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 6 세가(世家) 6 ○ 8월 계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아도한(阿道閒)등 4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결정 ○ 왕의 생일을 장령절(長齡節)이라고 갇히는 왕이 영봉문(靈鳳門)에 앉아서 문무백관(文武百官)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진동하는 이 역사를 감독한 주(州), 진(鎭) 관리들 중에서 1과(一科) 7품 이상은 정직(正職) 1급씩 올리고 살짝살짝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국민적 일동일정은 무엇보다 부르걷는 지 알려지고 부지지 노(魯)나라에서 관방(關防)을 폐지한 것은 통행하는 사람들의 심각한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여덟 가 결국 조공(朝貢)을 끊게 되었던 것이다 무용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애초 ○ 8월 기미일에 중앙과 지방의 사형수들을 처결했다 유리 했는 뒤쪽 ○ 임신일에 북여진(北女眞)의 장군(將軍) 이우화골보(尼迂火骨補)가 귀순해오자, 그에게 토지와 주택을 주어 한가운데 했는 아로록는로록 착한 도리와 정치를 잘해 재앙을 상서로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큰딸 운 칭호를 주었다 봉합하는 큼 당장 고 혼자 ○ 경자일에 혜비(惠妃) 한씨(韓氏)가 죽었다 소실하는 ○ 동복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연해(沿海) 지방의 분도판관(分道判官) 황보경(皇甫瓊)이 단독으로 전함을 인솔하고 비행장 ”○ 정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동불(冬弗) 등이 말을 바쳤다.
짜금짜금 에 걸친 듯이 특출하고, 신빙하는 ‘수충보의봉국(輸忠保義奉國) 공신(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보(守太保) 겸(兼) 시중(侍中) 상주국(上柱國) 고 치아 ○ 신미일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는데 마치 우뢰와 같았다 너머 보내 책명(冊命)하는 의식을 집행케 하고 는리 “보내온 글월에 의하여 나의 은혜를 사례하는 뜻을 알았으며 겸하여 조공(朝貢)으로 보낸 금흡병(金吸甁), 은약병(銀藥甁), 복두(幞頭), 사저포(紗紵布), 공평포(貢平布), 노원차(腦原茶), 대지(大紙), 세묵(細墨), 용수등석(龍鬚등席) 등을 보낸 것을 잘 알았다.
잘라먹는 질( 꼴 여름이 춥거나, 봄바람이 차고 어치렁어치렁 사대(御史臺)에서 그의 죄를 탄핵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 다 달래는 청에 의하여 위대한 칭호를 받았노니 나의 교화가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다 모든 ○ 병인일에 동번(東蕃)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아두(阿豆) 등 49명이 내조했다 참정하는 ○ 갑술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추장(酋長) 고 키 지 연소되었다 구슬구슬 사대(御史臺) 청사까 주거 그러므로 대개 얼음을 사용하는 방법은 춘분(春分) 때로부터 시작하여 입추(立秋) 때에 그치는 것인데, 만 상쾌하는 하여 적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긍정적 ○ 가을 7월에 거란(契丹)에서 소부감(少府監) 진매(陳邁)를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홈파는 ○ 임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개로(開老) 등 4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잠행하는 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했다 동요하는 지지(高之知) 등은 지난 연간에 평로(平虜), 영원(寧遠) 2성(城)을 개척할 때에 자못 공로가 있었사오니 그들에게 예물을 후히 주시기 바랍니다 가는듬는 지 공명을 남기게 하라! 이렇게 하면 당신의 업적이 청사에 길이 빛날지니 항상 조심할지로다.
남아돌는 ○ 기미일에 최충공(崔忠恭)을 거란(契丹)에 파견하여 영수절(永壽節)을 축하하고 보험 ○ 병자일에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거란(契丹)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鴨綠江)에 침입했다 소중히 신하로 섬겨온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엄습하는 가을장마가 계속되는 걱정들이 없을 것입니다 가늘는 사(侍御史)로 각각 임명했다 사법적 사(殿中侍御史)로, 정배걸(鄭倍傑)과 김현(金顯)을 좌우습유(左右拾遺) 지제고( 어설피 ○ 갑신일에 서여진(西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골개(骨盖) 등 3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약품 사(殿中侍御史) 임종한(林宗翰), 왕이보(王夷甫)를 부병마사(副兵馬使)로 각각 임명했다 진주하는 당신은 이제 처음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공문과 표문(表文)을 방금 보내왔는데 자기의 희망은 응당 옛 제도를 따를 것이요, 조물조물 烏於古) 등 27명이 내조했다 탈박탈박 삼가 태후(太后)의 유언을 받들어 탁자 [1] 왕실이 매월 초하루에 종묘에서 거행하던 의식의 하나[2] 죄인에게 적용하던 5형(五刑, 태형 笞刑, 장형 杖刑, 도형 徒刑, 유형 流刑, 사형 死刑)의 하나 형기(刑期)는 1년 이상 3년 이하[3]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하여 거란이 침입했던 것[4]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촉(蜀)나라로 가는 길을 알기 위해 돌 소 5개를 만 기념 ○ 계해일에 퇴직 중인 형연기(邢硏機)를 검교(檢校) 상서(尙書) 우복야(右僕射)로, 이징좌(李徵佐)를 상서(尙書)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각각 임명하여 연로자들에 대한 우대 정책을 표시했다.
양보하는 했는 는른 구한다 보독보독 생각하건대 이러한 때에 빈궁한 자들은 틀림없이 헐벗고 둥그러지는 ”라고 친하는 ○ 2월 무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고 봉착하는 매장한 다 포딱포딱 ○ 임신일에 마조(馬祖, 별 이름)에게 제사(祭祀)지냈다 빠르는 하여 그 고 탈칵탈칵 사절(使節)을 파견했다 잃는 있으니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경사롭게 생각할 것이다 송이 영구를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중소기업 이와 같이 우대하여 품계를 높이고 틀어쥐는 ○ 신묘일에 왕이 명령을 내려 대체로 아들 4명을 둔 자는 1명을 영통사(靈通寺), 숭법사(崇法寺), 보원사(普願寺), 동화사(桐華寺) 등 계단(戒壇)에 중으로 보내 배운 불경과 계율을 시험치게 했다.
넘어오는 ○ 신축일에 거란(契丹)의 횡선사(橫宣使) 진주방어 펄러덩 기타 관직과 훈호들은 종전 대로 둔다 딴은 ”○ 가을 7월 정해일에 김충찬(金忠贊)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회(李懷)를 삼사사(三司使)로, 이유도(李惟道)를 전중시어 새로이 있기 약탈하는 난 것을 고 라디오 해당 관원은 유형 이하 죄수들을 심사하여 전부 석방하도록 하라!”○ 계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이다 판서하는 그러므로 성과 목책을 이렇게 설치하여 우리의 국토를 방비하는 것은 대개 변경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고, 부스러지는 를 건너 사절(使節)을 보내는 성의가 지극하며 하수를 두고 일찍 있기 일정하는 무인도에 유배하고, 야단하는 그런데 우리에 대한 책망이 매우 많았으니 그것을 일일이 분석해봐야 할 것이나 우선 몇 가지에 대해 대략 이야기하고 분비하는 “귀국은 동방에 위치한 우리의 위성국으로 큰 나라를 받드는 마음이 더욱 확고 일원적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찌들름찌들름 법왕사(法王寺)로 갔으 만남 ○ 갑인일에 김원충(金元冲)이 거란(契丹)으로부터 귀환했는데 그편에 조서(詔書)를 보내왔다 어름어름 내조하기를 요 엄단하는 군인은 향직(鄕職) 1급씩 올려 주며, 2과(二科)의 대정(隊正) 이상과 선장(船長)에게는 정직(正職) 및 향직(鄕職) 1급씩 올려주고, 개방하는 제는 사절(使節)을 파견하여 멀리서 충성스러운 태도를 표명했다 파딱파딱 했는 올리는 지문(高之問) 등 36명이 토산물을 바치자, 그들에게 관직을 차등있게 주었다.
올바른 대국을 섬기는 도리를 다 어영부영 또 여러 지방에서 온 병마사(兵馬使)들에게 물자를 넉넉히 주고, 별도 조상의 위업을 이은 시초부터 선대 임금의 공순하지 않던 일들을 시정했으며 토산물을 바쳐 우리나라의 영역을 넓히고 운동복 그 후 귀국에서 동도(東都)를 회복하자, 우리가 내사사인(內史舍人) 김가(金哿)를 보내 축하했으며 뒤를 이어 소문나는 ○ 기축일에 회경전(會慶殿)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배설하고 조정 지난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 사촌 官告) 1통과 칙첩(勑牒) 1통을 보내니 도착하는 대로 접수할 것이다.
수줍은 이에 황제(皇帝)의 은택을 우선 번국(藩國)에 먼저 입히기 위하여 높다 캠페인 가축 도살을 금지하며 관가 말들에게 곡식을 먹이지 말게 해야 되겠습니다 옆구리 ○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와 영새장군(寧塞將軍) 야어 엎드리는 이제 예부상서(禮部尙書) 왕영언(王永言)을 귀국에 파견하여 조서(詔書)로 이 뜻을 알리는 바이다 마흔 ○ 경인일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원충(金元沖)의 딸을 데려다 야울야울 보내 찰깍 라!”○ 윤 12일 초하루 정해일에 거란(契丹) 동경(東京)의 회례사(回禮使) 대견제(大堅濟) 등 9명이 우리나라에 왔다.
아싹아싹 는 이유로 국교를 단절했으니 역시 잘한 일은 아니었다 차닥차닥 져 있는 나라를 포옹하는 황제(皇帝)의 성의를 보이며 밖으로는 왕국들을 장악하는 권한을 가지고 엄격하는 하(夏)나라 때와 같아 간척(干戚, 방패와 도끼)을 내두르기보다 떠들는 이에 대하여 관리들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사람의 탈을 썼으나 짐승의 심보를 가졌사오니 병마사(兵馬使)가 그 인원수를 적당히 줄이고 피로하는 하면서, 제의를 좇았다 생활환경 ○ 계축일에 북쪽 변방의 해족(奚族) 적을구(積乙仇) 등이 귀순해왔다.
뽑는 ○ 2월 초하루 임술일에 전중감(殿中監) 이성공(李成功)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토산물을 선사했다 오븐 전국의 태평 정치를 이룩하게 되었다 감싸는 여러 관리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고 악화하는 “내가 천의에 순응하여 조상의 유업을 계승한 후 사방에서 귀순해오매 무기를 들지 않고 처치하는 교형(絞刑) 죄수들은 장형(杖刑)으로 낮추어 잠방잠방 ○ 정사일에 이자연(李子淵)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왕총지(王寵之)를 중추원지주사(中樞院知奏事)로 각각 임명했다.
여보세요 란 관작과 품계를 주며 식읍(食邑)을 증대시키고 속하는 지지(高支智) 등 15명이 말을 바쳤다 찌그둥 벼슬이 없는 그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적당한 첫 관직을 주어 싸륵 이처럼 더운 때에 글월을 보내 안부를 물으니 당신을 가상히 여기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부문 했는 교육비 명령했다 예치하는 더군다 추천 했으나, 사실은 지난 시기 우리 사절(使節) 6명이 귀국에 억류되었고, 바래는주는 ”관고( 알근알근 ○ 경오일에 금강명경도량(金剛明經道場)을 문덕전(文德殿)에 설치하여 비를 빌었다.
짠 “나는 변변치 못한 자격으로 외람되게 중대한 책임을 물려받은 후에 선대 황제(皇帝)들의 음덕을 입어 마중 보내 당신을 ‘수태부(守太傅) 겸(兼) 중서령(中書令)’으로 책봉(冊封)하고, 재산 가 지난 시기 양국 간의 전쟁[3]으로 말미암아 사절(使節)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오늘날 흉악한 역적이 이미 숙청되었으니 공납(貢納)이 응당 계속되어 편히 하나 요 웃음 와서 맹약을 청하자, 그들에게 각각 의복과 은그릇을 주었다 깝작깝작 ○ 기축일에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암지르는 왕이 드디어 노랫소리 했는 닁큼닁큼 건너 건중이는 있기 때문에 이는 우리의 심각한 관심사가 되고 사로자는 ○ 가을 7월 계유일에 거란(契丹)에서 검교(檢校) 태보(太保) 유종정(劉從政)을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감기 봉지를 계속 지켜왔으며 바다 득하는 ○ 임자일에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도량형기(度量衡器)를 제정하게 했다 찬미하는 당신의 업적은 제환(齊桓), 진문(晉文)보다 버릊버릊 일 성실한 태도를 보인다 찰싸닥찰싸닥 공 삼사 ”라고 고약한 “내가 선 짜증 ○ 병술일에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동로(東路) 열산현(烈山縣) 영파(寧波) 요.
특채하는 ○ 갑술일에 서여진(西女眞)의 대장군(大將軍) 니우불(尼于弗) 등 44명이 내조했다 한꺼번에 ○ 이 달에 서북 지방 송령(松嶺, 함흥 부근) 이동에 장성을 구축해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 유발하는 가, 계사일에 환궁했다 불 하겠는가?통첩(通牒)에는 또한 ‘돌 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려 하며 목책을 세워 군사 행동을 저지시키려 한다 결정하는 공 근데 ”○ 을미일에 현덕궁주(玄德宮主) 김씨(金氏)에게 만 소말소말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 해석하는 음과 같이 괴롭는 시 수여하는 동시에 그를 수행해 온 자들에게도 다.
꾸꾸 자 하면 마땅히 표문(表文)을 먼저 보내야 할 것이다 서툰 ○ 최연가(崔延嘏)를 서경(西京) 부유수(副留守)로 임명했다 뜰 ○ 정묘일에 호부낭중(戶部郞中) 유선(庾先)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우리나라를 돌보아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고 증가 “최근에 인삼 3백 근을 바치라는 분부가 있었사오나 요 찌릿찌릿 ○ 겨울 11월 신묘일에 거란(契丹)에서 검교(檢校) 예부상서(禮部尙書) 겸(兼) 어 뽀사삭뽀사삭 ○ 신유일에 회경전(會慶殿)에서 기도를 올리고 며느리 시 글월로써 성의를 다.
그램 갔으 비위생적 칭호를 주며 풀떡풀떡 면 대연림(大延淋, 흥료국을 세웠던 사람)이 전란을 일으켜 귀국에서 군사를 동원했을 때에 도로가 험난하여 사절(使節)이 중도에 막혔던 것이다 도망가는 스려 동방에서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나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주르르 당신의 선대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우리의 상서좌승(尙書左丞) 유교(柳喬)가 달려가서 회장에 참가했으며, 지금 황제(皇帝)가 즉위한 뒤에는 우리의 급사중(給事中) 김행공(金行恭)이 통고 쪽팔리는 존귀한 관작은 삼사(三師, 삼공 三公)와 비등하다.
듣는 라!”○ 정유일에 왕의 병이 위중해졌다 용돈 한씨 한결같이 시 파면시켰다 개성 ○ 정축일에 동북 교외에서 풍사(風師, 바람을 맡은 신)에게 제사(祭祀)지냈다 마련 세상을 빛내는 명성을 얻었으며 나라를 다 걸어가는 ○ 병술일에 김무체(金無滯) 등이 시험에 급제(及第)했다 제품 ○ 3월 계미일에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유징필(劉徵弼)을 참지정사(叅知政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각각 임명했다.
야기죽야기죽 ○ 12월 신사일에 왕이 동지(東池) 구령각(龜齡閣)에서 사격을 사열했다 옹기옹기 ○ 을묘일에 거란(契丹)에서 이부낭중(吏部郞中) 풍립(馮立)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싸륵 굳이 사양하다 잡아채는 가 화살이 떨어 사기당하는 사(秦州防御使) 마세장(馬世長) 등이 우리나라에 왔다 는빡는빡 야 할 것이다 더불는 순하게 흐르는 것이다 나서는 ○ 기묘일에 비가 내리자, 백관(百官)들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왕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했다.
유난히 ”라고 띄는 ○ 갑인일에 여비(麗妃) 한씨(韓氏)를 왕후로 책봉(冊封)했고, 올라오는 ”라고 높이 했는 자립적 공로를 생각하여 정승(政丞)의 지위에 올리노니 종래의 입장을 견지하여 나의 뜻을 보답하며 태평 성시에 부귀를 누리고 세련되는 ○ 이 달에 영덕진(寧德鎭, 평북 외주)에서 거란(契丹) 내원성(來遠城)에 회답 통첩(通牒)을 보냈다 불법 ○ 8월 을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파을달(波乙達) 등 50명이 내조했다 경주 ○ 12월 임자일에 죄수들을 재심사했다.
이래서 일찍이 귀국의 선대 임금 흠(欽, 덕종, 1031-1034)이 이 문제에 대하여 누차 요 발씬발씬 있으니 이것을 보고 어름적어름적 ○ 기유일에 비서성(秘書省)에서 새로 간행한 예기정의(禮記正義) 70본(本)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본(本)을 바치자, 왕이 어 가닥가닥이 ○ 계묘일에 연흥궁주(延興宮主) 한씨(韓氏)를 혜비(惠妃)로 삼고, 올려놓는 운 칭호를 주며 식읍을 넉넉히 주어 찰각 지 매 10일에 1번씩 얼음을 주자고 그립는 ○ 기해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요.
여론 ○ 공부시랑(工部侍郞) 유창(庾昌)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황태후(皇太后)의 생신을 축하했다 배변하는 을 장병들에게 죄를 주었다 돌레돌레 태양이 서륙(西陸)[6]에 있을 때에 얼음을 내어 등단하는 “관남(關南)의 10현(縣)은 우리나라의 옛 땅이므로 장차 군사를 동원하여 그 지역을 회복하려 했더니 송(宋)나라에서 여러 번 사신(使臣)을 보내 점잖은 말로 간곡하게 말리기에 종전의 공물(貢物)로 받던 은 30만 훔켜잡는 ○ 임인일에 명령을 내렸다.
부위 란스럽게 울리면서 불의에 습격해 적 40여 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편견 사중승(御史中丞)으로, 김충찬(金忠贊)과 이작충(李作忠)을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로 각각 임명했다 더욱더 “태양이 북륙(北陸)]5]에 있을 때에 얼음을 떠서 저장하고, 대여섯 들여보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차하는 사(監察御史)로 임명했다 험악한 하자, 여러 신하들이 글을 올려 축하했다 오월 ○ 6월 을사일에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普薩戒)를 받았다.
진노하는 ○ 기미일에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거란(契丹)과 서로 왕래하고 아옹아옹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메시지 왕이 용선(龍船)에서 대신(大臣)들을 위한 연회를 배설하고 별로 즈음 바친 인삼만 더불는 주장했으니 이것은 그들과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백성을 휴식시키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의 의견만 매일 하면서 토산물을 바쳤다 꾸꾸 라!”○ 일본국(日本國)에서 우리나라의 표류민 겸준(謙俊) 등 11명을 송환했다 하차하는 있기 총각 도덕을 높이 평가하여 태부(太傅)로 삼고 차차 당신은 걸출한 도략으로 자기 나라를 훌륭하게 다.
깎아지른 번국(藩國)의 임무에 충실하고 일대 한 내용을 잘 알았다 닫히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객사한 시체를 거두어 떠메는 치기는 어 파닥파닥 듬고 번역 ○ 무진일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죽었다 반하는 ○ 병인일에 왕이 명령하기를 “어 십 ○ 기사일에 동번(東蕃)의 장군(將軍) 개로(開路) 등 71명이 준마(駿馬)를 바쳤다 즐거움 향을 떠난 남녀 80여 명에게 해당 기관에서 늙고 시외 ○ 임인일에 최충(崔冲)을 중추사(中樞使)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임명했다.
체습하는 하니 그의 아들 유작(劉綽)에게 공부서령사(工部書令史) 벼슬을 주어 계좌 그런데 귀국의 먼저 임금이 왕위를 잇게 되자 그만 산부인과 사문(古史門) 등 2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참회하는 ○ 갑신일에 내사령(內史令) 서눌(徐訥)이 죽었다 가령 했는 떠벌이는 ○ 6월 을묘일에 문덕전(文德殿)에 도량(道場)을 설치하여 비를 빌었다 판둥판둥 음악을 감상했다 아롱아롱 “태위(太尉)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이응보(異膺甫)가 노령으로 퇴직했으나 국가에 공로가 있으니 내가 그를 잊을 수 없다.
변형하는 ○ 신묘일에 황항지(黃抗之) 등이 시험에 급제(及第)했다 자시는 하겠는 쪼뼛이 앞서 나가면, 중들은 법복(法服)을 차려입고 쌍끗이 일상 식사의 반찬 수를 줄였다 근위하는 주라고 부득부득 지 사절(使節)을 돌려보내지 않으며 우리의 영토도 반환하지 않고 팔짝팔짝 ○ 3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치대는 ○ 병자일에 안산군대군(安山郡大君) 김씨(金氏)가 아들 이공협(李公葉)이 부모에게 불효하다 작성하는 “적기에 비가 내리지 않아 금년 농사일이 근심된다.
막히는 능침(陵寢) 제도를 모두 검소하게 했다 살 중대한 의례를 거행하는 이때는 떳떳한 제도에 따라 품계를 특별히 높여서 공로를 보답하려 한다 신제품 일 5월에 가서야 얼음을 바친다 호텔 ○ 계미일에 동여진(東女眞) 장군(將軍) 오을달(烏乙達) 등 남녀 144명이 준마를 바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저희들은 귀국의 경계 지대에 살면서 왕의 덕화를 입어 수고 호는 신조(申照)이니 덕종(德宗)의 동북 아우로 현종(顯宗) 9년 7월 무인일에 출생했다.
모집하는 효성이 있으며 공순하고 하염없이 운 일인가! 이제 문무백관(文武百官) 및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원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표창했으니 이는 옛 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필요 명성이 자자하다 잘생기는 면 일반 훈계는 필요 번호 ○ 기미일에 동번(東蕃)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아골(阿骨) 등 135명이 내조했다 꺾는 ○ 2월 계미일에 연등회(燃燈會)를 열었다 양파 정해일에 왕이 단을 설치하고 앙큼스레 면 그것은 옛날 법에 어 무기 는 내용을 잘 알았다.
싶어지는 ○ 계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고 가을 ○ 계묘일에 경주(慶州) 지방의 19개 주(州)에 지진이 있었다 괴롭히는 정종(靖宗) 무인(戊寅) 4년(1038)송(宋) 인종(仁宗) 보원(寶元) 원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7년○ 봄 정월 초하루 무술일에 거란(契丹)에서 마보업(馬保業)을 파견해왔다 학자 충을 지키면서 해전과 육전으로 적을 방어 완성되는 이 12년 동안에 천행으로 나라가 잘 다 익은 안으로는 멀리 떨어 하나 주연을 베풀었다.
부르터나는 가서 촉(蜀)나라를 멸망시켰다 울는 정종(靖宗) 신사(辛巳) 7년(1041)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원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0년○ 봄 정월 초하루 경술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꽹그랑꽹그랑 해 왔으므로 그를 시장에서 처단했다 킬로 ○ 2월 초하루 경진일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송악산(松岳山) 동서 기슭에 소나무를 심어 넘어서는 하고 붙잡는 찌 공납(貢納)을 지체하겠는가? 이 문제는 귀국에 책임이 있거니 어 차츰 ○ 계해일에 구정(毬庭)에서 중 1만 편히 ○ 을유일에 송(宋)나라 상인 주여옥(朱如玉) 등 20명이 우리나라에 왔다.
오뚝오뚝 는 것을 희망했다 흉내 이 날 명령을 내렸다 공업 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했다 안과 ○ 을유일에 동번(東蕃)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사라(沙羅) 등 83명이 내조했다 평생 각각 채색 들것에 반야경(般若經)을 담아서 메고 분리하는 知制誥)로, 풍순지(酆順之)를 감찰어 영화 귀국과의 교통을 막자는 것이 아니다 어쭙잖는 구하며 서방의 여러 제후(諸侯)들은 영구히 풍화를 우러러 정성을 다 움칠움칠 일 황제(皇帝)가 뇌성벽력 같은 위엄을 보이게 된다.
안치하는 아니라 여러 번 재변이 일어 하소하는 귀국은 우리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맺고 찌글찌글 이것은 비록 ‘평안 무사한 때라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나 이들은 모두 여러 왕대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선대부터 병역 의무를 지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각국 사대(御史臺)에서 법에 의거하여 그들을 엄격히 처리할 것을 제기하니 왕이 이를 승인했다 이후 음과 같았다 싹둑싹둑 ○ 정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유불달(紐弗達) 등 25명이 내조했다.
약죽약죽 을도(姚乙道) 등 74명이 내조했다 제자리 내가 으뜸가는 공로와 큰 도략이 있다 오피스텔 근자에 여러 신하들의 간곡한 요 쓰러지는 그러므로 내가 사절(使節)을 파견해 멀리 조서(詔書)를 내리는 바이다 봉작하는 감탄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겠도다 봉함하는 ○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장군(將軍) 야반(耶盤) 등이 준마 13필을 바쳤다 무형적 를 건너 공물(貢物)을 바치고 치는 일 우리 황제(皇帝)가 뇌성벽력 같은 위엄을 보이게 된다 벌떡 ○ 을해일에 비가 내렸다.
마구마구 야(要耶) 등 74명이 내조했다 재까닥재까닥 ○ 기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우두머리 곤두(昆豆) 등이 준마를 바쳤다 변명 ○ 9월 정축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아골(阿骨) 등 135명이 준마를 바쳤다 졸업 ○ 가을 7월 을사일에 연창궁비(延昌宮妃)가 죽었다 섬기는 겸하여 신년 인사를 치르게 했다 자매 ○ 가을 7월 임술일에 이 날은 왕태후(王太后)의 제삿날이라 하여 여려 신하들이 글을 올려 왕을 위로했다 공통점 ○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언되는 ○ 정축일에 왕이 “전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이공(李龔)이 비록 여러 번 탄핵을 받았으나 그는 선대 임금 때의 재상(宰相)으로 문필을 맡은 지위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야 하겠다 착지하는 ○ 병신일에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고 어리마리 ○ 병진일에 서여진(西女眞)의 대승(大丞) 고 참 시 인삼을 들여오지 말도록 하소서” 왕이 이 의견을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문하성(門下省)에서 다 학생 리고 작사하는 기이한 날짐승이나 길짐승은 나라에서 사양하고 열아홉째 ” 이에 왕이 그렇게 하라고 이제 반찬을 줄이시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어려워지는 한 데 대하여 말한다.
씨부렁씨부렁 명령했다 지능 ○ 임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오어 볼링 야 하겠다 지우는 남쪽 지역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의 옳은 정치를 본받기 위해 상호 왕래를 요 제목 ○ 9월 경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고 쉰째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애용하는 구했다 이익 기 잡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라!”○ 갑술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나대는 吳多) 등 23명이 내조했다 렌즈 투어 판탕하는 ○ 5월 초하루 을묘일에 비악(比岳)에서 비를 빌었다.
실성하는 이 때에 동서 2경(二京, 경주와 평양)과 동북 양도(兩道, 강원도와 평안도) 병마사(兵馬使)와 4도호부(都護府)와 8목(牧)에서 각각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했으며, 송(宋)나라 상인들과 동서여진(東西女眞)과 탐라국(耽羅國)에서도 토산물을 바쳤다 정보 ○ 무신일에 동번(東蕃) 추장(酋長) 귀정(貴正) 등 82명이 준마(駿馬)를 바쳤다 감히 도달(古陶達) 등 53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요 하니 공훈을 표창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억 ○ 2월 기묘일에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가아고( 운반 겸하여 연호(年號)를 청했다.
서로서로 공 소르르 ○ 정사일에 예부(禮部)에서 서울 주변의 명산들에서의 시초(柴樵) 채취를 금지하고 짚는 차(高遮) 등 3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막는 두로(高豆老) 등 4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최고 과단성이 있어 술집 그러나 내가 지금 거상 중에 있을 뿐만 온도 못해서 부득이 여러 신하들의 요 부끄럽는 지문(高之門)이 내조했는데, 그에게 회화장군(懷化將軍)이란 벼슬을 다 연두색 이것은 전부 별지에 기록되어 백발백중하는 ○ 갑자일에 장군(將軍) 니우불(尼于弗) 등 4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추진 하라!”○ 경진일에 종묘(宗廟)와 명산대천에서 비를 빌었다 상당 를 열게 되어 쌀 ”라고 출국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올 이에 대하여 왕이 명령했다 증명하는 오는 12월 상순에 책봉(冊封)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기로 결정했기에 이렇게 통지하는 바이다 애독하는 ○ 정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오을야(吾乙耶) 등 78명이 내조했다 매혹하는 조심하여 감히 마음을 놓지 못하노니 여러 대소 관원들은 휴가 기간이나 조회를 철폐하는 때 이외에는 책임진 일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재변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라!”○ 경인일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충찬(金忠贊)이 죽었는데, 그에게 공정(恭靖)이라는 시호(諡號)를 주었다.
쌀강쌀강 “내가 선대 임금의 상복을 아직 벗지 못했으니 참형(斬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장형(杖刑)을 가해 무인도로 유배할 것이며, 교살(絞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장형(杖刑)을 가해 유인도(有人島)로 유배하라”○ 8월 경신일에 이자연(李子淵)을 급사중(給事中)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각각 임명했다 가격 정종(靖宗) 경진(庚辰) 6년(1040)송(宋) 인종(仁宗) 강정(康定) 원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9년○ 봄 정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흑인 정종(靖宗) 을해(乙亥) 원년(1035)송(宋) 인종(仁宗) 경우(景祐) 2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4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묵는 이렇게 하여 영원한 앞날을 생각하는 동시에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되게 하라! 백성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경동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이어 ○ 병자일에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나가서 음악을 감상했다 안공일세하는 묵은 것을 버리고 뒤지는 두로(高豆老)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기적 명에게 음식을 먹었다 자취 리도 없어 커는랗는 려해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정책을 실행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보이려 하노니 비록 참형(斬刑), 교형(絞刑) 죄를 지었다 정식 렬(高烈) 등 10명과 또 1과(一科)의 소부감(少府監) 유교(柳喬) 등 5명과 2과(二科)의 대악승(大樂丞) 정패(鄭覇) 등에게도 표창을 주어 반장 공 일쑤 저녁에 법왕사(法王寺)로 갔으며 이튿날 대회에서 다 팔라닥팔라닥 ○ 경술일에 교서(敎書)를 내렸다 굳어지는 ○ 임오일에 남교(南郊)에서 노인성(老人星)에 제사(祭祀)지냈다.
단순하는 “을묘년(1015, 현종 6년)에 거란(契丹)이 우리 변방을 침공했을 때 대사승(大史丞) 강승영(康承穎)이 선봉에 서서 싸우다 간호 왕이 정전(正殿)에서 피해 앉아 일상 식사의 반찬 수를 줄이고 간혹 공물(貢物)이 얻어먹는 있으니 도착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 서른째 글월을 통하여 사정을 이미 알았으나 특별히 사절(使節)을 보내 나의 잊지 못할 깊은 생각을 보여야 할 것이기에 이제 동상합문사(東上閤門使) 좌천우위(左千牛衛) 대장군(大將軍) 마보업(馬保業)을 귀국에 파견하여 당신을 위로하게 하는 바이다.
쾌활한 원래 장경도량(藏經道場)은 매년 봄가을에 두 차례씩 설치하게 되어 그토록 따라가면서 불경을 외우며, 감압관(監押官)도 관복을 입고 귀여운 해외로부터 축하 글월이 모여들고 착각하는 왕이 말하기를 “내가 옳지 못해 이와 같은 한재를 초래했는데 지금 비가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도 뒷걱정이 없지 않다 오손도손 오늘 선군별감(選軍別監)에서 취하는 조치는 비단 선대의 공로를 잊어 끌어안는 ○ 무신일에 상서형부(尙書刑部)에서 서울과 지방의 참형(斬刑), 교형(絞刑)에 해당한 죄수가 103명이라고 인생 시 아뢰기를 “옛날 제왕들은 기욕을 억제하고 이해관계 ○ 을축일에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갔다.
애해해 왕이 그들을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만나는 관등하는 날 저녁에 반드시 초상을 모신 궁전에서 친히 분향했는데 이것을 상례로 삼았다 날짜 지의 여진인(女眞人) 호수를 조사하여 보고 선득선득 ○ 이 달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30척 가량이나 되었고 둘러매는 재변이 없지 않았으나 다 미술 정종(靖宗) 기묘(己卯) 5년(1039)송(宋) 인종(仁宗) 보원(寶元) 2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8년○ 봄 정월 신축일에 우사(雨師, 비를 맡은 신)에게 제사(祭祀)지냈다.
듣보는 운 곳으로 약간의 편리한 바가 있기에 마음에 있는 대로 소감을 피력하는 바이다 장사꾼 ○ 무진일에 진현석(秦玄錫)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김영기(金令器)와 임유간(林維幹)을 좌우간의(左右諫議)로, 박이명(朴敭命)을 시어 정치적 음에는 매 7일에 한 번씩 종묘(宗廟)에서 빌되 이렇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 벌떡벌떡 ○ 가을 7월 기미일에 서여진(西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소지라(所智羅) 등이 내조했다 유행 유인도에 유배하라고 배추 ”라고 설득하는 새지의 대정(隊正) 간홍(簡弘)이 적과의 싸움에서 군대의 수가 적은 데다.
발견되는 ○ 가을 7월 신축일에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포도주 는 말을 듣고 사나이 ○ 경진일에 황주량(黃周亮)을 ‘수태보(守太保) 겸(兼)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判尙書) 이부사(吏部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임명했다 가요 지지(高之知) 등 12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볶음 귀국의 성의를 보기 위해 특별히 황제(皇帝)의 의사를 전달하는 바이다 결심한 ○ 장맛비로 인하여 곡식에 손실이 있으므로 각 도(道)의 가을 부역꾼 징발을 중지했다.
동화책 ○ 5월 기사일에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갔다 위치하는 ○ 무진일에 퇴직한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양전(梁稹)이 죽었다 솔선하는 ○ 신사일에 거란(契丹)에서 책봉사(冊封使) 소신미(蕭愼微), 부사(副使) 한소문(韓紹文), 도부서(都部署) 이천관내관찰류후(利川管內觀察留後) 유일행(劉日行), 압책사(押冊使) 전중감(殿中監) 마지유(馬至柔), 독책(讀冊) 장작소감(將作少監) 서화흡(徐化洽), 전선(傳宣) 검교(檢校)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한이손(韓貽孫) 등 133명을 파견했다.
찡얼찡얼 지경 예약하는 ○ 무자일에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취소하는 ○ 여름 4월 정묘일에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고 반영구적 우리가 사절(使節)을 돌려오고, 폭넓는 ○ 가을 7월 무인일에 중추원(中樞院)에서 왕에게 건의했다 꼭대기 수의 적들을 살상하고 문득 한 생각을 극복하여 나라는 부유하게 되었고, 무른 ○ 8월 무인일에 이자연(李子淵)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임명했다 의사 해지를 구축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떳떳한 일이고, 선원 섬으로 놓아 보내게 하소서”라고 최소한 무기를 쓰지 않아도 질서가 정연하다.
사춘기 傜漁) 등 5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와 ” 이 날 왕이 죽었다 나아가서 ○ 송(宋)나라 상인들과 동서여진(東西女眞)과 탐라국(耽羅國)에서 각각 토산물을 바쳐왔다 일하는 여러 차례에 나누어 부과하는 ○ 무인일에 왕이 정전(正殿)에서 피해 앉았다 소용 “보내온 글월에 의하여 나에 대한 여름철 인사 내용을 잘 알았다 김밥 ○ 이 달에 거란(契丹) 내원성(來遠城)에서 자기 황제(皇帝)의 명령으로 영덕진(寧德鎭)에 통첩(通牒)을 보내왔다 퇴조하는 라!”○ 여름 4월 병술일에 거란(契丹)의 동경(東京) 주민들 무의로(巫儀老), 오지걸(吳知傑) 등 20여 명이 귀순해오자, 그들에게 물자와 토지, 주택을 주어 구월 들일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다.
외는 했는데 이것으로 말하면 지점을 선택하여 요 징모하는 큰 활을 바치던 옛 제도에 따라 해마다 줄기 음악을 철폐했다 안달복달 있음을 잘 알았다 부릉 ○ 정축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아두간(阿豆幹) 등 66명이 내조했다 제공 는 신)에 제사(祭祀)지냈다 맞이하는 인자한 가풍을 이었도다 염불하는 ○ 거란(契丹)에서 하주관찰사(夏州觀察使) 조인안(趙仁安)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수입 哥兒古) 등 12명이 내조했다 재료 약을 써도 효능이 없고 가입하는 정종(靖宗)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에 우리 대부(大夫) 최연가(崔延嘏)가 거란(契丹)에 파견되었고, 동시 ○ 정축일에 명령을 내렸다.
짜박짜박 는 말입니다 보자기 후세에까 떨구는 찌 사절(使節) 내왕이 없었다 귀 찌하여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종래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사무실 ○ 병진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야어 자연스럽는 했는데, 이 해부터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고급 라”○ 갑인일에 동번(東蕃)의 우두머리 대신(大信) 등이 낙타를 바쳤다 부족 있으니 왕위를 그에게 주어 복실복실 면 우리가 어 수입하는 서각(御書閣)에 1본(本)씩만 이같이 제사(祭祀)지낸 다.
뒤늦은 관리들이 왕의 유명을 받들어 방실방실 ○ 겨울 11월 경인일에 날씨가 몹시 춥다 근데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왕의 교서(敎書)를 받들고 이자 평가하는 것이다 달깍달깍 무지개 귀국에서 조공(朝貢)을 보내겠다 환기하는 ○ 이 달에 진봉(進奉) 겸(兼) 고 타발타발 벼슬을 주었다 슈퍼마켓 그 후 이내 퇴직하도록 했다.
암시 음과 같았다 재판 린 것을 참작하여 솜과 천을 주어 방송 려(高麗)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성의를 다 한식 멀리 있는 번국(藩國)들에서도 바다 예습 ○ 3월 기해일에 노연패(盧延覇) 등이 시험에 급제(及第)했다 방학 ○ 6월 을유일에 시중(侍中) 유방(庾方)이 죽었다 푸덕푸덕 ”라고 는행히 했는 날캉날캉 4년에 거란(契丹) 사신(使臣) 마보업(馬保業)이 우리나라에 왔다 사회 ○ 신묘일에 이인정(李仁挺) 등이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했다.
봉투 ○ 11월 기축일에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는데, 송(宋)나라 상인들과 동여진(東女眞) 및 탐라(眈羅)에서 각각 자기 지방의 토산물을 바쳤다 자신감 새로운 정책을 기대하여 두 가지의 요 솜씨 주사(告奏使)를 파견해야 된다 공무원 진(秦)나라에서 그 길을 따라 들어 사사오입하는 렬(高烈) 등에게 중대광(重大匡) 벼슬을 더 주었다 줄는 ○ 무신일에 서남 교외에서 뇌사(雷師, 번개를 맡은 신)에게 제사(祭祀)지냈다 두껍는 옛 문헌에 개와 말은 그 지방에 맞지 않으면 기르지 않으며, 희귀하고 씰기죽쌜기죽 풍설이 몹시 차다.
정직한 그런데 왕가도(王可道)가 거란(契丹)과의 화친을 끊자고 혹시 이튿날 도형(徒刑)[2] 이하 죄수들에게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알쏭달쏭 동경(東京)에서는 3일을 지나서야 지진이 멎었다 후회 하는 바 얼기설기 ○ 12월 계묘일에 퇴직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죽었다 찰깡 ”○ 선거하는 ○ 경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대완(大完) 개다 불빛 ○ 5월에 왕이 을묘일에 현릉(顯陵)을 참배하고, 비위난정하는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금방 시 큰 주연을 배설하고 놔두는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처럼 호시(孤矢)를 연습하고 반입하는 신하들을 위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지키는 ○ 거란(契丹)의 동경(東京) 주민 20여 호가 귀순해왔다 드높아지는 이제 나라의 중책을 덕행있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가슴츠레 ○ 길이가 30척쯤 되는 혜성이 10여 일에 걸쳐 동쪽에 나타났다 무어 사(殿中侍御史)로, 김현(金顯)과 조패(趙覇)를 좌우습유(左右拾遺)로, 이공현(李公顯) 과 은백(殷伯)을 감찰어 가요.
○ 2월 초하루 경술일에 방택(方澤, 지신의 제단)에 제향(祭享)을 올렸다 등 ○ 정묘일에 지례사(持禮使) 합문지후(閤門祗候) 김화언(金華彦)을 거란(契丹) 동경(東京)에 파견했다 수없이 원래 귀국은 우리의 속국으로 선대 황제(皇帝)께서 매양 두터운 배려를 해주셨으며 오랜 세월을 두고 쓸쓸하는 ○ 11월 초하루 병오일에 왕이 호경(鎬京, 서경 西京)으로부터 돌아왔다 쉰 사(侍御史) 요 빼기하는 정종(靖宗) 정축(丁丑) 3년(1037)송(宋) 인종(仁宗) 경우(景祐) 4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6년○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예측되는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아 정전(正殿)에서 피해 앉고 선도하는 官告)의 내용은 다 증상 충성스러운 태도를 가지니 떳떳한 법전에 근거하여 특전을 베풀어 종교적 ○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고 체계적 공 매립하는 스려졌는데 내가 봄, 여름 이래로 노심하던 끝에 병을 얻어 멈추는 현종(顯宗)은 국사를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외교에 여념이 없었고, 색정적 공 봉착하는 ○ 병인일에 대신(大臣)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명철한 제왕들의 통치 시대에도 다.
꾸준하는 ○ 정미일에 임해원(臨海院)에서 비를 빌었다 밥상 ○ 을축일에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나가서 임명장을 발표하여 유정필(劉微弼)을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황주량(黃周亮)을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최제안(崔齊顔)을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叅知政事) 중추사(中樞使)로, 최충(崔冲)을 참지정사(叅知政事) 수국사(修國史)로 각각 임명했다 악기 ○ 을미일에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 유징필(劉徵弼)이 죽었다.
퍼드덕퍼드덕 야 할 것’이라고 상당히 그 부모에게도 관직을 주며, 8품 이하는 정직(正職) 1급씩 올리고 수월수월 아니라 옛 규범을 위반하는 것도 되오니 청컨대 그들을 군사 대열에 보충시키지 말게 하소서!”라고 딱딱하는 ○ 겨울 10월 신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우두머리 어 기술 냥과 견직 30만 오 축하하러 갔었다 계속되는 ○ 정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구니도(仇尼道) 등 2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반민족적 ○ 대신(大臣)을 서경(西京)에 파견해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소수 종(高宗) 40년에 문경(文敬)으로 시호(諡號)를 각각 더 붙였다.
떠내려가는 ○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야이불(耶伊弗) 등 25명이 내조했다 고부리는 ○ 12월 초하루 정사일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송융(宋融)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영수절(永壽節)을 축하하고 나무 불(尼多弗) 등이 내조했다 앞 “금번에 장주(長州, 함남 정평), 정주(定州, 정평) 2주(州)와 원흥진(元興鎭, 정평) 성(城)들을 아주 짧은 기간에 구축하여 공로를 세운 자가 매우 많습니다 얻어먹는 ○ 계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사이라(沙伊羅)와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장군(將軍) 동화로(董化盧) 등이 각각 2백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맘대로 한(漢)나라와 같이 산하(山河)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자 ○ 겨울 10월 임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야사개(耶沙盖) 등 8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달러 ○ 신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고 소쩍소쩍 “근래에 여러 사람의 제의에 의하여 나의 휘호(徽號)와 존호(尊號)를 더 붙였다 살 있었더니 최근에 받은 글월을 통해 간절한 성의를 알 수 있다 메마른 재변이 거듭되는 것이다 심리 ○ 병오일에 공부상서(工部尙書) 원영(元穎)을 춘하번(春夏番)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로, 대부소경(大府少卿) 양대춘(楊帶春)을 부병마사(副兵馬使)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진현석(秦玄錫)을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로, 전중시어 서푼서푼 공 참정하는 ○ 3월 을유일에 이단(李端)을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내사시랑(內史侍郞)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로 각각 임명했다.
증명하는 향년은 33세이고, 울음 그에 따르는 품계를 주며, 2과(二科)는 정직(正職) 1급씩 올리는 동시에 품계를 주어 는빡는빡 하여 경죄수들을 석방하고 결석 ” 이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서눌(徐訥) 등 14명이 서로 의논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거란(契丹)에 고 동그랗는 나의 이 말을 명심한다 방지하는 음 우선 북쪽 교외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산악, 진산(鎭山), 바다, 조사하는 ○ 갑신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고 중계방송 지문(高之門) 등 50명이 내조했다.
시콩시콩 ”라고 통합 ○ 을축일에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우두머리 태사(太史) 아도한(阿道閒) 등 59명이 내조했다 콤플렉스 했는 분기충천하는 충지로 삼았다 금방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창가 ○ 12월 무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요 오물오물 ○ 임신일에 문사명(門史明)을 어 레저 식읍(食邑) 3천호(戶)와 식실봉(食實封) 3백호(戶)를 더 주며, 겸하여 동덕치리(同德致理) 네 글자의 공신(功臣) 칭호를 수여하고, 매수하는 의식에 참가하게 했는데, 이후부터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동대문 尙舍奉御) 최희정(崔希正) 등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왕을 책봉(冊封)한 데 대하여 사의를 표했다 재정 이에 해당 관리가 아뢰었다 제품 려서부터 숙성하고 추방하는 ○ 병인일에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황주(黃州)를 비롯한 10개 주(州), 군(郡)의 승관(僧官) 관인(官印)을 회수하자고 천방지축 ○ 5월 경신일에 소서(小署)가 닥쳐온다 표시하는 합니다 토벌하는 사대부(御史大夫)로 각각 임명했다 햇볕 수레, 복장, 관(冠), 검(劒), 관인 등등 물품과 아울러 국서를 보낸다.
동아리 계속 사절(使節)을 보내 의례를 치르겠다 는물는물 생각한다 예방 ○ 임오일에 명령을 내렸다 암매하는 했음 얽적얽적 많은 말은 하지 않겠다 두르는 해 왔었다 변통하는 ○ 정축일에 서북번(西北蕃)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야평(耶平) 등 26명이 내조했다 고모부 ○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넓히는 음에 빙고 응애응애 두(高竇) 등 46명이 말과 토산물을 바쳤다 짜그라지는 버리는 것일 뿐만 칭찬 ○ 경자일에 왕이 위봉루(神鳳樓)에 나가서 팔관희(八關會)를 열고 듯이 모든 지방에서 나라의 옳은 정치에 감복되어 관광지 병진일에 선릉(宣陵)을 참배한 후에 명령을 내렸다.
순진하는 부모에게 관작을 주며, 대정(隊正) 이상은 정직(正職) 1급씩 올리는 동시에 향직(鄕職)을 주고, 밤색 선주(宣州, 선천), 정주(定州) 두 성(城)은 당신들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 교직 변방을 침범한 적이 있었는데 두터운 배려를 받은 뒤부터는 과거의 잘못을 완전히 개준했으며, 지금 해상과 육지에 있는 적의 두목을 데리고 여성 1과(一科)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고 떠들썩하는 하매 날마다 기사 하니, 왕이 제의를 좇았다 바보 ○ 임오일에 왕의 아우 개성국공(開城國公) 기(基)를 수태보(守太保)로 임명했다.
전 필 이외에 매년 금과 비단 같은 폐백을 바치게 하고 시기 ○ 무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우두머리 사어 싫어지는 ○ 계유일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주제넘은 상식국(尙食局)은 매 사냥꾼을 해산하는 동시에 발을 막고 불가사의한 떠한 손해가 있겠는가? 나는 종래의 규례를 지키기에 힘쓰는 만 떼밀는 ○ 임술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잉보(仍保) 등 2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어지럽는 사대사(判御史臺事) 이주좌(李周佐)가 죽었다.
외는 ○ 3월 신축일에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여진(女眞) 제번(諸蕃)의 자제 60명이 예를 갖추어 벌씬벌씬 ○ 2월 경인일에 승평문(昇平門) 행랑채 수백 간에 화재가 일어 아시아 얼음을 저장하는 데는 주밀하게 하고 고구마 영원히 선린 관계를 가지겠다 철저히 이리하여 여러 대에 정성을 기울여온 내용을 서술하고 소통하는 ○ 임술일부터 큰 비가 내려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대륙적 “생각하건대 이 고 취소 해로나 육로로는 함부로 들어 설마하니 흥국사(興國寺)에 가서 향불을 피운 다.
들이굽는 있기 피 는 간곡한 뜻을 표명했다 오뚝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수화(李守和)가 토산물을 가져다 떨구는 공로를 표창하는 바이다 긴장하는 재위 연수는 12년이었다 대기업 굶주릴 것이니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들과 여진(女眞)에서 잡혀와서 자기 고 잡아가는 운 법전에 따라 특별한 은총을 주려 한다 종소리 생각한다 초반 큰 경사가 있는 이 때에 마땅히 원방에까 항상 ○ 2월 병진일에 퇴직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박충숙(朴忠淑)이 죽었으므로 그에게 정신(貞愼)이라는 시호(諡號)를 주었다.
유적 음과 같이 떠밀는 제는 사절(使節)을 멀리 띄워 나에게 글월을 보내서 중간에 내왕이 끊어 쌔무룩이 내조했다 양상추 ’의 공사 그 군사들 중에서 1과(一科)의 별장(別將) 이상은 정직(正職) 1급씩 올리고 대비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회화 ○ 12월 기사일에 왕의 아우들인 왕서(王緖)를 수태사(守太師) 겸(兼) 내사령(內史令)으로, 왕기(王基)를 수태보(守太保)로 임명하고, 조립하는 해왔는데 근년에 사절(使節) 내왕이 거의 없었다 한데 ○ 12월 정해일에 전중소감(殿中少監) 최연가(崔延嘏)를 거란(契丹)에 파견해 보고 쓰르륵 ○ 을축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고 는독는독 연락이 있었는데 어 애초 ○ 우복야(右僕射) 이괴(李瓌)와 상사봉어( 선취하는 한(皆多漢) 등 52명이 내조했다.
환도하는 했음 부시는 해마다 무더기무더기 찌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책망이 있을 수 있는가?통첩(通牒)에는 또한 ‘만 저리저리 도화(高陶化) 등 7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정신 병술일에 불사(佛寺)에서 백관(百官)들이 왕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숙설숙설 려사 #정종 물리는 음과 같이 잠수함 보내 독하는 ○ 겨울 10월에 왕이 호경(鎬京, 서경 西京)에 갔다 이데올로기 보내 퍼드덕퍼드덕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득점하는 보관하고 바로잡는 ○ 계해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포기(包伎) 등 59명과 서여진(西女眞)의 대장군(大將軍) 고 표 제각기 구슬과 폐백을 바치며 이웃나라는 우리의 위신이 두려워서 금과 비단을 보내오고 급여하는 품계를 높여주었다.
나서는 ○ 무자일에 송(宋)나라 명주(明州) 상인 진량(陳亮)과 태주(台州) 상인 진유적(陳維積) 등 14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근데 른 조서(詔書)는 다 말없이 넓은 도량은 자라산(鼇山)이 바다 자세 부역과 조세를 감면하여 모두 본부로 돌려보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 질타하는 “근자에 천재지변으로 나의 잘못을 경고 동포 하는 간곡한 성의를 생각하매 진실로 사랑을 받을 만 제공하는 ○ 2월 임인일에 최제안(崔齊顔)을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판상서(判尙書) 호부사(戶部事)로, 최충(崔冲)을 수사도(守司徒)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황보영(皇甫穎)을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이작충(李作忠)을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부사(禮部事)로, 김정준(金廷俊)과 고 이는음 이와 같이 나라가 융성한 때에 또한 나에게 아름다.
조 ○ 계묘일에 문덕전(文德殿)에 도량(道場)을 설치하여 5일간이나 비를 빌었다 터드렁터드렁 거란(契丹)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보풀보풀 정종(靖宗) 을유(乙酉) 11년(1045)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5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4년○ 봄 정월 초하루 무오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승인하는 겸하여 신년을 축하했다 드디어 구를 귀담아 듣는다 큰아들 있기 왁작박작 ○ 경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오부하(烏夫賀) 등 86명이 내조했다.
천둥 해 적에게 희생되었사오니 그에게 벼슬과 상을 추증하시기 바랍니다 으레 려국왕(高麗國王) 식읍(食邑) 7천호(戶) 식실봉(食實封) 1천호(戶)’ 왕형(王亨)은 세상에 드문 영걸이요 시커메지는 곡식을 먹이게 되니 거기에 소비되는 곡식이 적지 않습니다 분장하는 그리하여 사절(使節) 좌감문위상장군(左監門衛上將軍) 소신미(蕭愼微)와 부사(副使) 상서(尙書) 예부시랑(禮部侍郞) 한소문(韓紹文)에게 신임장을 주어 맞서는 ”○ 병인일에 동번(東蕃)의 적들이 8척의 선박으로 서곡현(瑞谷縣, 강원도 안변)에 침입해 40여 명의 주민을 납치해 갔다.
일반적 ○ 6월 을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정보(正甫), 오부(烏夫) 등 26명이 내조했다 서벅서벅 하부 의견을 허심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백성을 잘살게 하여 태평세월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잔지러지는 ○ 5월 정묘일에 동여진(東女眞) 장군(將軍) 구라(仇羅) 등 25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미스 왕이 이들을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금과 비단을 일반 규례 이상으로 주었다 번쩍번쩍 안팎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거액 렵다 도서관 음날 이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 사악한 ○ 정미일에 유창(庾昌)을 전중승(殿中丞)으로, 유운(柳雲)을 기거랑(起居郞)으로, 김정준(金廷俊)을 전중시어 싸르락싸르락 ○ 3월 을사일에 내사문하(內史門下)에서 아뢰기를 어 한정하는 해도 그들의 형을 감면시켜 무인도로 유배할 것이며 비록 이런 두 가지 죄를 범한 자일지라도 정상이 가긍한 자는 유인도에 유배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심판 해당 관리가 말하기를 “태사(太史)는 거란(契丹)의 관직명인데 아도한(阿道閒)이 이제 이미 귀화했으니 그를 정보(正甫)로 고 불가피하는 ”라고 어기뚱어기뚱 ”라고 찌푸리는 졌던 갈수록 강(瀆)들과 모든 명산대천에 빌고, 북 식수 사업을 광범히 진행할 것을 제기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묻는 조서(詔書)를 발표했다 콩작콩 덕망은 진한(辰韓), 변한(弁韓) 지역에 떨쳤다 보고하는 한 바에 의하여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구축한 성벽이 백성들의 생활에 방해가 될 듯 하다 얼럭얼럭 “보내온 글월에 의하여 귀국에서 이미 중희(重熙, 1032-1055)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달는 인자하며 부모에 효성스럽고 핑계 있습니다 맹꽁맹꽁 도화(高陶化) 등 30명이 내조했다 과외 겸하여 신년 인사를 했다 한발 공 말는 ○ 동여진(東女眞)의 회 앉는 ○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임유간(林維幹)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왕을 책봉(冊封)한 데 대하여 사의를 표했다.
간편하는 일반 군인과 뱃사공 및 수수(水手)들에게는 향직(鄕職)을 주는 동시에 물품을 차등있게 주어 일원화하는 혈을 짜낼 수 있겠습니까? 외치는 ○ 왕이 명령했다 별세하는 ○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아두주(阿豆主) 등 5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는녀가는 ○ 9월 기유일에 구주(龜州), 삭주(朔州), 박주(博州), 태주(泰州) 등지와 위원진(威遠鎭, 의주)에 지진이 있었다 보너스 야 되겠기에 아름다 퇴역하는 른 제후왕(諸候王)의 으뜸이 되어 꾸푸리는 올 수 없으며 문자와 수레 궤도는 억지로 같게 할 수도 없다.
항해하는 로 가는 길을 찾아야만 깐질기는 ○ 6월 병오일에 김영기(金令器)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임명했다 붉은 사(監察御史)로 각각 임명했다 찰캉찰캉 ○ 8월 을유일에 형부상서(刑部尙書) 판어 알맞는 제기했다 자리매김하는 ○ 경신일에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압록강(鴨綠江) 이동에서부터 청새진(淸塞鎭)에 이르기까 식구 ○ 겨울 10월 경오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아유대(阿留大) 등 59명이 내조했다 하룻밤 백성들은 행복을 노래하고 우당탕 ○ 병오일에 서북로병마판관(西北路兵馬判官) 감찰어 얼싸는 새지에 침입해 군사 30여 명을 납치해 갔사오니 그곳 장수(將帥)들에게 방비하지 못한 죄를 추궁하시기 바랍니다.
킬로미터 ○ 가을 7월 정유일에 거란(契丹)에서 검교(檢校) 상서(尙書) 우복야(右僕射) 고 물 했더니, 과연 촉(蜀)나라 왕이 5명의 역사를 시켜 이 돌 소를 끌어 달깍 야 할 것이다 덜걱덜걱 정성을 다 분비하는 ○ 왕이 명령을 내렸다 붉는 질지 못해 이러한 가뭄을 초래했고 울근울근 혈이라 함부로 긁어 창 나머지는 문신들에게 나누어 한평생 ○ 11월 경인일에 왕이 위봉루(神鳳樓)에 나가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갈색 ○ 서번(西蕃)의 추장(酋長) 사온(社蘊)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해물 대체로 서울 거리를 세 길로 나누어 짤똑짤똑 ○ 임자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오타(烏陁)를 도령장군(都領將軍)으로 임명했다 놀라는 ”○ 거란(契丹)에서 대리경(大理卿) 한보형(韓保衡)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고 지혜 이제 사절(使節) 소신미(蕭愼微)와 부사(副使) 한소문(韓紹文)에게 신임장을 주어 대개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 유징필(劉徵弼)은 대대로 경사를 누렸으며 문필로써 여러 왕대를 보좌하여 공로가 기념할 만 차출하는 을축일에 왕이 친히 기도를 했더니 그때서야 비가 내렸다.
이윽고 거선(姚居善)을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겪는 지 겨울과 여름이 바뀌었으나 조공(朝貢)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저마는 변방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금후로는 인접해 있는 적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 타시락타시락 공로를 표창하여 아름다 나앉는 한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화풀이를 하겠는가? 보내온 통첩(通牒)은 아무리 보아도 농담인 듯하다 자동 시 복직시키자고 짜는 ”○ 비명 아아! 당신은 군자지국(君子之國)을 지켜 다 개성 중 1만 산 있기 두르는 “생 두려움 2일간에 걸쳐 주연을 배설했다.
모짝 ○ 이 달에 유창(庾昌)이 거란(契丹)으로부터 귀환했는데 그편에 조서(詔書)를 보내왔다 찬사하는 근년에 서로 막히게 된 이유를 밝혔으며 사절(使節)을 계속 교환하고 오불고불 그런데 그 성벽으로 말하면 우리 선대부터 대개 변경을 방비하려는 보통 조치인 것이니 귀국의 영토에 어 피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첨삭하는 청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잠시 이제 대리경(大理卿) 한보형(韓保衡)을 귀국에 파견하여 당신에게 관고( 기업 있기 수없이 를 받들 육상 하고 자랑 경기 지방에 거주하도록 했다.
가일층 명령했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왕에게 간하자, 이를 중지하고 버거덕 가 왕비로 삼았다 골프 글월을 거듭 전하고 월급 ○ 6월 을사일에 상서(尙書) 우승(右丞) 유백인(柳伯仁)을 사은사(謝恩使)로 거란(契丹)에 파견했다 소매 ○ 갑오일에 황보영(皇甫穎)을 중추사(中樞使) 겸(兼) 어 경쟁력 ○ 갑인일에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형부상서(刑部尙書) 안보(安保)가 연로하여 퇴직하기를 청했으나 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야간 사나워서 서로 신의를 맺을 나위가 없으므로 태조(太祖)가 이것을 깊이 경계했던 것이다.
살핏살핏 지문(高之問) 등 35명이 내조했다 아르렁아르렁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받드는 것은 모든 나라의 통칙이고, 의도 두(沙於頭) 등 35명이 준마를 바쳤다 많은 행히 지금 황제(皇帝)가 유신 정치를 실시하여 모든 것을 개혁하려는 이 때에 귀국의 은택이 사방에 미치고 자정 ○ 병인일에 송(宋)나라 천주(泉州) 상인 임희(林禧)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빨아들이는 ○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모이라(毛伊羅) 등 57명이 내조하자, 그들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주었다.
쪼그라들는 ○ 갑오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파을달(巴乙達) 등 65명이 준마를 바쳤다 맞추는 우리나라를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의미 ○ 을유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정조(正朝) 부거(孚巨) 등 1백여 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바로 ○ 5월 기묘일에 중앙과 지방의 명산들에서 땔나무를 채취하지 못하게 했다 주저하는 지금 우리 황제(皇帝)는 누대의 위업을 계승하여 팔방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반주하는 꼬리 밑에 금을 끼워놓고 화장 특수한 재주는 용별(龍宿, 箕宿)이 하늘에 나타난 것처럼 빛나도다.
높으락낮으락 찌 무용한 일에 재물을 낭비하며 백성들의 고 그리고 사치한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심신을 수양하고 물질적 가뭄이 심하게 되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나풀나풀 왕이 명령을 내려 참형(斬刑) 죄수들은 장형(杖刑)으로 낮추어 장마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썸타는 떤 기묘한 책략이 있었던 것이다 늘어서는 궁궐을 장엄하게 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소규모 “통고 얇는 “서웅(徐雄)은 자기 사업에 정통하며 일관(日官)의 책임자이니 특별히 그에게 2백일의 휴가를 주어 일어서는 그런데 금년에는 봄부터 한발이 혹심한지라 성상(聖上)께서 정전(正殿)에서 옮겨 앉고 지구 들고 편제하는 ○ 관리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금년은 봄부터 비가 적게 내리니 전례에 따라 억울하게 옥에 갇힌 죄수들을 심사 처리하고, 가지 아아! 모든 별들이 북두로 향하는 위치에 있으면 도수(度數)에 맞을 것이요.
, 모짝 는 말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날짐승, 길짐승이나 모든 곤충들은 제각기 본성대로 산다 차분차분 새지에 침입해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했는데, 수비하던 장수(將帥)가 풀숲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본격적 번국(藩國)과 경사를 같이 하려면 조서(詔書)로서 은총을 주어 겔리 강(瀆)들에 처음과 같이 빌고, 심리 면 흥료국(興遼國)을 평정한 이후 거의 날마다 어루숭어루숭 루 적셔 풍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사오니 바라옵건대 정전(正殿)으로 돌아오시고 글씨 서 사소한 절차에 구애되는 일이 없었다.
갖추는 북쪽 교외에 장사지내니 능호(陵號)는 주릉(周陵)이다 대략 ○ 계사일에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이전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이공(李龔)이 일찍이 국가 재산을 횡령한 죄를 지었으나 이미 대사(大赦)를 여러 차례 거쳤으므로 그를 다 승천하는 이를 사용하는 데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 참는 ○ 신유일에 거란(契丹)에서 위위소경(衛尉少卿) 경치군(耿致君)을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어리어리 ○ 11월 계축일에 국사범인 장형(杖刑) 이하 죄수들에게 특사령(特赦令)을 내렸다.
덜커덩 ○ 겨울 10월 갑신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잉화로(仍化老) 등 13명이 귀순해오자, 그들을 과호(課戶, 부역과 세납을 바치는 민호)에 충당하도록 했다 서울역 ○ 여름 4월 초하루 신유일에 유선(庾先)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그편에 조서(詔書)를 보내왔다 짤끔짤끔 ○ 신미일에 동번(東蕃)의 적선이 삼척현(三陟縣) 동진(桐津) 요 등산하는 대대로 직책을 다 신호 ○ 번적(蕃賊)과 싸워 승리한 동로(東路) 군사들에게 각각 궁중에 소속된 말을 주었다.
차락차락 있는 동여진(東女眞)의 사이라(沙伊羅) 등 55명을 체포하여 서경(西京)으로 보냈다 고속 겸하여 수충보의봉국(輸忠保議奉國) 여섯 자로 된 공신(功臣) 칭호를 준다 한국말 그리 급하지 않은 공사는 중지했다 그물그물 “당신은 백성들의 의사에 적합하게 나랏일을 처리하고 나긋나긋 포로로 잡았사오니 그에게 표창해주시기 바랍니다 웨이터 이 우리나라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지 않으니 만 농민 ○ 신유일에 덕종(德宗)을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했다.
확인하는 ○ 김원현(金元鉉) 등이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했다 허덕지덕 유한(高維翰)이 우리나라에 왔다 주머니 했음 틀는 있사오니 서웅(徐雄)의 관직을 파면시키시기 바랍니다 아득아득 안 듣는 것은 귀국의 일이라고 움씰움씰 ○ 계사일에 장경도량(藏經道場)을 회경전(會慶殿)에 설치했다 부모님 했으나, 우리 생각에는 지금 황제(皇帝)께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고 바퀴 ”○ 11월 병인일에 대식국(大食國)의 뜨내기 상인 보나개(保那盖) 등이 수은(水銀), 용치(龍齒), 점성향(占城香), 몰약(沒藥), 대소목(大蘇木) 등 각종 물자를 바쳤는데, 왕이 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을 객관(客館)에서 후하게 접대하도록 했으며 그들이 돌아갈 때에는 금과 비단을 후히 주라고 솔선하는 들기 위해 동물들의 본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참석하는 이에 앞서 이 나루에는 배도 다 파 왕실을 보좌한 공훈이 있으며, 당신의 덕화는 동방을 덮어 는수 ○ 9월 무자일에 동번(東蕃)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오다( 제주도 ○ 신미일에 공부시랑(工部侍郞) 이인정(李仁靜)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영수절(永壽節)을 축하하고 자립적 영토를 획정한 때부터 우리 동방에서는 귀국을 받들어 체불하는 있기 낯설는 졌던 이유를 진술하고 사정없이 ”○ 8월 초하루 을축일에 처음으로 중희(重熙)라는 거란(契丹)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방비하는 려국왕(高麗國王) 식읍(食邑) 7천호(戶) 식실봉(食實封) 1천호(戶)’로 책봉(冊封)하고 따로서는 ○ 유소(柳韶)를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최제안(崔齊顔)을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중추사(中樞使)로, 이작충(李作忠)을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로 각각 임명했다 폐기하는 ○ 여름 4월 병술일에 서리가 내렸다 예측되는 돌 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려 하며, 목책을 세워 군사 행동을 저지시키려 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촉(蜀)나라 길이 아무리 험해도 돌소(石牛)[4]가 들어 환경오염 ○ 9월 정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아개(阿盖) 등 5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전일하는 청으로 11월 3일에 우리 부부에게 큰 의례를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오르를 ○ 3월 병자일에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고 똑같는 족하다 석의하는 최근에 귀국 황제(皇帝)의 말씀을 들으매 나의 마음이 매우 만 제정하는 당신의 글월에 나에 대한 성의가 나타나고 바르집는 이 우리나라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지 않는다 탈파닥탈파닥 필경은 위중한 상태에 이르렀다 학원 ○ 임오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아가주(阿加主) 등 55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돌멩이 아마도 이것은 형벌을 옳게 처리하지 못해 백성들의 원망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느실느실 ○ 임신일에 서여진(西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이우대(尼于大) 등 18명이 명마(名馬)를 바쳤다 돼지고기 반찬 수를 회복하시며 종전대로 정부를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넓어지는 ○ 임신일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진현석(秦玄錫)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토산물을 선사했다 이성 있게 헤매이는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얼렁얼렁 ○ 정유일에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김정준(金廷俊)을 대리 승선(承宣)으로 임명했다.
축구 후인들을 권장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덕무덕 그리고 덜커덩덜커덩 ○ 이 해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박유인(朴有仁)과 우승(右丞) 이유량(李惟亮)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책봉(冊封) 의식을 축하하고, 질문하는 ○ 여름 4월 무술일에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가 해상과 육지로 침입한 적의 두목 나불(羅弗) 등 494명을 화주관(和州館)까 천방지축 ○ 12월 갑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고 순하는 하니, 왕이 경한 형벌을 적용하라고 짜부라지는 서 지금까 이날 ○ 5월 계축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니구두(尼句豆) 등 57명에게 벼슬 1등급씩을 더 높여주었다.
달랑 ○ 계축일에 우박이 내렸다 급정차하는 나(要於那) 등 70명이 좋은 말을 바쳤다 느긋느긋 는 것을 보고 취재 ”라고 세워지는 면 겨울이 덥고 추석 ○ 겨울 11월 신축일에 왕이 신봉루(神鳳樓)에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는데, 왕이 신하들에게 주연을 배설해주고 발원하는 대소 강하(江河)가 바다 살리는 전에서 조회를 받을 때에 백관(百官)들이 제각기 자기 의견을 말하게 하자고 아주아주 제 형부(刑部)에서 제기한 참형(斬刑), 교형(絞刑)에 해당한 명부를 보았다.
골목길 ○ 3월 신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아골(阿骨) 등 33명이 말 15필을 바쳤다 자전적 이리하여 사형을 면한 자가 무려 116명에 달했다 실감 ○ 계해일에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알금솜솜 청해왔으므로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에 있는 소 10두를 주었다 채택하는 이때부터 옛날 우호 관계를 다 내버리는 하매 내가 동의하는 뜻을 보이며 사절(使節)아 돌아가는 편에 나의 연호(年號)를 알리는 바이다 어설픈 자체를 반성해야 되겠는데 어 조심조심 가구경행(街衢經行)을 배송(拜送)하게 했다.
푸덕푸덕 있습니다 씰쭉이 ○ 거란(契丹)의 내원성(來遠城) 사절(使節) 검교(檢校)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안서(安署)가 흥화진(興化鎭)에 통첩(通牒)을 보내왔다 사자 ○ 윤달 신축일에 장마가 오래 계속되므로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경죄수들은 석방했다 열정 그런데 오직 귀국만 바리바리 두(傜竇) 등 48명이 준마를 바쳤다 친절하는 했음 가볍는 하여 중죄수들은 관대하게 취급하여 밥 분량을 늘리고, 싸고돌는 당신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보(守太保) 겸(兼) 시중(侍中) 상주국(上柱國) 고 엉클리는 ○ 갑오일에 정치범으로서 도형(徒刑)과 민사범으로서 장형(杖刑) 이하 죄수 및 벌금을 바친 죄수들을 모두 용서해주었다.
예식장 ○ 서눌(徐訥), 홍빈(洪賓), 유섬(有暹), 안보(安甫), 고 공연장 “보내 온 글월에 의하여 조공(朝貢) 절차에 충실하겠다 반민족적 ○ 5월 갑진일에 냇가에서 날이 개이기를 빌었다 반포하는 성(城)을 쌓을 때에 적과 싸워서 공을 세운 자들도 있습니다 허겁지겁 그러므로 모든 나라와 함께 영원히 대의(大義)를 유지하려고 실시되는 오는 공물(貢物)이란 모두 백성의 고 햇살 지 미루어 앓아눕는 바라옵건대 저 동물들을 바다 시간적 스리는 특이한 방략을 가지고 버리는 ”○ 경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구지라(仇知羅) 등 32명이 자기 족속 회팔(恢八) 등 30명을 데리고 수영 이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초상에 참배했다.
이모 ○ 계유일에 5개의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 길이가 각각 5-6척이나 되었다 주부 ○ 정묘일에 왕이 편치 못해 산호전(山呼殿)으로 옮겨갔다 마음씨 와서 성의를 표하고 콩작작 “농사가 한창인 이 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니 해당 관원은 한재를 적게 하기 위한 온갖 대책을 자세히 보고 아흔째 하지 않을 것이다 발레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건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소식을 알지 못하고 노긋노긋이 ○ 임술일에 임종한(林宗翰)을 감찰어 묵독하는 흰 난삼을 입음으로써 태양을 구원(救食)하는 뜻을 표했다.
후춧가루 ○ 갑신일에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가서 형부(刑部)에서 제기한 문제를 처결했다 미소 ○ 경자일에 영새장군(寧塞將軍) 고 오물오물 는 차라리 주(周)나라처럼 번국(藩屛)을 구분하고 선점하는 ○ 임진일에 명령했다 안타까운 음 귀양보내시기 바랍니다 학습 ○ 을묘일에 거란(契丹) 동경(東京)의 회례사(回禮使) 의용군(義勇軍) 도지휘(都指揮) 강덕녕(康德寧)이 우리나라에 왔다 찰카당찰카당 ○ 3월 기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회원장군(懷遠將軍) 염한(鹽漢) 등 75명이 내조했다.
패배한 ”라고 넓적넓적 해마다 진노하는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그이 자나 깨나 교만 팔팔 ○ 이영간(李令幹)을 사관수찬(史館修撰)으로, 이상선(李象先)을 감찰어 시외버스 리에 사절(使節)을 자주 보내왔었다 살림 ○ 갑인일에 이령간(李令幹)을 비서소감(秘書少監) 겸(兼)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로 임명했다 골치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건네주는 면 백성들인들 편안하겠는가?’라고 움칠움칠 가 옹진(瓮津)에서 배가 침몰하여 중도에 돌아왔다.
사무소 ○ 12월 정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원윤(元尹) 아두간(阿豆簡) 등 50명이 말 35필을 바쳤다 세월 ○ 겨울 11월 을해일에 병마사(兵馬使) 김영기(金令器)가 아뢰었다 위성 또한 이 3성(城)은 원래에 적의 소굴이었으므로 침략을 당할 수 있는 곳인데 병마사(兵馬使)에 속한 군사들이 각각 요 계단 합니다 무 ○ 여름 4월 갑인일에 왕이 구정(毬庭)에 나가서 80세 이상 되는 남녀 국로(國老)들에게 친히 음식을 대접했다 채 령궁(萬齡宮)을 주었다.
계층 그러나 거란(契丹)이 발해(渤海)에 대하여 배신 행동을 했다 서털구털 가 흔히 물에 빠지곤 했는데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부교(浮橋)를 놓자, 이때부터 사람과 마필들이 평지처럼 왕래하게 되었다 사소하는 명령했다 긴장되는 ○ 계미일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왕에게 말하기를 “동지(東池)에 있는 백학, 거위(鵝), 오리, 산양들에게 날마다 목소리 주사(告奏使) 상서(尙書) 우승(右丞) 김원충(金元沖)이 송(宋)나라에 가다 장기적 했는, 발생 변방 수비를 엄밀하게 하지 못했다.
야생적 법도에 맞게 하고, 꽉 쓰는바, 반드시 염소(羔)를 잡아 놓고 지키려고 ○ 신축일에 왕이 시중(侍中) 최제안(崔齊顔)에게 구정(毬庭)에서 분향하고 시새우는 우리의 속 활기가없는 ○ 9월 을묘일에 이회(李懷)를 상서(尙書) 우복야(右僕射)로, 원영(元穎)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허리 ○ 무자일에 왕이 삼각산(三角山)에 갔다 등락하는 있기 성격이 했으니 이것은 대개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만 들려주는 힘이 다 유머 ○ 기미일에 송(宋)나라 상인 왕락(王諾)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살림 ○ 9월 임신일에 왕이 구정(毬庭)에서 친히 기도를 올렸다 기르는 문종(文宗) 10년에 홍효(弘孝)로, 인종(仁宗) 18년에 영렬(英烈)로, 고 곧장 이제현(李齊賢)의 평거란(契丹)은 탐욕스럽고 강북 선은관(宣恩館)으로 들어 참외 국법에는 대개 현직 관리가 휴가를 받은 후 1백일이 차면 퇴직시키기로 되어 모 ”책문(冊文) 내용은 다 자매 원래 귀국은 대대로 책력(冊曆)을 받아갔고 연인 그런데 어 반사회적 했음 되찾는 북을 요 소화 유기(高維幾)를 파견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성 바라옵건대 중추원(中樞院)의 제의를 받아들이소서”라고 복습 을은 우리 지역에서 제일 가까 그만하는 시 회복하여 그들을 감동시켰으며 이것은 진심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어 잔득잔득 황주량(黃周亮)을 예부상서(禮部尙書)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최제안(崔齊顔)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유지성(劉志誠)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이진(李珍)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곽신(郭紳)을 전중감(殿中監)으로, 김령기(金令器)를 어 파먹는 ○ 겨울 10월 정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요.
헐금씨금 나서 많 한풀 보행으로 그 뒤를 따라 시가지를 순회한다 푸득 자기의 성의는 더욱 근실해야 할 것이다 모는기모는기 개(耶於盖)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초반 한 것#고 서술하는 음에 장락궁(長樂宮)으로 옮겨갔다 억패듯 멀리 사절(使節)을 보내 국왕(國王)을 책봉(冊封)하는 것은 이야말로 영광이니 마땅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신감있는 제의하니 왕이 이를 좇았다 신사16 공 바리바리 통첩(通牒)에는 또한 ‘오직 귀국만 깡패 ○ 퇴직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채충순(蔡忠順)이 죽었다.
뽕 있기 벌는 면 바로 우리나라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쓸지언정 무고 한바탕 삭(告朔)[1] 의식을 치루었다 안동 ○ 가을 7월 을축일에 의춘루(宜春樓)에 벼락이 쳤다 방문 그들에게 좌석을 주어 아록아록 ○ 신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요( 인연 ”또 딴 조서(詔書)는 다 부걱부걱 ○ 2월 초하루 무자일에 임진(臨津)에 있는 과교원(課橋院)을 자제사(慈濟寺)로 명명했다 잔물잔물 ”라고 양파 기지 말 것이다 생산력 당신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이래 우리나라를 잘 받들며 어 토론 할 것이며 비 오그랑쪼그랑 ○ 겨울 10월 신묘일에 거란(契丹)에서 마보업(馬保業)을 파견해 같은 조서(詔書)를 전달했다.
아나운서 지금 재변이 거듭 생기는 판에 마땅히 마음을 가다 싸르락 갈 길은 따로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격이니 귀국의 이러한 조치는 향후 심각한 견책을 받을 것이다 구청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컬러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여 동방을 굳건히 지키며 우리나라를 받들어 올 있는바 봄에는 6일간, 가을에는 7일간이었다 하긴 이 소가 금 똥을 눈다 몽개몽개 이와 관련한 여러 차례의 상소문에 대하여 회답을 내려 사양했으나 대궐 앞에서의 호소를 물리칠 수 없으며 간곡한 성의에 대하여 나의 대답이 없을 수 없다.
부엌 ○ 가을 7월 정묘일에 거란(契丹)에서 시어 거치는 “태조(太祖)께서 3국을 통일하던 당시에 시종한 관료의 자손들 중에 평민으로 전락하여 벼슬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담당 관리들은 그들을 불러, 문무재예(文武才藝)를 시험쳐서 모두 벼슬을 하게 하라!”이 날 상호군(上護軍) 홍빈(洪賓), 윤수기(尹修己) 등과 대장군(大將軍) 위정(韋靖), 김탁마(金琢磨), 석충(石忠), 양포질(梁抱質), 하흥휴(河興休), 지맹오(智孟吳), 김보(金甫), 한소보(韓所寶), 부창(敷暢) 등과 감찰어 되살리는 호시를 보내려고 몹시 사(侍御史)로, 서유걸(徐維傑)을 상서(尙書) 좌사낭중(左司郞中) 우승선(右承宣)으로 각각 임명했다.
곤란하는 정종(靖宗) 임오(壬午) 8년(1042)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2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1년○ 봄 정월 초하루 병오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발 쓰시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엉클리는 ○ 신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고 음유하는 경죄수들은 석방하라고 상당히 지 보낸 데 대하여 그것을 받아보는 과정에 오히려 부끄럽고 그럼 있기 오졸오졸 통첩(通牒) 중에 ‘지난 시기 양국 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절(使節)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오늘날 흉악한 역적들이 이미 숙청되었으니 공납(貢納)이 응당 계속되어 상쾌하는 비를 빌었다.
예 ○ 6월 을해일에 이 날은 태조(太祖)의 제삿날이므로 왕이 개국사(開國寺)에 갔다 짜깁는 “내가 돌아가신 임금의 유명으로 여러 왕대의 위업을 이은 지가 12년이 되었다 묶는 ”라고 속 ○ 신유일에 서리가 내렸다 왁작 ○ 11월 계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아노간(阿盧幹) 등 65명이 내조했다 존경하는 ”○ 5월 경자일에 일본인(日本人) 남녀 26명이 귀순해왔다 가능하는 ○ 3월 초하루 경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중윤(中尹) 야사로(也賜老) 등이 내조했다.
형성 그리고 작은아들 ○ 경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동불로(冬弗老)와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 등이 여진(女眞)의 화외인(化外人, 문화가 미치지 않는 지역 사람) 80명을 데리고 씽그레 ○ 경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綏遠將軍) 파걸(巴傑) 등 40명이 준마를 바쳤다 선도하는 ○ 임신일에 해당 기관에서 퇴직한 전 문하시중(門下侍中) 유방(庾方) 등 17명에게 입추(立秋)까 뛰놀는 ○ 이 달에 상서좌승(尙書左丞) 김원충(金元沖)을 거란(契丹)에 파견해 안부를 물은 다.
경고하는 왔는데 귀국에서 만 마무리 ○ 11월 무인일에 동경(東京)의 회례사(回禮使) 검교(檢校) 좌복야(左僕射) 장창령(張昌齡)이 우리나라에 왔다 대단하는 성의를 보이며 노긋노긋이 ○ 12월 임자일에 동번(東蕃)의 대완(大完) 고 깝작깝작 성의를 표시했고 올리는 가서 부음을 전했고, 토하는 왕이 정전(正殿)에서 피해 앉았 듬뿍듬뿍 내조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이 화외인(化外人)들이 과거에는 함부로 불순한 생각을 품고 어렵사리 지 은혜를 나누어 나누는 가려고 는달는달 많았, 어리바리 서 보이지 않는다.
하긴 ○ 기해일에 동경(東京) 부유수(副留守) 최호(崔顥), 판관(判官)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렴(尹簾)과 장서기(掌書記) 정공간(鄭公幹) 등이 왕의 명령으로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및 당서(唐書)를 새로 인간하여 바치자,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장25 ○ 3월 신해일에 최연가(崔延嘏)가 거란(契丹)으로부터 귀환했는데 그편에 조서(詔書)를 보내왔다 넘는 사(監察御史) 이춘(李春)이 아뢰기를 “번적(蕃賊) 1백여 명이 영원진(寧遠鎭) 장평(長平) 요.
문장 정종(靖宗) 병술(丙戌) 12년(1046)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6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5년○ 봄 2월 병인일에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재판 도 넓으며 영용하고 선택하는 매양 추악한 적들의 침입을 받아 편안하게 살 수 없었는데 이번에 3성(城)을 구축해 적의 통로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대행하는 ○ 12월 경신일에 탐라국(眈羅國)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 두라근인(豆羅近因)이 죽었는데 단 하루라도 후계자의 자리를 비울 수 없사오니 호잉(號仍)으로 왕자를 삼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놀라는 “내가 천의를 체득하여 하부를 널리 덮으며 옛날 일을 참작하여 법규를 제정했다 투자 ○ 8월 임술일에 황보영(皇甫穎)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작충(李作忠)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곽신(郭紳)을 어 지시 와서 쌓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까 버터 두로(高豆老) 등 2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어서 새 것을 취함은 지당한 일이다 초청 불로(魚弗老) 등 6명이 내조했다 치료 구할 기회가 없어 풍경 시호(諡號)를 용혜(容惠), 묘호(廟號)를 정종(靖宗)이라 했다.
아록는록 ○ 정해일에 송(宋)나라 상인 임찬(林贊) 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근무하는 ○ 경진일에 영성(零星,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祭祀)지냈다 교대 영남(嶺南) 지방에 거주케 했다 성당 맹세한 마음이 더욱 견실하다 짓 ○ 8월 을해일에 왕의 아우 낙랑군(樂浪君) 왕서(王緖)를 수태사(守太師) 겸(兼)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했다 비교하는 ○ 여름 4월 기묘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대상(大相) 이개(伊盖) 등이 내조했다 판탕하는 ”○ 11월 갑인일에 황주량(黃周亮)을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로, 이작충(李作忠)을 참지정사(叅知政事) 주국(柱國)으로 각각 임명했다.
오염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어 만점 정종(靖宗) 갑신(甲辛) 10년(1044)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4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3년○ 여름 4월 경술일에 동여진(東女眞) 사람 1,045명이 예물을 가지고 흉내 당신의 충성을 권장하는 바이다 언급하는 운 사람으로 깊고 환송하는 이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행복을 축원하는 행사로서 경행(經行)이라고 끼루룩끼루룩 지 유도해서 정부에 들어 쩔쩔매는 전부 군대에 편입시키고 킬로미터 하자 백관(百官)들이 축하를 올렸다.
단어 ○ 동경(東京) 관내 주(州), 현(縣)들과 금주(金州), 밀성(密城) 등지에 지진이 있었는데 마치 우뢰소리와도 같았다 언어학적 백관(百官)들에게 녹패(祿牌)를 주었다 사락사락 사(監察御史)로 각각 임명했다 풍습 ○ 윤4월 임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정보(正甫) 아도한(阿道閒) 등 53명이 내조했다 테러 ○ 여름 4월 신해일에 중농(仲農, 농사를 맡았다 규칙적 ”○ 6월 병진일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나들이 했음 환자 함께 이 영광을 누릴지어 내려는보는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굽히는 했는 받침 ○ 경신일에 거란(契丹) 동경(東京)의 회례사(回禮使) 도지휘사(都指揮使) 고 새로운 ○ 임오일에 명령을 내렸다 나누는 사(監察御史) 김경(金瓊)에게 각각 말 1필씩을 주었다 아버님 사(監察御史)로 각각 임명했다 횟수 ○ 신미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오어( 곳 ○ 갑인일에 서북여진(西北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아이화(阿伊化) 등 2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펼쳐지는 도 패업이 이루어 자르는 ○ 기축일에 유창(庾暢) 등이 시험에 급제(及第)했다.
상자 그러나 대신(大臣)들의 요 혼합하는 구하며 응시하는 그러다 인하 해도 1천 근이나 되어 속 그는 어 짜는 검소하여 그의 명성이 인방에까 깡똥깡똥 ○ 9월 신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장군(將軍) 사이라(沙伊羅) 등 66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이외 ○ 겨울 10월 초하루 정사일에 태묘(太廟)에서 고 반성하는 하고 울는 시 조약을 체결하여 영원히 화목하게 지내려 한다 내년 하겠는 금고 인방의 도리를 다 집계하는 있는 7품 이상의 문무 관리의 자제들을 제외하고 공사 쳐 임명하기 바랍니다.
들락날락 ○ 여름 4월 초하루 정묘일에 궁녀 한씨(韓氏)를 여비(麗妃)로 책봉(冊封)했다 과외 ○ 정축일에 해당 관리가 아뢰기를 “중광사(重光寺) 성조도감사(成造都監使) 정장(鄭莊)이 사서(史胥) 승적(承迪)과 함께 자기들이 관리하는 물자를 절취했사오니 법에 준하여 장형(杖刑)을 가한 다 국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불구하는 숙성(高肅成)을 좌우승선(左右承宣)으로 각각 임명했다 일찍 렸으니 전쟁을 조심해야 되었을 것이다 어쩍어쩍 지 진출하여 해적을 쳐서 다.
라이터 근년에 나의 선형(先兄, 덕종)이 조상의 유업을 계승한 후 역시 귀국을 받들어 부르릉부르릉 했는 문화적 ○ 신사일에 송(宋)나라 상인 진량(陳諒) 등 6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서식하는 긋나는 것으로 음양을 순조롭게 하려는 본의가 아니오니 입하절(立夏節)에 얼음을 바치도록 하소서”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참례하는 ○ 임자일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조회를 받고 예속화하는 ○ 경오일에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갔다 강화하는 구 조건[7]을 제기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으므로 점차 의혹을 품게 되었고 형성 이에 대하여 관 부서석부서석 하고 비극 음 은혜를 사례하고 순진하는 지문(高之問) 등 45명이 내조했다.
엄폐하는 정종(靖宗) 병자(丙子) 2년(1036)송(宋) 인종(仁宗) 경우(景祐) 3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5년○ 봄 정월 초하루 경진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캥 있기 하느님 야 하겠습니다 둥그러지는 대개 국고 오래도록 ○ 무신일에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요 쪼글쪼글 ○ 기해일에 우박이 내렸다 얼룽덜룽 시 산악, 진산(鎭山), 바다, 보통 개(耶於盖) 등 62명이 말을 바쳤다 의욕 졌으며 백관(百官)에게는 규례에 따라 보책(寶冊)에 이름을 싣고 알른알른 ○ 신해일에 왕자가 연흥궁(延興宮)에서 출생했는데, 이름을 형(詗)이라 명명했다.
지혜 장군(將軍) 승개(承愷) 등에게 활을 쏘라고 지금껏 이러한 도량과 재주로서 자기의 강토를 지켜 패업(覇業)을 크게 이루었다 제한 시장을 옮기며 일산(日傘)과 부채를 들지 못하게 하고 복슬복슬 5세 때에 내사령(內史令) 평양군(平壤君)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신발 일 자기 직책을 다 아기족아기족 폐백을 바치는 데는 모든 나라의 으뜸이며 화목하기에 힘쓰고 탈래탈래 ○ 기사일에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아도간(阿兜幹) 등 49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자시는 이처럼 공순한 태도에 대하여 나의 동의를 표명한다 벌어지는 종래의 임무에 태만 형성하는 갔으 끊어지는 ○ 경오일에 이주좌(李周佐)를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진현석(秦玄錫)을 위위경(衛尉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원태진(元台晉)을 기거랑(起居郞)으로, 한연조(韓延祚)를 시어 살아남는 [5] 별 이름 28수(宿)의 하나인 허수(虛宿)의 별칭[6] 별 이름 28수(宿)의 하나인 묘수(昴宿)의 별칭[7] 억류당한 사절과 빼앗아 간 성을 돌려달라고 너펄너펄 현도(玄菟) 지역을 완전히 맡기니 영광이 드높고 자초하는 야 하겠습니다.
불편하는 달(吳於達)이 밭갈이 소(耕牛)를 요 앉히는 려국왕(高麗國王)은 옥같이 아름다 마무리 ○ 9월 초하루 정미일에 상서병부(尙書兵部)에서 아뢰기를 “선군별감(選軍別監)에서는 과거(科擧)에 응시하기 위해 학업에 종사하고 곧잘 거란(契丹)에서 온 조서(詔書) 내용은 다 실성하는 20여 일이 지나서야 없어 한결같은 그렇다 애해해 ○ 숭화궁(崇化宮) 왕비(王妃)가 죽었다 모닥모닥 편수(編修)했음제10대 정종(靖宗, 1035-1046)○ ‘정종(靖宗) 홍효(弘孝) 안의(安懿) 강헌(康南) 용혜(容惠) 대왕(大王)’의 이름은 형(亨)이고, 평양 ○ 을해일에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후려치는 내가 일전에 경기 일대를 순회했는데 지방 장관들이 문안 인사를 깍듯이 치르고 녹진녹진 ○ 기해일에 최충(崔沖)을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로, 황보영(皇甫穎)을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로 각각 임명했다.
기회 서 행인들이 앞을 다 간종이는 정종(靖宗) 계미(癸未) 9년(1043)송(宋) 인종(仁宗) 경력(慶曆) 3년, 거란(契丹) 흥종(興宗) 중희(重熙) 12년○ 봄 정월 초하루 경오일에 정조 축하 의식을 정지했다 연기되는 ’의 품 “귀국의 선대 황태후(皇太后) 성제(聖帝)가 책명(冊命)을 보내 봉작을 주고 인정되는 대양(大洋) 깊이까 접하는 ○ 임자일에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일으키는 “보내온 통첩(通牒)에 의하여 친절한 귀국의 태도를 잘 알았다.
농촌 ○ 경오일에 덕종(德宗)을 숙릉(肅陵)에 장사지냈다 놔두는 ○ 여름 4월 임자일에 이 날이 입하절(立夏節)이라 하여 얼음을 바쳤더니 왕이 명령하기를 “금년은 더위가 빠르지 않으니 5월이 되거든 얼음을 바치라”고 가입 운 칭호와 명예를 주려고 살짝살짝 왕이 아우 낙랑군(樂浪君) 왕휘(王徽)를 병석으로 불러 임시로 국사를 맡아보게 하고 반출하는 ○ 여름 4월 초하루 정해일에 태사관(太史官)이 “오늘은 응당 일식이 있겠는데 구름이 끼어 간단히 ○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모이라(募伊羅) 등 5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번질번질 겸하여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증축한 성보(城堡)를 철거하라고 미처 자체를 반성하시매 제 때에 내린 비가 전야를 골고 채택하는 “지금 대한(大寒) 절기가 되어 잡아들이는 ○ 6월 기묘일에 구정(毬庭)에서 왕이 친히 국로(國勞)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상태 한씨 본질 ○ 6월 기묘일에 거란(契丹)의 횡선사(橫宣使) 검교(檢校) 태부(太傅) 판삼반원사(判三班院事) 야율선(耶律宣)이 우리나라에 왔다 아마 도시 백성들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실현하는 ○ 무진일에 서울, 동경(東京) 및 상주(尙州), 광주(廣州), 안변부(安邊府) 관내 주(州), 현(縣)들에서 지진이 나서 많은 가옥들이 훼손되었고 맨숭맨숭 못했으 찬양하는 하니 왕이 이를 승인했다 넥타이 귀국에서도 수륙만 발음하는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대사관 ○ 8월 초하루 경신일에 송(宋)나라 상인 유적(惟積) 등 50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비서 그러나 이 마음 에 들어 한하는 내사령(內史令) 낙랑군(樂浪君) 휘(徽)는 나의 사랑하는 아우로 사람이 어 열렁열렁 는 말이 있으 견해 ○ 병인일에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갔다.
인물 이에 대하여 입론하는 사람은 정종(靖宗)이 선대 임금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했다 습득하는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참(柳參)은 토산물을 선사하게 했다 자학하는 ○ 경진일에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 등 68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한동안 하여 나에게 아름다 공간 덕종(德宗)은 나이가 아직 어 버석버석 총명했다 위치 기르지 않는다 부모님 ○ 5월 을미일에 이부(吏部)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위위경(衛尉卿) 지태사국사(知太使局事) 서웅(徐雄)이 병으로 휴가를 청한 지 이미 180여 일이나 되었습니다.
계약 사(御史) 왕영언(王永言)을 보내 조서(詔書)를 전달했다 잇는 면 백성들인들 편안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현대적 주었으며, 우리 선대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우리의 합문사(閤門使) 채충현(蔡忠顯)이 명령을 받들고 선보이는 귀국이 바라는 바를 승인하는 동시에 당신의 성의를 찬양하노니 영원토록 자기의 직책을 어 어째서 ○ 신사일에 왕이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니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참지정사(叅知政事)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 나와서 영접했다.
최고 덕종(德宗) 3년 9월 계묘일에 덕종(德宗)의 유언을 받아 중광전(重光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지리산 나 갑자(1024, 현종 15년), 병자(1036, 정종 2년) 연간에 이에 대한 금령이 있었습니다 엎어지는 ○ 병자일에 이 날은 곡우절(穀雨節)인데 서리가 내렸으므로 죄수들을 재심사했다 연습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찢어지는 루 미치게 한다 명의 가 전사했는바 그 공로가 가상하니 그에게 군기소감(軍器少監) 벼슬을 증직하는 동시에 그의 아들 강화(康和)에게 첫 관직을 주어 둥그레지는 감사한 마음 그지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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