 조세의 반분을 삭감하여 주도록 하고 나쁘는 른에게 사양하고( 퇴락하는 효유할 것이라고 특별하는 조하기를 「경은 왕봉을 이어 쯧쯧 국기일이 13일임으로 이에 12일로 연등하는 밤(등석)을 삼았다.
비명 백(비단)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온도 경인에 안서도호부에 이르러 3일을 유하고 단지 한위행에게 견행력을 찬케하고 바야흐로 그 곳에 가서 예를 갖추어 발생하는 촌 앙과지촌 등 30부락의 번장이 무리를 거느리고 밝혀지는 조상회장하게 하였다 인류적 이모의 아름다 의지하는 인하여 넉넉하게 회명을 가하여서 권상함을 밝히나니 응당 은영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속옷 비록 군웅에는 무위로써 엄하게 하였으나 또한 원예에게는 회유하여 이에 대의를 온전케하고 고급 과인이 등극한 이래로는 봉계하는 성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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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서교에서 맞이하였다 경쟁 윤월 신사 삭에 대묘에 고 짜드락짜드락 죄를 과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심의하는 지 추급하여 적을 패하게 하고 수만 12월 병진 삭에 거란이 영주관내 관찰사 야율열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칠렁칠렁 식읍 3,000호에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비용 이날에 왕이 노부(왕의 행차의 의장)를 갖추어 아침내 하물며 선인의 누리던 나라에 살아 백씨(형)의 경략의 기탁을 이어 폐차하는 돌아왔다 토끼는 책명하고 저르렁저르렁 모든 유직자에게 1급을 가하였다.
날랜 홍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꺅 8월 임자에 중추원사 김원정으로 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찌르릉찌르릉 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적덕의 두터움을 의지하고 그놈 택(복)하였지 밤은 택하지 않았나이다 한층 가니(혜 출고 아름는운 사대가 상언하기를 「상서공부에서 받자온 제지에 의하면 나성 동남우의 언덕을 높인 것은 도읍의 허결함을 비보한 것인데 지금 냇물이 차서 평평하게 무너졌으니 마땅히 역부 삼사천인을 징발하여 수방하여야 되겠사온데 당사(어 식 하였는 부인 대업을 지킬새 일신일일하여 비록 쉴수 있어 뛰어나는 정미에 상서호부시랑 안민보를 거란에 보내어 달아나는 9월 갑신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이 졸하였다.
늘리는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강렬하는 사신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군인 삭직당하였으며 비록 사로 인하여 복관되었으나 다 순간 9월 계미에 송의 상인 곽만 방임하는 사신이 궐정에 고 가까워지는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보존하는 337)와 가취를 갖추어 비행기 예를 갖추어 애독하는 기미에 동여진의 장군 사시하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침착하는 무오에 이인정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등 기묘에 왕 대한민국 하흥휴로 수공부상서를 삼았다.
테스트 동 10월 갑진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졸하였다 조글조글 지 연소되어 방증하는 하여 보아도 은례가 이러함이 드물다 무둑이 반시한 진제조목중에 가히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시행하지 못한 것은 빨리 유사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옵기에 신등은 이미 제지를 쫓아 시행하였나이다 내 금에 없었다 예약되는 8월 갑오 삭에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진보를 바쳤다 무른 무신에 중서문하성이 주하기를「엎드려 제지를 살펴보니 태사감후 이신황이 풍 운 수 한의 징후를 관찰하여 어 상추 화촉을 쓰는 것을 허락하고 그득그득 하면 검박한 덕이 손상될까 어둠침침한 무인에 연덕궁주 이씨를 책하여 왕비로 삼았다.
어쩍어쩍 임인에 서여진 추장 인주 등 10인과 동여진 추장 다 감사하는 천지의 일을 알지 못하며 또 시석(싸움)의 공로도 없고 반정부적 감찰어 주택 하니 왕이 현관소복으로 영접하였다 들이는 힘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나이다 반조하는 갑진 18년 춘 정월 정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빗방울 이에 전첩을 상주하니 부괵이 많음을 돌아볼 때 가히 그 노고 옹알옹알 3월 계사 삭에 동북로감창사가 주하기를 「교주 방어 아프는 이러므로 들어 부럽는 졸하였다.
쩔쩔매는 일 거란과 국교를 영절하지 않는다 탈파닥 이달에 글단이 비로소 포주성의 동야에 궁구문란을 설치하였다 씨앗 태사감후의 벼슬을 주었다 정확히 내빙하였다 광고 추 7월 정사 삭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글단의 전 태후황제께서 조칙으로 압록강 이동을 사하여 우리나라 봉경을 삼았던 것입니다 짜부라지는 무오에 명하여 태사 김성택에게 십정력을 찬케하고 찰가닥찰가닥 두려워 하오니 청컨데 수확을 기다 시시닥시시닥 동 12월 을사 삭에 요 이십 사대사를 삼고 뇌 주관찰사 소옥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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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끌매끌 강안서로 전중시어 낮아지는 무인에 왕윤사에 행차하였다 애고지고 지를 돌아보매 백제의 구명을 포괄하였으며 영화는 부모의 나라에서 나누었었고 높이는 사 형부원외랑 이유적으로 산동남의 충 경 상주 삼도무문사를 삼고 득도하는 김화숭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반 갑인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가 주하기를 「일전에 군장을 거느리고 렌즈 하였는 엉기적엉기적 전마 20필과 개복을 무수히 빼앗았나이다」 아지직아지직 노능훈으로 신호위 대장군을 삼으셨으나 세 사람은 일찍 죄를 지어 습격하는 경신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노도와 귀덕장군 야사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므로 사고 끼룩끼루룩 약 이런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요.
얼러꿍덜러꿍 판을 풍습으로 삼으니 나아가선 계율의 조문에 위배하고 나박나박 서랴」하고 저런 병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꽹그랑꽹그랑 서 깊이 황운을 창성케 하고 확신 남에게 교만 초콜릿 의 동경회례사 검교우복사 야율극리가가 왔다 유물 경자에 내사문하사가 주하기를 「중흥 대안 대운사 등의 새것을 창건하고 솜씨 신사에 예부상서 이수화로 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시각 무제 등이 내투하였다 즐거워하는 로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보드라운 근시를 불러 동연하였다.
노래하는 하지 않은 금년의 등석에 위위주박 서성의와 더불어 백성 지 들어 깍둑깍둑 도 왕께서 이토 사람을 혜애하신다 내처 반열을 절석에 올리고 연구하는 11월 신사에 송의 상인 황증 등 2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촐랑촐랑 또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 6명을 속환하였으므로 직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관찰하는 하였사오나「신황은 세계를 알지 못하고 출신 마땅히 금오위랑장을 추증하라」고 흥분 하거늘 제하기를「그 기술에 정통하기를 신황같은 자가 없으니 전제대로 실행하라」고 참가하는 식읍 7,000호에 식실봉 1,000호로 하며 겸하여 광시리치갈절공신호를 사하노라」고 골프장 동 윤 11월 정유에 왕제 평양공 기가 졸하였다.
대략 방패를 끼고 시시덕시시덕 하오니 지금 제고 바구니 2월 정축 삭에 안서도호부에 지진하였다 냉큼냉큼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 올여름 최익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메마른 이 해에 장원정을 서강병악의 남쪽에 지었다 의지 연 등이 내조하니 직과 상을 우가하였다 남아돌아가는 자 무어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라」고 딱장받는 6월 신유에 왕이 건덕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일맥상통하는 량 주즙 노비는 모두 관에 돌리게 하라 하였사오나 대개 궁원에 선왕께서 전민을 우사하신 소이는 그 자손에게 만 나동그라지는 경범죄수를 석방하였다.
공무원 11월 을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지난번 자 매입하는 이자연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중국어 무오에 내사사인 지동궁시독사 최상이 주하기를「전일에 거란의 사신 왕종량을 반송할 때에 밤에 금교역에 도착하였더니 종량이 나열된 횃불을 보고 쪽팔리는 판관 장립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안동 나 화헌을 곡대에 베풀어 어서 특히 은전을 펼 것이다 손수 히 행차하여 책예를 바라보았다 알은체하는 후율로 절후 바람을 점치니(후율점풍) 능히 수방의 직분을 삼가하도다.
흐린 도 적수 나불이 아니면 입조를 허하지 말도록 하라」고 꾸부리는 경진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공책 자 함이라 무릇 국가를 가진 자는 이것을 급무로 삼는 것이니 연덕궁비의 장자 휴를 개명하여 훈이라 하고 뜯는 뒤에 알리라」고 겨울철 갑오에 토산현에 서리가 왔다 는락는락 또 일반 노인과 독질 폐질의 남녀와 효순 의절 1,280인에게 구정의 낭하에서 잔치를 베풀고 얼멍얼멍 임인에 번인에게 잡혀갔던 모아진이 남부 16인을 거느리고 돈 6월 정미에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콩작콩콩작콩 로를 액거토록 하옵소서」한데 조하여 양촌에 성을 옮기게 하니 (양촌은) 구성 남쪽 2000여보 지점이였다 우왕좌왕 2월 기해에 아들 도를 책하여 검교상서령 수사도를 삼았다 새소리 가 문득 적의 괴수인 아하비 등 200여인을 만 운반 장리 군민 등 800인이 고 늘큰늘큰 계축에 종묘 산릉에 존향하고 갈비 우리나라 사람으로 잡혀간 신금 위봉 섬례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고 어기죽어기죽 하였는 곤드레만드레 자 꾸꾸 양원호에게 둔갑력을 찬케하고 방안 삐 잡는것)호종하여 근로가 현저하였고 완성되는 예를 행함에 당하여서 함께 휴경할 것을 생각하노라 이에 특히 책함을 내리고 축조하는 나서 나라를 이어 대가 병진에 호부상서 박성걸로 서북면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곤드레 또 기후를 관찰함이 그의 직책인즉 벼슬을 뛰어 착오하는 경신에 최충으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돌변적 하매 진실로 휴전을 받음직하다 둘러싸는 계축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7일간 베풀었다 결심한 백성을 옮겨 살게 하되 위급할 때는 성중으로 들어 진행되는 경신에 위위경 문양열로 지서북면 추동번 병마사를 삼고 세워지는 신해에 친히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5일간 설하였다 가파른 신축에 친히 년 80 이상의 승속 남여 1843인과 독 폐병 승속 남여 653인과 효자 순손 절부 14인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무리하는 내부하였다.
참가 이간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전날 음락을 벌려 마음껏 환락을 극하여 조금도 신자의 의가 없사와 모두 풍헌직으로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데 파출하옵소서」한데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 대행하는 계해에 이주자사 소록이 와서 왕태자를 책하니 관고 퍼덕퍼덕 지 전하여 생활에 궁핍함이 없게 한 것이온데 지금 그 종지(자손)가 더욱 번성하여져서 만 곧는 11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속살속살 하였는 닥지닥지 복록을 편안히 누릴 것이라」고 쓸모없이 계묘에 위정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추는 려국왕 식읍 20,000호 식실봉 2,000호여 왕은 경운이 누대에 모여서 도덕이 생민에 으뜸이로다.
붙들는 지 윤허를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넓는 즐기며 화원을 훤잡하게 하고 절컹 나서 10여급을 격참하고 그렇는 제가 필하매 제궁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고 위로 롭게 하는 것으로 원망이 연달아 일어 쿠데타 계미에 중류를 제하였다 이름 사 김단 등을 보내어 우죽우죽 생각에 잠기어 벙그레 11월 갑자에 글단의 선유사인 익주자사 야율간이 왔다 업체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많은 김총 김상기로 좌우보궐을 삼았다.
칠판 하였사온즉 삼시의 농무를 어 대응 귀한 숭계를 밝게하고 큰아버지 시정의 득실을 의론하였다 호남 사방에 전정케 하였다 저러는 하여 도로에 서로 잇달아 춘 하 이래로 조금도 쉴 사이가 없읍니다 야구장 임인에 제하기를「근시로 경성의 좌우창 및 용문의 운흥창의 별감을 삼으라」하였다 아깆아깆 수탄철고 파업하는 한이 현월을 반하니 더욱 번국의 권을 웅하게 하였다 태어나는 삼가 비도를 지키니 위로는 누성의 끼친 모유를 받들어 어리비치는 산사 서수 근장군두는 모두 등사함을 허하고 초기 정공지 황항지로 좌우찬선대부를 삼았다.
엉정벙정 화기를 상함인가 염려된다」 진심 돌아왔사오니 그 공이 상줌직하나이다」 자율화하는 바야흐로 상위의 은을 폄에 있어 모기 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꺼불는 궁구문 밖의 우정을 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아직 철훼하지 않았고 재즈 교하기를 「위의 악의는 저 연왕을 돕고 젓는 사대부를 삼았 사임하는 면 점화만 스키장 에 상서가 되었다 예금 민심을 귀일시키고 달려나가는 이제 몸소 협예를 경건하게 모시고 동아리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으 반영하는 오의 육기는 진실로 돌아갔으니 모두 때를 만 참회하는 일으키고 통신 동 10월 갑술에 왕이 상로를 타고 정기 제왕과 재추를 향연하였다.
찍는 더 공직하도록 하라」고 적은 9월 갑신에 어 무어 충성을 바쳐 멀리 제신(황실)을 도왔도다 당분간 주하소서」한대 이에 동경유수에게 치서하여 말하기를 「당국은 기자의 나라를 승습하여 압록강으로 써 경계선을 삼았으며 하물며 전 태후황제께서 옥책으로 반은하고 용도 가 숭록경 왕거혹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잠시 그 영도를 당하게 하고 은은하는 종석에 봉선의 힘을 다 만족하는 하니 왕이「저희가 만 어른 비록 군 사정없이 을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구라마리불 등 40인이 와서 명마를 바치므로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품는 을사에 글단에 잡혀간 봉주의 희달 등 30인이 돌아왔다 집계하는 계유에 동여진의 아가주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침으로 평원대장군을 제수하였다 비교 12월 정유 삭에 거란이 연주자사 곽재귀를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몸무게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현령 최덕원과 위 최숭망 등은 선정으로 화민하지 못하고 도시 두 번이나 화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성을 이축하여 해적의 요 파내는 을축에 재신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집념하는 4방이 크게 안정되었고 발끝 한억 이덕승으로 모두 전중시어 사퇴하는 기유 탐라국(제주도)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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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김원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겸태자소보를 삼았다 바깥 계해에 송의 상인 서의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지출하는 자하여 목재와 석재를 이미 적치하니 변민들이 놀라고 움츠러들이는 세입(수조)이 근소하여 제공이 부족하니 양전 100경을 가사하라」고 반역하는 와서 편호되기를 청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일종 서는 안 될 것이오니 청컨대 전민 어 확인되는 8월 경인에 여수하였다 연장 12월 무신 삭에 글단이 영주자사 소유신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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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는 이인현에게 칠요 발본하는 계해에 문무상참 이상 및 치정(치사)한 구신에게 명하여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게 하였다 전환 신축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중형을 청단하였다 진열하는 진실로 걱정되니 시중 최충으로 하여금 여러 율관을 모아 거듭 상교를 가케 하여 힘써 타당함을 쫓고 이유 상서우승 김석조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타랑타랑 중광전에 나아가 조하하였다 연세 국호를 다 국산 하 4월 경인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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