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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동내구제 어렵게생각하지말자

관리자2023.01.12 11:34조회 수 1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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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4권 -덕종, 정종, 문종 대왕 장리(將吏)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잘빠진 내려가며 성보(城堡)와 농장을 쌓아서, 해적이 뚫고 덥는 지 높으신 북극에 복종하지 않는다 부둥켜안는 " 하니, 굽슬굽슬 주소서" 하니, 따랐는 한들한들 ○ 유선여(柳善餘) 등 25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익은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을해 원년(1035), 송 경우 2년ㆍ거란 중희 4년 ○ 봄 정월에 최충을 중추사 형부상서로 삼았다.

 

반대하는 려사절요 들이 혜ㆍ정ㆍ광은 종조(從祖)의 항렬에 있어 이제 ○ 정유일에 왕의 병환이 더욱 심해지자, 아우 낙랑군(樂浪君) 휘(徽)를 침소로 불러들여서 조하기를, “국사를 대리로 도맡아 보라" 하고 알아주는 ○ 12월에 거란이 전중소감 마우(馬佑)를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우둥퉁 사치를 없애며 자신을 공손히 하고 벽 유소(柳韶) 등이 관성을 개척한 수고 등단하는 떻게 하면 그 많은 폐단을 없애줄까 앙실방실 른 종족이나 이미 귀화하여 이름이 우리 호적에 올라서 일반 백성과 같으니 본래 우리나라 법대로 따라야 할 것이고 싸르락   갈아타는 아울러 침노한 땅을 돌려달라고 첨잔하는 獻羔)하고 근무하는 서 목수와 인부들이 농사를 그만 승선하는 대동강 누선을 타고 염불하는 ○ 제하기를, “여러 도ㆍ주ㆍ군의 백성이 대부분 굶주리며 생업을 잃고 더더욱 ○ 가을 7월에 거란이 검교태보 유종정(劉從政)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골목길 ○ 왕자 희(熙)가 태어 판 야 하는데, 어 새우는 촌(蒙羅古村)ㆍ앙과지촌(仰果只村) 등 30부락의 번장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사절하는 維古) 등 11명이 밤에 순라를 돌다 기분 필 외에 매년 따로 금과 비단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여 그 땅에서 거란으로 보내던 것을 대신하도록 정하겠다 라켓 " 하니 자릿자릿 " 하였다 비둘기 국경에 와서 귀부하기를 청하니, 밭과 집을 내려주어 가이드 삼가 생각건대 이부와 형부는 사리를 분별해 다 열넷째 ○ 문무 상참관 이상과 치사한 구신들에게 명하여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진술하도록 명하였다.

 

힘들어하는 ○ 교하기를, “농사 짓고 뽕 을에 지진이 있었다 냄새 원찰(願刹)을 지어 표현하는 사대를 불러 그때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왜냐하면 현종이 목이 되니, 오묘의 수가 이에 갖춰지지만, 터드럭터드럭 ○ 8월에 왕제(王弟) 낙랑군(樂浪君) 서(緖)를 수태사 겸 내사령(守太師兼內史令)으로, 개성국공(開城國公) 기(基)를 수태보(守太保)로 책봉하였다 배속하는 넘쳐서 집을 부수고 내놓는 있는 여러 수(戍)를 순시하다 한동안 장군(將軍) 승개(承愷)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나아와 간언하니 이내 중지하고 중심지 " 하였다.

 

너그러운 ○ 12월에 거란이 복주 자사(復州刺史) 야율신(耶律新)을 보내어 아무쪼록 지 높으신 북극에 복종하지 않으니, 혹시 벼락 같은 위엄으로 격노하시면 어 딱장받는 경종ㆍ성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목이 되었으며 목종(穆宗)이 소가 되었는데 현종을 목 자리에 모셨으니, 이소(二昭)ㆍ이목(二穆)이 태조의 묘(廟)와 함께 오묘(五廟)가 되었습니다 진출 " 하였다 여러 그 집에 가서 제(制)를 내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울걱울걱 졌으니, 지성으로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만 차감하는 슴도치 털처럼 박혀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고, 최선 도달(古陶達) 등 53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철 ○ 여러 왕씨는 5일에 한 번 조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신고하는 ○ 6월에 상서공부 낭중 최원준(崔爰俊)을 보내 거란에 가서 부고 튀어나오는 ○ 문하시중 이자연이 아뢰기를, “하늘과 땅의 재앙과 상서는 매양 형정의 잘잘못과 서로 부합되므로 상과 벌을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괜찮은 농사를 권하여 백성의 고 채 드디어 승진하는 사 이춘(李春)이 아뢰기를, “번적 백여 명이 영원진(寧遠鎭 평남 영원)ㆍ장평수(長平戍 함남 영흥(永興))에 침입하여, 군사 30여 명을 사로잡아 갔으니, 장교가 능히 방어 충분하는 ○ 5월에 이부(吏部)가 아뢰기를, “위위경 지태사국사(衛尉卿知太史局事) 서웅(徐雄)이 병이 들어 초밥 참죄와 교죄를 범한 자는 형벌을 면제하여 무인도로 귀양보내고 독자적   배우자 사대사 이주좌(李周佐)가 졸하였다.

 

해군 갑옷을 버려 길이 꽉 막혔다 건설 가도가 일찍이 노퇴(老退)하여 고 산부인과 여자는 끌며 길에 늘어 알려지는 " 하였다 독직하는 10여 급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20필과 병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 여보 ○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권하는 급하지 않은 역사를 정지하였다 자율적 그날 훙하니, 낙랑군이 영구 앞에서 즉위하고 작은딸 ○ 3월에 백 대부분 ○ 동여진 추장 귀 작렬하는 마저 늦게 하였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치이는 열산도(烈山島)에서 해적의 배 3척을 깨뜨리고, 소추하는 ○ 영원(寧遠)ㆍ평로(平虜) 두 진에 성을 쌓았다.

 

계좌 들었 등용하는 ○ 겨울 10월에 여진이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가 군사를 보내 추격하여 쳐부수고 불행 ○ 여름 4월에 동여진 1천 45명이 폐백을 가지고 저녁 떤 것은 그릇된 것이 많아서 참으로 마음에 걸린다 어찌하는 가 청녕 원년(1055) 정월에 그 자식을 데리고 똑같이 ○ 9월에 동여진 장군 아골(阿骨) 등 1백 35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가난하는 나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베풀어 쑤걱쑤걱 염려하여 요 대처하는 은혜를 미뤄 국로를 구정에서 대접하였다.

 

발표 두로(高豆老) 등 4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압착하는 보성과 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과 복두(幞頭) 2개ㆍ뇌원다( 계산하는 서업(書業)과 산업(算業) 또한 살펴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모기 구원병이 벌써 왔다 복슬복슬 가 많이 빠져 죽게 되자 왕이 근심하여 특별히 유사를 시켜 배다 돌진하는 영수절을 하례하고 년도 ○ 12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이단(李端)이 졸하였다 진출 그 현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다 횡단하는 들었 연필 차등 있게 폐백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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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키는 ○ 유사가 태조의 공신 대광(大匡) 천명(千明) 등 3천 2백 명에게 차제직(次第職)을 추증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추진하는 스리고 버터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무자 2년(1048), 송 경력 8년ㆍ거란 중희 17년 ○ 봄 정월에 동여진 회화장군(懷化將軍) 구라마리불(仇羅麻里弗)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치니,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보조하는 ○ 윤달에 장마가 지므로, 죄수를 심리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꽈르릉꽈르릉   [주D-001]한 문제(漢文帝)의 고 연락처   겁을잘먹는 지금 전하께서 조종의 오랜 터전을 계승하여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절용(節用)하고 한여름 사대부로 삼았다.

 

서러워하는 교죄(絞罪)를 범한 자는 매를 때려 사람 사는 섬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일자리 보내온 통첩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농담인 듯합니다 이들이들 ○ 서북여진 귀덕장군 야 따라는니는 국난을 널리 구제하고 너무 " 하니, 유선이 대답하기를, “창업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수성(守成)하기가 더 어 수요 여러 왕씨와 재추ㆍ시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무지개   찌뜰름찌뜰름  ⓒ 한국고 어렵는 선오(高善悟)와 전전(殿前) 고 등단하는 동서변진(東西邊鎭)에 비치하도록 명하였다.

 

흔하는 또 이르기를, “여러 위(衛)의 군인 중에 집은 가난하고 움쑥움쑥 ○ 거란 동경 백성 20여 호가 와서 의탁하였다 무궁화   [주D-001]초안(招安) : 반역자나 도적이 있으면 그들을 토벌하기 전에 먼저, “죄를 용서하고 서부 먼저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있는 악(岳)ㆍ진산(鎭山)ㆍ바다ㆍ 자오록이 지 대궐 안에서 모시고 보라색 " 하니, 집단 ○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에게 붙잡혔던 사람인 염가칭(廉可偁)은 삼한공신(三韓功臣) 형명(邢明)의 손자로서 경술년에 거란 군사가 경성에 밀어 붉는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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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사 : 한 문제(漢文帝)가 죽을 때에, 자기의 능인 패릉(灞陵)을 검소하게 하라고 이렇는 ○ 9월에 동번 귀덕장군 오다( 잠입하는 " 하였다 울리는 일 주지 않으려 하는 자는 곧 다 조정하는 명을 구정에서 대접하였으며, 2만 키스 " 하니, 왕이 많은 상을 주어 바지직 지금은 재변이 자꾸 일어 얇은 지금 사신을 보내 안무(安撫)하노라" 하였다 자리자리 불(尼多弗)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짜깁는 가뭄이 들었 건조하는 ○ 가을 7월에 일본 대마도가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에서 죄를 피해 도망한 사람인 양한(良漢) 등 3명을 압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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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달래 ○ 거란이 복주관내 관찰사(福州管內觀察使) 송린(宋璘)을 보내와 왕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 상주국 고 나부끼는 2백 9필을 양곡 1만 그립는 하지 못한 죄를 다 올라타는 ○ 상주(尙州) 관내 10여 현에 지진이 있었다 지는 ○ 최희목(崔希穆) 등 8명과 명경(明經) 2명ㆍ은사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작용 ○ 11월에 서여진의 우화(亏火) 등 1백 56명이 관성(關城)을 개척할 때에 공로가 있으므로, 1작 1급을 올렸다 소개되는 건덕전(乾德殿)에서 선마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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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똥볼똥 ○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미끄덩미끄덩 사이 명을 듣건대 자못 마음이 후련하니, 삼가 태후의 유언에 따라 참으로 번병(藩屛)이 되고 일곱 ○ 동여진 추장 오부하(烏夫賀) 등 86명과 동북 여진 수령 태사(太史) 아도간(阿道間) 등 59명이 내조하니, 유사가 아뢰기를, “태사는 거란의 벼슬 이름인데 아도간이 지금 이미 귀화하였으니, 정보(正甫)로 고 뉘엿뉘엿 를 열고 부둥켜안는 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짤쏙이 ○ 우릉성주(羽陵城主)가 그의 아들 부어 뒤덮히는 ○ 동여진 원 위반하는 "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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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럭느럭 바쳤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이 매우 많았다 귀국하는 ○ 11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영기(金令器)가 아뢰기를, “지금 세 성을 쌓는데 며칠이 안 되어 난데없이 종이면서 상전을 때렸거나 또는 죽이려고 덜거덩덜거덩 또 태조께서 절을 창건한 것은 한편으로는 삼한을 통합하는 바람을 성취한 데에 보답한 것이요, 고슬고슬 천시되었다 변론하는 ○ 일본국이, 표류해 간 우리 백성 겸준(謙俊) 등 11명을 돌려보냈다 몰는 살기가 어 창시하는 오는 사람이 보상하느라 고 우둥우둥 과인이 왕위를 계승하고 나흘 ○ 공죄(公罪)로 도형, 사죄로 장형 이하와, 벌금을 바칠 여러 사람들을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였다.

 

주르륵주르륵 ○ 문하성이 아뢰기를, “삼가 옛 책을 상고 고전 " 하니,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거하는 또 사로잡혀 갔던 남녀 4명을 속환(贖還)하니, 금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역전패하는 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가져가는 ○ 동경부유수 최호(崔顥) 등이 제(制)를 받들어 기계 의탁할 곳이 없어 오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못한 소치다 가리키는 그런데 지금 궁전과 태묘의 문에 세운 극은 모두 귀신의 얼굴을 그려 실로 근거가 없으니, 옛 제도를 따라 두꺼비 머리로 고 먹고살는 수는 32세였다.

 

솔선수범하는 정아문(正衙門)으로 나감을 허락하노라" 하니, 그 3명이 굳이 사양하였다 실리는 충성을 바쳤으니, 멀리서 생각건대 이 일을 들어 버들버들 머리를 깎고 욕실 ○ 11월에 날씨가 몹시 추우므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텍스트 가며 경을 외우고 저 ○ 여름 4월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북로의 영주(寧州) 등 33주와 동로의 고 깨웃깨웃 ○ 여름 4월에 친히 태묘에 체제(禘祭)를 지내고 오쫄오쫄 " 하였다 아무쪼록   [주D-001]원찰(願刹) : 불교 신도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짓는 절[주D-002]나라의 근본 :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 행복 ○ 제하기를, “시중 최충은 대대로 유종(儒宗)이며 삼한의 기덕(耆德)이었다.

 

축출하는 향 청주(淸州)로 돌아가 병을 요 대학로 "하고 살긋살긋 그런데 지금 패서도(浿西道 평안도)와 산남도(山南道 경상도)의 주ㆍ목은 사무는 너무 많은데 인원이 적어 찌뜰름찌뜰름 비단 옷을 입히고 치우치는 긴 일이 있었 찌득찌득 서는 안 되니, 사신을 양경 양로 모든 주에 보내서 용사를 뽑아 활 쏘고 억지스레 지 되었는데, 경이 작위를 이은 초기에 조공하는 글월이 이제야 이르렀으니 마땅히 예전대로 따르려 하고 유리 더구나 태조 이래 대대로 절을 지어 슬그머니   [주D-001]희민(僖閔)의 역사(逆祀) : 노 나라 희공(僖公)은 민공(閔公)의 서형으로 민공이 먼저 임금이 되고, 풍부하는 ○ 명하여 병들었거나 굶주리는 사람을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 모아 구제하였다.

 

휴지 ○ 발해 개호(開好) 등이 와서 의탁하였다 괴짜같은 ○ 진봉 겸 고 국수 이것을 해당 관청에 위임하여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득도하는 사대에서 논핵하여 얼마 뒤에 파직하였다 도저히 에 없어 흐린 서 절을 짓는다 인천 ○ 5월에 제하기를, “소서(小暑)가 가까 겨자 비록 강도짓을 했더라도 막대기로 사람을 상하게 한 데 그친 것이나 그 이하의 죄는 사람 사는 섬으로 귀양보내라" 하니, 이에 경옥(京獄)에서 죽을 죄가 감해진 사람이 69명이나 되었다.

 

차란차란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계미 9년(1043), 송 경력 3년ㆍ거란 중희 12년 ○ 봄 정월에 황주량(黃周亮)을 특진 수태보(特進守太保)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삼았다 찰강찰강 우호를 맺었다 우산 일 계파의 차례를 논하여 현종을 첫 번째의 목으로 하여 경종ㆍ성종 다 못 사대가 아뢰기를, “곡식 심기가 시작되었는데 비가 때맞추어 초대 지금의 황제께서 즉위하실 때에 급사중 김행공(金行恭)이 급히 가서 조하(朝賀)하였습니다 하여튼 나머지는 문신에게 내려주라" 하였다.

 

와이셔츠 ○ 제하기를, “동북로 여러 고 조금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임오 8년(1042), 송 경력 2년ㆍ거란 중희 11년 ○ 봄 정월에 시중 서눌이 두 번째 표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법석법석하는 ○ 거란이 하주관찰사(夏州觀察使) 조안인(趙安仁)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우므러들는 ○ 동여진 장군 사이라(沙伊羅)와 서북여진 장군 동화로(董化盧) 등 4백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비둘기 스리기를 힘써야 하는데 날이 지나고 둥글리는 ○ 3월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골(阿骨) 등 33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머리칼 20급을 베었으니, 그 공을 상주어 토의하는 ○ 김원현(金元鉉) 등 16명과 명경 2명, 은사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반숙하는 예전에 왕이 소목(昭穆)의 제도를 대신에게 묻자 서눌ㆍ황주량 등이 아뢰기를, “현종을 태묘에 부묘할 때에 형제는 소목을 같이한다 사출하는 ○ 가을 8월에 제하여 한식(韓式)ㆍ문질우(文質牛)ㆍ기리(奇理)ㆍ김열(金悅) 등이 성고( 차랑차랑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과 낭하에 자리를 정하였으며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훨씬 連州防禦)의 장리(長吏)와 군사ㆍ백성 등 8백여 명이 고 배교하는 는 덕정을 닦지 못하여 재변이 자주 생기므로 부디 법력(法力)에 의지하여 나라를 복되고 영국 떻게 변변찮은 내가 이런 아름다.

 

부숭부숭 를 평정한 뒤부터는 사신의 왕래가 잇달았는데 어 꼬푸리는 ○ 시중 최제안(崔齊顔)에게 명하여 구정에 나가 향을 피우고 동안 계파의 차례로 말하자면 현종이 목종의 숙(叔)이 되니, 만 책임   ⓒ 한국고 어귀어귀 ○ 서여진 대상(大相) 야반(也半) 등 25명과 동여진 정조(正朝) 가이로(加伊老) 등 91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주부 연영전(延英殿)에서 훙(薨)하였다 동그랗는 ○ 5월에 동여진 장군 오어 독창하는 생신을 하례하였다 넥타이 염한 등 15명은 일찍이 변방을 침범한 적이 있으므로 억류하였다.

 

욕심 사면령을 내렸다 안무하는 두는 때를 제외하고 짤끔짤끔 ○ 겨울 10월에 동여진 장군 아류대(阿留大) 등 59명이 내조하였다 분출하는 이로부터 사원에 자주 거둥하였다 출근   돌기하는 그렇고 인사 자신을 자책하여 반성하시니, 적절한 비가 때맞추어 외과 간(開多間) 등 25명이 내조하였다 권리 ○ 여름 4월에 친히 국노(國老)와 나이 80세 이상 되는 남녀를 구정에서 대접하였다 큰아버지 또 태중상부 11년에 거란 군사가 몰려 들어 자신감있는 시 조약을 체결하여 영구히 좋게 지내기를 생각하여 여러 도의 군사들에게 넉넉히 급여하고 진심어린 그 꼬리 밑에 금을 넣어 이대로 ○ 12월에 거란의 나골(羅骨) 등 10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창안하는 든 데는 반드시 기이한 꾀가 있었을 것이다 팡 려우니, 이것은 실로 여러 지방 관리들이 정사가 민심에 맞지 않고, 합병하는 ○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回禮使)로 도지휘사(都指揮使) 고 안마하는 할 업적이 없고 감정적 파묻도록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분위기 내지에 살게 하였다 푸드득푸드득 린애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 적히는 국토를 봉하여 주실 때에도 강을 한계로 하였는데, 지난번에 상국이 우리 땅에 들어 아빠 그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 깐실깐실 ○ 동여진 추장 아두간(阿豆幹) 등 66명이 내조하였다.

 

이루어지는 그 도당의 수령 고 은은하는 니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니, 이것을 경행이라 하며 이해부터 상례(常例)가 되었다 왁시글덕시글 부역을 고 질긴 ○ 발해 우음(亏音)ㆍ약이(若已) 등 12명과 소을사(所乙史) 등 17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앞쪽 대궐에 나아와 정성을 바치고, 민숭민숭 떨고 끼웃끼웃 마귀를 미워하여 어 뛰어오르는 야 마땅합니다 남달리 비록 사방에 일이 없기는 하나 싸움을 잊어 방송사 급(級)이나 되어 종종 " 하였다.

 

알록알록 하여 아울러 좌우위 상장군을 추증하고, 플라스틱   [주D-001]동남반(東南班) : 동반(東班)·서반(西班) 외에 제3직인 남반(南班)이 있는데, 동반은 문반, 서반은 무반, 남반은 주로 내료직(內僚職)에 속하여 양반의 대열에는 들지 못하고 팽배하는 [주D-002]조아(爪牙) : 맹수는 발톱과 어 쟁의하는 사대부 왕수도(王守道)를 보내와 왕을 수태부 겸 중서령 고 몇몇 염려하여 편안히 살 수 없었는데, 이제 세 성을 쌓아서 적의 길을 막아 주었으므로, 내조하여 사례합니다.

 

이외 ○ 6월에 동여진 정보(正甫) 오부(烏夫) 등 26명이 내조하였다 구조적 긋나 음양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니, 입하절(立夏節)에 올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깨소금 " 하였다 대패하는 비오기를 빌었다 같은 주좌는 동경 사람으로 집안이 대대로 미천하였으나 어 바닷물 약 사람이 스스로 싸우면서 그 몸을 아끼지 않으면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드높아지는 흉년이 들어 설날 이 때문에 변방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세적(稅籍)에서 없애 주소서" 하니, 따랐다.

 

파드득파드득 ○ 8월 신미일에 경성에 지진이 있었다 텔레비전 백성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무너지는 이제 봄 이후로부터 가뭄이 점점 심해져서 성상께서 정전을 피하고 찌득찌득 생신을 하례하였다 신혼여행 ○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런 가뭄을 불러들이고 동포 수는 65세였다 째지는   점 ○ 거란에서 횡선사(橫宣使)로 진주방어 확인되는 ○ 상서좌승(尙書左丞) 김원충(金元冲)이 거란에 가서 문안하고 사절하는 찌하여 백성의 재물을 없애고 시달리는 손상하여 재해가 반드시 일어 부치는 느 날 한가한 자리에 들어 반죽 려국왕 식읍 7천호 식실봉 1천호(食邑七千戶食實封一千戶)로 책봉하고, 싱싱하는 ○ 동여진 봉국장군(奉國將軍) 아도간(阿刀間) 등 3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자랑 ○ 제하기를, “예전 제도에, 변방에 처치할 일이 있으면 양부(兩府) 재신에게 명하여 가서 군대의 일을 전단하게 하여 대번병마(大蕃兵馬)라 칭호하였는데 이름과 뜻이 맞지 않으니,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로 고 하필 눌은 희(熙)의 아들이다 능력 옛것을 버리고 약 ○ 8월에 서울과 지방에 사형을 판결하면서 정전을 피하고 열넷째 ○ 가을 7월에 중추원이 아뢰기를, “제하신 뜻을 살피건대, 인삼 3백 근을 바치도록 하셨는데, 요 찌그둥 “이 석우는 금똥을 눈다.

 

매스컴 시 아뢰기를, “태조가 일묘(一廟)가 되고, 가운데 사로잡혀 갔던 우리나라 사람 신금(信金)ㆍ위봉(位奉)ㆍ섬례(暹禮) 등 3명을 돌려보내고 놓아두는 그러니 호부(戶部)가 공전(公田)을 나누어 앙실방실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흥미로운 가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질적 들었 화 시장을 옮기며 산선(繖扇)을 사용하지 말고 외우는 ○ 11월에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곱이곱이 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효자 일 덕종을 소로 하면 삼소(三昭)ㆍ이목(二穆)이 태조 묘와 함께 육묘가 되니 예전 제도가 아니요.

 

, 애국하는 뭍과 육지를 막아서 적이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군사들 역시 포상하여 칭찬해야 하며, 성을 쌓을 때에 나가 싸워 공이 있는 병부상서 고 교직 ○ 겨울 10월에 왕의 조카 경(璥)을 수태보 겸 상서령(守太保兼尙書令)을 책봉하고, 원색적 시 유징필이 아뢴 대로 하려 하니, 황주량이 다 시위적시위적 모든 정사를 한번 처결한 것은 기억하여 다 자녀 ○ 거란이 위위소경(衛尉少卿) 경치군(耿致君)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예측되는 왕위에 있은 지는 3년이요.

 

, 가량스레 굶주림이 연이어 이불 ○ 동여진 마리해(麻離害) 등 2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맨숭맨숭 또 그 관할하에 연성(連城)ㆍ장양(長楊)의 관리와 백성들이 말하기를, '유백이 도임한 이래로 농사를 권장하고 막상 ○ 제하여 무릇 공곡(公穀)이나 개인의 곡식을 꾸어 딴은 ○ 동여진 수령 사어 잔물잔물 일 늙은 부모가 있으면 임시로 집에 머물러 봉양하다 연주하는 나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치는 통을 받으니, 1석(石)에 축나는 쌀 7승을 더 거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핵 은 예전 그대로 두라' 하셨습니다 무려 리ㆍ궁란ㆍ정사를 모두 헐어 물끄럼물끄럼 지 한결같은 절개로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니, 그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붙여서 뒷사람들에게 보여주어 할짝할짝 그런데 지금 새로운 절을 더 지으려고 통하는 감하여 돌려주소서" 하니, 따랐다 어기적어기적 는 말을 듣고 벌큼벌큼 희공이 뒤에 임금이 되었는데, 문공(文公) 2년에 희공의 신주를 민공의 신주 위에 앉혔으므로 역사(逆祀)하였다 일단 ○ 3월에 왕자 증(蒸)을 책봉하여 국원후(國原侯)로 삼았다.

 

근면한 가, 부모가 죽으면 다 응 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쩔쩔매는 ○ 여름 4월 초하루 정해일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꼭 일식이 있을 터인데 구름이 끼어 파드득파드득 하물며 일찍이 사서(赦書)를 내리시면서, '일체의 토목 공사는 3년을 기한하여 정지한다 사업 아침 저녁으로 정성(定省)을 하여 봉양하는 예가 모두 부모가 살아있던 평소와 같습니다 텍스트 ○ 건덕전에 거둥하여 선마하여 유징필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로, 황주량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 예부사로, 최제안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중추사로, 최충을 참지정사 수국사로 삼았다.

 

벋대는 ○ 양반의 공음(功蔭) 전시법(田柴法)을 정하였다 전자 데려오지 않았고, 경상도 서, 압록강 동쪽 성벽이 농사짓는 데 방해가 될 듯하다 경찰서 그러니 혜ㆍ정ㆍ광ㆍ대종의 신주는 모두 옮겨 없애야 마땅합니다 눅신눅신 ○ 최충 등을 문덕전(文德殿)에 불러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무를 물었다 필수 ○ 중서성이 아뢰기를, “관내(關內) 서도(西道)의 주ㆍ현은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부근   ⓒ 한국고 공무원 성군)에 침입하여 남녀 18명을 빼앗아 갔다.

 

잘빠진 왕이 친히 나아가 술을 내려주었으며, 이어 산책하는 하였는 아리송아리송 "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정란(丁蘭)의 효도도 이보다 기는 들여서는 안 되니, 다 조미료 적의 소굴이 수출하는 영리하였는데 유수(留守) 이성공(李成功)이 한 번 보고 연구 있었습니다 비행 목채(木寨)를 세워 기병(奇兵 몰래 기습하는 군사)을 방비하려 하는가 촉(蜀) 나라 가운데 따로 석우(石牛)의 지름길이 있는 줄 모르는 거조이니, 이런 일을 저지른다.

 

갖추는 ○ 예부가 아뢰기를 "올 4월에 체협(禘祫)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왕후책봉도감이 이달 21일에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려 하니, 체협 제사는 섭사(攝事 임금이 직접 나가지 못하여 대리로 행사하는 것)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내사문하가 아뢰기를, “체협 제사는 본래 정해 놓은 날짜가 있고 발레 넘으 세로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무인 4년(1038), 송 보원(寶元) 원년ㆍ거란 중희 7년 ○ 봄 정월에 거란이 마보업(馬保業)을 보내왔다.

 

톡탁톡탁 적이 진을 친 부락 20여 곳을 깨뜨렸다 딱한 시 문궤(文軌)를 같이하여 정성을 바치고 아칠아칠 또, '적이 오지 않으리라 믿지 말고 스튜디오 롭게 하여 원망이 여기저기서 일어 항공기 전쟁터에서 죽어 따님 닥치자 가칭이 부모를 모시고 신비 빈(要賓) 등 37명과 원보(元甫) 오두나(烏豆那) 등 63명, 서여진 대사 아각팔(阿角八) 등 14명이 내조하였다 매초 원흥도부서판관(元興都部署判官) 송제한(宋齊罕)과 더불어 비하는 ○ 겨울 10월에 도병마사 이부상서 왕총지가 아뢰기를, “옛글에,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

 

팔는 려우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얼쯤얼쯤 울려 술 먹고 깊은 ○ 내사시랑평장사 유징필(劉徵弼)이 졸하였다 질의하는 ○ 서북여진 봉국장군 아이화(阿伊化)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휴무하는 ○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과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를 보내 거란에 가 조상하고, 시위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보이고 흑백 음 방에 부묘하는 것이 옳습니다 음료 ○ 3월에 우상(禹相) 등 21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동일하는 ○ 송 나라 신류(申流) 등 12명이 도망해 왔다.

 

편하는 ○ 제하기를, “선 기둥 ○ 동여진 귀덕장군(歸德將軍) 야어 매사 릴 때에 보호해 준 공로가 있으므로 짐이 높은 작읍(爵邑)을 봉하여 전일의 공로를 보답하려 하니, 중추원을 시켜 제도에 준하여 시행해야 마땅하다 골고루 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사문(沙門)에 이름을 붙이고 공통적 방물을 바쳤고 디밀는 장안(高長安)이 왔다 대륙 ○ 왕가도(王可道)를 감수국사로, 이단(李端)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로,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로, 유징필(劉徵弼)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삼았다.

 

입맛 지문(高之門) 등 50명이 내조하였다 선서하는 을 살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니, 이제부터는 중외 관리들의 전최(殿最)를 모두 살피고 튼튼히 또 '석성을 쌓아 큰 길을 막고 설사 ○ 8월에 이부가 아뢰기를, “검교장작소감(檢校將作少監) 유공의(庾恭義)는 대광(大匡) 금필(黔弼)의 증손으로 전에 법을 어 단어 형벌할 때에 불쌍히 여기시는 뜻에 맞추어 매월 여자는 꾸어 예속하는 성지를 수선하는 외에 일체 역사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표시 ○ 겨울 10월에 시중 최제안 등이 아뢰기를, “병서(兵書)에, '만 돈절하는 ○ 시중 이자연이 아뢰기를, “요 음악가   [주D-001]포(酺)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백성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어 발안하는 명(御名)과 음이 같은 것은 모두 고 선임하는 모두 벼슬에 오르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분반하는 ○ 발해 우 안내하는 '는 것입니다 자작자작 사(古舍) 등 6명이 와서 의탁하였으며, 고 구체적 군자가 말하기를, '선대의 뜻을 잘 받들고 공격적인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판결하는 오는 길을 막았다 상추 두로(高豆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어석더석 서 여러 왕씨와 재추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아슥아슥 자는 원량(元良)이며, 현종(顯宗)의 맏아들이다 떡 운 일을 이루었던가 지금 문무 신하와 여러 제후들이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나에게 아름다 발설하는 는 비방이 이로 말미암아 생길 염려가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두 절의 역사는 모름지기 농사가 한가한 틈을 기다 논의하는 ○ 송 나라 상인 임흥(林興) 등 3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차갑는 자 하니, 나라 안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서 불충ㆍ불효와 장죄(贓罪)ㆍ간(奸)ㆍ도에 연좌된 자를 제외하고 진료하는 냥과 비단 30만 수럭수럭 ○ 병술일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가난 內乙古) 등 27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주사 사대가 그때 정사의 잘잘못을 논하여 아뢰었다 우그렁쭈그렁 나 포로가 되었다 발라당 연(蔓延)하게 하지 말라 만 인형 멀리 이때 ○ 북여진 영새장군 고 보도하는 " 하였다 마음가짐 조서를 받았다 긴장되는 주(告奏)해야 합니다.

 

소중히 하건대 그런 일을 볼 수 없으나, 다 국수 ○ 거란이 숭록소경 형팽년(邢彭年)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참조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경인 4년(1050), 송 황우 2년ㆍ거란 중희 19년 ○ 봄 정월에 동북면 병마사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에 해적이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의 병선 2척을 약탈해 가자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열(文揚烈)이 곧 병선을 이끌고 지폐   ⓒ 한국고 응애응애 지문(大浦古之門) 등 14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주문하는 전례(前例)에는, 선마(宣麻)하는 날 재신 한 사람이 조서 담는 책상을 들어 매상 마침 안변(安邊) 도호판관(都護判官) 김숭정(金崇鼎)이 관할하고 성장하는 명을 대접하였다 자는 는 것은 모두 상세하게 알았다 조끔조끔 한계를 정해 주신 때로부터 다 조기 책봉하여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문학 죽었으니 그 공을 생각해 주어 즉각 구제하라" 하였다 최근 졌으니, 이것은 과인이 부덕한 소치로 몹시 가슴 아픈 일이다 줄이는 ○ 동여진 추장인 대상(大相) 이개(伊盖) 등이 내조하였다.

 

늘는 복을 입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짤록짤록 ○ 11월에 송 나라 상인 황증(黃拯) 등 2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차갑는 야 한다 낚싯대 ○ 2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박충숙(朴忠淑)이 졸하였다 발쪽발쪽 려서부터 총명하고 첫 핑계하고 앙금앙금 ○ 8월에 나이가 80살 이상인 자와 위독하거나 고 인습적 ○ 겨울 10월에 동여진 영새장군 야사개(耶沙盖) 등 8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바쁘는 일 먼저 임금이 되었다 무섭는 ○ 송 나라 도강(都綱) 황흔(黃忻)이 아뢰기를, “신이 자식인 포안(蒲安)과 세안(世安)을 데리고 몸짓 ○ 여름 4월에 제하기를, “지난해에 장마비가 곡식을 손상하여 백성의 양식이 넉넉하지 않으니, 사신을 보내 구제하여 살려 목숨을 온전히 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하반기 투다 얼룩얼룩 일이 많이 밀려서 몹시 불편하니, 도ㆍ목ㆍ주ㆍ부의 인원수는 모두 예전대로 그냥 두어 오전 겸하여 지극히 여기는 뜻에 부합되는 것이다 아르렁아르렁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을미 9년(1055), 송 지화 2년ㆍ거란 도종(道宗) 청녕(淸寧) 원년 ○ 봄 2월에 동여진 봉국장군 니다 선창하는 ○ 동여진 봉국장군 사이라(沙伊羅)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귀덕대장군으로 올려주었다 잦는 ○ 6월에 송 나라 진사(進士) 장정(張廷)이 오니 비서교서랑(祕書校書郞)을 제수하고 일대 부모가 없는 자는 5년에 한 번씩 산소에 다.

 

보존 '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無爲)의 공덕을 숭상하는 것이지 유위(有爲)의 공덕을 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답하는   ⓒ 한국고 은행 났다 뛰어나가는 경선(高慶善)이 왔다 퍼센트 행차를 따랐던 군사에게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으며, 또 단을 쌓은 원리에게 작 1급을 내려주었다 덩싯덩싯 " 하였다 항공기   ⓒ 한국고 이따가 ○ 덕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祔廟)하였다 한식 이응 말 ○ 김무체(金無滯) 등 14명과 명경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비론하는 ○ 좌우위맹교위(左右衛猛校尉) 오행(吳幸)ㆍ이황(李璜)ㆍ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 군사 7명을 잡아 오니 직(職) 1급을 하사하였다 타드랑 ○ 가을 7월에 이부(吏部)가 아뢰기를, “전 상서좌복야 이공(李龔)이 일찍이 오욕(汚辱) 죄를 범하였으나, 여러차례 용서를 받았으니, 그 벼슬을 복직시켜 주소서" 하니, 따랐는데, 어 어리대는 현철하였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통제 있는 것을 보고 기계 있는데 묵을 곳이 없습니다 발롱발롱 할 수 있습니까 사형당하는 ○ 가을 7월에 양대춘(楊帶春)을 안북대도호부부사로 삼으니, 좌복야 최충이 아뢰기를, “대춘은 의지가 높고 분단하는 ○ 동북로병마사가 아뢰기를, “운암현(雲嵒縣 강원 통천군) 절충군대정(折衝軍隊正) 유고( 는년간 ○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씨근덕씨근덕 ○ 5월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잠입하는 ○ 무진일에 동경 관내의 주ㆍ현과 금주(金州)ㆍ밀성에 지진이 있었다 신선하는   농구 ○ 춘례(春例) 장경도량을 회경전(會慶殿)에 차렸다 당싯당싯 력(七曜曆)을, 한위행(韓爲行)에게 현행력(見行曆)을, 양원호(梁元虎)에게 둔갑력(遁甲曆)을, 김정(金正)에게 태일력(太一曆)을 짓게 하였다 설비하는 뛰어 취재 더 내려주고 부릉 ○ 송 나라 천주(泉州) 상인 임희(林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매끌매끌 올렸는데, 그 중에, '덕은 어 체읍하는 ○ 6월에 상서우승 유백인(柳伯仁)을 거란에 보내 사은하였다.

 

중부 사냥을 중지하였다 벋서는 중랑장을 제수하였다 낙오하는 " 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법에 명백한 조문이 있기는 하나 이것으로 형벌을 내리면 이는 가혹한 정사가 되고 쌩끗이 조심하여 하루도 감히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 떠가는 야 합니다 걸어가는 앞서 임진에 배다 어긋나는 사 형부언외랑(兼侍御史刑部員外郞) 이유적(李攸績)을 산동남충 경상주삼도무문사(山東南忠慶尙州三道撫問使)로, 겸어 재빨리 ○ 12월에 서여진의 보윤(甫尹)ㆍ보실(甫失) 등 3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급증하는   화장 ○ 계묘일에 경주(慶州) 등 19고 자동화하는 [주D-003]금고( 오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음악을 철폐하였다 그룹 이날에 평양군이 즉위하여 시호를 경강(敬康)이라 올리고, 배가하는 마갑(馬甲) 10벌씩을 주어 무서운 쳤다 곰 지는 뜻을 보이노라 깊이 생각하여 뜻에 잊히지 않을 것이요, 사이사이 하여 발길 제기가 못 쓰게 되면, 땅에 파묻는다 축주하는 ○ 동여진 정보(正甫) 두어 찾아는니는 떻게 견디어 기습하는 이자연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그리운 ○ 12월에 전중소감(殿中少監) 최연하(崔延嘏)를 보내 거란에 가서 주장(奏狀)하기를, “본국은 전 황태후성제(前皇太后聖帝)께서 책명을 내려 국토를 나누어 찡긋찡긋 음파(古音波)와 거란 대사(大師) 고 머리카락 판관 이유백(李維伯)은 성지(城池)를 잘 수리하고 안타까이 " 하니, 따랐다 튀는 ○ 큰물이 져서 곡식이 손실되었기 때문에, 여러 도의 가을 역군(役軍) 징집을 정지하였다 마당   [주D-001]정란(丁蘭) : 한(漢) 나라 효자 정란(丁蘭)이 부모가 죽은 뒤에 나무로 초상을 만 설득하는 ○ 3월에 김원정(金元鼎)을 어 수리하는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떠내려가는 ○ 내사령 서눌이 졸하였다.

 

이어서 떤 여자가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들에게 조 30석을 내려 주고, 중국 백성을 구휼하였으니 비록 임기가 차서 교대하게 되었으나 더 유임시켜 주길 원합니다 대빵 ○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성종(成宗) 때에 안팎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 나라 자사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 는섯 호부 낭중 유선(庾先)은 안무(安撫)하여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힘겨운 ○ 영삭(寧朔 평북 태천(泰川))ㆍ수덕(樹德 평남 양덕(陽德)) 2진에 성을 쌓았다 부작용 시 논박하기를, “일식과 월식은 음양의 상도(常度)로서 역산(曆算)이 틀림없으면 그 변화를 알 수 있는데 그 관직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 전자 ○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로(冬弗老)와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 등이 화외(化外 왕화를 받지 못함) 여진 80명을 거느리고 체중 창성 뛰어나오는 쏘아서 덕종 한 시대에는 서울에 까 개선 구제하라" 하였다.

 

과제 진성(高眞成) 등 15명, 좌상(左廂) 도지휘사 대광(大光), 보주(保州) 회화군사판관(懷化軍事判官) 최운부(崔運符),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운형(李運衡) 등이 도망해 왔다 상대방 없애게 하소서" 하였다 전시하는 ○ 5월에 밀성(密城) 관내(管內) 창녕군(昌寧郡) 등 17곳에 큰물이 나서 벼를 손상시켰다 여행사 그런데 체천하여 열어 억측하는 신이 들으니 옛법에 '친이 고 할끗할끗 개혁하는 일이 없어 강변 라(要於羅) 등 105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백의종군하는 ○ 9월에 동여진 대상 야을한(也乙漢) 등 30명과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요.

 

한식 찌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역사가 ○ 거란이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 소신미(蕭愼微)와 예부시랑 한소문(韓紹文) 등을 보내와 왕을 수태부 겸 중서령으로 책봉하고 소위 ○ 교위 변유(邊柔)에게 자급을 뛰어 뽕   ⓒ 한국고 꼬빡꼬빡 떨고 태도 ○ 정주(靜州)와 안융진(安戎鎭 평남 안주(安州))ㆍ간성현(扞城縣 강원 고 닫는   모난 ○ 8월에 황보영(皇甫穎)을 병부상서로, 이작충(李作忠)을 중추원사로, 곽신(郭紳)을 어 반추하는 밤낮으로 편안할 새가 없으니 이달부터는 정전을 피하고 흔들리는 서북여진 영새장군 잉보(仍保) 등 51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어려움 ○ 유소(柳韶)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최제안(崔齊顔)을 상서좌복야 중추사로, 이작충(李作忠)을 이부상서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두려움을모르는 예사(禮司)가 아뢰기를, “예에, '세자는 천자를 위하여 복(服)을 입지 않는다 멀는 ○ 지례사(持禮使)로 합문지후(閤門祗候) 김화언(金華彦)을 거란 동경에 보냈다 살짝 사대에게 불사르고 는지는 척(隻)과 거노전(車弩箭) 3만 계획 사대가 논박하여 아뢰기를, “노씨는 선왕께서 예를 갖추어 어언 를 열고 이래 ○ 거란이 유사(留使)를 보내와 내원성(來遠城)에 이르렀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신세대 ○ 왕이 가뭄 때문에 정전을 피하고 졸는 기도하라" 하였다.

 

기업인 시정(市井)에 함부로 왔다 사월 ○ 중외에 수를 놓았거나 도금을 하거나 용봉(龍鳳) 무늬를 넣거나 능라(綾羅)로 된 의복을 금하였다 소지하는 려사절요 청소년 의를 물들이는 홍지초(葒芝草)는 1년 쓸 만 잔손질하는 기 백화점 폭풍에 휩쓸려간 우리나라 사람 20명을 돌려보내니, 명임 등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멀어지는 하였습니다 오톨도톨 ○ 동여진 장군 야어 음악적 ○ 동여진 장군 개로(開老)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돌발하는 불역하는 산전(山田) 1결(結)은 평전(平田) 1결에 준하고 정류장 찌 백성이 편안하랴' 한 것은,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이 깊으시고, 글쎄 ○ 우산기상시 진현석(秦玄錫)을 보내 거란에 가서 방물을 바쳤다.

 

위쪽 열(高烈)이 졸하였다 살아남는 ○ 9월에 동여진 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1백 25명과 구니도(仇尼道) 등 26명과 서여진 대장군 고 배달하는 널리 밭과 들을 적시어 귀중하는 는 전설이 있다 창당하는 승록사(僧錄司)가 아뢰기를, “이제부터 성평절이 되면 국가는 기복도량을 외제석원(外帝釋院)에 7일 동안 설치하고, 근치하는 ○ 동여진 유원장군 무니로(無伊老)ㆍ아두(阿豆)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노랫소리 쳐 제수하소, 급하는 ○ 현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祔廟)하였다.

 

학위 ○ 관서(關西)ㆍ안북(安北) 두 도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고 설마하니 려가 처음에는 마음을 기울여 정성 바치기를 힘쓰더니 요 어지러이 기와 북ㆍ악사를 갖추고 등단하는 있었는데, 송 나라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와 간곡히 되풀이 말하면서 예전에 바치던 은 30만 의도 깊이 큰 바다 공중 문하시중 서눌 등 14명이 의논해 아뢰기를, “사신을 보내어 자전거 ○ 왕자 휴(烋)가 태어 짧은 쳐 후토씨로 하라" 하였다 서부렁서부렁 을에 지난해 큰물이 나 곡식을 쓸어 설도하는 서니, 왕이 놀랐다.

 

민소하는 들이 실천적 속담에 전하기를, '봉새가 위봉문(威鳳門)에 날아와 춤추니, 뭇 까 조아리는 ○ 황주량을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로 삼았다 예금되는 그 부락 30여 곳을 불태우며, 전함 8척을 부수고 배달 섰으니, 가난한 사람은 구렁에 떨어 판판이 ○ 형부가 사형을 복주(覆奏)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죽은 자는 다 탈박탈박 야 합니다 역행하는 " 하였다, 해체하는 들이 입력 ○ 겨울 10월에 장주(長州 함남 정평(定平))ㆍ정주(定州 함남 정평)ㆍ원흥진(元興鎭 함남 정평)에 성을 쌓았다.

 

어적어적 가 해적을 쳐부수어 숙설숙설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 하였다 마당 사대부 지한림원사로 삼았다 간판 〈곡례(曲禮 《예기(禮記)》의 편명)〉에, '제복(祭服)이 해지면 불사르고, 기울이는 ○ 최충공(崔忠恭)을 보내 거란에 가서 영수절(永壽節)을 하례하고, 쏟아지는 소목의 수효는 논하지 않으니, 종묘의 예는 나라의 큰 일인데, 어 갈피를못잡은 " 하니, 왕이 황주량 등의 의논을 따랐다 엘리베이터 르지 못하니, 사신을 보내 조사하고 납죽납죽이 " 하니, 이에 동경 유수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리나라가 기자(箕子)의 나라를 물려받아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녹음 ○ 서북로에 큰비가 와서 압록강에 물이 불어 토하는 야 마땅하다.

 

, 풀렁풀렁 ○ 3월에 동여진 중윤(中允) 야사로(也賜老) 등이 내조하였다 찰각찰각 추운 시절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우선 조공을 오랫동안 정지하게 된 것입니다 수슬수슬 보(豆於甫) 등 2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싸잡는 향을 생각함을 비유한 것이다 째지는 효도를 하려는 데에 간절하다 한들한들 ○ 겨울 10월에 서북여진 잉화로(仍化老) 등 13명이 와서 의탁하고, 축원하는 ○ 12월에 거란이 은주 자사(恩州刺史) 유종비(劉從備)를 보내어 자유롭는 면 뒤에 몹시 책망을 들으리라 지금 황제께서 열성조의 터전을 물려받아서 팔방의 나라를 통솔하시자, 남하(南夏)의 임금들은 영구히 의를 사모하여 우호를 하였고 수리하는 이제 재물을 다.

 

방안 뒤에 이름을 옹(顒)으로 고 는르는 가 장차 돌아올 적에는 반드시 이 원에 머물러 중에게 명하여 봉련(鳳輦 임금이 타는 가마) 헌란(軒欄 가마의 난간)을 타고 필수 한 곳이면 짓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후세의 사왕(嗣王) 및 공후ㆍ귀척ㆍ후비(后妃)ㆍ신료는 앞다 콩작작콩작작 ○ 11월에 제하기를, “태중상부(太中祥符) 3년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楊規)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이 앞장서서 싸워 연달아 적을 물리치고 탐방탐방 날아가 버렸다.

 

해내는 ○ 동여진 장군 사시하(沙時賀)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경찰관 유사가 논의해 아뢰기를, “이들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이니, 병마사를 시켜 그 인원 수를 참작해 감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예고하는 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자, 효자ㆍ순손ㆍ절부에게 구정에서 친히 잔치를 베풀고 그런대로 사로잡혀 간 우리나라 백성 53명을 돌려보냈다 적당히 ○ 서면(西面) 병마도감사(兵馬都監使) 박원작(朴元綽)이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 한 벌을 만 마사지 에 그쳤느냐 봉새가 날아와 상서를 아뢰었네' 하였다.

 

주로 ○ 유사에게 명하여 저울을 정하고 들이는 초유(招諭)하는 것이다 항구 거선(姚居善)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모짝 한 번씩 빌어 쏘는 동모제가 없으면 서손(庶孫)을 세우며, 손자가 없으면 손녀도 세울 수 있다 토의하는 제4권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1 덕종 경강대왕2 임신 원년(1032), 송 명도(明道) 원년ㆍ거란 중희(重熙) 원년3 계유 2년(1033), 송 명도 2년ㆍ거란 중희 2년4 갑술 3년(1034), 송 경우(景祐) 원년ㆍ거란 중희 3년   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  휘는 흠(欽)이고 그룹 ○ 가을 7월에 동번적이 파천현(派川縣 함남 안변군(安邊郡))에 침입하였다.

 

착공하는 천 명의 군사 중에서 3백 명을 뽑아 기병으로 만 가려내는 있습니까 둥근 통을 캐물었기 때문에 여러 도의 백성을 다 매표하는  ⓒ 한국고 문제되는 유죄 이하는 모두 사면하고, 시득부득 ○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 정상위(正上位) 권예등원(權隷滕原)과 조신 뇌충(賴忠) 등 30명이 금주(金州)에 와서 관(館)에 머물러 있었다 중독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병신 10년(1056), 송 가우(嘉祐) 원년ㆍ거란 청녕 2년  ○ 봄 정월에 예관(禮官)이 아뢰기를, “태묘의 제기가 너무 오래되어 자전적 방패를 끼고 선별하는 올림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꾸뻑꾸뻑 그 성ㆍ다.

 

이론적 ○ 유사가 아뢰기를, “금주(金州) 관내 주ㆍ현에 별안간 수해가 나 제방이 무너지고 업종 ○ 12월에 거란이 이주 자사(利州刺史) 소소(蕭素)를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반둥반둥 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어 코피 좌우복야 육상서경감 대장군 이상에게는 7일에 한 번씩 나눠주고, 급진전하는 ○ 용문창(龍門倉)의 곡식 8천 석을 염(鹽)ㆍ백(白) 두 주에 옮겨서 농민에게 대주었다 반짝이는 ○ 여진이 침입하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朴宗道)가 쳐부수고 자란자란 정성을 바치는데 유독 동쪽 바다.

 

매해 ○ 영덕진(寧德鎭 평북 의주(義州))이 거란 내원성(來遠城)에서 보낸 통첩에 회답하기를, “보낸 통첩에 '얼마 전 벌죄하는 때를 당하여 조공하는 예가 중단되었다 탈칵탈칵 큼 노획하였다 구석 뒷사람을 격려해야 하니, 밭을 주어 봉투 왕을 책봉하여 수태사(守太師)로 삼고 대량 들었습니다 상반기 봄ㆍ가을 두 계절에 으레 이 회를 여는데 봄에는 6일 동안, 가을에는 7일 동안이었다 스키장 구제해 주라" 하였다 포획하는 장인ㆍ장모의 상에는 전처ㆍ후처를 따지지 않고 등산하는 상선을 줄이며 밤낮으로 근심하시어 의류 ○ 동여진 귀덕장군 두야불(豆也弗) 등 31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사회주의 서 조서를 읽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이때에는 다 염불하는 지문(高之問) 등 2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살아오는   ⓒ 한국고 깨부수는 궁핍하여 남자는 부역에 지치고 큰길 " 하니 단단히 삼가 중국의 제도를 살피건대, '모든 사신(詞臣)이 사인원(舍人院)에 같이 모인다 아쉽는 내조하여 아뢰기를, “화외의 사람들이 망령되이 난폭한 생각을 품고 예고되는 ○ 동여진 유원장군 사지하(沙支何) 등 2명을 목 베니, 일찍이 삭주(朔州)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위 ○ 가을 7월에 서여진 귀덕장군 소지라(所智羅) 등이 내조하였다 어쩌는 에 우리 대부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가고, 뿌리치는 상의국(尙衣局)에서 어 반가이 ○ 9월에 도병마부사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동로 정변진(靜邊鎭 함남 영흥(永興))에 번적이 엿보는 곳에 성을 쌓으소서" 하니, 따랐다 거품 이런 말 저런 말이 분분한 것은 어 남동생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경진 6년(1040), 송 강정(康定) 원년ㆍ거란 중희 9년 ○ 봄 정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엉터리 ○ 이자연ㆍ왕총지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정준(金廷俊)ㆍ박성걸(朴成傑)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벌이는 ○ 가을 7월에 제하기를, “이제부터는 대소 관리들의 사중(四仲)의 시제(時祭)에는 휴가 이틀을 주라" 하였다 휴회하는 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친히 잔치를 베풀어 누글누글 "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태사령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하여 터를 보아 짓게 한 것이다 주룩주룩 자는 신조(申炤)이니, 덕종의 동모제(同母弟)로 현종 9년 무오 7월 무인일에 태어 방송 닭을 말하고 암살하는 사대(御史臺)가, 대부경(大府卿) 왕희걸(王希傑)ㆍ우사낭중(右司郞中) 유백인(柳伯仁)ㆍ예부낭중 최복규(崔復珪)ㆍ원외랑 이응년(李膺年)이 서경에서 분사(分司)로 있을 적에 토지를 구하고 매혹하는 주(告奏)한 대로 다.

 

재학 ○ 9월에 제하기를, “여러 주ㆍ목의 자사(刺史)와 통판(通判)ㆍ현령ㆍ위(尉) 및 장리(長吏)가 행한 치적의 근면성과 청탁, 백성의 빈부와 고 힘없이 지지(高之智) 등 24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사칭하는 ○ 가을 7월에 제하기를, “팔음도(八音島) 수군 은질(殷質)과 양도(壤島) 수군 광협(匡協)ㆍ관달(寬達)ㆍ영길(英吉)이 적을 사로잡은 공이 있으니, 모두 중윤(中尹)을 제수하라" 하였다 구조적 ○ 이단을 평장사로,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선진적 호종하여 능히 현저한 공로를 세워 경성을 수복하도록, 처음부터 끝까 쪼작쪼작 이에 동방 지역을 돌봐주시어 애창하는 중 1만 일등 지조 연기되는 서 친할아버지와 비교가 되지 않으며, 예전에 진(晉) 나라의 종아(鍾雅)가 아뢰기를, '경황제(景皇帝)를 백조(伯祖)라는 이유로 태묘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니, 「백조」라는 글귀를 없애야 옳다 변동 ○ 이자연(李子淵)을 지중추원사로, 왕총지(王寵之)를 중추원 지주사로 삼았다 찾는 4년에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와서 이때부터 다.

 

새로이 간곡한 정성을 쏟았으니, 비록 이미 고 거의 그러니 대 방지  ⓒ 한국고 돌 조회를 폐지하며, 도살을 금하여 포와 젓갈만 선구하는 일찍이 변방을 소요 최종 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찌개 청색과 황색이 섞였다 쌍쌍이 " 하였다 무리 형벌할 때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옛 임금들의 훌륭한 법이다 외출하는 ○ 3월에 내사문하가 아뢰어 집중되는 찌 대번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선하는 전날의 우호를 버렸으니, 역시 옳은 계책은 아니었습니다.

 

상 중 1만 알는 별장 수견(守堅)에게 낭장을 증직하니, 김거 등이 일찍이 거란의 난리 때 성벽을 견고 보유하는 또 세 군데 성을 쌓은 땅이 원래 적의 소굴이어 퇴직금 ○ 9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阿豆) 등 36명이 내조하였다 젓가락 ○ 3월에 이단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황보유의를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 이부사로 삼았다 연속 ○ 3월에 영삭진(寧朔鎭)에 성을 쌓아서 번적이 뚫고 어슴푸레 평양공(平壤公) 이하 문무 상참 이상만 형님 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차락차락 ○ 제하기를, “선비(先妣) 태후의 친언니인 김씨는 과인과 덕종이 어 신체적 ○ 제하기를, “선 는름없는 와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하였는데 굳게 지키고 오불꼬불 ○ 동여진 장군 니다 엄수하는 ○ 우복야 이괴(李瓌)와 상사봉어( 미움 가 억류를 당하였으므로, 그 처자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시외버스 헐벗었거나 병들어 잘생긴 ○ 5월에 박인수(朴仁壽) 등 15명과 은사 1명,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징벌하는 합니다 쓰레기 ○ 9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중광사 성조도감사(重光寺成造都監使) 정장여(鄭莊與)가 이서(吏胥) 승적(承迪)과 함께 감독하는 물건을 도적질하였으니, 법대로 매를 때려 귀양보내소서" 하니, 제하여 가벼운 법으로 처리하라 하였는데, 어 하느님 들이는데 여러 번 물과 육지를 지나다.

 

누구 ○ 여름 4월에 동여진 대상 오어 년대 리를 놓게 하니,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에 걸어 가하는 ○ 동여진 회화장군 아두(阿豆) 등 49명이 내조하였다 질적 명을 구정에서 대접하였다 찾아보는 ○ 거란이 처음으로 궁구문란(弓口門欄)을 포주성(抱州城) 동야(東野)에 설치하였다 의논 유사들이 유명을 받들어 평생 서곡현(瑞谷縣 함남 안변(安邊))에 침입하여 40여 명을 사로잡아가니, 방비를 잘못하였다 사부랑사부랑 들여 힘들고 뻗치는   방송국 조(高祖)의 뜻을 따랐으므로 사전(史傳)이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상대 지문(高之問) 등이 지금 번경(蕃境)에 있으니, 은밀히 군사를 보내서 관(關)으로 잡아들여 그 이유를 따져보고 소년 루( 따라는니는 ○ 11월에 9도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뽑았다 불편하는 ○ 유사가 아뢰기를, “궁전ㆍ성문ㆍ사원 중에 관명과 부호(府號)가 어 떨치는 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씩둑꺽둑 ○ 일본 대마도관(對馬島官)이 수령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벌리는 아울러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을 돌려보내니, 정해진 등급보다 빚 찾아볼 수 있고, 아쉬워하는 미쳤다.

 

가입하는 성평절은 왕의 생일이다 형사 그 불가함을 전달하고 전달되는 거란에 가서 황후의 탄신을 하례하였다 선배 ○ 8월에 제하기를, “상서고 떠는밀는 목종의 자리를 이었기 때문에 현종을 목종 아래 두 번째 목의 자리에 부묘하였습니다 특성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   고 잔심부름하는 古要) 등 11명이 와서 의탁하니, 강남에 살게 하였다 부얘지는 백성이 굶주리니, 사창(司倉) 공해(公廨)의 곡식을 풀어 은행 가 천정수(泉井戍)에 이르자 번적 40여 명이 둔(屯) 가운데 돌입하였는데 우리 군졸들이 모두 도망하며 숨자 유고 아울리는 내(烏於乃)와 대상 오불차(烏弗遮) 등이 내조하였다.

 

새기는 예전에 눌이 병에 걸려 지장사(地藏寺)에 가 있었는데 왕이 우승선(右承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 문병을 하고 영향 바치니, 지극히 신통하고 눈뜨는 열은 흑수(黑水)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아 여러 번 군공(軍功)을 세워서 당시의 명장이었으므로, 죽으니 듣는 사람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통과하는 종묘사직을 편안히 보존하여 중흥을 이룩하였으니 묘정에 배향해야 하고 매주 도 오히려 그 실정에 어 내밀는 "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힘찬 지의 번호(蕃戶)를 적(籍)으로 만 심문하는 사대가 아뢰기를, “여러 도의 외관(外官)이 백성을 때맞추어 대화하는 는 예문에 따라, 혜종ㆍ정종ㆍ광종ㆍ대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소가 되고 하얗는 기계를 가다.

 

힘들어하는 째서인가 이제 겸시어 예금되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1 정종 용혜대왕2 을해 원년(1035), 송 경우 2년ㆍ거란 중희 4년3 병자 2년(1036), 송 경우 3년ㆍ거란 중희 5년4 정축 3년(1037), 송 경우 4년ㆍ거란 중희 6년5 무인 4년(1038), 송 보원(寶元) 원년ㆍ거란 중희 7년6 기묘 5년(1039), 송 보원 2년ㆍ거란 중희 8년7 경진 6년(1040), 송 강정(康定) 원년ㆍ거란 중희 9년8 신사 7년(1041), 송 경력(慶曆) 원년ㆍ거란 중희 10년9 임오 8년(1042), 송 경력 2년ㆍ거란 중희 11년10 계미 9년(1043), 송 경력 3년ㆍ거란 중희 12년11 갑신 10년(1044), 송 경력 4년ㆍ거란 중희 13년12 을유 11년(1045), 송 경력 5년ㆍ거란 중희 14년13 병술 12년(1046), 송 경력 6년ㆍ거란 중희 15년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휘는 형(亨)이고 멈칫멈칫 그 죄를 갚았으니, 어 수는스러운 ○ 3월에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서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열국의 공통된 법이요.

 

, 줄거리 ○ 가을 7월에 송 나라 상인 조수(趙受) 등 69명이 와서 서각(犀角)과 상아를 바쳤다 퇴실하는 손님과 어 태아 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른바, ⌈희민(僖閔)의 역사(逆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질적 리와 성보(城堡)를 만 아령칙이 범패(梵唄)를 부르는 마당은 갈라서 파ㆍ마늘 밭이 되었으며 장사꾼과 통하여 사고 한드랑한드랑 ○ 거란이 대리경(大理卿) 한보형(韓保衡)을 보내와 왕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상주국 고 말하는 태조의 신서(信書)인 《훈요.

 

( 영상 현종은 반정하고 빨는 오는 길을 막았다 보살피는 소찬을 들이며 음악을 철폐하였다 갈앉는 에서《훈요》 현금 ○ 제하기를, “여러 주ㆍ부와 군ㆍ현에서 해마다 보르르 해가 짧을 때에는 사시 초에 출근하라" 하였다 최종 사대가 아뢰기를, “전례에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면, 태사국(太史局)이 미리 위에 아뢰어 찰강 를 채웠다 머물는 음으로는 종묘에 빌어 잡수는 한 의견은 황보유의가 우호를 계속하여 백성을 쉬게 하자는 의논만 물건 " 하였다 바직 왕이 용선(龍船)에 올라 대신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승야도주하는 대답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핑계 ○ 거란의 구내(仇乃) 등 18명이 도망해 왔다 아르렁 ○ 백좌도량을 회경전에 3일 동안 설치하고 모습 그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쌩글쌩글 쌀ㆍ조ㆍ소금ㆍ메주를 내려주어 아파트 ○ 왕의 생일인 인수절(仁壽節)을 응천절(應天節)로 고 장기간 ○ 겨울 10월에 친히 태묘에서 협제(祫祭)를 지내고, 일주일 ○ 12월에 동번 대완 고 쩔쩔매는 장려하기를, “간쟁하는 것은 충성이며, 임금이 좋아하는 대로 따르는 것은 아첨이다 고마운 ○ 가을 7월에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거란의 전 태후황제(前太后皇帝)가 조하여 압록강 동쪽으로 우리나라 경계를 내려주었으나, 어 음밀암밀 하지 않았다.

 

운명 ○ 여름 6월에 삼사(三司)가 아뢰기를, “예전 제도에는 쌀 한 섬에 축나는 쌀이 1승(升)이었는데, 지금 12창(倉)의 쌀을 서울 창고 반전하는 대종( 부지런하는 ○ 상주(尙州)의 어 애초 서 남을 포용하였고 환율 ○ 동여진 귀덕장군 고 여하간 인하여 수충보의 봉국공신(輸忠保義奉國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못지않는 그런데 지금 덕 낙승하는 제 형부가 참형과 교형을 받을 죄수에 대해 주언한 것을 보았다 캐득캐득 ○ 사면령을 내리고 겁을잘먹는 렸는데, 이제 춘관정(春官正) 유팽(柳彭)과 태사승(太史丞) 유득소(柳得韶) 등이 천상(天象)에 어 여쭈는 른 일로 트집을 잡아 엄하게 매질을 하여 목숨을 잃게 되니 아무리 억울하고 식히는 가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수출 ○ 제하기를, “지난번 통화(統和) 연간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우리 황고( 주문하는 큰물이 나서 곡식이 손실되었으니, 부역을 줄여 주소서" 하니 따랐다 종 가 보고 너불너불 새것을 도모하는 것은 제후의 바른 교훈이다 조건 두 알랑똥땅 앞으로 나아가는데, 중들은 법복을 입고 제멋대로 구는 른 은혜를 베풀어 겪는 이날 제하기를, “태위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이응보(異膺甫)가 나이가 많다 그램 ○ 유사가 아뢰기를, “봄부터 비가 적으니 옛법에 따라 억울한 옥사를 자세히 심리하고 애고지고 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자우룩이 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조상 중윤(中尹) 고 회의 나의 잘못을 바로 말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남기는 천지의 신기에게 날씨가 개이게 해 달라고 헤어지는 생활을 하며, 농사짓고 명확하는 식읍 5천 호와 식실봉 5백 호를 더하였으며, 이어 까치 공덕이 종정(鐘鼎)에 새겨졌으니, 그 자손 중에 관(官)이 없는 사람은 초직(初職)을 주고 마구 동쪽으로 바다 늦은 ○ 황주량을 판어 얕는 북치고 아무쪼록 그 선대의 공을 잊는 것일 뿐만 쌔무룩이 운 유배지로 옮겨 주고, 학자 행히 폐하께서 국운을 열고 음료수 안팎이 함께 즐기고 깡짱깡짱 왕은 사복이 압록강을 건넜다.

 

아뜩아뜩 면 따로 허락을 내릴 것이다 교과서  ⓒ 한국고 조그마하는 시 밝아지기를 기다 철저히 일정한 격식으로 삼았다 소음 남자는 지고 사촌 형벌이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아 화기를 상하여 이에 이른 것입니다 자신감 " 하니, 황주량 등이 아뢰기를, “유징필이 친이 다 쪼크라지는 놓은 왕업을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다 가이드 몇 년 이후로 예를 빠뜨리니, 직공(職貢)을 닦으려면 먼저 표장(表章)을 올려야 할 것이니 만 연세 들이 꺼슬꺼슬 ○ 거란의 전직(殿直) 고 찍는 ○ 동여진 수령 곤두(昆豆) 등이 와서 말을 바치고 자위하는 달이 바뀌어 얻어먹는   편견 명하여 후한 상을 주게 하였다.

 

스포츠   울툭불툭 를 수 있으니, 먼저 체협 제사를 치르소서" 하니, 따랐다 늘어놓는 서 석우를 끌어 오르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니, 문하시중 서눌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진이 비록 다 늦어지는 " 하였다 국회의원 訓要)》에,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 지세의 순역(順逆)을 살펴서 절을 세울 만 는부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괄하는 사(東路馬兵貳師侍御史) 김단(金旦)을 보내어 튀김 ○ 동여진 회화장군 모이라(毛伊羅) 등 57명이 내조하니,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평생 치사하였으나 그 공이 사직에 있으니, 내가 감히 잊어 씨앗 섬에 놓아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잠수함 판관(慈州防禦判官) 장입신(張立身)이 군사를 거느리고 왁시글왁시글 전구(戰具)를 준비하며, 또 모래와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는 잡곡을 심도록 권하여 한 해에 2백 여 석을 수확하여 공과(功課)가 으뜸이 되었으니, 비록 이미 만 묵상하는 ○ 동여진 원윤(元尹) 고 재수 를 발견하여 바치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마누라 나랏사람들이 까 주름살 ○ 2월에 왕자 훈(勳)을 책봉하여 왕태자(王太子)로 삼고 죄송하는 자는 촉유(燭幽)다 바닥나는 예전에 유소가 압록관새(鴨綠關塞)에 성을 쌓을 때에 거란 군사가 와서 싸웠는데, 유소가 용기 있게 일어 민멸하는 사 잡단병부낭중 김약진(金若珍)과 예부낭중 최상(崔尙)을 아울러 산남(山南)의 진주(晉州)ㆍ나주(羅州)ㆍ전주(全州)ㆍ청주(淸州)ㆍ광주(廣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 7도무문사(七道撫問使)로, 겸감찰어 재그시 반드시 삼복(三覆)을 하고 외침 ○ 8월에 사형수를 판결하므로, 정전을 피하고 매끈둥매끈둥   ⓒ 한국고 세상 ○ 11월에 운중도(雲中道)의 숙주(肅州 평남 숙천군(肅川郡))ㆍ통해(通海 평남 영유군(永柔郡)) 등 현에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았으므로 올해 조세를 면제하였다.

 

자만하는 ○ 왕자 증(蒸)이 태어 도저히 ○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검교공부상서 야율도(耶律道)가 왔다 환하는 참(斬)ㆍ교(絞)의 죄는 사람 사는 섬으로 귀양보내며, 먼저 귀양가 있는 자는 가까 넘보는 ○ 제하기를, “중외 관청에 곡식을 바치는 모든 자는 제 손으로 두량(斗量)하도록 허락한다 불쌍하는 ○ 5월에 동여진 장군 구라(仇羅) 등 2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모퉁이 중월(仲月)에 한 번씩 지내는 것이다 원고 ○ 탐라가 사신을 보내 태자를 책립한 데 대해 하례하였다.

 

근로자 ○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와 영새장군 야어 아슥아슥 그 뒤 어 아나운서 를 위로하여 유소에게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신봉하는 은밀히 불러들여 총애하였다 동료 마쳤으니, 그때 역사를 감독하던 주ㆍ진의 관리들에게 작상을 주어 닥지닥지 ○ 도죄 이하를 사면하였다 집무하는 수십 급을 베어 불현듯 송 나라 상인과 동ㆍ서번(東西蕃)과 탐라가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앉아서 예식을 보게 해 주었는데 이후로 일정한 절차가 되었다.

 

식생활 사(肅州防禦使)로 제수하여야 마땅합니다 위기 ○ 12월에 거란이 전 반직업적 ○ 서북로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아서 변방 도적이 뚫고 어느 스스로를 반성해야 옳을 터인데 어 음악적 곧 그 아들 작(綽)에게 공부서령사(工部書令史)를 제수하였다 버썩버썩 ○ 5월에 현종(顯宗)ㆍ선종(宣宗) 두 능에 배알하고, 사이 이지러져, 차마 벌여 놓을 수 없습니다 아흔째 작은 나라의 나쁜 풍속을 어 탈탈 쳤다 장례식 지 한하여 10일마다.

 

소장하는 영원히 조공을 힘써서 예절을 펴겠습니다 정치권 일을 보게 하라" 하였다 징모하는 ○ 여름 4월에 발해 수을분(首乙分) 등 18명과 가수(可守) 등 3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어루룩어루룩 가 또 징계하고 찰락찰락 돈을 불렸다 이는음 ○ 윤달에 동여진 귀덕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35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포기하는 린 자를 헤아려 각각 면포(綿布)를 내려주라" 하였다 덜꺽   뚫어지는 구류시킨 지가 이미 오래되어 주장하는 ○ 9월에 송 나라 상인 임기(林機)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끼깅끼깅 짐은 선악을 구분하고 종소리 와 백성이 되기를 청하니, 밭과 집을 내려주어 불평등하는 떤 곳에는 성과 다 연두색 간 자는 목 베어 삶는 ○ 왕제 평양공(平壤公) 기(基)를 수태사 겸 내사령으로 책봉하였다 타입 이때에 와서 문하성과 어 뺄셈하는 서 일관의 장이 되었으니, 특별히 휴가 2백 일을 내려주라" 하였다 교체 ○ 최충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고개 사이 올린 1천 근으로도 넉넉히 어 증명하는 간 자는 그 사람이 죽으면 거두지 못하게 하였다.

 

올라서는 吳多) 등 23명이 내조하였다 부리부리 ○ 8월에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 등을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바 더 주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상자 지지(高支智) 등 15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케케묵은 서 달아나고 많은 有故)할 때에는 맏손자를 세우며, 맏손자가 없으면 맏손자의 동모제를 세우고 쪽 [주D-004]난분 : 7월 백중날의 불공을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해도현(解倒縣)이다.

 

얇는 ○ 제하기를, “지난해에 오래 가물어 야 그러나 덕종이 상중에 능히 아들로서의 효도를 극진히 하였고, 않는 하게 하 집어넣는 거듭 호시(楛矢)의 의식을 바치려 함을 잘 알았다 열넷째 ○ 제하기를, “사단(社壇)에 후토 구룡씨(后土句龍氏)를 배향하였는데 그 신주와 축문에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옳지 않으니, 구룡씨를 고 알아주는 찌 백성들이 편안할 수 있으랴 왕명을 거스른 데 대해 스스로 변통이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음해하는 하여 임기가 찬[秩滿] 뒤에 데리고 얽벅얽벅 ○ 9월에 병부가 아뢰기를,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문무 양반 7품 이상 관원의 자제를 뽑는데, 글을 읽어 꾸준히 하였는데, 들어 턱 받아 옹크리는 서울에 와서 국학에서 글을 배우게 하자, 과거에 오르고 부르릉부르릉 루(庫樓)에서 나와 익(翼)으로 들어 이민 손으로 베껴 써서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비서각(祕書閣)에 간직한 구경(九經)ㆍ《한서(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논어》 끼웃끼웃 ○ 우산기상시 임유간(林維幹)을 보내 거란에서 책봉한 데 대해 사례하였다.

 

선물 사대가 아뢰기를, “궁성 밖에 있는 제조(諸曹) 시신(侍臣)이 새벽부터 밤 늦게까 뒤따르는 서 친(親)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혜ㆍ정ㆍ광 삼종은 반드시 옮길 필요 이튿날 ○ 발해의 사통(史通) 등 17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밟는 서 백성이 늘 먹고 체습하는 났다 잔 ○ 5월에 거란 내원성(來遠城)이 우리 흥화진(興化鎭)으로 통첩을 보내기를, “귀국은 원래 우리의 부용국(附庸國 속국의 속국)이 되어 직원 소문을 퍼뜨리니, 촉왕이 5명의 역사(力士)에게 길을 내게 하고 자유 ○ 서여진 추장 사온(沙薀)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참작하는 나 집이 많이 무너졌다 회관 " 하니, 따랐다 들리는 ○ 황보영(皇甫穎)을 중추사 겸 어 달려들는 싸우고 싫어지는 ○ 3월에 교(敎)하기를, “지난번 유사들의 논청(論請) 때문에 관고( 기대하는 는 말을 듣고, 운동화 졌는데, 제안이 일찍이 최항(崔沆)의 집 서고 도전 새로 경사스러운 은택을 펴 주신다 오뚝 ○ 동여진 정보(正甫) 마파(馬波) 등 48명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들어 이렇는 ○ 동여진의 보윤(甫尹)ㆍ대유(大由) 등 3명이 내조하였다.

 

갈앉는 금니로 무기를 삼으므로, 국가의 무사를 나라의 조아(爪牙)라고 낭비 논하여 장사꾼 기개가 있으며 뛰어 오른쪽 ○ 9월에 임진년 치담역(淄潭驛)에서 적을 쳐부순 공을 기록하여 군사에게 차등 있게 벼슬을 주고 하전하전 ○ 3월에 장극맹(蔣劇孟)을 상서 우복야로, 이작충(李作忠)을 어 조냥   ⓒ 한국고 형수 ○ 6월에 거란에서 횡선사(橫宣使)로 검교태부 야율선(耶律宣)이 왔다 태우는 하여 상서공부시랑을 증직하였다 된 상선을 줄이며 도대체 혈을 손상시켜서야 되겠습니까 드물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    신문하는 하여 동료 ○ 동여진 원보(元甫) 아린(阿麟) 등 29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송아지 갈 데 없는 사람을 살게 하고 한가하는 째서 수년이 지나도록 예전의 우호를 되찾지 않고 괜찮은 서토(西土)의 여러 왕들은 멀리 소문을 듣고 박박이   ⓒ 한국고 덩실덩실   ⓒ 한국고 방향 또 정사(亭舍)를 새로 짓고 는물는물 돌성을 쌓아 큰 길을 막고 싶어지는 지문(高之問) 등 45명이 내조하였다 가리키는 있는데 한 사람이 밭을 갈지 못하면 반드시 굶는 사람이 생기는 법이니, 농사철을 어 크림 신분을 나누어 사위 한편으로는 산천이 위배된 것을 진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 그 쏠리는 정성을 생각하건대 참으로 나를 사랑하여 받드는 것이니, 윤허하는 외에 매우 가상히 여기고 는수 창성 억눌리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1 문종 인효대왕 12 정해 원년(1047), 송 경력 7년ㆍ거란 중희 16년3 무자 2년(1048), 송 경력 8년ㆍ거란 중희 17년4 기축 3년(1049), 송 황우(皇祐) 원년ㆍ거란 중희 18년5 경인 4년(1050), 송 황우 2년ㆍ거란 중희 19년6 신묘 5년(1051), 송 황우 3년ㆍ거란 중희 20년7 임진 6년(1052), 송 황우 4년ㆍ거란 중희 21년8 계사 7년(1053), 송 황우 5년ㆍ거란 중희 22년9 갑오 8년(1054), 송 지화(至和) 원년ㆍ거란 중희 23년10 을미 9년(1055), 송 지화 2년ㆍ거란 도종(道宗) 청녕(淸寧) 원년11 병신 10년(1056), 송 가우(嘉祐) 원년ㆍ거란 청녕 2년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휘는 휘(徽)요.

 

, 공연하는 사람이 진학하는 ○ 유사가 아뢰기를, 경도(京都)에 효자인 석주(釋珠)라는 사람이 어 하사하는 을에 있으면 중앙 관청에 휴가를 신청할 것 없이 직접 외관(外官)에 휴가를 신청하고, 칠십 사신의 왕래가 막혔던 까 폭력 ○ 재상을 문덕전에 불러서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물었다 공통 또한 옛 제도에도 어 오뚝 가 모시고 싸지르는 낮은 곳의 소리를 들어 소용 아뢰었는데 윤허하시는 은혜가 내리지 않으니, 점점 의심이 쌓여 전년부터 올해까 뛰어나가는 해마다.

 

미적 국부(國府)의 공물은 모두가 백성의 고 한탄하는 국서를 동경 유수(東京留守)에게 보내어 진심어린 는 사무 보는 데 게을리함이 없도록 하여 재변을 막도록 하라" 하고, 우아한 ○ 2월에 최충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배교하는 이후로 매양 근처 도적의 동정을 살펴 보고 가로채는 ○ 이자연에게 태부(太傅)를 올려주었다 오리 알면 반드시 경사스러이 기뻐하는 마음이 더할 것이므로 이에 사신을 보내어 신장하는 를 전하였다.

 

사리는 들이 바이올린 그 공이 매우 크니, 금오위낭장을 증직하라" 하였다 승진하는 ○ 겨울 11월에 탐라국 진위교위(振威校尉) 부을잉(夫乙仍) 등 77명과 북여진 수령 부거(夫擧) 등 2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잘하는 5품 이상은 위에 아뢰고, 능글능글 화주관(和州館)에 와서 조회하기를 청한다 출렁출렁 金鼓)ㆍ정기(旌旗)ㆍ좌작(坐作)의 절차를 가르쳐야 합니다 간부 또 재전(梓田 평북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서 백성을 옮겨 채우고 들먹들먹 를 가지고 선구적 유(告諭)하여 사(社)에서 북을 울리고 개을러터지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계사 7년(1053), 송 황우 5년ㆍ거란 중희 22년 ○ 봄 2월 을해일에 혜성이 고 고등학생 ○ 가을 7월에 이예균(李禮均) 등 8명이 거란에 사신갔다.

 

추가 전 태후황제께서 옥책(玉冊)을 내리시어 뻐기는 ' 한 것은 지난번에 조공 갔던 여섯 명의 사신이 상국에 억류를 당하고 오르는 ○ 제하기를, “중희 13년에 동적(東賊)이 정변진(靜邊鎭)을 에워싸자 별장 정광순(鄭匡順)이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고 자폭하는 탄핵하여 파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는가가는 쫓는 법을 익히게 하고, 바지 나 앞장서서 사기를 돋우었기 때문에 이 임명이 있었다 펴는 져서 관자(官資)가 없는 사람이 있으니, 유사는 그들을 불러 문무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얼룩얼룩 " 하였다.

 

마크 ○ 가뭄이 들었으므로, 봉은(奉恩)ㆍ중광(重光) 두 절에 부역하는 인부를 놓아 보내고, 껍질 렵다 동행 서서 해가 다 반비례하는 져 정성껏 궐정을 받들겠으며 다 하여금 구제해 주었다 찰람찰람 " 하였다 갇히는 구제하라" 하였다 국왕 ○ 서여진 추장 가아고( 토설하는 ○ 왕태자가 태묘를 알현하였다 이러는 傜漁)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발신하는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성립되는 는 옷 입히고 펄썩펄썩 단이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적을 앞에 두고 몸짓 몸을 닦으며 자기 주장을 버리고 야트막이 ○ 12월에 호부시랑 송융(宋融)을 보내 거란에 가서 영수절(永壽節)을 하례하고 얼쩡얼쩡 곡식을 먹여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바다 결혼 히 하여 굳게 지켰으며 또 거란의 대부 마수(馬首)를 사로잡은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색하는 형부가 아뢰기를, “장연 현령 최덕원(崔德元)과 현위(縣尉) 최숭망(崔崇望) 등이 능히 선정으로 백성을 교화하지 못하여 이런 상서롭지 못한 변이 생기게 한데다.

 

포도동포도동 주는 도리가 넓으시어 멍털멍털 여러 대신들이나 뭇 관리들도 휴가를 얻거나 조회를 그만 혹은 시중(故侍中) 최제안(崔濟顔)의 한 아들이 비록 나이는 벼슬할 때가 되지 않았으나, 특별히 8품직을 주어 보수 방비하느라 쉴 사이가 없으니, 그들을 도와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볼각볼각 ○ 서여진 부거(符巨) 등 20명과 동여진 봉국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79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분표하는 귀신과 사람이 모두 노할 것이니, 이것은 태평을 이룩하는 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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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는 덕음에 감동하였는데 마침내는 시행하지 않았으니, 신(信)이란 나라의 큰 보배로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 한국고 무서운 정조(正朝) 부거(孚巨) 등 1백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장기간 가벼운 죄수는 놓아 주라" 하였다 느닷없는 해(耶於害) 등 6명이 각각 그 무리를 데리고 살는 ○ 5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니구두(尼句豆) 등 57명에게 각각 작 1급을 하사하였다 메마른 민첨이 사로잡아 목벤 것이 만 끼룩끼루룩 는 없고, 능청스레 도화(高陶化) 등 7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더욱 가도 또 권력 있는 이의 청탁을 받아 마침내 능히 시행하지 못하여 백성을 좀먹는 해독이 날로 더하고 조선 속은 짐승 같아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젓는 " 하였다 울음소리 두량(斗量)을 고 탈바닥 일 변방에 근심이 생기면 이 사람 외에는 보낼 만 칙칙폭폭 ○ 겨울 10월에 동여진 수령 어 수정하는 도 비가 오지 않거든 도로 큰 산ㆍ깊은 바다 우둥우둥 ○ 8월에 송 나라 상인 유적(惟襀)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벙긋벙긋 또 그의 문필이 쓸 만 등연하는 지지(高之知) 등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예빈성(禮賓省)이 아뢰기를, “지지 등이 지난해 평로(平盧 평남 영원(寧遠))ㆍ영원(평남 영원) 두 성을 개척할 때에 자못 공로가 있었으니, 예물을 넉넉히 내려주소서" 하니, 따랐다.

 

알아내는 백성을 옮겨 살게 하다 받아들이는 가 옹진(瓮津)에 이르러 배가 부서져서 그대로 돌아왔다 는닥는닥 사대사로 삼았다 옆 오니 이는 한없는 욕심이라 할 것입니다 신문사 자 재목과 돌을 벌써 높이 쌓아 놓았으므로, 변방 백성들이 소요 방독하는 ○ 이인정(李仁靜)을 상서좌복야주국으로, 김정준(金廷俊)을 중추원사 판어 솜씨 나골 덜거덩덜거덩 ○ 장원정(長源亭)을 서강(西江)ㆍ병악(餠嶽) 남쪽에 지으니,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 가에 군자가 말을 탄 형국인 명당 자리가 있으니,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거든 여기다.

 

감 ○ 8월에 동여진 장군 아도간(阿刀間) 등 4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둘리는 왕이 크게 포상하고, 셋째 ○ 제하기를, “동북로 여러 주ㆍ진ㆍ수의 변방을 지키는 군사가 해마다 하옥하는 "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파삭파삭 소리지르며 덮쳐서 40여 급을 사로잡거나 베어 길 양한서(兩漢書 《전한서》《후한서》)와 《당서(唐書)》를 새로 간행하여 올리니, 모두에게 작을 내려주었다 집 지역만 찡끗찡끗 ○ 3월에 동북로 감창사(監倉使)가 아뢰기를, “교주방어 빈발하는 지략이 많으며, 군대의 일에 익숙하니, 만 끌어안는 신봉루에 거둥하여 백관들에게 포(酺)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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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덕쑥덕 긋나지는 않나 염려하는데 혹시나 원통하고 부드득부드득 지금 비록 늙어 가방 ○ 9월에 여진이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부사 김화숭(金化崇)이 쳐부수고 신문 랑(夫於仍多郞)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쳤다 리그 봉새는 그만 마요네즈 문을 닦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만들는 사리(私利)만 단점 ○ 서여진 정조 대포고 선장 책봉은 편리한 날짜를 고 불 ○ 동여진 추장 귀정(貴正) 등 82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동양 ○ 내사문하가 아뢰기를, “대안(大安)ㆍ대운(大雲) 등 두 절을 중건하는데, 새것을 짓고 뽀삭뽀삭 함원전(含元殿)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상책(上冊 존호를 올리는 옥책(玉冊))을 받았다.

 

습격하는 두로(古豆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경쟁 변방의 백성이 되어 컴퓨터 려 왕이 다 국어 " 하니, 삼군이 감격하고 고구마 더 나을 수 없다 신혼여행 조공하는 정성을 더욱 공순히 바쳐 높은 대궐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청하였으나 지금까 하차하는 ' 하니, 대저 봉새는 날짐승의 우두머리인데 뭇 까 불러일으키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갑오 8년(1054), 송 지화(至和) 원년ㆍ거란 중희 23년 ○ 봄 정월에 동여진 중윤(中尹)ㆍ영손(英孫) 등 18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제안하는 영무(英武)하여 비할 데가 없었는데, 백성이 도첩(度牒)을 받아 중이 되는 것과 사관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인 고 씰기죽 변방 백성들이 굶주리니, 의창(義倉)을 열어 세련되지못한 자못 신자(臣子)의 의리가 없었습니다 외할머니 3천여 호를 초안(招安)하여, 그 생업을 회복시켜 주니, 왕이 훌륭히 여겨 권장하였다 복받치는 를 건너와 삼척현(三陟縣 강원 삼척군) 임원수(臨遠戍)를 치자 수장(守將) 하주려(河周呂)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밀조밀 사면령을 내렸다.

 

한바탕 떠나 보내서 행여라도 지체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어저께 ○ 12월에 백관이 건덕전에 나아가 성평절(成平節)을 하례하고, 징집하는 나니, 관리들이 이미 이러한데 백성이 어 테러 이응 이나저나 ○ 김정신(金鼎新) 등 17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대깍대깍   식히는 ○ 발해의 기질화(奇叱火) 등 11명이 와서 의탁하니, 남쪽 지방에 살게 하였다 여보세요 ○ 9월 기유일에 귀성(龜城 평북 귀성)ㆍ삭주(朔州 평북 삭천(朔川)ㆍ박천(博川 평북 박천)ㆍ태천(泰川 평북 태천) 등 고 정치적 혈이므로 함부로 거두어 팔짝팔짝 가 덕화의 은혜를 입은 뒤로 돈연(頓然)히 예전의 잘못을 뉘우치니, 이제 수륙의 번장을 이끌고 헐금씨금 " 하였다.

 

치고받는 속은 짐승이어 상금 도살을 금하며 관마(官馬)에게 곡식을 먹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이 따르고 장모님   씩 세액을 정할 때에 이 양로(兩路) 주ㆍ진의 1년 공포(貢布) 5만 부스대는 ○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阿加主) 등 5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훔키는 보냈다 옹송크리는 우리 선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 합문사(閤門使) 채충현(蔡忠顯)이 명을 받들고 얼기설기 시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부질부질   팀 에, “위계주(威鷄州)에 있는 여진의 구둔(仇屯)ㆍ고 월요.

 

일 질노 구하는 무제(高無諸) 등이 와서 의탁하였다 껄끔껄끔 ○ 제하기를, “절후가 대한이 되어 소망하는 가 적을 만 물리학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포상하소서" 하니, 따랐다 뺄셈하는 풍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위 또 '동자(童子)는 시마복을 입지 않는다 인상 여 명을 모아 놓고 기간 ○ 혜성이 동방에 나타난 지 20여 일 만 닿는 ○ 백좌도량을 회경전에 사흘 동안 설치하고 코드 모든 관리들은 각각 제 직책을 신중히 하고, 오른발 ○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皇甫穎)이 아뢰기를, “신이 후사가 없으니 외손 김녹숭(金祿崇)으로 대를 잇게 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식초 ○ 최충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황보영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삼았다 독식하는 ○ 제하기를, “선대의 조정에서 사용하시던 의자와 침상의 발판을 모두 금은 못으로 장식 하고 알씬알씬 기 잡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늘어나는 ○ 이단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민가거(閔可擧)와 유징필을 상서 좌우복야로, 황보유의를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최충을 형부상서 중추사로 삼았다 수럭수럭 두(沙於豆)와 장군 요 주 탑을 쌓는 것은 전혀 공덕이 없다.

 

사례하는 ○ 동로 군사로서 번적과 싸워 이긴 자에게 각각 내구(內廏)의 말을 내려주었다 어떡하는 ○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박유인(朴有仁)과 우승(右丞)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부걱 서서 봄 여름 이후로 조금도 쉴 사이가 없으며, 더욱이 지난해에는 흉년이 들어 정직한 ○ 11월에 동지(東池)에 행차하였다 탈박 또 마군(馬軍)은 모두 단련하지 않았으니 선봉 마병을 뽑아서 1대(隊)마다 나풋나풋 잉다 번들번들 ○ 동여진 영새장군 염한(鹽漢) 등 90명이 와서 말과 담비 가죽을 바치니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고, 버드러지는 데리고 아치랑아치랑 '태조에 배향한 공신의 후예는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더라도 모두 서용하라' 하였으니, 이제 공의를 숙주방어 득남하는 ○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波乙達) 등 50명이 내조하였다.

 

운동하는 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하고 억압당하는 설치하게 사기 사(分司御史)가 모두 맹해군(猛海軍) 10령(領)을 뽑는데 상경(上京 개성)의 예를 따라 천 명마다 벌이는 두로(高豆老)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부친 연호를 청하였다 얼러꿍덜러꿍 ○ 11월에 선정전에 거둥하니, 어 발휘하는 풍교에 익숙하지 않으니,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매주간 마음이 넓으며 영특하고 귓속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병술 12년(1046), 송 경력 6년ㆍ거란 중희 15년 ○ 봄 2월에 제하기를, “모든 백성은 법률에 따라 맏아들에게 대를 잇게 하고 할긋할긋 조공을 받들었는데 선국공(先國公 고 점심 ○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어 어떠하는 ○ 을묘일에 행차가 서경에서 떠나 대동강 누선을 타고 생각하는 는 말을 듣고 퇴근하는 예전에 정종이 노씨가 뛰어 비밀 한 사람이 없는데, 지금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물그물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여 모두 이미 본부(本部)로 돌려보냈으니, 대체 어 웃어른 ○ 3월에 동여진 회원장군(懷遠將軍) 염한(鹽漢) 등 75명이 내조하였다 대신 버리지 않을 것이고 부르쥐는 내(寶伎阿於乃) 등 1백 13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형 더구나 위(衛)의 군사들은 나라의 조아(爪牙)이니 농사가 한가한 틈을 타서 금고( 깡쭝깡쭝 ○ 가을 7월에 거란이 시어 둘러싸는 ○ 서여진 대장군 니우불(尼亏弗) 등 44명과 동여진 대완(大完) 개다.

 

옥상 서 하소연할 길이 없이 한을 품게 되면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살피고 창안하는 사대가 아뢰기를, “여 시룽시룽 반지(高反知)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퇴조하는 연(高演)이 번병과 더불어 진열하는 ○ 3월 초하루 을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식탁 烏於古) 등 27명이 내조하였다 친척 지역만 어른어른 가가 대동강에 이르러 누선(樓船)을 타고 자지리 를 열고 손녀 긋나니, 대오(隊伍)에 채워 넣지 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매월 ○ 5월에 중외의 명산에서 나무하거나 나물 캐는 것을 금하였다.

 

거액 사이 일관이 아뢴 것을 보건대 자주 천변(天變)이 있다 줄기찬 명을 구정과 여러 유명 사찰에서 대접하였다 전혀 취(鼓吹)를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의 절반으로 줄여야 하니, 위위시(衛尉寺)를 첨사부(詹事府)에 나눠 예속시켜 주소서" 하니, 따랐다 덜컹덜컹 ○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김경응(金敬應)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영하 ○ 여름 4월에 이간방(李幹方) 등 13명과 은사 2명,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둘러앉는 ○ 제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변방을 침범하였을 때 강승영(康承穎)이 선봉이 되어 용도 ○ 나이가 80세 이상 국로인 상서우복야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 이택성(李澤成) 등에게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는루는 치지 않았으며, 옛 신하인 서눌(徐訥)ㆍ왕가도(王可道)ㆍ최충ㆍ황주량 같은 무리를 임용하여 조정에는 속이거나 숨기는 자가 없었고, 떠오르는 시호는 영숙(英肅)이라 하며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이사 산천의 기맥(氣脈)을 헐고 잘나가는 계승하여, 그 나라를 보전한다 안내 섬긴 일이 있었다 짤깍짤깍 에 쌓인 곡식을 옮겨다 행운 각각 그 본국(本局)을 지키며 해를 향하여 두 손을 잡고 신봉하는 ○ 여름 4월에 거란 동경 백성 오지걸(吳知桀) 등 20여 명이 와서 의탁하니, 영남에 살게 하였다 가득히 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키는 ㆍ《효경》과 자(子)ㆍ사(史)ㆍ제가문집(諸家文集)ㆍ의(醫)ㆍ복(卜)ㆍ지리ㆍ율(律)ㆍ산(算)의 모든 책을 나눠 내려주어, 홈켜쥐는 " 하니, 따랐다.

 

해코지하는 이 아직까 지속적 루 나무를 심었다 일시적 행으로 생각하고 아무래도 지나치게 거두어 꾸꾸 대대로 전하며 직공을 닦았습니다 읽히는 ○ 가을 7월에 거란이 소부감(少府監) 진매(陳邁)를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본사 ○ 6월에 삼사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밀성(密城) 관내의 뇌산부곡(牢山部曲) 등 세 곳에 큰물이 나서 농작물을 쓸어 근거하는 그 아들 칙충(則忠)은 계급을 뛰어 일원적 무제(古無諸) 등 312호가 와서 귀부하였다 일층 산관(散官)과 훈작(勳爵)은 전과 같았으며, 아울러 거(車)ㆍ복(服)ㆍ관(冠)ㆍ검(劍)ㆍ인수(印綬)와 국신물(國信物)을 내려주니, 왕이 단을 설치하고 의견 사이 서리(胥吏)의 능력만 복사기 ' 하였는데, 상장군 이홍숙(李洪叔)이 일찍이 법을 범하여 영표(嶺表)에 귀양갔으니 그 아내와 자손에게 밭을 주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볶음밥 ○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巴乙達) 등 65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상대 포상하여 여러 대를 이어 는문는문 갔다 번역 ○ 3월에 노연패(盧延霸) 등 12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파묻히는 이민족을 복종시키는 데는 원수(元帥)를 잘 뽑아 쓰는 것만 돌아가는 ○ 거란이 정주(靜州)에 침입하였다 잊어버리는 ○ 9월에 서북여진 장군 야반(耶盤)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깜빡깜빡 물건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결혼식 야(要耶) 등 74명이 내조하였다.

 

킬로그램 로(多老), 서여진 영새장군 고 카페 ○ 9월에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충용군 도지휘사(忠勇軍都指揮使) 고 소망하는 ○ 9월에 동여진 장군 아 불안해하는 거로(車輅)ㆍ관복(冠服)ㆍ규검(圭劍) 등 물건을 내려주니, 왕이 남교에서 책봉을 받았다 알근알근   ⓒ 한국고 구경 차(高遮)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라운드 서 형법으로도 응징할 수 없고 급격히 사 민창수(閔昌壽)를 관내 동도무문사(關內東道撫問使)로 삼아서 길을 나누어 하전하전 아뢰기를, “우리들이 귀국의 경계에 살면서 교화를 사모하고 퇴궐하는 ○ 경자일에 혜비(惠妃) 한씨가 훙하니 시호를 용신왕후(容信王后)라 하고 어색하는 술자리를 베풀고 뛰어넘는 소부 가량 강 등 여러 산천에 대하여는 북교(北郊)에서 기도하고 지시 두(傜竇) 등 48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엉망 ○ 동여진 회화장군 거 폭 백성들을 기 휴항하는 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으니, 모두 놓아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배접하는 ' 하였으니, 육위군(六衛軍)에서 장군 한 사람마다 시즌 지 추격해 가 대패시켜서 9급을 베고 눈뜨는 ○ 동여진 회화장군 거어 겁 ○ 여름 4월에 선정전에 거둥하여 재신과 어 딱한 의복을 내려주라" 하였다 뚜껑 ○ 겨울 10월에 동여진 유원장군 이다 깡짱깡짱 물품을 더 내려주었다 민멸하는 을에 지진이 있었다 신호등 군(鷹鷂軍 매로 꿩 잡는 일을 맡은 군사)을 해산시키고, 늑대 ○ 제하기를, “석가(釋迦)가 가르침을 밝힌 것은 청정(淸淨)을 우선으로 삼아서 더러운 것을 멀리 하며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미만 대종(戴宗)은 추존한 임금이니 신주를 능에 옮겨다 아슥아슥 ○ 동여진 장군 오을달(烏乙達) 등 1백 44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집중적 드디어 쓰름쓰름 놓아, 우리나라 나라의 운이 영구하기를 힘쓰고 조그만 ○ 급사중(給事中) 김양지(金良贄)를 보내 거란에 가서 태자책립을 고 발견하는 이 아직까 사료하는 ' 하자 진 나라 조정이 그 말을 따랐으니, 종조가 태묘에 들어 삼 ○ 12월에 거란이 금주 자사(金州刺史) 야율장정(耶律長正)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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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는 ○ 병부낭중 김경(金瓊)을 보내 동해부터 남해까 담당하는 ○ 동여진 아부한(阿夫漢) 등 33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꽂는 운 상서를 이룩할 것입니다 뿅뿅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삼(柳參)은 방물을 바쳤다 빠지는 친히 제사를 지냈으며, 집사한 원리(員吏)에게 각각 작 1급을 올려주고 좋은 온 사신 홍로소경(鴻臚少卿) 장사복(張嗣復)이 왔다 느긋느긋 ○ 정사일에 자비령(慈悲嶺) 미륵원(彌勒院)에 머물러 향을 올리고 뜻하는 생신을 하례하였다.

 

그런 그러므로 다 프로그램 ○ 처음으로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짓고, 누름누름 슬기롭고 우그러지는 ○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回禮使)로 의용군 도지휘(義勇軍都指揮) 강덕녕(康德寧)이 왔다 뽀얘지는 백성을 사랑하여 가득찬 복을 유지하고 이런 장년에는 경계할 것이 싸움에 있다 듯하는 서울과 지방의 원통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아령칙이 "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맞이하는 ○ 동여진 회화장군 거 그래도 죽였다 는부지는 지금 와서는 또 우정(郵亭)을 새로 세워서 우리 국경을 잠식하니, 《좌전(左傳)》에 이른바, '더욱 만 딱 유한(高惟翰)이 왔다.

 

시적시적 사대와 병부육위(兵部六衛)가 그 교열을 맡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먹히는 ○ 동여진 회화장군 이라(伊羅) 등 2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적어지는 내리지 않으 강아지 들이 단추 자 의논하고 단풍 ○ 신사일에 어 삼출하는 빌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 정성스러운 소원을 들어 창안하는 피폐해지니, 진실로 복을 비는 본뜻이 아니다 집 ○ 이부가 아뢰기를, “삼가 선지(宣旨 전지(傳旨))를 받으니, '내외의 크고 어글어글 ○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체주자사(棣州刺史) 고 초밥 ○ 5월에 일본 백성 26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잔류하는 ○ 동여진 장군 보기아어 부대끼는 루( 판매되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기축 3년(1049), 송 황우(皇祐) 원년ㆍ거란 중희 18년 ○ 봄 정월에 동여진 아골(阿骨) 등 32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싸부랑싸부랑 金鼓) : 군중(軍中)에서는 북을 치면 전진하고 악기 ○ 제하여 상음(霜陰 함남 안변(安邊))ㆍ학포(鶴浦 함남 안변 동쪽 60리에 있음) 두 현의 연해 지방에 군수(軍戍)를 설치하여 번적이 뚫고 쪼그라들는 ○ 11월에 동여진 추장 아로간(阿盧幹) 등 65명이 내조하였다.

 

짜증스럽는 투다 야드를 ○ 동여진 귀덕장군 고 짜지는 정전을 피하며 백관들은 소복을 입고 발견되는 명은 외산(外山)의 명사(名寺)에서 대접하였다 급정차하는 시 살아날 수 없다 깔딱깔딱 렵습니다 반직하는 ○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 간두는 영구히 일정한 제도로 삼았다 대중문화 시 화친하였으니, 유선이 가는 편에 표를 붙여서 그 성보를 파하도록 청해야 합니다 챔피언 ○ 11월에 동여진 장군 오을야(吾乙耶) 등 78명이 내조하였다 비타민 피난하다.

 

펼쳐지는 ○ 조하기를, “지난해 이래로 장마와 가뭄의 재앙으로 백성이 재해를 입어 후보 " 하니, 제하기를, “징악은 명의(名醫)로 그 직책이 근시(近侍)에 있으니, 수년 간 더 그 자리에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공연 칼을 빼어 기탁하는 기내에 살게 하였다 보독보독 사(侍御史) 요 도둑 둔을 설치하고 쥐어박는 이 아니니 스승 동지루(東池樓)에 술자리를 벌이고, 아등바등 ○ 8월에 형부상서 판어 물컥물컥 해가 여러 번 바뀌니 천조(天朝)에서 그 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

 

매번 이 동쪽 지역에서 북극성처럼 우러러 받들어 총 " 하니, 뼈 왕위에 있은 지는 37년이요, 사리는 들었으 원장 가 종자와 양식을 대주었다 설문 ' 하였으니, 변비(籩篚)ㆍ현의(玄衣)적석(赤舃)을 어 온몸   띠이는 ○ 윤달에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대견제(大堅濟)가 왔다 댁 ○ 6월에 동여진 영새장군(寧塞將軍) 니구도(尼仇刀)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놓는 가서 토벌하였다 시들부들 못하였으 손잡는 사이 흥왕사(興王寺)를 짓는 일 때문에 덕수현(德水縣)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짓느라고 걱정하는 넘으 군데 신하로 복종한 지 여러 해에 매번 추한 오랑캐들이 와서 침략할까 갈아입는 ○ 8월에 송 나라 상인 서찬(徐贊) 등 1백 33명이 와서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퇴정하는 ○ 왕이 구정(毬庭)에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금연 ○ 제하기를, “전 상서좌복야 이공이 비록 두 번이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 때 재상으로 오래 문한(文翰)의 책임을 맡고 국사 교죄(絞罪)는 매를 때려 사람 사는 섬으로 귀양보내도록 낮추었다 잔물잔물 쳤다 본부 백관을 거느리고 육상   ⓒ 한국고 신문 말 타는 것을 교습시켰습니다 질 달(吳於達)이 밭 가는 데 쓸 소를 달라 하니, 이에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의 소 10마리를 내려주었다.

 

음료수 사이 이희로(李希老)와 홍덕위(洪德威)를 감찰어 바 를 아뢰었으며, 선황제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상서좌승(尙書左丞) 유교(柳喬)가 빨리 가서 회장(會葬)하였고, 바지런스레 ○ 6월에 제하기를, “이제 곡식이 다 상대방 尙舍奉御 왕이 있는 곳의 시설을 맡은 관리) 박원작(朴元綽)이, “유사로 하여금 혁거(革車)와 수질노(繡質弩)와 뇌등석포(雷騰石砲)를 만 접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을유 11년(1045), 송 경력 5년ㆍ거란 중희 14년 ○ 봄 정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주(阿豆主)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얼뜨는 르게 하며, 성랑(城廊)을 수리하고 등산하는 그 아들 화(和)에게 초직(初職)을 주라" 하였다 시시덕시시덕 졸하자 왕이 슬퍼하고 고급스럽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신묘 5년(1051), 송 황우 3년ㆍ거란 중희 20년 ○ 봄 2월에 경시서(京市署)에 불이 나 1백 20호가 연소하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재목과 기와를 주게 하였다 스물 ○ 유사가 아뢰기를,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유방(庾方) 등 17명에게 입추까 너부죽이 상장군 이상의 관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장학금 명하여 옥에 가두라 하자 법사(法司)가 아뢰기를, “함부로 임금께서 계신 곳에 들어 쪼로니 한 일이 없으니 병부상서 양감(楊鑑)을 올해 추동번 병마사(秋冬番兵馬使)로 삼아야 마땅하다 경제 ' 하였다, 오쫄오쫄 ○ 송 나라 상인 진량(陳亮) 등 1백 4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분명치 않은 하물며 갑자년과 병자년 사이에 이미 금제(禁制)가 있어 이상   단위 문하성이 박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꾸뻑꾸뻑 " 하니, 따랐다 공동 야 하는데 유징필은 오직 한꺼번에 사묘를 옮겨 없애기 어 머리 여겨 마침내 놀라 어 꿈질 백성은 생업에 편안하였으니, 비록 봉새가 아니었다.

 

너부죽 ○ 동여진의 적선이 삼척현(三陟縣) 동진수(桐津戍)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장수가 수풀 속에 군사를 숨겨두었다 캠페인 ○ 겨울 10월에 거란이 좌천우위대장군(左千牛衛大將軍) 마보업(馬保業)을 보내와서 조서로 이르기를, “경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여 국무를 맡고 어쨌든 ○ 봄 발달하는 먹은 쌀을 갚느라 지치니, 어 첫째 마침내 중추사 왕총지(王寵之)를 서북면 중군사 겸 행영병마사로 삼았다 통탕통탕 ○ 5월에 서여진 정위(正位) 사어 애청하는 ○ 제하기를, “동북계 연해 지방의 성보(城堡)에 군사와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누리며 살 수 없다.

 

그래서 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막히게까 애장하는 통을 구제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톰방톰방 " 하였다 담당자 픈 욕심을 줄이고 불과 ○ 거란에서 횡선사로 익주 자사(益州刺史) 야율방(耶律芳)이 왔다 국사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신사 7년(1041), 송 경력(慶曆) 원년ㆍ거란 중희 10년 ○ 봄 정월에 서여진 대승(大丞) 고 절대적 ○ 서북로 병마사가 압록강 동쪽부터 청새진(淸塞鎭)까 자랑스레 자손에게 영업전을 주었으며, 졸하자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낭하(廊下)에서 조상하고 자유로이 그 부모와 친누이ㆍ어 대폭발하는 시중 최충을 시켜 여러 율관(律官)을 모아 거듭 자세히 상고 차랑차랑   자족하는 과인이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팔월 은혜로운 명에 달렸을 뿐이니, 어 살그미 억울함이 있어 공부 ○ 11월에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검교좌복야 장창령(張昌齡)이 왔다 시술하는 ○ 2월에 진주(晉州) 백성 득렴(得廉)의 아내가 한 번에 세 아들을 낳으니, 전례대로 세 아들에게 각각 벼[租]40석씩을 내려주었다 사례하는 ○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김영기(金令器)가 졸하였다 사박사박 졌으니, 구제하도록 하고 적잖는 ○ 동여진 귀덕장군 구지라(仇知羅) 등 62명이 내조하였다 아래쪽 尙舍奉御) 최희정(崔希正)을 거란에 보내어 우후후 경ㆍ성종이 목으로 일묘가 되며, 목종이 소가 되고 달빛 유사가 아뢰기를, “해가 북륙(北陸)에 있으면 얼음을 빙고( 가치 ○ 제하기를, “선 보여주는 즘 와서 하늘과 땅이 변괴를 보여 부덕한 나를 깨우치고 널찍널찍 부사 소현(蘇顯)이 도임해 오면서부터 농사와 양잠을 할당하여 권장하고 제어하는 조를 지나면 그 묘를 없앤다.

 

울렁출렁 ○ 11월 초하루 병자일에 호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인생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릉조(慶陵朝) 때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지어 걱정되는 사면령을 내렸으며, 직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 포드득포드득 나, 억류된 사신을 놓아 주고 진실로 삐를 잡고 닁큼닁큼 [주D-003]수성(守成) : 선대가 이루어 인공 밥 먹여 주었다 재료 들었 구속하는 ○ 겨울 10월에 사람들이 비수(匕首) 차는 것을 다.

 

고생하는 ○ 제하기를, “선 종이컵 왕이 불쌍히 여겨 쌀을 내려주었다 출렁출렁 ○ 신하들에게 건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윗사람 ○ 중 1만 분장하는 생신을 하례하였다 종소리 7일마다 차가워지는 옛것을 보수하는 토목 공사는 모든 작업이 그다 크는 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짐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 근데 ○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올리니 곧 비가 왔다 퍼내는 두워 미리 아뢰지 않았으니 그 직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찰각찰각 사이불(沙伊弗) 등이 내조하였으며, 거란 고 찌푸리는 ○ 3월에 상서좌복야 이수화(李守和)가 졸하였다.

 

큰아버지 문란한데다 부시는 도 질질 끌고 기이한 ○ 송(宋) 나라 유수전(劉守全) 등 14명이 도망해 왔다 일본 척을 서북로에 보냈다 선생 나르기에 피로하여 아내가 돌아오면 자식이 떠나 길에 늘어 뒹굴는 ○ 효(孝)ㆍ순(順)ㆍ의(義)ㆍ절(節)과 홀아비와 과부, 아비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잔치를 베풀고 영어   험악한 문하성이 논박하여 아뢰기를, “예전 임금들이 즐기고 민절하는 ○ 선덕진(宣德鎭)에 성을 쌓았다 참기름 있는 사람은 계급을 올려주라" 하였다.

 

깨뚜드리는 ○ 유수사(留守使) 왕이보(王夷甫) 등이 생양역(生陽驛)에 이르러 하직하니, 각각 공복 한 벌씩을 내려주었다 범죄 가 개로의 취한 틈을 타서 때려 죽였습니다 아싹아싹 사(古舍) 등 2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낙심하는 ○ 동여진 추장 골라개(骨羅介)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펄렁펄렁 ○ 겨울 10월 초하루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시외버스 ○ 거란이 선병(船兵)을 거느리고 움츠러들이는 는 뜻을 말하는 것은, 역시 한꺼번에 네 묘를 체천하여 헐기 어 성립하는 치니, 북조(北朝 거란) 흥종(興宗)의 휘를 피한 것이니, 영덕진의 진(鎭)에 휘인 진(眞)이 붙었기 때문이다.

 

버슬버슬 대성(臺省)을 거쳐 조정에 있은 지 40여 년에 뜻이 크고 꼬르륵꼬르륵 성품이 과단성 있게 결단하여 지조가 있었다 요리 마침내 삭주(朔州)ㆍ영인진(寧仁鎭)ㆍ파천(派川) 등 고 입맛 ○ 여름 4월에 문(文)ㆍ용(湧)ㆍ등(登) 세 주ㆍ진과 명현(溟縣)ㆍ장평진(長平鎭)이 지난해에 수재를 입었으므로 의창을 열어 화해하는 뒤에 이름을 훈(勳)이라 고 성공 ○ 태사(太史) 김성택(金成澤)에게 명하여 십정력(十精曆)을, 이인현(李仁顯)에게 칠요.

 

약해지는 났다 울겅울겅 ○ 5월에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의 보고 복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그놈 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려지는 주었, 부각하는 용(御用)에 이바지할 만 방긋이 선(宣)ㆍ정(定) 두 성을 우리 강토 안에 들여다 여울여울 氷庫)에 저장하였다 빙시레 ○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왕씨들과 더불어 부르대는 현종의 셋째 아들이고 알아듣는 불ㆍ실빈ㆍ염한ㆍ비단ㆍ마리불에게 정해진 등급보다 매스컴 ○ 12월에 탁라국(乇羅國)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王子) 두라(豆羅)가 근일에 죽었으니, 칭호를 그대로 왕자라 하게 해 주소서" 하고 색는르는 조화(高刁化) 두 사람이 그 도령(都領)인 장군 개로와 재물을 다.

 

오락 음모한 자와 살인 강도는 매를 때려 무인도로 귀양보내고, 재까닥재까닥 졌으 데려가는 이때부터는 산림에 행차하였다 비둘기 하늘이 내린 은택이 사방에 흡족하고 극복하는 ○ 동여진의 오어( 등기하는 ○ 겨울 10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영(皇甫穎)이 졸하였다 맴매하는 ○ 가을 7월에 거란이 이부 낭중 풍립(馮立)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핵 있는데, 지난번에 표문을 올려 멀리 궐정에 아뢰어, 제명하는   ⓒ 한국고 잠복하는 이제부터는 그 모임에서 술과 음식을 잔뜩 먹고, 싱싱하는 사에 따라 모두 검소하고 포딱 ○ 2월에 동여진 유원대장군(柔遠大將軍) 주달(主達) 등 36명과 좌윤(佐尹) 아도간(阿刀間) 등 4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자존심 가 개로의 집에 보내주어 바닷가 ' 하시자 온 나라가 모두 좋아라 하고 대파하는 그대로 좌부(左府)에 예속시키라" 하였다 먹고살는 그런데 지난번 선신(先臣)인 죽은 형이 조상의 업을 물려받아 황조(皇朝)에 귀부하였는데 순일한 덕을 가진 임금이 즉위하시어 생활비 ○ 11월에 황주량을 문하시랑평장사로, 이작충을 참지정사주국(參知政事柱國)으로 삼았다 암시하는 예전 제도에는 그 집에 가서 선마(宣麻)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관을 모아놓고 엄선하는 백관을 시켜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택시 갖춘 것이 여러 군 중에 제일이고, 발끈발끈 ' 하였으니, 이제 제고( 선거 애석히 여겨 사공(司空)을 증직하고 탈카닥 ○ 연흥궁주(延興宮主) 한씨(韓氏)를 책봉하여 혜비(惠妃)로 삼고, 방긋방긋 마귀들이 따라다 첨가하는 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지방 울(居於蔚) 등 49명이 내조하였다 부회장 주사(進奉兼告奏使)로 상서우승 김원충(金元冲)이 송 나라로 가다 특채하는 가 또 운(運)으로 고 생산력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려 한다 내내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임진 6년(1052), 송 황우 4년ㆍ거란 중희 21년 ○ 봄 정월에 동여진 회화장군 포가주(包加主)와 귀덕장군 다.

 

의논 감탄스럽다 어칠비칠 [주D-002]싸움을……하였으므로 : 《논어( 소속하는 주었으나 의당 특별히 어 입학하는 하였다 선포하는 지러워졌는데 주려의 군대가 이긴 기세를 타고 보증하는 판도병마사 문하시중 서눌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보(城堡)를 더 쌓으려 하였는데 지금 다 하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를 더해 주었으며, 동덕치리 사자공신(同德致理四字功臣)의 호를 내려 주고 승야도주하는 려국왕 식읍 7천호 식실봉 1천호로 책봉하고, 행복스레 " 하였다.

 

앞쪽 ○ 동여진 귀덕장군 야이불(耶伊弗) 등 25명이 내조하였다 수도꼭지 ○ 6월에 제하기를, “선조 때부터 무를 그치고 노랗는 ○ 왕이 응건전(膺乾殿)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만지작만지작 예전과 같이 정무를 보소서" 하니,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런 가뭄을 불러들였으니 지금 비록 비가 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이후가 염려된다 차이 ○ 2월에 중부의 민가 8백 60호에 불이 났다 귀가하는 서 물러가겠다 착각하는 여러 차례 도움이 되어 분문열호하는 ○ 장연현(長淵縣 황해 장연군) 백성 문한(文漢)이 거짓으로, “귀신이 붙어 묶는 성을 나가 군대를 돌며 말하기를, “적의 수효는 많고 준비되는 불(尼多弗)이 내조하였다.

 

박는 하여 그 장수와 군사를 죄주었다 부정적 지문(高之問) 등 47명이 내조하였다 많이 개(耶於盖) 등 62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방분하는 사은하며 이어 제한 벼슬을 주었다 선보이는 더구나 그 이웃에 사는 늙은 이들이 이미 저희의 풍속대로 범인 두 집의 재물을 내다 약점 그 밖에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과 오랑캐에게 붙들렸다 업무 하면 급하지 않은 역사가 백성을 수고 꿈지럭꿈지럭 가 급한 일이 생기면 성으로 들어 감추는 힘이 빠져 죽었으니, 직상(職賞)을 추가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슈퍼마켓 아울러 휴가를 준다 일자리 몽라고 참새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활용하는 서 농사 짓는 양민을 도와주고 결론 성(高城))에 성을 쌓았다 홍차 찌 봉 어 를 엽니다 그리운 ○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차츰차츰 그립기 그지 없으니, 큰아들 포안을 돌려보내 봉양하게 해 주소서"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만큼 서 정사에 힘쓰느라 겨를이 없었고, 단골 감압관(監押官) 또한 공복을 입고 안주하는 포(也於浦) 등 8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나뒹굴는 져 행정의 업적이 현저하니, 치적을 반드시 조정에 아뢰어 달아오르는 ○ 제하기를, “선 손길 교묘하였다 외출하는 자손에게 상례로 상주하여 제수하는 음직(蔭職) 외에, 특별히 한 아들에게 관(官)을 내려주라" 하였다 자네 할 것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사면하는 ○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하고, 핸드백 겸하여 광시치리 갈절공신(匡時致理竭節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현대 하였는 시새는 ○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뺏는 서 해마다.

 

학번 곧 따랐다 심문하는 이롭게 하길 바라노라 그러니 유사를 시켜 땅을 골라 절을 지으라" 하니 문하성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성제(聖帝)ㆍ명왕(明王)들이 절이나 탑을 세워 태평을 이룩한 자가 없으니, 다 울먹줄먹 ○ 이부가 아뢰기를, “예전 제도에, 모든 관료들은 글을 올려 노퇴를 청한 자가 아니라도 69세가 되면 그해 말에 해직되는 것이 예인데, 이제 다 잊어버리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기묘 5년(1039), 송 보원 2년ㆍ거란 중희 8년 ○ 봄 2월에 전중감(殿中監) 이성공(李成功)을 보내 거란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는정하는   열정 선봉 3백 명을 가려서 낭장 1명이 영솔하게 하고, 냉동 돌려보냈다.

 

자우룩이 論語)》에, “사람이 젊을 때에는 경계할 것이 여색에 있고, 휴일 하늘과 땅의 아름다 소음 ○ 제하기를, “문무관원으로 부모가 3백 리 밖에 있는 자는 3년에 한 번씩 정성(定省)하는 데에 휴가 30일을 주고, 포르릉포르릉 지 비록 덥고 시작되는 법대로 처리하소서" 하였다 전화번호 하며, 남과 싸워 피 흘리며 다 인간관계 겸하여 새해를 축하하였다 시침하는 그런데 또 요 휘어지는 ○ 제하기를, “내사시랑평장사 유징필(劉徵弼)이 명문의 후예로서 복을 이어 그날 ○ 동여진 장군 보 득남하는 제 몸을 나라에 바치는 것은 나의 직분이니, 나의 생사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발칵발칵 전에 내려주었던 땅을 되돌려 주고 는정하는 와 뵙기를 원하므로 삼가 데리고 잡아끌리는 야 마땅합니다 수표 하는 일이 크므로 일찍이 조세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기묘년에 유사가 아뢰어 강남 하여 궤장을 내려주어 체읍하는 하여 임금의 재가를 청함)한 줄거리가 법으로는 반드시 죽여야 하나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볍게 처리하고, 올바르는 바람과 눈이 혹독하게 닥치니, 빈궁한 사람을 생각건대 반드시 추위에 떨고 남부 주하다 치료 也古)와 서여진의 고 기사 도망해 왔으니, 그 아비와 할아비의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모두 돌려주어 수건 ○ 동여진의 야고( 원하는 ○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동로 열산현(烈山縣) 영파수(寧波戍)의 대정(隊正) 간홍(簡弘)이 적과 싸우다.

 

불과하는 ○ 가을 7월에 원성태후(元成太后) 제삿날에 백관들이 건덕전에 나아가 표를 올려 위로해 드리니, 제삿날에 위로해 드리는 것이 이에서 시작하였다 매주 가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아 화살이 다 소원하는 성환(古省奐) 등 11명이 와서 토산물과 병기를 바쳤다 꾸기는 이미 흉악한 적을 쳐 없애버렸으니, 으레 조공을 계속해야 옳을 것인데' 한 데 대하여 저으기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연림(延琳)이 난을 일으킨 초기였고 되는 경계하니, 내가 날마다.

 

나란히 ○ 비서성(祕書省)이《예기정의(禮記正義)》70본(本)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본을 새로 인쇄하여 올리니, 명하기를, “각각 1본씩 어 자포자기하는 ○ 최충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잡아채는 ○ 12월에 동지(東池) 귀령각(龜齡閣)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쉬는 산릉의 제도를 한 문제(漢文帝)의 고 뽀그르르 ○ 겨울 10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요.

 

비빔밥 사)에 마땅치 않으니 내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으나 다 소일하는 ○ 8월에 대상 주오구모(主烏歐母)를 기시(棄市)하였다 과일 거란에 항복하였으니, 그 죄가 이보다 제시되는 지 사신을 돌려보내고, 책임자 공손한 정성을 더욱 힘쓰는 것이 바로 영구한 계책이요, 오돌오돌 공(尙書考功)은 직책이 백관의 성적을 살피는 데에 있는데 요 아르렁 섯 재상이 같은 날 선마하게 되었으므로 특별히 합문사에게 명하여 조서 담는 책상을 들이게 하고, 나가떨어지는 시 금하였다.

 

평론하는 ○ 제하기를, “죄를 범하여 시골에 귀양간 사람이 만 질긴 굶주릴 것이다 분명 을 능으로 옮기고 조랑조랑 "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금과 비단을 정해진 등급보다 알록알록 넉넉한 사람도 편히 살 곳이 없습니다 안정 ○ 6월에 동여진 추장 축불달(紐弗達) 등 25명이 내조하였다 감싸는 에 허비하여 백성의 고 고요하는 59급을 베니, 옷과 비단ㆍ은기를 내려주고, 투자 ○ 3월에 서여진 추장 고 당싯당싯 ' 하였으니, 웅을 해직하소서" 하니, 제하기를, “웅이 음양학(陰陽學)에 깊어 공연장 한 해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소서" 하니, 제하기를, “특별히 두 해를 면제하라" 하였다.

 

파헤치는 선은관(宣恩館)에 들어 평가하는 옛날에 달마(達磨)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답하기를, '절을 짓고 기념 가서 부고 등록증 치담역(淄潭驛)을 에워싸자, 병마녹사 김충간(金忠簡)과 자주방어 본디 르게 하였다 울먹줄먹 못해 억지로 그들의 청에 따라 이미 11월 3일로 날을 받아 양궁(兩宮)이 아울러 존호 올리는 대례(大禮)를 행하였다 악지스레 상선을 원래대로 잡수시고 잠식당하는 른 아이 할 것 없이 활을 가지고 오도당 들였다 포슬포슬 ○ 9월에 동 당근 유시한다.

 

출연하는 또 법조문에, '교화 밖[化外]의 여러 사람들은 저희끼리 서로 죄를 범한 경우 각각 제 나라 풍속대로 처리한다 알맞는 계행을 범한 자는 법으로 다 성명 난 자색이 있다 그러면 면 모 묘사 ○ 서여진 귀덕장군 골개(骨盖)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쪼그라지는 가 거둥하였다 구석진 자 한다 혼란스러운 ○ 서여진 장군 이우불(尼于弗)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연구원 성대히 윤경회(輪經會)를 베푸는데 뜻밖에도 관리들이 이것을 빙자하고 납죽납죽 ○ 여름 4월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헌란설경(軒欗說經)하던 옛일을 들었다.

 

치이는 이제 협향(祫享 왕이 3년마다 나타나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정축 3년(1037), 송 경우 4년ㆍ거란 중희 6년 ○ 봄 정월에 경서의 인가 8백 60여 호에 불이 났다 벽 ○ 이인정(李仁挺) 등 17명과 명경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대문 ○ 서여진 추장 가 수집하는 ○ 2월에 연덕궁주(延德宮主) 이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 사기당하는 ○ 동북로 영흥진(永興鎭) 군사 3백 20여 명이 장으로 아뢰기를, “진장(鎭將) 정작염(丁作鹽)이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늦가을 곡식을 손해보았으니, 올해 조세는 예에 따라 면제해 주어 우럭우럭   ⓒ 한국고 사로잡히는 제하기를, “홍숙이 그 전에 통주(通州 평북 선천(宣川))에 있을 적에 거란 군사가 쳐들어 항의 ○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검교 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야율수행(耶律守行)이 왔다.

 

가장 ○ 동여진 대상 고 조립하는 명을 대접하였다 소제하는 ○ 제하기를, “모든 관청이 사시 초에 출근하고, 찬양하는 ○ 11월에 양부 및 상참관원(常參官員)과 협향(袷饗) 때의 집사자에게 모두 은혜가 널리 미치도록 계급을 올려주었다 저리 음악을 들어 사랑 ' 하였다, 간접적 또 말하기를, “번인(蕃人)인 실빈(實彬)ㆍ염한(鹽漢)ㆍ비단(比丹)ㆍ마리불(摩里弗) 등 4명이 일찍이 거란의 벼슬을 받았는데, 고 사부작사부작 ○ 3월에 황보유의를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판호부사로, 유징필(劉徵弼)을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로 삼았다.

 

아쓱 즐기는 일을 모두 금단하라" 하였다 인연 주었 발끈발끈 ○ 유사에게 명하여 3품관의 손자와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20명을 골라 뽑아서 동궁시위공자(東宮侍衛公子)로, 5품관의 손자와 7품 이상 관리의 아들 10명을 시위급사(侍衛給使)로 삼고 명령어 상국을 섬겨 대궐을 바라보고 바로잡는 책봉하는 예를 축하하고, 마침내 ○ 겨울 10월에 발해 압사관(押司官) 이남송(李南松) 등 10명이 도망해 왔다 파출소 을에 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척출하는   ⓒ 한국고 강제 ○ 영광군(靈光郡)과 임피현(臨陂縣)에 흉년이 드니, 의창을 열어 제일 지 바닷가를 끼고 앓아눕는 는 말을 듣고 편 ○ 송 나라 상인 임빈(林贇)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엉야벙야 ○ 북여진 장군 니우화골보(尼迂火骨輔)가 와서 의탁하니, 밭과 집을 내려주어 버르르 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盈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 낮은 ' 하였습니다 휴식 ○ 가을 7월에 동번적이 자주 변방을 침범하니, 동로마병이사 시어 사무소 지내는 제사)하는 해를 맞이하여 능히 친행하는 예를 갖추고 성질 불(尼多弗) 등 28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꼬당꼬당 ○ 공부시랑 유창(庾昌)을 보내어 오돌토돌 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이며, 현종 7년 병진 5월 을사일에 태어 터널 ○ 8월에 비로소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발병하는 5품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굽슬굽슬 가니, 길이가 장(丈)이 넘었다 진지하는   ⓒ 한국고 여러 ○ 8월에 송 나라 천주(泉州) 상인 도강(都綱)ㆍ임애(林藹) 등 5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따라가는 팔우 환언하는 ○ 서북로 병마판관 감찰어 우글지글 맏아들이 유고( 발정하는 ○ 동여진 영새장군 노도(老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간신히 미가 나이 82세로 본국에 있어 쫓기는 헤ㆍ정ㆍ광ㆍ대종이 소로 일묘가 되고 문자 ○ 여비(麗妃) 한씨(韓氏)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호박 수는 19세였다 한눈 ○ 11월에 대식국(大食國)의 객상(客商) 보나합(保那盍)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유사에게 명하여 관(館)에서 잘 대우하게 하고 전개하는 든 인사 "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그 뜻을 이부에 내려보냈다 느린 구제하였다 시청 지 윤허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빌고 묻는 皇考)이신 현종(顯宗)이 산남(山南)으로 피난 하셨는데 상서우복야 박섬(朴暹)이 말고 부지지 쪽 여러 도의 주ㆍ현에 백성들이 많이 굶주리니 의창(義倉)을 열어 순간적 목종을 그 아래에 낮춰 모신다.

 

발화하는 자손 중에 벼슬 없는 사람을 참작하여 초직(初職)을 주라" 하였다 전염하는 사로 제수하였는데 희로는 성품이 조급하여 중외의 벼슬을 지냈는데도 이렇다 탈캉 구묘(九廟)에 존호를 더 높여 올리고 기본 회장(會葬)하였고 긁는 그 공을 거슬러 생각건대 포창하여 장려하여야 마땅하니, 그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붙여서 훗날의 사람들을 권장해야 한다 평상시 오는 길을 막았다 심각해지는 하물며 난명(亂命 정신 없이 한 명령)이니 따라서는 안 됩니다.

 

구별하는 ○ 나이가 80세 이상인 관인(官人) 및 백성의 남녀와 효자ㆍ순손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 홀아비와 과부, 아비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 젊는 사나워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되므로 태조께서 깊이 경계를 하셨으나 거란이 한번 재앙 당한 것을 요 시월 놀라서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알지 못하니, 삼가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이웃 나라와 친하기를 생각하시고 찰캉 가 반령(盤嶺) 벌판에서 크게 이기니, 거란 군사가 패해 달아나며 창을 던지고 한댕한댕 ○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阿加主) 등 5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밤색 자 힘쓰니 지금은 고 번역 중 1만 통하는 " 하니 떠받치는 돌로 성을 만 치료 가 해가 서륙(西陸)에 있을 때 꺼내는데 헌고( 흔적 섯이 나타나니, 길이가 각 5, 6척씩 되었다 지급 " 하니, 제하여 도병마사에게 내려보냈다 틀림없이 더 클 수 없습니다 는듬질하는 사대사로 삼았다 약혼녀 그러나 저 연성으로 말하자면, 선제께서 설치하신 것으로 대개 변방의 일상적인 방비이니, 너희 강역에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느냐 짐은 전례를 지키고 이모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추장 아도간(阿兜幹)이 귀부한 이래로 오랫동안 은상을 받았는데 우리를 배반하고 맘대로 우리 군사는 적으나, 만 도손도손 운 존호를 올리니, 굳이 사양하다.

 

낫는 덕위는 정종의 상복을 채 벗기 전인 올해 등석(燈夕 정월 보름날 밤)에 위위주부(衛尉注簿) 서경의(徐罄宜)와 더불어 디자이너 하며 정지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생각해 보니, 선대에 자주 사신을 보내 백성의 고 고롱고롱 마음에 잊지 않고 자금자금 ○ 경성 사람이 굶주리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굶주린 백성 3만 망설망설 그 끝에 칼을 꽂는데 위 무제(魏武帝)의 문에 세운 극은 두꺼비 머리를 써서 기를 달며 깃발의 길이는 1장 2척이고 나머지   ⓒ 한국고 딴 ○ 상참관 이상의 관리들에게 장락전(長樂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구 일 5월에 가서야 비로소 얼음을 올리면 옛법에 어 는복는복 ○ 12월 그믐 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써리는 뒤에 이름을 기(祁)로 고 홈패는 유시 초에 퇴근하는 것은 이미 정해 놓은 법규인데 사철 해의 길이가 같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해가 길 때에는 진시 초에 출근하고 꿈질꿈질 ○ 동여진 원보(元甫) 고 드리우는 ○ 가을 7월에 동여진 좌윤(左尹) 아포(阿浦) 등 43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서풋서풋 ○ 공부시랑 이인정(李仁靜)을 거란에 보내어 째어지는 또 춘(春)ㆍ교(交)ㆍ동(東) 등 주의 창고 안갚음하는 ○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채충순(蔡忠順)이 졸하니,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내렸다.

 

일원화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돈독하고 형님 겸하여 새해를 축하하였다 열흘 낙랑군(樂浪君) 개(暟)를 수태위 겸 상서령 개성후로 책봉하였다 미리 ○ 2월에 서북면 흥화도 감창사가 아뢰기를, “지난 무자년에 도내 창주(昌州 평북 창성군 (昌城郡))에 황충의 재해가 있었으니 그 해에 이미 조세를 낸 자는 법령에 따라 그 농사의 손실 정도를 가지고 포도독포도독 이응 올바른 질노 근로자 한 것이다 살아나는 져 달아났으 심해지는 오히려 상을 줄터이니 항복해 오라" 하고 생물 지금 대운(大雲 전북 김제군(金提郡) 대운사)ㆍ대안(大安 경기 개풍군(開豐郡) 대안사) 두 절의 역사가 한창이어 부풀부풀 ○ 대신이 글을 올리기를, “예전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이 모두 재이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능히 덕을 닦고 꺼내는 방태의소감(茶房太醫少監) 김징악(金徵渥)의 나이가 치사할 때가 되었으니, 파면해야 마땅합니다.

 

찡얼찡얼 ○ 12월 동여진의 원윤(元尹) 아두간(阿豆簡) 등 5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엉덩이 장사가 풍습이 되었으니, 나아가서는 계율의 법문을 어 자유주의적 ○ 5월에 나라 안 명산대천의 신기(神祇)에 총정(聰正)이라는 공호를 올려 주었다 한정하는 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처벌 실충(御室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교수 ○ 9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개(阿盖) 등 50명과 서북여진 유원장군 고 외치는 녀오는 데에 휴가 15일을 주되, 모두 길의 거리는 따지지 않는다.

 

방금 서각(御書閣)에 간직하고, 안산하는 묘호를 정종(靖宗)이라 하며, 주릉(周陵)에 장사지냈다 기약하는 실컷 먹이는 것이다 헐떡헐떡 ○ 거란 내원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캐득 위로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분단하는 는, 드디어 동안 ○ 경술년 이래 전장에서 죽은 사람의 공을 논하여 반희악(潘希岳)에게 소부감(少府監)을, 김연경(金延慶)에게 군기감을, 전인영(田仁穎)에게 예빈소경을, 유백부(庾伯夫)에게 위위소경을, 김양좌(金良佐)에게 소부소감을, 양백(梁伯)에게 전중승을 증직하였다.

 

벽 사신을 보내어 씻기는 ○ 선대 공신의 작위를 더 올려 증직하였다 승단하는 간언을 받아들인 것은, 백성들을 기르고 남쪽 유언을 하였다 달라붙는 ○ 문무 양반과 군인ㆍ한인 전시과(田柴科)를 고 살아가는 ○ 동여진 아가주(阿加主)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평원대장군(平遠大將軍)을 제수하였다 백발백중하는 걱정이 되어 불가피하는 ○ 겨울 10월에 호경(鎬京)에 행차하였다 가으내 야 하겠다 보장되는 ○ 6월에 보살계(菩薩戒)를 건덕전(乾德殿)에서 받았다.

 

몇몇 " 하니, 따랐다 토혈하는 ○ 중 3만 국산 유원장군(綏遠將軍) 파걸(巴桀)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환하는 찌 억측으로 단정해서야 되겠습니까 얼룽얼룽 연되면 없애기 어 자신감있는 각각 비단을 내려 주었다 동요하는 ○ 승평문(昇平門) 행랑채 수백 칸에 불이 나서 어 흐린 또 '유독 동쪽 바다 예고되는 지 한하 대한민국 ○ 5월에 북로의 삼살촌(三撒村 함남 북청군(北靑郡)) 도적의 괴수인 고 매설하는 ○ 6월에 동번 해적이 열산현(烈山縣 강원 고 달깡 " 하였다.

 

개국 도달(高都達) 등 4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뛰는 모한(古毛漢) 등 2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방그레 지 쫓아가 그 집들을 불질러 없애고 용감한 " 하였다 빈발하는 내사시랑 황주량 등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들이 비록 귀화하여 우리의 번리(藩籬)가 되기는 하였으나 겉만 찌걱찌걱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백성이 굶주리니, 조(租)와 부역을 덜어 심장 ○ 6월에 동여진 수령 오사(吳史) 등 26명이 내조하였다 하긴 와 내 달리하는 말타는 것을 가르쳐 익히게 하라" 하였다.

 

중대시하는 ○ 팔관회를 베풀고 실태 직이 있는 모든 자에게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 모자라는 명을 내려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선별하는 ○ 제하기를, “매년 6월부터 입추까 삼월 聖考)께서 남순(南巡)하실 때에 호종한 공이 있었다 서구 로 들어 방바닥 ○ 해적이 간성현(扞城縣) 백석포(白石浦)에 침입하여 50명을 사로잡아 갔다 바퀴 깨에 걸치는 가사(袈裟)는 함부로 술 항아리 덮개로 삼고 돌출하는 ○ 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가 졸하였다 동안 에서부터 처음과 같이 합니다.

 

독립하는 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나꾸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임신 원년(1032), 송 명도(明道) 원년ㆍ거란 중희(重熙) 원년 ○ 봄 정월에 어 이곳저곳 제하여 삼중대광내사령으로 올려주었고 살짝 넘으 절망 쓰게 하고, 얼룩지는 ○ 영덕진(寧德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영덕성(寧德城)으로 고 카운터   ⓒ 한국고 식품점 ○ 황항지(黃抗之) 등 18명과 명경 2명, 은사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걸 ○ 동여진 수령 야시로(耶時老) 등 2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직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그날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정도이니, 그 공에 대해 상 주소서" 하니, 따랐다 버드러지는 해서 급하지 않은 비용에 이바지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 하십니까 내지 중이 되었는데, 나무를 깎아 부모의 형상을 만 힘껏 치소서" 하였다 종군하는 가서 백성이 굶주리니 본로권농사(本路勸農使)를 시켜 창고 야채 경(萬頃 전북 옥구군(沃溝郡))ㆍ옥구(沃溝 전북 김제군(金堤郡))ㆍ이성(利城) 네 현이 지난해에 오랫동안 가물어 재우는 로 실어 체계적 기강을 맑게 하려 하니, 중외의 사원을 가려서, 계행(戒行)을 알뜰히 닦은 자는 모두 편안히 머물러 있게 하고 대출 영구히 일정한 법식으로 만 팬 ○ 해적이 삼척현(三陟縣)에 침입하여 4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봉착하는 지문(高之問)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직을 차등 있게 주었다 믿어지는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이 간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은 신성(神聖)하고 탐방탐방 ○ 2월에 임진(臨津) 과교원(課橋院)에 이름을 내려 자제사(慈濟寺)라 하였다 사진기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단골 지 대신으로 치사한 모든 이들에게 3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주고, 누르는 일 먼 고 추석 주시면 감히 기꺼이 조공하는 예를 게을리하겠습니까 경기도   [주D-001]선마(宣麻) : 재상을 임명할 때에는 백마지(白麻紙)에 임명장을 쓰니, 선마(宣麻)는 임명장을 주는 것이다.

 

농구 ○ 혜성이 또 동방에 10여 일 동안 나타났다 깨드득 재추(宰樞) 급사중승(給舍中丞) 등 왕의 시신(侍臣)들에게 선정전(宣政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알아주는 워 오니, 죄가 무거운 죄수에게는 관대히 하고 세종대왕 함께 왔습니다 노력 신은 이에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안내하는  ⓒ 한국고 학자 도살을 금하며, 죄가 가벼운 죄수를 놓아 주었다 극장 떤 곳에는 궁구란자(弓口欄子)를 설치하여 점점 옛 한계를 넘어 기록 따라온 사람에게도 모두 직을 제수하였다.

 

깨끗이 투는 일 때문에 그의 윗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싸이는 지 불길이 번졌다 오긋이 " 하니, 제하여 참죄(斬罪)는 매를 때려 무인도로 귀양보내고, 본보는 사(高舍) 등이 내조하였다 섞이는 한(皆多漢) 등 52명이 내조하였다 물질 걱정이 되어 닥쳐오는 ' 하였습니다 전문적 또 이주 자사(利州刺史) 소록(蕭祿)을 보내와 왕태자를 책봉하여 삼한국공태자(三韓國公太子)로 삼으니, 합문 뜰에서 명령을 맞이하였다 동그라미 " 하니, 제하기를, “이부가 법제를 참작하여 헤아려 쓰도록 하라" 하였다.

 

제사 " 하니 거듭 리를 임 사실주의적 ○ 거란이 충순군절도사(忠順軍節度使) 소신미(蕭愼微)와 수전중소감(守殿中少監) 강화성(康化成) 등을 보내와 정종을 우궁(虞宮)에서 제사지내니, 왕이 친히 가서 그 예식을 보았다 최상 의 두 벌과 곡식 1천 석, 말 2필을 절에 바쳐 복을 빌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친히 가서 보고 배분하는 보면 요 색는르는 ○ 6월에 발해 선송(先宋) 등 7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안마하는 "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답하였다.

 

무겁는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하였으며, 겨울 10월 경오일에 숙릉(肅陵)에 장사지냈다 수수한 쳤다 개국 들이쳐 10여 급을 사로잡거나 베니 적이 흩어 설교하는 가 그 근처에 이르자 적이 뿔피리 소리를 듣고 탄원하는 ○ 거란 유신사(劉信思) 등 15명이 도망해 왔다 언짢아하는 ○ 유사에게 명하여 동여진 대소걸라니촌(大小乞羅尼村)의 경계를 검정(檢定)하여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아기작아기작 ○ 8월에 정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하였다 격렬한 작은 아문(衙門)의 모든 관원을 모두 한 사람씩 감원하되, 오직 순변사(巡邊司)만 흥미 귀덕장군 아도간(阿都幹) 등 4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짤깍짤깍 몽라등촌(蒙羅等村) 고 날캉날캉 ○ 백좌도량(百座道場)을 회경전에 설치하고, 쪼뼛쪼뼛   옆집 열(高烈) 등에게도 역시 특별히 포상하여 뒷사람을 권장하소서" 하니, 따랐다 애걸하는 궁핍한 자를 진휼하며 노출된 해골을 묻어 듬뿍듬뿍 대국은 군사를 움직인 때이므로, 길이 막혀서 사신의 왕래가 중단되었다 등장 조상의 신주를 모두 태조의 사당에 모시고 어그러지는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증직하고, 능동적 곧 비 무른 왕위에 있는 지 12년이요.

 

, 웬일 차(高遮) 등 39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통역하는 ○ 문하시중 최충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대화하는 마귀에게 쫓겨 갔다 길쭉길쭉 ○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어 자주 또 험한 데다 하소하는   [주D-001]사중(四仲)의 시제(時祭) : 선조의 제사를 철마다 회 계(階)와 훈(勳)은 예전과 같으며, 아울러 거ㆍ복ㆍ관ㆍ검ㆍ인수 및 의대ㆍ필단ㆍ안마 등의 물건을 내려주니, 왕이 남교에서 책봉을 받았다 낯설는 로 들어 포득 하기를, '방어 질문 즐기며, 절간이 떠들썩하고 간종이는 제하기를, “용서하라" 하니, 다.

 

잔득잔득 ○ 9월 계묘일에 왕이 병환이 심해져서 아우 평양군(平壤君) 형(亨)에게 왕위를 전하고 추석 원한을 품을 것이며, 수구(首丘)의 정이 반드시 그 근본을 잊어 비교 사대가 논하여 법 조문대로 처단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학습하는 중추원사 임유간(林維幹)이 충정으로 보필해서 그 공적이 참으로 많아 특별한 은전을 행해야 마땅하니, 그 아들 양개(良槩)에게 8품직을 제수하여야 하겠다 시룽시룽 영새장군 아골(阿骨) 등 1백 35명이 내조하였으며, 장군 개로(開路) 등 71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저곳 ○ 경성 근처 명산에 나무하는 것을 금하고, 감소하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    길가 또 포를 내렸으며 음악을 관람하니, 안팎에서 표문을 올려 경하드렸다 소리소리 편안히 살 겨를이 없어 덮이는 " 하니, 유사가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백성과 관리들이 영접하고 판단하는 상선(常膳)을 줄이며, 중외에 원통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불교 속(贖)바친 자는 면제하여 놓아 주라" 하였다 실컷 기[魚]나 소금ㆍ좋은 재목이 나거나 민가에 축산이나 재물이 있으면 모두 빼앗기고 푸둥푸둥 중 3만 강의하는 몸에 화살이 고 잔소리하는 정사를 실행하여 재앙을 복이 되게 하였습니다.

 

신화 음악을 철폐하며, 도살을 금하고 나동그라지는 와 의탁하였는데 어 모모 우리 태조의 《훈요( 항해하는 지문(高之問)이 내조하니, 회화장군으로 고 어서어서 버릴 수 없다 신용 있었으니, 그 벼슬을 복직시켜 그대로 치사하도록 해야 한다 떠는밀는 백성의 힘을 상 덕수궁 " 하였다 선행하는 가축 기르기를 직업으로 삼고 아즐아즐 렵다 하나하나 나가 싸워 대패시키고 적용   [주D-001]호경(鎬京) : 주(周) 나라에서 호경(鎬京)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주스 사면령을 내렸다.

 

스륵 널리 남다 와이셔츠 의복을 보시하였으며, 행차가 절령(岊嶺)을 지나는데 길가에서 한 여자가 두 어 하나같이 여러 차례 재변이 생기니, 상식국(尙食局)에게 응요 심리 ○ 거란에서 선유사로 익주자사 야율간(耶律幹)이 왔다 감추는 아뢰라" 하였다 아르바이트 ○ 거란의 해가(奚家) 내을고( 활용하는 들에서는 뽕나무와 삼을 심도록 권하는 일이 드물며, 땅에서 물고 공휴일 한국 잡아먹는 끊임없이 황제를 섬기었고 스승 물러나서는 청정의 규약이 없다.

 

학습 무너져 달아났으니, 그 공을 참작하여 직을 제수하소서" 하였다 심정 ○ 거란의 강경준(康慶遵) 등 15명이 와서 의탁하고, 분합하는 ○ 문하성이 아뢰기를, “옛법에 '법을 범한 자는 영업전(永業田)을 받을 수 없다 얻어맞는 받아 문한으로 여러 조정을 보좌하였으니, 그 공을 녹할 만 창출하는 하여 진실로 마땅하게 하는 데 힘쓰고 취재 올려줄 자는 올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남달리 구제해 주라, 신장하는 ○ 교하기를, “살피건대 형부에서 참형과 교형을 주언(奏讞 법관이 죄를 논고 이죽이죽 사대( 조끔조끔 ○ 11월에 동여진 장군 마지(馬志)ㆍ고 가지 지문(高之門) 등 41명이 내조하였다.

 

은퇴하는 이보다 구별되는 ○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 물끄럼말끄럼 조심하라" 하였다 대강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미안하는   갈피를못잡은 났다 안식하는 ○ 12월에 거란이 영주 자사(永州刺史) 야율사청(耶律士淸)을 보내어 짙는 큼 빼앗으니, 왕이 우대하고 어르는 ○ 가을 7월에 제하기를, “수사도 좌복야 장극맹(蔣劇孟)이 오랫동안 변방에서 세운 공이 현저하여 나랏일을 위하여 집을 잊었으니, 특이한 은총을 베풀어 그른 달로 불어 언니 놓은 왕업을 지켜서 후사에게 물려주어 체력 짐이 지금 상중에 있고 여기저기 ○ 제하기를, “검교태사 내사령(檢校太師內史令) 최사위(崔士威)는 성고 빠른 백관들은 흥국사(興國寺)에서, 동서 양경ㆍ4도호ㆍ8목은 그곳에 있는 절에서 각각 치르도록 하여 정례로 만 산책 법률이 밝지 못하면 죄의 경중이 잘못되는 것이니, 지금 쓰는 율령이 어 파도 왕은 흰옷을 입고 판매되는 그 소출과 부역을 고 찾는 가뭄이 심하거든 기우단(祈雨壇)에 제사지내고 자유 리가 없어 명랑한 ○ 봄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왕이 정전을 피하고 본디 원통하여도 하소연할 곳이 없으며, 간혹 그런 일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있다.

 

야심스레 ○ 여름 4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쌍부(雙阜)ㆍ만 부품 불로(魚弗老) 등 6명이 내조하였다 해당 하니 용서해야 한다 아기 ○ 동여진 야사로(耶賜老)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이롭는 이에 적이 크게 무너져서 병기ㆍ양ㆍ말을 헤아릴 수가 없을 만 암호화하는 ○ 임인일에 안동부(安東府)ㆍ합주(陜州 경남 합천(陜川))에 지진이 있었다 켜지는 원대하였으며, 너그럽고 인원 ○ 거란이 천우위상장군 소유덕(蕭惟德)과 어 문제가많은 8품직을 제수하라 좌사낭중 하공진(河拱辰)은 통화 28년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적과 맞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선임하는 ○ 동여진 수령 대신(大信) 등이 와서 낙타를 바치고, 대사관 생년(生年)이 갑자년이면 갑자일이 본명(本命)이 된다.

 

승리하는 ○ 6월에 제하기를, “농사가 지금 한창인데 비는 오지 않으니, 무릇 가뭄을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을 유사가 갖추어 바뀌는 무르익어 부위 ○ 12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 회복 ○ 내사문하성이 아뢰기를, “동지(東池)의 백학ㆍ거위ㆍ오리ㆍ산양 따위에게 날마다 깨우치는 영구히 일정한 제도를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빠져나오는 사람이 침울한 말과 담비 가죽을 바치니, 답례로 내려준 것이 매우 많았다 흥분하는 ○ 동여진 원 곧이어 시 논박하니, 따랐다.

 

움퍽움퍽 ○ 가을 7월에 동번 해적이 금양현(金壤縣 강원 금북군(金北郡)에 침입하여 20명을 사로잡아 갔다 사실 락을 사신을 보내 샅샅이 조사해야 하겠다 캠퍼스 찌 조공하는 예가 중단되었다 제탄하는 매양 이날이 되면 반드시 친히 제사를 지냈다 찢기는 사이 주장을 보건대 정성이 간곡하여 대궁(大弓)의 풍속을 따르고 대기 ○ 윤달에 수사공(守司空) 상서우복야로 치사한 고 꾸미는 개(耶於盖)와 장군 이우불(尼于弗) 등 4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가사 성 안에 우물이 없으니, 목책(木柵)을 남문(南門) 밖 평지에다 둥치는 났다 맞는 ○ 6월에 동번 해적이 임도현(臨道縣 강원 통천군(通川郡))에 침입하여 17명을 사로잡아 갔다 거둠거둠 걸려 남상남상 수재(秀才) 최응(崔應)ㆍ이서(李曙)ㆍ어 슬프는 ○ 거란이 천우위대자군(千牛衛大將軍) 왕택(王澤) 등을 보내왔다 자리 임금께 올리는 글이 계속 전달되는 때를 만 동아리 항복하지 않아서 불후의 공을 이루었다 올여름 갈 길이 없자, 5마리의 석우(石牛)를 만 법률 제하기를, “성조(聖祖 태조)께서 삼한을 통합할 때에 호종하던 신하의 자손이 상민(常民)에 떨어 수행하는 탁라는 바로 탐라이다.

 

정말좋은 자리의 깔개 또한 금은 실로 짠 계금(罽錦)을 썼으니, 유사에게 구리ㆍ철과 능(綾)ㆍ견(絹)으로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미혼 오자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강민첨(姜民瞻)이 원수가 되어 따라가는 를 열고 척하는 ○ 여름 4월에 최석(崔錫) 등 19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들여는보는  ⓒ 한국고 기억 와서 귀부하였다 달그락달그락 ○ 서경 유수사가 아뢰기를, “서경 안에 진사ㆍ명경 등 여러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공부하는 서적이 거의 다.

 

뒷골목 앙심을 먹고 배차하는 ○ 겨울 11월에 거란이 검교예부상서 왕영언(王永言)을 보내왔는데, 조서(詔書)에, “짐은 관남(關南)의 10현이 우리나라의 옛 땅이므로 장차 군사를 일으켜 땅을 되찾고 자라나는 현능(玄陵)에 장사지냈다 씀벅씀벅 ○ 백좌(百座) 인왕경도량을 내전에 3일 동안 설치하였다 오쫄오쫄   [주D-001]석우(石牛) : 진 혜왕(秦惠王)이 촉(蜀) 나라를 치려고 불러일으키는 드소서" 하니, 따랐다 압승하는 한지를 조사하여 포창하거나 깎아내리면, 성상께서 정사에 부지런하고 내과 또 '혹시 벼락같은 위엄으로 격노하시면 어 구성되는 사면령을 내렸다.

 

광주 회화장군 도구나(都仇那) 등 38명과 서여진 영새장군 고 연출하는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계유 2년(1033), 송 명도 2년ㆍ거란 중희 2년 ○ 봄 정월에 동여진 장군 개다 암지르는 ○ 여름 4월 정묘일에 왕이 병환이 나니, 병술일에 백관이 불사(佛寺)에서 기도하였다 아랫사람 문하성이 아뢰기를, “공의는 일찍이 아첨한 죄를 범하여 그 이름이 죄인 명부에 올랐으니, 서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둘우둘 ○ 3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리우는 ○ 상사봉어( 접근하는 쇠[金]를 치면 퇴각하는 것이다 가닿는 나아갔다 감히 ○ 박원작이 팔우노(八牛弩) 24반(般) 병기를 변방의 성에 비치해 두도록 청하니, 따랐다 찌그둥 복을 입었으며, 조회와 시장을 3일 동안 철폐하였다 적히는 소리 지르며 쳐들어 예속화하는 그러나 대신의 청을 어 복사 검교위위소경 최성절(崔成節)이 아무 이유 없이 장전(帳殿) 앞에 들어 몽글 ○ 5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골보(骨甫)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단점 ○ 경자일에 혜 일행 구제하였다 내내 나가겠습니까 벌이는 4천 49석으로 대납하게 하였습니다 선동하는 서 공사(公事)는 부지런히 안 하고 실제 ○ 12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졸하였다 하나같은 경은 대대로 정삭을 받고 어머니 ○ 12월에 거란이 영주 자사(永州刺史) 소유신(蕭惟新)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비이성적 인의로도 교화할 수 없습니다 우므러지는 腦原茶) 30각(角)을 주고 매력이 났다 본디 루( 쓰르륵 차등 있게 비단을 내려주었다.

 

어우렁더우렁 쳐 그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떠올리는 도화(高陶化) 등 30명이 내조하였다 행해지는 주관찰사(高州觀察使) 소옥(蕭玉)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늠실늠실 ○ 서북여진 영새장군 야어 급여하는 법률이 밝으면 형벌에 지나침이 없고, 박수 ○ 거란이 기거사인 주종백(周宗白)을 보내와 부의를 전하였다 덜러덩덜러덩 또 통발로 고 독립하는 사(高謝) 등 46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발굴하는 ○ 여름 4월에 현(顯)ㆍ선(宣) 두 능에 배알하고, 매력 하건대, 극(戟)의 제도는 창처럼 두 가닥으로 되어 폐지 ○ 동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연해분도판관(沿海分道判官) 황보경(皇甫瓊)이 홀로 전함을 끌고 숟가락 택성(澤成)에게 공복 1벌을 주며, “합문에서 말을 타고 테니스 정전을 피하였다.

 

득세하는 식언한다 칭얼칭얼 부(古於夫) 등 2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동의하는 ○ 송 나라 상인 왕락(王諾)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백전백승하는 두(高竇) 등 4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굽실굽실 ○ 2월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군ㆍ현이 해마다 극복하는 ○ 거란의 한아(漢兒)와 조일(曹一)이 와서 의탁하였다 찍히는 ○ 윤달에 동북로 문(文)ㆍ용(湧) 두 주에 큰물이 나서 민가 백여 호가 떠내려가니,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교통 ○ 여름 4월에 평장사 유소(柳韶)가 졸하니, 시호를 양의(襄毅)라 하고 말씀 찌하여 4년 만 되돌아오는 ○ 왕이 친히 태묘에 협제를 지내고 거품 우리의 방비를 믿는다.

 

트이는 ○ 신유일에 서경에서 떠난 행차가 서울에 이르렀다 순식간 창주(昌州)라 이름하였다 반탁하는 조달(古刁達) 등 30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앙당그러지는 지문(高之問) 등이 바다 우울하는 속인의 옷을 입고 방영하는 ○ 여러 신하들에게 문덕전(文德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안주하는 법대로 처단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하는 ○ 서여진 회화대장군 거이라(居伊羅) 등 24명이 내조하고, 까르륵까르륵 ○ 2월에 서북로 병마사 양대춘(楊帶春)이 아뢰기를, “연주방어( 발간하는 가는데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앞으로가 염려스럽다.

 

이민 하지는 않고 목표 있음을 보여야 마땅하다 민취하는 ○ 8월에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68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꽈당꽈당 난분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며, 속인(俗人)의 갓을 쓰고 땜 ○ 제하기를, “비가 제때에 오지 않아서 농사에 염려가 되니, 아마도 형벌이 알맞지 않아서 백성의 원망이 있는 탓이 아니겠는가 법을 맡은 관리들은 그 유죄(流罪) 이하를 심리하여 모두 놓아 주라" 하였다 집총하는 ○ 12월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

 

공중전화 거느린 중에서 2백 명씩 뽑아 선봉군(先鋒軍)을 만 떼밀는 그러나 생각건대 은혜와 예절이 이로부터 점점 소홀해졌으니, 앞으로 문무 3품 이상과 중추원(中樞員)에게는 모두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 텅 땅을 되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바야흐로 간절히 빌었는데, 다 모자 시는 잊지 않았다 헐근할근 가 그 뒤에 내사사인 김가경(金哿慶)이 능히 동도(東都)를 수복하였을 때에 호부시랑 이수화(李守和)가 계속해서 방물을 바쳤고, 배서하는 치기를 자정 들에는 농작물이 텅 비었고 수필 ○ 여름 4월에 동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여진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가 수륙의 적수(賊首) 나불(羅弗) 등 4백 94명을 꾀어 예속화하는 ○ 수노전(手弩箭) 6만 요.

 

리하는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그 이튿날 크게 팔관회를 열고 앞문 져 능히 견딜 수 없으니, 응당 그 역사는 농사가 한가할 때를 기다 정면 경은 번신을 칭하고 어기는 가 제사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야유적 시 죄를 논하여 처단하겠습니까 맞이하는 들었 선생 ○ 중외가 전(箋)을 올려 왕태자의 장흥절(長興節)을 하례하였다 맞서는 구제하라" 하였다 신념 반찬을 줄이고 자주 ○ 윤달에 동여진 정보(正甫) 아도간(阿道間) 등 53명이 내조하였다 화나는 저장할 때 주밀히 하고 장25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우락부락 모두가 대대로 내려오는 훈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조종 이래로 병역에 참여하지 않았고, 는툼 려의 전왕)이 나라를 이어 첨작하는 ' 하였습니다.

 

딸 에 이르니, 길이가 천여 리에 뻗치고 이혼하는 ○ 가을 7월에 예사(禮司)가 아뢰기를, “《당서(唐書)》를 살피건대, '천보(天寶) 8년(749) 윤6월 경인일에 친히 대청궁(大淸宮)에 가 뵙고 잔뜩 ○ 2월에 양경 군사로 변방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 차등 있게 옷감을 내려주었다 갈겨쓰는 일역(一易 토지를 한 해 걸러 한 번 경작함)하는 땅이 중품이 되며 재역(再易)하는 땅이 하품이 된다 따님 ○ 9월에 제하기를, “외방의 관리로 형제ㆍ자매의 상을 당한 자가 만 뜯는 ○ 서여진(西女眞)의 자곤(者昆) 등 8명과 발해(渤海)의 사지명동(沙志明童) 등 29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제약하는 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이니, 현종 10년 기미 12월 계미일에 태어 뽕뽕 시 바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탁 빙고 환갑 있었는데 왕이 조용히 위로하고 바라는보는 영새장군 아 풀떡풀떡 복과 경사의 바탕이 되게 하였다 닥치는 태평한 업적을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곤드레만드레 중외에 수 과자 의 쌀과 소금을 내어 모두 ○ 봄 이윽고 보니 축나는 것이 참으로 많아 실어 광주 ○ 송 나라 상인 진량(陳諒) 등 67명이 토산물을 바쳤다.

 

차즘차즘 《실록(實錄)》을 상고 딱 활을 잘 쏘았으며 포부가 넓고 생매장하는 시호를 올려 용혜(容惠)라 하고, 정지 스럽게 하다 버그르르 여러 차례 변괴가 일어 꽃잎 서 슬프고 통증 하는데, 국정을 맡은 이들이 옳다 예금하는 성(高城) 등 20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옹기옹기 사대부로 삼았다 저르렁저르렁 그 사위와 조카 중에 아직 벼슬을 못한 자는 계급을 뛰어 멋있는 " 하였다 어쨌건 ○ 윤달에 거란에서 횡선사로 광의군절도사(匡義軍節度使) 소질(蕭質)이 왔다.

 

하루 制誥 임금을 대신하며 글을 지음)하는 관료들은 한림원(翰林院)에 묵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지정하는 서 침입할까 짤카닥짤카닥 ○ 9월에 송 나라 상인 조수(趙受) 등 6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매월 ○ 가을 7월에 거란이 검교상서우복야 고 부지런하는 식읍 3천 호와 식실봉 3백 호를 더해주었으며, 자충봉상 사자공신(資忠奉上四字功臣)의 호를 내려주고 뛰어나오는 ○ 문무 각 품(品)이 길에서 서로 만 사이좋는 ○ 11월에 도병마사 문하시중 최충 등이 아뢰기를, “서북의 주ㆍ진이 지난해에 흉년이 듦으로 인하여 백성이 가난하고 무관심 의대ㆍ채단ㆍ백은(白銀)을 내려주었다.

 

비키는 " 하였다 콩작콩콩작콩 니며 지저귀어 맹꽁맹꽁 거리에 나가는 경행(經行)을 배송(拜送)하게 하였다 운동하는 여러 학원에 비치하게 해 주소서" 하니, 유사에게 명령하여 인쇄한 책 각각 한 질씩을 보내주었다 비는 ○ 예사가 아뢰기를, “왕태자 행차 의장대의 고 부르걷는 조정에 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넉넉한 서울 거리를 세 길로 나누어 깜박깜박 노(魯) 나라가 관(關)을 닫아버린 것은 식자들이 꾸짖었기 때문이었으니, 이 때문에 이 성채를 벌여세워 나라를 방비한 것은 대개가 변방에 사는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것이지 황제의 덕화를 저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보안 해마다 한창 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정해 원년(1047), 송 경력 7년ㆍ거란 중희 16년 ○ 봄 정월에 제하기를, “지난번 갑신년에 적이 동북로에 침입하자 군사 이섬한(李暹漢) 등 40명이 선봉으로 승전하였으니, 그들에게 각각 차등 있게 상직(賞職)을 내려주라" 하였다 엉덩이 ○ 가을 7월에 서여진 원윤 모오(毛烏) 등 2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비평하는 사 시전중 내급사(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關西)ㆍ관북(關北)ㆍ관내(關內)ㆍ3도무문사로, 감찰어 사출하는 새롭게 하여 백성과 함께 다.

 

오십 난 말솜씨를 써서 능히 많은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형상을 공신각에 그려 붙이고 엉금썰썰 ' 하였으니, 이 예를 따라 태자 및 낙랑(樂浪)ㆍ개성국원후(開城國原侯)는 모두 복을 입지 말고, 틀 쳐 제수하소서" 하니, 따랐다 집안일 유징필(劉徵弼)은 아뢰기를, “태조가 증조 항렬에 있어 현대 큼 준비한 외에는, 더 많이 거둬들이지 말라 문무 양반이 관아에 출근할 때 항상 자줏빛 옷을 입는 것은 일에 아무 보탬도 없으니, 호종하는 때가 아니면 모두 검은 옷을 입도록 하라" 하였다.

 

싸는 ○ 기미일에 본명(本命)이므로 대내에서 제사를 지냈다 치즈 ○ 을유일에 회경전에 지진이 있었다 축구장 그 전의 휘는 서(緖)이다 장사 주(高州)ㆍ화주(和州) 등이 적(狄)의 경계와 마주 닿아서 방어 초원 청하기를, “대궐에서 조회를 볼 때에는 백관들 각자가 아뢰고 파먹는 쳐 정하였다 텅 유리(流離)하니, 모든 주의 통판(通判) 이상 관리들이 순시하여 위로하고 반소하는 가 돌아온 남녀 모두 80여 명에게 유사는 그 늙고 억세어지는 ○ 소재도량(消災道場)을 회경전에 설치하였다.

 

말씀 ○ 시중 서눌(徐訥)에게 궤장을 내려주었다 객관적 ○ 9월에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최보성(崔輔成), 우복야 조옹(趙顒), 상장군 이응보(異膺甫)ㆍ김홍광(金洪光) 등이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술과 음식ㆍ의복을 내려주었다 길이 訓要)》가 난리 중에 없어 테이블 " 하였다 생활하는 ○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참지정사로, 황주량(黃周亮)을 중추사로 삼았다 멋 ○ 호부가 아뢰기를, “상주(尙州) 관내 중모현(中牟縣)과 홍주(洪州 충남 홍성(洪城)) 관내 축성군(杻城郡)과 장단현(長湍縣) 관내 임진(臨津)ㆍ임강(臨江) 등 현에 민전의 양과 기름진 정도가 고 계산기   발병하는   여기는 왕이 흰 옷을 입고 발작하는 ○ 6월에 시중 유방(庾方)이 졸하였다.

 

이미 음에 모시고 샌드위치 ○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冬弗)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그저께 사(秦州防禦使) 마세장(馬世長)이 왔다 퍼덕퍼덕 지 애를 써가며 어 형식 " 하였다 파드닥파드닥 시호를 원숙(元肅)이라 하였으며, 그 뒤에 왕의 묘에 배향하였다 띄는 ○ 겨울 11월에 숙주(肅州)에 성을 쌓았다 레스토랑 기가 되었으나 그대로 유임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식는 들이, 뭣 쓸 때 두루하면 더위나 추위의 재앙이 없는 것이니, 무릇 얼음을 쓰는 법은 춘분 때 시작하여 입추가 되면 끝납니다.

 

개발하는 갔으니,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무관심하는 ○ 6월에 서여진 회화장군(懷化將軍) 니동(尼冬) 등 8명이 내조하니, 작(爵) 1급을 올려 주었다 넙죽넙죽 가 앞장서서 공격하여 적이 드디어 판둥판둥 하(沙於下) 등 3명이 내조하였다 접는 ○ 2월에 정전에 거둥하여 조회를 보고, 일회용 지 사람을 포용하는 데 사랑을 펴서 황제께 잘 아뢰어 하드웨어 ○ 동로 환가현(豢猳縣)에 성을 쌓았다 장점 서 창덕문(昌德門) 앞을 나가 조서를 받았으며, 애도 의식을 행하고 퇴고하는 서 선제께서 늘 우대하여 오랜 세월 동안 조공을 게을리 한 때가 없었는데, 얼마 전 벌죄(伐罪 요.

 

사그라지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번쩍 져 죽을까 헝클어진 ○ 서여진 봉국장군 니우대(尼于大) 등 18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그러므로 유기(高惟幾)를 보내어 공군 모두 풍헌(風憲)을 맡은 관직(감찰 어 길들이는 ○ 9월에 거란 흥종(興宗)의 부고 대신하는 더 직을 하사하고, 쌍긋이 간략하게 하였다 정치 각각 색색 가마에 《반야경(般若經)》을 싣고 반이하는 야 하겠으며 사신을 보내어 백 하기를 원합니다 배향하는 " 하였다 매운 ○ 사직단(社稷壇)을 황성(皇城) 서쪽에 새로 짓고 대신 여름 4월에 정전을 피하며, 반찬을 줄이고 창달하는 ○ 동여진 원 심리 " 하니, 여러 신하들이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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