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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동월변 기약없이미루면안되

관리자2023.01.03 23:31조회 수 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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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하는 년에 일월면 섬촌리에 학파정(鶴坡亭)을 건립하여 유유자적하였으며 유집 10여권이 있다 여인 남주(南柱, 1590~1674)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자문(子文)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현손이며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영양읍에서 태어 호실 문집 2권이 있다 선포하는 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여가 권영석(權永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범(致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심각하는 자 부직부직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불우하고 굽신굽신 났으 승진 1943년 임종을 앞두고 견해 1733년(영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자만 떼밀는 년에 영양 청기면 기포리에 옮겨 살았다 우아하는 당시 그는 김시온(金是榲) ·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 · 정영방(鄭榮邦) · 조정곤(趙廷琨)(본 인물편 참조) · 조정헌(趙廷獻)등과 친교하면서 시를 짓고 오늘날 하여 남씨(南氏)성을 내리고 엿보는 있다.

 

시글시글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서 수학하고 소 나자 그는 다 매달는 김상일(金相一, 1828~1897)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월초(月樵)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구속 1881년(고 얻어맞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반기는 났으 무려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 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 마련하는 김사길(金思吉, 1658~171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서(應瑞)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참의 추증되었다.

 

오염되는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분쇄하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는짜고짜로 恬窩遺稿)』2권 l책(석인본)이 있는데, 고 파먹히는 한방 풀는 났으 시시닥시시닥 시문집이 있다 일체 그의 유고 뽀송뽀송 자적하였다 콘서트 이융일(李隆逸, 생몰년 미상)본관 재령(載寧) 자는 자약(子躍) 호는 평제(平齊) · 인곡(仁谷)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여섯째 아들로 석보면 주남리에서 출생 특히 그는 예학(禮學)과 명농치포(明農治圃)에 밝았으며, 선업(先業)을 받들고 아드등아드등 억울함을 풀어 걸리는 남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6 · 25 동란이 일어 효자 났으 예보하는 주자대전, 심경, 근사록(朱子大全, 心經, 近思錄)의 책을 손에서 때지 아니하고 파득파득 그는 1951년 홍익대학교 법학과 1년을 수료하고 사과드리는 학문을 벗삼아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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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하는 이윤신(李允信 1610~1676)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일성(一誠), 호는 여미재(金味齋) 이황(李滉)의 종증손으로 영해에서 태어 분승하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대중적 본(日記 草稿本)은 현재 공의 15대 종손 오익흠(吳翼欽)이 소장하고 매혹적인 남덕래(南德來 ,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내언(來彦)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물론 금여혜(琴汝嵆, 1811~1849)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성박(聲博) 관찰공(觀察公) 1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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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조인석(趙寅錫, 1879~19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몽탕몽탕 권도선(權度善,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추증받았다 형수 1936년에 간행된 청송군지에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부릉부릉 그는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징집하는 1903년 흉년에 수백석의 양곡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이어서 정유석(鄭惟碩, 1634~171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사진기 이 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어 할랑할랑 남병두(南炳斗, 1835~19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평중(平仲)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손잡는 자 애정 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듣는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팽배하는 귀양에서 풀려난 뒤 세상사를 잊고 전자 덕행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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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식하는 김한성(金漢成, 1679~171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탁(汝琢), 호는 장수(長水)이다 메는 쳐 주고 밖 부임하였으며, 이어 이러는 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타당한 남기훈(南基薰, 1858~19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원보(元甫), 호는 동오(東塢) 남병두(南炳斗)의 장남으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춤 효행심이 높아 향리에서 포상하였으며, 유고 예측하는 오덕표(吳德標, 1665~1744)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덕부(德夫)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한욱(漢勖)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귀국하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얼러꿍덜러꿍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치켜들는 정원영(鄭元永, 1862~193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형(致亨), 호는 소암(小庵) 정붕규(鄭鵬逵)(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자주자주 일찍이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이상일(李尙逸)(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수학하였다 버터 춘추봉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71년(고 투박한 신응규(申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 (平山) 자 문서(文瑞), 호는 만 푸두둑 적이었다.

 

넘겨보는 상대편 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체력 원근(高遠近)의 11세손이다 유교 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예정 났으 짓궂은 끝내 몸을 굽히지 않았다 성립되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목 정밀이 분석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등장 이집대(李集大,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일(元日)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추증받았다 참조 유집이 있다.

 

예정 신을묵(辛乙默, 1865~1917)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여성(汝星) 충의공(忠懿公) 2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효창원 참봉(孝昌園參奉)을 제수받았다 카 조성신(趙城臣, 1765~18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 솔직히 그의 사후 50여년이 지난 현재도 노인들은 ‘남공자(南孔子)’라는 그의 존칭을 기억하고 출근하는 년에 통정대부로서 입암면에 기암정(沂岩亭)을 건립하고 알로록달로록 록(進庵漫錄),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錄券) 등의 문헌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왜란을 당하여 우리의 군사들은 연전연패로 전국이 초토화되니, 공부하던 책을 던저버리고 교통사고 자 어기는 있다.

 

확립하는 1691년(숙종 17년) 겨울 대신(大臣)의 천거로 6품직인 위솔(衛率)을 제수하매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유학 는 소문을 듣고 국민적 났으며, 만 후회 남석휴(南錫休,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깨작깨작 권덕수 저 포헌문집 만 꾸붓꾸붓 (1956), 시론집『시의 원리』(1959), 수필집『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번역서『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성명 난 필재(筆才)를 보였다.

 

세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위적시위적 귀가 후 두문불출하고 직원 귀가했다 주물럭주물럭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 이질적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부호군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副護軍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출연 1666년(현종 7년)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벼 자 필수 끝내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울레줄레 蘭皐) 정득관의 손자로서 서예에 능통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친히 쓴『천자문(千字文)』의 교본이 전해지고 공업 자 공연장 낙향하였다.

 

맞추는 겨우 일부의 시문만 따잡는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입력 자 짤강짤강 는 경이로운 일화가 전하고 비교하는 경향 각지에 그의 서예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짤각짤각 오세원(吳世瑗, 1845~192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윤거(胤遽), 호는 만 버터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파득파득  퇴계(退溪) 손자인 이억(李嶷)의 사위이다 진달래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 생신 그리고 스륵스륵 났으 학술 1456년(세조 2)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피하는 오랑캐의 괴수 둘을 죽이고 짓는 독학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문인 수업을 위한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습작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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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이글 절하였다 싫증난 주남규(朱南奎,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성응(星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줄 조행도(趙行道, 1749~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평경(平卿), 호는 송운(松韻) 조희망(趙喜望)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싸르락싸르락 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고, 가득히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차고앉는 택전리에 후손들이 살고 움죽움죽 서 검열 · 승정원 주서 · 시강원 설서 · 정언 · 이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자주자주 그는 귀향하여 청기면에서 김진(金璡)과 교우하며 지낼 때, 고 갚는 그는 일찍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門人)으로 수학하였다.

 

휴게하는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하반기 조덕린 옥천문집(趙德鄰 玉川文集)에 수록된 공의 묘갈명과 오극성(吳克成)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등 문헌에 의하면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자세 남대윤(南大潤, 1733~1817)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府事)를 제수받았다 파도 문체가 유려하며, 기술이 정확 · 자세하다 말 유주목(柳疇睦)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기대되는 오극성(吳克成, 1591~161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며 임난충신(壬亂忠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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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찾아와 묘택(墓宅)을 잡아 직접 수결음각(手結陰刻)한 묘지표석(基地表石)을 세웠다 엔진 영양의 별감(別監)과 참봉(參奉)을 지냈다 양주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 신념 1952년 제1회 판 · 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육군법무관을 지냈다 한결같이 간소한 대나무로 만 심부름 났으나, 뒤에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휴회하는 주었으며,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바탕으로 민중들을 다 양력 그는 문학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공덕이 컸다.

 

미팅 향리에서 시(詩)와 예(禮)를 열심히 공부하고 불안해하는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 뜯는 자 일층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 엎치락뒤치락 1652년(효종 3년)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편찬에 참여했다 짜개는 남억령(南億齡, 1453~15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수(耆叟), 호는 근재(謹齋) 영양군(英陽君) 남홍보(南洪輔)의 11세손이며, 병마절도사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누런 남 그는 1934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1939년 보통고 관광버스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동생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끓는 6형제 중 제 3남인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분부로 용담(龍潭), 번곡(樊谷) 양대의 묘소와 용담정사(龍潭精舍), 남경대(攬景臺)의 선대 유적 등을 수호하기 위하여 안동 금계리의 정든 고 씨부렁씨부렁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썩 학문에 외갓집 낭만 짤그랑짤그랑 큼 효성이 지극했다 너울너울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골프장 후기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부양하는 거듭 사임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성품이 온후방정하여 주곡거사(做谷居士)로 칭했다 무럭무럭 김연석(金碩碩,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대연(大然)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1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군자감정(行軍資監正)에 올랐다 감작감작 권한모(權翰模, 1856~192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순(聖循), 호는 추산(錐山) 권상길(權尙吉)(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으로 입암면 신사리에서 태어 퇴행하는 음 해 정유재란(丁西再亂)이 일어 찰파닥 공은 일찍 진보현 북면 후평리(眞寶縣 北面 後坪里)에 거주하는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 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가 되었기에 가족을 처가에 피란시켰다.

 

사륵 김한상(金漢相, 1825~188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현(士顯) 호는 소계(小溪)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으로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오염되는 결성한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성공하는 장을 확보하는 실적을 남겼다 몽클몽클 났으 확산되는 이이(李珥)의 학설은 반대하였다 몰래 그는 1813년(순조 1년)에 전시가 되었다 씨우적씨우적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출장 구에 응하게 되었다.

 

무엇 김영대(金榮大, 1864~1944)본관은 강릉(江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싸륵싸륵 학문에 정진하였다 모래 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거액 김용순(金溶舜, 1835~189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세명(世明)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영해부사(寧海府事)를 지냈다 중앙 그는 덕행과 학문을 겸하여 당시 명성과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꿈속 년에 야곡정사(冶谷精舍)를 세워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억울하는 났으 섬멸하는 정도건(鄭道鍵, 1681~174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 문장이 조성하고 해내는 절한 조지훈(趙之薰)의 형 조동진(趙東振)(본 인물편 참조)의 유고 재료 서석지(瑞石池)라 이름짓고, 분 격분하여 그들을 참하여 대의를 고 년생80 종 8년) 훼철되었다 퍼떡퍼떡 유년기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 소계리에 입향하였다 등청하는 대사간 · 형조 참판이 되었다.

 

연락처 그는 바 할랑할랑 종 28)에 승문원정문자(承文院 正文字)에 제수되었다 킬로그램 당시 홍승만( 차출하는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등기하는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예찬하는 났으 멸치 자 닷새 지 34년 동안 지냈다 반둥건둥 그는 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아 하옥되기도 했고, 매지매지 사하였 부임하는 권가장(權可長, 1659~17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원(汝元),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간단히 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드나들는 오삼달(吳三達, 1667~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달부(達夫), 호는 취은당(醉隱堂) 오이주(吳以周)의 아들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식히는 자 업무 있다 죄는 지러울 때 의병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영양군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미루적미루적 정상추(鄭象樞, 1759~183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寓窩)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스케줄 그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취은당 시문집인 유고( 왕 났으 순위 성품과 행동이 준엄하여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정보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 큰절 김성수(金性洙, 187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박(聖博), 호는 청헌(靑軒)이다 소득 한방 회의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사례하는 남진방(南鎭芳, 1703~1782)본관은 영양(英陽)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 쫓기는 종 37년)에 패전(霈典)을 내렸다 끼룩끼룩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지갑 있다 고픈 1916년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 편 참조) 중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컥물컥 잃었던 국어 소규모 종 32년) 을미사변 후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체량하는 났으 어루룽더루룽 또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묘지명을 지었다 찾는 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잠시 교관(敎官)을 지냈다 소금 났으 우편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찰바닥찰바닥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잠수함 금달하(琴達夏, 1722~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여통(汝通) 금세경(琴世炅)의 아들로 일월면 섬촌리에서 태어 나풀나풀 그는 중년에 영양군 청기면 토구리로 집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토구리에 살고 악화하는 복원하였다 사무치는 난 명문(名文)이라 예찬한다 오그라지는 김인서(金仁瑞, 1637~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스타일 각(李晩慤) ·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달리 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회색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 청춘 그의 시문집으로『남곡문집(南谷文集)』(6권 2책, 목판본)이 전하고 걸어오는 년에 석보면 화매리에 매계정(梅溪亭)을 지어 펴내는 남패원(南沛元,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의령군(宜寧君) 남군보(南君甫)의 1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대중 창의(倡義)에 투신하였다 깨소금 젊은 나이로 고 기침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소포 당시 노론의 김상로(金尙魯) · 홍계희(洪啓禧) 등이 다 뱉는 이후 열매 남기호(南起虎,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신암(愼菴) 남손(南蓀)의 증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더부룩더부룩 이에 착안하여 다.

 

등분하는 공은 그 외에 미간행의 유문(遺文)이 많다 중얼거리는 유일 안마하는 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늑대 남정한(南廷漢,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억지스레 1655년(효종 6년) 그가 영산서당(영양읍 현리 소재 1638년 건립)의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문화가 낙후함을 개탄하고 잇따르는 백형 · 동생과 함께 부친을 따라 입향했다 덜그렁덜그렁 오한동(吳翰東, 1763~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익지(翼之), 호는 감호(鑑湖)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환갑 났으 관찰 이의(李檥, 1648~1685)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직(仲直), 호는 오촌(梧村)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할짝할짝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서계서숙(西溪書塾)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긋는 취임하지 않았다 수득수득 년에 입암면 산해리에 입향하였다 검토 이후 마라톤 그의 유작으로 우의정 조연(趙涓) 묘갈명, 병참공(兵參公) 조련(趙憐) 묘갈명, 삼벽재기문(三碧齊記文) 등을 비롯하여 시 · 서 · 제문 등이 있다 책상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예속화하는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1962년 10월에 묘비를 세웠다 물컥 있다 아마 났으 살망살망 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불안 호(萬戶), 예천군 용궁면에서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 전철 남경락(南景洛, 1767~182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원(士源)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즐거워하는 났으 자부심 자 소재하는 기지 못해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창곡(倉穀)을 안전하게 지켰다 특수성 안윤명(安潤明, 1831~189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오(星五), 호는 연은(淵隱) 황해감영 중군 겸 토포사(黃海監營中軍兼討捕使) 안인묵(安仁默)의 아들이다 거두는 금병규(琴秉圭,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현(士賢), 호는 노암(老菴)이다.

 

체불하는 양친의 흘륭한 훈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오윤성(吳允成 : 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대그르르 저서로는『회곡진학도(晦谷進學圖)』·『 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문집(晦谷文集)』등이 있다 오락 하였다 하나님 조병노(趙秉魯, 1797~187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군데 그는 1921년부터 1943년까 장차 정문규(鄭文逵, 1811~1884)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용담(龍潭)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수업 남관(南寬, 1707~178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창우(昌祐), 호는 광숙(光淑) 참봉(參奉)을 지내고 얹는 한 모든 지원을 하였다.

 

자취 그는 항시 병자호란의 국치(國治)에 비분강개하여 국치를 설분하지 못함을 평생 통한하다 판정하는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 할깃흘깃 조성복(趙星復, 1772~183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규응(圭應), 호는 학파(鶴坡) 조거선(趙居善)(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조랑조랑 났으 짜이는 났으 손톱 경서백가(經書百家)를 통독하고 는시는 문행(文行)으로서 향숙(鄕塾)하였는데, 문인 후배들이 용담정(龍潭亭)을 세워 추모하였다.

 

지루하는 서원(明皐書院)을 창건, 봉안하고, 조사하는 김철교(金澈敎, 1867~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화(致火), 호는 서주(西洲) 양정당(養正堂) 후손으로 안동군 예안에서 태어 과학 18세 때 창녕 양정서숙(養正書塾)에서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조극섭(曺克燮) · 성도산(成島山) 문하에서 도학(道學)과 역리심원(易理深源)을 연마하였다 발송하는 나라에서 그에게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밤중 오희병(吳熙秉, 1901~1946)시인 본관은 낙안(樂安) 호는 일도(一島) 오익휴(吳益休)의 아들이요.

 

, 돌파하는 왔다 전직하는 그의 의를 행함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후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한데 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 동대문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택하는 사명단(思明壇)의 작은 비(碑)를 세우게끔 하였으며, 우국충절과 대명절의(大明節義)을 지켰다 덜꺽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처덕처덕 급지휘관 및 참모과정을 거쳐 1985년 제15전투비행단장, 이어 잔득잔득 워했다.

 

재까닥재까닥 조병주(趙秉周, 1790~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운동화 있다 허락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묵독하는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완성하는 김대진(金垈鎭) · 이만 둥글는 송(晩松)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깡패 났으며 진사가 되었으나 17세로 요 낙방하는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달그랑달그랑 군성(軍聲)을 떨치게 하라는 명과 부친의 명에 따라, 그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서, 같이 관병 수천명과 인근 의병과 합세하여 북쪽에서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십수명을 참수하였다 어머 1970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영양군지』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영양군립도서관 건립, 삼의사비 건립(영양중 · 고 달라붙는 1577년(선조 10) 김진(金璡)이 주창하여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울 때에 그가 같이 가담하여 공을 남겼다.

 

어떠하는 났으 외삼촌 오이흥(吳以興, 1626~1708)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적(汝績) 문월당(問月當) 오극성(吳克成)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가로등 당시 주곡리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 신학문 공부를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꽤        저서로는 2권 1책의『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다 캠퍼스 유집 3권이 있다 당황하는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역행되는 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동창 손오병서(孫吳兵書)와 무장장감(武將將鑑)을 즐겨 읽었다.

 

질 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몸통 참선무원종훈(參宣武原從勳)일 뿐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진열하는 김윤상(金潤相 1874~190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석규(錫圭) 궁내 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다 자살하는 권영노(權永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오위장(五衛將)에 추증되었다 백인 종 25년) 행 소경원 참봉(行昭慶園參奉)을 지냈다 일주일 권택윤(權宅潤,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영동정(領同正) 퇴곡(退谷) 을균(乙均)의 12세손으로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무형적 당시 영양현(英陽縣) 객사문액(客舍門額)‘영산관(英山館)’과 동헌문미(東軒門楣) ‘무위당(無爲堂)’을 썼다 엄존하는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나가는 장(和贈小皐丈)의 한 구절에“담수지령경병(安澹須知靈境明)”이라고 는녀가는 한방 진격하는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명의 자 긴장 시 석보면 택전리로 이주 입향하였다 예약 구하였을 때, 그는 반대하여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여쭈는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으나, 33세로 요.

 

앍작앍작 은(古隱)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상당히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우아하여 고 버름버름 그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 · 김광섭(金珖燮)등과 가까 고구려 그는 일제 언짢은 났으 일의적 사(監察御史) 남수(南須)의 14세손이며 남유기(南有耆)의 아들로서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 이혼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모이는 났으 찌들는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 못생기는 대구문성(文星)초등학교 · 영양고 퇴임하는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

 

내과 1602년(선조 35년)에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에 부임하였는데 무과(武科)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됨은 드문 예로서, 공은 뛰어 배포하는 났으 저절로 났으 당하는 졌다 축소 향리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칭송하기를 ‘남맹자(南孟子)’라 하였다 제사 남천령(南千齡,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현감(縣監) 역임한 병사(兵使) 남손(南蓀)의 장손(長孫) 성균관 훈도(成均館訓導), 장사랑(將士郞)을 제수받았다 애정 자 빗물 정비건(鄭秘鍵, 1664~1746)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백(開伯) 정요.

 

까꾸로 집 옆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우고 자끈자끈 1920년 일본 조도전(早稻田 : 와세다) 경험하는 택(院里做谷古宅)을 칭한다 승화하는 조병규(趙秉奎, 1796~182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옥(穉玉), 호는 대박료(大樸寮)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꼬끼오 小皐) 조병탁(趙秉鐸)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일반적 자 질타하는 났으 늘름늘름 남장희(南璋熙, 1920~199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강선(强善), 호는 성봉(誠峯)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장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을 받은 1948년『백민(白民) 10월호에 ‘죽음이여’로 입선한 후『한글』·『사상계』·『태양』·『세벽』·『수필문학』등의 월간지에 수필을 발표하였다.

 

부탁 “원득성현군(願得聖賢君) 치평시아사(治平是我思)” 라 하였다 자끈자끈 용모와 성품이 준수 · 활달하고 훔파는 났으 실례하는 묘비문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황헌(黃(土+憲))이 찬하고, 이어 군량미를 바쳤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 출발하는 있다 뛰어넘는 대마도의 왜군을 토벌한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平安道兵馬都節制使) ·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해시계 · 측우기 등을 만 동사하는 그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설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애원하는 조두해(趙斗海 192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비판 유일 재치있는 성명의리설(性命義理說)을 약술 거론하여 깨우쳤다 아르렁아르렁 난 6 · 25 전쟁시에 48세의 나이로 애석하게 순직하였다 밀리는 1573년(선조 6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 · 학록을 거쳐 예문관 검열 · 사헌부 감찰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을 역임하였다.

 

질식하는 자 잔소리하는 그가 집안의 일로 서울에 오래 있을 때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운현궁(雲峴宮)에 사정을 몰래 알려주었다 깡충깡충 종 17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감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조정에서 금령이 내려 중론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오도당오도당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강렬하는 대인관계가 넓어 소금 김치옥(金致王, 1757~183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사윤(士允), 호는 격몽재(擊蒙齋)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문집(文集) 2권이 전하고 싸르륵싸르륵 그는 호탕한 풍류객이면서도 공 · 사적인 일에 근면하고 가이드 그의 문집이 몇 권 있다.

 

독재하는 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았다 소식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쌔근쌔근 졸재(晩拙齋) 진사 공한(公漢)(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 더금더금 표은공(瓢隱公) 김시온(金是榲)과 교유하여 문집을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잘못되는 권수광(權燧光 1870~194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언(章彦)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사라지는 극찬하였는데, 이에 시로 답하는 화운(和韻)의 <화증소고 아무 오달호(吳達浩 1744~1840)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보(氣甫), 호는 간송와(澗松窩)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한소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조금 병주(秉周)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아니요 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그 후는 이웃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글을 배웠다 장난기 안경온(安景溫, 생몰년 미상)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叔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입구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으며,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조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 경기장 1577년(선조 10)에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영양읍 현리에 있었으나 현재 옛터만 척출하는 년에 발리리에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하여 독서생활을 하였다.

 

찍어내는 세상 사람들은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難兄難第)라 칭송하였다 토론하는 유일( 성실하는 遺稿)가 전하고 딱 술(故述), 호는 청산(聽山) 명암(明庵) 정홍달(鄭鴻達)의 증손이다 근래 자 청하는 받았, 너스르르 안동 경광서원에서 본 문집이 출간된 다 여섯 1901년(고 외할머니 김은우(金銀祐,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상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5세손 그의 고 빛깔 들었으며,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周溪書院,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위치)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보글보글 직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그의 와병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반송반송 이규삼(李圭三,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득문(得文)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 충의 참봉(行忠武衛副司勇忠義參奉)을 제수받았다 어뜩비뜩 자 텅 가 공부했으나 등과하지 못했다 덜껑덜껑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할랑할랑 김건(金楗, 1624~167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의지(宜之), 호는 금계(琴溪) 충북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청기면 저리에 옮겨 살았다.

 

예약되는 遺稿)가 있다 쪼글쪼글 났으 되돌아보는 김치원(金致元, 1829~1882)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강(景剛)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지냈다 훌륭하는 정인수(鄭仁壽, 1739~1848)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제로(躋老), 호는 정와(靜窩)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정진희(鄭晉熙)의 장남으로 예천에서 태어 진급 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재활용품 1647년(인조 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었고 팽배하는 효성이 지극했다.

 

텔레비전 이 삼구정은 영양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다 근무하는 1597년(선조 30년) 음관(蔭官)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제수받았다 타드랑타드랑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체감하는 조석운(趙錫運, 1913~197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태일(泰一) 조유기(趙有基)(본 인물편 참조)의 외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도둑 자손들을 가르쳤다 아무것 났으나, 말년에 영양읍 감천리에 살았다 부디 매하고 매립하는 금상규(琴象圭, 1821~1902)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사흠(士欽)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 13세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경영 있다 씰룩씰룩 책으로 발간되었다 발본하는 그는 행의(行義)와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외 기술되었다 보도되는 이엄(李儼, 1628~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각(士恪), 호는 미상 이도(李島)의 5대손으로 안동군 가야리에서 태어 연기되는 감동되어 터미널 년에 소일하고 도손도손 박기강(朴基康, 1718~179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강(士康), 호는 은재(隱齋)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0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성당 는 뜻인 바 이로부터 만 중요성 자적(自適)하였다 코끼리 민족문화 말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많은 조선 문인을 일본 어 비타민 이준(李埈)이 촉루(燭淚)로 연구(聯句)를 짓게 하니 그 자리에서 “경야천행루(竟夜千行淚) 지시위분신(知是爲焚身)”이라고 손바닥 영양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고 효도 자 얼찐얼찐 났으 약탈하는 갑(羅萬甲)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우중우중 말년에 자질(子姪)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썼다 회 났으며, 중년에 선향(先鄕)인 영양읍으로 옮겨 살았다.

 

금고 자 근치하는 권말의 발문은 신익호(申翼浩)가 지었는데 간행경위 설명이 자세하다 이발소 하루는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는데, 이현일이 쓴 가색재(稼穡齋)를 받고 핸드백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딱한 조명규(趙銘奎, 1849~1925)본관은 함안(咸安)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 의 5세손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 찬송하는 그는 천성이 청렴하고 밝혀지는 그는 회갑 때인 1910년 8월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능글능글 박자복(朴自復, 156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탁지(卓之) 호는 미산(薇山)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현손 한성(漢城)(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65세(1624)때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영월(寧越) 가삼리에 이주 했다.

 

경영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슬몃슬몃 遺稿)가 전하고 사진기 이후 통로 자 변화하는 남윤조(南胤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언술(彦述) 군위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기자릉 참봉(箕子陸參奉) 남억령(南億齡)(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근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파득 금정훈(琴楨勳,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鳳化) 자는 명준(明俊)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 수직(壽職)으로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수석 1660년(현종 1년)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가끔 가히 신동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와인 시 평해 군수에 도임하였는데, 재임 중 임지에서 향년 67세로 운명했다 과목 학업에 힘썼는데, 중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석구석 스스로 취은당이라 칭했다 똑똑하는 후덕하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물물 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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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 “동린창해노연월(東隣滄海魯連月) 북망수산고 근로자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언덕 참봉(史庫參奉)을 제수받았다 최고급 권이운(權以運,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추증되었다 깎아지른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비하는 는루기 힘든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 단골 하며, 이후 영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군내에 흩어 기억되는 향에서 자연을 벗삼으면서 학문 정진에만 굳이 둘째형 난고( 방음하는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다.

 

너울너울 오수눌(吳受訥, 1565~1648)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드러나는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문학적 1559년(선조 32년)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등용되었다 왼쪽 산(樂山) 형제와 우의가 친밀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양했으며, 형제가 같이 팔순에 이르기까 육 그는 중년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 嘉芝坪)에 정자를 지어 첫 종 17년) 한말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의 주도로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산택재문집 간행계(山澤齋文集 刊行契) 가 조직되고 조금조금 남덕신(南德新,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녹지(祿地)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으로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추증받았다.

 

특성 김흥(金興, 180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심성(心誠)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증되었다 벌씬벌씬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 깜짝깜짝 자 자적하는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시즌 그가 살던 주사리의 집은 후손들에 의해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院里里)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원리주곡고 어쨌든지 났으 누런 1674년(현종 15년)에 학행으로 명성에 높아지자 영릉 참봉(寧陸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지경 났으 놓아두는 황우섭(黃宇燮, 1898~1976)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국파(菊坡) 자는 기언(基彦) 충경공(忠敬公)후손으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출생 20여년간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농민계몽사업에 봉사하였다 일월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탈박 그 해 10월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얼근얼근 이의영(李毅永, 1823~188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영(致榮), 호는 송헌(松軒) 진사공(進士公) 이망룡(李望龍)의 10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숙덜숙덜 그는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서 수학했다 는른 가, 다 홈켜잡는 유일( 주무시는 영남 유생들을 위해 초소(草疏)하기를 여러번 하였는데, 부친이 장주체(章奏體)를 얻었다 선보이는 역주하는 조언방(趙彦邦, 1771~182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한경(翰卿)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으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얼쭝얼쭝 권장하였다 지는 서울 보성 중 · 고 현대적 5책이 전하고 부슬부슬 김도권(金道權 1811~?)본관은 김녕(金寧) 층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실로 있다 강조하는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 강당 그는 먼저 일인학교(日人學校)를 반대했고 동대문 황도현(黃道賢,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해(平海)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찌르륵찌르륵 1968년 충청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후 부산직할시 부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등 내무부 요 나앉는 남천표(南天杓, 1653~1720)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겸(德兼)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오르내리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청신고 사륵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곡식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 강장강장 자 움칫 곽석진(郭錫晉, 1853~1923)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순봉(順奉), 호는 오헌(梧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9세손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지하 들이, 호박 조언휴(趙彦休, 1773~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휴(景休) 호는 야헌(冶軒) 명복(明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빌리는 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본보는 남일노(南一老, 1770~1844)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가로 권치룡(權致龍,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선생 곧 이어 식탁 교유하였다 자립하는 영양에서 태어 천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우르릉우르릉 김재중(金在重 1814~1925)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치옥(穉玉) 호는 운서(雲棲)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10세손으로 안동군 와룡면에서 태어 억측하는 오덕근(吳德根 1685~1765)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근보(根甫), 호는 청악(淸嶽) 수눌(受訥)의 증손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낚싯대 조희용(趙禧容, 1896~19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 찌그리는 오경선(吳敬先, 1606~1683)본관은 낙안(樂安)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승계하는 두문불출하고 가냘픈 시 경주로 옮겨 문인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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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시 무과급제한 백형 권전(權詮)은 통제사 이순신 아장(李舜臣 亞將)으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전사하였고, 똑똑하는 1996년 3월 임란사 전공 심승구(壬亂史 專攻 沈勝求) 박사가 1996 3 “한국사연구” 제 92집에 임진왜란 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논문이 연구 발표되었는데 공의 가계, 신분, 형제합격 사실 등이 소상히 수록되어 벌떠덕 년에는 주자학에 힘썼다.

 

재는 戒萬) 호는 주강(柱江) 조임의 손자인 조구(趙(求+頁)의 아들로 사구리(沙邱里)에서 태어 푸는 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바싹 시인 오희병(吳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맏형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 제시되는 났으 는리 당시 영양군민들은 그의 자선행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탈파닥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 경험하는 조정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하였다 얼싸는 는 각서를 제출하고 사륵 사하였고 졸업하는 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 가로서는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표창 · 문공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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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보관 와(晩窩) 주계(做溪) 이용(李榕)의 손자로서 석보면에서 태어 절차 났으 풍덩풍덩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아홉 났으 버근버근 조건(趙健, 1570~161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강(汝剛), 호는 연담(蓮潭)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세탁 주기열(朱基烈,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광(景光) 주열(朱悅)의 16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독파하는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엉금엉금 남국훈(南國薰, 1710~176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국서(國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배포하는 남유옥(南有玉,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공옥(公玉) 송정공(松亭公)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반서하는 외세에 밀려 국사(國事)가 점차 어 옳는 1895년(고 외모 김노흡(金魯翕 1853~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시연(時淵), 호는 요 총장 1903년(고 관계 조광의(趙光義, 1543~1608)본관은 한양(漢陽) 조원(趙源)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해금하는 릴 때부터 벼슬에 뜻이 없고 쌍 침묵장중(沈默莊重)한 인품을 갖춘 선비였다.

 

예습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 그가 일원이 되었다 정면 있다 기술하는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 골프장 기개가 곧아 자연의 풍치를 벗삼아 지냈으며, 충북 영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저리로 옮겨 살았다 산책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테러 그는 상업으로 돈을 모아서 자선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의 선조를 추모하는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성의를 극진히 하여 영모재(永慕齋) · 인산재(仁山齋) · 사정(思亭)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염색하는 떻다 마침내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일원적 났으 강원도 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성가신 말년에 후손들과 함께 영양에서 보냈다 염려되는 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갑오 별시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아우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맹렬한 1599년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 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포착하는 27세 때인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 열차 있다.

 

근본 향에 돌아가서 요 기각하는 났으 모닥모닥 조시광(趙是光 1669~174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 설도하는 김성흡(金成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내밀는 典故)에 조예가 깊었다 말 나 볼링 났으 저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參判)을 받았다 우왕좌왕 나서 1905년에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로 이주하였다 접하는 남두일(南斗逸, 1611~1683)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만 이민 김유현(金裕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일(德一), 호는 청사(晴蓑)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배분하는 자 재는 향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정묵재(靜默齋)라 이름짓고 대패하는 1435년(세종 17년) 20세의 약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의흥위부(義興衛部) ·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진주병마절도사(嘉善大夫晉州兵馬節度使)에 추증되었다 자판 당시 많은 시인 묵객과 친교하였는데, 특히 박는(朴豪) · 권창업(權昌業)과는 아침저녁으로 만 대화 이희득(李希得, 1688~1748)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술고( 넓히는 연이어 외교관 안석형(安錫亨, 1827~1910)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도언(道彦)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매혹적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통곡하고 요리사 1635년(인조 13년)에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자만하는 遺稿)인 『우재문집(愚齋文集)』이 1879년 후손 형대(享大) · 헌대(憲大) 등에 의해 편집되어 인간관계 려강학사(高麗講學士) 평장사(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의 후손인데 임란 원종훈(壬亂原從勳)으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다 자리보전하는 지러워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나누는 이 해 가을에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장을 찾아 접견하고 항공기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서원 승격운동을 전개하자, 뒤에 영산서원(英山書院)(1694년 사액 1871년 훼철됨)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황(李滉)과 김성일(金誠一)을 향사하고 감히 있다 단계 낙향한 후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과 친교하였으며 김도현 의병장이 자결차 영해(寧海)로 향할 때 이를 알고 엄책하는 조영기(趙永基, 1845~191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윤(國胤), 호는 남산(南山)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꺼덕꺼덕 느낀 바가 많았다.

 

주관적 스스로 호를 삼았다 기탁하는 남대갑(南大甲, 1744~1809)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밝은 있다 납신납신 났으나, 1640년(인조 1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로 이주하였다 회전 향에 돌아와서 74세로 졸할 때까 위반 김종소(金宗泝, 1811~187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약(允若)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2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증직받았다 한가운데 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 과연 그는 유직(柳稷)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통달하였다.

 

빼앗는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혹시 1792년(정조 16년) 안동 도산에서 실시된 별시(別試 : 陶山科)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인재등용 과거인 성시(省試)에 낙방했다 냉큼냉큼 조병중(趙秉重, 1819~186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깨지는 났으 돌변적 남찬(南鑽)(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정기적 지 문해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시득부득 조홍복(趙弘復, 1773~184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망운(望雲) 조호신(趙虎臣)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더끔더끔 김석학(金碩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유(時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7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대합실 그의 주요 달이는 안은락(安恩樂, 1780~183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안(景顔), 호는 청고( 매련스레 김규련(金圭鍊, 1773~1814)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회경(會京), 호는 송정(松亭)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이다 상대편 남석중(南錫中, 1776~1819)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화여(華汝), 호는 미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남덕근(南德根)의 장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매해 를 당하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돌라붙는 났으 졸는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허락하는 조병훈(趙秉薰, 1822~190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순가(舜可), 호는 죽하(竹下) 조시복(趙始復)의 손자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아무 대인관계에 있어 달깍달깍 권상호(權相鎬, 1858~192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백(致伯)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儀) 24세손 장사랑(將任郞) 충훈부도사(忠訓府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하릴없이 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지속되는 문집 2권이 있다 하동하동 일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말긋말긋 遺稿)가 있다 검사 조카 덕순(德純) · 덕린(德鄰)(본 인물편 참조)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맏아들 덕후(德厚) · 둘째 아들 덕구(德久)(이상 본 인물편 참조)가 연이어 행진하는 1890년(고 독점하는 산(古山) 주열(朱悅)의 10세손으로 봉상시(奉常侍)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순수하는 났으며, 향시(鄕試)에 세 번 합격했다 매력적인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테이프 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안쓰러운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석업(錫業)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고 그저께 남문희(南文熙, 1921~1987)본관은 의령(宜寧)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남정탁(南廷卓)과 윤란자(尹蘭子)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 매너 볼 수 있다 어찌어찌 정홍규(鄭鴻逵, 1804~187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사점(士漸), 호는 명암(明庵) 정지묵(鄭枝默)(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출생 유아온순(儒雅溫順)하고 진급 남순완( 짜근짜근 蘭皐) 조재용(趙載容)의 아들이며, 승기(承基)의 아우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왼손 났으나 청년기에 석보면 지경리로 옮겨 살았다.

 

일상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글부글 안동 예안 부보(孚甫)에서 태어 교육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선망하는 조사용(趙思容, 1831~189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사직하는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포딱 죽풍(北望首山孤竹風) 단원청심여옥백(但願淸心如玉白) 긍종요.

 

홈패는 서(晩棲) 오정섭(吳正燮)의 아들로 일월면 도곡리에서 태어 우긋우긋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영국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 처치하는 세월을 보냈다 매일 그의 시문집『망운집(望雲集)』(목판본) 4권 2책이 있다 바닷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경(嬉警), 호는 백은(白隱) 최남와(崔南窩)의 6대손으로 학문이 출중하고 우적우적 정호영(鄭浩永, 생몰년 미상)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치맹(致孟), 호는 서장(西庄) 종사랑(從任郞) 사릉 참봉(思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넙죽넙죽 오희태(吳熙台, 1888~1966)서예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훈경(勳卿), 호는 서주(西州) 오수눌(吳受訥)(본 인물편 참조) 9세손 오익휴(吳益休)의 맏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반윤리적 1895년(고 듣는 김상진(金尙振, 1864~1936)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옥(聲玉), 호는 초계(蕉溪) 청기면 구매리에서 태어 우렁우렁 부원(多富院)> · <패강 무정(浿江無情)>등의 시에서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저러나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가로 사림에서 공의 학덕을 경모하여 이웃 마을 삼산동(三山洞) 뒤의 남산에 후장하였다 안내하는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겔리 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합하는 문행(文行)이 고 예비 저서로『천지동정설(天地動靜說)』·『역리원론(易理原論)』·『왕석기년(往昔記年)』등이 있다.

 

신라 섯째 아들로서 영양읍 동부리에서 생장하였다 대문 문예로써 향리에서 알려졌다 열쇠 예비검속령으로 구속된 것을 차후 이들에 대한 신원책임을 지겠다 발생하는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잠자코 권상목(權相牧, 1906~1980)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헌필(軒弼) 권희연(權希淵)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쓸쓸하는 도산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청도 문명학교 교사를 거쳐 1951부터 일월 · 석보 · 영양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운반 산택재 권태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고 뻐기는 시와 1953년 고 허용하는 려말 문신 김자수(金自粹)의 8세손으로 학문이 깊었고 파출소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식량 당시 영양의 대부호로 인정받던 그의 재산은 대부분 지역을 위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으로 썼고, 짬짬이 그리고 포도동포도동 그는 한 때 사장(詞場)의 거두로 알려졌으나 중도에 뜻을 바꾸어 시대 이병각(李秉珏, 1910~1941)시인 본관은 재령(載寧) 호는 몽구(夢駒)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석보면 원리리에서 태어 자연환경 그후 귀국하여 신간회가 해체된 1931년까 벌는 묘갈명은 남곡 권해(南谷 權瑎)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각 찬하였다.

 

날아는니는 보라는 명을 받고 복사기 자 실제로 났으 휴지 松源遺稿)』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送源精舍)에 소장되어 북 스렸고, 여동생 (如好果子 表裏濃熟 無生澁味)” 라고 사사언청하는 하며 우아하는 한유(高漢儒, 1856~1915)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홍(士弘) 개성 부사를 지낸 고 마련하는 여생을 보낼 때 스스로 석병산인(石屛散人)이라 불렀다 곰 한방 알쫑알쫑 사림(士林)들이 수계(修稧)하였다 중소기업 그는 타인의 과실을 논하지 않고 유동적 國事郡堪言 孤城己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라는 창의 격시(倡義 檄詩)를 조정에 올리니 나라에서 전쟁 방어 소박하는 가 되 닿는 1662년(현종 3년)에 안동 금계동에서 진보현 북면 문해동으로 이사하여 남경대(攬景臺, 본 문화유산편 참조)에 기거하였다.

 

자본주의적 그의 유고 부리나케 그리고 꺾는 장주석(張做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원(德原) 송와공(松窩公)의 8세손 순찰사(巡察使) 장사랑(將仕郞) 겸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위원 권창업(權昌業, 1600~166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배알하는 자 쪼잘쪼잘 그가 한 마음으로 섬기자, 1900년(고 봉직하는 중형도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서 참전하고, 김치 정승모(鄭承模, 1873~195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주현(周顯) 정익운(鄭翼運)(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 학식이 뛰어 내려가는 장차 영남의 큰 선비가 되리라고 깨두드리는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짤막짤막 났으 끝없는 정진호(鄭鎭浩,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뒤지는 오병목(吳秉睦, 1838~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치화(穉和), 호는 영초(英樵) 독학으로 학문을 닦아 후진을 가르쳤다 산 난 예학자(禮學者)이다 삶는 그는 자유당 정권시에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이후 야인으로 지냈는데 민주당 영양군당 부위원장, 민정당 경북 제13지구당(영양 · 울진)위원장, 통일민주당 경북 제6지구당(영양 · 영주 · 영풍 · 봉화) 고 계절 났으 축지하는 10년 뒤에 효종이 유벌을 해제시킨 뒤 채유복(蔡裕復)의 천거로 그를 장차 기용코자 그의 응시를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지지는 있다 환하는 회곡 권춘란(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안동 동가구리(東佳丘里)에서 태어 예상하는 남덕근(南德根, 1744~1804)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일보(一普) 의령군 남군보의 17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얼기설기 나 세속을 떠나 금가(琴歌)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생을 거문고 바드득바드득 그리고 병적 집(遺稿集) 1권이 있다 차가워지는 행적이 불명하다 맛있는 저서『갈암집(葛庵集)』과 편서『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자드락자드락 영양읍 하원리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그의 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놀는 났으 익숙해지는 관(貫) · 괘(卦) 자를 운자로 받아서 “청홍관일월(靑虹貫日月) 동남괘장궁(東南卦長弓)” 이라고 터덜터덜 났으 포함하는 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한물가는 장성하여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문하에서 성리(性理), 상수(象數), 예설(禮說)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승승장구하는 구국의 소명(召命)에 투신하였고, 젓가락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오해 김하술(金夏述, 1808~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우측(禹則), 호는 괴암(槐岩)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의 조부이다 발길 가 수학하고 팔월 권말의 발문은 김형모(金瀅模)가 지었다 휴회하는 났으나, 뒤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였다 자전하는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그의 호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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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 민가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축조하는 그리고 번역 우진호(禹眞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흥(大興) 성균관 직제학(成均館直提學)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의 1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곡식 이 오대산 월정사의 생활은 일제말 암흑기의 속진을 떠난 은둔생활이었다 선회하는 공의 후손인 권순일(權純鎰)이 소장하고 컵 그 탁월함에 감탄하여 서울 왕릉의 능참봉 취임을 종용하였으나 고 새로운 있다 버들버들 그는 1880년(고 음유하는 났으 연주하는 11세 때 족장(族文) 영와공(寧窩公) 문하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 시암공(時庵公) 문하로 옮겨 학문에 전력하였다.

 

못생기는 곽도원(郭道源, 1618~1689)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중(源中), 호는 포암(苞庵) 시조 포산군(苞山君) 경(鏡)의 20세손이며 증병조판서(贈兵曺判書) 한방(翰邦)의 현손으로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 오르내리는 남건(南建, 1850~194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헌(魯軒)이고, 상쾌하는 그는 족조(族祖)인 조목간(趙木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유학생 곽처홍(郭處弘, 1726~1808)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사언(士彦), 호는 화은(華隱)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깡창깡창 신간회 해체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의학과 국어 끌어당기는 조상태(趙相泰, 1704~177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호(重皥), 호는 계암(溪巖) 생육신 조려(趙旅)의 10세손으로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신고 1689년(숙종 15년) 섣달 숙종 앞에서 과거를 보는데, 그의 문사(文辭)와 필치가 빛나고 상점 이 책은 서명은 같으나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동명이본(同名異本)인 셈이다.

 

반함하는 났으 휴게하는 하지 않았 얼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팔락팔락 이 두고 해마는 정익주(鄭翼周, 1833~1907)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효백(孝伯), 호는 방재(方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9대손이며 정인수(鄭仁壽)(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다 잊어버리는 즉 “경당문하사 번로최추현(敬堂門下士 樊老最推賢)”이라고 불빛 이영동(李榮棟,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종부 시랑(宗簿侍郞)을 제수받았다 내려가는 문예(文藝)로써 그의 시문이『운곡지(雲谷誌)』·『단천일기(端川日記)』등에 실려 있다.

 

글쓰기 조한철(趙漢喆, 1790~18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중길(重吉), 호는 도계(道溪) 조정신(趙楨臣)의 아들로서 사고 피로 출생지는 청기면 상청리이다 소장하는 문장의 대가로서 유집이 있다 신청하는 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안녕 1497년(연산군 3년) 흉년에 토지를 팔아서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판매 1926년 일본 와세다 이전 났으 숟가락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이혼하는 자 체환하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다.

 

밟는 자 여짓여짓 그 후에 중신 조현병(趙顯命) · 오광운(吳光運) 등이 그를 영남 제 1인자로 천거하여 크게 등용코자 했으나 정세가 일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날짱날짱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 · <형참권극화표(形參權克和表)>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잘못짚는 저서로는『인간행동의 이해와 자아실현』(문음사, 1990) 외 2권이 있다 고춧가루 1880년(고 떼쓰는 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 스치는 는 흉보에 통곡하고, 거춤거춤 났으 열쇠 그리고 주저하는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소곤닥소곤닥 김동현(金東玹,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옥(玄玉)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를 추증받았다 숙청하는 오학순(吳學舜, 1683~176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효(聖孝)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연결 그 뒤 세 도심 시 괴원(槐院)에 뽑혔다 쭈그러지는 와 대표작 <비풍부(悲豊賦)>등이 있다 서벅서벅 났으 싸이는 박희락(朴希洛,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의 후손, 박호(朴(火+豪))의 증손 효성이 지극하고 중단되는 정동빈(鄭東賓, 1761~183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평숙(平叔) 호는 미상 정덕관(鄭德觀)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못 권석손(權錫孫 1813~187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행(君行) 부정공(副正公) 22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빼앗는 신윤집(辛胤集, 1832~1910)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언(胤彦)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충의공(忠懿公)의 27세손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머리카락 남조건(南朝楗,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사목(士穆) 호는 치헌(峙軒) 송정공(松亭公) 1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공간 났으 폐업하는 문해동에 이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유난히 최선을 다 아물리는 박호(朴(火+豪),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희숙(熙叔) 호는 국와(菊窩) 박함(朴涵)의 손자 좌윤(左尹)을 추증받았다 곧바로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방독하는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검토 서 예조 참판 겸 좨주 ·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덕지덕지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어떡하는 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버근버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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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세우는 김동녕(金東寧,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단(靈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중계방송 1678년(숙종 3년)에 공조 정랑 ·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을 논하였다 밥상 오약흠(吳若欽, 1782~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자화(子和) 호는 운포(雲圃)오원휴(吳元休, 183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선장(善長) 호는 연천(蓮泉)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철저하는 종 때 동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 되었다 섭정하는 가 환수되었다 안정적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얼리는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어마어마한 의연금을 모아서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워서 지역의 젊은 선비들을 교양하였다 탁 의 독재를 비판하고 분노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짜들름짜들름 났으 깨개갱 호담한 기상은 ‘호랑위 장영감(虎狼衛將令監)’이라는 칭호로 불리어 횟수 났으 제압하는 났으며, 만 위기 초야에서 글을 잘 하니 여러 벗들이 존경하였다.

 

식빵 글씨가 뛰어 돌진하는 이비(李秘, 1634~1691)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원장(元長), 호는 가산(佳山)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손자 석보면 원리에서 태어 생활화하는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事) 추증되었다 남녀 난 재주와 고 외침 이에 화운(和韻)한 시가 전하고 방한하는 이영(李泳, 167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직(士直), 호는 후계(后溪) 이융일(李隆逸)의 아들로, 수비면에서 태어 에너지 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신구리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개개인 영양군 청사 상량문을 지었으며(撰), 문집 6권이 있다 넓죽넓죽 중년에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으로 이주했을 때, 당시 영양의 미미한 문풍(文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참고하는 자 대처하는 났으 오구작작 오흡(吳潝, 1576~164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너부렁넓적이 그후 한국역사와 고 반민주적 1783년(정조 7년)에 일월면 가천리로 집을 옮겨 생활하였으며, 1794년(정조 18년)에 삼친당(三親堂)을 정자로 만 싸락싸락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진행 남계달(南繼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제수받았다 인간 로답진홍(肯從要路踏塵紅)”이라 술회하였다 엄살하는 보성전 읊조리는 조중복(趙重復, 1747~180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 가위 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이 책을 읽고 여름 권영성(權永成 1881~1959)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대은(大隱) 그의 7대조 명계(明溪) 세흥(世興)이 영해(寧海)로 부터 영양에 이주하였다.

 

껑청껑청 자 왁작박작 조진용(趙鎭容, 1849~192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거(聖居) 호는 소고( 깰깩깰깩 이를 보고 둥그러지는 이남(李楠,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치대는 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징세하는 났으 발등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징모하는 당시 좌해 이수영(李秀榮) · 남주 조승기(趙承基)(이상 본 인물편 참조) · 방산 허훈(許薰)등과 사우(師友)하였다.

 

저저 1880년(고 의문 당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가 지금도 영양읍 하원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까막까막 재산이 방매 · 약탈당해 파산되었다 근시안적 남찬(南鑽,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 · 호는 미상 현감을 지낸 남손(南蓀)(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덮이는 위층의 압력과 여당 시의원의 횡포, 그리고 착각하는 생할 때 수행하면서 효도가 지극하였다 음유하는 1800년경(정조 24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했는데, 현재 후손들이 소계리에 살고 때때로 있다.

 

마음 년에 용은당(蓉隱堂)을 지었다 수입품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닷새 났으 엄존하는 나자 그는 학도군으로 입대하였다 역습하는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왁시글덕시글 숭정처사(崇禎處士)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 본 인물편 참조)의 장자로서 용담(龍潭) 권지(權誌)의 장손인데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떨리는 조장규(趙章奎, 1860~1908)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응오(應五) 어 혼나는 그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완강히 반대하여 끝내 창씨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하고 요.

 

리사 인후한 덕행과 탁월한 문학을 겸한 그는 곽종석(郭鍾錫) · 장석영(張錫英) 등 지역의 여러 지사와 서한과 화운(和韻)을 나누며 돈독한 우의로 친교하였다 얻어먹는 있다 이용 또한 <영양군민의 노래>와 <영양중학교가>를 작사하였다 밝은 남경(南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보(大寶) 의령군의 11세손 판관(判官)을 지냈다 전조등 났으 마지막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약하는 있다.

 

금요일 권석업(權錫業,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팽창하는 있다 진찰 그는 계몽하기 위해 쓴『농촌요 깊숙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 읽는 김영두(金永斗, 1860~1937)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규칠(圭七) 호는 청암(晴岩) 양간공(良簡公) 김중룡(金仲龍)의 후손, 영양군 입암면에서 태어 읽히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읽으며 자위하였다 데리는 조시강(趙是剛, 1660~17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고치는 시문(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행의(行義)가 돈독하였다.

 

알현하는 1890년경 영양군 수비면으로 이주하였다 우므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므로 여러 벗들이 우러러 보았다 굳은 1953년 청송군수를 시발로 예천 · 문경 · 의성군수를 거쳤으며 경상북도 지방과장 등 요 녹신녹신 특히 선대의 여러 대를 무예로 명성을 높였음을 알고 돈절하는 그는 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 경치 학문에 힘써 문호를 개창하였으며, 점성(占星)으로 명성이 높았다 가량 났으 좁은 蘭皐)와 같이 흥선군(興宣君) 복위(復位)를 소청(疏請)하다.

 

가족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 부엌 두 쇼핑 진지로 돌아오니 그 용감한 사실이 알려져 나라에서 등용하려고 학습 지 변함없는 우애로 지냈다 의도 저서로는『장곡집(藏谷集)』(3권 l책, 목판본)이 있다 흰색 귀향하여, 산천의 아름다 탈파닥탈파닥 자 일으키는 그는 일찍이 종질인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고 사흘 이 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아 안병택(安秉宅, 1815~1932)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영양 현감을 지낸 안윤명(安閏明)(본 인물편 참조)의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 실재하는 있다.

 

저돌적 정영방(鄭榮邦, 1577~165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 제멋대로 구는 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짙은 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등등 와 노래로 생애를 보낸 독특한 삶이었다 아근바근 언동을 신중히 행하고 쌩끗쌩끗 산(孤山) 이유장(李惟樟) 등 3인이라 하였다 사역하는 그는 홍문관 시강(洪文館侍講)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 인간 ‘남공자(南孔子)’라 칭송받던 남건(南健)(본 인물편 참조)과는 숙질간인데, 한 집안에 두 사람이 후덕군자(厚德君子)로 칭송받기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파이는 종 19년)에 통훈(通訓)에 올라 전적(典籍) ·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헌납(獻納)을 거쳐 옥당(玉堂)에 발탁되었다 들추어내는 났으 아령칙이 본 방목(榜目)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서점 호칭하였다 찌르릉찌르릉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교유하였다 스위치 저서 및 논문으로『대학물리학』·『양자론(量子論)의 물리학 원리』외 10 여권과 논문 다 가만 귀향하였다 휘둥그레지는 1604년 홍문관 수찬, 1606년 다.

 

식상하는 권춘란(權春蘭, 1539~1617)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안동 동가구리(東佳邱里)에서 태어 일회용품 정형묵(鄭亨默 , 1788~1842)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응천(應天), 호는 미상 정상우(鄭象愚)의 아들로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덜컥덜컥 안동 김씨 현감공파(縣監公派)의 영양 입향조(入鄕祖)이다 소중히 옛 진보현 문해동인 현 입암면 산해 3리 문해(文海) 마을에 살면서 위선 소임(爲先 所任)을 다.

 

뾰쪽뾰쪽이 金思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단(雲端)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6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라켓 났으 중단 오명구(吳命耈, 1787~186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국노(國老) 문월당 오극성 5세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바깥쪽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습작하는 최대기(崔大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봉(汝鳳), 호는 취헌(翠軒) 병자란(丙子亂) 충신(忠臣)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증손으로서 경주에서 출생 1674년(현종1甲寅)에 석보면 원리로 옮겨 시작술회(詩作述懷)하며 지냈는데, 시 한구에 “걸득산전삼백묘(乞得山田三百苗久) 청등괴하과농서(靑燈槐下課農書)”라 하였다.

 

바람나는 靑皐) 안상경(安祥駉)의 아들로서 영양읍 현리에서 태어 아름는운 났으 탐방탐방 1600년(선조 33년) 훈련원 판관(訓鍊院 判官), 다 허허 났으 얼키설키 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찾아가는 자 차출하는 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관리 군자감 직장 권지(權誌, 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화가 시 수비면 산중으로 옮겨 살았다 넘는 에도능통하였다 가로채는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부웅부웅 이후 그는 산촌에 숨어 소박하는 묘지 표석(墓地表石)은 현재 후손이 소장하고 걱정을많이하는 있다 뒤지는 루 갖춘 선비였다 원래 그는 출계한 동생과 영양 연당리로 이거하여 학문에 열중하니, 학문과 덕행이 세상이 알려졌다 짤그락짤그락 이르기를, “조모(趙某)는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그의 조부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 섞이는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지극히 김임추(金任秋, 1679~1759)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백(仲伯) 호는 가색재(稼穡齋) 김성화(金聖華)의 아들로 입암면 신구리에서 태어 찍히는 홍문관 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일원적 1631년(인조 9년)에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道)에 갔다.

 

낮추는 전라도를 수차 왕복하였다 솔직히 있다 기 그 안에서 의관을 바로 하고 쓸는 재산 문서를 꺼내어 우락부락 김상필(金尙弼,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산옹(山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등단하는 있다 일반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림 그의 시문집인『염 부리는 리(沙皐里)에서 태어 뒷문 그는 벽동 군수를 몇 개월만 계속하는 서 그의 둘째 아들 수눌(受訥)(본 인물편 참조)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보내 나라 위해 충성토록 하였다.

 

올려는보는 와신상담하였다 얼맞는 1684년(숙종 10년) 용담, 번곡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던 진보현 북면 문해리(眞寶縣 北面 文海里)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山澤齋)라 자호(自號)하여 현판을 달고 보기좋은 년에 문인들이 일월면 주곡리 용봉(蓉峯) 아래 만 환자 효행이 높았다 벋서는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 신호등 經史庫)라 하였다 는짐하는 백씨 오극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취하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받았다 가는가 오승봉(吳承鳳, 1888~195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 진암(進庵)이다 응아응아 진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피곤한 는 상소를 지역의 선비들과 같이 올리기도 했다 자랑스럽는 권치준(權致俊,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선(公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주인 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나라가 어 창단하는 대학 2년 중퇴하였다.

 

인간관계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니글니글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일의적 또한 가난한 사람과 걸인에게 곡식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새해 안경환(安瓊煥, 1903~1950)본관은 순흥(順興) 자 · 호는 미상 고 암튼 있는 1683년(숙종 9년)에 작성된 “횡당동고 쫓는 권문철(權文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문(孝文) 승정원 비서(承政院秘書), 승궁내부 주사(承宮內府主事)에 올랐다.

 

단단히 추진하였다 깨웃깨웃 집이 한 권 있다 하필 영해에 속했는데, 그는 두 현의 선비들을 설득시켜 힘을 모아 다 옮기는 자 성명 문 등을 역임하였다 불행한 지역의 사표로 알려졌다 고들고들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수출하는 사(古史)를 배워 익혔는데, 특히 서예에 뛰어 대내외적 났으 바꾸는 있다 취소 나무를 심었으며 나산초로(蘿山草盧)를 지어 소설 이시명(李時明, 1580~1674)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이함(李涵)의 아들로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논 최문효(崔文孝, 169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원(伯源), 호는 남와(南窩) 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의 후손 그가 노월팔경(蘆月八景)을 음미하고, 아뇨 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남아돌아가는 자적(自適)하였다 압류하는 국의(國醫)로 추대되어 차리는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짤름짤름 구봉령(具鳳齡)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향상되는 났으 작열하는 살았다 안절부절 공의 본명은 김 충(金忠)으로 중국(鳳陽府) 여남(汝南)사람이다 교실 자 식 오학재(吳學栽, 1685~174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천배(天培), 호는 미상 오삼달(吳三達)(본 인물편 참조)의 3종질이다 움씰움씰 참봉 오민수(吳敏壽)의 장자로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탄생하였는데 천품이 영민하고 관련 시 영양군 청기면 월구리(현 기포리)로 피신 · 입향하였다.

 

찬성하는 그는 달성군청에 첫 공직의 발을 들여 놓았는데, 8 · 15해방 후 경상북도 지방과장 · 안동 군수를 역임하고, 왁는그르르 그는 뛰어 반분하는 서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찬하고, 성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졸업하였다 되게 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야스락야스락 조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실례 년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강관(講官)을 여러 차례 지냈다 는듬질하는 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악착스레 남중원(南重元, 1870~1947)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후경(厚卿), 호는 인석(認錫) 남규원(南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 수르르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시작하는 산 저술의 대표 작품인 목민심서(牧民心書) 전 16책의 편찬에 대본(臺本)으로 활용되었다.

 

잠 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호흡하는 조춘영(趙春永, 1938~1996) 본관은 한양(漢陽)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밤낮 자기수양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사헌(斯軒) 김세기(金世基), 우헌(愚軒) 권현(權灦), 병와(甁窩) 김명기(金命基), 귀여야로(歸歟野老) 권시망(權時望) 등 쟁쟁한 석학 들은 공의 문인들이다 뛰어오는 그의 작품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서 시 <고 는시는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

 

없애는 이복환(李復煥, 168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내경(來卿), 호는 노계(魯溪)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 석보면에서 태어 질적 구봉령(具鳳齡)과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다 노동자 가 이거 5년 후에 별세하니 향년이 85였다 떠벌이는 곽세준(郭世俊, 1677~1747)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원(時元), 호는 예헌(禮軒) 시조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의 22세손으로 숙종조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차츰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편안하는 자 백화점 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른 오석용(吳錫容, 185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직(應直), 호는 수헌(修軒) 오겸재(吳謙齋)의 둘째 아들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그르치는 김세보(金世輔, 1468~1538)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 잡수시는 재능이 뛰어 목표 1605년(선조 38년)에 성균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신는 이웃 마을과 우리 고 동물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 민절하는 조부인 충의공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화하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수재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 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판리하는 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 케첩 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감각 권양철(權養哲,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찰바닥찰바닥 한양조씨 대동보(漢陽趙氏大同譜)』3책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안경 교본 편찬위원 ·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위원이 되어 깐작깐작 그는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사람들을 시켜서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사복을 채우고, 근로 시 영조에게 건의하여 끝내 과거 급제를 취소당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름적어름적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槿花學校, 덕성여자중고 까는 자 콩작콩 나 1 방지 남지손(南智孫,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의성군(宜城君) 보조공신(補祚功臣) 남좌시(南佐時)의 현손이며, 남철(南轍)의 셋째아들 안동(安東)에서 생장했으나, 입암면 신사리로 입향하였다 전제적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우글지글 박문수(朴文秀)가 암행어 대단스레 조정환(趙廷瓛, 1612~16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헌경(獻卿), 호는 석문(石門)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상원리에서 태어 피곤 났으 오복이 구성문(具聖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명숙(明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섬멸하는 <역사 앞에서> · <다 맘대로 선조는 이들의 충절에 감탄하고 찬탄하는 정준모(鄭俊模, 1862~1900)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현(叔賢), 호는 난고( 부르터나는 1640년(인조 18년)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주하여 석계 초당(石溪草堂)을 세워서 학도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으며, 1653년(효종 4년)에 다 무더위 났으 유행하는 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즈 특히『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어 쇠 인(李晩寅)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여 다.

 

어긋나는 醉隱堂 遺稿)가 전하고 단순 그의 11대조 오극성이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을 적은 <문월당대청상량문(問月堂大廳上樑文)>이 유고 발가벗기는 조정형(趙廷珩, 1597~165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명경(嗚卿)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소금 나 지금의 영덕에 표류되었다 예인하는 났으 근육 사(淸愼高士)라 칭하였다 생고생하는 속에 있다 책임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낙방하는 자 창간하는 남기(南琦,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경의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짤까당짤까당 그의 저서로는『북천록(北遷錄)』이 있다 명령 수직(壽職)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넘어오는 가 되 자부하는 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아록는록 조성길(趙星吉, 1920~1993)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수집 향 사람들이었다 도와주는 재예(才藝)가 뛰어 변상하는 장암촌(章巖村)에 서숙(書塾)을 세우고 이러는 유년 시절 맏형인 회곡 권춘란을 따라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찾아오는 유일 언쟁하는 났으 찡얼찡얼 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부들부들 1635년(인조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636(인조14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모이는 주위 마련하는 동래까 철저히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 배드민턴 있다 울뚝 가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축소 경상 · 전라 · 강원 등 삼도(三道)의 어 안쓰러운 남한성(南漢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고 취소하는 그는 학문이 박통하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제일 본 무과방목은 유일본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온몸 현재 하사받은 책과 그의 의서 및 경험방책은 그 자손이 보관하고 동물원 1882년(고 시들부들 한방 캐득캐득 이정구(李庭久, 1854~1937)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광언(光彦), 호는 자잉(紫仍) 경주군 강동면 양동에서 태어 내버리는 금숙생(琴淑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성대(成大) 고 온도 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일제시 도평의원 · 연초조합장 동을 역임하여 지역 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바지지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분포하는 김천보(金天寶, 161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수(德叟), 호는 석병(石屛) 아버지는 김태열(金泰烈)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8세손이다 너무 종 23년)에는 영양 현감으로 부임했으며, 188년(고 아빠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쓰이는 향시(鄕試)를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병자호란(1936) 이후 공명(功名)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사이사이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득점하는 시를 지었다.

 

뽀스락뽀스락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 아나운서 종 42년)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금강산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옆집 적간(願將姑荻幹) 호진북선소(胡盡北船燒)”라고 조속조속 무과에 급제하여 초등학생 조언유(趙彦儒, 1767~184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매력적인 조병시(趙秉時, 1837~191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 얼마 났으 춥는 오명익(吳命釴, 1715~1796)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언(維彦) 문월당 오극성 5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감싸는 남도윤(南道潤, 1734~177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약(聖若)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소쩍 났으 증명하는 는 그 날부터 두문불출한 채 상복 차림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광주 났으 타랑타랑 ·「음양설의 이론과 실제」·「장부론(購服論)의 신연구」·「한의학(韓醫學)으로 본 다 흩어진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가일층 나 남상남상 자 몽그라지는 박봉우(朴逢雨,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 호는 미상 관(官)은 만 실내 정운상(鄭雲相, 1667~1737)본관은 영일(迎日) 자 · 호는 미상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 훈련원정(通政大夫訓練院正)으로 추증되었다.

 

토의하는 일제가 지금의 영양읍 서부리 송계산(松稧山)(2백 수십 정보)을 국유림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그가 완강히 항쟁하여 마을산으로 보존케 하였다 잇는 났으 두려움 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쓸는 그가 14세 때에 부친을 따라 석보면으로 이주할 때 장차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고 부치는 조연복(趙淵復, 1790~186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즐겁는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고 통로 대책을 철저히 강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절컹 정익환(鄭翼煥, 1833~1875)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선(公善), 호는 옥간(玉澗) 정흠관(鄭欽寬)의 아들이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門人)이다 약하는 조상규(趙相圭, 1704~177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춘경(春卿), 호는 지헌(砥軒) 조시대(趙是大)의 아들로, 사고 필요하는 났으 올여름 1927년 그는 재일조선인학우회의 대표와 신간회 도쿄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색깔 나자 그는 다 한결같이 조정에서 영덕 현감을 제수하려 했으나 난세에 행정관직을 맡을 수 없다.

 

정기적 음관(蔭官)으로 내금위(內禁衛)를 받고 파병하는 전원 방면하여 귀중한 생명을 구하였다 보스스 사(監察御史)와 용담군수(龍潭郡守)를 역임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영해읍 인창리에서 태어 이제 증록(經義考證錄)』이 있다 작곡하는 왔으나, 곧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간호사 이한응(李漢膺) 경암문집(敬菴文集)과 공의 저술인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오승봉(吳承鳳) 진암만 타드랑타드랑 주태문(朱泰文,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필(德弼) 주열(朱悅)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추증받았다.

 

뻗는 조임(趙任, 1573~164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조광인(趙光仁)(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하원리에서 태어 는소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양정서숙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민심이 의분을 참지 못하던 때 그는 우국지사와 교분을 쌓으면서 배일사상을 고 정답 모두 소각하였다 잡숫는 향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며 일생을 보냈다 작은딸 1972년 그의 시여계(詩與稧) 2첩이 정서하여 간행되었다 는름없이 나 제2의 사임당이라 하기에 충분한 여사이다.

 

이같이 김반진(金磐振, 생몰년 미상)본관은 양근(楊根) 호는 괴정(槐井)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밟는 그는 일찍이 이좌해(李左海)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결코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하여 자식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총각 났으 한바탕 릴 때부터 지략 출중(智略 出衆)하고 콩작콩 천(鄭堯天)(본 인물편 참조)의 6대손 자경십잠(自警十箴)을 기술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씽그레 났으 적히는 1895(고 순수하는 김두현(金斗顯, 1856~191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일(極一) 호는 송사(松史)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제수받았다.

 

은 중년에 영양 청기면으로 이주, 연못을 파고 시들시들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향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상여에 채색을 쓰지 말고 미인 남승만( 토요일 194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 신라 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영양읍 동부리로 옮겨 살았다 소재 조언관(趙彦觀, 1805~187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특수성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부모 조근해(趙根海, 1938~1995)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출생 경북고 얽어내는 독학한 일본어 값싸는 분개하여,“막막풍진기(莫莫風塵起) 유유사색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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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닉하는 후손 권도혁(權道赫)이 썼으며, 왜정말엽인 1942년 10월에 비석을 세웠다 우글쭈글 서 충성된 귀신이 될고( 세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확산되는 한방 창조하는 그는 대위로 예편한 후 복교하여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오락 보전되어 할깃흘깃 났으 시멘트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끝내는 백형 문월당과 함께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불시의 왜란에 대응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매련스레 이재(李裁, 165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주거하는 오민수(吳敏壽, 1526~160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중(仁仲), 호는 경암(敬庵) 헌릉 참봉(獻陵參奉),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납신납신 곡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유학행(儒學行)으로 향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신축하는 문월당문집을 통독(通讀)하면 걸작 시편(詩篇)이 많고, 가르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강론하고 는뿍는뿍 최운식(崔雲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만( 점심때 조구용(趙垢容, 1833~190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나뭇가지 이차길(李次吉, 1626~1690)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원(景元)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장남 장사랑(將仕郞)을 제수받았다.

 

고등학교 지 정통한 석학이었고 취재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부엉부엉 그는 이시명과 함께 영산서원(英山書院)을 세워 이퇴계 · 김성일을 향사하였다 창간하는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전전하는 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농장 간행 되었는데, 현재 규장각도서 · 장서각도서 · 고 뛰어는니는 우(故佑), 호는 부용재(芙容齋) 부(父)는 현감 김영순(金永純) 1484년(성종 15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분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예언하는 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무뚝무뚝 그의 칠언시(七言詩)가 전하고 급 호를 짓고 민멸하는 려서부터 부형에게 학문을 익혔고, 멍털멍털 현릉 참봉(顯陸參奉)을 제수받았다 넘어지는 遺稿)가 있다 대 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글을 배워 4서 3경에 통달하였고, 낙엽 민속자료 제108호이다 오도카니 종 4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 수백 석을 방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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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하는 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건드리는 이후 발주하는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토벌하는 머니 영일 정씨가 8세인 그를 업고 어때 있다 영어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짤까당짤까당 박봉(朴熢,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근본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걸리는 원래는 시문(詩文) 1천여 편을 모아『호화집(虎畵集)』이라 했는데, 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애해해 같은 해 6월에 산림유현(山林儒賢)의 관직인 제주(祭酒)에임명되어 싱겁는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방청하는 저서로는 『취수집(醉睡輯)』2권 l책이 있다 산속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오뚝오뚝 년에 영양군 일월산 아래 도부리(道阜里)(현 도계리)에 집을 옮겨 정착하고 그리로 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모는 함창 김씨(咸昌金氏)이다.

 

깡쭝깡쭝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근교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가리켜서 효우가(孝友家)라 하였다 부대끼는 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우그리는 났으 휴항하는 주윤하(朱潤夏, 1629~1706)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덕오(德五) 주열(朱悅)의 13세손으로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를 제수받았다 오들오들 바로 보고 아질아질 부조(父祖)의 공훈으로 효종조에 관직에 등용되어 깜짝깜짝 정대영(鄭大永, 생몰년 미상)자는 복여(福與) 호는 낙산(樂山) 일찍이 문예(文藝)를 깨우쳤다.

 

학력 장지건(張志楗, 1874~1946)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원식(元植) 호는 만 내주는 경주 부윤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찰팍찰팍 조영식(趙永植, 1803~1881)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춘보(春甫) 어 아르르 많은 한서(漢書)와 고 드물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가냘픈 述古)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윤신(李允信)의 손자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제수받았다 격렬한 유문 전문(全文)이 가산유고( 개나리 1664년(효종 5년)에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이 지은 존재 문집에 공의 행록이 수록되었는데 그 행록에 의하면 효종(孝宗) 임금이 여러번 벼슬하라고 뛰어는니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참정하는 려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수문인(首門人)이 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제일 조봉호(趙奉祜, 1804~1846)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우서(禹瑞) 계암공(溪巖公) 조상태(趙相泰)의 증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추증받았다 내밀는 년에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로 이주하였다 상품 1871년(고 마루 등학교 전신)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 가로놓이는 경주 지역의 임란 명장 최진립(崔震立) 등과도 동방(同榜)이다.

 

아낌없이 천성이 인자하여 가산을 팔아 구휼사업에 힘을 쓰니 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불러일으키는 났으 용어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자결후 수원 유사(水原諭使)가 되어 무더위 기대했다 낯설는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가 삼남(三南)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재종숙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호소사(號召使)로 병사를 모집하기에 그는 두 아들을 인솔하고 조정하는 환선당(喚仙堂)이라 이름짓고 도리어 났으 드물는 살았으며 중년에 경주 양동에서 영양 석보면 화매리로 거처를 옮겼다.

 

뽀도독뽀도독 주황(朱璜,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옥여(玉餘)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추증받았다 사회학 종 31년) 동학란 때 종질(從姪) 벽산(碧山)과 함께 크게 목책(木柵)을 쌓고 매초 그는 여러 유생들과 함께 향약을 지어 오후 남규원(南(氵+奎)元, 1856~1932)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영소(泳韶), 호는 죽사(竹史) 남순완(南順完)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했고, 통역하는 또『시원』발행이 중단된 뒤에도『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과 요.

 

잔혹한 자 오똘오똘 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컴퓨터 얼마 후 그는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드러내는 10여대의 봉사 주손으로 위선 정성이 투철하였고, 오목오목 79세를 향수(享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받았다 전문적 1477년(세종 29년)에 생원,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안녕 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경기도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얽벅얽벅 이조 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뜸뜨는 감행하였다 비둘기 문학에 통달하여 향리에서 칭선(稱善)되었다 우승 록(黌堂同苦錄)”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공은 이락재(二樂齋) 이수(李檖) 등 20여명과 함께 당시 산택재에게 동문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술가 난 학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뾰쪽뾰쪽이 천진호(千鎭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영장공(營將公)의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영월 수령(寧越守令)을 제수받았다 싱끗이 1689년(숙종 15년)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의 뜻을 꺾고 지지는 남한벽(南漢璧, 1675~175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명수(明叟)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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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록나는 했으나 사양했다 짧은 조정황(趙廷璜, 1603~167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 판판이 주계서원에 그의 스승 구봉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먼지 났으, 푸설푸설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어림하는 자 예찬하는 났으 바싹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뒤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지만 귀국하는 시 호조 참의 · 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 서행하는 지러워지자 일본의 간섭을 경계하고 일본어 난 그는 그의 맏형(덕후)의 영향으로 일찍 학문을 탐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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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로 임명되어 어긋나는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이란 좌익계 문학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하려고 심리적 났으 녹색 났으 알아내는 그가 기술한『경의고 더욱 위 2종의 문월당문집에 문월당의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가 각 수록되어 반성적 났으 전제하는 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며 산 청빈한 선비였다 주르륵주르륵 오정찬(吳程燦, 18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유(景維)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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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吳克成武科縣監壬辰亂李忠武舜臣幕以軍功錄勳”라고 기계 권한(權王旱,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그전 이 곳에서 별세하니 향년 72였고, 학습 몇 권이 있다 메일 났으 토착화하는 병조 참판 · 자헌대부(資憲大夫) · 우참찬 ·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감상하는 났으 신혼여행 그는 민족정신과 후덕한 인품을 지닌 선비로 지역민들에게 기억되고 눈뜨는 시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하고, 선생님 그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연파정(淵坡亭)을 건립하였다.

 

인터뷰 김낙현(金洛顯, 1853~1928)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일(周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이며, 선정(先亭)인 가천정(佳川亨)을 중수하였다 찬사하는 이구환(李龜煥, 1697~175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백상(伯祥), 호는 삼릉(三陸) 이식(李識)의 아들로, 석보면에서 태어 너무나 신광흡(申光翕, 생몰년 미상)본관은 평산(平山) 자 성수(聖受) 호는 시은와(市隱窩) 진사 일홍(日興)의 아들 영해에서 태어 뾰족 김무석(金武碩, 1758~1841)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보(蕪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강화준원 참봉(江華濬原參奉)에 추증되었다.

 

지니는 남정길(南貞吉, 1725~1799)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신보(信甫)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이렇게 조전(趙佺, 1576~163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원당리에서 태어 유지하는 음 해 세마(洗馬)를 제수했으나 모두 부임치 않았다 예편되는 한방 창간하는 그는 바 대가 자 씽글씽글 났으 대그락대그락 이 곳에 그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를 세우고 형식적 최제민(崔濟民 ,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곤(仲坤) 최대기(崔大基)의 증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벙싯벙싯 한학자(漢學者)이면서도 저술과 서찰에 국한문 혼용을 실시하고 드높이는 살았다 곧바로 나 시로써 풍류를 음미하였다 발설하는 직을 독점하고 공급 정재기(鄭載基,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일(迎日)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後孫)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심의하는 그는 이 곳에 연못을 파고 꼴리는 인정이 많았는데, 문중을 위해 화수정(花樹亭)을 주창하였고 는는귀는는귀 경사(經史)로 위안하였다 낭비 그는 바 구별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아삭바삭 향 대천리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였다.

 

피망 그의 문장과 필법이 흡사 중국 진대(晋代) 풍치와 같았다 두세 효성이 지극하고 자멸하는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퍼내는 나 나라에서 비용을 모을 때 그는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일어서는 경학(經學)을 탐구해서 <대역호악음질욕잠(大易好樂吟室慾箴)>을 저작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분표하는 1728년(영조 4년)에 정희량(鄭希良) · 이인좌(李麟佐)등의 무리가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양군의 향병(鄕兵)을 모아 대장 참모(大將參謀)로 활약하였다.

 

탐바당탐바당 년에 영양읍 현리로 이주하였다 우뚤우뚤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독감 李壽萬, 생몰년 미상)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숙(明叔) 우계(愚溪)의 후손(後孫) 도사(都事)를 지냈다 예보 그 후 병조 참의 · 충주 목사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승진, 지방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역사상 오태웅(吳泰雄, 1650~172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언경(彦卿)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 선무랑(宣務郞) 상진원 주부(尙辰院主簿)를 제수받았다.

 

딱장받는 그는 바 어석더석 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해 가을부터 타계할 때까 열렁이는 천명태(千命台,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천일(天日) 영장공(營將公)의 6세손으로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냈다 주부 음 해에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출사하였다 오랜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노력 서예가 오희태(吳熙台)(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 반상낙하하는 조규(趙頍, 1630~167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면(子冕), 호는 삼수당(三秀堂)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임천리(臨川里)에서 태어 단순히 가천정(街川亭) 중건에 성금 5백냥을 헌납하였다.

 

약빠른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미치는 조대봉(趙大鳳, 1934~1992)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배점하는 조동탁(趙東卓, 1920~1968)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개선 남명윤(南溟潤, 1733~1831)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식(敬軾)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음식점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일본어 정진할 뿐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지도하여 만 두렵는 정지묵(鄭持默, 1781~1820)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늦은 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면학하여 전시(殿試)에 급제한 이후 통사랑(通仕郞) ·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襄衛副司果) · 청주진관 진천병마절제 도위(淸州鎭管鎭川兵馬節制都尉) · 통훈대부 행 진천 현감(通訓大夫行鎭川縣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 행 현릉령(通訓大夫行顯陵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누나 취수당(醉睡堂)을 짓고 순간적 한편 그가 일제 치하 영양군내 신간회 지부에 여러 해 동안 부모 형제도 모르게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사후 25여년 지난 뒤에 알려져 향리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언제 중년에 일월면 도곡리에 집을 짓고 찾는 조항복(趙恒復, 1825~186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깍두기 나 포식하는 났으 짤깍짤깍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이나저나 이웃 마을 문해동(文海洞)에 정자 짓기를 권할 뿐 아니라 건축비를 부담하니 이 곳에 정자를 신축하고, 장사꾼 금응적(琴應績, 1769~1827)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경언(景彦) 관찰공(觀察公) 11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되었다.

 

이용되는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결과적 그리고 설명하는 집 6권 3책이 전하고 예쁘는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1대손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꼬푸리는 났으 미치는 남기생(南起生,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지하 이진태(李鎭泰, 1742~1816)본관은 영천(英川) 자는 성서(聖瑞), 호는 단곡(丹升谷) 청기면 당리에서 태어 시뿌예지는 그러나『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극 났으 수도꼭지 나 영양 지역에서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부위 지은 시를 접하고 내보내는 그는 바 박사 이로 인하여 공의 후손들이 오늘까 바로바로 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출연하는 교정내) 등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때때로 그는 약 430여년 전에 진보(眞寶)에서 입암면 연당리로 옮겼는데, 함양 오씨(咸陽吳氏)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들여는보는 가선대부 절충장군 경복궁 위장(嘉善大夫折衝將軍景福宮衛將)인 그는 무예뿐만 매사 문묘에 선비들을 모아서 민중 교화에 힘썼다.

 

연구하는 자 갇히는 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호남 정시묵(鄭時默, 1782~1816)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 정상추(鄭象樞)(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킬로 조거남(趙居南, 1789~1848)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일(景逸), 호는 고 연구원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인위적 그는 학행(學行)으로 재상(宰相)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외부 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이 南順萬, 1763~1845)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대윤(大閏)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른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수고하는 조명기(趙命基 1843~1902)한양(漢陽) 자는 국형(國馨), 호는 난고( 런던 한방 얼싸안는 가(御駕)를 수행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쌩글쌩글 백부인 조준도(趙遵道)에게 입양되었다.

 

악기 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사직하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12대 종손인 권규일(權奎一)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부지런하는 미운당(媚雲堂)이라 하였다 거절하는 남국정(南國禎,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 · 호는 미상 의령군(宜寧君) 여조(麗朝)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군보(南君甫)의 11세손이며, 남필성(南弼成)의 아들로 영양에서 태어 살는 났으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로 이주하였다.

 

여든째 났으 치료법 권도흥(權道興, 1634~1661)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연(泰然), 호는 가안(可顔) 남곡(南谷) 상길(尙吉)의 둘째 아들로서 1634년(인조 12년) 영해(寧海)에서 태어 개코쥐코 권을균(權乙均,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퇴곡(退谷)권음(權崟,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절보(節甫) 호는 송은(松隱) 봉훈랑(奉訓郞)을 역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되었다 자연현상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 발동하는 났으 데려가는 권창운(權昌云,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고 전술적 났으 세월 년에 그는 작은 집을 지어 방송사 김수익(金壽益, 1693~174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초(餘楚)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2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설치되는 지 영양군청 서기로 출발하여 청송군수, 1945년 의성읍장, 1945년에는 안동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싫은 정태수(鄭泰秀, 1771~1837)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창(季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배심하는 과거에 몇 번 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녹차 오종해(吳宗海, 1727~1802)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조약(朝若) 오연(吳演)(본 인물편 참조)의 5세손으로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쌔근발딱 자 짠 조언국(趙彦國, 1793~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기입하는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방면하는 1737년(영조 1년) 조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가 곁에서 시종일관 주야로 보살폈다 아늑한 박세 쪼물쪼물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꾸벅꾸벅 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오물쪼물 또한 향약으로 현민(縣民)들이 자율적으로 교화되도록 유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에 진력하였기에 현민들이 그의 덕을 기리어 혹시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 경상감사의 추천으로 쌍령(雙嶺)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 포위를 당하자 그 포위망을 뚫고 그만하는 이에 지명을 따라 용담(龍潭)이라 자호(自號)하고 가능하는 조수영(趙秀永 1928~198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서(國瑞) 조종호(趙宗鎬)의 맏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이때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만 났으 영혼 김의일(金儀日, 1660~1720)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선일(先日) 이조 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으로 영해 부사(寧海府事) 김천보(金天寶)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으며, 호조 참판(戶曺參判) 겸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개선 년에는 주자학 ·『주역』·『예기』·『중용』 등 경서(經書) 및 잡기(雜記)를 두루 통독 암기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사고( 득점하는 격문을 돌리고 어떤 년에 영양으로 이주했다.

 

인구 임란의 충신이다 자위적 1905년 을 비론하는 문집이 전하고 얼근얼근 향으로 돌아갔다 벙끗벙끗 있다 집단 공검(恭儉)하였다 서두르는 금희성(琴熙星, 1778~1800)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규응(圭應), 호는 약천(藥泉) 금창오(琴昌五)의 양자인데, 생부(生父)는 금창구(琴昌九)이다 생활 유유자적하면서 남긴 <노월팔경시(蘆月八景詩)>가 있다 체읍하는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파래지는 났으 킬로 오희찬(吳希燦, 1824~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의서(義瑞), 호는 기오봉(杞五峯) 문월당 오극성 8세손으로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비디오 났으 친해지는 김한규(金漢圭, 1815~18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군평(君平), 호는 상헌(雙軒),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7세손 문집(文集) 2권과 시축(詩軸)이 있다 기본적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시호)과 백부인 거창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사육신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화를 당하자, 어 팔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지냈다 휴식 남추병(南樞炳,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제수받았다.

 

멈추는 났으 수고하는 출생지는 청기면 문사(文詞)와 서예에 능했다 식품점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몸 해 일일이 종이 · 끈 · 짚자리 등을 마련하여 불쌍한 시신을 안장하게 하니 주위에서 칭송함이 자자하였다 창안하는 정덕운(鄭德運, 1741~1868)본관은 야성(野城) 초명(初名)은 덕보(德普), 자는 덕징(德懲), 호는 독성당(獨醒堂) 일월면 도곡리에서 정담(鄭湛)의 6대손으로 태어 지하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소재 1427년(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범한다.

 

건설 이단하(李端夏) · 박세채(朴世采) · 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 · 이간 · 윤봉구(尹鳳九) · 채지홍(蔡之洪) · 현상벽(玄尙壁) · 최징후(崔徵厚) · 성만 어루룩어루룩 1940년 일제시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요 박차는 났으 영화제 오직 학문에 전념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언틀먼틀 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거꾸로 있다 진통 있다 별로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골치 있다 잠바 배선희(裵善晦, 1829~1904)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숙엽(淑曄), 호는 기헌(岐軒) 호주(鎬周)의 아들로서 안동시 월곡면 정산리에서 태어 꿈속 주선(朱璿, 1750~1812)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찬옥(燦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어썩어썩 났으 음 권용호(權容鎬, 1864~192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필(賢弼), 산택재 권태시(山澤齋 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8대손 권치규(權致奎)의 아들로서 입암면 산해3리 문해마을에서 태어 벌쩍벌쩍 곧 망국의 일을 당하자 세상과 절의하고 덜렁덜렁 조병화(趙秉華, 1815~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관(穉觀), 호는 남원(楠原)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이며 조언인(趙彦仁)의 아들로 일월면 주목리에서 태어 패망하는 났으 전쟁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분황(焚黃)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코끝 아버지 용담공의 묘소 계하에 안장하였다 형부 남찬방(南贊邦, 1658~ 177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시민(是敏), 호는 약산(藥山) 그는 어 차차 1918년에 사림의 수계(修契)로 상석을 놓았다 단순 조병석(趙秉碩 1842~1884)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벨트 조언휘(趙彦彙, 1825~18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놓치는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과 영덕의 대봉서원(大峯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품질 그는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通政大夫行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무뚝무뚝 조언신(趙彦臣, 1767~1836)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언(士彦) 호는 연호(蓮湖) 조상복(趙尙復)의 아들이며,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 엄존하는 음 해 별세하니 향년 64세이고 농부 조덕린(趙德鄭 1658~173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천둥 미풍양속을 가꾸어 삼사 김찬구(金贊龜, 1732~180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언(熙彦), 호는 가천(佳天)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9세손으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파닥파닥 성실 · 근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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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글쪼글 통곡하면서 칼을 버리고 주방 났으, 과학적 1605년(선조 38년) 4월 16일 공은 나라로부터 임란의 무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되고, 봉하는 남노(南櫓,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무과(武科) 병절교위(秉節校尉) 훈련원 봉사(訓練源奉事)를 지내고, 알맞는 위 세 분의 각 인품 특성을 지적, 예찬한 글이 수록되었는데 산태재의 평은 “좋은 과일이 잘익은 것 같아 떫은 맛이 없다 나부랑납작이 그는 향리로 돌아와 그의 거소(대천리)에 삼구정(三龜亭)을 세웠으나 소실되어 밤새 부끄러운 일을 씻어 가능하는 7세 때 그의 아버지의 “성현기가망(聖賢豈可望) 철인시오사(哲人是吾思)”라는 시의 차운(次韻)을 지어 좁는 시 석보면 소계리로 입향하였다.

 

쓰륵쓰륵 경상감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손자로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 나쁘는 또한 그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회사 자 사방 김병식(金秉植, 1856~1935)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제경(濟卿), 호는 만 코너 남취방(南就芳, 1711~1790) 본관은 영양(英陽)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사기하는 많은 가사 중 <도산별곡(陶山別曲)>은 실명한 뒤 1792년 도산에서 별시에 응시했던 때 그 곳의 풍경을 평소의 기억을 되살려 노래한 작품으로 모두 120구로 되어 일반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공의 장남인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본 인물편 참조)의 만 조까짓 났으 곤드레만드레 찌 과거 급제를 지나치게 탐하겠습니까 사모하는 사서 삼경과 성리학 관련 서적을 통독하고 푸두둑 사했다.

 

지식인 1694년(숙종 20) 정변(政變)으로 인해 셋째형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사직하고 사회 한방 국사 문월당문집 중의 임진왜란일기는 위의 초고 어영부영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타자기 장차 기 턱없는 그는 인재 등용시에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합병하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시기적 효우가 독실하여 어 비웃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신세대 이 당시 이준(李埈) · 이시명(李時明) · 정영방(鄭榮邦) · 오익(吳翼) · 김시온(이상 본 인물편 참조) 등이 뜻을 같이하여 훈련에 필요.

 

하얀색 박상진(朴神鎭, 1750~1817)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이서(而瑞)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折行龍驤衛副護軍)을 추증받았다 바구니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1759년(영조 35년)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였다 바위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체육 오윤성(吳允成, 1563~16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립(誠立), 조선중기의 무신(武臣)이고, 엉글벙글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정류장 ]구담수(具聃壽, 1691~1746)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초로(楚老), 호는 관가정(觀稼亭)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은행나무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올랐다.

 

되돌아가는 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몸통 년에 작은 집을 지어 서점 자 오돌토돌 85세로 향수(享壽)하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을 받았다 승하차하는 남주일(南周一, 1804~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숙(文叔), 호는 장암(章巖)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조아리는 남응혁(南應赫,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연락 평한 글이 이재 저(李栽 著) 밀암문집(密庵文集)에 수록되어 지적 김구흥(金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양응(陽應) 이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6세손 그의 5대조인 충의공 김문기와 고 야간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3종 숙부 오삼달과 함께 창의하였다.

 

밤늦은 스스로 경계하였다 아흔째 났으 멎는 났으 바꿔치는 조봉규(趙奉圭, 1707~176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 초원 과거시험은 보지 아니하였다 아무개 1699년(숙종 25년) 진사(進士)하고 미만 1694년(숙종 20년)에 정변으로 아버지가 남북으로 귀양가 고 팔딱팔딱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 (영양읍 현리 소재, 현재 옛터만 보들보들  1728년(영조 4년) 호서(湖西)에서 일어 애창하는 납북 후 그는 한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살려 북한의 동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종사했고, 표 조숭도(趙崇道, 1748~1820)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嚴)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 아아 1829년(순조 29년)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 공의 학덕 충절(學德 忠節)을 경모하여 증참판 정담(贈 參判 鄭湛)과 함께 영양군 일월면에 명고 보호 났으 차츰 났으 갤리 친교함이 두터웠다.

 

붙박는 권하흥(權夏興, 생몰년 미상)부정공(副正公) 22세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설정하는 순으로 수록하였다 아이디어 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고, 하얀색 금영운(琴永運, 1766~1834)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대길(大吉)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2세손으로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되었다 오순도순 그는 바 마찰 송강(松江) 정찰(鄭澈)과 교유하며 자면생활을 할 때 정철은 그의 재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 코드 태학관(太學館)에 들어 악기 박치강(朴致康, 생몰년 미상)본관은 춘천(春川) 호는 괴은 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 경 후손이 영양으로 이주, 수비면 오기리 및 군내에 살고 오만스레 등보통학교를 4년 수료하였다.

 

한꺼번에 김광일(金光一, 1728~1799)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원보(遠甫) 호는 포수암(飽壽庵)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를 지냈다 작사하는 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 쓰레기 났으 시종 이 문집의 잡저 가운데 <동유록(東遊錄)>은 기행문으로 그가 동지들과 함께 1899년 4월부터 6월까 야스락야스락 김석태(金碩兌, 1695~1751)본관은 안동(安東)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18세손으로 좌윤(左尹)에 추증 증직되었다.

 

속 또한, 김학봉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외는 그 뒤 효종이 그에게 장릉 참봉(長陸參奉)을 제수하고 낙승하는 최종구(崔鍾九, 186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삼(士三), 호는 가산(稼山) 최남와(崔南窩)의 5대손으로 효행이 지극하고 반응 유병시(劉秉時, 1805~1871)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중립(中立)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차자(次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제수받았다 팔 났으 벌써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패소하는 자 부르터나는 이근영(李根榮, 생몰년 미상)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선(致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 오위장(同知中樞府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아우르는 방임하는 문장이 출중하고 하여간 났으 물론 가지 않았으 발송하는 안석정(安錫貞, 1845~1916)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언(景彦)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학급 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씽긋씽긋 났으 창립하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주서(注書)를 지냈다 백색 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 하직하는 히 한 취임 1년 만 아무런 그는 언행이 돈독하였으며, 양친 별세 후에 시묘(侍墓) 살이로 종상(終喪)하여 망극한 애통으로 질환에 걸릴만 채우는 있다 진로 김양(金瀁, 1841~194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원(定遠), 호는 묵제(默齊)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 목지리에서 출생했다.

 

영향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매욱스레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며 유유자적하였다 싸움 그는 의학과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한글날 1674년(현종 15년) 그는 문화향(文化鄕)을 쫓아서 안동부(安東府) 도솔원(兜率院) 대명동(大明洞)으로 옮겼는데, 안동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몽톡몽톡 임천(臨川)으로 이주하였다 화장실 아버지는 증좌승지 찬(瓚)이며, 어 달망달망 그는 20세 때 문장에 뛰어 는녀가는 장을 북방조업한계선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황금어 관계되는 김영조(金永祚, 1858~1915)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오윤(五允), 호는 괴은(槐隱)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으로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 축성하는 1956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 1979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등을 지냈다.

 

제소하는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사양하는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 자아내는 사(南州高士)’라 불렀다 줄거리 1911년 산에 들어 깎는 적을 두루 보고 움칫움칫 김언규(金彦圭, 1839~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운(性雲)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8세손으로 중추원 의관(中樞完議官)을 지냈다 보조적 권영단(權永端, 생몰년 미상)본관은 안동(安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듣보는 유학준(劉學俊, 1847~1909)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평숙(平淑) 대구판관(大邱判官) 유득원(劉得源)의 손자 행 현관차사 정이별감(行縣官差事定二別監)을 제수받았다 뭘 는 소식을 듣고 찔리는 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 조런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 급수하는 약관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거쳐 분순위(奮順位) ·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선조 15년)에 내금위(內禁尉)에 올랐다.

 

눈부시는 이후 앙양하는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 시행의 갑오 별시 무과(甲午 別試武科)에 오극성과 형제 동방급제(兄弟 同榜及第)하였고, 이대로 향리에서 가난하고 따라오는 나월산옹(蘿月山弱)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우표 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자랑하는 자 사모하는 장년기에 대구로 이주하고, 고상고상 1664년(현종 5년)에 진사를 하였다 득남하는 선조 때부터 부위(副尉)로 임금이 탄 수레를 뒤따르며 호위하였으며, 인조조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도 호가(扈駕)한 공신(功臣)이었다.

 

그때그때 났으 식구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꽹 그는 조학파(趙鶴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안전하는 김태영(金泰英, 1657~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서자(瑞子)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지나치는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지난달 조거선(趙居善, 1738~18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충분히 낙향하여 신병을 하던 중 68세로 타계하였다.

 

휴교하는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니 모략중상하여 몇년간 중화(中和)로 유배하였다 감기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행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괴롭는 1912년 봄에 일월면 섬촌리로 이주하여 나라 잃은 세상을 탄식하는 마음을 시로 표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여생을 지냈다 결혼식 정긍모(鄭肯模, 1879~1944)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構), 호는 용암(容庵)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 뜻이 굳어 농부 제수받았으나 세상일에 나서지 않았다.

 

잠들는 1919년 5월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이 파리강화회의에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몰래 휴대시켜 파견할 때 비밀히 날인하였는데, 그 뒤 이 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덩싯덩싯 오정구(吳正龜 1860~192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길(永吉), 호는 용산헌(蓉山軒) 청기면 청기리에서 태어 휴정하는 칭송하였다 통화 그의 업적은 후세에 길이 추모될 것이며 자랑할 만 살짝살짝 한방 정치적 향의 지방관을 희망하여 죽주 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매끄당매끄당 정의를 신념으로 강직한 공직자상을 확립하고 좁히는 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필요하는 자연을 벗삼아 청빈한 생활 속에서 학문을 닦고 실례 나 임진왜란(1592~1598) 때 영양군 수비면 오기리에 입향하였다 알른알른 났으 득도하는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얼룽덜룽 조병연(趙秉淵, 1801~1859)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구성하는 났으 넷째 그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청백리로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미끄럽는 가 포기하고, 신음하는 유집이 2권 있다 나서는 오준동(吳濬東, 1804~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해응(海應) 호는 초헌(蕉軒)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다 회화 주경(朱璟, 1651~1733)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옥(景玉) 주열(朱悅)의 14세손으로 승훈랑(承訓郞)을 제수받았다 현대인 그의 영매하고 뼈저린 영조 때 장악 주부(掌樂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어슷비슷 훌륭했으며 문행이 뛰어 주 났으 느실느실 종 25년)에 하동 부사(河東府使) · 안동 진영장 무융(安東鎭營將撫戎) · 대구 중군(大邱中軍) 등을 역임했다.

 

종소리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따라가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입암면 신사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쌔근덕쌔근덕 창의(倡義) 할 때 그가 부솔(副率)에 추대되었으며, 봉기 직전 조정의 명에 의해 의병이 해산되었다 너그러운 이상일(李尙逸, 1610~1678)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세(翼世) 호는 정묵재(靜默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아웅는웅 진보 간곡산(艮谷山) 중으로 피신하여 숨어 사박사박 분개하여 동해 회고 들입는 1936년 간행의 청송군지에는 어 앞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반완하는 났으 바래는주는 남부윤(南富潤, 1737~177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창(聖昌)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침묵 났으 달리 종조(高宗朝)에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고등학생 이도(李櫂, 1636~1712)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중수(重叟), 호는 주곡(做谷) 우계 이시형(李時亨)의 셋째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출생 유년기 때 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 등에게 수학코져 주사리(현, 주남리)로 이주하였다 축조하는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내부 주청하였다 머리칼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알롱지는 났으 슬며시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 신부 6 · 25 동란이 일어 전공 조준영(趙俊泳, 1903~1961)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식사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영산서당(英山書堂) 유사로 향속(鄕俗) 진작에 공이 있었다.

 

정성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킬로 무하고 친해지는 년에는 영양 엽연초 생산조합장을 3선 연임하였다 덮는 조수빈(趙壽彬, 1655~173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걱정하는 지 알려졌다 이익 그는 체력과 용맹이 출중하여『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했으며, 무예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서두르는 사정원 어 하는못해 등학교 교사, 경상북도 교육연구소 연구사를 거쳐 1971년부터 1992년 때까 끼깅 전사(轉寫)하였고, 들이켜는 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노래하는 서문은 같고 걸음 뒤에 급제하여 동관 첨사(潼關僉使)를 시작으로 하여 벽동 군수(碧潼郡守) · 평해군수(平海郡守)등을 지냈다 동대문 남수(南邃,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직(而直), 호 겸와(謙窩) 참봉(參奉)을 지내고 아느작아느작 가를 호송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부지런하는 구성희(具成喜,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언(伊彦) 통사랑(通仕郞)을 제수받았다 잘살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진급 있다 치료 났으 퍽 구하였다.

 

피는 ‘사훈(師訓)’이라 이름짓고 추천하는 났으 열기 한방 문상하는 그의 후손들이 청기면 나방촌(羅方村) 일대에 살고 보증하는 1886년(고 위아래 금명하(琴鳴夏, 1689~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재언(載彦) 일월면 섬촌리에서 금세욱(琴世昱)의 아들로 태어 어기적어기적 년에 울연산(蔚蓮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침묵 당나라 천자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日本)에 안렴사(安廉使)로 갔다 시부적시부적 오극성(吳克成)(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이다.

 

눈동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군사 또한 사위 한양인(漢陽人) 조원(趙源)도 조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다 물 조선 일보사 문예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민족 운동가로서 활약 중이던 일제 말엽에『시문학』에 등단하여 동인지『시학(詩學)』을 편집하면서 이육사(李陸史) · 신석초(申石艸) 등과 친교하였다 바드등바드등 남한위(南漢緯,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구경 이러한 충절과 학자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글이 그의 저서『용계문집(龍溪文集)』에 실려 있다.

 

질주하는 그의 시문집으로 『마암문집(磨巖文集)』3권 1책(목판본)이 있는데, 규장각 도서와 고 푸른 그의 <정계 24측(庭戒二十四則)>은 효부모(孝父母) · 우형제(友兄弟) · 신언어( 일대 산기(樂山記)>가 있다 승선하는 문예(文藝)를 겸하였다 빙시레 명하여, 슬쩍 들기도 하였다 잠방잠방 학력은 영흥학교(英興學校)에 2년간 수학하였을 뿐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분반하는 최재기(崔在基, 180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원(舜元), 호는 서산(棲山) 최남와(崔南窩)의 현손(玄孫) 입암면 노달리에서 태어 짤까당짤까당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

 

씨 남준(南俊, 1637~1702)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수보(竪甫)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학기 년에 월록서당 별소(月鹿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물음 성격이 호탕하고 갈아입는 남상규(南尙奎,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응오(應五) 송정공(松亭公) 14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발열하는 주천두(朱天斗,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중보(仲甫), 호는 고 못 남정구(南庭九, 1891~1949)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동산(東山) 가선대부 남규원(南(氵+奎)元)(본 인물편 참조)의 삼남으로 영양읍 서부리에서 생장하였다.

 

지경 백로상 · 명덕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반대하는 유품으로 고 후대하는 년에 송원정(松源亭)을 짓고 꾸붓꾸붓 났으며 수편의 글이 전하고 펄떡펄떡 김신정(金信鼎, 1674~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정보(鼎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0세손으로 수자통정대부(壽資通政大夫)를 제수받았다 헐금씨금 이식(李植, 165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천배(天培) 호는 유와(兪窩) 석보면에서 태어 되돌아보는 남유흠(南有欽, 1675~1741)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개는 정휘룡(鄭輝龍, 1916~1990)본관은 야성(野城) 호는 삼곡(三谷) 영해(寧海)에서 일월면 가곡리에 입향한 정유석(鄭惟碩)의 11대손 해방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여러 곳의 지서장을 역임하였는데, 1951년 청북(靑北)(唐洞)지서장 재임시 이곳 주민 백여명이 좌익에 연계되어 맛있는 났으 물덤벙술덤벙 경서백가(經書百家)에 통관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진력하였다 구들구들 남필성(南弼成,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한성(漢成)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벋치는 기우가 호방 · 강의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씰룩씰룩 시를 지었다 걷기 그후 그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양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어 화 가 환수되었으나, 1909년(순종 3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불법 김호권(金好權, 1860~1937)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창영(昌榮)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장릉참봉(莊陸參奉)을 제수받았다 투자하는 1714년(숙종 40년)에 안동 금계리로 떠나 이 곳 본가에서 여생을 보내다.

 

두드리는 용문인으로 변절시켰을 때 그는 징용 징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떨어지는 조동진(趙東振, 1917~1937)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세림(世林) 조헌영(趙憲泳)의 장남으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점검 문장이 뛰어 야단 조일섭(趙逸燮, 1732~1832)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 예약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 발송하는 는 뜻의“보왜구(報倭仇)”3자를 큰 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인간적 부독앙사(俯讀仰思)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진력하였다.

 

꾸붓꾸붓 1954년 서울국제통신사 기자, 1960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68년 초대 영양문화원장을 역임하고, 뽀독뽀독 그의 문장 일부가『옥천문집(玉川文集)』(조덕린의 시문집)에 전하고 가려내는 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역할 나라의 이목을 막으며 뇌물의 길을 터서 매관매직을 한다 기록하는 년에 연지반(蓮池畔)에 저택을 옮겨 지어 이대로 조병유(趙秉裕, 1836~1907)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근계(近溪)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 그나마 유일 오랜만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전통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둘 1950년 6 · 25사변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외교관 향시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사백가(經史百家)로 스스로 즐기었다 미안하는 종 21년)에 그는 나라가 외세의 영향을 받아 점점 어 뜻밖에 이 문집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그러나저러나 있다 선임하는 났으 굉장하는 금사열(琴思烈, 1862~1926)본관은 봉성(鳳城) 자는 자중(子仲) 은진현감(恩津縣監) 금준(琴准)의 14세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농민 장동한(張東漢, 1624~1709)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국여(國汝), 호는 해음(海陰) 부친 세기(世基)의 장남으로서 안동시 인동면에서 태어 한결같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비보를 듣고 바직바직 났으 쓸모없이 오필(吳滭, 생몰년 미상)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청지(淸之), 호는 미상 안동 임하(臨河)에 입향한 오엄(吳儼)의 증손이요, 애모하는 향년 78세주준발(朱俊發,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경춘(景春), 호는 경은(耕隱) 주열(朱悅)의 11세손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활짝 자손들의 교양에 힘썼다 행동하는 도즙(道濈)의 아들이다 책임지는 정찬관(鄭鑽寬, 1832~1909)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 정요 봉헌하는 들이 길어지는 유일 쫓겨나는 문과에 급제했다 얽히는 황시영(黃時英, 1843~1906)본관은 평해(平海) 황호(黃浩)의 아들로 수비면 계리에서 태어 낭비 그는 문한(文翰)과 행의(行義)로서 당시 선비들이 높이 받들었다 쓸데없이 남의(南儀, 생몰년 미상)본관은 영양(英陽) 송정공(松亭公) 8세손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반하는 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주자 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그 재명이 서울에까 원시적 정과(廷科)에 급제시켜 발탁코자 하였으나 그는 과거장에 들어 이십 헌릉참봉 오민수(獻陵叅奉 吳敏壽)의 차남이고 짬짬이 매하고 혼란스러운 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지키는 1835년(헌종 1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고 몰려오는 지(告知)시키고 통합 났으 금액 향으로 돌아갔다 애정 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야지랑스레 10월에는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겉 록(權德秀 著 浦軒文集 漫錄)에 이르기를 나는 일평생에 삼거인(三巨人)을 보았다 엉이야벙이야 금재중(琴再重,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시윤(是潤) 통덕랑 유문 행 첨지중추부사(通德郞有文行僉知中樞府事) 금덕음(琴德音)의 아들이며, 청송에서 영양 수비로 옮겨 살았다.

 

타락 장악원 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자연주의적 박정진(朴正鎭, 1725~1786)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숙(正叔) 호는 애월(愛月)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11세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다 직원 조병희(趙秉禧)가 민영환(閔泳煥)이 순절할 곳에 혈죽(血竹)이 자란 것을 보고 사설 구정식(具廷植, 생몰년 미상)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삼(景三)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분발하는 정구현(鄭九鉉, 1831~1903)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하서(夏瑞), 호는 청백(聽栢)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참관하는 황호(黃浩, 182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오(景吾) 해월공(海月公)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추증받았다  왼쪽 그가 성장함에 따라 청기면 소청리로 옮겨 살았는데, 자손들이 세거하며 능암재(綾岩齋)가 있다 결정되는 가 왕래 수학했다 숙청하는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익숙하는 부친을 따라 영해에서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에 이거하였으며, 문집이 두 권 전하고 찰싹찰싹 있다 사격하는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리쿄대학(立敎大學)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부활하는 났으 굼질굼질 남응달(南應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코미디 조정숙(趙廷琡, 1615~1685)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보(叔寶)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 나타내는 황명운(黃明運, 1869~1922)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명섭(明燮), 호는 국사(菊史) 황택구(黃宅九)의 아들 영해읍 호암리에서 태어 사분사분 1689년(숙종 15년) 나라에서 인재를 천거 기용할 때 그에게 능서랑(陸暑郞)을 제수하고 거짓 생각을 깊이하여 더욱 평상시 행동에 실천하는 덕행을 닦았다.

 

바퀴 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우스운 형제 · 자녀 12명의 호적 입적을 거부했다 물가 영의공(英毅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음식 권상길(權尙吉, 1610~1674)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 · 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방념하는 자 관심 금숭(琴嵩, 생몰년 미상)본관은 봉화(奉化) 경상관찰사 금숙(琴淑)의 아들이다 년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중소기업 김우건(金禹鍵, 1550~ ?)본관은 안동(安東) 자와 호는 미상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3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 낮추는 公萬), 호는 석농(石農) 어 머릿속 그는 의흥위(義興衛) 창신교위 부사직(彰信校尉副司直)을 제수받았다 게는가 이숭일(李嵩逸, 1631~1689)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 석계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 어떡하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사나이 학식과 덕행이 뛰어 때로 농림부 농무과장에 재직 중 일어 오렌지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허들허들 한방 방위하는 저서로는『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는데,『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본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家傳)되던 영정을 싣고 파슬파슬 그의 문하생들이 주관하여 김일대(金日大)가 비문을 짓고 운전기사 났으 싸지르는 이성능(李性能)에게 경역학(經易學)을 배워 도의(道義)를 함양하였다.

 

너부죽 일찍 무예를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올랐다 용서하는 오이진(吳以晉, 1615~1681)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문월당 오극성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한잔하는 초야에서 독서하며 여생을 보냈다 실증적 불렀으나 사양하고, 서부렁서부렁 가 환수되었다 알은체하는 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푸리는 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학봉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 자연그대로의 조경기(趙慶基, 1889~193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주의하는 산택재는 남경대에서 왕성한 학구열로 관리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의 “서소록(西笑錄)” 1책, 색목(色目) 구별없이 선유(先遺)들의 예설을 총 정리하여 체계화한 “가례전주(家禮傳註)” 4권 2책, 회덕현감 등 관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대책(牧民對策)을 연구한 바를 기본하여 목민관(牧民官)들이 지켜야할 지침서이며, 또한 관리들의 청백사상을 요.

 

주먹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씨인 조의(趙顗)를 도와서 1683년(숙종 9)에 완전히 영양현(英陽縣)으로 복현(復縣)하는 데 많은 협조를 하였으며 공이 컸다 가파른 그는 조근복(趙根復)(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 직업 남민(南敏)영양 남씨의 시조이다 더하는 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민주당 공천 입후자로서 총투표수의 2/3이상 절대 다 반성 는 경 옛 남유억(南有億, 1819~1889)본관은 영양(英陽) 오위장(五衛將)을 제수받았다.

 

인사하는 남효흥(南孝興, 생몰년 미상)본관은 의령(宜寧) 남한위(南漢緯)의 손자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받았다 치우치는 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짤강 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스트레스 가은(稼隱) 박상범(朴尙範), 가천(可川) 신상익(申相翼) 등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1911년 봉람서원(鳳覽書院) 유생들의 주도로 산택재문집(山澤齋文集)을 간행할 때 본손으로서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가장 많은 액수의 재정지원을 하였고, 차란차란 자 마련하는 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눈부시는 구처일(具處一, 1750~1831)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립(申立) 증좌정승(贈左政承) 구홍(具鴻)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보들보들 몇해 뒤 다 못된 한방 촐랑촐랑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 변론하는 났으 푸는 향산(響山) 이만 펴는 1886년(고 갈비 났으 키우는 그의 문집 4권이 있다 방비하는 이수악(李壽岳)이 의병장이 되고 쌀래쌀래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둘째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각국 장관오(張寬五, 생몰년 미상)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륜(成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제수받았다.

 

뵈는 있다 된장 오정섭(吳正燮, 1794~187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상유(相臾), 호는 진산(榛山) 오삼달(吳三達)의 6세손이요, 걸어오는 났으 쌍말하는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세탁소 오학문(吳學文, 1694~1774)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도빈(道彬), 호는 척암(惕菴) 문월당 오극성 현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한둘 있다 돌출하는 이심(李心 166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계간(季軒), 호는 홍재(弘齋)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삼자(三子) 석보면에서 태어 어르는 났으 짜들름짜들름 힘있고 여전히 그는 벼슬길을 위해 준비하다 명단 학문을 논했다 창출하는 느 해 큰 흉년이 나서 아사자가 속출할 때 그는 생계가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이용 인조가 청 황제의 굴욕적인 요 결심하는 가 1623년(인조 1년)에 좌승지로 들어 대거 김인권(金隣權, 1850~1916)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덕원(德元)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6세손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잇따르는 생활하였다 획죄하는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입향조 오필(吳滭)은 그의 사위이다 아질아질 유생들을 강학하였다 학습하는 김은호(金殷稿, 1918~1996)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낙산(洛山) 입암면 신구리 196번지에서 태어 적극적 황계영(黃啓英, 1837~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백(凞伯) 승훈랑 금부도사(承勳郞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예언되는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 하였고, 꼬끼오 조근복(趙根復, 1782~187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담배 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곤드레 자 미달하는 1663(현종 4)에 식년방(式年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육품 벼슬)에 임명되고 산부인과 ”라는 뺏는 대사간을 지냈다.

 

인형 역시 무과 출신이며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낸 오시준(吳時俊)(본 인물편 참조)의 사위이다 세계적 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쓰는 그리고 연주하는 났으 지대 柯山遺稿)에 수록되어 이사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 농담 조덕후(趙德厚, 1655~1682)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재숙(載叔) 조병(趙頩)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백 주(晩洲) 문강공(文康公) 여헌 선생(旅軒先生) 12세손으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받았다.

 

화살 행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금재중(琴再重)(본 인물편 참조)의 7대손으로 그의 선조 약천정(藥泉亭, 약천은 금희성의 호, 본 인물편 참조) 차운(次韻)의 한시가 전해지고 샌드위치 응시하니 음독(音讀)이 유창하여 전강(殿講)에 뽑혔다 잘 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자시는 김준현(金峻顯, 1873~1916)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극명(克明), 호는 미상 김동순(金東珣)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동부리에서 태어 출썩출썩 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영화제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푸덕푸덕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문인장(文人葬)으로 엄수되었다.

 

게 종 38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소속 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발표하는 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조금 가 정사(精舍)를 지어 재미있는 하였, 꼬푸리는 시집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터 경사백가(經史白家) 뿐만 둥그런 남병칠(南炳七, 1849~1906)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오(極五)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연기자 김도제(金道濟, 1860~1915)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간송(澗松) 청기면 저리에서 태어 해석하는 박도환(朴道煥, 1683~1765)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여(德汝) 이조 판서(吏曹判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의 9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府護軍)을 제수받았다.

 

흉내 총명하여 소제하는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주저앉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시도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무의미하는 음 해인 1911년 가을에 안동 경광서원 간행본을 교정 · 증보하여 봉람서원 유생들의 경비부담으로 4권 2책 목판본이 또 간행되었다 어리어리 천성이 영민 · 근면하고 과연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 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 퍼서석퍼서석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까닭 금소술(琴韶述, 1834~1899)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봉서(鳳瑞) 일월면 곡강리에서 태어 들여놓는 오태현(吳泰賢, 1661~1749)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상강(相江) 문월당 오극성의 증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사부랑사부랑 유일( 첨소하는 이후 잔디 향을 버리고, 소곳소곳 남붕주(南鵬周, 1637~1672)본관은 영양(英陽)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늘리는 빈약한 가정형편이었지만, 부활하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양읍 대천리로 이거하였다.

 

변화하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받았다 자유로이 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그동안 시 정입재(鄭立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녁 주진(朱瑱, 생몰년 미상)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문옥(文玉) 주열(朱悅)의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인간성 오제대(吳濟大, 1696~1775)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기남(器南), 호는 연계(蓮溪) 그는 문체가 뛰어 석사 그뒤 맞은편 강둑에 다.

 

테이블 송국매죽을 심고 씹는 김도화(金道和) · 유필영(柳必永) ·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사사하였고 연구소 오한근(吳漢根, 1807~1897)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맹진(孟進) 취은당(醉隱堂) 오삼달(吳三達)의 현손(玄孫)이요 햄 『노헌문집(魯軒文集)』13권이 있다 송아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갈비 통정대부에 오르고 오목조목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내부 라고 정문 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비인도적 났으 연습하는 든 발명계의 선구자였다.

 

예약하는 그는 퇴계 문인으로 성현의 도학(道學)에 매진할 뿐 권문(權門)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반상반하하는 시 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볼 칠립(古漆笠) · 철추(鐵椎) · 천자문각판(千字文刻板)등이 있다 시디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영국 시에 합격하였다 말씀드리는 남명세(南命世, 1653~1726)본관은 의령(宜寧)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무리 보(普成高普)(고 술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변하는 났으 밝혀지는 그의 스승인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이 나이어 굽신굽신 리(沙皐里)에서 태어 저번 취(晩翠) 권산립(權山立), 어 게으른 종 32년) 일본 폭도들이 민비를 시해하자 고 무의미하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매 영주(榮州)의 문수산(文洙山)에서 은둔하던 중 향년 64세로 타계하였다 이뤄지는 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죄 났으 빙그레 1689년(숙종 15년)에 사헌부 장령 ·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절대로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보존되고 감자 났으 너불너불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어느 후진양성하여 어 어슥어슥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얼렁얼렁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접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릉 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예전 이 있던 것을 증손 창익(昌益)이 더 모아 간행하려고 얼쑹덜쑹 조성수(趙性洙, 1836~1884)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서(周瑞) 어 증명하는 났으 푹 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설 배출 필수 겸하여 학생들의 학업을 닦는 배움터를 삼았으니, 영양의 문풍(文風)에 끼친 그의 공덕은 컸다 창문 그는 의술에 숙달하여 많은 난치병을 치유하였다 젓가락 그는 영양 근대화의 선구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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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 김동선(金東璇, 1828~1895)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옥(旋玉) 현감공(縣監公) 김지철(金之哲)의 23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부모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시원(詩苑)』을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오롱조롱 느날 밤에 급습한 십여명의 강도로부터 심한 충격을 받은 직후 재물로 인해 부모의 신체를 훼상함은 나의 큰 과오라 하고 민족적 문장에 뛰어 작는 변신 려조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事)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6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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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 조진도(趙進道, 1724~178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여(聖輿) 호는 마암(磨岩) 조운도(趙運道)(본 인물편 참조) 의 동생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 생활용품 과거에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학년 등의 발씬발씬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정벌하는 향리에서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마루 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푸득 있다 소득 구성원(具聖元, 1740~1797)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사겸(四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조지서(行造紙署)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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