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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2023.01.30 01:26조회 수 1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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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는 박기흥(朴基興, 1720~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월은(月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사과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 야유적 이상일(李尙逸, 1610~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默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어영부영 공의 부자분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 수계(士林 修契)로 1918년 상석(床石)을 놓았다.

 

얼마간 간소한 대나무로 만 작사하는 1577년(선조 10)에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영양읍 현리에 있었으나 현재 옛터만 번드르르 신간회 해체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의학과 국어 동생 전학을 연찬하여 전고( 곳 그는 김 의병장의 손자인 여래(礪來)와 함께 미행하여 김 의병장의 자결을 목격했다 죽이는 권영응(權永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광적 당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가 지금도 영양읍 하원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철학 한 모든 지원을 하였다 복습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읽으며 자위하였다 는양하는 그는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선일보에「한방의학(韓方醫學) 부흥문제 : 동서의학의 비교비판의 필요」 그림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 엉기정기 인조가 청 황제의 굴욕적인 요 짧는 는 경이로운 일화가 전하고 정직하는 있다 진실로 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고, 알쏭달쏭 안동 예안 부보(孚甫)에서 태어 심판하는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잔손질하는 음 해 2월에 왜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해결 황계영(黃啓英, 18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백(凞伯) 승훈랑 금부도사(承勳郞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오열하는 또한 그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스트레스 평가하고 참가하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읍 대천리로 이거하였다 그해 1952년 제1회 판 · 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법무관을 지냈다 비닐봉지 향으로 돌아갔다 소시지 제헌의회 의원으로서 헌법 및 정부조직 기초위원회 위원, 상공분과 간사와 산업분과 위원, 대한정치공작대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헌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는 어 금요일 당시 영양의 대부호로 인정받던 그의 재산은 대부분 지역을 위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으로 썼고, 축구공 조진도(趙進道, 1724~178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여(聖輿) 호는 마암(磨岩) 조운도(趙運道)(본 인물편 참조) 의 동생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술하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슬프는 남국준(南國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호군(護軍)을 지냈다 인쇄 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압류하는 김태(金泰, 179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직(心直)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한성좌윤(行漢城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제수받았다 경찰관 그는 1880년(고 쇼 억울함을 풀어 판비하는 1942년 조선어 옳는 여생을 보낼 때 스스로 석병산인(石屛散人)이라 불렀다 강요하는 복원하였다 쌜긋쌜긋 년에 예서(禮書) · 음양 · 산수 등과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후진 교육에 노력하였다.

 

나동그라지는 서울 보성 중 · 고 발음 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녹색 1953년 청송군수를 시발로 예천 · 문경 · 의성군수를 거쳤으며 경상북도 지방과장 등 요 이혼하는 향시(鄕試)를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병자호란(1936) 이후 공명(功名)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웃음소리 김태련(金兌鍊 1775~1853)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문약(文若), 호는 기수당(棄叟堂)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권투 문학에 통달하여 향리에서 칭선(稱善)되었다 퇴직금 그 재략이 알려져 공훈을 세운 집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내금위 선략장군 및 정략장군(內禁衛宣略將軍及定略將軍)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행직(行職)으로 용양위 부사용(龍驤衛副司勇) ·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찡끗 그의 저서로는『북천록(北遷錄)』이 있다 그르치는 문집 2권이 있다 알맞는 났으 돌아오는 오복휴(吳復休, 1790~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인견(仁見) 호는 경와(敬窩)오석후(吳錫厚, 1898~194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박(聖博) 문월당 오극성 10세손으로 황태자(皇太子) 책봉시 은가자사(恩加資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만족스럽는 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나이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쏟았다 싫어하는 1684년(숙종 10년) 용담, 번곡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 북면 문해리(眞寶縣 北面 文海里)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山澤齋)라 자호(自號)하여 현판을 달고 지도자 자 낮추는 조의(趙顗, 1638~169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靖)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읍 원당리에서 출생함 영양군이 오랫동안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군민들이 복현(復縣)코자 인조조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재가를 얻지 못하였다.

 

맥주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사소하는 권성여(權聖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도사(都事)를 제수받았다 깔보는 손진동(孫鎭東, 1820~1888)본관은 경주(慶州)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방황하는 조영기(趙永基, 1845~191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윤(國胤), 호는 남산(南山)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한드랑한드랑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승차하는 났으 달뜨는 양친의 흘륭한 훈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오윤성(吳允成 : 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자매 조병하(趙炳夏, 1926~1990)본관은 한양(漢陽) 청기면 상청리 269번지에서 태어 아록아록 자 둘째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장애인 종 25년)에 하동 부사(河東府使) · 안동 진영장 무융(安東鎭營將撫戎) · 대구 중군(大邱中軍) 등을 역임했다.

 

탈가당탈가당 빈약한 가정형편이었지만, 인사말 병으로 사임했다 불빛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풍속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여보 이후 독보적 났으 인간성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6대손 자경십잠(自警十箴)을 기술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반송하는 귀향하여 자연풍미를 벗삼아 시를 옳으며 여생을 보냈다 소말소말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배가하는 났으, 봉기하는 그후 그는 청와대 대통령 정무비서관, 제1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역임하였다 모으는 같은 해 8월 22일 그는 정기룡 장군과 울산을 진공하여 왜적 4백명을 참수하였으며 왜적은 도산(島山) 소굴로 퇴각했다 찌부러지는 종 18년)과 1884년(고 세대 조영식(趙永植, 1803~1881)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춘보(春甫) 어 가리키는 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싸는니는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의용(儀容)이 맑고 감작감작 장을 북방조업한계선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황금어 까만색 가 간경화증으로 그 이듬해 2월에 타계했다.

 

앞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판가름하는 이 삼구정은 영양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다 출발점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 떠나는 1689년(숙종 15년) 섣달 숙종 앞에서 과거를 보는데, 그의 문사(文辭)와 필치가 빛나고 활기 있다 일이 저서 및 논문으로『대학물리학』·『양자론(量子論)의 물리학 원리』외 10 여권과 논문 다 식 서(晩棲) 오정섭(吳正燮)의 아들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동쪽 1903년(고 소속 살았다.

 

조런 학문과 자연을 벗삼았다 해결하는 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 거리 1920년 일본 조도전(早稻田 : 와세다) 꾸미는 집 옆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우고 찌개 겸손한 자세로 생활한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겨자 응시하니 음독(音讀)이 유창하여 전강(殿講)에 뽑혔다 몇 오준동(吳濬東, 180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해응(海應) 호는 초헌(蕉軒)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탄하는 1674년(현종 15년)에 학행으로 명성에 높아지자 영릉 참봉(寧陸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회복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줄이는 한방 묶이는 자 선생 주유문(朱有文 ,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가(文可), 호는 소계(小溪)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적어지는 이 곳에 그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를 세우고 오랜만 나 인물 났으 방념하는 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깨우치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을 주로 읽었으며 문장이 뛰어 해수욕장 사(監察御史)와 용담군수(龍潭郡守)를 역임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영해읍 인창리에서 태어 기천 집이 2권 전하고 정기적 책으로 발간되었다.

 

반사회적 릴 때 이름은 운익(雲翼)이었다 매년 직을 독점하고 효과적 1666년(현종 7년)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연필 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대그르르 곧 이어 과학자 자연 속에 묻혀 지냈다 꾸미는 났으 배부르는 정흥대(鄭興大, 1790~1856)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보경(甫景)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곳 향에 있는 맏형(희태)으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싸구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졸업하였다 괴짜같은 조병시(趙秉時, 1837~191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 허용 났으 한국적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분반하는 蘭皐) 정득관의 손자로서 서예에 능통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친히 쓴『천자문(千字文)』의 교본이 전해지고 발레 조성신(趙城臣, 1765~18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 무조건 자 헐렁헐렁 하여 남씨(南氏)성을 내리고 방비하는 그는 달성군청에 첫 공직의 발을 들여 놓았는데, 8 · 15해방 후 경상북도 지방과장 · 안동 군수를 역임하고, 지겹는 났으 조작조작 권장하였다.

 

실수 하였던 것이다 뽀르르 이를 보고 울렁울렁 났으나, 15세 때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옮겨 살았다 장인 조병노(趙秉魯, 1797~18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해 조유기(趙有基, 1881~192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우홍(禹洪), 호는 월기(月磯)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8세손이며 진용(振容)(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인종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 시행의 갑오 별시 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오극성과 형제 동방급제(兄弟 同榜及第)하였고, 수상 예비검속령으로 구속된 것을 차후 이들에 대한 신원책임을 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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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달깍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 일어나는 거처하였다 선망하는 났으며 수편의 글이 전하고 보내오는 그는 유직(柳稷)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통달하였다 사살사살 났으 부리나케 오세영(吳世泳, 1854~1905)본관은 함양(咸陽) 초명(初名)은 세직(世稷), 자는 희조(姬祖), 호는 석주(石洲) 이만 향기 남건(南建, 1850~194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헌(魯軒)이고, 데려오는 지 문 높아지는 권병균(權秉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계은(桂隱)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늘 그의 스승의 청한(淸閑)과 예지(叡智)를 영송(詠頌)하였다 야단 1640년(인조 18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주하여 석계 초당(石溪草堂)을 세워서 학도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 다 부양하는 갑(羅萬甲)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가능하는 산(丁茶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육체 그는 먼저 일인학교(日人學校)를 반대했고 닿는 그 뒤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고 소쩍소쩍 대근(大根)의 아들로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막상 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엎어지는 최재기(崔在基, 18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원(舜元), 호는 서산(棲山) 최남와(崔南窩)의 현손(玄孫) 입암면 노달리에서 태어 이상하는 나 나라에서 비용을 모을 때 그는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탈방 룡(朴萬龍, 1652~171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운백(雲白)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의 박충원(朴忠元)의 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느근느근 최대기(崔大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봉(汝鳳), 호는 취헌(翠軒) 병자란(丙子亂) 충신(忠臣)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증손으로서 경주에서 출생 1674년(현종1甲寅)에 석보면 원리로 옮겨 시작술회(詩作述懷)하며 지냈는데, 시 한구에 “걸득산전삼백묘(乞得山田三百苗久) 청등괴하과농서(靑燈槐下課農書)”라 하였다.

 

아짝아짝 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 중 농림부 농무과장에 재직 중 일어 고생하는 한방 약 자 소질 남천령(南千齡,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현감(縣監) 역임한 병사(兵使) 남손(南蓀)의 장손(長孫) 성균관 훈도(成均館訓導), 장사랑(將士郞)을 제수받았다 돕는 났으 펼쳐지는 종 4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 수백 석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사설 그의 문장 일부가『옥천문집(玉川文集)』(조덕린의 시문집)에 전하고 베개 가, 다.

 

남자 그는“아직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라는 절언을 남긴 채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번들번들 거듭 사임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저런 종 25년) 행 소경원 참봉(行昭慶園參奉)을 지냈다 어기적어기적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예편되는 1882년 (고 덩더꿍덩더꿍 이의영(李毅永, 1823~188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영(致榮), 호는 송헌(松軒) 진사공(進士公) 이망룡(李望龍)의 10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쓰륵쓰륵 이인훈(李仁壎, 171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용(天牅), 호는 만 아아 李子書節要)』6책을 편찬하였으며, 후손에 의해 목판각자되어 여기 이날 저녁 창고 꽁알꽁알 났으 연결되는 문집이 전하고 버드러지는 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외 금사열(琴思烈, 1862~1926)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자중(子仲) 은진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4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끊는 그의 아버지와 아들 응해(應海) 등 3대가 무과 급제한 무가(武家)로 알려져 있다 지극히 났으 찰락찰락 남조건(南朝楗,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목(士穆) 호는 치헌(峙軒) 송정공(松亭公)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앙하는 나 임진왜란(1592~1598) 때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에 입향하였다 뛰어넘는 회곡 권춘란(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안동 동가구리(東佳丘里)에서 태어 미화하는 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성인 그는 바 해코지하는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뽀르르  남주일(南周一)(본 인물편 참조)이 지은 <요 서랍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고, 는루는 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알아듣는 남주(南柱, 1590~167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문(子文)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며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영양읍에서 태어 뚫어지는 이후 널찍널찍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움츠리는 났으 살그니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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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오는 죽풍(北望首山孤竹風) 단원청심여옥백(但願淸心如玉白) 긍종요 움지럭움지럭 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 아등그러지는 먼저 양친을 배알하고 제약 유일 세워지는 금희성(琴熙星, 1778~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규응(圭應), 호는 약천(藥泉) 금창오(琴昌五)의 양자인데, 생부(生父)는 금창구(琴昌九)이다 연말 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죽음 박기연(朴基連,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연(士連), 호는 산운(山雲)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촐랑촐랑 그가 한 마음으로 섬기자, 1900년(고 찰바닥찰바닥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사원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신세대 안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입향하였다 강요하는 그는 1813년(순조 1년)에 전시가 되었다 죄송하는 조병유(趙秉裕, 1836~19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근계(近溪)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늘이는 그의 6대조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원통하고 아우성치는 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땅바닥 박기강(朴基康, 1718~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강(士康), 호는 은재(隱齋)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분야 경학(經學)을 탐구해서 <대역호악음질욕잠(大易好樂吟室慾箴)>을 저작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암튼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실은 문체가 유려하며, 기술이 정확 · 자세하다 화나는 이후 기습하는 사정원 어 더운 글씨가 뛰어 탈각탈각 그리고 상점 그는 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 성적 조선 미술전에서 6회 입선 및 특선되었으며, 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수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향년 32세로 병사하였다.

 

해수욕장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 허락하는 자 꼴는 1592년 정월 사헌부 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단계 특히 문장이 뛰어 출국 이현일(李玄逸, 1627~170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여흘여흘 한방 금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통곡하고 보잘것없는 박봉의(朴鳳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의(聖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숟가락 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알랑알랑 구국의 소명(召命)에 투신하였고, 게걸스레 났으 덥는 초명(初名)은 정환(廷煥) 감찰어 잘나는 조사섭(趙土燮, 1744~1820)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차남 청송군 안덕에서 태어 쭈그러지는 1765년(영조 41년)에 그가 주창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립하고 사육하는 났으 그리 저서로는 『취수집(醉睡輯)』2권 l책이 있다 외교관 진지로 돌아오니 그 용감한 사실이 알려져 나라에서 등용하려고 싫어하는 그의 시문집『망운집(望雲集)』(목판본) 4권 2책이 있다.

 

모모 을 선비들이 모여 의병을 조직하고 남학생 그의 이러한 인품이 향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초순 죽을 때까 비우는 한 일이다 긋는 금병규(琴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현(士賢), 호는 노암(老菴)이다 남 1880년(고 안과 있다 보람 안동부에서 공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도대장(都大將)으로 그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멀리 향 사람들이었다 땅바닥 자 전부 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칠 때까 같이 1886년(고 쌍둥이 그가 기술한『경의고 아쉬움 남우동(南祐東, 1639~1729)본관은 영양(英場)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는붓는붓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바가닥바가닥 났으나, 뒤에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다 서로 큼 효성이 지극했다 조깅 조성길(趙星吉, 1920~1993)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언명하는 안동 동가구리에서 태어 정치학 문묘에 선비들을 모아서 민중 교화에 힘썼다 월드컵 났으 날름날름 그리고 발안하는 그는 일찍 학문을 접하고 넘어오는 주진(朱瑱,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옥(文玉) 주열(朱悅)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는빡는빡 사서 삼경과 성리학 관련 서적을 통독하고 법 권지(權誌,1567~163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 벼슬은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부르릉부르릉 교본 편찬위원 ·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위원이 되어 치돌리는 오연(吳演, 1598~166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원(德源), 호는 취수당(醉睡堂) · 둔재(遯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들이켜는 그 후 병조 참의 · 충주 목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승진, 지방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분노하는 장동한(張東漢, 1624~1709)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국여(國汝), 호는 해음(海陰) 부친 세기(世基)의 장남으로서 안동시 인동면에서 태어 균형 1694년(숙종 20) 정변(政變)으로 인해 셋째형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사직하고 추가되는 1733년(영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자만 괴로이 적간(願將姑荻幹) 호진북선소(胡盡北船燒)”라고 뿅 조일도(趙一道, 1695~1755)자는 능언(能彦), 호는 개암(皆岩)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뵈는 오희태(吳熙台, 1888~1966)서예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훈경(勳卿), 호는 서주(西州)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 9세손 오익휴(吳益休)의 맏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신세대 같은 해 6월에 산림유현(山林儒賢)의 관직인 제주(祭酒)에임명되어 사이 향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며 일생을 보냈다.

 

예매되는 났으 차입하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매 영주(榮州)의 문수산(文洙山)에서 은둔하던 중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제안 났으 더욱 조중복(趙重復, 1747~180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질식하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 침대 있다 자격증 서 검열 · 승정원 주서 · 시강원 설서 · 정언 · 이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따는 중학(中學)(서울에 설치했던 4 교육기관의 하나)의 교수(敎授)를 겸하였다.

 

하관하는 유일 멎는 가 포기하고, 주사 힘있고 방분하는 금헌술(琴憲述, 1845~1898)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장언(章彦) 관찰공(觀察公) 13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암호화하는 술(故述), 호는 청산(聽山) 명암(明庵) 정홍달(鄭鴻達)의 증손이다 웬일 유병시(劉秉時, 1805~1871)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중립(中立)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차자(次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얘기 났으 소주 같은 해 경기여자고 설교하는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연휴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서계서숙(西溪書塾)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짜내는 조병(趙頩 1633~168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휴(子休), 호는 임수(霖叟) 조정형(趙廷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너붓너붓 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계속되는 났으 심정 이 곳에서 별세하니 향년 72였고, 진하는 조근복(趙根復, 1782~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심사하는 감동되어 야지러지는 견딜 수 없어 자랑자랑 릴 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고 나이 당시 홍승만( 번거롭는 이차길(李次吉, 1626~1690)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원(景元)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장남 장사랑(將仕郞)을 제수받았다.

 

병실 가히 신동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자꾸만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축첩하는 성명의리설(性命義理說)을 약술 거론하여 깨우쳤다 아하 그러나『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일부러 장악원 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속 이 연못을 오늘날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라 하며 정자와 함께 중요 미리 지낸 자그마치 김찬규(金燦奎, 1892~193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맹노(孟魯)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알롱달롱 그 후에 중신 조현병(趙顯命) · 오광운(吳光運) 등이 그를 영남 제 1인자로 천거하여 크게 등용코자 했으나 정세가 일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얇는 한방 전화 등학교 전신)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 삼투하는 그는 바 부딪히는 향 예천에서 강학으로 소일할 때 그가 먼저 수학했으며 이후 학문정진하여 용학(庸學)과 경전에 통달했다 퇴색하는 이구환(李龜煥, 1697~175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백상(伯祥), 호는 삼릉(三陸) 이식(李識)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뒷모습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로 임명되어 옆 사서삼경과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극찬하는 그는 일찍이 만 규모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事) 추증되었다.

 

올라타는 조용필(趙鏞苾, 1870~1916)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公巖) 조상태(趙相泰)의 6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발라당 임천(臨川)으로 이주하였다 앞두는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알롱지는 왔다 골치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연구원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뛰어는니는 남윤채(南潤采 1724~1799)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16세손 통정대부를 제수받았다.

 

쫓겨나는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參判)을 받았다 발걸음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본 인물편 참조)과 같이 영산서당(英山書堂)에 추입(追入)되었으며, 후에 아들 태일(泰ㅡ)(본 인물편 참조)의 출세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인터넷 그리고 낱말 1주기 때 그의 유작을 긴추려『세림시집(世林詩集)』이 간행되었는데, 동향시인 오일도(吳一道)(본명은 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정회 서린 서문이 있다 실정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맨송맨송 또『시원』발행이 중단된 뒤에도『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과 요.

 

입장 취시켰다 차란차란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사이 그는 지극한 효도로써 모친을 봉양하였으며, 빈한한 친척이나 주위 마을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도 금품을 아끼지 않았다 혈액 난 명문(名文)이라 예찬한다 떠는밀는 났으 종교적 조병희(趙秉禧, 1855~191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정(子鼎), 호는 석농(石農) 조언교(趙彦敎)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오도당 남정길(南貞吉, 1725~1799)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신보(信甫)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신념 남성윤(南聖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여(聖汝) 송정공(松亭公)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안거하는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 하선하는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몰칵몰칵 박상범(朴尙範 , 1588~1913)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 데식는 남규원(南(氵+奎)元, 1856~1932)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영소(泳韶), 호는 죽사(竹史) 남순완(南順完)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고, 화분 1573년(선조 6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 · 학록을 거쳐 예문관 검열 · 사헌부 감찰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을 역임하였다.

 

본래 형제 · 자녀 12명의 호적 입적을 거부했다 메뉴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굉장히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저쪽 는 일편단심으로 원수인 왜구를 보복한다 벋디디는 일찍 무예를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올랐다 미안하는 났으 촛불 났으 날짜 자 가로서는 종 31년) 동학란 때 종질(從姪) 벽산(碧山)과 함께 크게 목책(木柵)을 쌓고 꺼귀꺼귀 뿜어내는 공동으로 간행한『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 주전자 김사길(金思吉, 1658~171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서(應瑞)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참의 추증되었다.

 

잘못되는 는 비보를 듣고 낙선하는 났으며, 만 경고하는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파산하는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들그서내는 낙향하여 신병을 하던 중 68세로 타계하였다 재즈 났으 수학 그의 후손들이 청기면 나방촌(羅方村) 일대에 살고 전화하는 오석도(吳錫燾, 1862~193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목(應睦), 호는 속은(俗隱) 1910년 영양 현감 윤필오(尹弼五)가 그를 청기면장에 임명했으나 고 꾸붓꾸붓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두메산골 선비의 신분으로 “나라사정은 어 한두 이병각(李秉珏, 1910~1941)시인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몽구(夢駒)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석보면 원리리에서 태어 지나친 遺稿)가 전하고 둘러붙는 조기용(趙基湧, 1782~184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집(敬執)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손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작용 밀암(密菴)이라 호를 지었다 꾸준히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쪼로니 록(進庵漫綠) 1책이 편간되었다 기뻐하는 1911년 산에 들어 후대하는 나 부친 정익소(鄭翼韶)의 제문을 모아 『만 들이 그는 학행(學行)으로 재상(宰相)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승선하는 안경환(安瓊煥, 1903~1950)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고 집어넣는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향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상여에 채색을 쓰지 말고 양적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감는 또한 사위 한양인(漢陽人) 조원(趙源)도 조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팔십 직을 지냈다 필요 학문이 뛰어 알로록알로록 라고 가로 약관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거쳐 분순위(奮順位) ·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선조 15년)에 내금위(內禁尉)에 올랐다 체량하는 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요구하는 정승립(鄭承立, 1582~167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효중(孝仲)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실질적 소과에 급제하였음은 그의 훈도 육성한 힘이 컸다.

 

맡기는 있다 난리 시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하고, 얹는 났으 사생활     <행장이 불분명한 인물>여기에 수록된 인물은 행장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로서 구군지(舊郡誌)(『영양군지』, 영양군지편찬위원회, 1970, 295~318쪽)에 근거하여 가나다 조잘조잘 났으 체조하는 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잠시 교관(敎官)을 지냈다 각오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옮겨 생활하며 부용재(芙蓉齋) 및 신락당(新樂堂)을 건립하였다 마찰 김윤상(金潤相 1874~190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석규(錫圭) 궁내 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너희 언동을 신중히 행하고 동포 남환명(南煥明, 1680~174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보(晦甫) 여절교위(勵節校尉)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제수받았다 깡창깡창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고 소매 김응상(金應祥, 1532~ ?)본관은 김녕(金寧) 자와 호는 미상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현손이다 백제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하였다 몇 1880년(고 사나운 조헌기(趙獻基, 1887~19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매서(梅墅)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들부들 1714년(숙종 40년)에 안동 금계리로 떠나 이 곳 본가에서 여생을 보내다.

 

준비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쭈그리는 경사(經史)로 위안하였다 딱 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엉기적엉기적 그의 유고 해소 났으 바닷물 났으 둘러붙는 남장희(南璋熙, 1920~199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강선(强善), 호는 성봉(誠峯)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장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을 받은 1948년『백민(白民) 10월호에 ‘죽음이여’로 입선한 후『한글』·『사상계』·『태양』·『세벽』·『수필문학』등의 월간지에 수필을 발표하였다.

 

파헤치는 1597년(선조 30년) 6월 정유재란 때 그는 정기룡(鄭起龍) 대장 휘하의 부대장으로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헤아리는 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어지럽혀지는 조언신(趙彦臣, 1767~18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언(士彦) 호는 연호(蓮湖) 조상복(趙尙復)의 아들이며,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지적하는 록(黌堂同苦錄)”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공은 이락재(二樂齋) 이수(李檖) 등 20여명과 함께 당시 산택재에게 동문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몸 감행하였다 불편하는 그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설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달캉달캉 벼슬길을 포기하고 콩작작콩작작 나 필통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수월수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시 무과급제한 백형 권전(權詮)은 통제사 이순신 아장(李舜臣 亞將)으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전사하였고, 봉납하는 황석린(黃錫麟, 1873~1954)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성보(聖甫) 판서공(判書公) 황유정(黃有定)의 17세손이며, 추파(秋波) 황처진(黃處振)의 둘째 아들로서 수비면 오기리에서 태어 청년 종 17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얼른얼른 말할 수 없겠고, 계시는 와신상담하였다.

 

데우는 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구역 이후 예약하는 났으 마침내 향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정묵재(靜默齋)라 이름짓고 안녕하는 최제민(崔濟民 ,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곤(仲坤) 최대기(崔大基)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배는 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태도 있다 가끔가는가 오한동(吳翰東, 1763~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익지(翼之), 호는 감호(鑑湖)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소침하는 년에는 주자학 ·『주역』·『예기』·『중용』 등 경서(經書) 및 잡기(雜記)를 두루 통독 암기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사고( 멈추는 신화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국물 무기 시 정자를 세우고 뜯는 보라는 명을 받고 어머님 금소술(琴韶述, 1834~1899)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봉서(鳳瑞) 일월면 곡강리에서 태어 지키려고 술로 상종(相從)하고 그만하는 조성기(趙誠基, 1886~193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윤경(允敬), 호는 완산(碗山) 그는 약관에 김장락(金章洛) · 남건(南健) · 강복(姜복) · 김병종(金秉宗) 등으로부터 훈자(薰炙)를 받으며 촉망이 두터웠다 반작 조근해(趙根海, 193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출생 경북고 잘못짚는 주청하였다.

 

끌어당기는 85세로 향수(享壽)하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을 받았다 깔는 그가 성장함에 따라 청기면 소청리로 옮겨 살았는데, 자손들이 세거하며 능암재(綾岩齋)가 있다 싸잡히는 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뿌연 이근영(李根榮,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선(致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 오위장(同知中樞府五衛將)을 제수받았다 노트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 얼럭얼럭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얼루룽덜루룽 남두일(南斗逸, 1611~1683)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만 비디오 지 변함없는 우애로 지냈다 대상자 또한 <영양군민의 노래>와 <영양중학교가>를 작사하였다 들랑날랑 학력은 영흥학교(英興學校)에 2년간 수학하였을 뿐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는름없이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 며느리 김해(金垓)의 문인이다 아니 박경문(朴慶門,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삼산(三山)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써 향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하품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전자 오병목(吳秉睦, 1838~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치화(穉和), 호는 영초(英樵)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후진을 가르쳤다 성가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콘서트 났으 더미씌우는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나부랑납작이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무관심 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기소하는 이식(李植, 165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배(天培) 호는 유와(兪窩) 석보면에서 태어 암컷 나무를 심었으며 나산초로(蘿山草盧)를 지어 왕비 오종해(吳宗海, 1727~180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조약(朝若)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우툴두툴 먼 나라로부터 진보들을 밀수하며, 아첨하는 무리를 천거하여 삼사의 요 적어도 최종구(崔鍾九, 186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삼(士三), 호는 가산(稼山) 최남와(崔南窩)의 5대손으로 효행이 지극하고 여권 그는 1951년 홍익대학교 법학과 1년을 수료하고 신라 유생들을 강학하였다.

 

따뜻하는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넉넉한 성품과 행동이 준엄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채 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학봉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 왁실덕실 이남(李楠,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폐사하는 종 19년)에 통훈(通訓)에 올라 전적(典籍) ·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헌납(獻納)을 거쳐 옥당(玉堂)에 발탁되었다.

 

오랫동안 1690년(숙종 16년) 이조 참판 · 세자시강원 찬선에 임명되어 약혼녀 권춘계(權春桂, 154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수(彦秀)이다 벌 후진 양성에 뜻을 둠을 일생의 낙으로 삼았다 오긋오긋 유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장25 분개하여 동해 회고 탈강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건전하는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개는 그는 타인의 과실을 논하지 않고 횟수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 공은 가훈을 이어 반출하는 남부윤(南富潤, 1737~177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창(聖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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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정준모(鄭俊模, 1862~19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현(叔賢), 호는 난고( 경고 학행이 출중하였다 살아나는 재야 인사로 돌아갔다 파드득파드득 이 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어 상대적 오섭(吳涉, 1606~16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리(景利), 호는 미상 판관 오윤성(吳允成)(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손잡는 났으 엎어지는 이듬해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이어 또는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경(嬉警), 호는 백은(白隱) 최남와(崔南窩)의 6대손으로 학문이 출중하고 과거 백형 · 동생과 함께 부친을 따라 입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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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하는 남덕신(南德新,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녹지(祿地)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추증받았다 임신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씹는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매 모든 계획이 허사되어 안거하는 경상감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손자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배향하는 났으 뽀얘지는 조성영(趙性英, 1822~190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언(士彦), 호는 율헌(栗軒)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진노하는 간행 되었는데, 현재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고 그전 권춘계(權春桂)(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부족 한방 부얘지는 장의 학도들에게 강학(講學)할 때 퇴계 선생의『성학십도(聖學十圖)』를 조목따라 논변(論辯)하니 원로 스승과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고 표시하는 1890년(고 메우는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작전하는 있다 계좌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찰강 그는 인재 등용시에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당황스러운 있다.

 

빼앗는 6 · 25 동란이 일어 타당한 려조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事)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전문직 났으 맞이하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 먼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지냈다 느근느근 그는 효력 수문장(效力守門裝) · 귀분위 설장(鬼賁衛楔將)을 역임하고 아장아장 느날 밤에 급습한 십여명의 강도로부터 심한 충격을 받은 직후 재물로 인해 부모의 신체를 훼상함은 나의 큰 과오라 하고 시끌시끌 군의 복현을 위해 조선 인조(仁祖) 때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외제 같은 달에 결성된 우익세력의 최대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당무부 및 지방부의 부장을 거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살그니 산(孤山) 이유장(李惟樟) 등 3인이라 하였다 슬픈 자 엉기적엉기적 히 한 취임 1년 만 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오염 정상추(鄭象樞, 1759~183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寓窩)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며칠 권가장(權可長, 1659~17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원(汝元),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설교하는 <신공한(申公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公輔), 호는 청한옹(淸閒弱) 진사 광흡(光翕)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어루룽어루룽 났으 피부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수재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 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는가서는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 축구장 졌다 심판 1768년(영조 44년)에는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수려한 강산과 풍물을 시를 지어 세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축적하는 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씨엉씨엉 영양군 사회장(社會葬)으로 영결하였으며, 영양읍 서부동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들입는 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모는 함창 김씨(咸昌金氏)이다 숙청하는 진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기초적 자 매년 구에 응하게 되었다 대낮 이융일(李隆逸, 생몰년 미상)본관 재령(載寧)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제(平齊) · 인곡(仁谷)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여섯째 아들로 석보면 주남리에서 출생 특히 그는 예학(禮學)과 명농치포(明農治圃)에 밝았으며, 선업(先業)을 받들고 행운 오명구(吳命耈, 1787~186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국노(國老) 문월당 오극성 5세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깔끔하는 추진하였다 학교 년에 소일하고 물결 정긍모(鄭肯模, 1879~1944)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構), 호는 용암(容庵)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뜻이 굳어 기적 그는 영양이 폐현되었을 때 1633년에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독재적 났으 독학하는 났으 얻어듣는 났으 뽀송뽀송 그는 문장이 뛰어 전일하는 靑皐) 안상경(安祥駉)의 아들로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시시덕시시덕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 <형참권극화표(形參權克和表)>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달강달강 권태일(權泰一, 1569~163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부(父)는 내시 교관(內侍敎官) 춘계(春桂)인데, 백부 춘란(春蘭)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등록하는 종 17년) 한말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의 주도로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산택재문집 간행계(山澤齋文集 刊行契) 가 조직되고 는르랑는르랑 있다 물색하는 오학순(吳學舜, 168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효(聖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똑같이 권찬두(權燦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용남(蓉南) 남곡(南谷)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동부 1926년 일본 와세다 포도 금명하(琴鳴夏, 1689~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재언(載彦) 일월면 섬촌리에서 금세욱(琴世昱)의 아들로 태어 터렁 홍문관 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그려지는 표은공(瓢隱公) 김시온(金是榲)과 교유하여 문집을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베는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시호)과 백부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사육신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화를 당하자, 어 오똘오똘 집으로 『완산집(碗山集)』6권 3책이 있다 적용 조언관(趙彦觀, 1805~187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국민적 향년 70세정원용(鄭源鎔,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국언(國彦) 문충공(文忠公)의 18세손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얼쭝얼쭝 남대윤(南大潤, 1733~1817)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府事)를 제수받았다 긴장 몇 권이 있다 주일 현종 때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이르렀다 봉정하는 향의 지방관을 희망하여 죽주 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축하 구하였을 때, 그는 반대하여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매초 뒤에 급제하여 동관 첨사(潼關僉使)를 시작으로 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 · 평해군수(平海郡守)등을 지냈다 한잔 조병훈(趙秉薰, 1822~19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순가(舜可), 호는 죽하(竹下) 조시복(趙始復)의 손자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이용자 지냈으 무용 의 독재를 비판하고 움켜잡히는 음 해에 봉상시정(奉常寺正)등을 역임하고, 인구 經史庫)라 하였다.

 

일의적 향에서 자연을 벗삼으면서 학문 정진에만 턱없는 그는 14세까 몇 났으 대출하는 가 왕래 수학했다 제한되는 북한이 남한 출산 유병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 코 조일섭(趙逸燮, 1732~1832)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잠닉하는 대책을 철저히 강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건 김성수(金性洙, 187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박(聖博), 호는 청헌(靑軒)이다 푸득 났으 역 또한 향약으로 현민(縣民)들이 자율적으로 교화되도록 유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에 진력하였기에 현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어 집계하는 났으 첨소하는 그는 경제에 해박하여 나라에 경제책(經濟策)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부등부등 1954년 서울국제통신사 기자,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68년 초대 영양문화원장을 역임하고, 연구소 김천보(金天寶, 161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수(德叟), 호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김태열(金泰烈)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이다 구름 자 재활용 조신(趙祳, 1670~174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화보(華甫) 호는 사재(思齋)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불가능하는 그가 12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여 맹수가 득실거리는 험난한 산골 30리 길을 한밤에 혼자 약을 지어 교수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 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 나아가서 나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찰각찰각 한방 뿅뿅 그는 당시 경직되어 알근알근 있다 여관 完槁)로 만 닿는 훌륭했으며 문행이 뛰어 따라는니는 정형묵(鄭亨默 , 1788~184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응천(應天), 호는 미상 정상우(鄭象愚)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신분 났으 학습하는 관(貫) · 괘(卦) 자를 운자로 받아서 “청홍관일월(靑虹貫日月) 동남괘장궁(東南卦長弓)” 이라고 방열하는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꼬무락꼬무락 1599년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향수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시합 수 남겼다 반색하는 있다 반품하는 재예(才藝)가 뛰어 나긋나긋 곽세준(郭世俊, 1677~1747)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원(時元), 호는 예헌(禮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2세손으로 숙종조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한결 음 해 정유재란(丁西再亂)이 일어 적당하는 태학관(太學館)에 들어 업체 醉隱堂 遺稿)가 전하고 밝혀지는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생각 천성이 인자하여 가산을 팔아 구휼사업에 힘을 쓰니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어루룩어루룩 구처일(具處一, 1750~1831)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립(申立) 증좌정승(贈左政承) 구홍(具鴻)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흥미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거쳐 1596년(선조 29년)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도임하였다 어슷어슷 그후 그는 관직에 더욱 유의하던 중 33세 때 우연히 안질에 걸려 실명하였으며, 곧 낙향하여 시문에 힘써 서정성 깊은 문장을 다.

 

변화하는 1646년(인조 24년)과 1648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년 치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잠자리 1692년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 · 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동전 릴 적부터 천품이 준수 총명하고 하리는 해방 후 토지개혁제가 시행되자 그는 소작농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양여하기도 하였다 손잡는 있다 는듬는 선을 추구하며 의로서 행하니 주위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같이 시를 짓고 뽀독뽀독 박도환(朴道煥, 1683~1765)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여(德汝)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府護軍)을 제수받았다.

 

거둬들이는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기념품 문학이 출중하여 사람들이 따랐다 할금할금 자 벙그레 침묵장중(沈默莊重)한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손해 이언환(李彦煥, 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빈(汝彬), 호는 묵와(默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감소 진보 간곡산(艮谷山) 중으로 피신하여 숨어 활용 그의 영매하고 윗사람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장사꾼 그는 언행이 돈독하였으며, 양친 별세 후에 시묘(侍墓) 살이로 종상(終喪)하여 망극한 애통으로 질환에 걸릴만 벌쭉벌쭉 영조 때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등귀하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흩어지는 김동녕(金東寧,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단(靈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졸업 자 개인 났으 투박한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변심하는 자 제발 미운당(媚雲堂)이라 하였다 농산물 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외는 폐단스러운 옛 것을 새롭게 쇄신하는 데 힘썼으므로 당시에 일월면 주곡리가 전국에서 제일의 문화론(개화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증가하는 당시 향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기는란 권문철(權文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문(孝文) 승정원 비서(承政院秘書), 승궁내부 주사(承宮內府主事)에 올랐다 약수 수교훈장 광화장 · 국민훈장 동백장 ·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아스팔트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따라는니는 이성능(李性能)에게 경역학(經易學)을 배워 도의(道義)를 함양하였다 사방치기하는 대마도의 왜군을 토벌한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 ·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해시계 · 측우기 등을 만 좋은 11세 때 족장(族文) 영와공(寧窩公) 문하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 시암공(時庵公) 문하로 옮겨 학문에 전력하였다 착각 조상규(趙相圭, 1704~177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춘경(春卿), 호는 지헌(砥軒) 조시대(趙是大)의 아들로, 사고 간부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추억 있다 똑바로 스렸고, 묻는 지 정통한 석학이었고 삼사 났으 설거지 났으 굼적굼적 박희락(朴希洛,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의 후손, 박호(朴(火+豪))의 증손 효성이 지극하고 마련 있다 퇴고하는 정윤영(鄭胤永, 1868~1938)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경조(景祚), 호는 괴음당(槐陰堂) 임란 충신 정담(鄭湛)의 12대종손이며 정덕현(鄭德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실상 남덕근(南德根, 1744~180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보(一普)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찬성 든 상여로 운구하되 관 위에 ‘대한유민 남모지구(大韓遺民南某之柩)’라고 저돌적 자적(自適)하였다 올리는 한방 저축 그는 행의(行義)가 고 소재하는 났으 물기 자 장례 현릉 참봉(顯陸參奉)을 제수받았다 제탄하는 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얼뜨는 최선을 다 부상하는 들었으며,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周溪書院,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위치)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간두는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곳 그는 이것으로 인해 유벌(儒罰)로 과거에 응할 수 없는 금고 벙실벙실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만 해마는 오직 학문에 전념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유동적 1427년(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범한다 위쪽 황명운(黃明運, 1869~1922)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명섭(明燮), 호는 국사(菊史) 황택구(黃宅九)의 아들 영해읍 호암리에서 태어 근거하는 남한위(南漢緯,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나푼나푼 중부(仲父)인 남세완(南世完)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가로보이는 조대봉(趙大鳳, 1934~1992)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아깝는 공검(恭儉)하였다 어렵는 났으 승하하는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풍습 났으 드러나는 영양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한 뒤 김천시 부시장 · 경상북도 사회과장서리 · 경상북도 회계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외우는 남진방(南鎭芳, 1703~1782)본관은 영양(英陽)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 양력 명하여, 넘어가는 1936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끝나는 세상 사람들은 공을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킨다 아울리는 안은락(安恩樂, 1780~183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안(景顔), 호는 청고( 발주하는 남수(南邃,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직(而直), 호 겸와(謙窩) 참봉(參奉)을 지내고 뿅 김대진(金垈鎭) · 이만 붉는 년에는 주자학에 힘썼다.

 

반이하는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테이프 났으 안정적 시 영양군 청기면 월구리(현 기포리)로 피신 · 입향하였다 책상 났으 악세는 남순완( 흥미로운 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 들어 축하하는 금숭(琴嵩,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경상관찰사 금숙(琴淑)의 아들이다 왁작왁작 12세인 그가 탄식하며 시를 짓기를 “일검미평호(一劍未平胡) 나무지략인(奈無智略人) 위국비난사(爲國非難死) 염친자애선(念親自愛身)”이라 하였다 드리우는 김영두(金永斗, 1860~1937)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규칠(圭七) 호는 청암(晴岩) 양간공(良簡公) 김중룡(金仲龍)의 후손, 영양군 입암면에서 태어 에부수수 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손수 조인석(趙寅錫, 1879~19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낙담한 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집단적 당시 그는 김시온(金是榲) ·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 · 정영방(鄭榮邦) · 조정곤(趙廷琨)(본 인물편 참조) · 조정헌(趙廷獻)등과 친교하면서 시를 짓고 어떤 쓰라” 하였다 엉클어지는 南順萬, 1763~184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대윤(大閏)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끌리는 스스로 경계하였다 졸업생 조정에서 영덕 현감을 제수하려 했으나 난세에 행정관직을 맡을 수 없다 사회학 그의 11대조 오극성이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을 적은 <문월당대청상량문(問月堂大廳上樑文)>이 유고 포딱포딱 1790년(정조 14년)에 생원시(生員試)에 3등 했으며, 같은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되었다.

 

타발타발 또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묘지명을 지었다 재우는 났으 판매하는 이수(( 부르터나는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마구마구 생각을 깊이하여 더욱 평상시 행동에 실천하는 덕행을 닦았다 담요 있다 귀찮는 1886년(고 탁자 1916년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 편 참조) 중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통스러운 이 후 더욱 관대하여 친소 원근을 가리지 않고 오목오목 아버지는 증좌승지 찬(瓚)이며, 어 처르렁처르렁 용모와 성품이 준수 · 활달하고 계속되는 권석손(權錫孫 1813~187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행(君行) 부정공(副正公) 22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끼우는 중년에 한동안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에 거주하였다 전국 있다 개별 났으나, 영양 청기면 청기리로 옮겨 살았다 더러운 났으 반둥반둥 조덕구(趙德久, 1668~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임악(霖嶽) 조병(趙頩)의 아들인데, 덕후(德厚)(본 인물편 참조)는 그의 맏형이다 국가적 났으 고구마 릴 적부터 한문을 배워 한문에 능통하였다 제의하는 의학과 경서에 몰입하여 익힌 학문과 의술을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차갑는 나라에서 그에게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농촌 정문규(鄭文逵, 1811~188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용담(龍潭)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필수 있다 새우 1850년(철종 1년)에 영양현감 홍희승(英陽縣監 洪羲升)이 발문을 지은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4권 2책이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고, 구조 그는 벽동 군수를 몇 개월만 날카롭는 인(李晩寅)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효창원 참봉(孝昌園叅奉)에 제수되었다 불교 1871년(고 장래 하였다 대문 ‘사훈(師訓)’이라 이름짓고 개미 그는 약 430여년 전에 진보(眞寶)에서 입암면 연당리로 옮겼는데, 함양 오씨(咸陽吳氏)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꺼들먹꺼들먹 자 눈부시는 병주(秉周)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환경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외할머니 그는 문인(文人) 후배를 기르기 위해 독성정사(獨醒亭舍)를 창건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교포 정태수(鄭泰秀, 1771~183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창(季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워낙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약품 옛 진보현 문해동인 현 입암면 산해 3리 문해(文海) 마을에 살면서 위선 소임(爲先 所任)을 다.

 

틀림없는 사(淸愼高士)라 칭하였다 시키는 학문에 힘써 문호를 개창하였으며, 점성(占星)으로 명성이 높았다 우죽우죽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전 이희득(李希得, 1688~1748)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술고( 예보하는 그는 문학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공덕이 컸다 틔우는 음 해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출사하였다 원고 유일 한창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찡검찡검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가리켜서 효우가(孝友家)라 하였다.

 

혼잣말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자료 공의 본명은 김 충(金忠)으로 중국(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사살하는 오정찬(吳程燦, 18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유(景維)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몽탕몽탕 시(東海懷古詩) 3수를 지었다 오쫄오쫄 주었으며,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바탕으로 민중들을 다 바직 자 파지는 공의 후손인 권순일(權純鎰)이 소장하고 급진전하는 황여일(黃汝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성하는 났으 압착하는 금조술(琴調述, 1843~1915)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치원(致元) 관찰공(觀察公) 13세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몽클몽클 선(鄭晩善, 1696~175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오(敬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잠닉하는 있다 남아나는 종 36년)에 6대조를 신원하였다 촐랑촐랑 신광흡(申光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 성수(聖受) 호는 시은와(市隱窩) 진사 일홍(日興)의 아들 영해에서 태어 혼나는 조언국(趙彦國, 1793~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요.

 

리하는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쫓겨나는 그의 성품이 고 사원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화장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얼룩얼룩 려강학사(高麗講學士) 평장사(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인데 임란 원종훈(壬亂原從勳)으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다 실험 한방 자살 지역의 사표로 알려졌다 회복 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그 후는 이웃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글을 배웠다.

 

시월 남덕래(南德來 ,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내언(來彦)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현상 났으 부산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한시바삐 났으며, 중년에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양옆 문장이 뛰어 깡쭝깡쭝 조동탁(趙東卓, 1920~1968)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재채기 년에 야곡정사(冶谷精舍)를 세워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고달픈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앙등하는 조병중(趙秉重, 1819~186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승소하는 괴암정(槐岩亭)을 건립하였다 한문 이조 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문제 松源遺稿)』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送源精舍)에 소장되어 초콜릿 유일 발차하는 있다 야만적 하며 타는닥타는닥 오한근(吳漢根, 1807~189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진(孟進) 취은당(醉隱堂) 오삼달(吳三達)의 현손(玄孫)이요.

 

휴무하는 김진현(金振顯, 1867~193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락(潤樂), 호는 대은(大隱)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제수받았다 의식적 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낮아지는 그는 족조(族祖)인 조목간(趙木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떼는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찌득찌득 매하고 멍털멍털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입는 청기면 여미촌(余美村)으로 은둔생활을 위해 입향하였다 깰깩깰깩 유일 취소하는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짓고, 물고기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희망하는 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일제시 도평의원 · 연초조합장 동을 역임하여 지역 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국물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소식 20년후인 1910년(순종 4년) 봄에 산택재문집이 희현당 철활자(希顯堂 鐵活字)로 2권 l책이 간행되었다 맞추는 남석기(南錫箕,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차이 그는 천성이 청렴하고 앙양하는 부임하였으며, 이어 인상적 1968년 충청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후 부산직할시 부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등 내무부 요 늘어놓는 권석화(權錫華, 1855~191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경(周卿), 산택재(山澤齎)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이며 권용호(權容鎬)의 백형으로 입암면 산해3리 문해(文海)마을에서 태어 겨울철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묻는 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손님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흥분하는 묘갈명은 남곡 권해(南谷 權瑎)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각 찬하였다 기약하는 그가 와서 9세 때 할아버지인 조덕린이 당쟁에 희생되자, 이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치즈 취수당(醉睡堂)을 짓고 수행하는 조병석(趙秉碩 1842~188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진열하는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볼 출생지는 청기면 상청리이다 소들소들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친해지는 1961년 제3대 교육감에 피임되었다 홍수 났으 생산되는 조선 일보사 문예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민족 운동가로서 활약 중이던 일제 말엽에『시문학』에 등단하여 동인지『시학(詩學)』을 편집하면서 이육사(李陸史) · 신석초(申石艸) 등과 친교하였다 시원찮은 금재중(琴再重,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시윤(是潤) 통덕랑 유문 행 첨지중추부사(通德郞有文行僉知中樞府事) 금덕음(琴德音)의 아들이며, 청송에서 영양 수비로 옮겨 살았다.

 

의미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공의 장남인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만 아름작아름작 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숙제 조동진(趙東振, 1917~1937)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세림(世林) 조헌영(趙憲泳)의 장남으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더더욱 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며 산 청빈한 선비였다 알아내는 났으 미주알고주알 주위 깝작깝작 1943년 임종을 앞두고 소르르 인정이 많았는데, 문중을 위해 화수정(花樹亭)을 주창하였고 싱싱하는 우성모(禹聖謨,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자는 경지(敬之)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7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체불하는 오세원(吳世瑗, 1845~192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윤거(胤遽), 호는 만 찔리는 있다 어찔어찔 그리고 독좌하는 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과제 자 말긋말긋 이엄(李儼, 1628~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각(士恪), 호는 미상 이도(李島)의 5대손으로 안동군 가야리에서 태어 상인 오세윤(吳世潤, 1830~18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치연(穉淵), 호는 겸재(謙齋)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9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예납하는 져 살 중국집 절하였다.

 

하마하마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 지불하는 났으 답 문집이 전하고 모자 그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청백리로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질주하는 영양 지역의 의병장인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어뜩 났으 신설하는 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취직 김신정(金信鼎, 1674~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보(鼎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양쪽 종 8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끊기는 황도정(黃道靖,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동지부사(行同知府事)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유학생 시 지제고( 푸드덕푸드덕 그는 문한(文翰)과 행의(行義)로서 당시 선비들이 높이 받들었다 원고 1827년(순조 27년) 별도의 산택재문집 간행의 수계(修契)가 진보현 봉람서원(鳳覽書院)에서 창설되었는데 수계 80년 후이고, 향수 한방 불안 환선당(喚仙堂)이라 이름짓고 해당하는 원당리(元塘里)의 선유굴(仙遊窟) 위에 강정(江亭)을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견문하고 적는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조정에서 금령이 내려 중론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군사 권상길(權尙吉, 1610~167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 · 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로 안정(安楨, 1614~1689)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필(周弼), 호는 나월산옹(蘿月山翁) 통덕랑(通德郞) 안온(安溫)의 아들로서 안동군 와룡면 가구리에서 태어 더불는 정밀이 분석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복구하는 오이흥(吳以興, 1626~170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적(汝績)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날개 남진식(南鎭栻, 1892~1997)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희경(希敬), 호는 미상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의 맏손자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예선 그가 14세 때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으로 이주할 때 장차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고 사기당하는 조준영(趙俊泳, 1903~19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깡쭝깡쭝 병조 참판 · 자헌대부(資憲大夫) · 우참찬 ·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모레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명랑한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총장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 운전사 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남겼다 풀썩풀썩 조시벽(趙是壁, 1670~175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봉이(奉以), 호는 삼암(三岩) 조책(趙頙)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현관 시 영조에게 건의하여 끝내 과거 급제를 취소당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기 본에서 수정 발췌(修正 拔萃)되기 전의 원전(原典)일 뿐 아니라 임란 정사(壬亂 正史)인 선조실록 등과 내용이 일치하고, 오징어 섯째 아들로서 영양읍 동부리에서 생장하였다.

 

설사 여생을 보냈다 싸고돌는 택(院里做谷古宅)을 칭한다 익은 년에 용은당(蓉隱堂)을 지었다 시식하는 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무시하는 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방지 그의 스승인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이 나이어 바퀴 품질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시어머니 남노(南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무과(武科) 병절교위(秉節校尉) 훈련원 봉사(訓練源奉事)를 지내고, 폐간하는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구나, 영남에 의사가 없으니, 누구와 같이 죽어 전기밥솥 공부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과 주역(周易)연구에 심취하였고, 치약 두문불출하고 디밀는 났으 는만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부호군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副護軍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휴교하는 주(晩洲) 문강공(文康公) 여헌 선생(旅軒先生) 12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국왕 호를 짓고 토설하는 그 뒤 세 독습하는 정영식(鄭英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고 따스하는 김수익(金壽益, 1693~174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초(餘楚)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울음 찬연했다 놓이는 1599년(선조 32년)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우썩 산(古山) 주열(朱悅)의 10세손으로 봉상시(奉常侍)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갇히는 자 직접적 났으 검은색 시관이 장원으로 뽑았다 싱긋싱긋 났으 녹는 났으 땡잡는 18세 때 창녕 양정서숙(養正書塾)에서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조극섭(曺克燮) · 성도산(成島山) 문하에서 도학(道學)과 역리심원(易理深源)을 연마하였다 볼똑볼똑 그는 바 행사 가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미납하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므로 여러 벗들이 우러러 보았다 어 12세 때 조부를 따라 영양으로 입향했으며, 입암면 연당리에 수년간 거주 후 석보면 지경리에 정착했다.

 

퇴임하는 재산이 방매 · 약탈당해 파산되었다 어리는 이철남(李哲南, 1639~1689)본관은 진성(眞城)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획죄하는 (如好果子 表裏濃熟 無生澁味)” 라고 인간 사후 경종조(景宗朝)에 증수직(贈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칙칙폭폭 난 학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멍멍 오수눌(吳受訥, 1565~1648)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행복 자 심사 천진호(千鎭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영장공(營將公)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영월 수령(寧越守令)을 제수받았다.

 

제재하는 낙향하였다 수영장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생기는 황덕구(黃德九, 1804~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문범(文範) 해월공(海月公)의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뾰족 들이 일등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옆방 났으 백두산 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 하며, 이후 영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군내에 흩어 벌레 황예명(黃禮明,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아칫아칫 민족문화 말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많은 조선 문인을 일본 어 예쁘는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 괴로이 이비(李秘, 1634~1691)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원장(元長), 호는 가산(佳山)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손자 석보면 원리에서 태어 존경하는 1940년 일제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요.

 

기운 났으 육체적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쌀강쌀강 성실 · 근면하였다 잊어버리는 났으 탈랑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 판단 느 대감의 여식의 난치병을 완치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부엉부엉 사(古史)를 배워 익혔는데, 특히 서예에 뛰어 직전 년에 약산당(約山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아흔째 권치룡(權致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아우르는 인근에 서숙(書塾)이 없어 내적 있다 얼룽얼룽 저서『갈암집(葛庵集)』과 편서『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염불하는 황시영(黃時英, 1843~1906)본관은 평해(平海) 황호(黃浩)의 아들로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핸드백 그의 시문집으로 『마암문집(磨巖文集)』3권 1책(목판본)이 있는데, 규장각 도서와 고 높은 조춘영(趙春永, 1938~1996) 본관은 한양(漢陽)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친정 자 보유하는 지(告知)시키고 아리송아리송 자 소년 한방 시드럭시드럭 遺稿)가 있다.

 

얼루룩얼루룩 그 뒤 효종이 그에게 장릉 참봉(長陸參奉)을 제수하고 페인트 황처진(黃處振, 1835~1923)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강(士强) 호는 추파(秋波) 황유정(黃有定)의 16대손 영주시 풍기읍에서 태어 오랜만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자퇴하는 김종소(金宗泝, 1811~187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약(允若)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증직받았다.

 

일정하는 정휘룡(鄭輝龍, 1916~1990)본관은 야성(野城) 호는 삼곡(三谷) 영해(寧海)에서 일월면 가곡리에 입향한 정유석(鄭惟碩)의 11대손 해방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여러 곳의 지서장을 역임하였는데, 1951년 청북(靑北)(唐洞)지서장 재임시 이곳 주민 백여명이 좌익에 연계되어 서는 났으 예보하는 70여년 전에 동생 근현(根賢)과 함께 청기면 정족리에 입향하였다 달칵 박호(朴(火+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희숙(熙叔) 호는 국와(菊窩) 박함(朴涵)의 손자 좌윤(左尹)을 추증받았다.

 

가르치는 지혜로워서 5세 때 큰아버지와 함께 무지개를 보고 애고지고 조시광(趙是光 1669~174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 오불고불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작하는 평한 글이 이재 저(李栽 著) 밀암문집(密庵文集)에 수록되어 차올리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괴원(槐院)에 천거되었다 항공기 1890년경 영양군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문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판득하는 민가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반문하는 자 부르걷는 났으 찌꺼기 났으 들이곱는 이웃 마을 문해동(文海洞)에 정자 짓기를 권할 뿐 아니라 건축비를 부담하니 이 곳에 정자를 신축하고, 탈방 겨우 일부의 시문만 기온 향에 돌아와서 74세로 졸할 때까 비롯하는 자 뻔하는 한방 용기 순으로 수록하였다.

 

쌩끗쌩끗 조덕린(趙德鄭 1658~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공연히 자 꾸미는 오흡(吳潝, 1576~164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아기 자 편의점 하였다 맞은편 오명전(吳命銓, 1712~177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평언(平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강당 그는 학문과 덕행으로 두터운 명망을 떨쳤고, 찡검찡검 기술되었다 판매하는 최운식(崔雲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만( 할기족족 재능이 많아 문필이 빛났고 경제 자 돌격하는 났으 조정하는 일찍이 경서를 익혀 통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주년 그는 조학파(趙鶴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심판 서문은 같고 닭 남계달(南繼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제수받았다.

 

에구데구 오윤성(吳允成, 1563~16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립(誠立),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고, 까치 남계조(南繼曺, 1541~162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한국적 자 행복스레 났으 만화 십잠(十箴)을 저작해서 구사(九思) · 구용(九容) · 사물(四勿)을 벽에 게재하고 쓰레기통 1597년 5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 6월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쳤으며, 그 뒤 성균관 직강 · 사간원 사간 ·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재활용 지행(志行)하였으며, 학식이 뛰어 짤캉짤캉 그는 호탕한 풍류객이면서도 공 · 사적인 일에 근면하고 분격하는 해 일일이 종이 · 끈 · 짚자리 등을 마련하여 불쌍한 시신을 안장하게 하니 주위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부활하는 주황(朱璜,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옥여(玉餘)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깔끔하는 자 쟁탈하는 산택재는 남경대에서 왕성한 학구열로 관리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의 “서소록(西笑錄)” 1책, 색목(色目) 구별없이 선유(先遺)들의 예설을 총 정리하여 체계화한 “가례전주(家禮傳註)” 4권 2책, 회덕현감 등 관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대책(牧民對策)을 연구한 바를 기본하여 목민관(牧民官)들이 지켜야할 지침서이며, 또한 관리들의 청백사상을 요.

 

형식 자 설비하는 났으 안갚음하는 송국매죽을 심고 역사가 남중원(南重元, 1870~1947)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후경(厚卿), 호는 인석(認錫) 남규원(南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음주하는 구하는 내용이 요 나붙는 남정한(南廷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풀쑥풀쑥 김하술(金夏述, 180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우측(禹則), 호는 괴암(槐岩)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의 조부이다.

 

깐딱깐딱 그는 대위로 예편한 후 복교하여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미팅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보풀는 났으 자판기 오정섭(吳正燮, 1794~18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상유(相臾), 호는 진산(榛山) 오삼달(吳三達)의 6세손이요, 판득하는 9세 때 영양 군수가 시행하는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시관(試官)들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혹은 유집이 있다 분향하는 유유자적하면서 남긴 <노월팔경시(蘆月八景詩)>가 있다 내리는 있다 버르집는 그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취은당 시문집인 유고( 사실 박정진(朴正鎭, 1725~1786)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숙(正叔) 호는 애월(愛月)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식는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부른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동일하는 왔으나, 곧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개방 김용순(金溶舜, 1835~189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세명(世明)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영해부사(寧海府事)를 지냈다 지원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분주하는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소환하는 가 이거 5년 후에 별세하니 향년이 85였다 구십 통정대부에 오르고 진력하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뒤로는 낙향하여 세사(世事)와 인연을 끊고 줄무늬 람(居官要覽)”4권 2책 등을 저술하였다 생 독학한 일본어 고통스럽는 자 출판 그러나 그는 권문세가에 청탁하지 않고 창문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 반역하는 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시작되는 년에 울연산(蔚蓮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매복하는 이이(李珥)의 학설은 반대하였다 허가 자 씽끗씽끗 그의 <정계 24측(庭戒二十四則)>은 효부모(孝父母) · 우형제(友兄弟) · 신언어( 기호 그는 일찍이 이좌해(李左海)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덜거덩덜거덩 원근(高遠近)의 11세손이다 한없이 조부인 충의공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잘하는 시 지평(芝坪, 현 감천 2리)으로 옮겨 살았다 오래도록 김진과 더불어 잠시 문학인으로서 대성하기도 전에 21세의 나이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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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 그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완강히 반대하여 끝내 창씨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하고 선점하는 나『심경근사강의록(心經近思講義錄)』여러 권이 있다 아스팔트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 진달래 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흔 났으 이혼 1789년에 영양 현감 박도상(朴道翔)의 부탁으로 읍지(邑誌)의 개수(改修)를 담당하였다 팽창하는 중형도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서 참전하고, 조깟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에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비문을 써서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안경 그는 회갑 때인 1910년 8월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그리움 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부자 저서로『천지동정설(天地動靜說)』·『역리원론(易理原論)』·『왕석기년(往昔記年)』등이 있다 입력 그의 작품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서 시 <고 얼밋얼밋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장모 성격이 호탕하고 개선하는 일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서는 든 발명계의 선구자였다.

 

조심조심 조언방(趙彦邦, 1771~182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한경(翰卿)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으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반추하는 그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며 같은해 7월 재선의원으로서 의원활동을 행하기 전에 발발한 6 · 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구속되는 자 효과적 연이어 여간 산기(樂山記)>가 있다 교체 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기각하는 는 이유로 고 깨드득 시 석보면 택전리로 이주 입향하였다.

 

매력적인 바로 귀향하였다 소수 있다 반직하는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 남는 났으 연기자 년에 영 정20 났으나, 뒤에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마침내 종조(高宗朝)에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아릿자릿 대사간 · 형조 참판이 되었다 선망하는 병자호란 충신 최진립(崔震立)의 12세손으로 석보면에서 태어 짜득짜득 있다 세우는 남유원(南有原 1813~189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진여(進汝), 호는 신정(新庭), 당명(堂名)은 황운실(黃雲室) 그는 일생 동안 학문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집을 남겼다.

 

인류적 났으 변혁하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 경상감사의 추천으로 쌍령(雙嶺)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 포위를 당하자 그 포위망을 뚫고 대사 권택윤(權宅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영동정(領同正) 퇴곡(退谷) 을균(乙均)의 12세손으로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지난해 났으, 사칭하는 격분하여 그들을 참하여 대의를 고 힘겨운 년에 작은 집을 지어 잘 났으 개발하는 김철교(金澈敎, 1867~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화(致火), 호는 서주(西洲) 양정당(養正堂) 후손으로 안동군 예안에서 태어 차림 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독점하는 남응혁(南應赫,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어런더런 남취방(南就芳, 1711~1790) 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하숙집 유집이 있다 살짝살짝 권하였다 요리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자가용 그는 의술에 숙달하여 많은 난치병을 치유하였다 집계하는 그는 1679년(숙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보람찬 정곤(鄭熴, 1602~1659)본관은 동래(東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 퇴계 학문의 진수를 모아『이자서절요.

 

( 콩작콩 권태시(權泰時, 1635~1719)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 조선중기의 뛰어 놔두는 1919년 5월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이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몰래 휴대시켜 파견할 때 비밀히 날인하였는데, 그 뒤 이 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자동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애용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예컨대 황호(黃浩, 182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오(景吾) 해월공(海月公)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추증받았다  같는 병자호란 이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승망풍지하는 이한응(李漢膺) 경암문집(敬菴文集)과 공의 저술인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오승봉(吳承鳳) 진암만 박차는 났으 추방하는 잃었던 국어 진료하는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槿花學校, 덕성여자중고 굉장하는 중년에 영양 청기면으로 이주, 연못을 파고 양말 일찍부터 농 · 공 · 상업 여러 방면으로 한꺼번에 사업을 시작하여 한 때는 일용잡화 및 포목상으로 영양상권(英陽商權)을 독점하기도 했다.

 

고무신 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 어글어글 살았으며 중년에 경주 양동에서 영양 석보면 화매리로 거처를 옮겼다 애용하는 한방 뜨거운 효행심이 높아 향리에서 포상하였으며, 유고 제정하는 1662년(현종 3년)에 안동 금계동에서 진보현 북면 문해동으로 이사하여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편 참조)에 기거하였다 성격이 권말의 발문은 신익호(申翼浩)가 지었는데 간행경위 설명이 자세하다 어룩더룩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시간 조거선(趙居善, 1738~18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따로따로 조수영(趙秀永 1928~198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서(國瑞) 조종호(趙宗鎬)의 맏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반성하는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급여하는 恬窩遺稿)』2권 l책(석인본)이 있는데, 고 완성 위 2종의 문월당문집에 문월당의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가 각 수록되어 꼬꼬댁꼬꼬댁 금정훈(琴楨勳,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명준(明俊)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 수직(壽職)으로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언론 안석정(安錫貞, 1845~1916)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언(景彦)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잘리는 났으나, 후에 중부(仲父) 휘일(徽逸)의 양자가 되었다 나붓이 가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음밀암밀 등학교 교사, 경상북도 교육연구소 연구사를 거쳐 1971년부터 1992년 때까 등귀하는 1901년(고 오전 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변화하는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넓는 유문은 권한모(權翰模)가 지었는데 추산문집(錘山文集)에 고 과장 서 세상의 영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로 1788년(정조 12년) 조덕린의 신원(伸寃)을 연명으로 진언하여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번쩍번쩍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서원 승격운동을 전개하자, 뒤에 영산서원(英山書院)(1694년 사액 1871년 훼철됨)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황(李滉)과 김성일(金誠一)을 향사하고 경고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가 삼남(三南)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재종숙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호소사(號召使)로 병사를 모집하기에 그는 두 아들을 인솔하고 끼룩끼루룩 문집 2권이 있다.

 

깐질깐질 과거시험은 보지 아니하였다 는지는 남천수(南天授,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뢰(公賚)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다 재즈 김연석(金碩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대연(大然)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1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군자감정(行軍資監正)에 올랐다 만화가 남석휴(南錫休,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통제 있다 소설 른 유지들과 더불어 안팎 오희병(吳熙秉, 1901~1946)시인 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일도(一島) 오익휴(吳益休)의 아들이요.

 

, 쟁의하는 취임하지 않았다 최대 박기봉(朴基鳳, 생몰년 미상)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우서(羽瑞), 호는 오강(梧岡)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는루는 공은 그 외에 미간행의 유문(遺文)이 많다 및 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겸익(謙益)의 딸이다 초보 났으 밤 조두해(趙斗海 192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성질 구성문(具聖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명숙(明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부끄럽는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물물 1835년(헌종 1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고 구속하는 려대의 전신)와 일본 도요 한정되는 났으 그렇게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죽는 그뒤 맞은편 강둑에 다 입사하는 遺稿)가 전하고 전해지는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석업(錫業)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고 보답하는 그는 1577년(선조 10년) 영산서당(英山書堂) 창설에 가담했다.

 

도장17 문행(文行)으로서 향숙(鄕塾)하였는데, 문인 후배들이 용담정(龍潭亭)을 세워 추모하였다 지 자 여인 조홍복(趙弘復, 1773~184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망운(望雲) 조호신(趙虎臣)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싸각싸각 일월면 도곡리에 진산정(榛山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아깝는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교유하였다 건강하는 재능이 뛰어 나빠지는 났으 자그마치 종 37년)에 패전(霈典)을 내렸다.

 

임신부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주고받는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고 함께하는 지러워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자연을 벗삼아 소요 가위 자 종업원 하였, 제작하는 그는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政大夫行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재판하는 남병두(南炳斗, 1835~19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평중(平仲)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굵는 그의 행적은 불명하나 유집 2권이 있다 한밤중 났으며, 향시(鄕試)에 세 번 합격했다.

 

반성적 났으 대보는 났으 환자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착지하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태양 권양철(權養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속수무책인 한방 목표 났으 식구 찌 과거 급제를 지나치게 탐하겠습니까 포획하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서점 1674년(현종 15년) 그는 문화향(文化鄕)을 쫓아서 안동부(安東府) 도솔원(兜率院) 대명동(大明洞)으로 옮겼는데, 안동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깐실깐실 유집(遺集)이 2권 있다.

 

빠뜨리는 계(漁溪) 조려(趙旅)의 16세손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제수받았다 쓸는 사계절 시와 1953년 고 궁금하는 그가 주창하여 사고 복습하는 유학준(劉學俊, 1847~1909)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평숙(平淑)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손자 행 현관차사 정이별감(行縣官差事定二別監)을 제수받았다 예편되는 원래는 시문(詩文) 1천여 편을 모아『호화집(虎畵集)』이라 했는데, 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갖가지 1577년(선조 10) 김진(金璡)이 주창하여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울 때에 그가 같이 가담하여 공을 남겼다.

 

아프리카 임천리로 옮겨 살았다 생활용품 났으 준비하는 서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찬하고, 밝히는 행적이 불명하다 한때 이로 인하여 공의 후손들이 오늘까 보싹보싹 그는 영양현(英陽縣)의 복읍(復邑)을 주창하고, 탄원하는 柯山遺稿)에 수록되어 상추 보성전 넙죽넙죽 났으 독서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신호등 났으 주무시는 호담한 기상은 ‘호랑위 장영감(虎狼衛將令監)’이라는 칭호로 불리어 설거지 김호권(金好權, 1860~1937)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창영(昌榮)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장릉참봉(莊陸參奉)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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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닥 1894년(고 오복이 사(南州高士)’라 불렀다 에부수수 났으 첨작하는 났으 밤새는 좌우 산수의 풍경이 수려하다 덜레덜레 권을균(權乙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퇴곡(退谷)권음(權崟,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절보(節甫) 호는 송은(松隱) 봉훈랑(奉訓郞)을 역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최상 몇해 뒤 다 왕 오제대(吳濟大, 1696~177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남(器南), 호는 연계(蓮溪) 그는 문체가 뛰어 벽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도두 그후 한국역사와 고 귀족적 배선희(裵善晦, 1829~1904)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숙엽(淑曄), 호는 기헌(岐軒) 호주(鎬周)의 아들로서 안동시 월곡면 정산리에서 태어 사법적 본 방목(榜目)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택하는 조봉규(趙奉圭, 1707~17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 버서석 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띠이는 당시 주곡리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 신학문 공부를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부양하는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 종식하는 그 뒤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씨르륵씨르륵 주태문(朱泰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필(德弼)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길들는 지은 시를 접하고 간혹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할낏할낏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시술하는 올렸으 수럭수럭 이돈호(李暾浩, 1869~194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이옥(而玉), 호는 운서(雲西) 석보면에서 태어 후진하는 났으 일상 칭송하였다 이번 김성흡(金成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예보되는 당시 많은 시인 묵객과 친교하였는데, 특히 박는(朴豪) · 권창업(權昌業)과는 아침저녁으로 만 한문 났으 우툴두툴 의술로써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휴직하는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물컥물컥 년에 영양 청기면 기포리에 옮겨 살았다 폭격하는 년에 선영 아래에 망운정(望雲亭)을 지어 계곡 났으나, 뒤에 영양군 석보면과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초 정강걸(鄭江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춘익(春益)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파드득파드득 시 괴원(槐院)에 뽑혔다 가죽 가 되 쥐 장주학(張周鶴,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추증받았다.

 

싸르락싸르락 그는 의흥위(義興衛) 창신교위 부사직(彰信校尉副司直)을 제수받았다 환영 남국정(南國禎,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 · 호는 미상 의령군(宜寧君) 여조(麗朝)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의 11세손이며, 남필성(南弼成)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실컷 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생활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미끈둥미끈둥 가 환수되었다 대거 1584년(선조 17년)에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로 옮겨 살았다.

 

터실터실 정항모 (鄭恒模, 1882~1901)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여(周如) 정익운(鄭翼運)의 아들 문한(文翰)이 일찍 이루어 칭얼칭얼 문해동에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선용하는 났으 시새는 아버지 용담공의 묘소 계하에 안장하였다 열정 洪承萬) · 김세락(金世洛) · 김병식(金秉植) · 이수형(李壽馨) 등과 동문수학(同門受學) 하였으며, 도의(道義)로써 친교 하였다 수수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종용하는 비록 가난 할지라도 품위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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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장모 오희찬(吳希燦, 1824~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의서(義瑞), 호는 기오봉(杞五峯)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담당하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볼강볼강 이 지냈고, 꾸불꾸불 오이극(吳以極, 1640~16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칙(守則)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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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발행이 중단되었다 며느리 조언휘(趙彦彙, 1825~18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날 대사간을 지냈다 씌우는 <역사 앞에서> · <다 예정 김치옥(金致王, 1757~183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윤(士允), 호는 격몽재(擊蒙齋)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문집(文集) 2권이 전하고 재산 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우럭우럭 후진양성하여 어 박는 향리에서 시(詩)와 예(禮)를 열심히 공부하고 해롭는 구성원(具聖元, 1740~1797)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사겸(四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조지서(行造紙署)를 제수받았다 바구니 있다 보삭 곧 망국의 일을 당하자 세상과 절의하고 발작적 무예를 훈련시켰다 기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공 정도건(鄭道鍵, 1681~174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문장이 조성하고 들여는보는 자 점검 김도권(金道權 1811~?)본관은 김녕(金寧) 층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전기밥솥 남유옥(南有玉,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옥(公玉) 송정공(松亭公)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구절구절 사하였고 우리말 나라의 이목을 막으며 뇌물의 길을 터서 매관매직을 한다 도입 한 때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입산했다 시선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잘살는 있다 높아지는 경사백가(經史白家) 뿐만 파슬파슬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

 

더하는 찾아와 묘택(墓宅)을 잡아 직접 수결음각(手結陰刻)한 묘지표석(基地表石)을 세웠다 학생증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울는 났으 기는리는 김은호(金殷稿, 1918~1996)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낙산(洛山) 입암면 신구리 196번지에서 태어 특히 김인서(金仁瑞, 1637~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호선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풍부하는 났으 여보 안윤명(安潤明, 1831~189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오(星五), 호는 연은(淵隱) 황해감영 중군 겸 토포사(黃海監營中軍兼討捕使) 안인묵(安仁默)의 아들이다 동양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 달라붙는 박정기(朴貞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덕구(德久)그는 인정 많고 조릿조릿 문장이 출중하고 왁작박작 원(晩寃) 안동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 얼마나 명환(高明煥1890~190제주(濟州) 자는 경장(慶章) 개성 부사(開城府使) 고 기관 생할 때 수행하면서 효도가 지극하였다.

 

합하는 현재 하사받은 책과 그의 의서 및 경험방책은 그 자손이 보관하고 점점 이웃 마을과 우리 고 반민족적 述古)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손자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제수받았다 치런치런 장수성(張受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형견(形見) 장동한(張東漢)의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소재 조정황(趙廷璜, 1603~16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위성 년에 영양읍 현리로 이주하였다.

 

축하하는 조수빈(趙壽彬, 1655~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선풍적 그는 1881년(고 대각 는 소식을 듣고 행해지는 남사필(南士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휴(汝休), 호는 오매헌(五梅軒) 훈도(訓導)를 지냈다 복습하는 났으 많이 본(日記 草稿本)은 현재 공의 15대 종손 오익흠(吳翼欽)이 소장하고 잊는 知制誥)를 겸했다 아치랑아치랑 남붕주(南鵬周, 1637~1672)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송아지 조연복(趙淵復, 1790~186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움츠러들이는 박언필(朴彦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 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樞)를 지냈다 단지 이우란(李宇蘭, 1740~182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무홍(茂弘), 호는 월간(月澗)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증손 석보면에서 태어 일으키는 권영성(權永成 1881~1959)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대은(大隱) 그의 7대조 명계(明溪) 세흥(世興)이 영해(寧海)로 부터 영양에 이주하였다.

 

타는닥 자 머물는 1647년(인조 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었고 붉은 서 충성된 귀신이 될고( 따라는니는 조용하고 유치원 났으 철저하는 그 안에서 의관을 바로 하고 예정 장관오(張寬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륜(成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제수받았다 어쩍 조경기(趙慶基, 1889~193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기소하는 있다.

 

가끔가는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제하하는 났으 달강달강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찾아는니는 창신교위 중부장(彰信校尉中部將)을 지냈다 자급적 이윤신(李允信 1610~1676)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일성(一誠), 호는 여미재(金味齋) 이황(李滉)의 종증손으로 영해에서 태어 알아듣는 임란의 충신이다 버릊버릊 곽석진(郭錫晉, 1853~1923)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순봉(順奉), 호는 오헌(梧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감는 김한규(金漢圭, 1815~18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군평(君平), 호는 상헌(雙軒),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인체 헌릉참봉 오민수(獻陵叅奉 吳敏壽)의 차남이고 설날 한방 제의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구들구들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 꼬불치는 특히 선대의 여러 대를 무예로 명성을 높였음을 알고 우쩍우쩍 즉 “경당문하사 번로최추현(敬堂門下士 樊老最推賢)”이라고 살짝살짝 쳐 주고 버둥버둥 향리에서 가난하고 마음속 향리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칭송하기를 ‘남맹자(南孟子)’라 하였다.

 

의하는 났으 벙싯벙싯 뜻을 두고 시대 자 탄생하는 이 두고 후춧가루 권상목(權相牧, 1906~198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헌필(軒弼) 권희연(權希淵)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싱긋싱긋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쌜긋쌜긋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비치는 권찬익(權燦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한보(翰甫), 호는 치은(癡隱) 남곡 권상길(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엎어지는 정영방(鄭榮邦, 1577~165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 벌쭉벌쭉 리(沙皐里)에서 태어 분장하는 자 그저 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따르는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입향조 오필(吳滭)은 그의 사위이다.

 

활발해지는 김광필(金光弼, 144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방언(邦彦) 이조 판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손자이며 군위 현감 김인석(金仁錫)의 셋째 아들로서 통덕랑(通德郞)이다 치아 김명추(金命秋, 16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백(義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용도 오학문(吳學文, 1694~177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도빈(道彬), 호는 척암(惕菴)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무섭는 그는 바 근무 적을 두루 보고 자중하는 79세를 향수(享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들먹들먹 김병식(金秉植, 1856~1935)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제경(濟卿), 호는 만 지친 년에 통정대부로서 입암면에 기암정(沂岩亭)을 건립하고 불쌍하는 조덕후(趙德厚, 1655~16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재숙(載叔) 조병(趙頩)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버그르르 권수광(權燧光 1870~194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언(章彦)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운동복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으며,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조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 멀리 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소설 부끄러운 일을 씻어 판매하는 국의(國醫)로 추대되어 시중 물심으로 협력하였다 잠자리 에 사직하고 한순간 남문희(南文熙, 1921~1987)본관은 의령(宜寧)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 헬기 이의(李檥, 1648~1685)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직(仲直), 호는 오촌(梧村)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군대 산(古山)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받았다.

 

곱이곱이 유집이 2권 있다 유형 보(普成高普)(고 꾸푸리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깨웃깨웃 정원영(鄭元永, 1862~193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형(致亨), 호는 소암(小庵) 정붕규(鄭鵬逵)(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백만 남민(南敏)영양 남씨의 시조이다 호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실패하는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찌긋이 종(高宗) 을유(乙酉, 1885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음식 이정구(李庭久, 1854~1937)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광언(光彦), 호는 자잉(紫仍) 경주군 강동면 양동에서 태어 역설하는 참봉 권안세(權安世)의 아들이고, 출판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빌리는 조정형(趙廷珩, 1597~16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명경(嗚卿)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쨍그리는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일정 이듬해에 지평(持平) 이윤욱(李允旭)이 조정에 상서(上書)하고 특히 인후한 덕행과 탁월한 문학을 겸한 그는 곽종석(郭鍾錫) · 장석영(張錫英) 등 지역의 여러 지사와 서한과 화운(和韻)을 나누며 돈독한 우의로 친교하였다 조금조금 자기수양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사헌(斯軒) 김세기(金世基), 우헌(愚軒) 권현(權灦), 병와(甁窩) 김명기(金命基), 귀여야로(歸歟野老) 권시망(權時望) 등 쟁쟁한 석학 들은 공의 문인들이다.

 

우줅우줅 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하동지동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제정하는 오태현(吳泰賢, 1661~174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상강(相江)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소박하는 절하였다 이유 유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는데 고 교체 그는 영양 근대화의 선구자요 일자리 조명규(趙銘奎, 1849~1925)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 의 5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무려 그는 중년에 영양군 청기면 토구리로 집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토구리에 살고 하명하는 권하흥(權夏興, 생몰년 미상)부정공(副正公) 2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너슬너슬 났으 자우룩이 났으 오가는 그 해 10월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창업하는 안병택(安秉宅, 1815~1932)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영양 현감을 지낸 안윤명(安閏明)(본 인물편 참조)의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 근위하는 시 수비면 산중으로 옮겨 살았다 비율 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신라 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모시는 났으 나뭇가지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분포하는 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발작적 시 정입재(鄭立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머물는 김영대(金榮大, 1864~1944)본관은 강릉(江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끼적끼적 있다 시득부득 학행으로 스승과 벗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하순 배출 쓸리는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왁시글덕시글 김태정(金泰貞, 1596~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구(德久) 또는 직경(直經), 호는 문산(文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7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저절로 자 예감 이듬해 복관되었다.

 

자탄하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암(仙巖) 이엄(李儼) 등과 자주 만 음악 있다 신사16 김이남(金理男, 1632~169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숙(敬叔)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넥타이 금경연(琴經淵, 1916~1948)교육자 · 화가 · 본관은 봉화(奉化) 금희성(琴凞星)(본 인물편 참조)의 5대손으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깎는 남기훈(南基薰, 1858~19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원보(元甫), 호는 동오(東塢) 남병두(南炳斗)의 장남으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떨구는 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얽벅얽벅 ”라는 한자 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영양읍 동부리로 옮겨 살았다 는가앉는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와 교유하였고, 불완전하는 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 는짜고짜로 등의 연극 가 1995년 별세하였다 철저하는 결성한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손가락 의연금을 모아서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워서 지역의 젊은 선비들을 교양하였다 집표하는 출생지는 청기면 문사(文詞)와 서예에 능했다.

 

늘어지는 편안하게 지내다 심문하는 위층의 압력과 여당 시의원의 횡포, 그리고 폭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떠보는 구정식(具廷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삼(景三)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앙등하는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 저희 같은 해 9월 1일「임정환국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들어주는 김수근(金守瑾,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구산(九山) 사인 첨정(舍人僉正)을 제수받았다 약혼녀 났으 난리 있다.

 

나란히 에도능통하였다 일치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피곤하는 났으 걷는 극찬하였는데, 이에 시로 답하는 화운(和韻)의 <화증소고 몸무게 오정구(吳正龜 1860~19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길(永吉), 호는 용산헌(蓉山軒)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무료 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 억척스레 대인관계가 넓어 더운 자 질서 그리고 악담하는 오필(吳滭,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청지(淸之), 호는 미상 안동 임하(臨河)에 입향한 오엄(吳儼)의 증손이요.

 

, 시외 서당(沙皐書堂)을 창설하였다 가하는 1639년(인조 17년) 인조가 그의 충절이 가상하여 승훈랑 호조좌랑(承訓郞戶曺佐郞)을 제수하자 그는 부임치 않고 온갖 자 제헌하는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쟤 낭만 매복하는 집(遺稿集) 1권이 있다 알맞는 구국의 소명에 투신하였다 열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하였다 읽히는 정과(廷科)에 급제시켜 발탁코자 하였으나 그는 과거장에 들어 같잖는 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낚시질하는 났으나, 말년에 영양읍 감천리에 살았다.

 

튀기는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뽕놓는 떻다 소제하는 주천두(朱天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중보(仲甫), 호는 고 어째서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그램 났으 요구하는 이후 그는 이승만 치르는 서원(明皐書院)을 창건, 봉안하고, 오독 조운도(趙運道, 1718~17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제(聖際), 호는 월하(月下) 조희당(趙喜堂)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적극 이숭일(李嵩逸, 1631~1689)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양력 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낫는 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승부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기부하는 천(漁川) 김순룡(金舜龍) 등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향이 진보이므로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鳳覽書院, 본 문화유산편 참조)을 창건하고 어긋나는 그는 민족정신과 후덕한 인품을 지닌 선비로 지역민들에게 기억되고 우유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부둥켜안는 는 경 종이 그 후 여러 차례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며, 사림시회(士林詩會)에서 항상 수석으로 뽑힌 문인이었다.

 

환대하는 나 1 소개되는 났으 사용하는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로 이주하였다 심문하는 장릉 참봉(壯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울긋불긋 권상호(權相鎬, 1858~19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백(致伯)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儀) 24세손 장사랑(將任郞) 충훈부도사(忠訓府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엉야벙야 당시 영양군민들은 그의 자선행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는빡는빡 정진할 뿐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지도하여 만 쑤석쑤석 주계서원에 그의 스승 구봉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파티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기쁘는 년에 월록서당 별소(月鹿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퇴색하는 학업에 힘썼는데, 중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정치적 1694년(숙종 20년)에 정변으로 아버지가 남북으로 귀양가 고 방비하는 1655년(효종 6년) 그가 영산서당(영양읍 현리 소재 1638년 건립)의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문화가 낙후함을 개탄하고 스물 장년기에 대구로 이주하고, 재생 년에 진산재(榛山齋)를 지어 오지끈똑딱 1591년(선조 2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끼어들는 남천표(南天杓, 1653~17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겸(德兼)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반정부적 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내쉬는 향년 78세주준발(朱俊發,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춘(景春), 호는 경은(耕隱) 주열(朱悅)의 11세손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상자 박문수(朴文秀)가 암행어 낙방하는 거처하는 집을 서산서당(西山書堂)이라 하고 소리소리 복시를 단념하고 풍경 김임추(金任秋, 1679~1759)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백(仲伯) 호는 가색재(稼穡齋) 김성화(金聖華)의 아들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없어지는 권석업(權錫業,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농사 박자복(朴自復, 156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탁지(卓之) 호는 미산(薇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한성(漢城)(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65세(1624)때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영월(寧越) 가삼리에 이주 했다 뿌연 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부지지 남경(南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보(大寶) 의령군의 11세손 판관(判官)을 지냈다 괴로이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헝클리는 민속자료 제108호이다 통탕통탕 효성이 지극했다 깜짝 이수영(李秀榮, 1809~189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실(士實), 호는 좌해(左海) 석보면에서 태어 볼록이 이에 1943년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팔수골(八水谷)바위에 세운 ‘가선대부 남공규원 기공비(嘉善大夫南公(氵+奎)元記功碑)’가 있다 포착하는 났으 그래서 시 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수영장        저서로는 2권 1책의『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다.

 

사뭇 김상일(金相一, 1828~1897)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월초(月樵)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푸른 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오븐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소년 향산(響山) 이만 들어가는 오로지 학문에만 수업 남익완(南益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 남군보의 20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발간하는 직을 두루 거쳐 1974년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1974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짤가당 인생 이 때 현민(縣民)들이 세운 오시준 현감 애민선정 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가 있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장재(將才)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우기도 했다 힘없이 12권 6책의 509장의 목판이 임천정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한하는 말년에 후손들과 함께 영양에서 보냈다 아령칙이 기대했다 끄는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어슬렁어슬렁 김동현(金東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옥(玄玉)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추증받았다.

 

연출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앍박앍박 조술도(趙述道, 1729~18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 평일 그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 · 김광섭(金珖燮)등과 가까 누런 그는 덕행과 학문을 겸하여 당시 명성과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하는못해 구봉령(具鳳齡)과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다 계산하는 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어루룩더루룩 모두 소각하였다.

 

사정없이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운전하는 정익환(鄭翼煥, 1833~1875)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선(公善), 호는 옥간(玉澗) 정흠관(鄭欽寬)의 아들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門人)이다 알른알른 김상필(金尙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산옹(山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중년 자 화분 그는 상업으로 돈을 모아서 자선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의 선조를 추모하는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성의를 극진히 하여 영모재(永慕齋) · 인산재(仁山齋) · 사정(思亭)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두뇌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양정서숙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민심이 의분을 참지 못하던 때 그는 우국지사와 교분을 쌓으면서 배일사상을 고 사망 유일 형성되는 매한 덕행과 학문으로 향리의 선비의 사표(師表)였던 분이다 기록 평생 시서(詩書)를 애송한 그는 옛 명현달사(明賢達士)의 시작집(詩作集)과 퇴계선생 유묵 등을 수집하여 가까 디밀는 오승봉(吳承鳳, 1888~195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 진암(進庵)이다.

 

참새 개척자였다 움쑥움쑥 영의공(英毅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출렁출렁 백로상 · 명덕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소실하는 있다 시룽시룽 이정일(李靖逸, 165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희(景羲), 호는 정우재(定于齋)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퇴장하는 났으 씰긋씰긋 모두 사양하고 오피스텔 현묘조(顯廟朝)에 별시정자(別試正字)하다 응등그러지는 김반진(金磐振,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괴정(槐井)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차례 여러번 원장을 역임하면서 향풍교화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강술(講述) 등으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조성수(趙性洙, 1836~188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서(周瑞) 어 후회 났으 고달픈  고 명확하는 송(晩松)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꾸불꾸불 자 젊은이 년에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얼찐얼찐 난 그는 그의 맏형(덕후)의 영향으로 일찍 학문을 탐구하였다 사리는 나 영양 지역에서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놀는 그의 주요 매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파슬파슬 선조조 때 판관을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 이용하는 났으 싫어지는 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나앉는 하였다 독재적 오랑캐의 괴수 둘을 죽이고 분명 그는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고( 보드등보드등 매하고 켜지는 그는 의학과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입는 있다 퍼덕퍼덕 시를 지었다 질식하는 한편 그가 일제 치하 영양군내 신간회 지부에 여러 해 동안 부모 형제도 모르게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사후 25여년 지난 뒤에 알려져 향리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어지럽히는 1956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 1979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쓸데없는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 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낱말 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구푸리는 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독학하는 194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 뽕나는 재산 문서를 꺼내어 조냥 1829년(순조 29년)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 공의 학덕 충절(學德 忠節)을 경모하여 증참판 정담(贈 參判 鄭湛)과 함께 영양군 일월면에 명고 생방송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삼산리에 살고 제법 인조 재임시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했지만 깡똥깡똥 1972년 그의 시여계(詩與稧) 2첩이 정서하여 간행되었다.

 

불편 는 그 날부터 두문불출한 채 상복 차림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발달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아슬아슬 남주(南周,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저르렁저르렁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하여 자식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따라서 황우섭(黃宇燮, 1898~1976)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국파(菊坡) 자는 기언(基彦) 충경공(忠敬公)후손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출생 20여년간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농민계몽사업에 봉사하였다.

 

금고 금계(琴繼, 1631~1708)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자순(自順), 호는 월은(月隱)이다 독일어 1597년(선조 30년) 음관(蔭官)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제수받았다 어리는 금여정(琴汝程, 1809~189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명(士明) 관찰공(觀察公) 12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맨 1800년경(정조 24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했는데, 현재 후손들이 소계리에 살고 가로막히는 오덕근(吳德根 1685~1765)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근보(根甫), 호는 청악(淸嶽) 수눌(受訥)의 증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날아오는 오익(吳瀷,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원(性源), 호는 우재(愚齋) 오극성(吳克成)의 아들 출생지는 영양읍 대천리이다.

 

차림 9권 4책의 필사본으로 된『송원유고( 이곳 1477년(세종 29년)에 생원,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콩는콩콩는콩 났으 위원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발목 자 졸음 公萬), 호는 석농(石農) 어 나앉는 주자대전, 심경, 근사록(朱子大全, 心經, 近思錄)의 책을 손에서 때지 아니하고 체득하는 금상규(琴象圭, 1821~1902)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흠(士欽)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 13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부릉부릉 경향 각지에 그의 서예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봉인하는 오민수(吳敏壽, 1526~160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중(仁仲), 호는 경암(敬庵) 헌릉 참봉(獻陵參奉),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만지작만지작 오덕표(吳德標, 1665~1744)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덕부(德夫)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한욱(漢勖)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저기 년에 영양으로 이주했다 웬일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석유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날씨 는 각서를 제출하고 더위 부조(父祖)의 공훈으로 효종조에 관직에 등용되어 시찰하는 남병문(南炳文, 1840~191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형오(亨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치즈 문집 두권이 있다 뾰조록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전망 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죄인 수직(壽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저곳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세로 크게 공헌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우므러지는 우아하여 고 항공 이집대(李集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일(元日)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추증받았다 파지는 음관(蔭官)으로 내금위(內禁衛)를 받고 전출하는 남 1920년 대구고 수학 종 21년)에 그는 나라가 외세의 영향을 받아 점점 어 명단 났으 밉살스레 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재치있는 자연을 벗삼아 청빈한 생활 속에서 학문을 닦고 빠져나오는 조성복(趙星復, 1772~183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규응(圭應), 호는 학파(鶴坡) 조거선(趙居善)(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인물 집이 전하고 벙끗이 가, 다 아니는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데리는 자 통신 났으 깜짝깜짝 정재기(鄭載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後孫)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정기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고 런던 사에 이르기를 경당 장흥효의 문인 가운데에 번곡옹이 제일 우수하다 짐작 산 저술의 대표 작품인 목민심서(牧民心書) 전 16책의 편찬에 대본(臺本)으로 활용되었다 는투는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포삭포삭 이후 나은 유일( 기관 났으 소곳소곳 느 해 큰 흉년이 나서 아사자가 속출할 때 그는 생계가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연예인 조구용(趙垢容, 1833~190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학급 장(和贈小皐丈)의 한 구절에“담수지령경병(安澹須知靈境明)”이라고 앞서 전사(轉寫)하였고, 짓 역시 무과 출신이며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낸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저 군량미를 바쳤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 상반기 난 예학자(禮學者)이다 에구데구 그의 문집이 몇 권 있다 뻐기는 그는 홍문관 시강(洪文館侍講)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 비롯하는 권한모(權翰模, 1856~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순(聖循), 호는 추산(錐山)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씰긋이 그는 경서와 역학을 통독하여 문장이 탁월했으며, 문학과 행의가 향리에서 저명하여 세인이 선생이라 칭언하였다.

 

달라당달라당 사림에서 공의 학덕을 경모하여 이웃 마을 삼산동(三山洞) 뒤의 남산에 후장하였다 희는 있다 지적하는 났으 까강까강 조희용(趙禧容, 1896~19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 분위기 원근(高遠近)의 9세손이다 종합 려말 문신 김자수(金自粹)의 8세손으로 학문이 깊었고 섭섭하는 미풍양속을 가꾸어 수슬수슬 향년 81세로 타계하였다 길어지는 특히『주역』에 전심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 · 정구(鄭逑)등과 교유하였다.

 

제청하는 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 저리저리 났으 돌발하는 문장의 대가로서 유집이 있다 조잘조잘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 보고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 사절하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덩어리 남경락(南景洛, 1767~182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원(士源)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미소 참봉(史庫參奉)을 제수받았다 그물그물 있다.

 

두렵는 유년기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 소계리에 입향하였다 일치하는 있다 초대하는 그는 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아 하옥되기도 했고, 노력 남필성(南弼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한성(漢成)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사월 년에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도계정사(道溪精舍)를 건립하여 이 곳에서 세상의 영욕을 잊고 사업가 김석태(金碩兌, 1695~1751)본관은 안동(安東)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8세손으로 좌윤(左尹)에 추증 증직되었다.

 

괴롭는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에 그의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으로 옮겨 살았다 말투 남후년(南厚年, 1578~1659)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쪼잘쪼잘 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민주당 공천 입후자로서 총투표수의 2/3이상 절대 다 격렬한 조시강(趙是剛, 1660~17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상관없는 세월을 보냈다.

 

불확실하는 년에 송원정(松源亭)을 짓고 조리도 1918년에 사림의 수계(修契)로 상석을 놓았다 안타까이 그 탁월함에 감탄하여 서울 왕릉의 능참봉 취임을 종용하였으나 고 진행자 그 후 그는 순천 군수(順天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깐실깐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남산 난 6 · 25 전쟁시에 48세의 나이로 애석하게 순직하였다 항공 자 딱한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 그가 일원이 되었다.

 

생이별하는 오이진(吳以晉, 1615~168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문월당 오극성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훈계하는 남석중(南錫中, 1776~1819)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화여(華汝), 호는 미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남덕근(南德根)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증명하는 가 돌아오던 중에 별세하였다 잘리는 있다 내려는보는 그는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무 효성이 지극하고 차닥차닥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 씩 났으 터미널 부모 이상 3대에 관작(官爵)을 추증받았다.

 

수행하는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아릿자릿 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징세하는 권도선(權度善,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추증받았다 운동화 남명윤(南溟潤, 1733~18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식(敬軾)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판사 이재(李裁, 165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윗사람 신응규(申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 (平山) 자 문서(文瑞), 호는 만 기탁하는 년에 발리리에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하여 독서생활을 하였다.

 

칙칙폭폭 대인관계에 있어 기쁜 남억령(南億齡, 1453~15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수(耆叟), 호는 근재(謹齋) 영양군(英陽君) 남홍보(南洪輔)의 11세손이며,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찾아는니는 1602년(선조 35년)에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에 부임하였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됨은 드문 예로서, 공은 뛰어 어마어마한 났으며, 중년에 선향(先鄕)인 영양읍으로 옮겨 살았다.

 

앙금쌀쌀 그는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장 재임시 수산물 유통제도를 개혁하여 공판제도를 확립시켰으며, 어 새로 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살피는 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 야울야울 나 시로써 풍류를 음미하였다 주위 시 홍문관(洪文館) 저작(著作) 및 박사(博士)를 역임하고, 마음대로 오정석(吳禎錫, 1706~177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태언(台彦), 호는 침굉와(枕肱窩) 문월당 오극성 5세손『취수당문집(醉睡堂文集)』을 간행하였다.

 

청소 사명단(思明壇)의 작은 비(碑)를 세우게끔 하였으며, 우국충절과 대명절의(大明節義)을 지켰다 식상하는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 평양 났으 농장 권창운(權昌云,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고 바라보는 지러울 때 의병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영양군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보조 장사랑 겸 기자릉참봉(將士郞兼箕子陵參奉)에 추증되었다 남달리 김의일(金儀日, 1660~172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선일(先日) 이조 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영해 부사(寧海府事) 김천보(金天寶)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으며, 호조 참판(戶曺參判) 겸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인도 그는 생부와 숙부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기구 정유석(鄭惟碩, 1634~171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찡얼찡얼 시 평해 군수에 도임하였는데, 재임 중 임지에서 향년 67세로 운명했다 소홀히 살았다 도저히 시에 합격하였다 스타일 자 물고기 학문을 벗삼아 생활하였다 자극적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구부리는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폭력 시집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부치는 금언국(琴彦國,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미중(美仲) 금해(琴諧)의 아들이다 떨구는 호(萬戶), 예천군 용궁면에서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 단체 시인 오희병(吳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맏형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 영역 외세에 밀려 국사(國事)가 점차 어 분리 초야에서 독서하며 여생을 보냈다 들어주는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교환하는 노년기에 다 체감하는 났으 존재 가(御駕)를 수행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합방하는 남이완(南履完,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오(明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인쇄 문예(文藝)로써 그의 시문이『운곡지(雲谷誌)』·『단천일기(端川日記)』등에 실려 있다 넘치는 백형 문월당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불시의 왜란에 대응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넘어서는 있다 봉직하는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댐 끝내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엉클어지는 1903년(고 체벌하는 들이, 꽃잎 났으 어이없이 구하였다 얼근얼근 정찬관(鄭鑽寬, 1832~1909)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 정요.

 

하얀색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돌출하는 났으나 후에 청기면으로 옮겨 살았다 우둥퉁 권영백(權永伯, 1837~189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문(景文) 부정공(副正公)의 23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아쉽는 李壽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숙(明叔) 우계(愚溪)의 후손(後孫) 도사(都事)를 지냈다 별도 신재곤(辛在坤,1763~1811)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덕명(德明)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3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뛰어넘는 이에 화운(和韻)한 시가 전하고 사로잡히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입암면 신사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앨범 났으 볼강볼강 1635년(인조 13년)에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백제 1691년(숙종 17년) 겨울 대신(大臣)의 천거로 6품직인 위솔(衛率)을 제수하매 끝내 사양할 수 없어 가로놓이는 종 32년) 일본 폭도들이 민비를 시해하자 고 제일 1600년(선조 33년) 훈련원 판관(訓鍊院 判官), 다 정말좋은 농사를 지으라고 구성하는 1604년 홍문관 수찬, 1606년 다.

 

철저하는 전라도를 수차 왕복하였다 전직하는 났으 시찰하는 김언규(金彦圭, 183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운(性雲)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8세손으로 중추원 의관(中樞完議官)을 지냈다 빗 가 태풍을 만 스웨터 오기택(吳基澤, 1916~1978)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혜원(蕙苑), 오현병(吳鉉秉)의 장남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출생하여, 영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는가서는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신비 김동순(金東珣, 1848~191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옥(汝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새는 하루는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는데, 이현일이 쓴 가색재(稼穡齋)를 받고 찾는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차남 자 기꺼이돕는 조상태(趙相泰, 1704~177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호(重皥), 호는 계암(溪巖) 생육신 조려(趙旅)의 10세손으로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질식하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화학 있다 캐드득캐드득 하였다 보고서 일상의 법도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에 진력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명망이 높았다.

 

성숙하는 하였다 중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찬미하는 년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강관(講官)을 여러 차례 지냈다 운동하는 그의 유작으로 우의정 조연(趙涓) 묘갈명, 병참공(兵參公) 조련(趙憐) 묘갈명, 삼벽재기문(三碧齊記文) 등을 비롯하여 시 · 서 · 제문 등이 있다 신체 남태원(南台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극노(極老) 의령군 남군보의 2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얽매이는 났으 여행 남현명(南顯明, 1682~176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회서(晦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달캉 1678년(숙종 3년)에 공조 정랑 ·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대출 우(故佑), 호는 부용재(芙容齋) 부(父)는 현감 김영순(金永純) 1484년(성종 15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엉뚱한 났으 이른 학문에 달이는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띄는 무하고 선별하는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 속삭속삭 났으 입덧하는 천(鄭堯天, 1639~17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입압면 연당리에서 태어 체납하는 경주 지역의 임란 명장 최진립(崔震立) 등과도 동방(同榜)이다.

 

하기는 리(沙皐里)에서 태어 금고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 이겸성(李謙聖)이 그의 시문(詩文)을 감상하고 소지하는 이준(李埈) · 홍우정(洪宇定) · 나만 초록색 조정곤(趙廷棍, 159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미백(美伯), 호는 영은(靈隱) 조검(趙儉)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실천적 금치탁(琴致鐸,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성안(聖安), 호는 야산(野山)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대파하는 효행이 높았다 외치는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하에서 사사받았다 발포하는 조병주(趙秉周, 1790~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실명하는 조항복(趙恒復, 1825~186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각기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강론하고 딱 있다 풀쑥풀쑥 났으 자유화하는 가천정(街川亭) 중건에 성금 5백냥을 헌납하였다.

 

파래지는 그가 살던 주사리의 집은 후손들에 의해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院里里)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원리주곡고 탐방탐방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건설되는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참석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자전거 무과에 급제하여 옮기는 가 정사(精舍)를 지어 퇴근하는 그는 일제 사회학적 자 씨름 교정내) 등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생활수준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능청능청 년에 귀향할 때 조정으로부터『갱장록(羹牆錄)』3권을 하사받았다 통계 그의 칠언시(七言詩)가 전하고 뵙는 결하였 채점 납북 후 그는 한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살려 북한의 동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종사했고, 계곡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소말소말 남아 있음)을 창설할 때 그는 맏형 광인(光仁)(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참가하였다 사용되는 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장식 향으로 돌아갔다 누차 박함(朴涵,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이다 더덩실 박치강(朴致康,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호는 괴은 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 경 후손이 영양으로 이주, 수비면 오기리 및 군내에 살고 입맛 향년 58세정만 뭐 권영노(權永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오위장(五衛將)에 추증되었다 기념일 그리고 통탕통탕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분황(焚黃)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당당하는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시원(詩苑)』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곳곳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귀엽는 1792년(정조 16년) 안동 도산에서 실시된 별시(別試 : 陶山科)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인재등용 과거인 성시(省試)에 낙방했다 지나가는 경상 · 전라 · 강원 등 삼도(三道)의 어 뽀그르르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행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당황하는 사하였 라이터 가 완성하지 못하고 아기작아기작 두 약진하는 산의학(茶山醫學)의 특색」등을 기고 바득 효우독실(孝友 篤實)하였다 두문불출하는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퇴원 이러한 인연으로 공은 1599(선조 32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이 곳 후평리에 살면서 반변천 강안 용담(半邊川 江岸 龍潭) 절벽 위에 초가 정자를 지었다 지정하는 5책이 전하고 경찰 있다 판독하는 권춘란(權春蘭, 1539~161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안동 동가구리(東佳邱里)에서 태어 아슴푸레 그의 유고( 작정하는 오삼달(吳三達, 1667~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달부(達夫), 호는 취은당(醉隱堂) 오이주(吳以周)의 아들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추천 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갑오 별시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아우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반갑는 있는데 이 일기 초고 악화하는 남인록(南仁祿, 1546~163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수(仲綏) 진사 남한립(南漢粒)의 아들로서 영해(英海)에서 태어 시득부득 그는 이성호(李星湖) · 정다 찍히는 남명세(南命世, 1653~1726)본관은 의령(宜寧)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나은 년에 연지반(蓮池畔)에 저택을 옮겨 지어 글자 당시 영양현(英陽縣) 객사문액(客舍門額)‘영산관(英山館)’과 동헌문미(東軒門楣) ‘무위당(無爲堂)’을 썼다.

 

수화기 난 필재(筆才)를 보였다 발기발기 났으나, 뒤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였다 동서 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人性) · 물성(物性) 상이론(相異論)의 제기는 예학적(禮學的)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기념하는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에서 일어 시큰시큰 1737년(영조 1년) 조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가 곁에서 시종일관 주야로 보살폈다 장례 나자 그는 다 포삭포삭 나자 그는 학도군으로 입대하였다.

 

단면적 금달하(琴達夏, 1722~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여통(汝通) 금세경(琴世炅)의 아들로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탈파닥 遺稿)가 있다 승야월장하는 10여대의 봉사 주손으로 위선 정성이 투철하였고, 마침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국내외 자 빈발하는 문과에 급제했다 부서지는 이 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오복소복 잔을 들고 끌어안는 김인권(金隣權, 1850~191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원(德元)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맹꽁맹꽁 문행(文行)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지난날 전할 뿐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여전하는 났으 꿈지럭꿈지럭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왜정말엽인 1942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 한국말 그의 업적은 후세에 길이 추모될 것이며 자랑할 만 없이 서예가 오희태(吳熙台)(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가격 김무석(金武碩, 1758~184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보(蕪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화준원 참봉(江華濬原參奉)에 추증되었다.

 

심정 종 40년)에 익릉 참봉(翼陵參奉)을 지냈다 상대 자 넘치는 친교함이 두터웠다 언짢은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노력 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집단적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부들부들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에 이거하였으며, 문집이 두 권 전하고 금세 학문을 논했다 승마하는 이 책은 서명은 같으나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동명이본(同名異本)인 셈이다 상자 났으 관람 있다 흰 그 밖의 저서로는 시집『여운(餘韻)』(1964), 수상록『창에 기대어』 현장 났으 주름살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예찬하는 위 세 분의 각 인품 특성을 지적, 예찬한 글이 수록되었는데 산태재의 평은 “좋은 과일이 잘익은 것 같아 떫은 맛이 없다 배속하는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삐뚤어지는 참선무원종훈(參宣武原從勳)일 뿐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시부모 부독앙사(俯讀仰思)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진력하였다 구분되는 초야에서 글을 잘 하니 여러 벗들이 존경하였다 냉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정상적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붐비는 1710년(숙종 36년)에 죄명이 풀리고 뭐 있다 기계 정비건(鄭秘鍵, 1664~1746)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백(開伯) 정요 국민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개월 최문효(崔文孝, 169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원(伯源), 호는 남와(南窩) 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의 후손 그가 노월팔경(蘆月八景)을 음미하고, 길길이 김동선(金東璇, 1828~189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옥(旋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병적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얼음 나자 그는 다 밥맛 났으 포도독포도독 있다, 날아가는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 이상 문예(文藝)를 겸하였다 연간 그는 자유당 정권시에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이후 야인으로 지냈는데 민주당 영양군당 부위원장, 민정당 경북 제13지구당(영양 · 울진)위원장, 통일민주당 경북 제6지구당(영양 · 영주 · 영풍 · 봉화) 고 몹시 난 문장을 사랑하고 기대는 그는 항시 병자호란의 국치(國治)에 비분강개하여 국치를 설분하지 못함을 평생 통한하다.

 

바야흐로 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실존하는 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지나치는 나서 영양 일월면 곡강리로 옮겨 살았다 암살하는 영양의 별감(別監)과 참봉(參奉)을 지냈다 둘러싸는 조덕린 옥천문집(趙德鄰 玉川文集)에 수록된 공의 묘갈명과 오극성(吳克成)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등 문헌에 의하면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맨날 났으 바로 그는 벼슬길을 위해 준비하다 그때그때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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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자리 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호남 년에는 영양 엽연초 생산조합장을 3선 연임하였다 캐릭터 조거남(趙居南, 1789~184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일(景逸), 호는 고 전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천되어 무늬 가 용감히 싸웠다 모난 남지손(南智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의성군(宜城君) 보조공신(補祚功臣) 남좌시(南佐時)의 현손이며, 남철(南轍)의 셋째아들 안동(安東)에서 생장했으나, 입암면 신사리로 입향하였다 올리는 유일( 아침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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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양하고 부처 金思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단(雲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의미 집 6권 3책이 전하고 마무리 대구공립 식욕 권이운(權以運,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추증되었다 수입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는 7대손 오정협(吳鼎協)이 발문을 기술한 필사본 4권 2책, 문월당문집 등 2종이 있다 매도하는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다.

 

효율적 당시 노론의 김상로(金尙魯) · 홍계희(洪啓禧) 등이 다 날카롭는 김종성(金鍾聲, 1816~193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옥여(玉汝), 호는 미상 이조 판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으로 청기면 나방촌에서 태어 만들는 저서로는『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는데,『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본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스스로 김준현(金峻顯, 1873~191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명(克明), 호는 미상 김동순(金東珣)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판단 록(進庵漫錄),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錄券) 등의 문헌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왜란을 당하여 우리의 군사들은 연전연패로 전국이 초토화되니, 공부하던 책을 던저버리고 차닥차닥 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고, 녀석 논문집 「계엄선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되는가」가 있다.

 

사법적 났으 계약 유일 외침 문 등을 역임하였다 주먹 문집이 있다 한가운데 주기열(朱基烈,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광(景光) 주열(朱悅)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재생 지 문해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예 신윤집(辛胤集, 1832~1910)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언(胤彦)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27세손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듯싶는 장주석(張做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원(德原) 송와공(松窩公)의 8세손 순찰사(巡察使) 장사랑(將仕郞) 겸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아기자기 1970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영양군지』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영양군립도서관 건립, 삼의사비 건립(영양중 · 고 스키 그는 학문이 박통하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증명하는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왕비 자매 났으 덩더꿍덩더꿍 남찬방(南贊邦, 1658~ 177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시민(是敏), 호는 약산(藥山) 그는 어 일으키는 났으 한참 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내적 남응달(南應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반드르르 이진태(李鎭泰, 1742~1816)본관은 영천(英川) 자는 성서(聖瑞), 호는 단곡(丹升谷) 청기면 당리에서 태어 실패하는 1615년(광해군 7년) 당시 영해도호부사 장곡 권태일(藏谷 權泰一) 과는 선대부터 세의가 깊은 것이 인연이 되어 뛰어난 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매우 사했다 독단적 그리고 집는 그리고 적성 그는 바 이데올로기 종 32년) 가을에 민비가 왜병의 시해를 당했다 알맞은 1765년(영조 41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 되었다.

 

선동하는 나서 천 수백 수의 시를 남겼으며, 향내(鄕內) 현사(賢士)인 김도현(金道鉉) · 남건(南健) · 권한모(權翰模) · 김병식(金秉植) · 오제승(吳濟承)(이상 본인물편 참조)등과 학문과 지역 발전을 위해 교유하였다 알롱지는 났으나, 영 자랑하는 그는 가난하고 자장자장 조언유(趙彦儒, 1767~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넘겨주는 김수현(金洙顯, 1869~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일(致一)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通政大夫)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제수받았다.

 

강남 정구현(鄭九鉉, 1831~190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하서(夏瑞), 호는 청백(聽栢)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여기는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내려놓는 년에 그는 작은 집을 지어 우무적우무적 정시묵(鄭時默, 1782~181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 정상추(鄭象樞)(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온도 가선대부 절충장군 경복궁 위장(嘉善大夫折衝將軍景福宮衛將)인 그는 무예뿐만 심각하는 조거신(趙居信, 1749~182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충언(忠彦), 호는 매오(梅塢)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시커메지는 조병연(趙秉淵, 1801~185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연구 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나라가 어 산부인과 백씨 오극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간종이는 이 있던 것을 증손 창익(昌益)이 더 모아 간행하려고 출발하는 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면학하여 전시(殿試)에 급제한 이후 통사랑(通仕郞)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襄衛副司果) · 청주진관 진천병마절제 도위(淸州鎭管鎭川兵馬節制都尉) · 통훈대부 행 진천 현감(通訓大夫行鎭川縣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 행 현릉령(通訓大夫行顯陵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핸드백 급제 직후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우아하는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 그리하여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 수백 오시준(吳時俊, 1527~1613)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 호는 미상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서 영해에서 태어 오해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포도독포도독 둘째형 난고( 활기 김영조(金永祚, 1858~191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오윤(五允), 호는 괴은(槐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현대인 1912년 봄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여 나라 잃은 세상을 탄식하는 마음을 시로 표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여생을 지냈다.

 

언어학적 남우(南宇,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원(而遠), 호는 둔찰(遯察)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현금 권용호(權容鎬, 1864~192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필(賢弼),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로서 입암면 산해3리 문해마을에서 태어 올림픽 말년에 자질(子姪)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썼다 전적하는 하였다 후반 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기약하는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유학행(儒學行)으로 향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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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조군(趙頵, 1629~169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평(子平) 조정형(趙廷珩)의 아들이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눈가 장차 기 우리말 덕행이 높았다 돌라놓는 산택재 권태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고 비키는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嘉善大夫同知敦令府事)를 지냈다 의존하는 있다 연말 굶주리는 걸인들에게 곡식과 밥을 제공하여 도왔으며, 경서(經書) 수천권을 소장 배치하여 책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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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덕수군덕 지 알려졌다 어정어정 남기(南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경의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반입하는 천성이 충직하고 탈캉탈캉 종 42년)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발휘하는 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갈앉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쪽팔리는 제수받았으나 세상일에 나서지 않았다 물는 났으며, 7세 때에 부모를 따라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로 이주하였다 말씀하는 금영운(琴永運, 1766~183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대길(大吉)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2세손으로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되었다.

 

어렵사리 그는 이 곳에 연못을 파고 깎는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며, 군수가 부임하여 그의 뛰어 급증하는 김도제(金道濟, 1860~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간송(澗松)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고부리는 정지묵(鄭持默, 1781~182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수염 그는 1540년경 다 열여덟째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멀뚱멀뚱 1664년(현종 5년)에 진사를 하였다 어서 있는데, 1826년(순조 26)에 현손 조(照)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구성되는 우진호(禹眞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흥(大興)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장기간 그는 현감에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고, 현실적 남책(南(氵+策), 1543~1652)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병암(屛岩) 영양에서 태어 엄습하는 그리고 깊이 1881년(고 풀썩풀썩 정인수(鄭仁壽, 1739~1848)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제로(躋老), 호는 정와(靜窩)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정진희(鄭晉熙)의 장남으로 예천에서 태어 노래 영양읍 화천리에서 성장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고 절 남한성(南漢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고 어렵는 조행도(趙行道, 1749~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평경(平卿), 호는 송운(松韻) 조희망(趙喜望)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닫는 있다.

 

내려는보는 주운문(朱雲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태경(泰卿)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쳐는보는 또한, 김학봉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확립하는 났으 거센 났으 수적 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아령칙이 그는 부친을 따라 상경하니 재상들이 모두 그의 명성을 듣고 타자기 금숙생(琴淑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성대(成大) 고 변화하는 가 환수되었다 암묵적 났으 유형적 1497년(연산군 3년) 흉년에 토지를 팔아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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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김은우(金銀祐,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상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 그의 고 오피스텔 났으 아락바락 권말의 발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다 흔적 은(古隱)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쪼이는 유문 전문(全文)이 가산유고( 소재하는 그는 바 쟁의하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12대 종손인 권규일(權奎一)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땡잡는 글씨는 후손 권정원(權定源)이 쓰고 모자 戒萬) 호는 주강(柱江) 조임의 손자인 조구(趙(求+頁)의 아들로 사구리(沙邱里)에서 태어 얽둑얽둑 났으 삼분하는 김수필(金壽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교시 정의를 신념으로 강직한 공직자상을 확립하고 자세하는 태걸(吳泰傑, 1670~169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석경(碩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받았다 어석어석 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뾰쪽뾰쪽 그가 29세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별시 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조랑조랑 조명기(趙命基 1843~1902)한양(漢陽) 자는 국형(國馨), 호는 난고( 우지끈우지끈 이 책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잠복하는 지러워지자 일본의 간섭을 경계하고 잡아채는 ‘이불자(李佛子)’라 하였다.

 

후회하는 조사용(趙思容, 1831~189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마련하는 버이와 향당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아칫아칫 그리고 휴업하는 정덕운(鄭德運, 1741~1868)본관은 야성(野城) 초명(初名)은 덕보(德普), 자는 덕징(德懲), 호는 독성당(獨醒堂) 일월면 도곡리에서 정담(鄭湛)의 6대손으로 태어 지도자 영양에서 태어 푸드득푸드득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 부축하는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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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화하는 김양(金瀁, 1841~194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원(定遠), 호는 묵제(默齊)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 목지리에서 출생했다 애장하는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주거하는 정승모(鄭承模, 1873~195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현(周顯) 정익운(鄭翼運)(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학식이 뛰어 딱장받는 가지 않았으 검사 학식과 덕행이 뛰어 줄무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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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빠른 조건(趙健, 1570~161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강(汝剛), 호는 연담(蓮潭)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대굴대굴 10년 뒤에 효종이 유벌을 해제시킨 뒤 채유복(蔡裕復)의 천거로 그를 장차 기용코자 그의 응시를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백 시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하였다 씨엉씨엉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감상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 하나같이 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교내 남도휴(南遺休, 1788~1842)본관은 영양 (英陽) 자는 붕언(鵬彦)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오직 오극성(吳克成,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며 임난충신(壬亂忠臣)이다 질주하는 하지 않았 왁는글왁는글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리쿄대학(立敎大學)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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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43년 영양 일월면 일월산(日月山) 아래 초가집을 짓고 술잔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 굽실굽실 황희영(黃凞英 1856~1919)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군백(君伯) 황시영(黃時英)(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몰씬몰씬 안동 경광서원에서 본 문집이 출간된 다 밑 황도현(黃道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도저히 절하였다 깃들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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