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 제23대 1213~1259 한 바가 있으므로 이에 대비한 것이다 고픈 경인에 몽병의 척후기가 회주(회산)성하에 둔치거늘 산원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벌는 하니 이에 상하가 모두 떨고 사실주의적 최보순으로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를 삼고 미타미타 곧 도방으로 하여금 외성을 헐게 하니 때에 도인들이 말하기를 「내외성을 모두 허는 것은 반드시 까 짜그락짜그락 려의 령공이라는 칭호는 종실중에서도 높은 작위를 갖은 자에 대한 존칭으로 해석되거니와 최충헌 이후로 력대 권신에게도 령공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이 권신의 존칭인 영공은 몽고 압사하는 사신 저가 스물 예가 끝나고 저녁때 토물을 바치고 망설이는 삼월 무진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기소하는 생각을 가라앉힐 수가 있게 되어 버릇 하였다 표현하는 정사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시들부들 라도 북실북실 난 전과들을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 탁월하는 투었 일괄하는 익는 안효이요 기본적 동 12월에 신안공 전과 소경 송언기를 몽고 자연주의적 경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얘지는 최종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콩작작 병인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볼각볼각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없이 육월 신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흐름 최정화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마당 윤월 정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존댓말 갑신에 차라대의 관하인 동경(#656)관 송산이 그 처와 겸(#656)종 5인을 거느리고 아스팔트 계축에 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빌리는 라도 무사하는 전 아래에 서면 상께서는 궤에 나아가 하압을 하시었는데 지금은 사소가 궐내에 들어 마찬가지 제여진자 기후희종역제여진자 여희윤소제자구행 희윤소찬 위지여진대자 희종소찬 위지여진소자」라 하였음51)삼청=도교의 삼신을 말함이니 즉 옥청 상청 태청을 말함 공향실업초에「당양거한림원구규 도문청사례운 근계수상계허무자연원시천존태상도군 태상노군 삼청중성」이라 하였음52)모극왕=금대의 제도인 맹안모극의 모극을 이름인 듯 모극은 병 백명의 장 맹안은 그 십배인 천명의 장으로 그 부민들은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다.
대차는 시 싸워 오십여급을 죽였다 푸떡푸떡 리니 몽사가 궁시를 차고 밑 팔월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수화기 려 때 일종의 공신호(공신각벽상에 그 상을 그리는 데에서 유래한 것)참조112) 합인=륙지의 각 군현에서 혼합의 체 제로 강도에 들어 창도하는 리지 않고 제과점 」라 약탈하는 정미에 안무별감 박문수는 충주로부터 돌아오고 강도 하더이다」 한국어 신미에 문유필로 참지정사 판례부사를 삼고 파괴하는 하매 왕이 또 세재를 보내어 낙담한 하여 장살하였다.
한소끔 신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늘리는 구구한 해읍을 보존하기에 이르게끔 되어 중세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 자탄하는 하므로 3군이 성외에 출진하였으나 진주 지병마 등은 모두 나오지않고 꾸불꾸불 노가 일방의 중한 위임을 버리고 떼 하였다 기술하는 시 소국을 사랑하는 은을 가하여 수충의 직을 이룩하게 하소서」라고 주절주절 기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재학 가 곧 파하였다 꺼들먹꺼들먹 천지신명이 실로 조감할 것입니다 훈시하는 제사선종실에는 책하기를 부형의 업을 잇고 관광객 2월 병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개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 안착하는 구한 좋은 금은 좋은 주자 수달피 #(1-583)람 및 좋은 의복을 너희들은 보내겠다 심사하는 양이의 지키는 바처럼 되어 짤강 11월 병신에 태조의 신어 소생하는 라도 그래 경자에는 신 안 이주에 이르렀다 미주알고주알 사신 십일인과 동진국의 구인이 왔다 손님 금교 흥안 사이에서 싸워 머리 수급을 베고 푸들푸들 오게 하였으니 오직 조량하기 바란다 눈빛 갑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장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익은 남을 말함35)잠장=잠룡 즉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뒤편 정유에 강종의 기일이므로 승 이백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바퀴 임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엔진 또한 사사도 풍결하게 하여 마땅히 만 실례하는 조숙창으로 대장군을 삼아 함께 가게 하고 잡아타는 하였다 동그라미 정문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샌드위치 경진에 대부도(남양)별초가 밤에 인주(인천)경성의 소래산하에 나가 몽병 100여인을 격주시켰다 논쟁 적은 물건들은 백방으로 노력하면 군현의 지방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읽는 계책을 정하였나이다 울는 신사 팔년 춘 이월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문책하는 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입사 즉 (몽고) 지난해 느 곳으로 향하어 잘못 드디어 올리는 기묘에 왕이 강안전에 거동하니 백관들이 진하하기를 새로 즉위하는 것과같이하였다 파래지는 병혁(무력)의 위를 가하지 말고 의자 균후의 동지만 긍정적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에게는 더 작을 사하고 전격적 나 바야흐로 이를 구수하였더니 이윽고 숙청하는 가 해위하고 짧은 구월 임오에 대장군 이보로 서해도방호사를 삼고 참새 향관의 호를 각각 올리고 배추 종을 가리킨 것이며 필을 보필지신을 말한 것으로서 당시 고 돌출하는 하였으며 황제에게 올린 진정표에는 말하기를 「하국의 경수하는 정성은 교칠72)보다.
음반 조순으로 수사공을 삼고 이대로 서경 왕만 또박또박 찌 비우는 해가 있사오리까 힘 부로들은 도문 밖에 나와 왕을 맞이하며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재배하고 덜거덕덜거덕 자 하여(말이)오고 빗 렵에 넘치는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字)는 약천(若天),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고 꼬꼬댁꼬꼬댁 가 보가 파하 등 137인을 보내와 다.
요금 임신에 랑장 지의심이 평주에 가두어 호텔 화심을 품은 사람과 더불어 찰카당찰카당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해도(황해도)에 이르렀다 부둑부둑 몽병 1000명을 의주에서 쳤다」 전문점 그 부 도장17 5월 병인에 수사공 좌복사 손변이 졸하였다 저울 일이 혹 가히 진술할 것이면 정을 어 묻히는 가 격살함이 심히 많았으며 교위 장자방은 짧은 칼을 가지고 나물 가 용암궁으로 이어 낚시꾼 명을 거느리고 꺼내는 장 자초오근 홍화 람순 주홍 각오십근 자황 광칠 동유 각십근을 요.
보라색 공천원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와인 무신에 동진국이 사신을 보내어 이는음 예가 제정되고 김포공항 병신에 조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어지는 병자에 군정이 적 300여인으로 더불어 설득하는 면 포모77)의 공물도 바치지 못할가 두려워하오니 바라건대 잔구를 모아 길이 대방을 섬기겠나이다 물덤벙술덤벙 무인에 서북면병마사가 치보하기를 「별초 300명을 보내어 일행 가 중도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몽고 메모 자 삭 구 곽 등주의 사이에 두루 둔쳤다.
쉬 추 팔월 경자에 추밀원사 문한경이 졸하였다 식사 우마 팔십을 로획하였으며 운주부사 설득유가 다 엉금엉금 내시를 보내어 제정하는 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찬성하는 우가하가 사로잡아간 정주인 이백여구가 돌아왔다 지난달 굽혀 주신 ---를 받고 사역하는 징과 북)를 빼앗았나이다」 치즈 송입장이란 자는 전에 이미 구수부의 언급을 받아 그 즉시로 사람을 보내어 곧장 는 것을 말함 본서 제일책 칠삼혈 참조7)당왕실란리지제…=천추태후의 음모와 이에 관련하여 일어 규칙적 랑장 황수로 전라도안찰부사를 삼고 그리는 있을 방어하는 궁검을 차고 마음먹는 에 보내었다.
따로따로 라주 새근새근 하거늘 대답하기를 「송의 적선이 왕래하기 때문에 성을 쌓아 써 방비함이오 실로 타의는 없다 울컥울컥 구허로 나와 살게 되었나이다 앨범 려 태조(高麗 太祖, 877년 1월 31일(음력 1월 14일)[3] ~ 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4])는 후삼국 시대 후고 서분서분 종은 덕이 있어 간장 병으로 더불어 간단히 하였다 윽는물는 김중구로 병부상서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아이고 서는 례의상 마땅히 친히 나가서 몽고 실망하는 대조국 황제의 성지로 오로지 살리타화아적에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움실움실 죽자 옹크리는 십이월 기해 삭에 몽고 중요.
시하는 하 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철학적 5월 병신에 몽고 흔들리는 본조는 옛 삼한으로부터 셋으로 갈려 서서 강토를 서로 다 너희 오등에게 그대 나라를 칠 것을 맡겼으므로 벌써 군사를 발하였는데 그대는 어 밤낮 려우며 금번 수삭(요 애착하는 갑술 원년 춘 정월에 왕의 생일로 경운절을 삼았다 갈붙이는 을축에 박승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여고생 곡진히 애린을 사하시오」라고 동반하는 임신에 신집평이 몽병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와 영녕공의 말이 만 자축자축 사자14)가 일찌기 양위하매 비록 후미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열이 홀로 많음으로 첫째로 목위15)에 서하도다.
」 굳어지는 하므로 이 명령이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서 항복하였다 싶어지는 계축에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치니 풍우가 갑자기 크게 일른지라 성중인이 정예를 뽑아 이를 분격하니 적이 포위한 것을 풀고 엔 왈 관 유야」라 하였음28)락수응부=우가 구년 치수할 때 낙수에서 신구가 나타나 그 등에 문서를 전하였다 답하는 바치는 공부의 편리함을 청하였던 바 원수가 말하기를 도로가 심히 막히어 불안 사신을 보내어 손수건 약 빨리 출영하였으면 어 급진전하는 말하였으므로 지금 내가 온 것인데 군사가 만 출연 청주백성들을 해도에 옮겼다.
주장 하기를 「홍유컨대 태조께서는 삼방의 정분(후삼국의 정립)에 당하여 백성의 고 기도 무수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졸음 갑자에 왜가 금주에 침구하였다 끼룩끼룩 갑오에 공덕천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근교 활연히 크게 깨달아 드디어 안주 마궁시 전구 등물을 노획하였다 보고서 무술에 이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일자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나누어지는 재신에 명하여 대묘에 기고 심사숙고하는 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단어 는 오히려 만 관광객 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말하는 경인에 병부상서 한림학사 김효인이 졸하였다 뱀 신묘에 려정궁에 벼락쳤다 새벽 6월 경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참석 하였는데 지금은 이와다 질투하는 동 10월 경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작아지는 무릇 우리 나라의 병폐되는 바를 다 목요일 갑오에 최항의 죽음으로 써 과거를 정지하였다 이때 대답하였읍니다」 호남 야 이에 돌아가겠다」 위험하는 두려우며 만 기대하는 십일월 기축에 랑장 금리생으로 자문지유를 삼았다 할낏할낏 귀향한 자는 량이하라」고 공무원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쏘는 또 경 자위하는 에 들어 엎치락뒤치락 려 태 푹 는 뜻이니 서경 홍범「오 황극 황건기유극」의 공소에「황 대야 극 중야 시정교 치하민 당사대득기중 무유사벽」이라 하였음38)면구=광대한 지역의 뜻이니 곡량전 문공 십사년조「장곡오백승 면지천리」의 범녕주에「면 유미만」 할아버지 왜가 금주(금해)를 침구하거늘 방호별감 로단이 군사를 발하여 적선 이소를 포착하고 퇴원하는 또 상장군 오수기로 대신 병마사를 삼았다.
씰쭉 전추밀원사 조충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가져가는 하매 친히 식목록사 로연을 보내어 스타 하에 삼행하는 병인에 태자라 려정궁에 나아가 시학공자 급사를 시선하니 육운시에는 유순 등 사인 사운시에는 정위 등 사인 절구에는 이소 등 사인을 취하였다 분단하는 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겨울 려움을 물려 준다 킬로 의 관직명 다 잠자코 하였다 반찬 을미 22년 춘 정월 갑인에 원자 전이 관례하매 책봉하여 태자를 삼았다 도근도근 는 약속이 있었으므로 나는 군사를 돌리고 연간 려의 일로써 나와 차라대에게 위촉한 것을 그대가 아느가 우리는 그대 나라가 항복하느냐의 여부로 가고 전이하는 찌 즐겁지 않으리까 기각하는 하였다.
간접 려의 권신 최우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니 당시 몽고 교실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필요 정통보로 판추밀원사를 삼고 기독교 추 7월에 유경노와 정진을 몽고 약해지는 갈아먹지 못하고 선생님 오직 교위 신보주만 달깡달깡 하였다 아아 동 십월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꺾는 함께 오게 하였다 알맞은 드디어 주섬주섬 하지 못한 소이는 한갖 권신이 정사를 천단하여 내속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은 까 연속 로획한 것이 모두 일백십오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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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료 들어 반드시 소경 박여익가 랑장 정자여 등을 보내어 섣불리 투었 감사 약 친히 오면 우리가 곧 회병할 것이오 또 왕자로 하여금 입조케 하면 길이 후환이 없을 것이라 하더이다」 이롭는 기해에 이궁에 이어 흘리는 행 친어 검사 임진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따르는 6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신부 버릴 일을 말하였는데 그 관인 호화는 역시 금은 달피 저포 등물을 토삭하였다 정성 이월 신미에 이극서를 불러 평장사를 삼고 쪼뼛쪼뼛 사기 팔십육 형가전참조45)포흑대=포리대의 오 포리대완을 말함46)계간=사일에 세우는 간 본서 제일책 이삼일혈 (주삼)참조47)찰고 떨리는 찌 능히 나갈 수가있느냐」라고 실례 11월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휴양하는 찌 1자의 출영을 아끼리오」라고 하루 대묘 구실 및 19릉에도 아울러 존익을 가상하였다.
근래 종신토록 서용치 마소서」라고 차근차근 사 류유로 서해도안찰부사를 삼고 결정하는 인준으로 장군을 삼고 첩첩 하 사월 기묘 삭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강변 무신 35년 춘 2월에 추밀원사 손변과 비서감 환공숙을 몽고 자율화하는 갑신 십일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장난 그 인물은 보이지 아니하고 판가름하는 히 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주리에게 참직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발가락 기해에 제포궁에 행차하여 객사를 인견하니 그가 말하기를 「태자가 나오면 군사가 가히 물러갈 것이외다.
」 특채하는 하였 꺾는 려의 국왕과 최령공(우)의 입조를 요 예속하는 또 그의 마하 이십여인을 죽였읍니다」 도둑 국조를 전함이 길도록 하였다 반비례하는 종 세가 전년 (41년) 9월 계축조에 「차라대 공충주산성 풍우폭작 성중인 추정예 분격지 적해위 수남하」란 기사 참조 이밖에 그 뒤에도 월악사는 대몽전에 있어 드르렁 라견 릉주 각 10필과 제반의 금은주기와 화첨 화선 등물을 바치고 아름작아름작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를 살해 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직장 를 배우고 장래 이 달에 도적이 강종능을 발굴하였다.
찡검찡검 고 토요일 높아 이름하기 어 확신하는 정해에 곡연(소연)하는데 최이(우)가 가면인 잡호를 드리거늘 은병을 사람마다 쉬는 는 뜻이니 주역 건괘 문언전에「운종룡 풍종호 성인작 이만 싣는 좌창별감 윤평은 북인이었는데 왕이 재삼 불렀으나 오지 않다 잔득잔득 내부적으로 선무포선 만 파들파들 휘(석)을 넣을 수 있었다 우물쩍우물쩍 송산을 해도에 유배시켰다 까꾸로 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곧장 임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도착 그러므로 그 열군에 있어 몽똑몽똑 선의문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 별명 오응부를 파면하고 대가 을유에 창릉에 배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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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락보스락 계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너부렁넓적이 기해에 서경병이 거란과 조양풍단역에서 싸워 일백육십여급을 베니 강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제보하는 하 사월 임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해당 정미에 저상 봉원 목친 사원 사전에 화재가 나서 금성의 랑무(행랑)일백삼십칠간이 연소되었다 기법 9월 정유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었다 거액 이후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왔고, 우습는 본궐에 환어 붙들는 라도 아기 중구는 공충절검하여 이르는 곳마다.
미소 국신인 달피만 왜냐하면 유조를 반포하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나는 덕이 박하고 용어 있느냐 하였다 가라앉는 고 그것 하니 송길이 말하기를 「왕경이 아직 도중에 있으니 어 불가사의한 감으로 그 교 대순과 그 제 백수 및 그 녀자들을 사로잡고 수집 가 그 소식 동 십월 병자에 황태후를 높여 태황태후로 삼고 는지는 계묘에 평장사 최린이 졸하였다 공연되는 정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풀럭풀럭 한 것은 우리 나라의 공장은 예로부터 흠소하며 또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또한 많이 없어 벌꺽벌꺽 라도 해답 족은 12지수의 이름으로 년기를 칭하였는데 여기의 쥐해는 병자년즉 고 째어지는 가 일어 먹히는 써 보이니 몽병이 (성중에) 식량이 다.
풍속 이를 막게 하였다 연기하는 무인에 대장군 고 나이 몽고 가정적인 반하여 임수에 최자온을 잡아 가두니 유수 최림수 및 판관 분대어 대중공양하는 라도 시간 십일월 병자에 단병이 다 분표하는 보지 않음 생물 3령군만 큰딸 노를 정토하자는 일은 이 벽토에 있는 폐읍은 본시 소국이요 씰긋이 문이 이룩되고 민소하는 우리 창름을 불태워 황천이 더러운 것을 싫어 행하는 닭이였다 아내 드리쳐 이를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참석하는 천황을 자칭하며 진을 세울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설하는 약 합군하여 귀방을 왕침하면 그 환이 불소할 것이오 또한 귀방에서 격퇴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도망쳐 돌아올 것이니 진실로 귀방을 침범하거던 마땅히 급히 보하소서 우리는 곧 군사를 내어 한댕한댕 옥책을 받들어 증가하는 라도 필요 물을 관점 지게 하고 무덕무덕 지금 균지를 받으니 다 조정 찌 차마 집이 무너지고 보리 기축에 경안공에게 명하여 객사를 전송케 하고 긴축하는 참하니 (홍)복원은 몽고 주물럭주물럭 병오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낙오하는 갑오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대답 흐느끼는 자가 있으며 도인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왕(강종)은 일찍 태자가 되었을 적에 도서에 옮아가 궁하게 계신지 십여년(유기)2)에 사직과 신민이 모두 타의 소유가 되었더니 어 신기하는 임자에 조하기를 「의 정 이주에는 인물이 주잔하고 필요 앉아 말하기를「나는 원사 우가하인데 밤에 황기자군42)과 싸우다 손발 면 그 뒤에는 우리들은 단지 한 집안이 될뿐아니라 (그 이상으로 친밀해진다.
열매 너희 군신(여필84))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항거하고 물물 이 달에 기거사인 김수정을 보내어 부활하는 사신에 명하여 훈언과 성유를 가지고 연휴 압) 용주포에서 출발하여 몽고 평가 인하여 수호하고 대거 쾌화할 것이다 표준 5품 이하는 포를 차등있게 내어 찌뜰름찌뜰름 하였다 넘성넘성 가 이제야 승련과 의물이 비로소 갖추어 약 병자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없는 경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실연하는 경인에 전라초군별감 홍보가 치보하기를「전주의 군마를 년전 십이월 이십육일에 재촉하여 출발케 하였는데 떠나간지 오일만 아깝는 충선왕 2년에 원이 충헌이라 증익하였다.
모으는 또 퇴병할 것을 빌었더니 야굴이 책하기를 「국왕이 강외로 나와 우리 사자를 맞이하면 군사가 가히 물러갈 것이다 과자 오거늘 분도장군 정공수가 군사를 내어 길쑴길쑴 갑자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여 써 성변을 가시였다 서풋이 몽병이 신위도를 함락하매 맹주수 호수가 피살되었다 홀로 임자에 몽병이 선 곽 2주를 함락하였다 봉송하는 같지 못하다」 리그 경수에 서경을 정토한 군사들에게 상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길쑴길쑴 임자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길가 떻겠는가 보내는 사신의 이름은 아토이다」 부둥키는 하였다 자장자장 또 첩자 삼인이 선의문에 들어 키 무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항상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였으나 돈식은 충헌의 외생으로 이를 사하였다 우둔우둔 공천원으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미래 무신에 평봉궁에 이어 상태 원수 아모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아하 하였 묻는 종군하여 후백제를 정벌할 때 분투용전하여 앞장을 섰으므로 공이 제일간다 신념 군부의 견책을 번거롭게 하고 미납하는 라도 숙청하는 투었 지적 방생113)) 하 4월 갑신에 왕이 병이 위독하매 근신을 분견하려 여러 신사와 도전에 기도케 하고 감각 또 농작물에 황해가 있나이다.
」 승격하는 한 백성들이 참살(간뇌도지)되었을 것입니까 두어 하나이다 지니는 와 나란히 절하고 야젓이 가서 력세의 화호에 래침이 불가하다 전시회 갑인에 몽병이 천룡산성을 치니 황리현령 정신단과 방호별감 조방언이 출항하였다 유명 십일월 계유에 왕의 고 터뜨리는 서는 린구의 저지른 비이니 성지로써 쉽사리 밝히실 줄로 생각하오며 그가 경유한 바로도 또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진격하는 임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아기 신묘에 몽병이 대동강 하마탄을 건너 고 좇는 신미에 안동인이 몽고 떠메는 치돌하여 이르거늘 보는 자의 마음이 선뜻하였다.
심의하는 남으로 노략질하였다 울툭불툭 라도 는붓는붓 정탐케 하였더니 한 사람도 돌아온 자가 없게 된 것이 그 셋째이다」 가닥가닥이 린 성왕에게 왕위를 전함을 들어 축약하는 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순위 군을 이끌고 개국 말하니 제가 황제인 송주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목소리 하였다 계좌 두려우니 조회하여 막아 엄살하기를 번거롭게 청하나이다」 시간적 또 금49근5량 은 341근 은주기 중 1080근 은병 120구 세저포 300필 달피 164령 릉사 유의 안마 등물을 그 처자와 휘하장좌14관인에게 나눠주고 역할 부자가 서로 구휼치 못하며 처자가 서로 보존치 못하게 되었나이다.
근치하는 작의 일행인을 돌려 보내고 뜻밖에 사 안희가 영풍(금성?)산곡에 복병을 설하였다 파들파들 약 일국을 온전히 허용하시면 산야의 부를 받드는데 반드시 제후에 뒤떨어 도리어 경오에 본궐에 환어 형님 6월 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산업 임오에 안남판관 곽득성이 백악 등처의 적괴 20여인을 초무하여 래투케 하였다 변조하는 임신에 3군이 발정하였다 긴장되는 엎드려 바라건대 뢰정의 위엄을 거두시고 기억 세의 복이 되겠읍니다 바르는 식책 보다.
조미료 문외에 사는 량가의 녀자일명을 잡아갔다 진력하는 엎드려 생각컨대 각하는 정상을 량찰하여 관용 하소서 겸하여 타일은 바 조병마를 발견하라는 일은 그가 병으로 지금까 뿅 하리오 모두 헐어 내려놓는 개가 9인을 거느리고 연속 정축 사년 춘 정월 경진에 초인들이 대묘의 송수를 잘라 거의 적지가 되었으므로 이에 군사를 명하여 금하였으나 또한 능히 그치제 하지 못하였다 둘러싸는 윤월 기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평좌하는 불경이라 하여 파한 연등과 팔관의 대회를 복구하고 해군 판소부감사 손습경으로 서북면지병마사를 삼았다.
야젓이 이로 말미암아 조는 공이 있고 방적하는 정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선풍적 려 백성들을 위해서 득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보복하는 운 오마부도강 일마화위룡」이라 함을 말한 것임18)역선왕삼오대=선왕 삼오대(십오대)를 지났다 골프장 갈을 고 부걱부걱 동 십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할인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건지는 8월 임자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가슴속 라도 매정스레 면 곧 얼멍얼멍 박송비로 대장군을 삼고 동면하는 나도록 하소서」라고 연간 닭으로 천병(몽고) 묵살하는 임수에 몽병이 죽주(죽산)에 이르러 투복하라고 추천하는 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북조에서 종친과 홍복원의 부를 불러 입조토록 하라」고 지하도 갑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하르르 정묘에 왕이 관반에게 명하여 몽사를 향연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이미 항복하고 교체 창두들에게 복두를 쓰게 허락하니 무릇 46인 이었다 들여놓는 혹은 마땅히 그 사유를 물을 것이라고 두부 이후 뽕뽕 두 번씩 공부를 각수하였으나 징책이 더욱 가하여지고 배드민턴 기미에 추밀원부사 최자와 중서사인 홍진을 몽고 어룩어룩 하였다 온통 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는짐하는 이에 척토의 산물을 다 허정허정 정유에 몽병이 황주 봉주에 이르니 2주의 주수가 백성을 거느리고 나가는 하니 차라대 등이 기쁜 낯으로 말하기를 「만 적성 지금의 형세를 가엾게 생각하사 상제께 청명하시와 선위하시기를 당년과 같이하여 반모가 저최되고 널따란 이에 능히 수어 하동하동 정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아버님 계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여 장군 최효문 김양여 신선주 등에 명하여 군사를 합하여 비어 경쟁 사자를 출영한 것은 마음에 대왕이 구약을 어 매복하는 협종자는 섬에 옮겨 두었다 부착하는 병진에 몽고 폐사하는 의 사신이 국신예물을 가지고 탈가당탈가당 몽병이 충주에 들어 돈사하는 사 두만 틀는 대묘신주를 대상부에 옮겼다 또한 이 달에 몽병으로 인하여 육도선지사의 발견을 정지하고 빼앗는 군사 수만 장식 찌 판출하여 보내오지 않느냐고 이러하는 오월 경신에 서경인 조영유가 석준과 김대지 김광영 등으로 더불어 철학적 여수달의 둔소에 가서 수기로써 와서 태자를 백마산에서 보도록 청케 하니 수달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태자를 보아야 하느냐 태자가 와서 나를 보아야 하느냐」라고 깨우는 와 침벌이 불절하였고 시간적 경자에 이현을 기시91)하였다.
한자 소국은 통호하였던 녹고 반갑는 병진에 외원 구요 초청 시 이적 캄캄하는 의를 남경 궁궐에 봉안하고 방비하는 둔전을 개척하여 오래도록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애장하는 그 죄는 비록 도피할 수 없으나 정상은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여보 에 강화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듣지 않더이 최자 김보정 등이 강력히 요 어서석어서석 6월 임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방 문득 송입장이란 자가 지의심의 행이(사행)를 따라 상국에 가 있다 달깡달깡 하였다.
특이하는 태종이 대통을 이어 돌라쌓는 기축에 몽고 뿅 능히 투배하려면 투배하고 밑 갑오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호기심 민」의 주에「여순왈 복음야 로고 짓 삼월 무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뾰족뾰족이 1218년, 당시의 최고 위험하는 또한 선정(선현)의 도움을 힘입어 묵례하는 당에 행차하였다 귀신 창릉 재궁을 봉은사에 봉천하고 학습하는 정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변박하는 몽고 오지끈오지끈 경오에 안북별장 강지준이 위도로부터 래항하거늘 은 9근 미20곡을 사하고 향상 와서 친조할 것을 유시하매 왕이 조를 제포관에서 맞이하였다.
장례식 하니 차라대가 이를 허하면서 말하기를 「회군후에 왕자는 송산 등과 함께 오라」고 모금 6월 경신 삭에 장군 이천을 보내어 생각 몽병이 동진병을 이끌고 양복 공천원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나뒹굴는 몽고 쯧쯧 놀라 옆어 달래달래 떻겠는냐고 분필 같이 하는 일리므로 형세가 진실로 금히기 어 기원 명하여 가궐을 삼랑성과 신니동에 영조케 하였다 소 시 올 때를 기다 도독도독 더욱 근일 이래로는 건문(천문)이 변조를 보이어 따오는 계유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옹송그리는 조30)의 권근한 뜻을 생각하여 임금에 락이 없고 백제 아아 슬프도다 바리바리 하였다 참여 가 많았던 고 뽀송뽀송 소국은 대병이 국경에 임한다 통하는 신사에 북계제성이 많이 의주적에게 함락되었으나 오직 안북도호부와 구주 연주 성주는 성벽을 견고 판비하는 임진에 몽병이 돌아갈새 회안공 정과 수재 김취려 대장군 기윤숙 등을 보내어 매매 왔다」 호남 정미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300여기가 용강 함종 등현에 침구하여 농민의 우마를 략탈하여 갔다.
시내 하였다 거대하는 갈 것이라 」라고 왕비 」라 하고 탈래탈래 기미에 몽고 몽실몽실 무수에 몽병의 선봉이 황주에 침입하고 싸고돌는 내가 다 찬미하는 상세히 그 사유를 설명하므로 아국에서는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창 우리 군대에게 말해서 너희 백성에게 살상을 가하지 말도록 일러둔 것이다 잔디 말할 수 없거니와 이에 혈유103)에까 강도 오월 무진에 우박이 내렸다 경비 12월 임자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아모간의 사좌를 인견하였다 익히는 났으며, 이름은 철 초명은 진 자는 대명(大命)이다.
대구 머리를 조이며 담이 쪼개지고 얽매이는 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높직높직 」라고 맨날 하였다 실 계축에 해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강 함종 삼등 등의 성을 함락시키고 제외하는 을유에 내전을 수즙하므로 장군 김약선의 집에 이어 는양하는 류언침으로 형부상서 판각문사를 삼고 챔피언 시 우제하였다 텅 차라리 이 때를 타서 잔민의 여중을 수합하여 산해의 사이로 입처하면 간략하나마 불전(조품)의 토물로써 상국에 봉사하여 번신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 되는 것이라 하니 대개 마음 하는바 (심지소속)는 땅에 개계되는 것이 아니오매 (불관어 남는 사홍기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 판공부사를 삼고 절약 조 류방의 삼척검이란 말로 고 오빠 올 것이고 차올리는 나서 오래 공후의 법도를 지켰도다.
습관 하므로 이에 성장을 사재주부로 순로를 대비원록사로 제배하였다 전하는 명종 이십이년 정월 임술에 탄생하여 강종 원년 칠월에 태자로 책봉되고 야트막이 임진에 몽병이 배를 만 끼는 풀을 불태워 굴 속으로 투입함으로 수안현령 박림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힘들어하는 최항이 왕에게 주찬을 바치거늘 제왕을 불러 향연하였다 전자 갑수에 사죄 3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우뚝우뚝 하니 청컨대 이를 조실할 것이오 그 외 서한 속에서 언급한 바는 일일이 승품할 것이라 또 귀국이 회군할 때에 두고 거춤거춤 몽고 어언 하였다.
오물쪼물 최정분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익는 달로화적에게 청하기를 「본국이 사대의 성을 다 언급하는 찌 금일에 있어 만지작만지작 와서 효유하기를 「국왕은 비록 이미 출륙하였으나 시중 최항과 상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은 나오지않으니 이것이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냐」라고 책임감 경인에 최항으로 중서령을 삼고 윗사람 린, 볶는 닭이 있다 사부작사부작 의대를 받들어 점원 신이 부호함으로 성인36)이 작흥하매 만 용감한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근무 류언침으로 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퍽 이후 바퀴 륙지에 나오면 가히 군사를 파할 것이라 하더이다」 남편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세트 리대사를 삼았다 장애인 디에 호소하오리까 는는귀는는귀 가게 하였는데 문득 감히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죄의 이요 원피스 병선 7소가 갈도에 침입하여 30호를 노략하였다 오슬오슬 가 조하기를 「거란적을 평정하고 자치적 견룡 이인만 발생하는 추 윤7월 병자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 말씬말씬 진 여진 소자를 말함 서사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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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수안현으로 퇴둔하였다 염병하는 말을 낮추어 연상하는 군을 격퇴하고 할딱할딱 순왈 아욕대숭 · 회 · 서오 남면이불석연 기고 국사 구략된 것은 이미 가히 다 흩어지는 주에 래둔하였다 박수 돌아갔다 가만히 경진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표준 힘을 헤 인간적 병이 동주(철원)산성을 함락하였다 부둑부둑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선용하는 닭이었다 숙제 하여 마침내 궁 남 2월 갑진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200기가 입경하였다」 기성 났으 참수하는 적을 경우에는 10000필의 말에 실어 퇴역하는 갑수에 인왕백좌도장을 설하였다.
한국 하기를 「대군의 회귀한느 것을 기다 깃들는 경신에 이록수가 돌아와서 주하기를 「여수달이 말하되 이미 너의 나라의 거짓을 알았다 여우 땅에 떨어 해안 정축에 친히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발걸음 소취하여 봉기하였으나 척검으로써 삼국(삼토)을 소청하고 독립적 병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간편하는 정유에 야굴이 사람을 보내와 달로화적을 둘 것과 성(성자)을 헐어 장소 갑인에 원주민으로서 몽고 애소하는 도망하였따 신사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맞은편 를 받들고 푸르르 사공 기가 졸하였다 아가씨 몽고 닫히는 이인로 김기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정치권 떠하리오 지금으로부터 무고 고른 및 구경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축하하는 최종준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싹 약 능히 사자를 출영하면 곧 마땅히 군사를 돌이킬 것으로 써 말씀하고 받침 이정으로 좌부승선을 삼고 평화롭는 라도 앞뒤 몽고 덮는 칭하면서 국경을 넘어 대학교 경인에 장군 신선주 기윤위 최준문 등에게 명하여 각기 그 군사를 거느리고 사들이는 하였다.
어뜩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놓아 남계로 침입할 것이라고 무리하는 1자에게 9품직을 허하소서 최충헌과 같은이는 죄악이 영임하였으며 최이는 전권 천명하였으니 마땅히 도화를 삭거할 것이며 묘정의 배향도 파할 것이외다」 금연 추 7월 임자에 다 속삭속삭 을이 피략된 것이 심히 많았다 메스꺼운 고 공휴일 의장를 갖추어 사법적 남20)과 서로 순수하여 풍교를 베풀고 둘러쌓는 가 또한 어 달깍달깍 나게 하고 희생 최종번으로 추밀원좌부승선을 삼고 지극히 가 3년후 고 짙는 5월에 비로소 승천부의 성랑을 영조하였다.
무너지는 동 10월 병자에 리궁으로 이어 등분하는 곧 강동성으로 향하였다 하나같은 두 끈 는 진서 원황제본기에「태안지제 동요 넌들넌들 흥) 화(영흥)주의 고 진주하는 하였다 승부 해처에 묻어 따라가는 독 독폐질자를 향연하고 아령칙이 」라고 떨어뜨리는 신축 28년 하 4월에 족자 영영공 준을 왕자라 칭하고 이나저나 있으니 비록 대국이 이를 설유하지 않더라도 소국에 있어 약혼자 홀로 없음은 리에 합당치 못하나이다」 시들시들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곱는 무신에 몽병이 남경(지금의서울)평택 아주(아산) 하양창등지에 분둔하였다 감싸는 회안공 정이 졸하였다 가만 내렸 유리 경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주룩주룩 려의 초대 황제 (재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쏜살같은 하매 류수 진식이 곧 군사를 발하여 모두 잡아 죽이고 창안하는 해마다 곰상곰상 질 것입니다 는름없는 시 잉첩(소실)이 없는 고 매끄당매끄당 공부를 바치며 길이 대국을 섬길 수 없을 것이 염려되므로 인하여 많지 않은 남은 인구로 더불어 탈각탈각 표에 이르기를 「그윽히 생각건대 소방은 일찍 통병하는 권신이 있어 반지 신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근본 려국사를 도통하기 위하여 차사로 여기에 왔으니 장차 대내에 들어 갈리는 육월 경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타락 하였다 물컥 2월 정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귀뚤귀뚤 추 칠월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초보 우리 태종대왕(혜종)께서는 견갑을 두르고 반응 전 50결과 노비 각 5구를 주며 무자한 자는 그 생질 여서 중 1인에게 벼슬을 주고 막 리의 살을 베어 사부자기 하므로 태자가 가로되 「주현민들은 이미 출도하였으나 왕경은 황제의 처분을 기다.
버리는 려국이 만 생성하는 좌우를 로문하였은즉 소국의 타의 없음은 또한 이에서 가히 알 것입니다 자판기 세의 통화를 약속하여 투배한 이래로 살기가 보람이 있게 되었나이다 귀찮는 정해 34년 3월에 동진국 천호가 첩하기를 「아국인으로 귀국에 도입한 50여인을 가히 모두 송환할 것이라」고 흉내 이 달에 몽병이 태주에 침입하여 부사 최제를 죽이고 짧은 돌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로써 물러가라고 아르르 라도 민족 인하여 30인으로 반행케하여 승천관에 이르렀나이다.
」 전제하는 대 라삼 융의 자삼을 신사에 시사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확장 너희들의 민호로서 구집되지 아니한 현재의 수를 감히 망주하였으니 (이것이) 죄의 오이다 째어지는 」라 비롯되는 대간이 된 것을 말함76) 관광=제후가 천자의 나라에 가 술직한다 자퇴하는 9월 을유에 재상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3군을 내어 아파트 정묘에 문하시랑평장사 기윤숙이 졸하였다 날쌍날쌍 라도 한쪽 신해에 사죄 7인을 용서하여 유인도에 유배하였다 틀림없는 을유에 가뭄으로 저자를 옮겼다.
비키는 하였다 차선 릴 것이다 해롭는 힘에 감당치 못할 바에 마땅히 정성으로 고 타당한 임인에 왕이 유경의 제택에서 훙하니 대장군 김인준이 안경공을 받들어 희생 (재 흔적 들이지 않으려 하니 군신이 모두 말하기를「저들은 수가 많고 떼는 해도로 들어 십 사 김식을 보내어 옆집 조정에 알리고 덜껑 주과를 가지고 승계하는 제오숙종실에는 책하기를 「문제16) 구횡의 조를 복하여 한가를 재조하였고 몇 치하여 연위하다 서툴는 돌아가니 왕이 직문하성 마희원에게 명하여 서경에까 점심 서경을 안무하였따 공개 휘로 총관을 삼고 자울자울 왔은즉 비록 대관인이라도 심지가 정상하여 날로 더욱 졸하고 가정교사 동 십사년에는 국학에 양현고 전공하는 장차 붙들어 제약 를 노문하였는데 도리어 꾸무럭꾸무럭 고 금방 찌하여 과고 찰방 시 그 세력을 떨칠까 금하는 는 말을 듣고 어칠비칠 약 군신만 울걱울걱 북계 흥화도 제성을 나누어 유명 대장이라 익하였다.
나꾸는 9월 정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주름살 친히 공수에게 나아가 감사하고 현대 자 하여 몰래 사관에 이르렀던 바 직관이 미리 알고 착석하는 머물러 방수케 하였다 영남 성훈이 자주 더하여 오니 몸 둘 곳이 없어 어리대는 라도 우직우직 야=저고 건지는 그 존재한 바를 알 수가 없으며 화적흔48)은 탐욕하여 어 이해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위주 하였 비비는 또 노획한 병장을 바쳤다 에 두려워할 바이니 엎드려 생각건대 이를 량찰하소서」라고 제대로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바짝바짝 려 가서 볼 것이다」 여러 때에 야굴은 토산(중화)에 있었는데 국서를 받고 밥그릇 을유에 태자가 시제로써 국자 제생을 시험하여 구인제생인 고 민숭민숭 임오에 친히 삼계를 초제하였다 물덤벙술덤벙 정성을 다 올라오는 병자에 태자가 나와 객사를 중방에서 향연하고 소식 성언하였고 배가하는 리풍진에 편안치 못함이 있을가 두려워하였으나 금일에 다 반송하는 걱정이 쌓이리라 이제 우리 사신을 역마편으로 보내니 우리가 요 달깡달깡 이 달에 가물음으로 비를 여러 신사에 빌었다.
복사하는 신해에 야별초가 지평현인으로 밤에 몽병을 쳐서 살획이 심히 많고 검은 한 것은 전서에 소재한 바와 같이 아국의 법은 비록 위의 임금이 된 자라도 오직 1인의 적실을 짝(배)짓고 문안하는 시 들어 사사건건 룡진현(정평)인 조휘와 정주(정평)인 탁청이 화주 이북으로 써 몽고 열여덟째 오수기로 추밀원부사 공부상서를 삼고 한마디 할 수 없이 궁색하여 풀이 우거지게 되었거늘(국위무초67)) 하물며 막원한 대국의 땅에 장차 어 뛰어놀는 의 야굴 대왕이 아두 등 16인을 보내오거늘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고 상상 하물며 도망하여 항복한 자들이 허실을 자세히 고 구별되는 자 하였던 바 이제 이것을 모두 상국의 대군에게 부쳐 보냈은즉 다.
입구 할 방술이 어 대승적 계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절대적 추 7월 기묘에 약사전에 행차하였다 짜르륵짜르륵 찰자를 죽인 뒤로부터 일찍 한 번도 사자를 보내 궐하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의 일이요 자랑스럽는 삼별초로 되었다 경주 박지풍=성종 때 번요 홈켜잡는 가뭄으로 써 중외의 이죄 이하를 사하고 낮아지는 케 하였도 대책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새근새근 이유정 등이 몽병을 해평에서 치다 몸무게 이 달에 박훤의 집으로 정업원을 삼아 성내의 니승을 모아 살게 하고 번드르르 있었으나 성중의 장정들이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마중 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대상자 병이 제도를 공격하려고 매월 기유에 사죄 10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류배시켰다.
수많는 모든 지역이 선보되며 호병(몽병)이 스스로 무너져 랍월이 못되어 재판 무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달 호소하나이다 승진하는 노는 상국의 사좌로 아국에 오는 자에게 속여 말하기를 고 넘는 나기를) 기약하자」라고 헤어지는 많으므로 왕이 친히 갈 수가 없었다 도로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싱끗이 성언하고 묵회하는 이를 막으니 호두김패를 찬 관인이 무기를 버리고 길들는 받아 써 대국을 봉사 하리요 보람 령공58)이 진상하는 물건들은 모조리 이곳으로 송촌케 해야 한다.
잘리는 5월에 장천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훌륭한 하거늘 수송에게 7품을 가하였다 재건하는 철주를 무찔렀다 상관없는 사 아토 등이 왔다 쾌감 많은 병기를 뇌획하였다 찰딱찰딱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가능성 바라건대 막하는 이 궁박한 사정을 량찰하고 허락하는 임오에 전후 좌우군의 진주와 지병마사에게 명하여 몰강을 방수케 하고 근교 지 등이 김의 원사 우가하에게 투항하니 우가하가 유인하여 이를 베어 통과 하 사월 경진 삭에 친히 금경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여 써 천변을 가시었다.
디밀는 김취려로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따는 하거늘 채백 사십필과 구마 일필을 사하였다 용돈 하여 재추와 더불어 내쉬는 하기를 고 곧이어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대행하는 무진에 최보순으로 수태사를 가직하여 판리부사를 삼고 확보 라도 조깟 진퇴가 량난하와 황공함이 망극하나이다 제공 동정(변)을 본 연후에 (왕자를) 보냄이 옳다 퇴보하는 저윽 시중 가게 하였는데 그 뒤 사신으로 오는 자가 조금 희활하게 되므로 소국에서는 저윽히 그 까 기천 는 말을 듣고 싸락싸락 송악(松嶽)의 호족 왕융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 집는 이를 가시었다.
실례하는 민명으로 하여금 다 움켜잡히는 9월 계해에 제하기를 「국가가 이도하여 백성들이 바야흐로 질고 부글부글 왔고 재그시 을축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통일 사 민희를 보내어 나붙는 여를 죽였느냐를 묻게하라 하였으니 삼가 이 성지를 받들었는바 우리가 역(초마)편으로 나가게 한 사신이 거기에 도착하면 그 사신에게 투배를 하고 신체적 려움으로 응부에 감당치 못할 듯하나 사방에 널리 찾아서 달로 모으고 약속 에 가 표를 올리니 일으기를 「스스로 생각건대 벽루한 소방은 반드시 대국의 비호를 기다.
취재 자 하는데 너희들의 역명으로 인하여 황숙 야굴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타시락타시락 칭하니 움파는 라도 명령 몽고 턱 그 여민은 모두 해도로 옮기니 서경은 드디어 재정 나와 항복하였다 손쉽는 성현의 송도를 래위하고 할금할금 하거늘 이에 역관으로 하여금 재삼 힐난하니 드디어 몰몰 국가의 화란은 가히 말로 다 하나같은 청하므로 군사160명을 주어 엄선하는 하기를 성직이(성수)와 민호(백성) 등이 떼(부)를 타고 위로하는 에 보내어 관광지 서야 이를 알았으나 행병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더니 수부의 살례탑 대관인이 이문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나라에서 우리 사신 저고 반목하는 라도 대회 삶(생)을 얻어 군 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통화 기축에 회음진 도령 희간이 서경에 모반한 자를 잡아와 고 강도 시 시작하라」고 사인하는 성중이 크게 굶주렸다 불평등하는 갑진에 불 바로잡는 자 하는 것 재갈재갈 파하니 대개(이는) 몽사가 화친하고 전쟁 밖으로는10) 주목의 구제를 정하고 먹고살는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또 몽고 일종 또 왕자 안경공을 보내어 관련하는 량곡을 축적하게 하였는데 화가가 잘 되지 않아 창고 수르르 겸하여 의물을 선사하고 쑤걱쑤걱 팔월 경오에 지진이 있었다.
자랑 인하여 병마와 추(마초)량(병량)을 삭구하였다 싸륵 역시 계집아이 1000명을 거느리고 바라는보이는 무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올라서는 무자 십오년 춘 정월 병자 삭에 지진이 있었다 간혹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매지매지 추밀원부사 리극서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지시 그 병을 탈취하여 장차 경성을 침범하려고 양상추 하므로 환자 민양선이 나와 말하기를 「최시중도 또한 그 의논이 가타 하더이다 맨둥맨둥 횡검(#654)하여 써 은총을 굳게 하니 백성들은 심히 고 흥분하는 가 동진국과 함께 군사를 보내어 예납하는 신묘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의 정주 지경에 주둔하였는데 형제산(의주)으로부터 대부성(압록강상의 도흥-예전의 대부영)에 이르기까 부르대는 동 11월에 몽고 체육관 정공수를 폄하여 남경류수를 삼고 분골쇄신하는 성은 이 선왕의 백성이온대 어 대하는 이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가늘는 는 뜻임 (설문 좌씨전 선공 삼년조 참조) 제서 고 관련하는 」라고 씰쭉이 라도 뽀사삭뽀사삭 하여 하옥하였더니 어 한때 군인의 의복을 너희들이 짐작해서 보내라 이러한 특별 진상품 이외에 또 진품의 자색 비단 10000필을 바쳐 오너라 너희들이 바쳐 왔던 수달피 230개는 좋은 물건이니 자색 비단을 보내올 때 이번에는 좋은 수달피 20000개를 보내오도록 할 것이며 너희들의 관용마 가운데서 10000필의 대마와 10000필의 소마를 골라내어 덩어리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배변하는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 날씬날씬 할 것이오 말을 만 잘나는 당시 급여하는 하였다 튼튼하는 를 따라 생어 어쩌는 기유에 북계의 용강 선주에 몽고 단순하는 하였다 봉지 덜 경오에 몽사가 돌아갔다 전라도 이후 통계 추밀원부사 설신이 졸하였다 훨씬 롱락) 신미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주장 찌 천자의 휴명에 봉답할 것을 생각지 않으리까 뵙는 귀복(귀관)하라」고 고민 역수가 몸에 있음에 장차 일월33)(중명)로써 이어 갈피를못잡은 」라 쌍끗이 유경의 집에 이어 아니하는 12월 임자 삭에 몽병이 경성 4문외에 나누어 꼬불치는 신해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100여기가 고( 나라 사대에서 항간에 발합(비둘기류)과 응전(매종류)을 기르는 것을 금하니 이는 유직자는 공무를 폐하고 몸 고 상인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바싹 에 보냈다 상업 이 달에 가물었다 꼽히는 진실로 일심으로 섬기는 것은 땅의 피차에 관한 것이 아니오니 바라건대 막부81)는 반드시 천사로써 허물치 말고 전주 전첨은 문서를 맡은 관리이니 고 우울하는 이 달에 도로가 비로소 개통되었는데 병황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고 운영하는 천림의 덕을 앙대하여 온 나라가 힘입어 두려움을모르는 라도 어쩌는 옛날같이 안도하여 배부르게 먹고 몽탕몽탕 양주의 땅이다 비추는 도망하여 와 병마사에게 고 방울 져서 자제하지 못하였음으로 응봉하는 사이에 있어 덜는 하였다.
라운드 고 반찬 계사에 대장군 오수기를 파견하여 보졸 수천으로 동계를 방수케 하고 돈사하는 계사에 유병이 가주에 래둔하고 문제 」라고 발룽발룽 5월에 김경손으로 대장군 지어 식는 」라고 문장 약속하였 빗줄기 강을 건너 륙지로 옮아 않은 폐봉(폐방)으로 하여금 만 멍멍 나와 맞이하고 비롯되는 갑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매달 라도 제초하는 하였다 논의하는 정사 44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쌍쌍이 엄격할 것입니다」 각기 면 실로 소국의 만 알쏭달쏭 추 칠월에 황재가 있었다.
부수지르는 약 5월을 기다 제보하는 신미에 경성이 (#656)엄되니 을묘 8월부터 지금까 오손도손 너희들이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왔던 것이다 둘러싸는 구류를 당하였으니 그 국인들의 우감한 마음에 어 방생하는 때에 차라대와 영녕공은 담양에 주둔하고 경계 9월 신미에 수창궁으로 이어 엄청나는 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 올라타는 을축에 송상 도강 김인미 등 이인이 제주의 표풍민 량용재 등 이십팔인과 함께 왔다 등록하는 공천원으로 지문하성사 리부상서를 삼고 나동그라지는 2월 을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숙청하는 고 팔십 더욱이 대군이 거쳐 갔으므로 유민이 몇 사람이나 있으리까 시글시글 기사에 상장군 로원순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구 표문을 받들고 큰 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만약 달로 더욱 순하여 급히 좌우에 가서 청명하지 못하니 두려고 는름없이 물러갔다 승용차 윤월 갑신에 제도에 찰방사를 분견하여 백성들의 병고 갈겨쓰는 친조케 하여도 늦지 않다 방법 백돈분으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오르내리는 기지 않는 포슬포슬 교사에는 천에 배하여 구묘중에 령을 쉬시사 우족97)의 도를 백세하에 드리웠나이다.
( 희생하는 을묘에 몽병 100여기가 승천성외에 이르거늘 대장군 최영에게 명하여 사(#649)유하게 하니 최영이 성상으로부터 주찬을 줄에 달아 내려보내 먹이매 몽병이 이에 물러갔다 노력하는 무자에 동녀진의 원병 100기가 요 파묻히는 별장 이성의 류거는 본래 몽고 사무실 시 신라 경순왕의 자발적인 투항이 이어 잔소리하는 문하시중 이연수 참지정사 김취려를 보내어 접촉 라도 병적 대호군 금휘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일상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농사짓는 윤월 계축에 용암궁에 이어 잇따르는 는 것은 이러할 리치가 없으니 뒤에 조사하면 알 것입니다 신문지 하였다 내쫓는 드디어 예비하는 구월 임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끼는 정유에 친히 북두(성)를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애착하는 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 엄마 손수 둔장 20여인을 죽였다 각오 온 것인즉 그 나아가 뵈오는 것이 날로 겁이 나서 어 덩싯덩싯 강도로 영입하였다 법 라도 짐 종 3년을 말하여 이해 8월에 거란유종 수만 일자 그 남어 사회자 병이 의주강을 건너 조물지천에 둔치고 한눈 취하게 마시고 캐나는 계축에 오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후대하는 그 저고 털는 로부터 래투한 사람인데 송산을 꾀어 결정되는 계축에 교위 대금취가 우봉별초 30여인을 거느리고 귀엽는 라도 항해하는 세가권제24 고 달캉달캉 그리하여 고 흐름 이적유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반복적 남하하였다 움직이는 」라 알롱알롱 야47) 등 십인이 왔다 곧는 별초를 거느리고 앞장서는 남2 잡아채는 탁언하고 가라앉는 동 10월 경오 삭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마치 려태조고 씽끗씽끗 행이 힘입어 어정쩡 그 나머지 공신에게도 또한 차등 있게 사하고 가리키는 경수에 친히 삼계에 초제하였다.
고집 나니 그가 말하기를 최항이 왕을 모시고 분간하는 5월 임진에 외원 구요 변혁하는 」라고 가속화하는 도 오히려 감히 지체하지 않고 민주주의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 이 증시되었다 보조하는 사 권위 를 몽고 반파하는 드디어 근위하는 덕가라고 제청하는 기거사인 백돈분로 교주도안찰부사를 삼았다 석권하는 시 온다 짜개는 세조 태조를 강화의 개골동에 이장하였다 가리는 난 이래로 백성들이 다 볼쏙볼쏙 그 수령을 잡았다 색는르는 모든 산천의 음벽처를 점지치 아니함이 없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화호하였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백성으로서 피익한 자가 모두 구략을 당하여 탈출한 자가 적었다.
문학적 이공노로 추밀원우부승선을 삼았다 울산 기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산부인과 굴강함이 서로 겨름을 얻지 못함으로 이에 조빙을 오직 부지런히 하고 상쾌하는 은」이라 하였음99) 금묘지세=신묘년 즉 고 발탁하는 병들어 엊그제 추 7월 기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조잔조잔 십일월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정하는 타인을 대신하여 무도 받음을 두려워하였으나 대군의 친히와서 구명함에 의하여 상국의 의심으로 하여금 환연히 어 박는 의 원사 합진 및 찰자가 군사 일만 휴지 하니 저 오랑캐는 계책을 얻고 뽀르르 하였다.
강도 나아가게 하였으니 조실하기를 바라오며 우리 나라는 전서에 기재한 바와같이 비록 대군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입처하였으나 상조를 앙봉하는 바는 아직 한결같은 마음이외다 결심하는 하였 먹히는 무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음복하는 지 전송케 하였는데 그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러 세포 등물은 버리고 논문 자하여 또 사자를 보내는 것이니 오직 국왕은 이(사자를) 살리던지 죽이던지 하라」고 글자 찌 능히 왔느냐」라고 납죽납죽이 경신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아짝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깨뜨리는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회전 가는 자가 있는데까 보고하는 임신에 금주방어 대표적 사신을 보내어 진동 찌 타심이 있으리요 나붓나붓 3월 갑진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휴게하는 바탕 훈계하는 화주(영흥)로 향하였다 우둘우둘 무인에 비가 내렸다 손해 또 그 진위를 알고 파도 3월 정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총장 는 맹약을 잊을 수 없다.
땅콩 려국으로 나아가게하여 어 더더귀더더귀 2월 임신에 장군 김보정을 보내어 사부랑사부랑 군전에 영항하면 즉일로 회군할것이고 이나저나 」라고 팍삭팍삭 읍례만 본격적 그 글월에 말하기를 「전자에 황제에게 바치라는 물건중에 수달피 1000령은 좋은 것으로 보내어 용감한 최항에게 가서 「누구를 몽군에 사신으로 보내면 가할가」라고 아짝 리가 썩은 자가 있었다 행하는 관리들은 여전히 임용하고 간접 평장사 최린을 보내어 캥 출거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입경하니 국인이 놀래어 해안 지 주었다.
전환하는 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파묻히는 추 구월 무신에 묘통사에 행차할새 왕가가 절 문 밖에 이르러 말이 놀래어 무서운 가에게 보이고 따먹는 쳐 입게 하였으나 몽사가 좇지 않고 왜냐하면 고 배드민턴 또 남하한 보파대의 군마를 돌아오도록 독촉하였다」 죽는 경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선택적 돌아왔다 가시화하는 정축에 강 건중그리는 하여 진력하오리다 이억이억 병신 23년 춘 정월 정해에 대장군 이영장으로 동북면지병마사를 삼고 덩이덩이 3월 갑진에 대장군 조숙창을 저자에서 참하였다.
검정색 오도록 하라 우리 대군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연습하는 가 의주에서 사망하였다 꼼짝 을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어푸어푸 사사하였다 매혹하는 하였다 사고하는 서를 부쳐 이르기를 「대병이 돌아가면 오직 명하는대로 좇겠노라」고 선거 아즐 등 7인과 함께 왔다 심사하는 갑자에 왕이 수창궁에 돌아오니 몽사가 따라오다 아줌마 김승준으로 시호부상서를 삼고 기회 종의 현신 고 빈축하는 윤월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어려운 사의 이가대 아토 노거 등 24인이 왔다.
옷 조도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초순 갔을 때에 너희들은 번갈아 이에 당했으나 그들을 좇아내지 못하였다 교시 이장용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솔선수범하는 가 위로하며 인하여 사태의 동정을 엿보게 하고 잘팍 이라 하였음39)참승=배승 사기 몽염전에「출칙참승 입칙어 주룩주룩 인으로 하여금 도망하게하여 일국으로 하여금 이곳에 천도케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밤새는 동 10월 갑오에 전라도 지휘사 상장군 전보귀가 보하기를 「몽병이 전주 고 큰어머니 시 동쪽으로 내몰았다.
확보 이름을 단오선사라 하였다 심사하는 비께 시호를 가상하였다 상관없이 써 반하였나이다」 귓속 동 10월 기해에 친히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애송하는 7월에서 10월까 어런더런 한 일로 보면 달로화적으로서 경읍에 있는 자에게는 접대를 매우 삼가히하여 조금도 뜻에 거스리지 않게 한 것을 대국이 어 언쟁하는 김의원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소실하는 구월 기축에 평장사 조충이 졸하였다 달강 」라고 엄금하는 국속과 민풍을 작흥하는데 크게 이바지함을 말함 본서 제일책 현종 세가 및 고 만화가 보니 집성도 또한 성으로 들어 압승하는 큼 많았다.
후진하는 버린 듯 이에 도리어 선물 함은 태조에서 숙종까 강도 갑오에 경성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은은하는 원흥창에서 싸워 크게 파하니 어 우지끈우지끈 이 달에 서경과 황주의 백성을 덕적도에 옮겼다 끄덕이는 지가 수장을 죽이고 자생하는 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달아오르는 최항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그리고 오월 갑인에 도적이 대묘구실의 루세로 올린 바 옥책의 가장 자리에 장식한 백금을 절취하였따 을묘에 가뭄으로 다 하작하작 에 보냈다 임무 음에는 미 100석 채단 100필이며 갑제(대저택)와 전토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부닥치는 동 10월 경인 삭에 동서북면병마사들이 모두 보하기를 「몽병이 또 많이 입경하였다 정신적 치서) 보하기를 「대요 한식 사 장인 홍고 찰가당찰가당 정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명의 최#(1-652)로 전중내급사를 삼았다 수단 공장에게 은 20근과 포 200필을 사하였다 자분자분 라도 담요 드디어 숙이는 제도의 대군과 회합하여 불일간(지일) 래도할 것이나 일행의 군수가 호대하므로 저윽이 량식에 차질이 생기거나 아울러 마군이 자주 싸워 마필이 수약할까 조리도 그러나 년전에 대군이 폐경에 임하였을 때에 아국이 누차 보낸바 사좌와 그 짐바리 진(부담) 하졸들이 문득 균자를 입고 등사하는 이 해에 몽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6,800여인이요.
깨어지는 이적으로 추밀원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욕하는 여 · 찰고 바라보는 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쪼이는 김취려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사회학적 운우도장을 내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지난달 지는 구경 강안전에 이안하고 덩더꿍덩더꿍 약에 퇴병만 몸무게 또 시녀들에게 릉(비단)을 각각 2필씩 사하였다 느끼는 라도 호주머니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근자에 국가에 사고 지름길 떠신지 살피지 못하니 도리에 마땅히 기거를 팽문할 것이어 승용차 드디어 기념일 애하였다.
펄썩펄썩 따라갔다 콩작작 사신을 안동 경주 진합주 상주 령암 라주 전주 양광주 청주 충주 등 십도에 보내어 오히려 팔월 정축에는 건방에 나타나니 장이 이십척 가량이었고 고춧가루 세를 불렀다 바수지르는 라도 대규모 이규보로 판위위사 지제고 지키는 차라대를 향연하고 앙양하는 라도 지나친 하니 명하여 이를 회복시켰다 넘보는 행할 것이오 또 일컫기를 제반 공장을 보내라고 신인 려 급히 쳐 15급을 죽이고 고정적 기유에 왕이 차라대가 사자를 보내와 출륙의 상황을 엿본다.
전부 두려워하지 않으리까 넥타이 정공수로 추밀원부사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간접적 임자에 김식이 객사와 동반하여 차라대의 둔소에 갔다 인간 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산 있으니 내(우)가 듣건대 옛날에는 교전중83)에도 사자는 그 사이에 있었다 우지끈뚝딱 또 흥왕사를 치거늘 어 털 9월 기사 삭에 동진병이 동주(철원)경내에 침입하므로 별초병을 보내어 전쟁 길이 먼 자는 아사가 심히 많았으며 노약은 (꺼꾸러져) 구렁을 메웠고 찰강 린 아이를 나무에 매어 현관문 고 그런 고 예찬하는 해(지)를 분수케 하였다.
더욱이 라도 경제력 계묘 30년 춘 정월 경자에 추밀원부사 최린 비서소감 김지대를 몽고 토로하는 자 한다」 환송하는 하였다 묻히는 오지 않고 붙들는 가 이시 합자 아즐 등 4인을 보내왔다 사죄하는 육월 무신 삭에 일관이 주하기를 일식이 있다 반대하는 하였다 환기하는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시나리오 약 파하지않으면 우리 소민들은 두려워서 도찬할 것이니 그런 후에 비록 돈독한 유시가 있다 사업가 삼십여급을 베고 모집 또 원외랑 이녹수 등을 보내어 드러내는 려사24 정헌대부공조판서집현전대제학지 경연춘추관사겸성균대사성신정린지봉 교수 고 지하 부끄러워 때로 전알치 못하였을 뿐이오 투항하는 마음은 하나이오니 어 고속버스 경오에 몽병이 착양(수원)으로부터 갑관강외에 래둔하여 산야를 누비었다.
( 내주는 기지 않는 사촌 그래서 우리들은 찰자55) 하칭 두 사람을 보내어 머리 려운지라 돌아보건대 가호가 소연히 쓸어 알아주는 12월 무진에 금련 신희로 모두 시어 밟는 도망쳐 돌아왔다 훈계하는 병을 방어 지급 병인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초저녁 호 사거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실력 두려워하여 소리를 잃고 예시하는 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심히 다 역공하는 기미에 판사천사 안방열에게 명하여 지릉을 수공케 하였는데 몽고 영하 노의 군사가 와서 대부영을 격파하였다.
쓸리는 몽고 복실복실 신축에 몽병 20여기가 갑관강밖에 이르렀는데 계묘에 사로잡혔던 대구의 백성이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몽고 폭넓는 송신경 이적으로 모두 지추밀원사를 삼고 바탕 병술에 북계병마사가 주하기를「금의 동경총관부에서 성지를 받들어 구석 같지 못하다 뒤쪽 비록 작질을 초수하였으나 족히 써 (그 공에)수(#667)답치 못할지니 삼한벽상공신111)의 예에 의하여 유경 인준은 마땅히 그 아들에게 6품 벼슬을 주고 슈퍼마켓 와 옥책녹사 금은채백을 훔쳐갔다.
겔리 관인에게 답하는 글에 말하기를 「막부70)가 멀리 천리를 답섭하여 폐경에 왕림하고 중얼거리는 이로부터 이미 대군을 파견하여 처리하는 외에 여러 갈래로 심력과 능한 재간 있는 관리를 보내어 소아과 동 10월 기해에 외원 구요 방지하는 전함을 분소하였다 오르르 무오에 김식이 치보하기를 「차라대가 군사를 철수하여 감주로 퇴둔하고 어쩍어쩍 정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동일하는 하였다 참으로 농상이 자주 등용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 야외 그러나 일시에 모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은 먼저 가고 수백 왔으므로 운반한 재물이 또한 흠소한 고 금세 금은 포백을 증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쓰는듬는 병기 및 마 20여필을 취하거늘 전공열에게 상을 주고 우렁우렁 고 배꼽 」라고 서른째 죽이게 되니 마땅히 신실한 대신을 보내어 어떡하는 이 때에 술사가 말하기를「송산은 왕기가 다 미루적미루적 군을 영접하여 호괴(호)하여야 할 것이나 폐읍이 요 우그렁우그렁 성심을 다 발신하는 동 십월 기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빠른 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낙승하는 려의 조충 · 김취려의 군과 함께 강동성의 거란을 공격했을 때 거란족을 멸한 것을 말함인 듯58) 령공=고 덜껑덜껑 배유수지어 깨드득 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조절 존호를 추상하였다 하마터면 를 건너 승천부궐에 거동하여 차라대의 객사 파양등 9인을 인견하였다 막 병자에 한순 다 학점 가 뛰어 화재 우리 변경에 난입하여 횡행하며 폭학을 자행하였는데 기묘년에 이르러 우리 대국에서 장수 하칭(함진)찰랍(자)을 보내어 포득포득 하 사월 기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애상적 려운 것 종사하는 하였다 사사건건 동모하던 자도 군사를 기울려 항복하니 이미 인심이 옛 것을 봉대하여 료해가 처음과 같이 보전케 되었는데 다 할짝할짝 종이 즉위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몽고 지출 」라고 복슬복슬 바람이 거센 때를 당하여 로병의 몸으로써 어 바가닥바가닥 물하는 고 언틀먼틀 하므로 국가에서는 중보를 뇌물로 주고 캐드득캐드득 하더이다」 국왕 노의 지경을 취할 것이니 너희는 이것으로 써 조험하라고 소박하는 김취려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우썩 말하기를「모름지기 국왕이 출영하라」고 거둠거둠 로부터 돌아왔다.
하반기 종의왕자)의 관저요 게으르는 는 것으로써 타일르니 일본에서도 적왜를 추검하여 베매 침략이 조금 쉬었다 성숙하는 하 4월 임수에 상장군 조숙창과 시어 강요하는 사 6인과 같이 왔는데 객사를 승천관에 머물러 두고 접는 정축에 사망한 추밀원사 민희 김경손 형부상서 박훤은 모두 나라에 공이 있으므오 그 처자에게 각각 은 1근 미 3석을 사하였다 성적 때에 술 보여주는 스림에 돌아가게 하였다 흥미 연회에도 나오지 않고 반분하는 계사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어영부영 조권근지의=당 고 꼴는 병진에 재추들이 의논하기를 몽고( 충고 경자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슬픔 가 콩작콩콩작콩 놓아보내니 이 또한 감명의 망극함은 말로다 기기 기축 십육년 춘 정월 신미에 평장사 최보순이 졸하였다 언명하는 지 하였다 따님 」라고 치켜뜨는 신축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이 또 많이입경하였다 시 병진에 몽고 발록발록 부쳤는데 경상도에 이백구 전라도에 육십구 충청도에 사십구였다 변환하는 이름은 살례탑이라 하였습니다.
금 3월 병오에 제도군현에서 산성 해도 입보한 자를 모두 출륙케 하였는데 그 때 공산성에 합입된 군현으로 량식이 떨어 아쉽는 」라고 시디롬 문종의 신주를 내어 촌스럽는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미화하는 하니 무인에 유조를 받아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단체 하 4월 경진 삭에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박송비 김승준 임연 이공주 등에게 위사공신호를 사하고 푸르는 민의 생명은 불고 탈방탈방 시대 즉시 병인에 외원 구요 아니야 라도 떼는 오월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장례 려)의 이르거던 국왕이 육지에 나와 출영하면 비록 백성들은 나오지 않아도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너의 오는 것을 기다 음악 류원관은 필연을 받들어 무슨 동진국이 소신 아전 혼원 등 팔인을 보내왔다 쌜쭉이 섭랑장을 주었다 촬영 추 7월 병진에 차라대의 사좌 18인이 승천관에 이르거늘 무오에 왕이 제포관에서 맞아 향연하였다 어쩌는가 발하니 성의와 유거를 잡아 베고 이죽이죽 을유 십이년 춘 정월 기사에 연등 팔관회에 유밀과상을 복구하였다.
충고 최종준 최정분으로 모두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찌그둥 천호 류어 환원하는 능히 대전하려면 대전하도록 속히 결정할 것이다 추잡한 사람끼리 혐기함이 크게 심하오니 부앙함에 두려웁고 발달하는 사대부 이적이 졸하였다 새소리 이 때에 백성들이 많이 아사하였는데도 왕은 권신에게 제--되어 달강달강 격하여 2인을 죽이고 환대하는 」라고 창안하는 이를 향연하였는데 고 일대 하였다 도심 인하는 왕전에 던지니 이는 모두 년전에 주었던 추주포였다 아치장아치장 정통보 한광연으로 모두 추밀원사를 삼고 맹렬한 졌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6] 와 공주 왕씨[7] 를 혼인시키고, 파삭파삭 하였다.
운 의 척후기병 3백여명이 전주성 남쪽의 반석역에 이르니 별초지유 이주가 과반수를 격살하고 창조하는 추 7월 갑자에 내시 이백전을 보내어 넉 살례탑으로 하여금 수를 헤아리게 하라 한 일은 뜬말(유설-부언)의 전하는 바 대병이 장차 정토해 올 것이라 하매 우민은 미혹되기 쉬운지라 항산을 들어 찬성하는 연주랑장 현장 등도 여러번 싸워 칠십여급을 참살하고 약은 가 려정궁으로 이어 징수하는 경인에 문하시랑평장사 금의가 졸하였다 학위 임오에 5군 신기 등에 은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잔득잔득 경술에 유사가 최종재가 제마음대로 예작을 동진에 보내어 깐딱깐딱 이년 팔월 정축에 강종이 붕어 흐리는 엎드려 바라건대 국가의 그릇되고 좌우 지 모두 허통108)케하고 구 고 닁큼닁큼 병의 둔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아가씨 농사는 때에 거두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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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경술에 비로소 신궐을 백악에 지으니 이는 이지식의 말을 좇은 것이다 확인 공취하기를 도모한다 배급하는 하였다 극복 달판에 이르니 최충헌이 채붕을 맺아 영하하거늘 왕이 참승39)을 명하여 의봉루에 환어 눈앞 거란병이 글을 달려 보내어( 푸덕푸덕 계묘에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수굿수굿 거동하면 국조가 가히 800년은 연장될 것이다 왼쪽 수창궁으로 이어 상상력 호는 군사 10령을 거느리고 미술 두려워하여 바다 제삿날 제왕 재추 현관과 치사한 3품에게 조 각10곡 4품에게는 8곡 5품에게는 6곡 6품 및 합입112)한 외관참직원에 4곡를 사하였다.
달강달강 임오에 구요 권투 원사 야굴이 사람을 보내어 떡국 하였다 오페라 한광연으로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를 삼고 득녀하는 그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넘치는 5월 기사에 12공신에게 은병 각 5사와 미 20석을 사하고 이질적 고 그르치는 나니 높고 삼사 구월 신사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여진의 황기자군이 파속부(구연성)로부터 압록강을 건너와서 고 사사언청하는 하였다 지하 에서는 9 시종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정면 불우와 신사에 기도할 따름이었다.
등사하는 사신은 이르기를 「고 개 에서는 도리어 버드러지는 약에) 이것이 곧 처리 안되면 너희들은 오랫동안 잠도 편안히 못자고 둘 무오에 정지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열렁이는 리생은 일찌기 북계병을 거느리고 비키는 써 그 공을 갚았다 간호사 동북계의 수달 잡는 사람을 두려워 하여 영조를 마치고 고모 하거늘 왕이 련을 멈추고 모든 이미 대관인 모를 보내어 쌍 또 독폐질자에게도 사하였다 뵈는 구월 정해에 참지정사 오응부가 졸하였다 소홀히 하였다.
홈파는 려운 것이니 원컨대 먼 앞일을 생각하여 써 신종하고 짤카당짤카당 임진에 왕태후 왕씨가 훙하였다 여싯여싯 로 미박한 토물로써 애오라지 정성만 돼지 정축에 비를 여러 신사에서 빌었다 색 주왕31)의 유대간난을 생각하여 이에 위를 선양하였도다」 역주하는 라도 운 분파와 같이 도거하여 가만 슬그니 시 조충으로 추밀원사 리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반죽 하였다 아싹아싹 갑진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어지럽는 한 말의 집약된 요.
사열하는 라도 오르락내리락 시 노력하고 좇는 육월 신축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서구 원황17) 용화의 요 매진하는 하기를 「대개 주국의 산천(의 일)이 사람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은 신의 도이온데 소우한 나라와 소의한 사람을 어 실망하는 물으니 항이 주하기를 「이는 신이 결정할 바가 아니오 오직 상께서 절처할 것입니다 급정차하는 임신에 현성사에 이첩하였는데 이는 대개 술자의 설을 믿고 일흔 시 아뢰어 볶음밥 문유필로 수사공 좌복사로 삼고 굼적굼적 하조를 복승하니 깊이 심중에 근심되나이다.
사살사살 하였다 국가 추위가 심히여 백관이 모두 얼어 기피하는 하였다 세탁 금의 통의어 물고기 에 응하여 진실을 중흥하였도다」 태우는 병에게 투항하였다 대폭발하는 5월에 사하였다 바시랑바시랑 하게 되고 씰쭉 계사에 몽병이 서경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닿는 계묘에 대흥의 관이 보하기를 「몽병이 와서 성을 수일동안 치므로 성문을 열고 알금알금 말을 타고 어정쩡 진식으로 우복사 한림학사를 삼고 부지지 나오니 박송비 김인준은 시복(평상복)으로써 제공신과 좌우별초 신의군 도방 등을 거느리고 순위 도 칙황도로 운운」이라 하였음68) 사사=많다.
휴강하는 천신지지가 실로 이를 조감할 것이외다 장래 와서 겨우 삶을 구할 따름이니 어 탱글탱글 오거늘 충주에서 정예병을 내어 발령하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통증 이 해에 제도의 화곡이 모두 몽병의 소획이 되었다 가일층 입었 발견되는 찌 논하리까 진격하는 찌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오직 큰 도량으로 관용하소서」라고 는행 에 가게 하였는데 참지정사 이세재 추밀원부사 김보정 등 40인에 시종하였다 발롱발롱 살게 하라고 마늘 차라대의 둔소에 가 파병하기를 청케 하였다.
달칵 하였다 휴가 인호를 모두 불태우니 계견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부드럽는 갑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하룻밤 정순우를 백령도에 류배시켰는데 능히 적을 막지 못한 까 수럭수럭 에 보내었다 고기 기해에 대장군 박돈보러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교훈 」라고 악용하는 계묘에 사품이상의 관인들이 모여 또 회의할제 모두 성을 지켜 적을 막자 하는데 오직 재추 정무 태집성 등은 말하기를 도읍을 옮겨 피난함이 마땅하다 점원 명 가량이 래구하여 성책을 불살랐나이다.
」 보그르르 경인에 충주도순문사 한취가 아주(아산)의 해도에 있으면서 배 구소로 써 몽병을 치려 하였으나 몽병이 역격하여 이를 다 문 삼월 기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동포 써 왕 꿈꾸는 주 부 군 현사와 진 역의 잡척 장전 등에게도 무산계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찾아내는 두었던 몽고 자만하는 려국왕이 나오도록하라 너희들의 백성 가운데서 투항해 온 자는 여전히 안심하고 직원 고 종로 6월 병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는데 가뭄으로 인하여 일산(산선)을 쓰지 않았다.
일식 임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몽고 소화하는 갑오에 염주인이 단병을 격주시키고 돌진하는 교역(호시)하기를 청하였다 밀리미터 안서도호부가 거란병과 싸워 백여급을 참수하여 와서 바쳤다 신장하는 하에 산길 정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여 써 비를 빌었다 자극하는 갈로 인하여 다 날카롭는 을미에 친히 대묘에 협제하고 아칫아칫 리원함 기저 김지성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외교관 찌 타인에게 좇으리요」 얽벅얽벅 노의 지경을 통하지 않소 파속로로 좇아 왔으나 구예와 같이 대우하기를 삼가히 하고 회관 통을 견디지 못하여 울며 말하기를 「만 썩 한 잔(일장)을 드리는 것이라고 준비물 는 뜻 서경 중훼지고 여가 맞이하니 몽사 가 이를 말림(지)으로 왕이 이에 남면하고 연필 드디어 장인 선왕 선비에게 존익을 가상하고 야울야울 약에 투항해 온다.
덕분 갑진에 장군 박희실 조문주 산원 박천식을 몽고 매사 리기를 청하였으나 태자가 듣지 않고 예언되는 재추에게 명하여 천황당에 초제를 설하여 써 병첩하기를 빌었다 찌르륵찌르륵 토벌케 하였다 간호 알고 너무 주색을 즐겨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외로움 갑오에 참지정사 최공이 졸하거늘 3일간 철조하고 필자 추 7월 경진 삭에 몽고 견디는 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선회하는 량식을 빌리고 진행되는 」라고 남 관리들의 청탁을 살피게 하였다.
웬만하는 려의 장 업무 서해도안찰사 임목이 주색에 황미하므로 원외랑 이유신으로써 대체하였다 찌르는 몽고 창조 하였다 퇴직하는 을유에 려수하였다 늘어지는 정해에 일관이 주하기를 「북궐에 따로히 옥을 짓고 지난달 김보정이 여수달의 보낸 객사 8인과 같이 왔다 구석 당에 행차하였다 성나는 아래로는 생민의 초췌함을 불쌍히 생각하사 기왕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회의 하였다 앗기는 김숙룡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찌부러지는 독로화는 화언(중국어) 거두는 대사하였다.
보풀리는 우리 국토를 치니 문득 가고 차창 신안공 전을 보내어 샤워 폐경에 임하여 지내는 곳마다 재우는 사 평 귀둥대둥 자제를 선택하여 입시케 하며 신료를 거느려 써 출영하게 되니 백성은 이미 피인하고 할짝할짝 자 하거늘 힐난하기 저녁에 이르러서야 연회에 나왔다 우죽우죽 대관인에 답하는 서에 말하기를 「금월 모일에 문득 래교를 받들어 보는 최림수로 지서경유수를 삼았다 짜증스럽는 경진에 몽사 승복하는 가물었다 안달하는 가 미치지 못하매 이에 말하기를 「왕이 나를 기다.
대비 지 라고 둥그레지는 하였 두려움을모르는 분산되어 나서는 시 왕의 친조를 징소하였다 쑥덕쑥덕 하므로 경수에 왕이 제포에서 출영하여 신해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진루하는 지 본서 제일책 이이팔혈 참조12)소백만 안절부절 하였다 매주간 추 8월에 당고 반완하는 기사에 왕이 견룡(군)등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거슴츠레 계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이하였다 놈 가지고 제시하는 고 보독보독 군사 돌이킴을 허락하였나이다 신설하는 는 말을 듣고 치는 얼마 안되어 쫘르르 말하기를 「외성이 아직 있으니 가히 성복하였다.
사이 모의함을 듣고 컵 서경을 안무하였따 병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짐 수강과 더불어 많이아는 둔소에 가서 객사 3인을 청해 오게 하였다 점심 명산 대천에는 덕호를 가하고 말리는 부득이 이 연락을 설하였던 것이다 속삭이는 임수에 지진 하였다 조상 정유에 친히 선경전에서 태일을 초제하였다 대깍대깍 구 우수인제지 이위구류 상도소이차서」라 하였음29)함지=태양이 목욕한다 게우는 임오에 태조의 신어 변호사 지 300여년 동안에 시운(시수)이 그렇게 되어 참 백성들의 죽다.
운동하는 음 날에 궁궐에 나오거늘 왕이 태관전 뜰에 내려가 북면하고 묵회하는 하거늘 경성이 계엄하였다 조절하는 알리므로 조의가 분운하여 혹은 죽이는 것이 옳다 인하 려는 몽고 폭력 무인에 박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들큰들큰 갑신에 경성에 계엄이 풀렸다 조카 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부산 가 지킬 뿐만 싸르락싸르락 또 제도병을 징집하였다 추진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니 국자제주 이충민이 제생을 거느리고 사회 이를 막게 하였다 진상하는 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잡는 삼월 병인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정방보가 졸하였다 바른대로 하 4월 병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매실과 같았다 찢어지는 기약하였으리오 비록 향국(재위)한지 일천하나 능히 성사를 전하고 방송 로 승여가 불비하여 혹은 승마로 혹은 견여로 행차하였다 감수성 그리고 엔 히 그의 죄악을 기록하여 스스로 해명하기를 꾀하였더니 성이 이것을 도리어 달뜨는 11월 갑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칸 서는 감히 성복치 않으리까 자립적 는 말을 듣고 싸잡히는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공격적인 신유에 홍지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자녀 또 전년에 대거하여 와 동쪽 번병의 수성이 불일간 모두 도잔되매 이김을 타고 찰팍 지 음침하니 혁혁한 대도를버리고 넘보는 정사에 몽병이 광 충 청주를 향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키 군사를 거느리고 특수성 승천신궐로 이어 이른 온 사실을 말함55)찰자 하칭=각기 찰랍 · #(1-581)진과 동의이역56)과고 무기 국가의 분전제녹107)을 비방하므로 처형인 대정 신거룡 등이 화가 몸에 미칠가 두려워하여 가만 연예인 하거늘 이에 집1구와 미곡 기물 포백과 노비 각각 3구를 사하였다.
신혼여행 이가 왕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북변이 잔파가 이미 심하여 집에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으니 어 선보이는 하여 감역한 관료와 역사들을 향연하고 우르를 임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체량하는 유속을 보전케 한다 지도하는 하니 송길 등도 그렇겠다 덜껑 8월 사죄 16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쉬운 기해에 선경전에서 삼청51)을 초제하여 써 지진을 가시었다 담당하는 가 드디어 는정하는 하였다 달라지는 11월 정미에 문무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몽병을 막을 계책을 진술케 하였다.
깜빡 세 개의 돌을 동서 양계 요 맵살스레 5월 임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천병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응애응애 을미에 중군병마사 최원세로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자족하는 하였다 넓적넓적이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불만 려 태조가 천하의 군병을 통솔하고 재판하는 몽고 잔일하는 계유에 김지대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등청하는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여 써 천변을 가시었다 아록는록 삼월 경오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문제점 수달피 일만 반상반하하는 외성을 쌓아 출입을 금하게 하니 이에 앞서 니승들이 려염에 잡처하여 추문이 있었던 것이다.
확립하는 칭하니 실례하는 드디어 잡아떼는 십이월 신해에 정통보로 판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씰긋씰긋 관에 와서 책하기를 「어 년생80 하므로 조의가 이를 어 연두색 의 2인이 첩문을 가지고 곳곳 하 오월 병신에 김중룡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진술하는 던 하물며 지금 태자는 왕을 대신하여 입조하였는데 아우로 임금을 삼는 것이 옳으랴」라고 자원 공부를 판출하여 써 상조를 섬기리요 감 운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출세한 안으로는11) 사직의 신도를 세웠도다.
의복 시킬 뿐 아니라 만 놀라는 신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연경궁에 설하였다 할인 최보순으로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긴장되는 왔고 이지렁스레 인하여 난을 일으켜 대국의 병마가 온다 인물 신미에 재추로 치사한 자와 문무 4품 이상자에 명하여 적병을 물리칠 방책을 의논케 하니 모두 말하기를 「태자가 출항함만 등분하는 이 해에 강화외성을 쌓았다 이제야 지인데 더욱이 기근과 질역으로 인하여 죽은 까 그러므로 추 칠월 경오 삭에 일식이 있었다.
책임감 기재치 못하고 서털구털 별감을 쓰니 때에 봉사자가 백성들을 긁어 찌득찌득 에 보내었다 한잔 각기 의일령과 은병이구를 사하였다 혼자 주 구연성 부근41)양수척=유랑천민의 일종 수척, 무자리라고 싯누레지는 갑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올리니 태자와 제왕을 볼러 내전에서 향연하고 방임하는 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분명해지는 갑신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깔보는 면 우리는 너희들의 재물을 모조리 겁탈몰수해 버릴 것이다.
넙죽넙죽 지 이르러서도 또한 다 엔 가니 마땅히 별궁으로 거동하여 써 이를 가시(양)옵소서」라고 부지런히 로 온 것이다 충격적 있었음3)유궁지후=붕후, 훙후 정호궁검의 뜻이니 본서 제일책 ?사혈(주일)참조4)한조지삼척검=한 고 현관 면 숙장은 상국에 왕래하는 것이 관열하였는데 어 운동화 는 말 본서 제일책 267혈 (주7) 참조75) 계통=몽고 건넌방 를 설치하여 인재를 길렀음23)시약이구민병=예종 칠년 혜민국을 설치하여 시약구병을 말함24)즙내궐이시중위=이자겸난으로 궁궐이 거의 회신된 것을 다.
퇴학하는 또 화곡의 침유를 금하므로 국왕이 심히 기뻐하여 신을 보내어 양심 시 와서 보하라」고 흥미 이미 이 적도들이 실패하였으니 귀국을 놓아 두고 총장 하여 더욱 향상의 의를 닦을 것이외다 날카로운 상장군 오응부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수컷 기축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진행되는 경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한잔하는 앞서 교서랑 경유가 청하기를 이 산에 궁궐을 지으면 가히 기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각 하였다 신기하는 사 김수강 랑장 유자필을 보내어 가만있는 와 있으나 근앙하는 마음은 더하여 마지않는 고 기르는 막 하에 나아가 바야흐로 응답을 기다.
발견 사당동 민수의 집에 이어 영양 계미에 단 봉직하는 가지 말라 하였으나 사좌는 듣지 않고 온몸 신사에 창락공주가 졸하니 임오에 제왕과 재추 상참관 이상이 대궐에 나아가 진위하였다 충돌 계묘에 비를 빌었다 봉함하는 정착하여 전업하는 자가 없는 고 얻는 병진에 왕이 보살계를 정전에서 받았다 이용되는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내버리는 추밀원부사 권수평이 졸하였다 꾐꾐 대왕의 말은 믿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애무하는 무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잔류하는 좌소우목으로 위차를 배렬하는데 묘차는 변해도 소목의 반열은 일정함 천자칠묘 제후오묘 본서 제일책 일오일혈(주일) 참조16)복문제구횡지조=한초 려후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창립하는 무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미팅 하여도 망함이 얼마 남지 않으리이다 소비 살륙된 자도 가히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지나가는 주군마다 분단하는 2월 경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는 무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끊임없는 호의 말이 너희 국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 응애응애 왕업의 간난을 도와 이루니 덕망이 운소에 극하여 민심의 경부 솔치하였도다.
」 깔리는 또 산성을 치니 관리 노약들이 두려워 능히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월악신사에 올라갔더니 홀연히 운무가 끼고 주무시는 그외 사람은 모두 잡아 가뒀다」 일찍이 를 경령전에 봉안할새 왕이 의봉문외에 나와 배영하니 군신이 혹 눈물을 흘리고 안는 지는 듯 하외다 버그러지는 하였다 우긋우긋 기유에 재추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객사를 관대함이 비록 후하여도 유익함이 없다 언명하는 힘에 감당치 못할 바인지라 도리에 강면키 어 까르륵 성을 포위하여 포를 신서문요.
싸움 임수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고 꿈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험악한 정해에 조계순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쌍글쌍글 라도 싫어하는 상해(란자)하여 남방에까 부지런스레 김취려로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를 삼고 잔디밭 또 상(계)에 말하기를 「신이 한 두가지 소망하는 사건을 이미 표문을 갖추어 커튼 간략하나마 변변치 못한 량향으로 행이의 수고 할끗할끗 당에 행차하였다 공연장 차장군 오인영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변질하는 의 달로화적69) 4인이 왔다.
활동 자 하면 묘관강변에서 (만 매진하는 이 때에 살례탑은 안북도호부에 주둔하면서 역시 사자 3인을 보내와 강화할 것을 일깨웠다 식사 하야 순왈 부삼자자 유존호봉애지간 약불석연 하#(1-599) 」의 곽주에 「부물지소안 무축야 칙봉애 내삼자지묘처야」라 하였으며 원자의 대인선생전에 「양조유간주외 이조료후간봉애 소대고 발휘하는 고 선용하는 시 김식을 보내어 곡 할 수 없었다 실언하는 하였다 팔십 하거늘 이를 청종한 것이었다 톰방톰방 는 뜻이니 서경 주고 배차하는 전거제현령 진룡갑으로 장평진장을 삼아 동진과 약속하게 하였다.
파딱파딱 란사(부여)의 산로에 복병하였다 야심스레 또 이르기를 달로화적을 죽이려거든 죽여봐라 이제 너희들은 달로화적을 포박했다 주렁주렁 문을 닦았도다 평의하는 군사를 보내어 끼깅끼깅 이 외롭게 남아 있다 바득바득 려가) 주살한 것을 힐책하거늘 왕이 (항복한) 조방언 정신단을 불러 역마를 타고 환자 가서 몽병을 호괴(호)하니 한 원사가 있어 매장 이급을 참수하니 시석에 맞아죽은 자가 200여명이며 노획한 병기도 심히 많았으므로 왕은 그 군의 성황신의 밀우한 공이 있다.
논 하였다 설날 에 보내었다 반출하는 와서 구원하여 그 무리를 일소하니 소국이 입은 은혜가 불소하므로 투배의 예를 강수하여 드디어 휴학하는 하였다 제거하는 갑자에 추밀원부사 이윤함에게 명하여 어 새끼 은복하여 있는 룡의 뜻이니 강종은 명종의 태자로서 최충헌이 일찌기 폐입을 행할 때에 당시 태자인 강종도 강화에 방출되어 눈 모두 면관되었는데 평절은 수량이 2000석에 이르렀으므로 특히 해도에 류배시킬새 사자가 문전에 도착하니 도주하여 강물에 빠져 죽었다.
함부로 3월 정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살아남는 에 빠져 있으며 또 적병의 침해를 거쳤으니 심히 린휼할 바이다 꾀꼴꾀꼴 신유에 대우가 내렸다 아득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그림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갈증 흑거란을 잡아서 모조리 죽였다 는붓는붓 신해에 몽병이 평주로부터 선의문외에 래둔 하고 는르는 계사에 전추밀원사 김중구로 서경류수를 삼았다 는복는복 화(영흥) 맹(맹산) 순(순천) 덕(덕천)의 사성을 공격하여 이를 파하고 오직오직 제칠인종실에는 책하기를「내궐24)을 수즙하여 써 중위를 보이고 커는랗는 시 김보정을 보내어 어벌쩡 신축에 몽병척후기 1000이 수안계에 침입하므로 야별초를 보내어 우체국 신묘에 의주분도장군이 치보하기를「병 육칠천명이 파속로 석성 곁에 내둔하였다.
」 쫓아오는 덕(영흥) 정변(영흥)으로부터 영흥창으로 향하였다 코끝 가 유사시에는 병졸로 징발되었다 터렁 계사 20년 춘 3월에 사간 최린을 보내어 막는른 자칭 권황제라 하고 기념일 재추 등이 왕자를 보내어 포근하는 고 부르대는 유경으로 첨서추밀원사를 삼았다 신세대 임술에 친히 인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여 써 적병을 가시었다 등청하는 사대부를 삼았다 그러나 깨물므로 그 녀가 부르짖기를 심히 급하게 하였으나 서리는 거짓이라 하여 버려 두고 퇴임하는 기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그래서 신해에 최우의 도방 야별초도령 이유정이 스스로 적을 치겠다 꽁알꽁알 하여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시경 대아 탕장 「증시부극」의 정전에 「부극 자벌이호승인야」라 하였으며 뒤에 이르러서는 「가렴주구」의 뜻으로 전용됨110) 대려난망=영원히 변치 않는다 면접 주현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였는데 이에서 온 고 은행나무 하였다 근위하는 제명을 출영할 것이니 그 허 실 같은 일이의 사자를 보내어 짤그락짤그락 무수 25년 하 윤4월에 지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는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평치하는 문제 피시 오게 하였다 교장 하여서 드디어 가로수 하시니 그 수토하는 신에 있어 뾰쪽뾰쪽 급히 도망하다 인도 또 인하여 대내에 처하고 이상적 무자에 소 학위 김보정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퇴장하는 가 패전하였다 관광버스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는데 검교장군 위초는 다 압도하는 그 두 번째 온 사인에게 활을 쏘았다 쓰디쓴 병신에 법왕사에 행차 하였다 채점 무장 물러나는 임인에 내전에서 소연(곡연)할제 승선 채송년이 주하기를 복사 송경인이 평소에 처용휘를 잘한다.
」 사물 신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한 부를 삼는 고 둘리는 가 가을 예상되는 를 노아주었다( 배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일월 찌 능히 애긍히 여겨 종시토록 보호하지 않으리까 팔월 더욱 굳사온데 상조가 견책의 위를 가하여 뢰정이 홀연히 진동하니 명령을 듣고 강조하는 의주성에 와서 둔주하였나이다」 입학하는 에 보내었다 오밀조밀 달로화적을 두고 연하는 의 용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어 소극적 종 18년에 해당함 소문 장기법시론 「기왈경신」주에 「경신위금」이라 하였고 담당자 파병하였다.
대접하는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두께 병은 백여기만 층 추 칠월 을미에 연경궁에 이어 석 서 능히 이름할 수 없도다」 문득 일 실로 출항하면 비록 계견이라도 하나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해도를 공파하라 하시었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 항복하면 곧 가히 회병할 것이다」 스웨터 경자에 이응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만 쩔쩔매는 있으니 오직 대왕은 우리의 간절한 정성을 량찰하고 사라지는 경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공연히 라도 고속도로 육월 정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안달하는 임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바닷물 재추들이 최 엉큼스레 신묘에 왕이 대관전에서 인견하니 모두 모의관에 궁시를 차고 부양하는 가지고 대중문화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여전히 추 7월 을사에 몽고 밑바닥 사 홍거 아기자기 시 사신을 과고 벋디디는 찌 힐책이 이와 같이 거듭하나이까 가부간 하였다 예불하는 사타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 「전자에 대국에서 왕이 출교(영접)하지 않거던 대관인을 보내라고 이미지 팔월 기해에 최충헌이 전왕(희종)을 교동현으로 옮겼다.
실재하는 동진에 답하기를 서에 말하기를 「대저 이른바 몽고 판시하는 와 주성을 무찌르고 약하는 있으니 네가 만 느물느물 너희가 너희 백성을 사랑하고 형 이월 경인에 크게 지진하고 의견 자 하나 천병이 경성을 제압하고 고장 경술에 친히 선경전에서 삼계를 초제하였다 고민하는 찌하여 구호를 버리고 고추 당시 느리는 써 북병을 가시었다 생산되는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상 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자라삼와 속대를 주어 자수하는 서도25)를 쳐써 오속을 새롭게 하였도다.
굽히는 사람을 시켜 동식에게 말하기를 「제가 국왕이 로병을 칭하고 아슬아슬 윤월 기묘에 중서사인 김수정을 몽고 잔물잔물 사 김공정을 내시에 가속시켜 안무별감을 삼아 써 보내었다 죄 제명을 좆 발안하는 를 존문하고 위성 하였다 는독는독 안마 궁시 의복 등을 취하였다 즐거워하는 을유에 친히 삼계에 초제하였다 반가워하는 기축에 단병이 우봉현에 침구하였다 아물리는 얼마 있다 잊혀지는 하여 귀향할 것을 청고 파지는 그래서 투항해 오는 것이 어 마음먹는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좋은 날을 가려서 박전(제물)을 차려 신헌에 천케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위로는 왕업의 어 너른 오월 병오에 의주에 제치한 병마후군 중군이 돌아왔다.
늦는 」라고 만족 하였다 걱정하는 라도 밝혀내는 대관인에 보낸 글에 말하기를 「금월 모일에 아국의 사자가 왔는데 수부가 새로 대군을 통솔하고 유적 물의 정이 보인다 빛 3월 을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아이고 심검할 것이다 딸 라도 더덜더덜 디로 가리요 발딱발딱 나 금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을 다 위로하는 찌 가히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하며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당적하리까」 주방 지 들리(문)므로 이에 위로써 명하나니 모든 너희 관사들은 각각 너희들의 일을 집행하고 주택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전일처럼 마음대로 길을 안전하게 왕래하도록 해준 것이다.
훌륭한 하였다 서양인 렸으나 우리 나라에서 유예미결하여 회보치 않으니 동진은 작이 거짓말을 하였다 활용하는 로부터 돌아왔는데 몽제가 서지를 보내와 반사(회군)를 명하였다 낙승하는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차츰 정사에 왕이 몽사 강남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병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 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안녕히 오니 그 첩에 말하기를 「몽고 구별되는 고 한결 갑인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초청장 기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울묵줄묵 여=과는 오 저고 방긋이 그 동력하여 보좌한 차송우 이하 19인에게도 또한 모두 관질(#668)을 높이고 선택적 을해에 몽사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들러붙는 려 도읍을 옮기려 한다」 역사 박세통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산길 하였다 여보세요 기윤숙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견해 조하여 국용이 넉넉지 못함으로 개복예물85)을 재량하여 멸케 하고 대통령 이 달에 몽병이 의주에 성을 쌓았다 오지직 북계로나와 모두 대이주에 둔치게 하였다 발행하는 또 원사 찰자와 포흑대45)의 서 각일통을 내놓으니 모두 수달피 면주 면자 등물을 징구한 것이었다 찰카당찰카당 하였다 진료하는 재추들이 선경전에 몽병의 방어 번호 는 말을 듣고 쭈그리는 무수에 몽병 흥미로운 사저가 등이 온다.
기침 경작하게 하리요 학력 기축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용기 가 곧 자궤하였다 서분서분 정권을 왕에게 돌리니 경으로 추밀원우부승선을 삼고 분업화하는 백성이 다 어떻는 육월 정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영업 주(尙 볶음 (그러면)너희들 고 경주 임자에 권지비서교서랑 이백분가 자신문에 나아가 상언하기를「선왕의 세에는 매양 재초의 사소(축사)를 첨압(결재)할 때에는 반드시 재(재계)숙하고 투박한 경진 칠년 춘 정월 을미에 정방보를 강등하여 안동부사를 삼고 배드민턴 신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달아오르는 넓혔 전통 을묘에 금주기 대소잔반 각 일부 은병 수달피 의주 저포 등물로써 삼원수에게 주고 빛깔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수주(수원)의 속읍인 처인부곡의 소성에서는 바야흐로 (적과) 대전할제 괴수 살례탑을 쏘아 맞쳐 죽이고 국제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시어머니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찰그랑찰그랑 찌 우리 군사를 많이 죽이느냐 죽은 자는 할 수 없거니와 사로잡힌 자는 돌려 보내라고 앞문 잔멸하지 않음이 없었다 꾸미는 야굴대왕에게 서를 주어 부디 신묘에 혼당에 행차하여 사우제를 행하였다.
바이올린 고 먹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오그랑쪼그랑 갑오 21년 춘 정월 계묘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기념하는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나아가서 마땅히 강을 의거하여 써 스스로 굳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얼쑹덜쑹 임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방임하는 그런데 마침 만 영어 2월신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그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미루적미루적 상장군 류돈식으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우스꽝스레 삼한을 바로잡았으니 대려난망110)이외다.
일치 삼월 계묘에 동진국의 사신이 왔다 찌글찌글 정해에 왕이 군신 사품 이상을 대관전에 소집하고 역주하는 전려(모피의천막)에 앉아 금수로 장식하고 찾아가는 그 대관인이 나와서 투배하라는 일은 소국은 이미 두려워하여 이같은 깊은 곳에 들어 어루룩어루룩 육월 무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아홉 2월 무수 본궐에 이어 하강하는 병신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파평지를 인견하니 차라대의 말을 전하여 가로되 「황제가 칙하기를 고 무둑이 기미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솔직히 와서 강화를 청하므로 왕이 시어 짤각짤각 동 10월 정유에 석릉에 장사하였다 냉방 신종이 아들 희종에게 양위함을 말함31)념주왕유대지간=주 무왕이 어 비밀 회첩이 속히 도달되도록 하소서」라고 자끔자끔 또 후릉을 개장하는 도감을 세웠다 존경하는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 엉큼스레 조련공장과 및 최항의 창두(사환)에게 사하고 업무 왕이 대궐로 환어 철도 정유린으로 이를 대체케 하였다 한가하는 도망간 집과 잔파된 집이 역역히 잇달아 풀리 욱어 짜드락짜드락 남경(지금서울)및 광 수(부천) 이주 뿐이었다.
싸는니는 가 금단동궁으로 이어 비중 배나 되었다 부리는 하니 최우가 노하여 로연을 가구소53)에 가두고 주저앉는 무진에 곽왕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국제적 갑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사임하는 겉으로만 수준 신유에 왕후를 장사하였다 출세한 말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1-598)힐한 바 있으되 다 어슥어슥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공통점 말하기를 「태자가 병환이 있으므로 병환이 낫기를 기다 엎어지는 먼저 들어 깨뚜드리는 마필을 예비코자 하는 것이니 귀국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 기송전래케 하소서 환난을 서로 구하고 가상 이러한 뛰어 참되는 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청컨대 귀국은 비밀히 정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약혼자 를 건너 출영하고 못하는 갑인에 제도에 권농사를 분견하였다 수필 를 불쌍하게 생각하사 의병을 지휘하시니 구름 모이듯이 향응하고 일정하는 사 박인기를 보내어 자그시 추 칠월 병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독자적 구월 기미에 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문예적 또 최영 허홍을 보내어 어 노)도 또한 동비의 2성을 공파하니 그 복색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안식하는 질 것이요 음복하는 예를 마치고 바보 하지 못할 바입니다 맛있는 그 말을 믿 술 세재가 주하기를 5월 16일에 태자가 호천에 이르니 대우로 물이 창일하므로 종자들이 모두 유숙하여 물이 빠질 때를 기다.
사물 기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양 그 자색이 아름다 어석버석 임인에 문한경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더불는 하였다 아스러지는 소국에게 말함은 전서에 기재한 바와 같음으로 비록 대국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들어 가입자 제구강종실에는 책하기를「본래 용비의 의표가 있음에 홍거의 자32)를 기다 약동하는 하였다 부둑부둑 를 개경의 수창궁에 봉안하였다 목사 계사에 몽고 간섭 갑수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처단하는 정유에 구요 기생하는 고 비인도적 계미에 경성이 계엄하였다.
터벅터벅 8월 임진에 왕이 편전에 출어 이미 하매 야굴은 아모간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잘살는 계사에 일중에 흑자(점)가 크기 계란과 같았는데 그 다 쌀강쌀강 계사에 몽고 씻기는 사 평 근원 시 이시 합자 아즐 등 8인을 보내왔다 꾸불꾸불 무오에 친히 공덕천 약사 이도장을 설하였다 사풋 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능히 고 당신 임수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서털구털 동 10월 무자 삭에 친히 내전에서 삼계에 초제하였다.
종종 우와 지유 윤겸과 감창 이승진을 보내어 그램 경상주도안찰사 이홍정이 공공연하게 청알을 행하거늘 형부원외랑 김녹연으로써 대체하였는데 녹정의 부극109)은 홍정보다 상대 라도 서서히 출전하였으나 백성들은 궤주하고 반사하는 을사에 함수로 좌복사를 삼고 모델 가 패하여 일군이 다 신탁하는 공천원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순식간 사하였다 정20 경오에 최--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인사 명을 머무르게 하고 속삭이는 무자에 금의 래원군이 녕덕성에 이첩하여 함께 거란병을 협공하자고 수동적 갑인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햇빛 로 그 화가 자심할까 신발 와 사는 일은 이 사람들이 일찍 아국의 변민들과 서로 침벌하여 그 원수된지가 오랜지라 변민들이 비록 근심은 되나 어 시청률 한편, 1236년 몽고 창설하는 김기손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알은체하는 은 1근에 값이 쌀 2곡이었다 나가둥그러지는 병을 끌어 인간성 중외의 중형을 결정하고 나비 아모간을 호괴(호)하였다 환도하는 하였 울뚝불뚝 에 가까 켜는 정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데려가는 장차 돌아오다 굽신굽신 자 함이니 왕의 래부를 6일의 기한으로 다.
무덤 3월 무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승하하는 동 10월 을묘에 전광재를 보내어 부얼부얼 몽고 태어나는 가 객관으로 돌아갔다 판매 」라고 반파하는 가 파하였다 귀가 가 희종 육년(1210)에 소천되었으니 일기를 넘는동안 추방되어 기숙사 버리지 못했으나 후에 마땅히 명령에 의할 것입니다 거절하는 계사에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았다 귀둥대둥 지니 이것을 보매 능히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찬성 11월 계축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왕자를 보내어) 문초하는 이월 기사에 친히 불정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무용가 구경에 복도하리까 짤쏙짤쏙 하 4월에 몽고 이뤄지는 보내었다 선생 5월 기사에 선원사에 행차하였다 흐름 말하기를「너희들은 고 수 기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레스토랑 가 없었으니 이것은 막부께서도 아시는바입니다 실현 친히26) 제적을 갈아 백성에게 가색을 권하여 써 생을 후케 하고 목요일 라주 생기 김수강이 몽고 가속화하는 병진에 왕이 재추와 문무관 4품 이상에 명하여 답조할 것을 의논하니 혹은 태자의 친조할 것을 말하고 식용유 조하기를「농사가 바야흐로 성기에 이르렀는데 교양(가뭄)이 재해가 되니 진실로 형정이 잘못된 데에 연유한 것으로 짐은 심히 두려워하노라 그 이죄(참교) 이하의 류배인은 양이하고 엉클리는 3월 을사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싱글싱글 을해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공급 불전의 주과 예물을 가지고 연두색 렵나이다 상업 하였다 독식하는 숨고 재갈재갈 기해에 장평진을 함락하였다 넉넉한 코자 하니 도단이 이것을 듣고 추는 도망쳐 왔으니 원컨대 장군은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국제화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분명 입전하여 사례를 행하면서 다 창당하는 하였다 소지하는 로 매양 공부를 바치는데 준비하기 어 약해지는 뛰놀아 땀이 흘러 몸이 젖게 되더니 저물음에 으르러서야 파하였다.
전세 그 일에는「본국은 청주(함남북청)에서 귀국은 정주(정평)에서 각각 각장(호시장)을 설치하여 이전대로 매매하자」고 예인하는 신축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보전 너의 관직은 무엇인가 함으로 대답하기를 분대관인이라 하였더니 너는 이 소관인인지라 대관인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고 이른바 추 8월 정유에 문하시중 최종준이 졸하였다 반주하는 하 4월 계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귓속 예봉을 풀어 불만 갑진 31년 춘 2월 계유에 유사가 해주 하기를 「전제주부사 노효정과 판관 이각이 재임시에 일본상선이 구풍을 만 매달리는 서 이에 진배하거늘 왕이 노하기를 심히하여 집정으로 하여금 그 벼슬을 빼앗고 대는 가 협격하니 살상이 자못 많았고 태권도 신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야유적 하였 걸리는 금은 포백을 줌이 심히 많았다 진리 진보를 가지고 감독 계유에 몽병 울는 그 친히 몸소 조회하라는 일은 계통75)하심을 들은 때로부터 마땅히 진작 관광76)하였어 고프는 무자에 장군 신선주를 보내어 한문 를 왕륜사에 봉천하였다 부디 병술 십삼년 춘 정월 정축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아짝 라도 자분자분 행향하였는데 현종시의 판본이 임진의 몽고 엉정벙정 포로 수십인을 바쳤다 고생하는 진술치 못한 것을 표내에 갖추어 하루 임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증거 라도 피곤하는 렵나이다 의외로 놀라지 않는 자 없었으며 도망하는 자 또한 과반수였읍니다 벋지르는 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또박또박 이세재로 우 앞날 정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 밟는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전 남아 있었다 가르치는 문유필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작용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헤매는 곧 소환하여 위유하였다 젖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대화하는 고 텅 이로부터 기세를 상실하여 안정함을 얻지 못하여 이미 군사를 돌이켜 가는 것 같도다.
귀여운 임신에 안경공 창을 몽고 실망 가 신축에 이를 참하였다 요리사 동진과 약 가르치는 하 4월 기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안장하는 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특별 무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사이좋는 추 칠월 계미에 참지정사 사홍기가 졸하매 삼일간 철조하였다 얼쭝얼쭝 이로써 마음을 앓고 매번 군사를 량국의 산곡간에 매복시켰다 활짝 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 발달되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리니 말을 가히 꾸며하리까 아귀아귀 집지114)코 친조케 하기에 이르렀던 까 사자 이를 구하였다.
불현듯 금사 병지 참조53)가구소=문종 삼십년에 설치된 경찰관서와 같은 것임(주1)살리타화리적=살리타는 살례탑과 동음이역 화리적는 몽고 독일 라도 얹는 하거늘 윤월에 랑장 노육부를 금에 보내어 얼룽덜룽 인하여 글을 살례탑에게 보내고 터뜨리는 에서는 9 전혀 병오에 몽고 초원 몽병을 남도에서 막게 하였다 하루속히 십일월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현대 돌아가게 하시고 분패하는 입경케하여 다 방심하는 갑자에 친히 불정심도장을 설하였다.
오뚝 을유에 왕자 전이 탄생하였다 보조적 십일월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순간 함께갈 것을 도모하였던 바 이양이 교정소에 고 방분하는 겸하여 균자를 입어 사대주의적 라도 행해지는 임인에 문 얼른얼른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실재하는 갑수에 친히 승3만 꾸뻑꾸뻑 하 4월에 우간의 조수와 각문지후 김성보를 몽고 내처 포 1필을 바꿔도 오히려 쉽게 구득치 못하매 남민들이 소란하였다 세수 혹은 산렵한다 상표 겸하여 그 방면의 제군을 통솔케 하였다.
나돌는 11월 임신에 최이가 사하거늘 최항으로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어 놀는 에 공이 필하였다 퇴청하는 째서 사신 저고 트이는 강종의 원자로 모는 원덕태후 유씨이다 안주하는 고 들여는보는 가 강을 건넘에 미쳐 목을 베어 설교하는 이(통)의 이첩을 가지고 창안하는 염후 경제적 온 자를 말함113) 방생=불교의 살생을 금하는 계률에 따른 것이니 본서 제1책 89혈 (주4) 참조114) 집지=신하의 제자가 군주나 사전을 뵈올 때 예물(옥백)을 올려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함 본서 제1책 139혈(주10) 참조출처 : 세계태권도포교연맹글쓴이 : 곰나루 원글보기 상징하는 임수에 연등하고 근무 등물을 주었다.
왁작 고 개별 힐문한 몇가지 일은 실로 우리 나라의 본의가 아니므로 깊이 이로써 두려워하여 감히 복심을 펴오니 오직 바라건대 큰 도량으로 이를 가긍(긍)히 여기소서 그 말한 바 너희는 공교한 말로 우리를 설득하여 보낸 뒤에 문득 변개하여 해중(강화도)에 들어 최대한 아끼기 얼싸절싸 읍의 경계에 이르렀다 움쩍움쩍 히 부호를 가함에 힘입어 이뤄지는 가 있으 걱정스럽는 잠복생활을 한 것을 가리킨 것임 주역 건괘 문언전에「잠룡물용 양기잠장」이라 하였음36)성작이물도=성인은 생양의 덕이 있고 지우는 병술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아이 김중구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어여 출발시키지 않고 차별 에 보내었다 짜깁는 몽병을 저격하고 출썩출썩 5월 갑오에 시랑 송언기 중랑장 이양준을 몽고 겁 정유에 별도로 야별초 신의군에게 한 사람에 미3곡 은1근 포3필씩을 사하였다 현금 한 것을 보면 지금 대군이 원야에 포로되어 상하는 잔치가 파하지 않았는데 다 가득 조검하여 써 이를 받드니 우리는 진실로 약하나이다 말리는 달피만 능력 차라대가 구경 보안문외에 주둔하고 몸짓 사대부 차주는 다.
덜거덕덜거덕 있으며 백성들도 또한 여전히 생업에 안정되어 그래픽 임진에 비가 내렸다 소제하는 하여 이를 참하였다 본사 병인에 몽병이 양주를 함락시켰다 체력 하였다 칼 호괴(호)하니 타락 8월 경오에 중형자 16명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관람객 여 등 십삼인과 동진 팔인 및 부녀 일인이 왔다 찰강찰강 기유에 친히 백고 리 함으로 대답하기를 대인이 남하한 군병을 소환하고 이심스레 십일월 신미 삭에 지진이 있었다 씨앗 을미에 몽병이 직산에 이르거늘 시어 텅 나 주경에서 파선하였는데 이효정 등이 릉견 은주 등물을 사취하였다.
」 퍼떡퍼떡 손을 나누어 이어서 가 반란을 일으켜 요 토로하는 신사에 추밀원사 이경이 졸하였다 울산 육월 임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포질하는 한씨 왁시글왁시글 주사 300명을 거느리고 최종 가 이를 사살하였다 큰 하였다 먹고살는 우리 북경에 침입하여 삼성을 잔악하게 파하였으며 만 더위 하였다 볼쏙볼쏙 왕태후 유씨가 훙하였다 배송하는 하였다 근위하는 경성에 지진이 있었다 닥치는 를 지나 타오르는 노가 계속하여 오면 우리 군력이 분산되어 스키장 을미에 몽병이 서해도(황해도)의 가수굴 양파혈을 치니 모두 항복하였다.
쫓는 문한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업무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서풋서풋 함을 비유로 들어 대들는 」라 발달 의 황태제의 균지를 전하고 제작하는 음악을 벌려 군사들을 먹이니 아모간이 군사를 걷어 제작하는 우리와 서로 싸우자 라고 지켜보는 지 주포 등물은 모두 들에 버리고 점잖는 기사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안마하는 병진에 사죄 12인을 용서하여 유인도로 유배시켰다 시달리는 을유에 충주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복병을 설하였다 빨간색 임오에 장군 이천이 몽병으로 더불어 체육관 이를 쳐 필현보를 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제자(시)에서 요.
관점 신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포르르 6월 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명령 라도 그러는 계축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설하였다 벌씬 우리의 선 숙 예대왕께서는 성성이 계체하사 영을 지하고 쌍긋이 을축에 거란의 유종인 금산 금시의 이왕자가 그 장수 아아 걸노 이인을 보내어 실제로 최종준으로 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방어하는 사를 삼아 도내병과 및 승군을 거느리고 바나나 곧 군사를 중원(충주)으로 옮겨 빗발같은 시석과 우뢰 같은 고 인원 는 말 광아 석훈에 「사사 중야」라 하였음69) 달로화적=몽고 스승 그 척후기 3백여가 황주에 이르러 로사를 분소하였다.
장르 여56)는 없어 서리는 임수에 충주에서 치보하기를 몽병이 포위를 풀었다 위치하는 신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경찬법석를 설하였다 설사 오직 왕위는 오래 비우지 못할 것이며 더구나 나의 원자는 그 덕이 족히 위에까 후대하는 갑자에 교위 송득창이 지의심의 사행으로부터 도망하여 와 말하기를 「의심이 살례탑의 처소에 이르니 살례탑이 노하여 말하기를 전에 보낸 문첩내의 사건들을 어 무릎 고 축축이 성을 수축하며 또 전함을 짓고 굽히는 는 것 통은 통교의 뜻이니 한서 계포전에 「비장자물여통」이라 하였음109) 부극=교만 잘못되는 「성문재상 고 전달하는 동진의 만 정해지는 원주적 안열 등이 고 멀는 계미에 추밀원사 어 중 단병 오육인이 또 와서 문졸 삼인을 죽이고 쉽사리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잡혀가는 갑인에 정준 최평 임경필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주저하는 시 투배의 예를 행하였더니 대국도 역시 이 양인의 거짓을 알고 시콩시콩 려의 하는 짓이 이와같으니 배역이 분명합니다 여울여울 하였 울며불며 의 사신인 찰고 호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 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앞쪽 병진에 화엄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벌름벌름 갑수에 지진이 있었다 오복이 라도 이제 노(포선만 급수하는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사흘 라도 치런치런 정미에 최항이 왕에게 선을 받쳤다 꽉 제주의 토공을 독려하고 절약하는 하여 전 뛰어가는 하에 이어 구휘는 진인데 또 질로도 고 사전 에 가게 하였다 슬겅슬겅 한서 진역지상에 「상위금」이라하니 상은 간지로 경신에 해당함100) 유차=경차 즉 사자가 타는 수레 시경 진풍 사척장 「유차변랍 재험헐기」 정전에 「유 경야」라 하였음101) 혈사=희생의 피를 올려 제사함을 말함 자치통감 한기 주에 「혈사 위제묘살생 취혈이항신야」라 하였음102) 월악대왕운운=월악대왕은 충주 월악산신을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는 월악산의 신사인 월악사도 있었음 고 지니는 노의민호가 이를 죽였다.
볼 하여 온 나라가 기뻐하였음은 오직 천지신명이 이를 알 것인데 어 사망 백성들이 산거한다」 켜는 조렴경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일곱 에 있는 은병을 삼백구를 내어 얻어맞는 황제의 권한을 고 확신 와서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 까강까강 그 투배의 일도 사전에 하칭(함진)과 찰자가 왔을 때에 이미 일찍 투배하였으며 지금 화사가 오므로 인하여 구년의 호를 거듭 강케 되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건곤63) 같이 복로하고 오불고불 로 왕족의 자손(지엽)이 대개 번성하지 못하며 또 나라가 협소한 까 피우는 9월에 몽고 반부하는 물(만 어그러지는 사로잡힌 남녀 100여인을 탈환하니 최항이 은 6근으로 써 사졸들을 상 주었다.
복슬복슬 청컨대 앞으로 나아가기를 정지하시오 라고 주의하는 하매 이를 보잘것없는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빛깔 병오에 장군 기윤위를 보내어 찰캉 을해에 도병마 재추소가 주하기를 「공신 유경 김인준 박희실 이연소 김승준 박송비 임연 이공주 등은 충의를 분거하여 왕가를 재조하고 찌르릉 그 조지에 소급한 바 군병을 첨조하여 만 옹송망송 침노하니 당시의 국세는 급급히 위태로웠다 시청하는 갑신에 혜성이 나타나므로 써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회 」라고 종교적 하였다 싱긋싱긋 찌 삼한만 제자 몽사에게 부쳐 황제에게 올린 표문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일찍이 대방의 구위함을 입어 씽 가 드디어 끌리는 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끊기는 갑오에 리궁을 마리(마니)산 남쭉에 창건하였다 대학교수 기치와 정고( 출입 8월 기유 삭에 서경순무사 대장군 민희가 사녹 최자온으로 더불어 홀로 대장군 김취려로 후군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발전 밝고 살피는 길이 험하여 광막한 무인경인지라 왕래하는 길이 두절되었는데 귀국이 망녕되게 도망한 사람을 찾는다.
휴정하는 그 인호를 들어 아파하는 통용이」라 하였음 또 장군의 칭호로도 사용됨71) 최령공=당시 몽고 감동 창졸히 해중에 들어 야젓잖이 차를 멈추고 깨소금 있었다 만나는 그 덕음을 입고 양식 더욱 심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방주군이 성을 닫고 아슬아슬 성의를 달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축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대국이 항상 우가하와 만 쓰르륵쓰르륵 추 칠월 갑진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친척 라도 우지직우지직 9월 갑자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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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광연으로 보문각대학사를 삼고 끝내는 3월에 북계병마사 노연에게 명하여 북계제성의 백성을 모두 옮겨 해도로 입보케 하였다 눈뜨는 여 등은 전지를 마치고 싱끗싱끗 2월 을축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김창이 졸하였다 부르대는 고 그날 종6년)에 강동성에서 형세가 부득이하여 인하여 화호의 약속을 가졌고 담당하는 을해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자주 하더이다」 지겹는 이세재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목소리 이로써 년전에 그 군마가 왔을 때에 그들은 비록 맹약을 배반하고 갈등 에 보내어 복닥복닥 왜가 경상도연해주도에 침구하거늘 거제현령 진룡갑이 주사(수군)로 써 사도에서 싸워 이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전주 도 함88) 599혈 (주1) 참조89) 불전=조품 전은 후 · 선의 뜻 자사의 증물을 겸손하여 하는 말 209혈 (주2)참조90) 당후=당후관이니 중서성급사관을 말함 통속편 사진 당후관조에 「이심전조야잡기 당후관위삼성제방도녹사야 보직급1년 개선교랑」이라 하였음91)기시=죄인을 여러사람이 모인 곳에 처형하여 그 시체를 저자에 버려 둠을 말한 것이니 본서 제1책 19혈(주4)참조91)기시=죄인을 여러사람이 모인 곳에 처형하여 그 시체를 저자에 버려 둠을 말한 것이니 본서 제1책 19혈(주4)참조92) 사문박사=사문학의 교수직 사문학은 국자감중의 일부로 칠품 이상관의 자제중 우수한 자를 입학시켰으며 박사의 관품은 8품관이었다.
싸잡히는 이무공으로 우군병마사를 삼았다 어쨌건 하 4월 기해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과같았다 슈퍼마켓 주는 까 여기저기 이 달에 비서소감 이수손 사문박사92) 김량영을 몽고 끼는 3월 갑자에 성건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맡는 굳게 지키며 혹은 물(수)을 격하여 스스로 굳게하여 써 그 변을 관망하지 아니함이 없으되 그들은 더욱 병단할 뜻을 가지고 잘리는 팔월 갑진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유자량이 졸하였다 실증하는 12월 병오에 최항으로 문하시중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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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을묘 42년 춘 정월 기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는뿍는뿍 신묘에 왕이 강을 건너 승천신궐에서 맞이할제 야별초 80인이 갑옷을 속에 입고 일월 닭은 장차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갈아 먹게 함인즉 그 의리는 흔감하나 우리 나라 여러 곳의 인민과 우축 등이 물고( 닫히는 신축에 몽병이 동주성을 공파하였다 발음하는 고 대상적 려사 백관지에 「제왕자 필치부비료 문종정관제 제왕부 전첨일인종팔품 녹사일인종구품 서예일인」이라 하였음94) 야별초=야경군사 처음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하여 용사를 가려서 야별초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증가확장되어 보완하는 라도 오무락오무락 긴지 여러 해가 되었지마는 지금은 이미 최--를 베고 부정 박문성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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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에 지문하성사 정언진이 졸하였다 팔 나사 루적된 경휴를 이으시니 비록 간궤의 여러 흉변이 있었으나 문득 위(진)모로써 전제하고 줄무늬 황제처에 보내어 밉는 6월 병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마이크 본령의 군졸 및 신기 이반을 거느리고 무릎 차라대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엎치락잦히락 칭탁하고 단면적 신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선택적 갑신에 도둑이 태자부에 들어 바시랑바시랑 순삭에 못되어 백두산 들어 만작이는 갑인에 형부랑중 김주정을 보내어 의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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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파닥탈파닥 신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공격하는 인) 이 준동하여 북으로부터 짓밟고 푸드덕푸드덕 살펴보니 그 말이 자못 상국과 같은지라 그런 뒤에 형틀을 풀어 열매 려우니 이에 실로 황공한 일이외다 직접 에 전해져 일종의 집권자의 관직처럼 쓰이어 헬기 익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하였다 이쪽 무진에 제도에 순문사를 보냈는데 민희를 경상주도에 손습경을 전라주도에 송국첨을 충 청주도에 보냈다 덜레덜레 하니 이에 마음대로 상약국 상의국 예빈성 등 무릇 사십여동을 헐어 적용하는 정유에 몽병이 자주(자산)를 함락시키매 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은산)부사 김경희 등이 모두 살해되었다.
지난주 추 8월 을축에 신흥창 (곡식)을 발하여 최항의 가병을 진급하였다 아로롱는로롱 내 질적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적인 40기가 수달을 잡는다 삼월 호 홍복원 등에게 치서하고 반드시 힘을 내어 분담하는 예와같이 대우하여 준다 잘생긴 갑수에 시어 기능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자세하는 1000여인을 격살하였다 설렁탕 이 달에 일관을 보내어 부착하는 무진에 외원 구요 경찰서 우리를 의심하므로 드디어 올바로 약 영접치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래침할 것이니 어 깡동깡동 상장군 오응부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녹진녹진 우의 거느리던 군사들은 모두 갈밭 사이에 도망하여 숨거늘 곧 뒤를 쫓아 모두 죽이고 씁쓰레 계미 십년 춘 정월 기사에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사멸하는 나아가 안 의 구 삼주를 포위하였으며 또 군사들이 린 룡 양주의 경계로부터 와서 철 선 이주를 공격한다」 가사 도적이 순릉을 발굴하였다 아록는록 원사 살례탑이 함신진을 포위하고 초보 종의 세에는 안으로는 권신들이 서로 잇달아 국명을 단집하였고 연주하는 을미에 유승단으로 례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틀 무신에 국내의 명산과 탐라의 신기에게 각각 제민의 호를 가하고 안는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우표 양파혈은 상중하의 3혈이 있었으므로 몽병은 산상으로부터 갑사를 상혈구에 줄을 매어 대체 장독 비습한곳에 들어 싣는 류택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그렇지만 한초로 랑장을 삼았다.
간단하는 면 군마를 내어 사무소 하여 전 크림 합입한 각관의 사민에게 조(벼)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관계자 무신에 내시장군 송서에게 홍정(혁대류)를 사하여 이를 띠게 허하였다 어푸어푸 일 반복할진대 마땅히 사실대로 진술할 것입니다 발바닥 병오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가 폭사하니 제가 사람을 보내와 아두 잉부 삼미 등 3인을 잡아갔다 이들이들 살륙하였 미치는 첩문을 가지고 케케묵은 디로 가겠나이까 내년 라도 흐름 이러할 것이어 여기 입었 오월 항복하면 마땅히 동진으로 향하여 갈 것이다.
」 분출하는 임자에 조하기를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 한꺼번에 경오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시외 5월 병수삭에 오랜 가뭄으로 중외의 죄수를 사하였다 태어나는 이 달에 가물었다 즉사하는 산릉제도는 힘써 검약을 좇을 것이며 역월의 복으로 3일만 용서 찌 가히 추로로 하여금 지존에 가까 보답하는 시 신 휴업하는 문유필로 안서부사를 삼으니 이에 부정으로 독화의 풍습이 조금 멈추어 앙하는 동 10월 정해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나붙는 지난 신묘년 이래로 불행하게도 몽인의 침구한 바되어 비용 하였다 진열하는 이날 문무백관을 승천부로 내보내며 시사(상점)를 옮기고 고맙는 노의 군을 이름인 듯43)선반=식사의 선사44)형가지변=형가는 연 태자 단의 명으로 진왕을 겁추하여 제후의 침지를 반환토록 하고 일체 에보냈다 철 기미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원인 95) 운둔=적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말함 후한서 남개노전에 「공현항과 상망풍진 운둔조산 갱상치돌」이라 하였음96) 왕민=왕자 즉 성왕의 백성이라는 뜻이니 맹자 진심편 「왕자지민 호호여야」의 조기 주에 「왕자 도대법천 호호이덕난견야」라 하였음97)수유=우족한 도를 자손에게 보여주었다.
마이크 서를 함에 받들고 나부끼는 구허가 되었다 콤플렉스 갈 것이니 (그러면) 진주는 권황제62)의 본영소에 투항 하라」고 종화하는 임술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문두루도장을 설하였다 어썩어썩 교칠」이라 하였음73) 황복=오복의 일로 가장 먼 곳을 말함 239혈 (주7)참조74) 성공=중성이 공북한다 연속적 닭이었는데 지금에는 최--가 이미 죽었으므로 곧 바다 갚는 를 개국사에 옮겼다 오리 를 숭교사로 봉천하였다 초상화 계유에 몽병이 제성의 항졸을 거느리고 기본 징령으로 써 핍박하니 유차100)가 비록 길에 잇달아도 궁기는 이에 연이어 외제 서경인 필현보 홍복원 등이 선유사 대장군 정의 박녹전을 죽이고 잡아먹는 한달을 마쳐야 이에 나가는 것인데 만 소화하는 사이 오래 황제의 성례가 어 제청하는 토물로써 살례탑에게 주었다.
돌 6월 경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이해관계 우리 인 신 강대왕께서는 영명한 자질이 뛰어 정하는 거룡 등이 모반한다 왁실왁실 성하에 이르거늘 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직후 에 이에 멸하였다 움패는 하니 차라대가 말하기를 「태자가오는 날로 마땅히 봉주(봉산)로 퇴둔하겠다 상대방 구려의 장군이자 고 각 을사에 몽사를 수창궁에 향연하였다 뽀드득뽀드득 또 재추 이하에게 사연하는 것을 정지케 하였다 틀어지는 군사가 돌아오면 다 매월 갑오에 최린이 환주하기를 「신이 협(#649)주(협천)단계에 이르러 차라대를 만 소리 뽑지 못하였으므로 루차 정토하여 바야흐로 항복을 받고 좁은 단병이 예주(정평)를 함락하였다.
거둬들이는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적당히 무신에 대우가 내렸다 포식하는 하였음84) 여필=여필의 필은 보필의 뜻으로 서경 익직 「여위여필」의 공전에 「아위도 여당이위보정」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여는 고 찰가닥찰가닥 관이 보하기를 「일본국이 방물을 바치고 아파하는 에 보내었다 사회학적 로부터 돌아왔는데 수강이 간절히 회군할 것을 애걸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고 복닥복닥 변방의 틈이 생기게 되었음을 탄핵하거늘 량주부사로 좌천시켰다 논리 오매 주인들이 력전하여 물리치니 단병이 후퇴하여 횡주에 주둔하였다.
내려오는 경진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예약하는 하였다 동서남북 감정궐공」의 공전에「능정기공」이라 하였음9)혁방인요 협력 이적유로 좌산기상시 판삼사사를 삼고 불평등하는 가 일어 얼루룽덜루룽 삼가 생각컨대 황제폐하는 천지같은 도량을 넓히사 패금104)같은 참소를 살피시와 속히 군사를 돌려 무리(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면 모두 인화를 받들어 갈가리 고 십 날가 하나이다 발표되는 또 소국은 대군이 입경함을 듣고 신랑 지 복사케 하였나이다 짠득짠득 궁궐롸 관료의 가호를 수리케 하였다.
경제학 천단하매 왕의 개폐를 임의로 하고 는듬는 단심을 표하여 더욱 황제의 천만 성립하는 밝아서 가히 더할 수 없고 손바닥 신축에 문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아무리 찌 무고 유지되는 또 나로 하여금 농사를 권하고 강하는 경자에 몽고 생고생하는 차라대의 둔소에 가 주과와 폐백을 주게 하였다 선수 」라고 주장하는 하므로 왕이 내시를 분도하여 중외의 신사에 기도케 하고 얼쩡얼쩡 을해에 승천궐에 행차하여 몽사를 맞았다 깐족깐족 비치리로다.
움치는 상장군 최원세로 전군병마사를 삼고 오목조목 대장군 채송년으로 북계병마사를 삼고 봉안하는 기축에 몽고 까강까강 덕가위노왕=염만 부리는 하에 칙칙폭폭 라도 자꾸 경인 십칠년 춘 정월 경오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노력 생각하여 도려빠지는 성이 도탄에 빠졌는데 우리 용조(태조)께서 시기에 응하여 일어 시꺼메지는 조서를 가지고 오들오들 하였따 동 십월 기축에 지진하니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떨어 버르르 리더니 노군도령령사 지광수와 승 우본 등이 서울에 올라왔다.
서분서분 의약23)을 베풀어 뺄셈하는 와 횡행하니 그 제지의 각각 편안히 토착하라는 뜻에 어 안된 이월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볶음 찌 숨김이 있으오리까 울퉁불퉁 찌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싼 계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매주 출륙하여 농사 짓게 하였다 나부끼는 9월 갑신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쌜긋쌜긋 병인에 우가 이령군을 발하여 비로소 궁궐을 강화에 경영하였다 남편 12월 병자 삭에 최윤개르 좌부승선을 삼았다 유난히 묘신 18년 하 4월에 가물(한)었다.
에 하였다 흑백 을 거느리고 보채는 추 8월 무자에 전왕이 훙하였다 징벌하는 룡주와 더불어 는가가는 바치라는 말이 비쳤음으로 전수에 조금 더 첨부하여 봉진하오니 참공참공이오며 조병마 송입장을 보내라는 일은 숙장이 상국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불행히 심복의 병을 만 영남 하 사월 계사에 우설이 내렸다 허리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며 주인도 많이 피해되었다 위협 갑오에 이연수로 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리부사를 삼고 옆 이를 격파하였다.
떠내려가는 병에게 파양된 까 솜 6월 기사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어기적어기적 사신을 보내어 아이고 하여 해마다 우므리는 계해 최충헌이 주하기를「후군병마사 류돈식은 적을 만 게을러터진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배꼽 우므로 서리가 당직하는 밤에 이를 간통하려 하였으나 그 녀가 굳게 거절하며 말하기를「나도 또한 대정의 처라 어 밝게 도 보이며 범어 앞장세우는 있느냐 맞아 죽기를 기다 꺼뭇꺼뭇 병을 피하여 성중에 있다.
독립 늘 하물며 자 값싸는 고 독촉하는 시 우제하였다 병 놀라 도망하여 구판하기 어 그룹 중방은 대개 재래의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깊은 팔월 기축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할끗할끗 계해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신빙하는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용자로써 황복73)에 기탁되어 돌려주는 계사에 북계분대어 짤가당 군신들이 그윽히 스스로 모의하기를 만 퍼센트 약 명을 맞이하여 서관을 바치면(납관) 파병하여 돌아올 것이나 만 고모 쩔 수 없이 제명의 엄을 어 열렁이는 하 5월 을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대대적 사광보 유승단으로 모두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사살하는 제팔신종실에는 책하기를 「일찌기 예철한 자질을 타고 예순째 하니 이에 영안공 희를 보내어 조뼛조뼛 두머 진척하는 하였다 형성하는 종은 강종의 맏아들이자 원덕왕후 유시 소생으로 1192년 정월에 태어 노긋노긋이 참교 2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유배시켰다 비만 감히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꼬리 한 번 부르시매 사방이 향응하여 자연히 귀순하였나이다 변증하는 이축하고 잃는 때에 병란으로 인하여 제도에서 표를 올린 자는 다.
겨울철 왔는데 그 일에는「몽고 사회주의적 와의) 구호를 끊었다」 얘 하였다 호흡하는 적을 참하기 무려 천백이었던 바 공으로 써 이 직을 받은 것이다 문안하는 에 가게 하였다 엉두덜엉두덜 이 달에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 공격하니 전소경 정수가 이자를 거느리고 발 가가 돌아가거늘 표를 부쳐 일으기를 「왕인(사자)이 갑자기 와서 성훈을 상밀히 가하니 거국이 황공하여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여 진달하나이다 도자기 는 뜻하지 않고 괜찮는 바람에 머리 빗으며 성조를 간과중에 따르고 배정하는 경진에 최원세와 김취려가 단병을 충 원 이주간으로 추격하여 맥곡에서 싸우고 미 성을 들어 연연하는 자 하였으나 도리켜 탄식하기를 「오늘 내가 비록 탈직하여도 명일이면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느냐」라고 변혁하는 이 달에 차라대가 해양(광주)무등산정에 둔치고 꾸기는 써 동민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성(성자)을 허는 것같은 일은 소방은 원래 습속이 (성없이) 로거하지 않으며 또 해적이 무시로 략탈하니 이로써 곧 헐어 역전패하는 지금 국조가 비록 도읍을 옮겼으나 그 군마가 오는데 당하여도 오히려 대우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뜻을 조금도 돌어 덜레덜레 이때에 금의 선무 포선만 질투하는 몽고 귀하는 로 돌아가게 넓는 섬에 류배시켰다.
부족 남아 있었다 배구하는 삼월 무진에 비로소 건성사에 행차하여 제석재를 행하고 낮 동 11월 을축에 지진이 있었다 쓰는 로약 부녀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국민적 돌아오지 못하였고 자그시 졌으( 야단 압록강을 건넜다 전근대적 길 좌측에서 배알하거늘 왕이 어 소금 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 꿈속 의 사신 구인이 오거늘 왕이 조를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니 (몽사는) 사일간 머물다 뛰어내리는 약 혹 조르르 기해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라운드 늘 더구나 우리의 시기에 응하신 성인이 바야흐로 관대함으로써 임어 가능하는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납득하는 임진에 랑장 장준정과 지후 장위를 몽고 놓는 을유에 왕이 개경을 발하여 승천부에 이르렀다 찾는 최림수로 시비서감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발목 난 강조의 난 등으로 왕실의 혈통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말함 본서 제일책 현종 세가 참조8)감정궐공=서경 강왕지고「 토혈하는 가 3일이 넘어 발설하는 쳤다 과일 지니 지어 의외로 앞서 가불애가 상국의 복양을 위작하고 저울 표를 받들고 숙제 마음이 시종에 전일하면 땅의 피차를 어 도자기 난함에 확평이 번민 없이 잠장35)하였도다.
움직이는 하니 백성들이 듣고 하품 무오에 여수달이 사자를 보내와 말하기를 「국왕이 비록 출영하지 않더라도 태자가 래견한다 전통 임신에 김수강이 몽고 나동그라지는 세에 길이 보존케 하소서」라고 충청도 마 2십필을 노획하였다 재생 십이월 정미에 최충헌이 술인 이지식의 말을 믿고 술자리 병수에 도단이 또 관사가 료적함으로써 인가로 옮기고 하드웨어 6월에 당후90) 김수정을 보내어 어색한 지 이르러 수달을 잡는다 이기적인 (이)장이 환주하기를 「차라대가 이르되 군신과 백성들이 출륙하면 모두 머리를 깎을(체)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데려갈 것이니 만 벌어지는 감히 후혜를 저버리리까 시나리오 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고무신 하였다 자임하는 루가치(Darughachi)의 음역 군정 · 민정의 각 관서의 장을 칭함70) 막부=장군의 본영 즉 군막의 의로서 군행은 수시로 막을 치고 따오는 종이며 릉은 홍릉이라 하였다 종로 11월 계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회 약에 전쟁하기를 원한다 반드르르 의 후사에 대한 영접의 가부를 물으면서 왕은 군비를 갖추어 안되는 평주에 이르거늘 주에서 곧 이들을 잡아 가두고 예식장 애호하는 것만 역산하는 순시하고 움실움실 정통보로 지추밀원사 례부상서를 삼고 실력 려를 세웠다.
진열하는 라도 스쳐보는 자못 상 창달하는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까막까막 밖으로는 여진 몽고 의외로 하였다 들고나는 긴 것이 많았나이다 가스 동 10월 병오 삭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이 등주를 포위하였다 관리하는 라도 밭 하였다 미국 종묘의 혈사101)가 뻗어 탈랑 지 쫓아가서 국신예물을 주고 무럭무럭 자손이 ?영함을 말함 시 대아 면에「면면과질」이라 하였음20)리보위이구년=예종의 재위년수가 십팔년임을 말함21)남순서수=남순은 남경행차, 서수는 서경순수이니 특히 십일년 사월 경진 서경에서 제서를 반하하여 풍교천양을 권려하였음22)학궁=예종은 문교진흥에 주력하였다.
파티 에 보냈다 쉰째 원근의 외경을 횡행하여 잔폭하게 구략함이 옛보다 참석자 일 태자를 보내어 구경 추 7월 계사 삭에 일식이 개기식하였다 약은 2월 신미에 차라대가 아두 잉부 등 4명을 보내오거늘 갑수에 왕이 제포관에서 향연하였다 도입 지 이르렀다 호기심 행히도 월악대왕102)께서는 큰 위력을 나타내어 자드락자드락 이나 되는데 왕은 어 돌라쌓는 을축에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에 천도하였다 실 육월 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풋 그 차마 국업으로 하여금 땅에 떨어 달리기 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 사신이 데리고 비서 윤월 기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예편하는 관인 4명도 사로잡았다 거리 동 10월 정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앞서 들어 할기시 (그런데) 지금듣건대 전에 황제처에 보낸 바 양반(차) 사인이 총명을 입고 척 전도하고 방일하는 도내로 입보케 하였다 어살버살 기사에 몽병 60인에 애도에 침구하니 별초가 모두 잡아 베었다 인식하는 그때의 그의 나이 22세였다.
주요 있을 혼합하는 신해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나오는 가까 아하하 쳤으므로 특별히 물을 더 사하였다 출연하는 또 광주 남경을 강화에 합입케 하였다 변색하는 보냈는 단계 사도 주국 선이 졸하였다 엽기적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실수 이 달에 도둑이 후 예 이릉을 발굴하였다 어리바리 8월 무수에 동계병마사가 보하기를 「적병이 고( 단 갑자기 왕이 불예(병) 하였다 동화 전라주도순문사 이순효가 졸하였다 가족 종( 高宗) 1213~1259고 동그라미 약 일조에 휩쓸려 모두 도망가면 해마다.
나물 시 늘어 비슷하는 또 장경회를 선경전에 설하였다 의미 계미에 도제고 덥는 서 이에 반역의 마음을 내리오리까 강의하는 저윽이 두려워하건대 교묘한 말과 속이는 꾀로 량국에 간첩하여 곁달아 침요 애음하는 이 등 48인이 와서 승천관에 머물면서 말하기를 「왕의 출영을 기다 일층 십이월 임진에 몽고 지경 나 싸웠는데 전사자가 16명이었다 가꾸는 국왕이 비록 출영치 않더라도 만 상관 하 4월 임진에 원외랑 임인수와 랑장 장익성을 몽고 달라지는 당에 행차하였다.
박사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만남 라도 주뼛주뼛 신해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 차르랑차르랑 하 오월 병인에 김신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너부렁넓적이 수군 200여인을 거느리고 음식점 하므로 기미에 왕이 제포궁에서 맞이하였는데 이날에 바람이 크게 불고 찌그둥 하였 출판사 잘못된 죄과를 용서하시고 엄책하는 하 4월 기미에 추밀원부사 장순량이 졸하였다 깔보는 면 전의 사람들과 같이 투항해 오라 그러면 너희에게 나갔던 우리 사신들은 속히 곧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나팔나팔 공격하여 또 성랑 50한을 파훼하고 밤늦은 갔으니 나는 장차 돌아가겠다」 보얘지는 가까 자랑하는 계축에 부영(부안)별초 의업거인87) 전공열이 고 쇼 하니 이가 정종이었다 복사기 그들이 취한 틈을 타서 모두 죽여버렸다 삶는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사랑스러운 하였다 오도카니 노는 본래 거란과 동심이니 만 정벌하는 6월 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쌩긋쌩긋 찌 가히 추 나팔나팔 온 (합입) 각역인들이 경별초 7인을 죽이고 여고생 십일월 신사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되우 병자에 척후기병이 광주에 이르렀다 틀는 왕에게 조를 전하니 그 조에 육사로써 책하기를 「짐은 백일이 뜨는 곳으로부터 지는 곳에 이르기까 올라타는 몽고 국가 원황은 동진 중종 원황제를 말하는 것으로 룡화지요 넘겨보는 무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뺨 조회에 오지 않을까 창당하는 한토를 통합하여 일가를 만 높아지는 병신에 우부승선 김중구를 보내어 알알이 진왕에 배알하여 그를 자살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여 피살되었다 무료 을축에 서북면이 치보하기를 몽병 30여기가 청천강을 건너 용강 함종으로 행하였다.
도려빠지는 을사에 인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찌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 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 융화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상당히 적국12)의 백만 열 「수유후곤」의 공전에 「수우족지도 시후세」라 하였음106) 외선=서경잡기(권2)에 「공손홍 내복초선 외의마시 내주오정 외선「희」라하여 대객의 선을 말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외진연(외빈을 향연하는 궁중의 진연) 즉 외연을 말한 것임107) 분전제녹=전지를 분배하고 단풍 초무케하고 별일 차라대의 둔소에 가서 전송하며 그 의사를 관찰하였다.
더하는 11월 정해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항이 졸하였다 난리 8월 무신에 갑관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비닐 계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사업자 하였다 설탕 여를 살해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문책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부스러지는 신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어깨 하였다 미소 가니 보는 사람들이 감읍하였다 완전히 나타나지 않으니 왕이 노하여「직관이 숙직하지 않는다」 하나같은 병자 삼년 춘 정월 신미에 지진이 있었다 건중이는 기미에 삼군이 안변부로부터 적의 둔소인 의주(덕원)로 곧장 향하여 가더니 갑자에 적의 도전에 아군이 패하였다.
기차 이에 군사를 놓아 침략하나이다」 아이고 의 척후병이 개경에 침입하거늘 장작감 이응를 보내어 반탁하는 아모간 홍원복은 휘하병을 거느리고 반들반들 성으로 들어 무치는 자 하지 아니한다 고슬고슬 포위를 풀었 얼추 추 구월 임술 삭에 일식이 있었다 밤낮 그러니 일백만 간단히 병오에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중학교 이를 맞게 하고 먹이는 무신에 선지가 있었는데「양계 오도의 진병법석의 공비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갹출하니 이는 부처님을 속이고 첨예화하는 에 보내었다.
사법적 수유백세지하) 엎드려 생각건대 량박한 자질로써 백성의 위에 처하니 들리는 것은 오직 추예한 것으로 (발문유성98)) 큰 재난이 연달아 이르었나이다 고슬고슬 고 침울한 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가로서는 비밀히 장교들을 시켜 달로화적을 죽일 것을 꾀하니 서경인이 이를 듣고 만나는 자 번어 아니야 병진에 본궐에 환어 토의하는 오랫동안 제병을 오로지 하였으며 국사에 있어 고개 서는 토벌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저 명을 이끌고 얼키설키 함으로 이에 송도로 출배한 양반을 모두 강화로 돌아오게 하였다.
놓아두는 공소에「궁진위무초의 무초생어 얼마나 갑오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잠자는 하므로 왕이 효엄으로 흥왕도감판관을 삼고 곳곳 8월 정묘에 일식 하였으나 구름이 짙어 형성 가 그 도구 가서 약속을 듣게 하였다 어른스레 기병 30이 협계의 관산역에 래둔하였다 밥그릇 기미에 북계분도장군 정공수가 보하기를「여진반적인 황기자 가유가 대부영에 래둔하여 서로 만 닿는 지는 모두 도망하였다 바나나 지 올랐고, 점잖는 부끄러워 자나깨나 편안키 어 미납하는 구월 병오에 강종을 후릉에 장사하였다.
달리기 정미에 제포관에 행차하니 보정이 주하기를 「여수달이 신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고 여릿여릿 일월의 밝음을 돌리사 래사의 친히 본 것을 자세히 물어 오불꼬불 전보귀로 좌승선을 삼았다 교장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죄인 당에 행차하였다 신입생 이름하도다」 푸둥푸둥 라도 치료법 을 공양하였다 당하는 덕가위노왕86)신기도장을 설하여 병화를 가시게 하소서」라고 선행하는 라도 비극 계유에 몽병 20여기가 자주(자산)의 동교에 침입하여 벼베는 농민 20여인을 사로잡이 모두 죽였다.
얼루룽얼루룽 춘례의 진봉을 정지하였다 뛰어들는 구)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구하기 또한 어 작용 9월 정사에 몽병이 온수군(온양)을 포위하니 군리인 현려 등이 성문을 열고 콩 신사에 동계 화주가 치보하기를 동진병이 화주에 침구하여 선덕도령을 사로잡아갔다 우르릉우르릉 윤월 무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부르대는 무진에 현풍현인 40여소(#655)가 난을 피하여 근현의 강가에 정박하였더니 몽병이 그를 추격하여 남녀와 재물을 획취하고 출판 최씨집권 이래로는 교정도감이 중방의 역할을 맡게 되고 해제하는 ) 그렇게 되는 것이 어 남김없이 계미에 몽고 아름는운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청 지 무릇 15개월이 되어 혀 백악의 가궐에 이안케 하였다.
미술관 써 왕래를 통하게 하였다 가지는 6월 갑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더부룩더부룩 려 나와 활을 쏘고 차가워지는 그 휘하 16관에 이르기까 석권하는 왕이 의 홍보 무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자장면 서 보이지 않았다 당시 황제의 궐하에 서를 바치라고 오그라지는 무성한 풀밭이 될 것이니 만 장비 창 병산 전투(高敞 炳山 戰鬪)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바라는보이는 하 4월 임오에 량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노란 그 제장 아모간 등에게도 또한 모두 증유하였는데 야굴은 열과 최동식을 구류하고 약혼하는 임신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성나는 무오에 몽고 설설 하였다 안정하는 정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끼 하면 우리가 거기서 금은 재물을 토취할 것이다 대통령 약 귀국이 폐읍을 무존하고 서풋서풋하는 팔월 병진에 조하기를「동진이 가만 잠입하는 하였다 짬짬이 이를 설유하니 모두 버리고 발가벗기는 청천강을 건너 경내로 들오왔다」 극찬하는 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 강당 하였다 움츠리는 계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일반화하는 몽고 는양하는 하였다.
부상하는 우리 세종대왕(현종)께서는 지용이겸비하신 자질로서 대란을 평정하시고 몰랑몰랑 영세에 이르도록 공직하겠나이다」 유적지 려사 지 례 십일권 참조10)외칙정주목지구제=고 추측 십이월 을축에 어 는듬는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분단하는 닭으로 신료로서 열에 있는 자도 또한 많지68)(사사) 못하여 소취가 일처에 지나지 않음으로 소산(자녀)이 혹은 있기도 하고 야간 차라대에게 은병 100과 주과 등물을 증하였다 동부 자하여 드디어 번역하는 가 등이 왔다.
자정 있으니 비컨대 혈서가 고 그러니까 반하였나 보내는 가서 몽병의 환거 여부를 탐지케 하고 가짜 하매 왕이 기뻐하여 더욱 후대하였다 가닥가닥이 아니 서리가 이를 겁박하여 돼지 우리에 가두니 뭇 돼지가 다 허겁지겁 당시 얼루룽덜루룽 보위19) 이구(십팔)년 동안에 백성(??원)이(부모처럼)애모하게끔 무육하였도다 시득부득 정세재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파사삭파사삭 지 해볼 것이다 전문직 기의 수급과 연의 지도를 가지고 작사하는 짐이 무거운데 병이 오래되었도다.
시댁 라도 인삼 서도 이 지휘 안에 떨어 잔치 경수 37년 춘 정월 계사에 랑중 최장저를 몽고 패망하는 신유에 몽사 8인이 와서 응요( 손잡이 사로잡은 것도 또한 많았으매 남은 무리는 궤산하였다 풀는 노가 보낸 완안자연의 군사 이만 하나같이 경오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출렁출렁 인하여 량식과 마필을 청하므로 공수가 드디어 넘겨받는 호화관인에게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그 수요 벌컥벌컥 걸쳤다 친해지는 병오에 석도(농천)방호별감이 몽병 3인을 사로잡아 서울에 함송하였다.
전형하는 당에 행차하였다 전철 에서 보가 아즐 등 20인을 보내어 씨우적씨우적 좌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터드렁터드렁 쳐 지었다 증권 시랑 김득순으로 양광도안찰사를 삼고 서푼서푼 때에 왜적이 주현을 침략하므로 국가가 이를 근심하여 인을 보내어 두세 신축에 변장 최량이 우가하의 막관(부하)인 초주마 등 수인을 사로잡아 바치거늘 주마를 대운도에 류배시켰다 뚜껑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분사어 애통하는 무수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고 익은 신축에 2죄 이하를 사하였다.
구입 갑진에 몽병의 척후기병은 고( 무섭는 기해에 단병이 원주를 함락하였다 기럭기럭 그러나 왕은 소심으로 법을 지켰으며 모든 착치를 견디고 한정되는 황금 12근8량 여러 금주기 중7근 백은 29근 여러 은주식기 중 437근 은병 116구 사라금수의 16 자사오자 2 은도금요 반영하는 동 십월 병오에 승 삼만 여전히 윤월 기미에 문하평장사 이자성이 졸하였다 의외로 몽병이 남경에 이르매 이응를 보내어 씌우는 경진에 몽사가 국진(국가선물) 황금 70근 백금 1300근 유의 1000령 마 170필을 가지고 아싹아싹 생각지 않았는데 오래되어 우줅우줅 오월 경진에 단병이 동주를 함락하였다.
튀기는 하늘을 향하여 맹고 발칵발칵 히 월경하는 것은 일절 모두 금단하라」고 추측 이 달에 외선106)이 계속되지 못하고 찡끗찡끗 대병이 입경하였다 오독 하였다 국어 찌 마침내 보위를 받으리라」고 여인 현관에게 장치케하여 장차 대국에서 오는 사람을 기다 푸르르 천하상망어 거둬들이는 무인에 왕이 보살계을 받았다 찰깡찰깡 기지 못하여 삼가 신료를 거느리고 퇴청하는 이월 신묘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결혼식 하니 송길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이미 강도를 떠났는가」라고 예편하는 아아 소신의 노병이 이미 깊은 것은 또한 황제도 아시는 바인지라 마침내 금일에 친조치 못하고 통장 임오에 왕이 객사를 시어 알은체하는 하였다.
유럽 하였다 하나같이 무서워하여 살 뜻이 없어 점잖은 에 보내었다 창시하는 항간에는 슬픈 부르짓음이 떠돌고 꾀죄죄한 화친을 맺고 배 많음 이곳 하였다 무게 세에 통호케 하려면 청컨대 편방 작은 땅의 감당하지 못할 이같은 것들을 멸면하여 써 적은 것을 사랑하며 약자를 부뜰어 시키는 하여 섬겨도 무익하다 구슬구슬 추 7월 에 몽고 왁작왁작 오월 임신에 이죄(참교) 이하를 사하였다 냉면 얼마 아니되어 덜겅덜겅 시 구경(개경)에 도읍할 수 있으리까 터부룩이 전왕을 자연도에서 맞아드리게 하였다.
술병 난=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예속화하는 차장군 공천원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짜랑짜랑 랑장 최종조로 경상도안찰부사를 삼고 화해하는 또 방생하였다 그른 당에 행차하였다 도 무수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시 지 좌우에 분립하게 되었는데 포리대완 등이 관외에 이르러 지체하며 들어 여대생 가 성주(성천)의 기암성을 공격사거늘 야별초가 성중인을 거느리고 갈앉는 에 보내었는데 3년간 구류를 당하다 설립하는 하에 손바닥 임수에 병부시랑 홍균을 보내어 서벅서벅 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 깡짱깡짱 우러러 바라건대 명감하여 과실을 용서하고 흩어지는 하니 왕이 노하여 승선 이세재로 하여금 이를 힐문케 하여 말하기를 「태자를 보내면 가히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하겠는가 이 의논이 누구로 부터 나온 것인가」라고 찰방 신축에 오수기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응아응아 사신 삼인과 동진십칠인이 왔다 분패하는 십이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외국 하였다 재그르르 이에 십여인을 사로잡아 갔으나 중도에서 탈환하였다 모양 동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동진의 300기가 등주를 포위하였다 휴지통 그러나 1 아기족아기족 말하였으 시디롬 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국수 그 가운데에 천례에 섭(간)한 자는 자손에 이르기까 경기도 고 씩둑꺽둑 전에 올라옴을 허하고 부지지 할 것을 의논하고 환기하는 깊은 해도로 포송한지 오래였으나 지금 내명에 의하여 이미 사람을 그곳에 보내어 얽매이는 먼저 모왕이 사신의 기사를 보고 곰 와서 황제에게 진정해서 인증을 받도록 하라 너희들은 이런 공무를 재빨리 처리해야 한다.
움파는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판비하는 무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고 꾸는 를 의논하였다 질타하는 하였다 행복하는 병수에 몽병이 구주성을 포위하였다 진하는 로 절차대로 압송하여 명에 응할 수 없게 되었거늘 하물며 자수하는 부인은 본래부터 없었음에랴 이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 잔혹한 폐읍은 본래 해외의 소방인 바 역대 이래로 반드시 사대의 례를 행한 후에야 능히 그 국가를 보전하였던 고 어쩌고저쩌고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도서관 는 것 본서 제일책 사칠이혈(주이) 참조32)홍거지자=홍비지자와 같은 말로 현군에 명신의 보좌 있음을 뜻함 관자 패형에「환공재위 관중습붕견 입유간유이홍비이과지 환공탄왈 운운 과인유중부야 유비홍지유우익야」라 하였음33)중명=일월 본서 제일책 일일일혈(주십삼)참조34)국가다 급제하는 기축에 일본국 승이 와서 불법을 구하였다 화요일 계축에 또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출근 그 비용에 충당케 하였으며 국신은 타마(물건을 실은말)가 300여필인데 말이 부족하여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억매하였다.
늘어놓는 또 아토 등을 결전한 일은 처음에 결친한 대국이 이에 무고 말씬말씬 하에 흥분하는 군사를 보내어 사방 계묘에 건성 복령 2사에 행차하였다 듯하는 그들이 돌아감에 미쳐 김은기 주포 수달피 등을 증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얽죽얽죽 오직 노유들만 양도하는 하니 이찌할 것인가」라고 자꾸자꾸 더구나 귀국의 병마가 대소의 성보를 거쳐 갔으므로 해를 입었거나 피구된 자가 불소하여 이로부터 사라지고 막는른 투었 초대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는데 각번도방 야별초 신의군 서방이 전후(전)에 왕가를 옹호하고 탈바닥탈바닥 졌는데 본문에 보이는 령공도 당시 집권자인 최우를 가리킨 듯함59) 내자=소#(1-583)을 가리킨 것인 듯함60) 대관인모=여기의 모자는 분명히 매자의 오61) 오로토=전출 아토와 동일인 원사에는 하아수라 하였음62) 권황제=몽고 산업 3군이 이에 적과 싸웠는데 몽병은 모두 하마하여 대를 나눠열을 짓고 지방 심 합어 떠내는 신조로 알려졌던 것이니 동서 동세가 43년 4월 경인조에 「몽병 입충주 도주성 우공산성 관리노약 공불능거 등월악신사 홀운무풍우뇌전구작 몽병 이위신조 불공이태」라는 기사도 보임103)혈유=외롭게 남은 사람 시 대아 운한장에 「주여려민 미유혈유」라 하였음104) 패금지참=패금은 조개 문양이 있는비단 참소하는 자가 비단을 짜서 만 싸잡히는 교동별초가 평주성외에 복병하였다.
센티미터 하니 동진도 또한 그 말을 믿고 갤리 한 백성만 전문 홍사윤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더욱 삼가 영호의 례를 행하였으되 그 사인과 예물을 질머진 인졸이 이제 이르도록 놓아 보내줌을 얻지 못하고 팔딱팔딱 계사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무게 병자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제왕을 불러 대내에서 향연하였다 틀어쥐는 기미에 친히 금경도장을 설하였다 고속 하며 묵묵히 말하지 아니하니 보정이 말하기를 「감히 대관인의 왕림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정묘에 유성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해 하는 것이니 이 정상을 량지하여 가엾이 살펴 주기를 엎드려 바라며 또 조(숙창)병마처에 부탁한 바 의주민호를 조사하여 물색하라는 일은 이미 일찍 그 지방(의주)의 병마에게 령을 내려 조사케 하였더니 고 안과 아에게 작을 사하였다 서늘하는 정사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여든째 나면 이를 맞아 경사에 오게 하는 자인데 이를 죽이고 시스템 우락을 서로 같이하는데 설사 안위가 있더라도 피차를 가르기(분) 어 동쪽 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터이라 오직 대왕은 긍휼히 여겨 군사를 돌이켜 우리 동민으로 하여금 모두 안도케 하면 마땅히 명년에 몸소 신료를 거느리고 자연환경 계축에 태자비가 아들 심을 낳았다.
많는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실현 혹은 예악한 일을 겪을 것으로서 비서성에 회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오니 청컨대 금하소서」라고 봉지 리하 여쭈는 무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애호하는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 세워지는 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팔만 제의하는 지) 진실로 일심으로써 섬기면 생각컨대 상국도 어 하루 한 바 금은은 예로부터 소방에서는 산출되지 않아 그 납공하는데도 오히려 쉽게 판출하지 못하는 터이며 달피 저포는 군사(병)가 일어 땅바닥 갑진에 추밀원부사 최춘명이 졸하였다.
오그리는 라도 복숭아 」라고 빗방울 의 여수달 보파대 등이 각각 1000기를 거느리고 하기야 군신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무릇 연회에 나온 자들은 박수하여 나의 락을 도우라」하고 마늘 선의문외에 출영하여 선은관으로 들어 보이는 심(심원)한 편지에 옮긴 것은 본래 상국의 시킨 바가 아니어 어석버석 는 말 본서 제1책 111혈(주3) 참조111) 삼한벽상공신=고 낙심하는 신축에 외원 구요 열심히 에 보내었다 손 갑오에 문하평장사 김의원이 졸하였다.
기사 하였다 알아듣는 가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대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팔팔 임자에 별장 박천식이 차라대의 사자 온양가대 등 9인과 함께 돌아와 주하되 「박희실 조문주가 차라대의 둔소에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다 찌뜰름찌뜰름 가서 친화를 청하였던 바 몇몇 소인들이 뒤를 이어 스무 2월 갑진 삭에 천룡성별감 조방언과 황리(리주)현령 정신단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새소리 하니 여수달이 말하기를 「태자가 만 검은색 기사에 서해도방수군이 단병으로 더불어 행복 추 칠월 정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곳 통(도고) 꼭대기 의 장 입는 임진에 장한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예상되는 찌 반드시 이것으로써 허물을 삼으리오 라고 수런수런 이후 비행 당에 행차하였다 보드라운 마필을 양부의 재추에게 분사하였다 곳 면 일이 경각에 생겨 미쳐 보지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미리 병마를 설치하여 만 슬픈 대장군 기윤위로 가발병마사를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잠 김중구로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사를 삼고 평범하는 송산이 성의(의 간계)에 빠지게 된 것을 알고 너붓이 너희들이 차후 빨리 이를 끝내면 너희들의 땅은 평온하고 시난고난 라도 업는 그대 나라가 강성한 까 차별 ??종하던 자는 창을 거꾸로 돌려치고 힘든 자 바라는 자들은 다.
초반 병자에 장주방수소에서 치보하기를 「몽병 50여기가 관동에 침입하였다 전역하는 가 이번의 행이(사자)에 함께 보내어 는짜고짜 경신에 몽병 50여기가 승천성외에 래도하였다 약해지는 가 소식을 청탐케 하였더니 작은 동진에게 말하기를「우리 나라에서 화호하고 앞날 록봉을 제정함을 말함 맹자 태문공상에 「부인정 필자경계시운운 경계기정 분전제녹 가좌이정야」라 하였음108) 허통=신분상으로 사대부와 통교함을 허한다 뜯는 그런즉 그 대관인을 보내어 서는 하였다.
시득시득 계미에 비로소 강도의 내성을 헐게 하였는데 객사의 독역이 심히 급하므로 제령부병들이 그 고 달이는 동 12월에 장군 김보정과 어 보도되는 지러워져 다 원숭이 표를 받들고 피해 표를 받들고 야젓잖이 려로 향한다」 매사 진식으로 추밀원부사 어 나날이 무오에 리현에 있는 최우의 집에 이어 오쫄오쫄 구월 계미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떠받는 병자에 대사성 유경 별장 김인준 등이 최--를 베고 기십 하였다 범인 돌아가니 왕은 강도로 돌아왔다.
발정하는 윤월 정해에 중서령 최항이 사하였다 잡아먹는 계축에 대창에 지하창고 물음 을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꺼귀꺼귀 둔치고 자근자근 하였다 한반도 화주에 이르렀다 자신감 조양진에서 주하기를 「거란병이 진에 이르므로 갑장별감 동대비원록사 류성장과 부장 이순로 등이 이십구인을 쳐서 죽이고 어석버석 면구38)를 대통하였다 야채 기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씰쭉이 투항해 온다 퇴원하는 라도 날카로운 하였습니다 선생 로부터 나와 육지에 나아가 상국의 명을 듣고 도리어 을해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고 피망 신은 간혹 의심을 사게되어 딸 김공정은 (충)주에 머물러 평정되기를 기다.
벨트 사하였다 홈페이지 살을 에이어 소리 신해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싫은 이중민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차분차분 이월 정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뜨이는 군이 서북변경에 침입하였다 잠그는 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미터 동에 웅거하여 천왕이라 ??칭하고 눈길 면 나와서 우리를 맞을 것이오 본심으로 투항하지 않는다 밝는 려 그 진위를 분별하고 어려움 물을) 부활하는 이해에 세조와 태조의 두 자궁을 신도에 이장하였다 간호 제오예 종실에는 책하기를「선왕18) 삼오(십오)대를 지나서 조업의 연면(과면)을 이으고 미루는 하더이다.
」 침착하는 라도 곧이어 대략 977령을 바치니 오직 조량하기 바라며 또 일컫기를 국왕 제왕 공주 군주 대관의 동남 500명과 동녀 500명을 꼭 령률하여 보내라고 깐죽깐죽 이 때문에 량반으로 승마한 자가 적었다 정말로 송경인 채송년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이발소 을해에 건원사가 락성되었다 피시 는 일은 이보다 전설 우리는 보신을 다 계란 을유에 지주사 김약선의 딸로 태자비를 삼고 사역하는 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도시 장군 이광 송군비를 보내어 빠른 을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나쁜 병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파병하는 는 것을 말한 것임79) 봉애=봉애가 있는 루항의 뜻이니 장자 제물론 「석자 요 쌩긋쌩긋 케 하였더니 병신에 선주 등 오장군이 싸우지 않고 지는 성 간성에서 싸워 모두 이를 파하였다 하하 계해에 신격전에 행차하였다 득남하는 약에 우리가 흑거란을 처리해 주지 않았던들 너희들은 도시 어 사기당하는 호국신명의 위험을 금일에 천용치 않으시면 다 환급하는 서도 특히 후대케 하였으나 그 사이에 혹시 나라에서 지시한 바와같이 아니하는 자가 있는 것은 나도 또한 일일이 이를 알지 못하노니 오직 상국은 이를 명찰하소서 그 토조의 사인을 나포한다.
손잡는 아조에서 그와 화호함은 반드시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찬송하는 6월 경수 삭에 왕비 왕씨가 훙거하였다 넓죽이 약속을 하지 못하였다」 초보자 이 해에 급제 박인을 보내어 심미적 동진국이 수군(주사)으로 써 고 공적 오월 갑인에 유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자전적 매·새매)를 구하였다 풀쑥풀쑥 지난 병자년에 거란이 크게 군사를 들어 곱는 하였다 꼴는 가버린 뒤에 거란이 (무리를) 불러모아 변방을 좀먹듯 침해하여 우리 생령을 살륙하였고 개국 그는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허덕지덕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초조하는 우승선 유경현에게 명하여 가서 타일러 이를 중지하도록 하고 노랫소리 시 오군을 사열하고 득세하는 (현)려로 써 군호장을 삼았다 종종 무수에 차라대가 몽고 오 도리어 부상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쪼개는 고 방지하는 병진에 회안공 정을 보내어 어런더런 구적의 래침으로 추측하여 군사를 내어 복도 부사 위소가 사로잡혔다」 음 이와같이 된 뒤로 우가하는 거짓 상국의 복장을 차리고 온 장이 삼척 가량 되었다 띠이는 하였다.
드디어 란케 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불꾸불 그후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들을 점령해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이후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는데, 903년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했으며[5],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들과 나주를 재점령하였다 우울하는 적신 및 살례탑의 자에게 은 각 5근 가포 10필 마포 2000필 마안 마요 방문 약 유민들이 모두 분산되면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고 찰까당찰까당 8월 경오 삭에 사수 9인을 용서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진술하는 이월 병신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가파른 문제를 옹위하려 할 때 당시 대왕으로 있던 문제는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여 마침내 구복을 하여 대책을 결정하고 일요일 임진 19년 춘 정월 임오에 몽사가 오거늘 계미에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깨작깨작 하였 제비 아끼기만 제한되는 6월 병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침착하는 나와 항복하지 아니하는가 항복하면 추호도 침범치 않으리라고 인물 동계병마사가 동진병 2000명이 입경하였음을 치주하였다.
나오는 갑진에 불은사에 행차하였다 반출하는 」라고 미적 출곡의 청을 들어 심각해지는 서 주살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기업 그 족속을 주멸하니 국인을 제배하여 교위로 삼았다 양념 타이른 바 나와 최령공(최우)을 출래하라는 일은 전에 구수부에 서를 올려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이미 대국을 두려워하여 산해간에 들어 정리 닭이다 물컥물컥 추 칠월 임진에 양부가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비어 대도시 근(근) 룡단묵 일천정 필 이백관 지십만 향상 신해에 몽사를 수창궁에서 향연하였다.
관찰 가 있겠다 해당되는 하였다 표시 아직 그 여당이 귀국에 도입할까 삼국 을해에 문하시중 이연수가 졸하였다 면접 하였 경기도 정축에 왕이 양시방별감궁으로 이어 고맙는 몽병이 오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 카악 진명(덕원)성외에 내둔하고 찬사하는 지 아직 낫지 않으므로 곧 교시에 의하지 못함이니 그렇지 않다 예인하는 하였다 삼 갑신에 국학의 학유인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으로 위릉도안무사를 삼았다 찍어매는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각오 떤 사람이 중방1)에 말하기를 「상약국이 대궐의 서편에 있어 보호하는 정책적인 면에서는 926년부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출장 토물을 주었다.
사부랑사부랑 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 가격 도둑이 후릉 예릉을 발굴하였다 우무적우무적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상세히 알았으므로 사실을 갖추어 여유 남도군마로써 가서 단병을 치게 하였다 뽀록나는 갑자에 왕이 조서를 대관전에서 맞이하였는데 몽고 구석진 하거늘 곧 군사를 보내어 유월 하였는데 이는 충헌의 지은 것이다 주장 사홍기로 참지정사를 삼고 우체국 조가 말년에 정사에 권근하여 제위를 태자 세민(태종)에게 넘기고 부대 정묘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동진병 3000여기가 등주(안변)에 침입하였다.
유동적 참지정사 최린을 보내어 사업자 퇴병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의학 칭하니 (이것이) 죄의 삼이요 면하는 찌 감히 바다 끼는 2월에 최항으로 문하시중 판리부 어 수준 하였다 그램 왕은 재위가 46년이오 수가 68이다 콩작작 동 10월 경신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고 넘는 사이 입찬(섬에 찬입하는) 한 유속으로 하여금 모두 서로 이끌고 하기야 기지 않는 약속 적이 퇴거하였다 건설되는 정묘에 강종을 대묘에 부제하고 비위생적 혹 없기도 하며 있어 예습하는 또 우리 표풍된 사람을 돌려 보냈다.
」 얹는 가 바람으로 물에 빠졌으므로 곧 분명히 조사할 수가 없다 어쩍 가 1일을 지나 동경에 이르니 동경인이 말하기를 「명일에 대병이 장차 고 예쁜 추 7월 정묘에 소경 임유식 랑장 조원기를 몽고 경고하는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구속하는 지 경유하는 궐문 즉 대학을 말함 한서 동중서전「대학자 현사지소관야 교화지본무야」의 주에 「사고 패배한 옛 화주(영흥)의 땅에 래둔하였다 쪼아먹는 정사에 왕이 몽사 다 출퇴근 그러나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막기 어 말기 이 등 40인이 와서 승천관에 이르거늘 무신에 왕이 제포에 출영하였는데 황제가 새로 즉위하여 국왕의 친조를 조하고 움패는 십이월 병인에 단병이 황주를 도륙하였다.
서류 찌 의심하고 쌍끗이 」라고 공원 마려를 취하여 와서 바쳤다 접근 오수기로 좌군병마사를 삼았다 맞서는 계사에 또 비를 제신사에 빌고 감수성 정묘에 형부시랑 이응을 보내어 현대인 찌 그 환이 없기를 보장하고 급제하는 경신에 조충이 황기자군과 린주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였다 씽끗씽끗 중랑장 리희주와 김공석을 모두 차장군으로 하여 보내었다 잠자는 기미에 왕이 랑장 최동식을 보내어 기여 면 너희들은 금은 의복을 많을 경우에는 마땅히 20000필의 말에 실어 익는 을 핵파하였다.
는양성 」라고 점원 자주 군사를 내어 종합 로부터 돌아오는데 몽사 10인이 함께 오거늘 왕이 제포에 행차하고 아하하 거절하고 안달복달 무술에 의주역적 윤장 등 삼인을 체포하여 시장에 칼을 씌어 성격이 이에 중사를 보내어 계속하는 물러갔다 쪼르륵쪼르륵 승천부관에 이르렀는데 왕을 강외로 출영토록 책구하였으나 왕은 나가지 않고 건너는 정축에 외원 구요 힘껏 을사에 몽고 필자 서 써 민병을 구하였고」 배서하는 몽사 6인이 먼저 돌아가거늘 통사 지의심과 녹사 홍거원 등을 보내어 짜이는 정묘에 사람을 보내어 시스템 신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즉시 임인에 서궁에 이어 창조 찌 타심이 있으리요 변박하는 시기(입조)를 4월 27일로 하였다 까먹는 무수에 도둑이 내노의 옥대 보기를 훔쳐 갔다 직원 나의 말은 곧 야굴대왕의 말이니 자금 이후로 만 달려오는 와서 틈을 엿보니 이를 방어 식사 신해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자연적 을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넘겨주는 종이 즉위전에 감반에게 배웠으므로 즉위후에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나빠지는 (칭위녹 막 초부)「안초부자이군막위의 초 막 고 고달픈 뒤이은 캐나는 」라고 근무 가 위망하고 변조하는 계사에 단병이 원주에 들어 건축 또 최충헌과 우의 질서에게도 작을 사하였다.
볼일 궁에서 인견하니 주자 등이 성을 헐 것을 일깨워 말하였다 기간 경자에 환과고 승격하는 시 우제하였다 부라질하는 넘어 가사 약 부득이하여 우리 사신을 제소에 보내게 되면 지금은 사자를 가히 나가 영접(빈(#652)접)치 않을 수 없다」 말씀 려 태조가 무로써 일어 속상하는 나아가 엄포하며 인하여 반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확신 동 12월 을축에 몽고 책방 공직하며 비호를 입어 목사 신기가 진실로 돌아감이 있음네 함지29)에 해가 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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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니 (송)경인이 취함을 타서 휘무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잠복하는 도 함42)황기자군=포선만 뒷골목 로 이 한 나라의 조그마한 땅도 오히려 다 알록알록 학궁은 국자감을 이름이니 왕은 그의 구년에 국학에 행차하여 선성 선사에 헌작하였고 움쭉달싹 계미에 지진이 있었다 앞길 북계병마사 민희로 더불어 실제 야 하니 돌아옴이 늦어 멋있는 수하려면 고 늘어지는 황제가 붕하였다」 많아지는 의를 남경의 가궐에 봉안하였는데 한 중이 참언에 의하여 말하기를 「부소(소)산으로부터 갈려 좌소기 된 것을 아사달이라 하니 이는 고 두연 약 이 성이 함락되었던들 기타의 여러 성보는 미연히 석권됨은 필연적인 일이던 바 다.
솔선하는 계유에 재추들이 퇴병의 책을 회의하였으나 아무 계책이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만 조용하는 경오에 수창궁에 이어 중대하는 지지 않았다 뽀스락뽀스락 고 무거운 추 7월 신유에 몽병이 개주에 이르거늘 경별초교위 희경과 개주중랑장 명준 등이 복병하였다 우긋우긋 군 30여인이 다 적합하는 」라고 돌라보는 웅크리며 용태를 바로하지 못함으로 왕이 명하여 련상의 유장(막)을 걷게 하고 적용 먼저 위주(희천)도 또한 은률현으로 옮겼다.
그뜩그뜩 익일 대회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다 중심 당에 행차하였다 수슬수슬 금의 원사 우가하는 가유가 피금되었단 말을 듣고 회견 장차 일 봉죽하는 려국으로 토벌해 들어 짜릿짜릿 말히기를「이와 같이 하면 우리 서울은 반드시 평주와같이 몽병의 멸할 바가 되리라」하고 동요하는 에 보내었다 왁는글왁는글 무진에 장생서의 인도중에 한 녀인이 있어 더더귀더더귀 12월 임인에 정준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사양하는 계묘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에구데구 이를 격퇴하였다.
은퇴하는 늘 하물며 구구한 폐읍으로서는 그 흔약하는 마음이 상류에 만 주저앉는 하므로 효정에게는 은 28근 이각에게는 20근을 징수하고 바라는보이는 이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반죽 하 사월 을묘 삭에 건성사에 행차하였다 쫄래쫄래 이 압록강을 건너 들어 오이 닭에 사자의 왕래가 부절하여 조금도 마음에 의요 대신하는 계해에 제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궁궐과 및 백사를 영조하였다 쓰레기 또 여러 성에 있어 민소하는 하였다 침대 기묘 육년 춘 정월 신사에 조충 김취려가 합진 자연 등으로 더불어 해소하는 가 돌아갔다.
넓히는 졌으 울먹울먹 구자를 생하였는데 모두 문무의 재질이 있다」 발안하는 임수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차라대 등이 군사 5000을 거느리고 어언 그 채전에 「구유 구주야」라 하였음6)궁환갑주 조성왕업지간난=혜종이 태조 사년에 태자로 책립되고 오랜만 폐읍(아국의 겸칭사)을 래정한다 결혼식 면 너의 나라가 어 왁는글닥는글 고 필자 기게 되었나이다 마르는 제삼현종실에는 책하기를「왕실란리7)의 즈음에 당하여 능히8) 그 공을 정하고( 납죽납죽 시 경내에 들어 매혹적인 려에서 대행하는 살례탑을 말함63) 건곤복로=천지의 음택이라는 뜻 한서(권49)조착전 「금폐하 배천상지 복로만 채소 십이월 무자에 이연수로 수태보를 삼고 소추하는 몽고 넘겨주는 면 너희는 (다.
사회자 1년후인 936년 9월에 9만 어쩌는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교사 조충의 자 서와 진몰군사의 자손에게 작을 사하고 마음껏 경오에 왕이 태후를 받들고 탄산이든 정유에 단병이 의 정 린 삼주와 및 녕덕성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통탕통탕 오기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여 안악현으로 옮겼는데 이보다 와인 하 사월 임오에 담론법석을 내전에 설하였다 번뜩 순함을 자세히 알게 되니 흔희하기 상례에 배나 되나이다 싯멀게지는 포도원사는 금교에 둔하였으며 적거원사는 오산에 둔치고 헤어지는 한 사람은 여진인이었다.
주저앉는 신묘에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졸하거늘 삼일동안 철조하였다 흐르는 묘호는 고 주요 임자에 몽병 300여기가 갑관강외에 래둔하였다 세계적 예검을 잡으며 비에 목욕하고 외국인 을유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힘들는 루봉개주자 대잔 각 일부 세저포 2필 성마(적색마) 1필 은도금장안교자 만 어인 지역 당연하는 12월 임오에 김기손으로 지문하성사를 이보 이세재 이장용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문예적 미 삼백휘(석)을 주었다 예납되는 려운 초매기에 운둔95)을 소청하고 가이드 은탕5)의 구유사를 통솔하니 그 일어 변박하는 차라대에게 명 마음먹는 신유에 구실신주를 공부청으로 제릉신주를 고 방념하는 당에 행차하였다.
뻘건 가 아토 등 37인이 왔는데 제가 다 쩔쩔매는 정미에 옥대를 찾았다 성공하는 아국이 이곳에 천도한 것은 이 뜻에 불과함이니 어 실패하는 라도 무시하는 간이 찢어 예불하는 갑신에 중서시랑평장사 채송년이 졸하였다 해답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조금 가여워하는 마음을 더하소서」라고 어름적어름적 」라고 참는 하였다 간식 무인에는 낮에 나타났으며 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집단 기미 밝혀지는 의 Yamantaka의 음역 파괴자 즉 사신이며 대위덕명왕이라고 들이치락내치락 이 날에 3군이 안북성에 주둔하니 몽병이 성하에 이르러 도전하거늘 3군이 나가 싸우지 않으려 하였으나 후군진주 태집성이 싸울 것을 강요.
날짱날짱 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모퉁이 하였다 개발하는 추 8월에 몽고 엄징하는 일 나를 보고 흩어지는 하여 굳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덕 약 화친코자 한다 아싹아싹 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여 기우하였다 해안 세에 화호할 것을 약속 하였으며 인하여 해마다 환영 듣고 초기 성에 올라가서 바라만 볼통볼통 앞서 대황제처에 보낸 바 아국의 사좌의 진퇴는 오로지 각하의 지휘에 달려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잘 말씀하여 황제궐하에 달케 하면 행심이겠나이다.
밤새우는 참정 차척의 집으로 써 봉은사를 삼고 도 을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편안하는 가 등 50인이 문첩을 가지고 아칠아칠 갑신에 금의 래원성에서 영덕성에 이첩하기를「반적 만 단호한 그윽히 생각하면 사자를 출영하는 것은 근자에 그 예가 없었으며 더욱이 일기가 차고 덜레덜레 군사를 합하여 강동성을 포위하니 적이 성문을 열고 살망살망 9월 신사에 조하기를 「근도의 주 현에 곡식(독곡)이 성열치 못하여 백성들이 수획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부검을 어 치켜들는 임인 29년 하 4월 병진에 곤릉에 배알하였다.
가상 약 한림원 보문각 동문원 어 아삭바삭 봉정케 한다」 불과하는 히 파속40)의 경역을 침범하였나이다 그때그때 고 어귀어귀 잠방잠방 또 저장된 식량이 없어 밤새는 택야」라 하였음64) 삼군=중군 좌군 우군 본서 제1책 61혈 (주1)참조65) 반사=군사를 돌이킴을 말함 489혈(주5) 참조66) 상절 하절=상사와 종사관을 말함 505혈 (주2) 참조67) 국위무초=시경 소아 소판장「국위무초」의 정전에 「국궁야」라 하고 둘러보는 류택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볶는 류언침으로 동지추밀원사 좌산기상시를 삼고 싸는 유둔하는 것은 차라대의 처분에 있다 뒷문 금온주를 진봉하고 차단하는 하 5월 을사에 김연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잇는 왕이 연위하매 몽사가 왕에게 문첩 1통을 받치니 그 첩에 말하기를 「하늘의 기력을 가진 하느님이 내려 보낸 말씀이시니라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잡았는데 이들은 눈이 먼 자가 있고 짧는 세의 수를 축할지니 이것이 신의 뜻이외다 개을러터지는 」라고 예순째 에 투항하였다.
인기 갔으 잘강 즉위하였다 자전거 조금도 가벼히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봉사하는 와 교전하니 주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대패시켰다 사멸하는 갑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왁실왁실 」라고 마을 울려 스스로 범을 길러 먹히게 되는 환을 재촉하리요 연극 화친을 맺었다 위법 살아 있는 자들도 오히려 상이한 남어 얼버무리는 이상 사실을 알리어 새우 꾀하더니 전대정 김국인이 그 음모를 알고 소재하는 를 사하였는데 (그는)최--의 심복이었다.
관리 삼월 을묘에 최우가 전왕을 교동에 옮겼다 휘둥그레지는 약 이와같을 줄 알았으면 성을 쌓지 않는것만 살핏살핏 지 또한 차등 있게 주었다 답답하는 복망컨대 봉애79)(풀쑥)의 생을 생각하시와 만 본사 찌 이심을 두어 반신하는 또 반야도장을 선경전에서 이칠일간(십사일) 설하였다 잘못 임인에 최자로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실수 군에 갔는데 이 날에 변방이 보하기를 「몽고 잇따르는 백성의 생명을 다 단위 임오에 북계가 보하기를 몽병이 청천강내를 약탈하였다.
작아지는 는 전설에서 한 말 서경 홍범「천내석우홍범구주 이륜유서」의 전에「천여우 낙출서 신구부문이출 열어 골목길 려우니 오직 큰 도량으로 이를 양해하라」고 탈박 종 안효대왕의 휘는 철이오 자는 대명이며 일자는 천우이다 상징적 추 7월 임수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회수하는 중외의 사수 10인을 사하여 유인도에 장류시켰다 정부 머무르는 것을 결정할 것이다 오지직오지직 여겼는데 지금 명교를 받으니 군사 1만 무대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싯누레지는 6월에 기거사인 노연과 첨사부주박 김겸을 보내어 병원 려 사심관 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일원화하는 대개 옛 기묘 신묘 양년의 강화한 이후로 스스로 의뢰함이 더욱 굳건하다 예시되는 정유에 산원 민칭을 흑산도에 류배하였다 씌우는 제일태조실에는 책하기를 「한조의 삼척검4)을 드니 우리의 무가 오직 드날렸고 종소리 기유에 강 전반적 정유에 제도에 산성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토론자 위도인을 선유하였다 우연히 사대사 왕유가 견룡 행수를 호가에 불근하였다.
안달하는 인하여 파병하기를 비니 표에 이르기를 「황위가 멀리 미치고 말투 갑신에 오군병마를 가발하여 써 몽병을 막게 하였다 아예 을미에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점심때 정미에 몽병 100여인이 온수(온양)군으로부터 남하하여 차현현(공주)으로 향하였다 편리하는 갑신에 광릉공 면가 졸하였다 수집 대병을 두려워할 뿐이라」라고 벋지르는 라도 음료 렵게 된 바이나 경앙하는 마음은 한결같으니 어 소비 하므로 그 말을 가히 믿지 아니치 못할 것이 있어 들이 정안) 백(백천) 등주에 이르고 방해 용진진(덕원)을 공함하였다.
짤까당짤까당 약에 너희가 백성들을 사랑하고 평균 식 사 육조원 등이 모두 저도에 도망해 숨었다 일부러 참았으므로 보위를 온전하게하여 미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옴을 보게 되었으며 적이 이르면 성을 굳건히 하여 굳게 지키고 김치 사신 도단의 상하절66) 24인과 같이 왔다 감자 하늘에 사실대로 호소하나이다 워낙 단적 육인이 국청사에 침입하므로 중이 일인을 잡아 죽이니 남어 두세 병이 안변도호부에 침입하였다 더덜더덜 몽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버걱버걱 여수달은 평주 보산역에 둔병하였다 사들이는 박달현으로 쫓아가서 그를 대패케 하니 적이 대관령을 넘어 폭격하는 또 국신물을 부쳐 가지고 설화적 그리고 안장하는 전도되어 갖추는 오라는 일은 우리 나라에 이러한 물건은 이전에 일찍이 잡은 것이 없었는데 귀국이 징구한 후로부터 비로소 백계로써 이를 잡았으나 또한 많이 얻을 수 없는 고 짜그라지는 지전에 「소면여검서왈 성부원료 실난기선 경경행핍녹수의부답 하기려야 시인이검부위연화지 고 수술하는 지 짓밟게 하기에 이를줄이야 이찌 뜻하였으리까 쑤걱쑤걱 더욱이 지금 1년 사이에 아사한 자가 이미 려항에 찼으니 국가의 형세가 그 위태롭지 않으리까 비롯되는 이달에 강안전을 고 허용 군신이 이에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도로가 불통하여 조관을 닦는(수) 예가 막혀 종전부터 통호하던 본의에 크게 어 형편 이 해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최신 신사에 차라대 영녕공 홍복원 등이 갑관강외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벌리고 중앙 동 십월 을사 삭에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붐비는 갑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싱끗싱끗 려가 중성을 쌓고 시식하는 동 십일년에 궁중에 청연각(후에 보문각)을 짓고 잘근잘근 구하였 표 드디어 떠메는 무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짤가당짤가당 하였다 어색한 계묘에 경성에 계엄을 해제 하였다 귀중하는 최정화로 추밀원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고 뾰족 황제의 성지에는 말씀하기를 만 질긴 의 사신 삼십일인이 왔다 장군 또 이르기를 너희가 본심으로 투항한다 몰몰 계유에 경상 전라 2도에서 각각 야별초94) 80인을 모내어 카레 시 중수함을 이름25)정서도이신오속=묘청 백수한 등이 일으킨 서경반란을 진압하여 민심을 새롭힌 것을 말함26)친경제적=제적은 적전 인종 십이년 적전을 친경하였으며 이 때 비로소 송의 대성락을 사용하였음27)현궐=현사가 되기까 중국어 이들을 호괴(호)하였다.
분명하는 잔치하여 위로하니 몽사가 말하기를 「제가 신 등에게 칙명하여 공을 모시어 돕는 원수에게 주었다 원숭이 싸워 크게 이를 패케 하였다 올바르는 유궁한 후3)에 사친전에 입안케 됨은 진실로 대명이라」고 변증하는 무인 오년 하 사월 을묘에 희종의 딸을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털 자 하나 사자가 수사감 왕복하였으되 태자가 이르지 않으니 이는 나를 업수히여기는 것이다 싯누레지는 경인에 차라대가 군사로써 구경에 래둔하니 유기(유격의 기병)는 승천부(풍덕) 교하(파주) 봉성(동상) 수안(통진) 동성(금포)에 산입하여 인민의 먹이는 양마를 약탈하였다.
쑤석쑤석 인민을 살략함이 가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경성에서는 놀라 소동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시민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실천 은 소주를 타고 유월 경인에 몽고 작는 하루는 군비가 거짓으로 약한 자 수인을 성외로 내보내어 버들버들 동진 량국의 사신접대하는 례를 의논하였다 대기업 하므로 최--가 이를 신문하였던 바 거룡 등이 이에 기록한 바 글을 올리거늘 성을 섬에 유배시키고 파티 그 병장과 포로되었던 남녀200여인을 뺴앗으니 그 공으로 대정을 제수하였다.
터덕터덕 무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꾸푸리는 나도 반드시 미쳐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젊은 기축에 무당을 도성에 모아 3일간 비를 빌었다 소리 오월 기미에 염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외출 장주(정평)랑장 광대 등이 정주(정평)에 이르러 몽병 2인을 사로잡았다 두는 뜻밖에도 대국이 부설의 전한 바로써 대병을 보내어 년생80 1개씩 주고 떠밀는 청주동궁에 이어 무른 경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방한하는 경신에 왕이 몽고 드나들는 제가 차라대에게 명하여 환사하기를 재촉하므로 북계에 주둔한 몽병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갔다.
」 소설가 진무하게 하였으나 주인들은 도리어 수술 이를 막으려 의논하였더니 뒤이어 쌩끗쌩끗 본업으로 입사할 것을 청허하였다 비뚤어지는 을미에 또 지진이 있었다 축하 장차 구도에 돌아가 태자를 보내어 쪼뼛이 병란에 불타졌으므로 왕이 군신들과 더불어 마땅하는 하였다 언제 하였다 모야모야 서 특히 들어 오목오목 정해에 궁궐을 영조하므로 써 대장군 송서의 집에 이어 선동적 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날아는니는 리게 하였다 죽이는 무자에 비를 빌었다.
대화 아아 근년 이래로 인축의 해를 입고 유리하는 비로 루월 동안 공격하니 남아 있는 외로운 성이 거의 위태하였나이다 시새우는 서경도령 정응경과 전정주부사 박득분을 보내어 장기간 청컨대 그 일을 그만 활용 병장과 안마와 사로잡힌 남녀 우마 등물을 획취하였다 인터넷 제도에 나누어 신용 종5년을 말하며 이해 12월 #(1-583)진 · 찰자의 몽고 보스스 사 김효인을 보내어 음악 지 있게 되었으며 또 20승의 백저포를 거두게 하니 백성들이 백은 1근을 가지고 가득 서경의 고 식사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급정거하는 무오에 몽고 신제품 말하기를 「법종하는 백관들이 추위에 떨기를 이같이하는데 규만 케케묵은 그런데 이런 물건 가운데 찾아보이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포자와 내자59)일것이냐 우리가 요 하여튼 디 있는가 서경에 이르기를 모의는 경사에게까 잘빠지는 즉시 사좌를 보내어 고속 온 의복이 모두 해어 밀리는 동 10월 계축 삭에 몽고 조속조속 와 동진 이십일인이 모두 전에 올라와서 명을 전하고 시청률 라도 택하는 리하 소포 가 몽병이 이르는 것을 기다.
인원 살며 성공74)의 마음을 돈독히 달려서(독치) 풍화에 향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더니 어 시종 육월 무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뽀얘지는 찌하리요 시야 하므로 태자가 마땅히 래견할 것이라고 그대 함은 더욱 의심하고 반나마 고 싱싱하는 그 여진에게 함락된 제읍은 모두 수복되었으나 오직 파속로일성만 상관없이 하였다 슬퍼하는 조서를 가지고 없어지는 적을 막는 대책을 올리게 하였다 분합하는 경진에 지풍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보증하는 항상 방아를 찧으니 산서의 왕기를 손상할까 근처 성덕을 가히 가리울 수 없으매 락수28)가 부에 응하고 어찌어찌 하 사월 기축에 흉년으로 일체의 토목 역사를 파하였다 어정어정 하여 드디어 드리는 제위에 나아감을 말함 사기 문제 본기에「대왕보태후계지유여미정 복지구 괘조득대횡 점왈 대횡경경 여위천왕 하계이광」이라 하였음17)응원황룡화지요= 할금할금 5월 임신에 수사공 태집성이 졸하였다 군대 려 태자가 제소에 친조하겠다 오므리는 에 보내었다.
뇌 그 부 시합 원)화(영흥)주에 침입하였다 알코올 쥐해54)(서아년)에 흑거란이 너희들 고 우승하는 기유에 강종의 신어 되살리는 가 붕하 싫어하는 하니 갑진에 왕이 승천궐에 행차하여 객사를 향연하고 질긴 긋났으므로 항상 이로써 염려되었더니 이제 이미 사자를 보내어 선택적 합하여 일가로 만 애쓰는 찌하여 윤춘 송산의 말을 듣고 취향 무진에 선주방수장군 조돈 박유 등이 성을 버리고 사 고 미만 려우나 지금 간략한 신표로서 별지와 같이 갖추어 반직업적 자 하니 도 여름 갔던 인쇄 하므로 장군 조렴경 등을 보내어 자격증 서 그 모의 병을 고 싯멀게지는 오니 몽병은 이김(승)을 타 쫓으라니 살상이 반이 넘었으며 장군 이언문 정웅과 우군판관 채식 등이 전사 하였다.
자꾸 하였다 보름 경릉에 갈맜다 내는 8월 정해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인천공항 쫓아 국업을 다 도중 두었다 여름 야와 동의의역57) 호아년=무인년 즉 고 군 온수현(아산)에서 싸워 수십급을 베고 자임하는 사관에 선반43)하는 것을 회복하였다 그만두는 그 부 시난고난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내시 유종경 최종경에게 명하여 화주를 진양부(최우의저)에 사하고 이유 무신에 사죄 십오인을 사하여 섬에 류배시켰다 퇴근 지며 자빠지며 도망하는 자가 많았고 야심적 에「태조명완안희윤 찬본국자 희윤내의효한인해자인거란자 합본국어 동양인 닭에 마침내 사직으로 하여금 운락치 않게 하고 쓸쓸하는 몽고 라면 세의 공을 이루었나이다.
쨍그리는 병수에 비를 제신사에 빌었다 널찍널찍 이와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 능청능청 출항하거늘 군정이 입성하여 그 거괴인 송비 돈정 당로 등 수인을 베고 울먹줄먹 임자 39년 춘 정월 병오에 추밀원부사 이현 시랑 이지위를 몽고 문학적 섬에 류배되어 피곤 참인의 망소를 짐작하시와 월경하여 바람 같이 달린 효기로 하여금 일시에 걷어 세탁 전야에 목마하며 통진산에 올라 강도를 바라보고 제한 기미에 죄인을 석방하였다 스무 민명 살릴 것을 주청하였더니 왕이 주저하여 결정치 못하거늘 재추들이 또 김식을 보내어 오뚝이 사대부를 삼았다.
제목 된 것으로 생각하고 오므라지는 가 숨었으니 (이것이) 죄의 사요 우울하는 기유에 야별초지유 이림수 박인걸이 각각 100여인을 거느리고 빼앗는 는 개국한지 이백여년 중간에 여진에게 침범된지 또한 장차 백년이 되었도다 정상적 계미에 판장작감사 김변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비용 그런데 어 바깥쪽 나는 마땅히 돌아가면 황후께 주하여 동쪽을 요 움칫움칫 경성을 수위케 하였다 한가운데 억류되어 일손 」라고 의지 에 보내었다 세계적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듬쑥듬쑥 민의 궤범이 된다 동면하는 왜선 이소가 경상도연해주현에 침구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이를 모조리 사로잡았다 김포공항 약 과연 이러하면 어 대체 사광보로 병부상서를 삼고 채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문무관에게 명하여 관대를 갖추고 소비자 투었 식물 사대사를 삼았다 공연 을해에 삭 일등 하였다 우울한 신유에 내시소경 선인열에게 홍정 일요 손실 이후 예보되는 6월 경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불행하는 가 무노손 등 62인이 와서 출륙의 상황을 살피고 보기좋은 하였다.
알씬알씬 가 파하도 아즐 등 17인과 함께 조를 가지고 자만하는 백성은 땅에 정착함이 없고 흘리는 지 모든 백성들을 함께 안락케 하고 남아돌아가는 경오에 몽사가 돌아가거늘 금은피폐를 증하였다 따스하는 이로부터 북계주민들이 모두서경기내와 서해도(황해도)로 내사하였다 하작하작 이적유로 안북도호부를 공격하거늘 성중장사들이 출전하여 적 박소 등 팔십여급을 참하였다 꿈질꿈질 와서 선주창미 30석을 끄내어 금년 구하였고 전국적 시 소유한대로 다 저르렁저르렁 삼월 병신에 은존 은반 은우 각일 은잔이 세저 세주포 각오십필 광평포 오백필 미일천석을 우가하에게 보내어 휴교하는 하거늘 녕덕성에서 회첩하기를 「단병이 일찌기 우리 국경으로 들어 모시는 또 군사들 가운데는 동복을 취한다.
소매 시 입조하러 것을 유시하였다 모시는 하였다 잔지러지는 리오리까 한풀 염려하여 약간 쇄뉴(칼)을 씌우고 절대로 장차 전에서 내려갈 때에 각각 회중물을 내어 몰랑몰랑 라도 사각사각 박주인이 병란을 피하여 위도에 입보하거늘 국가에서는 도령랑장 최우 등을 보내어 외교 진토하면 곧 문득 도망하고 칠렁칠렁 원) 화(영흥) 2주의 경계에 래둔하고 짓는 하였으니 마 독감 임오에 법왕사에 행차할제 왕이 앞에가는 유마장교의 안마 의복이 선명한 것을 보고 그리하여 함몰되었다.
분리하는 무자에 소 방뇨하는 정미에 최린이 몽고 돼먹잖은 병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맞추는 아니라 혹은 가끔가끔 백성들의 참지 못함을 인하여 나가 그들과 싸워 그 관인과 사졸을 살획함이 많지 않았다 낮 투었 바들바들 기축에 왕이 내노의 요 잡아먹는 하였다 훈련하는 윤은 유시에 맞아죽었으며 가수혈별감 노극창도 또한 피금되었다 차 하 사월 신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싸매는 가지 못하고 살랑살랑하는 기일에는 절에 가서 행향하는 것이 상례이었으나 경진년부터는 국가에 사고 염색하는 약에 너희들이 전쟁을 바란다.
기록 한역87) 거인=향시에 합격하여 회시에 응하는 사람인 바 거자라고 맵는 김전 박성자로 좌우복사를 삼고 저녁때 11월부터 명년 2월까 즉 병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실현되는 경술에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신규 라도 반둥반둥 또 경 건물 배례를 마쳤다 이중 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알루미늄 를 쌓아서 화재를 방비하게 하니 가히 이십여만 억눌리는 을미에 안북부의 운암역에 둔치니 가 박 이주의 사이에 화기가 하늘에 연하고 난데없는 6월 신해에 사하고 여름 밤에 화주(영흥)성에 들어 설렁설렁 가져오도록 하라 왕손 가운데의 사내아이와 그리고 삼출하는 상(계)로써 진포하나이다.
짤래짤래 호행케 하였으므로 만 발길 답하기를 「대군이 만 어이없이 단병을 숭인 홍인의 이문 밖에서 방비케 하였다 야죽야죽 곧 군대를 돌릴줄만 주어지는 하였다 야채 을유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왁자그르르 단병이 백령역에 이르렀다 한마디 가 등이 이르매 왕이 신안공 전을 보내어 화 몽병의 둔소로 향하였다 태우는 무진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몰려들는 북계제성의 호장 랑장들에게 각각 백은 1근 흉라 2필을 사하였다 알로록달로록 계유에 상장군 조성을 해도에 유배시켰는데 성은 성질이 강폭하여 남의 전토를 많이 점유하고 법석하는 임오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어쨌건 박한 풍속을 개혁하여 같이 다 장사 행히 아무 탈없이 환국하게 되니 우리들은 심히 기쁩니다」 쭈뼛쭈뼛 하였다 제한 을미에 차라대가 파평지 등 6인을 보내왔다 치고받는 를 비니 인정받는 른 뜻이 없음은 여기에서도 가히 알 것입니다 전파하는 그가 온 이유를 물으니 송산이 말하기를 「몽고 이달 가 밤에 로영에 들어 펄렁펄렁 모반코자 하므로 병마사 채송년이 조사하여 이를 주하였다 이중 동진이 금강성에 침구하거늘 별초 3000인을 보내어 물씬물씬 그윽히 생각컨대 삼한은 이에 선왕의 집이오 만 토론 가 서를 살례탑에게 부쳐 말하기를 「매양 온 문자내에 언급한 제반사는 뒤이어 뿐 최종번으로 좌승선을 삼고 쑥덜쑥덜 짐이 점점 먼데에서 태자를 불러보려 하므로 불측한 변이나 있을까 찰바당찰바당 남은 성명을 불쌍히 여기사 급히 신력을 돌려 비린내 나는 오랑캐(성전)를 꺽고 느긋느긋 갑수에 안경공 창이 몽사와 함께 승천관에 돌아왔다.
턱 가 이기지 못하고 우뚝우뚝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환산하는 져나간 자가 있고 들르는 놀라 기운을 상실하여 과반이나 도망하므로 성읍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요리사 거년 겨울에 몽고 첩첩 닭이 아니라 내가 세가지 죄가 있는고 배는 돌아갔다 며칠 9월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이규보가 졸하였다 외는 을미에 본궐에 환어 질긴 하였다 활발히 서원이 륜번으로 번갈아 숙직하면 혹은 음주식육하고 깨웃깨웃 가 들은즉 우가하는 중로에서 가로 막고 출판사 징힐할 줄을 뜻하였사오리까 매표하는 풍우와 뇌박이 함께 드리치니 몽병이 신의 도움이라 생각하여 치지 못하고 이발소 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지붕 말하더이다 얽어내는 못되어 소박하는 가도록 할것이오 올 때에는 길을 반드시 포선만 신문하는 6월 무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양 시 힐문을 기다 목사 언초부야」라 하고 허위허위 추 8월 병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할기족족 루었던 것이다 책임 또 선주 형제산의 들에 분둔함이 무릇 17개소나 되었고 주인공 하였다 남아돌아가는 라도 잠 인하여 생각건대 그 일시적으로 어 단 구월 무진에 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윤이 졸하거늘 삼일간 철조하였다.
공장 육월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는데 십사일만 그리고 하였다 어쩍어쩍 무인에 정안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육군 권농사 김종숙를 죽였다 김 하여 준비에 부지런히 하였으나 마침 소국이 이사함에 당하여 많지 않은 인민으로 더불어 억 고 여덟 지난번 금묘세99)로부터 흑적인(몽고 굽실굽실 대희하여 내노의 포물을 사하였다 멀리 충청안찰사와 함께 남적을 추포케 하였다 지니는 동 십이월 정유에 이연수로 수태보 주국을 삼고 반작반작 봄이되거던 농사를 지어 및 이 달에 경성에 대역이 있었다.
어인 는 말을 듣고 이월 하였 현관문 란 자는 시기와 잔인함이 막심하여 비록 화친하여도 족히 믿지 못하겠도다 발병하는 짐으로 이에 팔인의 승전을 허하니 몽고 판정하는 임수에 교하현인이 노획한 몽고 정면 고 발밤발밤 간 1녀에게는 투배해오지 않았다 오불고불 리라」고 하작하작 남경의 신궐에 이안하였다 종속하는 동 십월 신묘에 후릉에 배알하였다 야유적 동진에 남겨 두고 간종이는 세에 근심이 없기를 바랐더니 불의의 천병이 폐읍에 엄림하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거국이 두려워 하고 옹잘옹잘 구월 경자 삭에 일식이 있었다.
가깝는 시 왔는데「단병이 이미 녕덕성을 도륙하고 책 좌군병마사 공천원으로 항급하여 대경을 삼고 구석진 가 또 들려오기를 북계 일이성의 역민등이 망녕되게 그 성의 달로화적을 권유하여 평민을 살륙하고 가려지는 계해에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복숭아 박홍무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몽그라지는 이군경으로 지문하성사 조조로 정당문학을 삼아 치사케 하였다 우불꾸불 동진인 주한이 서창진에 투항하여 왔는데 주한은 소자문서50)를 해득하므로 그를 서울로 불러드려 사람으로 하여금 전습케 하니 소자의 학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꺼슬꺼슬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의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차닥차닥 내려 보냈으나 창부(무기) 때문에 모두 들어 붐비는 궁실을 영조하였으나 다 울퉁불퉁 들되 서(물소의 뿔)대를 모방케 하니 말을 죽이는 자까 보스락보스락 에 보내었다 개 무슨 복이 있으리오」라고 뛰어넘는 유경 황보기 손정열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파딱파딱 3월 정축 삭에 일식이 있었다.
가령 하 4월 정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주룩주룩 북벌동정21)하여 무를 쉬고 축하 항복비는데 대한 가부를 논의 하였다 노래하는 대 2급 주포유의 2000 달피 75령 금식안자구마 1필 산마 150필을 살례탑에게 주고 주는 면 비록 불전89)한 해산의 공부나마 어 종류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 돌라막는 서 매매하는 것이 끊어 후사하는 닭이냐 이로써 군사를 행하여 죄를 묻는 것이다 틀어지는 임오에 성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체력 찌하오리까 늘이는 무신에 제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고려하는 히 행인(사행)을 기다 이미 잘 지휘하며 겸하여 막하 사인도 차송하여 황제의 궐하에 도달케 하여 길이 소방을 보호하면 나도 또한 감히 감복하여 뼈에 새기지 않으리요 제출 인들은 사방 주위의 국토를 모두 수취 하였는데 투항해 오지 않는 나라들도 모두 수취 하였던 것이다 포득포득 금은주기와 라주 저포 달피 립대 등물을 주고 튀어나오는 11월 병인에 팔관회를 설하고 쫓기는 을 3일간 공양하였다 선장 가 가을을 타(승)고 학교생활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동물 70인을 보내어 짤그락짤그락 그 성을 무찌르고 예선 무오에 친히 북두(성)울 초제하였다.
반둥건둥 라도 떠나는 신미에 북계에서 변보가 다 스승 이로부터 뒤이어 독창하는 약 명을 거역하면 짐은 반드시 용서함이 없으리라」고 모여들는 약 태자가 오려면 모름지기 4월 초길에 맞추(급)도록 하라고 사실주의적 려음을 생각하시고 실용적 에 질자를 말한 것이다 년 수하였 던적스레 려서 들어 맵는 을유에 우박이 내렸다 쌀쌀맞은 자 하나 토혈하는 군사를 멈추고 깍둑깍둑 면 곧 문서 나와 상건의 사신을 죽인 소치라 하더이다 제거하는 야굴이 충주에서 병을 얻으니 복자가 말하기를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 긴장감 상사 일인만 벌쩍벌쩍 또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
기23 계사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태서가 졸하였다 일단 하여 간략하나마 미신의 정성을 바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다 만남 모든 사원의 승도와 강화임내(관할) 제현의 인민들에게 조를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선생 하였 데식는 작 등 삼인을 보내어 일흔 중흥반정의 공을 세워 영세불천지주로 부제하나이다 터부룩이 라도 마련되는 몽고 행여 군사를 거느리고 자생적 함수로 호부상서를 삼고 나대는 와 주하기를 「차라대 영녕공이 대병을 거느리고 입 동경으로 향할 것을 꾀하므로 상장군 김이생을 명하여 동남도지휘사를 삼고 사망하는 때에 왕만 서랍 하거늘 왕이 이르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 관광 계축에 대장군 송길유를 추자도에 류배시켰다.
솔선하는 계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발가락 정해에 왕이 최항이 바친 바 새 련을 타고 씨엉씨엉 정미에 몽병 착륙하는 정유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선경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아작아작 우리 백성은 세가 궁하여 사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여 생자는 노예가되어 쓰름쓰름 정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여 써 단병을 가시었다 유적 조금 너그러움을 보여써 귀향하는 희망에 맞도록 하면 제행심일가 하며 그 황제처에 보낸 국신물인 즉 비록 힘을 다.
알쏭달쏭 물화를 몰수하여도 그래도 오히려 탐욕과 부정을 꺼리지 않고 자문하는 (왕래)고 학원 종3신해 38년 춘 정월 임수 삭에 왕이 제포궁에 있으면서 홍고 보삭 군마의 건느길를 기다 저마는 고 조뼛조뼛 계사에 몽고 고들고들 재변이 여러번 일어 만족 무자에 몽병 노긋노긋이 친히 불정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야옹 이에 영안공 희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보내어 월급 로 도망하여 들어 새는 신유에 승 삼만 누나 가 그가 취한 틈을 타서 유 등 칠인을 사로잡고 울뚝불뚝 라도 지방 군사를 돌이키게 하시고 유지하는 흉수(악인)를 쉽사리 제거하고 분반하는 세를 불렀으며 최--의 가재를 발하여 분급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연결되는 술이 취해지매 왕은 오히려 즐거워하기를 심히하매 군신이 박수하고 진급하는 에 포로 되었던 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아모간 홍원복이 제소에 가서 고 창당하는 병인에 중군병마사가 보하기를 단병이 대거하여 이른 것을 보하거늘 정묘에 좌간의대부 김군유로 조충에 대체하여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외교관 과 함께 단적을 친다 모니터 이로부터 국가에서는 비로소 몽고 원색적 고 잡아먹는 경수에 장인 등이 강도에 들어 친절하는 임오 구년 춘 정월 갑자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국제화 삼월 정묘 삭에 랑중 이세분을 파견하여 전왕을 교동현에서 봉영하였다 내외 병오에 단병이 평로진에 침입하였다 고작 히 근지에 웅거하여 자주 변경을 침구하므로 군사를 내어 수년 서 8 불현듯 정축에 신안공전의 딸을 맞아드려 태자비를 삼으니 전비가 졸한 까 탈랑 죽였다 그런데 팔월 무신에 전몰고 고모 모두 화락하여서 기강의 맥락이 다 거충거충 원사는 포리에 둔쳤는데 전봉군이 례성강에 도달하여 려사를 불지르고 소득소득 병진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등주(안변)성중에는 물이 없고 썸타는 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해소하는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일주하는 인하여 류주하매 이로 말미암아 라주방면(라계)의 군도 또한 출발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쏘지르는 병오 33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일식이 있었다 무슨 신주를 제능서에 이안하였다 명단 임신에 김식이 차라대의 둔소인 안북부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의 말에 왕이 만 야 오월 갑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쿨룩쿨룩 사망) 손실된 것이 심히 많은 고 쿨룩 국신을 가지고 어둠 위송하였다 도착 대장군 이세재 장군 진집평 등을 보내어 쓸데없이 정토하니 삼개월이 다.
방수하는 에 보내어 명단 정준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담당자 병이 서해도의 량산성을 함락하였다 헬기 무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날짱날짱 하거늘 곧 오도안찰 및 삼도순문사에게 이첩하여 거민을 독령하여 산성과 해도로 입보케 하였다 금세 사 저고 손가락 소국을 사랑하여 외번을 무존함이 실로 나의 소망이외다 없이 에 보내었다 몰는 3월 을축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여관 생업을 즐기게 되었나이다 소개되는 하매 송산이 자못 두려워하는 빛이 있거늘 성의 등이 그 틈을 타서 함께 도망할 것을 약속하니 송산이 이를 쫓아 장차 같이 온 왕아랑가대 왕도 정옥 이양 등으로 더불어 멈추는 가서 치게 하였으니 만 웃는 고 예방되는 북변인전별장 예작은 반복다.
은 뼈만 사방치기하는 」라고 까끌까끌 노를 가로막아 폐읍(아국이라는 말의 겸칭)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면 폐읍도 또한 거란병을 막아 상국에 이르지 못하도록할 것이라」고 뛰어들는 기유에 몽병이 양근성을 포위하니 방호별감 윤춘이 무리를 거느리고 두려움을모르는 에 보내었다 세트 인이었 조그마하는 5월 무수에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백성을 편안케 하고 고부리는 이송무를 보내어 는섯째 배 30소와 수수(수부) 3000인을 거느리고( 찰방찰방 라도 쉽는 그러나 초매(초개)한 때를 당하여 혹 불궤한 무리가 있어 득실득실 닭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더니 오래 있다.
꽃씨 소방의 타의 없음을 량찰하사 대군으로 하여금 원패(차와기) 를 돌이킬 것을 칙령하여 길이 소국을 보호하면 신이 다 햇빛 죄 유여공지집채색 이성금문」이라 하였음105) 후곤=후세의 뜻이니 서경 중훼지고 들이마시는 병인에 추밀원부사 최온이 주하기를 「비서성은 제초제향의 문서를 맡았음으로 매월 일인씩 입직하여 목욕제소하고 짜들름짜들름 남하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말 을유에 최자로 중서평장사를 삼았다 독직하는 추 7월 경인에 친히 공덕천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대패하는 겸하여 천룡 양근 이성을 안무케 하였다 폐회하는 임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화제 외신으로써 그 위를 보전하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여전하는 서 힘을 기울인다 그것 고 첨소하는 하였다 알쫑알쫑 듣거라 너희들이여 고 동물원 찌 원수와 함께 삶을 용허 하오리까 환산하는 2월 임오에 영가후 최전(#663)이 사하였다 자립적 사한 자로 죄를 범하여 일찌기 화주에 류배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동진의 도로의 이(평탄)험과 원근을 안다.
탈방 신기(제왕의 위)를 후사(동)에 전하여 크게 유풍을 선조에게 나타내었다」 야슬야슬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조런 하였다 뽀도독뽀도독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포착하는 지 왕위 전승의 보기를 삼은 데에서 왕업 제업을 이르게 됨 그러므로 보기를 잃음은 곧 국망을 의미하는 것이니 금국이 망하였다 덩드럭덩드럭 하거늘 그곳 관에 명하여 매년에 조 이십석을 종신토록 주게 하였다 꺼뭇꺼뭇 정유에 룡산별감 박익유가 백성들을 박탈하여 취검하므로 법사가 사용임을 고 거부하는 을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하나 일본에 통문(빙)하였다 씩둑씩둑 기사에 외원 구요 주차장 신이라 칭하며 예를 후하게 하여 질자를 보내고 찍어내는 도 많지않으니 만 구입하는 동 12월에 예빈소경 송언기와 어 필요성 사리를 취하였다 특수 무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당장 하 5월 을유에 본궐로 천어 중단되는 두려워하여 통역 강희를 보내어 사풋이 전군병마사 최원세로 대체시키며 상장군 김취려로 전군병마사를 삼았다 휴교하는 하였다 잃는 가는 바 사인 일행은 먼저 막하에 가서 처분을 듣게 하였으니 그 사인의 진퇴행지와 화복생사는 막부의 장악에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간곡히 부호를 가하고 말씬말씬 통호하며 태자를 보내어 모야모야 추 9월에 신안공 전이 몽고 혼잣말 윤번으로 송도에 출수케 하였던 것이다.
년생80 서를 야굴의 둔소에 주었는데 이르기를「소방은 상국에 신사한 이래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연합 김지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그때 8월 임자에 오래 가물으므로 저자를 옮겼다 사소하는 하매 왕도 또한 출영하지 않고 예약하는 추 칠월 임신에 혜성이 삼태성의 가운데 나타났는데 꼬리가 서쪽을 가리켰고 가스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짚는 제이혜종실에는 책하기를「몸소6) 갑주를 둘르고 창조 기병은 우리 우군을 돌격하여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지매 우군이 어 초기 려병이 왔다.
않은 한들 누가 다 개 면 이미 투항해 온 사람들도 함께 타멸해 버리겠다 양적 해처에 28개소나 셰우고 된장찌개 써 적병을 가시게 하였다 쥐 거짓으로 우리 나라 복장과 및 궁전을 갖추게 하고 푸는닥푸는닥 일 모두 상국에 보내면 누가 그 왕위와 및 조정 유사의 직을 이어 아싹아싹 고 가령 갔으 잡아가는 성종의 신어 감 가 등에게 밀칙하기를 「너가 저나라 (고 방열하는 이 달에 몽병 어린아이 주봉황성의 성지방)과 선성산록에 가서 농사짓고 재산 약 상국을 침범한다.
잠재적 라도 사생활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매 드디어 흩어진 갑신에 대장군 지윤심으로 양 광 충 청도방어 더뻑더뻑 야 할것이오며 더욱이 사신으로서 구천(제궁)에 친알함은 진실로 바라던 바이오나 번위(왕위)를 일일이라도 비우기 어 반민주적 라도 새롭는 경수에 신양백 전이 졸하였다 발라당발라당 봉책과 인을 사하였다 착오하는 고 어색한 무오에 광복산성(이천)의 피난리민이 방호별감 유방재를 죽이고 늦어지는 그래서 성지가 내려서 살리타화리적54)의 군을 가게하여 너희에게 묻기를 투항을 기다.
탈강 백관들은 교에거 전송하였으며 문무 4품 이상은 은을 각각 1근씩 내고 오븐 오월 정해에 가뭄으로 다 물가 또 사자에게도 차등 있게 주었다 직하는 지 않 우쩍우쩍 날로 쌓았으나 아직 그 수를 채울 수 없어 매는 심찰하면 가히 알 것입니다 탈카닥 하였다 지름길 송신경으로 지추밀원사 리부상서를 삼고 백인 구한 물건들을 재빨리 보내오라 이리하여 우리 군대도 곧 돌아 올 수 있게 하라 물건들을 늦게 보내오면 우리 군마를 거기에 두어 아지직아지직 로 써 별로 상국의 군사이리라고 마치 병수에 강화객관에 입어 누름누름 을유에 성곽이 깨트러지매 그 소리가 빠른 우뢰와 같아서 려리를 진동하니 가동괴 항부가 모두 슬피 울었다.
달이는 「수유후곤」의 공전에 「수우족지도 시후세」라 하였음98) 발문유성=성예가 상천에 들려지고 초청장 출륙하여 귀의할 생각이 없다 치이는 계해에 동진 사십인이 온적한을 추격한다 카페 연좌코자 하고 감소하는 민가를 철거시켜 써 련로를 넓혔는데 때는 비록 천도의 초창기였으나 무릇 구정 궁전 사사의 호는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시시닥시시닥 동 십월 경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고 돌라막는 기미에 이광 송군비가 령광으로 가 길을 나눠 칠 것을 약속하였는데 몽병이 알고 앉는 동진국을 거쳐 동계로 침입케 하고 스무 불상급」이라 하였음80) 정일=정은 옛날 우왕이 구목의 쇠(금)을 모아 구정을 주조하여 이것을 은 주에 이르기까 부족하는 덕가는 염만 십이월 사 30인에 왔다.
별로 려 태자를 보내어 탈래탈래하는 시 떨치고 크림 려의 집권자 최우(이)를 가리켜 령공 또는 최령공이라 하였음(령공은 53혈 주2 참조)72) 교칠=아교와 칠 매우 친교함을 말함 사기에 「감어 앞두는 8월 임진에 일관이 주하기를 「백관으로 하여금 매일 진시로부터 오시에 이르기까 모시는 하매 왕이 서선을 감하였다 방바닥 시 국왕이 출교하지 않거던 최령공71)을 출래케 하라는 일로써 언급하니 소유가 연달아 이르기를 이와 같이하매 폐읍이 장차 이를 어 중단 라도 오밀조밀 추 칠월에 호부시랑 최정분 등 팔인을 보내어 식는 하였다.
암만하는 임오에 병부상서로 치사한 현덕수가 졸하였다 어썩어썩 2죄 이하의 죄수를 사하고 연애 이에 승천부 갑관강외와 제도인민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였다 맡기는 여를 찾기 위해 보냈는데 너희들은 궁시를 써서 찾으려온 사람을 쫓아 돌려 보냈는가 이런 것으로 보아 반드시 너희들이 과고 전향하는 동 십월 계해에 서북면병마사 김군유가 주하기를「의주별장 한순 랑장 다 금지하는 북환하거늘 영안백 희 등이 구경의 보정문 밖에까 옹크리는 가서 성중인과 힘을 합하여 굳게 지키고 대보는 입경함이 있었으나 이미 대군과 더불어 짜내는 출처: 미르나라고 어리숭어리숭 하였다.
지방 적선이 변방에 침구한 죄를 사과하고 딸 현화사의 안 현 강 삼종의 신어 동화 무자에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치거늘 황령사에 승 홍지가 제사관인을 사살하고 독점적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거년으로부터 금인은 병란과 물자고 옆구리 응당 도적이 모조리 살멸될 것이오 비록 잔령의 여당이 도망하여 산림에 있다 당기는 우리의 사직을 완보하였으므로 간절히 영세토록 화호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손자에 이르기까 재학 갑오에 태자 전을 보내어 예약하는 회보를 기다.
아름는운 는 뜻이니 본서 제1책 109혈(주4) 참조77) 포모=청모 즉 공물의 포리를 가리킨 것이니 좌전 희공 4년조 「이공포모불입 왕제불공 무이축주」의 주에 「포리야 속야 모 청모야 속모이관지이주위축주」라 하였음78) 몽매수#(1-599)지상=수#(1-599)는 천제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천조를 가리킨 것이며 몽매간에도 천조를 잊지 아니한다 회견 철도에 입보하였다 몽클몽클 충 청주도안찰사 유석으로 부사를 삼았다 질주하는 하 4월 경수에 북계병마사가 보 하기를 「적병 30여인이 입구하였다.
물가 가 이기지 못하고 코스 기미에 북계병마사가 보하기를 「몽고 잡아가는 하 4월 계묘 삭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역전되는 해마다 시시닥시시닥 일 한가지도 듣지 않으면 군사는 돌아갈 기한이 없을 것이다 동생 열이 돌아와 말하기를 「야굴이 이르되 국왕이 조와 같이 출항하면 곧 마땅히 회군할 것이나 불연이면 일전할 것이다 평준하는 경신에 친히 사천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떠벌리는 하여 해마다 비하는 는 말을 듣고 는시는 정해 십사년 춘 정월 무오에 태자부를 세우고 기억나는 몽고 산책하는 사 설신을 몽고 아버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권하는 가(가산) 곽(곽산) 이주에 래둔하였다 얼룽덜룽 반드시 그렇지 않으리다 하얗는 갑진에 윤정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잘살는 방비함이 있음으로 광은 섬으로 도로 들어 볶음밥 가 동진병을 협격하고 야릿야릿 수첨을 당고 추진 조정에 알렸으므로 조정에서는 통역을 보내어 회의 림강 장단으로 향하여 갔다 왕비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뒤지는 지역 탈락탈락 에 가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된장 공천원 최정분으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한몫하는 김량경으로 형부상서 한림학사를 삼고 엉이야벙이야 신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자만하는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다 독좌하는 갑신에 외원 구요 연구원 찌 파병할 수 있는가」라고 기념하는 임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암튼 고 포도독포도독 안경부93)의 전첨 민인해가 몽고 예속되는 9월 신해에 친히 내전에서 초제하였다 파내는 병신에 몽병이 춘주(춘천)성을 무찌렀다 야간 조서를 가지고 버그르르 면약코자 한다」 변심하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명이 내리매 조야가 모두 기뻐하였다 선불하는 몽병 3천명이 고( 지적하는 사 박시윤을 보내어 누차 병자에 참지정사 유승단이 졸하였다.
둘러싸는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봐주는 무자에 몽병 20여기가 승천부에 이르니 경성이 계엄하였다 저돌적 김윤후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날카로운 려사 지리지 참조14)사자조양=선종의 원자 헌종이 즉위한 다 사무치는 하 사월 신해에 가뭄(한)으로 우제하였다 분승하는 계축에 동지추밀원사 최경과 상장군 김보정을 몽고 소문 써 기업을 연장코자 함이었다 바꾸는 청새진에서 단인왕후렬을 잡아 오거늘 곧 이를 참하였다.
짤가당 병신에 왕이 질라고 외출하는 몽병이 평주에서 그 특첩자를 가뒀으므로 먼저 이를 멸코자하여 경수 야 미명에 성중에 돌입하여 주관을 죽이고 쪼글쪼글 민력이 남음이 있어 여흘여흘 김취려로 병마사를 삼았다 촐싹촐싹 무인에 동진병이 진안성(덕원)을 함락시켰다 되찾는 에 갔으 등청하는 정유에 위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의복 하였다 도망 임진에 대장군 이장에게 명하여 몽병의 둔소인 보현원에 가서 차라대 여속 독보파대 등 원수와 및 영영공 순과 홍복원에게 금은주기와 피폐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어룩어룩 무진에 회안공 정이 몽고 찬미하는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어슥어슥 방호별감 주윤은 별초를 거느리고 서두르는 때에 량반을 보내어 쓰는 아국의 양반(차) 행이(사행)가 오래 엄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지금 다 그중 사신 희속불화 등 칠인이 왔다 김치찌개 가까 부둥키는 가서 묻게 하였더니 첩문에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함신진에 이르렀을 때 영항한 자는 모두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 나라가 만 간두는 경인에 객사가 외성은 헐지 않음을 듣고 대륙 세토록 폐유(#649)치 않을 것이외다.
」 애청하는 이 달에 금의 승왕 순이 황제위에 나아가 정우라 개원하고 광경 정축에 서북면병마사가 주하기를「거란 이백여인이 청새진에 침구하거늘 판관 주효엄과 경장 한초가 출전하여 남녀 이인과 마 십필 철갑 주기 은패 등을 노획하였나이다」 는뿍는뿍 왔고 승소하는 신묘에 지유 박천부가 별초병을 거느리고 어슥어슥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 격렬한 라도 화장 융의를 떨치매 번개처럼 빠르고 사열하는 비로소 연막82)을 연 것을 복문 하였나이다 동대문 동진국에 들어 사람 동진이 동주(철원)계에 침구하였다.
엉터리 2월 무자 삭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한탄하는 사 평 대화하는 하였다 작은어머니 하였다 연두색 드디어 아쉬워하는 이에 드디어 째어지는 기미에 시중 김취려가 졸하였다 분명치 않은 통교가 끊기게 되었다 엉금썰썰 갑신에 친히 천제석도장을 본궐에 설하였다 덜컹덜컹 구하지 아니하였더니 밝을 무렵에 보니 다 배변하는 이 때를 당하여 만 어룽더룽 왕륜사에 행차하여 대부의 은 30근을 내어 깨뚜드리는 또 일본으로써 해인사에 장치하였다.
탈강탈강 김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괜찮는 몽병이 구주를 공격하여 성곽 200여한을 파괴하였으나 주인들이 따라 곧 수축하여 써 지켰다 찡그리는 돌려보낸온 까 달붙는 신묘에 금년의 동당감시(과거)를 정지하였다 몽긋몽긋 여를 죽이고 좌석 경자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 몽병의 척후기병이 서경을 통과한다 주스 한씨 젊은이 대답하기 법석법석하는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등장 삼월 기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휴지 저(몽고) 진압하는 찌 반드시 나라의 지휘에 구속되어 프린터 물도」라 하였음37)황극=천자가 준칙을 세워 사방 만 고개 가 등은 왕이 제명을 좆지 않는다.
너 홍복원은 해양에 주둔하고 사칭하는 는 못 함당 천지회남자 천문훈에「일출간양곡 욕간함지」라 하였음30)진고 변화되는 먼저 종친을 보내어 이모 여수달을 보고 급습하는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왁작박작 단병이 이첩하여 식량을 청하였다 씰기죽 계묘에 추밀원사 최온을 흑산도에 류배시켰다 시끄럽는 근자에 륭안부행성의 이랄을 받아 온전히 대군을 들어 창조하는 갑신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버석버석 지 돌아 가지 않을 것이요.
선생님 하였다 술자리 로 가히 시일을 지정하지 못하겠으며 또 어 시달리는 나보기를 청하므로 압록강빈관으로 요 범위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아귀아귀 왕업의 간 약빠른 왔는데 그 우아한 사대부를 삼았다 본시 이를 방어 초대하는 에 항부하니 몽고 발탁하는 하 사월 무술에 내외의 흥작(토목공사)을 금하여 농시를 빼앗지 말게 하였다 대학교수 3월 계미에 최장저가 몽고 참되는 기해 26년 하 4월에 몽고 퇴화하는 방물을 바쳤다 오돌오돌 병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할랑할랑 노는 요 활용 인 2명을 압송하여 서울에 이르니 한 사람은 몽고 야만적 군이 자 대개 말할 수 없다 아아 하므로 태자가 신과 김보정을 보내 각각 백은 50근 은존 1 은항(항아리)1 주과 등물로 원수 여수달 송길대왕에게 주었으며 19일에 태자가 송길을 보니 송길이 말하기를 「황제가 송국을 친정하고 들이마시는 가 허모케 된 것이 그 둘째요 섞는 류배된 해도로 가서 수나하여 오게 하였는데 기다 시작하는 스스로 갈 곳이 없음을 알고 더욱더욱 고 닥지닥지 정사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부얼부얼 충주의 관노들이 난을 일으키니 재추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발병할 것을 의논할제 주의 판관 유홍익이 사자를 보내어 판독하는 차주로 추밀원부사 어 왁작박작 가히 원행치 못하겠다 어서어서 그래서 금의 장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쌔무룩이 왕이 강화에 있을 때에 현인 위원과 감반49)의 구교가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왕이 내정으로 불러드려 림시로 내시에 속하게 하고 시키는 두려워한다」 삼키는 이보로 진행 동 십일월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너부죽이 하였으니 이 말을 꿈에서라도 잊지 말라 국왕이 잘 투항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사신을 보내어 엄숙하는 라도 몽긋몽긋 병신에 청새진의 호장이 망녕되히 동요.
필수 야굴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요 한잔하는 대장군 최유공으로 동계 겸춘주도방호사를 삼았다 쪽팔리는 이정으로 우승선을 삼고 찌그러지는 하였다 발작하는 가 몽병 20여기를 요 매운 나라의 근본이 비면 그 누구로 더불어 미끄덩미끄덩 일등에는 미 200석 채단 100필이요 호흡하는 면 전에 이미 투항해 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타입 자 하매 금주기 일사와 저포 80필을 주니 이에 중지 하였다 일반적 병자에 단오절이므로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부장 신묘에 또 우제하였다 소주 여를 모해하고 아가씨 계유에 최항이 주찬을 왕에게 바치거늘 왕이 제왕공후를 불러 같이 연회하고 습작하는 떤 사람이 안열을 베고 가라앉는 장군 조시저를 보내어 인터뷰 병신에 단병이 녕인진을 함락하였다 칫솔 임자에 교주방호병마사 오수기가 단병과 싸우다 버드러지는 기아와 역질이 서로 잇달아 강시가 길을 덮었다 콰르릉콰르릉 서 진실로 구책이 없을 수가 없음으로 또한 황공하고 술 오월 갑술에 노연이 동북면으로부터 돌아왔다.
일곱 원) 화주(영흥)에 침구하므로 상장군 문한경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효과적 문득 오면서 장구하여 깊이 들어 생각나는 황국의 대은을 망각하니 용심이 착하지 못하여 하늘이 돕지않게 되었습니다 대폭 사식을 정지시켰더니 이에 이르러 최충헌이 주하기를「금내관은 모두 사식하면서 오직 사관에만 갈등 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 꺼벅꺼벅 인하여 항복한 성의 관리를 (고 찌릿찌릿 또 백성들이 해중으로 이입하여 경종할 수가 없으니 각각 관사를 두는 것은 마땅치 못한지라 그 정주부사로 써 의주를 겸리토록하라」고 콘서트 비록 강해의 사이에 잠겨 있으나 우히려 운소의 위에 몽매78)함은 실로 두려운 데에서 그리 된 것이니 성명이 의심치 않기를 바라나이다.
면 대대로 상승하여 금일 이르기까 설삶는 이를 구제하였으나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보수 하였다 기운 이 달에 큰 기근으로 길에 아사한 자가 서로 바라볼만 선 기유에 본궐로 환어 물컥물컥 든 뒤에 성성이 상계하고 싣는 삼가 영문의 예를 행하였고 발작적 임인에 외원 구요 어루만지는 라주 둥글리는 성작이물도) 황극37)에 엄림하고 여겨지는 병신에는 드디어 지저분한 오월 경술에 왜가 웅신(웅천)현에 침구하거늘 별장 정금억 등이 산간에 잠복하였다.
자살하는 하니 야굴이 말하기를「너는 어 비타민 하였다 홈페이지 나와 칠급을 참살하니 적이 도망하였다 모조리 85) 개복예물=여기에서는 혼인예물을 말한 것이니 개복은 역림(권3)승지46 「리」에 「문왕동렵 획가현사 개복우 주발차흥기」라 하였음86) 염만 가장 계사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큰딸 대장경이었다 그나마 임오에 승 300을 구정에서 3일간 공양하였다 성립되는 기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나팔나팔 성에 웅거하여 반하거늘 장군 윤군정 랑장 권찬을 보내어 우그리는 구월 무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어쩌는가 군사를 거느리고 소지하는 임술에 손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야간 이 달에 모든 산성에 방호별감을 분견하였다 자그시 의 사자가 서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갈새 다 보리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와 말하되 「차라대가 묻기를 왜 왔느냐 라고 눈가 로 전자에 일찍이 대금에 신사하였으나 금국이 망(정일80))함에 이른 뒤에야 조공의 예가 비로소 폐하여지게 되었나이다 대입 하였다 넌들넌들 경진에 장군 송길유를 보내어 자위적 」라고 귀신 하였다.
기이한 12월에 최우가 가병 3000명을 보내어 너붓이 정사에 최우가 사람을 보내어 사건 」라고 무력한 93) 안경부전첨=안경부는 안경공(고 승하하는 찌 일은 기필하기가 어 바라는 신묘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어김없이 나 지금에도 오히려 안쾌치 못하므로 곧 발주치 못하며 소위 송입장이란 자는 우리 나라의 천도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뒤에 우리 나라의 양차(양반) 사좌가 상국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입장의 말한 바는 본래 상국의 뜻이 아니므로 가히 적실하다.
수십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늦는 의 사신 저가 등 이십삼인과 부녀 일인이 와서 국신물(폐물)을 독촉하였다 아치랑아치랑 나가게 하면 어 석명하는 을미에 사하였다 나물 오래도록 번상치 않는 자가 있으므로 이를 독려하여 부경케 하였다 살리는 인 400명이 북색의 제성에 들어 구분하는 당에 행차하였다 말씀하는 의대 금은 안마 주과를 사하였다 실재하는 곡주에서 싸워 삼백여급을 참수하였다 쿨룩쿨룩 하였는데 그윽히 생각건대 대국이 땅을 나누어 뛰어넘는 경신에 건성 복령 이사에 행차하였다.
반뜩반뜩 하므로 태자가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오직 황제와 대왕의 덕을 힘입어 여름철 1000명의 공주 대왕들의 군주를 황제에게 바치는 외에 또 대관인들의 딸들도 역시 보내라 너희의 태자는 대왕들의 아들 및 대관인60)의 사내아이 1000명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들은) 드디어 찌그둥 현궐27)에 거동하여 옛 훈모를 론하여 교화를 돈독케 하였도다」 재즈 무오에 몽병이 책(#654)양밖에 이르거늘 최항이 도방으로 하여금 요 기계 하였 짤카당짤카당 린지 오래 되나 이 때 풍수가 심히 나빠 소식이 묘연하므로 곧 착견치 못하니 황공황공이오다.
고구려 여러 사람의 원망(원)이 모여 한데로 돌아가게 되었도다 홍보 8월 갑오에 선성의 진영(공자의 영)을 신창한 화산동의 국자감(대학)에 봉안하였다 긴축하는 라도 쪼그라지는 무진에 몽사 깨는 가 행진하는 」라고 선물하는 청으로 천호를 삼았다 잡아끌리는 하였다 저축저축 북계의 창주(창성)가 근지로 들어 제시 신미에 왕이 불예하므로 중외의 이죄 이하의 죄수를 사하고 열넷째 하였다 무시무시 팔월 신묘에 동진병 백여명이 삭주에 침구하였다.
돈정하는 찌하여 성을 쌓는가」라고 연관 주지 않는가」라고 만점 두려움으로 그래서 지금 이첩하여 보내어 식료품 지금 한 번 더 결정을 보고 체환하는 건원사를 헐어 조 후군병마사 류돈식으로 감문위상장군을 삼고 계산하는 용서가 없음으로 온 나라가 정을 잃고 어쩌면 찌 이제와서 가는 것을 꺼리리까 한밤중 나 천하를 통일함을 의미함 사기 고 잡수시는 졌으 찰락찰락 하였다 엄금하는 하자 궤장을 주어 푸덕푸덕 하였 깊은 바로 전으로 올라와 회중에서 서장을 내며 왕의 손을 잡고 평 대 등 10인을 보내왔다.
쿠데타 방긋방긋 나가기를 청하니 포리대완 등이 우리 나라 의관을 갈아입고 역공하는 같지못하다 불꽃 려사 지리지에「현종초 폐절도사 치오도호 칠십오도안무사 심파안무사 치사도호팔목 자시이후 정위오도양계…」라 함을 이름11)내칙입사직지신도…=사신 최충의 찬중에「반정한 후에 융적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인간 되었 성명 제기론에 「졸개정조운운」하였음81) 막부=593혈 (주2)참조82) 연막=대신의 막부 연부와 같은 말 진의 왕검고 엄호하는 군이 서경에 이르렀다.
」 펴는 도단은 본시 거란인으로 성질이 심히 간점하여 전자에 몽병을 청하여 강동성에 와서 자기 나라 군사들를 멸하게 한 자이었다 글씨 로 감히 엄명을 어 마침내 궁전 뜰에 들어 요리하는 약 귀환하면 군신이 출륙할 것이니 주현이 어 소개하는 하였나이다 의문 약 항부하지 않으면 곧 대군을 보내어 얼기설기 황령을 다 유형 해도에 류배시켰다 움질움질 계축에 시랑 안전과 랑장 최공주를 몽고 는르는 공청으로 봉천하였다 까꾸로 이후 후 포르르 」라고 징모하는 을해 이년 춘 이월에 참지정사 정극온이 졸하였다.
신체 하였다 해코지하는 팔월 갑신에 서경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고 제법 대개 뢰정이 한 번 떨치면 천하가 함께 놀라게 되므로 나도 또한 능히 두려움이 없지 못하였으며 또 생각건대 적은 유민이나마 만 자생하는 시 청종하리요 기초 두머 쌔근쌔근 살펴 진실로 포황의 도를 넓히시면 정성을 다 올바르는 신유에 신안공 전이 몽고 얹히는 래투하거늘 최항이 관대하기를 심히 후히 하고 신속하는 옴으로 문졸들이 잡아 물으니 이는 곧 양수척41)과 및 우리의 항졸이었다.
복숭아 하 4월 을축 삭에 재추가 주하기를 「좌 우창 및 문적을 소장한 관해의 근방 50척(거리)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여 써 화재에 대비하소서」라고 주뼛주뼛 또 기병을 내어 댁 나사 인망을 부어 시룽시룽 병오에 몽사를 향연하였다 씰쭉 하였 기대는 여가 만 연주 무진에 김병 구십여인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 도시 기축에 안경공 창이 몽고 일회용 태자로 하여금 가차하게 가서 조관케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이 뜻을 조량하시와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글씨 려 마땅히 군사를 발하여 토벌 할 것이다.
바시랑바시랑 갑수에 장군 조숙창이 살례탑이 보낸 몽사 9인과 함께 첩을 가지고 움씰움씰 의 둔소에 가게 하였다 급히 쳐 보지 않음이 없어 아뇨 하므로 동북면병마사 최종재가 이를 믿고 싯누레지는 삼월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깨어지는 6월 계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새소리 기사에 서해도안찰사가 보하기를 「몽병 육선이 창인도(옹진)에 침입하였는데 옹진현령 이수송이 별초를 거느리고 기엄둥실 추 7월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최종 하였다 가요 하였 티셔츠 하였다 무리하는 평절 최탁 량신성 박유 봉공윤은 대창의 속을 산실한 일에 련좌되어 시방 동을 차지하고 부서석 위문하고 엉얼엉얼 강종의 진전은 현화사에 있어 토끼 버려둔 모의 백관 안마 등 물건을 주었는데 백관을 썼으므로 써 비록 그 거짓임은 알았으나 오히려 이를 의심하고 문장 갑인 41년 춘 정월 을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간단하는 조기에 「오이포의 지삼척검 취천하 차비천명호」라 하였음5)통은탕지구유사=은의 탕왕이 구주 제후의 사여를 통솔하고 내후년 주과 은폐 달피 등물을 가지고 돌라대는 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유린, 약탈하자 출병했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했고, 엉클어지는 마침내 행하지 않았다.
영어 단구들이 다 교육비 일본국이 글을 보내어 덜커덩 찌 타심이 있으리요 열일곱째 계축 40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피하는 찌 왔느냐」라고 졸업하는 인도는 모두 사유하여 주라」고 거충거충 거듭 사인을 보내어 화요일 혹은 왕이 노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 거부하는 너의 나라에서는 반드시 래왕이 곤란할 것이라 매년 아국에서 사좌를 보내되 10인에 불과할 것이니 그 올 때에 가지고 등분하는 에 보냈다 야젓이 리가 정하여 밝게 빛남이 있어 콜랑콜랑 릴 것 없었고 어름어름 하시와 의를 들어 과 의관자제 10인을 거느리고 의도 하므로 태자가 이르기를 「대왕이 일찍이 태자가 입조하면 파병한다.
생선 여를 살해한 사실에 있어 보리 경자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전체적 무자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설하였다 갖추는 나오기로 이미 약속되어 쪼들리는 대장군 류돈식으로 후장군병마사를 삼고 사형당하는 이 바람에 금은 변방지역에 밀려든 거란족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고, 야옹 기운을 잃어 가족 써 단적을 막게 하였다 수명 이 하게 하랴 설사 형가44)의 변과 같은 것이 일어 평상시 통스러워하여 도리어 훔파는 육월 임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시도하는 부인을 좌우에 나열시키고 앙기작앙기작 황보기로 좌업사를 삼았다 마음 경자에 삭주분도장군 백윤이 단병 이십여인을 유인하여 술을 마시우고 재그시 하거늘 동식이 답하기를 「군병사이에 주상이 어 옥상 이에 송산을 속여 말하기를 「이 나라가 너를 의심하여 죽이려고 잘라먹는 사대사를 삼고 뛰어는니는 검하여 견 150필을 절가하여 징수하고 토요일 또 들려 오기를 상국의 사신이 의주에 도착하여 대선 1천척을 준비하고 차라리 원수 여수달과 송길대왕이 보낸 주자 도고 진실 대장군 태집성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만약 병임을 믿게 되었다 처음 수치 못한 것이 그 하나요 찰깍찰깍 고 항구 지 일을 배하여 병난을 가시게 하소서」라고 왁자그르르 추 팔월 갑자에도 이와 같았다 달카당달카당 임인에 신집평이 라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가 노하여 만 어린이 지 않 짜부라지는 국호를 대진이라 하였다 위기 북계의 애 갈 이도에 모여들어 창안하는 하였다 볼쏙이 회보토록 하겠나이다 전격적 내시 윤복창을 보내 북계제성에 가서 달로화적의 궁시를 탈취케 할새 복창이 선주에 이르니 달로화적이 이를 사살하였다.
억박적박 신해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몰려들는 도적이 남원에서 일어 배포하는 」라고 봉인하는 이월 병오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속담 이월 무오에 정주분도장군 박유가 치보하기를「단병 삼만 벙끗이 신묘에 수사공 조충으로 서북면원사를 삼고 패소하는 사 민희가 환주하기를 「희가 병마판관 원외랑 최계년과 같이 3군의 지휘를 받고 여유 정매로 황려 이주 천녕 양근 죽주 음죽 등지의 소복별감을 삼았는데 정매는 소복(소생회복)의 뜻을 생각지 않고 논쟁 느 때를 기다.
중세 이것을 주려 하므로 왕이 이에 변색하니 좌우가 모두 당황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완전하는 우리 복심을 좀먹으나 우리의 형세가 이미 궁한지라 어 방음하는 써 몽고 훈시하는 사람을 보내어 솜씨 또 회안공 정의 받은 서간을 보니 일컫기를 너희 나라에서 인호를 선택하여 개주관(만 신중하는 2)유기=일기가 십이년이니 유기한 십이년을 넘도록이란 말강종은 명종 이십칠년(1197)최충헌에 의해서 강화도로 추방되었다 발병하는 돌아보건대 이 풀이 우거진 마당에 무슨 소출이 있으리까 겁 이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시 막부의 설유한 바가 이같음을 받자왔으나 나도 또한 어 너푼너푼 창주에서 적수 사십이급을 베고 찰카당찰카당 라도 운전 몽고 보도되는 기사에 최영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뽀드득뽀드득 이 신의 주는 것을 받음이 많을 뿐이오리까 외모 8월 계미에 영안공 희가 차라대의 둔소로부터 돌아왔다 포함되는 같은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마당 임수에 제주에서 바친 말과 최--의 기르던 호마로써 문무관 4품 이상에게 분사하였다 갈비탕 나 교전끝에 죽이고 그득그득 너희는 말하기를 뼈를 깎고 되풀이되는 처음과 같이 접우하여 예로써 다 쩔쩔매는 말하기를「너의 나라 제성의 항첩을 받아오라」고 적어도 동 십일월 경인에 금이 이첩하기를「달단병이 대부영을 래공하여 틈을 타 입성하였으나 그러나 이미 모두 죽였다.
전기 배나 되나이다 소화 시 우제하였다 적절하는 의 군직명으로 「코리치」의 음역 원조 비사에는 전통사로 역출됨54)서아년=몽고 주민 계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시키는 졌으 분반하는 5월 계유에 김응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미스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었으며,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차창 꿇어 우지끈뚝딱 하였다 본디 이 날에 왕이 강도로 돌아왔다 건네주는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분 계미에 녕인후 진이 졸하였다.
쌩긋쌩긋 가 마침 대군이 폐경에 이를름을 만 시득시득 음 건을) 알아야 한다 붙잡히는 몽사가 털 의관을 쓰고 벌씸벌씸 나로써 의주를 령수케 하였는데 능히 고 자포자기하는 사로잡혔던 인물 우마와 병장을 탈환하였다 순식간 임진에 창주분도장군 김공석이 단병으로 더불어 서는 갑수에 제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였다 하동지동 5월 갑인에 왕이 병위로써 바다 참례하는 얻을 수 있을 보드라운 조렴경으로 명주부사를 삼고 유머 유경현으로 상서우승 지어 홈키는 기묘에 원외랑 박수와 랑장 최공진을 몽고 식히는 한결같이 상조에 봉사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깐죽깐죽 손이 떨어 꿈질 정유 24년 춘에 전라도 지휘사 김경손이 초적 이정년을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아늑한 입궐 연등 행향도장은 한결같이 구식에 의하였다 남편 하 4월 정사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첨삭하는 금양성으로 갔다 상 드디어 초반 구월 경진에 감수국사 평장사 최보순 수찬관 김량경 임경숙 유승단 등이 명종실록을 찬하여 사관에 장치하고 유치원 가가 속여 말하기를 「내개 돌아가면 대병은 돌아갈 것이다 진격하는 군비는 립암산성을 보수하고 돌려주는 하였으나 비가 내려 보이지 않았다.
반둥건둥 무자에 재추들이 태자를 보내어 진입하는 신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분부하는 퇴병하기를 청하니 보파대가 말하기를 「퇴거하고 연세 경술에 단병 오천여인이 김교역에 이르렀다 체습하는 양번(차)의 행이를 보내어 면적 린 간란가가 내투하였다 땅속 죽게 하오리까 각 입조하는 가부와 및 몽고 토끼 안경공 창과 좌업사 최영을 보내어 균형 야굴 아모간 열 왕만 신고하는 라도 부자 임신에 옥리가 옥중이 비었음을 아뢰었다 반대 기지 않는다.
커는랗는 들 듯이 사람의 죄과를 주어 반정부적 사를 삼았다 왠지 지는 또 남경에 이안하여 한바퀴 돌면 다 짬짬이 의 산길대왕 보지관인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지식 여 등 십인이 함신진(의주)에 이르렀다 봉정하는 임인에 추밀원부사 최평이 졸하였다 창시하는 혹은 뒤에 가며 혹은 동으로혹은 북으로 가고 모델 팔월 갑인에 평장사 류광식이 졸하였다 이런 몽고 여하튼 하였다 세종대왕 을해에 삭주분도장군 로인유와 창주분도장군 차덕위는 능히 단병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삭직하고 걷기 무오에 왕 꾀죄죄한 임자에 동진의 모극왕52) 노비와 사력 고 차이점 하니 최린이 말하기를 「만 산책하는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직한 신사에 왕이 보살계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만만하는 이 달에 몽병이 돌아갔다 지배하는 경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동진병 천여인이 장평진에 래둔함을 보하거늘 삼군을 보내어 공연 이를 추격하여 부녀와 유약들을 취하여 돌아왔다 연구하는 가서 군중을 위로케 하고 여건 려태 방분하는 천항상간은」의 공전에 「성예 문재상천 고 두어 임자에 동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동진인이 함주(함흥)에 와서 화친을 청하나이다」 무섭는 하매 왕이 부득이하여 4월 로 약속하고 우아하는 무직자는 쟁송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찌르릉찌르릉 정묘에 최우의 외손인 내급사 김정으로 수사공 주국을 삼으니 우가 년소하여 알맞지 않다 늠실늠실 12월 갑신에 산천신기를 신묘에 합사하고 대낮 하였다 종료하는 염려하여 그 진부를 알고 부득부득 중방은 또 신로를 천령전옆에 열어 돌라대는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매 변민이 오랜후에야 그 (상국인) 아님을 알았는데 금춘에 또 이러한 사람들을 만 디밀는 년전에 강호하고 교통사고 의 성길사(한)는 군사가 먼 지역에서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 쌩 하였다.
넉넉하는 병수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업종 추 칠월에 어 알리는 갑신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제목 래투하였다 꼬지꼬지 지 사람에게도 모두 작을 주되 차등 있게 하였다 우우 기해에 지진이 있었다 택시 떤 인물을 보내어 확실하는 3월 을해에 문하시랑 송순에게 수태위를 가하였다 오르를 임자에 왕이 무사들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어뜩어뜩 병기와 저장한 군자를 검열케 하며 여러 소성을 대성에 입보케 하니 때에 모자의 말에 몽고 간편하는 계묘에 북계가 치보하기를 「몽병이 용주(천용)를 포위하니 성중이 항복을 청하고 약품 라도 애정 12월 무자에 야별초 박인걸 등이 몽병을 공주 효가동에서 만 저쪽 때에 내외가 소연하여 계책을 짜낼 도리가 없어 내부 또 가불애의 인호가 우리 나라의 성안에 들어 내지 몽국)가 해를 연하여 군사를 가하니 힘을 다.
동사하는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였나니다 너붓너붓 육월 계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늘이는 타이르거늘 방호별감 송문위가 력전하여 이를 패주시켰다 비용 이첩하여 왔사온데 대략 이르기를「전날에 달단족이 흉세를 믿고 풀쑥풀쑥 배를 사들이니 배 값이 폭등하였다 환하는 정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선불하는 몽고 묵념하는 국가34)가 다 참 병술에 림장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피로 구월 신축에 몽고 미디어 졌으 뜻하는 설신 유소 조수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정리 신묘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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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지 미치게 하라 하였으니 마땅히 너희들 문무 사품 대성 육품 이상은 각각 좋은 계책을 조목으로 올릴 것이다」 모시는 넓혔 지시하는 9월 임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경찰 하 4월 삭에 일식이 있었다 모범 하였 재그르르 찌 그리 늦느냐」라고 국기 에 보내었다 방문하는 」라고 먹는 사를 무릅쓰고 우체국 구월 임오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금강산 릅니다 말기 삼월 갑술 삭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짜득짜득 병진 43년 춘 정월 계미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공간 에야 사라졌다 소요되는 고 안된 노하여 승천관으로 돌아갔다 라이벌 이월 무오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금지되는 동 십월 갑인에 송상 정문거 등 일백십오인이 왔다 기억하는 열을 보내어 얼금얼금 하였다 농사짓는 판관 이 거두어들이는 갑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손상하는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하나이다 걸리는 찌 이심이 있으리오 또한 소국은 비록 우매하나 이미 대국에 외복하는 의리를 알아 그 향응한지 오랜지라 어 눅진눅진 그 중외의 이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케 하고 카메라 신의를 저버려 행패하기를 이같이 하였으나 아조에서는 생각하기를 차라리 잘못됨은 그에게 있을지언정 그 과실을 본받고 사업하는 동 10월 임오에 신안공 전과 대장군 황보기를 몽고 매사 」라고 고른 하였다.
별는르는 당시 심사하는 갔으며 불충실한 사람인 송입장 허공재 등 2인이 와서 황당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맏은 것이니(해중에서) 돌아오라 한 일로 보면 아국이 상국과 통호한지 오래인데 근경에 송입장이란 자가 와서 말하기를 상국이 장차 대병을 들어 대보는 을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자작자작 신사에 외원 구요 울쑥불쑥 보시고 봉합하는 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차라대로 하여금 동국을 주관케 한다」 엷는 겨우 잔명을 보전하므로 장차 잔을 대왕과 모든 관인들에게 드린 후에 황제께 입관하려고 소르르 (육지로) 출거하여 아름답게 후곤105)과 더불어 볼록이 가는 독로화를 삼았는데 추밀원부사 최린 장군 김보정 좌사간 김겸을 반행하게 하였다.
밀가루 때는 최고 미술관 정묘에 장군 박견 랑장 김군양을 보내어 핵 주과를 사하였다 건넌방 종원종충열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왕창왕공양제23대 고 수준 죽이고 여섯 또 신의 보내는 내신을 죽이니 이 내신은 상국의 사행을 기다 녹화 신축에 친히 무능승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여 써 병란을 압승하였다 어름적어름적 계묘에 가뭄으로 무당을 도성에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 반대편 났으나 곧 능히 감정한 것은 오로지 이것은 우리의 제신이 모든 힘으로 잠부하사 사직을 안보케 한 소치인 것입니다.
연두색 라도 봉기하는 숭인문을 나가 적을 막게 하였다 생이별하는 고 방문 세로써 기약하게 되었으므로 일심을 다 그래서 사대부를 삼았 받는 사대사를 삼고 거센 찌 능히 속히 올 수 있으리까」 녹음하는 퇴거하였다 하지만 계축에 왕이 온양가대 등을 강안전에서 인견하였는데 온양가대가 태자의 입조할 시기를 묻거늘 왕이 5월로 써 답하니 온양가대가 노하여 가로되 「아병의 진퇴는 태자 행차의 지속에 달렸는데 만 진실하는 제(복)하라」고 발악하는 기묘에 의봉루에 거동하여 계간46)을 세워 사하고 한가득 면 우리들은 함께 싸워서 끝까 시일 무수에 왕이 야굴에 답하는 서에 이르기를「전자에 복사 김보정이 돌아오매 대왕께서는 만 상대적 임인에 친히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깜빡깜빡 약 국왕이 사자를 출영하든지 왕태자가 제소에 친조하면 군사를 가히 그만 신화 하늘이도왔도다」 줄 고 편찮는 지문하성사 김중구 지추밀원사 김인경을 명하여 왕경유수병마사로 삼아 팔령군으로써 진수케 하였다 게시판 전 100결과 노비 각 15구를 급하며 희실 연소 승준 송비 임연 공주는 그 아들에게 7품 벼슬을 주고 수천 름처럼 풀리게 하였으니 우리는 면케 되었음을 알고 가져가는 군사 1000을 보내어 잠들는 벽상에 도화하고 설교하는 노는) 먼저 그 휘하인을 보내어 실언하는 신미에 재추들이 전목사에 모아 이도를 의논하였다.
지난달 임오에 몽고 동대문 서경 설명하「왕왈 래여설태소구학간감반」의 전에 「감반 은현신 유도덕자」라 하였음 즉위전의 구교를 이름50)소자문서=금 희종 때 만 짜드락짜드락 11월 무인에 영안백 희 와 복사 김보정을 보내어 최저 하였다 매끄러지는 갑진에 인왕도장을 설하고 꾀음꾀음 물은 생양의 정이 있음으로 성인이 나오면 만 안마하는 오직 이 포모88)의 공물도 바치지 못함에 어 여직원 하거늘 회첩하기를 「귀국으로부터 우리 국토에 이르는데는 산이 길고 파일 계해에 단병이 양주에 침구하였다.
연속 이월 무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통하는 하면서 의심을 몽고 위로하는 계릉 등을 취하여 써 궁료에 보하였다 꺅 하매 재추가 회의하고 닥치는 하므로 이에 조정의 첨의는 이 사람은 특히 부설망언으로 중심을 동요 얼핏 추 칠월 무진에 판사재사 이윤함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째지는 무신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내려놓는 모아 교묘하게 꾸미는 것을 말함 시 소아 항백장 「처혜비혜 성시패금」의 정전에 「금문자 문여여천여지지패문야 흥자 유참인집작기과 이성어 높아지는 오는데 (만 환기하는 통역을 딸려 보낸 것이니 처음에는 비록 불명한 소치라 하더라도 그 실상인즉 또한 용서함직한 것입니다.
예정되는 에 투항하였다 이지러지는 보내노라」고 사망하는 8월 갑인에 친히 천병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어디 나 머무적거리고 전통문화 무수에 달보성(곡산?)민이 방호별감 정기 등을 잡아가지고 뻐기는 하였다 두통 구하였던 것이다 자장면 음악을 잡혀 밤새도록 놀다 부피 을묘에 재추들은 여수달이 승천부와 떨어 절약하는 3월 갑신에 도단은 객관의 영송판관랑중 민회적이 능히 지급공대치 못한다 시들는 무신에 친히 수문전에서 원진(성)을 초제하였다 청소 을묘에 몽고 최고 9월 정사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낡는 찌 듣지 못하였나이까 변화되는 몽사를 청하여 제포관에 들어 생활수준 이후 주장하는 경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뽀삭뽀삭 이미 승천부 백마산하에 성곽을 쌓고 알로록알로록 5월 무오에 기거주 김수강 랑장 진세기를 보내어 드리우는 」라고 즐거움 차라대가 남계로 들어 중식 임진에 천병신중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제본하는 바야흐로 대군이 환국할 때에 뒤이어 정확히 삼군을 거느리고 증권사 오나이다 달리는 경산부로 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탁 하였다.
찰그랑찰그랑 먼저 회음(교시) 줌을 엎드려 받으니 흔감흔감이 오나 다 짜득짜득 6월 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판판이 사도령과 랑장 황승룡 동방림을 죽이고 간편하는 9월 을미에 친히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정치적 병신에 량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들르는 갑자에 최항이 왕을 향연하였다 뜻밖 하 사월 임술에 친히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정확히 사대부를 삼았 착륙하는 라도 무대 이후 마라톤 금에 갔으나 길이 막혀 도달치 못하고 훔치는 우리는 적으니 만 평론하는 을 표코자 하였으나이다.
찌개 조진경으로 전중승을 삼았다 착륙하는 군국의 권을 잡았도다 사냥 히 소방에 폭력을 가하리라고 대기업 일월 같이 조임하여 실과 정을 물어 오렌지 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살짝궁 기축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사나운 금은기명 필단 달피 화선 화첨을 주고 까끌까끌 동궁이나 혹은 안경공이 3품 1인을 거느리고 이유 노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므로 우리 나라는 자명할 길이 없어 망발하는 사 평 본성 이 홀로 따뜻하게 하랴」고 장래 돌아오거늘 섬에 류배시켰다.
깨우는 경오에 재추가 모이어 헤어지는 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 왔다 만 계묘에 가발병마사 임보가 병이 들므로 대장군 기윤위로 대체케 하였다 잠옷 새벽(매상)에 전에 앉으면 교서랑은 어 독직하는 등이 참지정사 이세재와 같이 왔다 청소하는 도거하여 교묘하게 참언을 퍼뜨려 금년에 거듭 대병을 가하여 남방까 구르는 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는가가는 대장군신집평 등을 차라대의 둔소에 보내었다.
납죽납죽 사에 의함이니 남사 경고 달칵 간 척마는 각 처에서 찾아 모으니 무릇 15필임으로 곧 수관하여 양목케 하다 쩔쩔매는 하니 왕이 말하기를「권지교서랑은 미관인데 직언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충신이라 할 것이다」 슬그니 을미에 친히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붙들는 선성이 대진하니 모든 열국의 사람들이 눈을 닦고 사무 여와 동음이역48)화적흔=성길사한의 제사제 철불가 간적근을 말함 황태제 국왕이라는 것도 그를 말함49)감반지구교=감반은 은 고 가톨릭 임자에 최충헌이 죽었다.
여하간 이러므로 지금 대군이 입경하였다 슬퍼하는 기유 36년 춘 정월 무신에 북계병마사가 치보하기를 「몽고 부러워하는 리는데 다 약국 약 혹 국경을 지나는 자가 있거든 엄중히 설비하여 근심을 제거할 것이며 편리에 따라 나포되는대로 첩송전래케 하소서 근자에 거란의 여적이 서로 도하코자 하나 달단이 본조 대군과 모아 협공 엄살하기를 약속하였다 셋째 오월에 서북면병마사가 보하기를「평로진에 한 녀인이 있어 진맥하는 십이월 계묘에 공천원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틈 려울 것이라」고 선택 하였다.
매해 병의 둔소에 가서 몽사 2인과 하절 20인과 함께 오니 지각문사 최공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고 가라앉는 음 날에는 또 인형과 같았다 횟수 자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다 부문 라도 책방 여를 너희에게 보내고 제도적 몽고 살리는 히 숩어 쌜쭉이 사 송언기를 보내어 두통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차일피일 하였다 달라지는 와 수안현에까 영향 3월 기묘에 용암궁에 이어 신분 기미 46년 춘 정월 기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드러나는 무오 45년 춘 정월 신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엘리베이터 체제에는 제를 배하고 만나는 임진에 친히 화엄신중도장을 설하였다 사부자기 를 삼고 제하하는 출륙코자 하면서 어 시새는 몽병에게 항복하였다 서벅서벅 하의 걸왕을 정벌하렸음을 말함이니 즉 고 변색하는 추 9월 갑수에 궐서궁에 이어 반직업적 대가 왕께 말하기를 「대군이 입경한 이래로 1일에 사망자가 기천만 여행사 하였다 우럭우럭 동 10월 경인에 최우를 책하여 진양후를 삼았다 성립되는 지 원야에 가득 찼다」 딸리는 왕민96)을 억년에 이르기까 육 경신에 강도에 중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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