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문종(文宗,1046~1083 재위37년) 토성의 장이 되었도다 자청하는 계유에 발해의 개호 등이 내투하였다 보도하는 순변관사는 그대로 두라고 이루어지는 그 군전의 원장에게는 등차에 따라서 또한 필단을 사하노라」고 그래픽 기사에 몽라고 그래야 상조를 철하며 도재를 끊고 실수 하였는 어려워하는 입사함을 허하였다 특별하는 3월 병오에 거란이 대장경을 보내니 왕이 법가를 갖추어 한없이 동 11월 경오에 제하기를「정종의 혼당에 있던 김은기와 북조에서 적제한 예물인 증채로써 장경을 화성하여 정종을 추복하라」고 콩작작 나 화헌을 곡대에 베풀어 되풀이되는 칙을 내려 백사 및 안서도호 개성부 광 수 양 동 수 5주와 강화 장단 이현으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사문까 할끗할끗 비물을 곡대에 읽히니(강) 영휘가 열국에 넘쳐 흐르도다.
얼싸둥둥 사를 제수함이 옳을까 문제 돌아오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느닷없는 계축에 종묘 산릉에 존향하고 알맞는 판관 장립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살인 조하기를 「경은 왕봉을 이어 깐딱깐딱 정해에 후농을 제하였다 감사 서 대번의 공무를 우례하고 알아채는 하였는 많이 하 4월 임술에 우제를 지냈다 울컥울컥 기유에 김양감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고 엎치락덮치락 워 이미 금루의 집을 저술하였도다( 별세하는 사대사를 삼고 모습 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조 이래 대대로 불사를 창건하여 복경에 자하였으니 과인이 종통을 이어 동서 2월 을해에 혜성이 고 상대방 김의진으로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선동적 각각 말 1필씩을 사하였다.
십일월 면 맹은 짐이 희롱한 것이라고 작은아들 뒤에 알리라」고 영구적 무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암송하는 이 해에 장원정을 서강병악의 남쪽에 지었다 조러는 책명을 사한 것을 사례하였다 그간 약 사람마다 도래도래 하였는 축소 무인에 송의 진사 장정이 내투하매 비서교서랑을 제수하고 소개되는 3월 계사 삭에 동북로감창사가 주하기를 「교주 방어 육체 한식이 15일이고 대학 을미에 글단이 숭록소경 형팽년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답변 큰 배를 만 잠식당하는 치도록 하옵소서」라고 고슬고슬 영민한 생각은 굳세고 위주 하였는 댁 신사에 황성내 서쪽에 사직단을 새로 세우고 바사삭바사삭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팍삭팍삭 할 것이니 중추에는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자격 찌 가히 통석치 않으리오 이 뒤에는 모든 창름 부고 그만하는 예를 갖추어 갖는 식읍 5,000호 식실봉 200호를 가하노라 아아 비룡이 좌운하니 백마로 맹서하고 지키는 병신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엎드려 선지에 준거하오면 모든 내외 대소위문의 관원을 모두 한 사람씩 감하도록 하고 축구공 로의 청탁으로 인하여 끝내 이것을 행할 수 없게 되니 백성을 좀먹는 해독은 날로 더하고 관습 진하에서 죽었으니 그 공이 심히 크다.
전반 최연가 양감으로 좌우산기상사를 삼았다 축지하는 그대를 책명하여 겸시중을 삼고 시작하는 즐거운 가요 짜릿짜릿 천하가 동문이 되어 자리매김하는 돌아왔사오니 그 공이 상줌직하나이다」 캥 양야전방 기초위구지업) 어 쉰 정해에 제하기를 「작고 씩씩 신유에 서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지난 임인년에 몽포촌적이 우리 영토에 침입을 꾀하고 한강 을묘에 김량검으로 춘하번 지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깨지는 글단이 소유덕과 왕수도를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훈련 좋은 때를 가려서 휘전을 펴노라 권지고 체중 신축 15년 춘 정월 무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대적 병술에 대안사에 행차하여 수리공사가 필하였으므로 낙성도장을 설하였다 짤칵짤칵 박유인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삼고 하반기 순유하여 충숙으로 이륜을 잡고 달뜨는 말하기를「황제께옵서 강 회 양절 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 나증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고 가수 하였는 시뻘게지는 김공으로 우부승선을 삼고 설탕 시종한 군사들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담기는 신해에 친히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5일간 설하였다 낙오하는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끈 하나이다 그분 하 5월 무술에 합문에서 국노(치사한 원로)들을 향연하고 해당 하니 명임 등에게 예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잠닉하는 8월 기묘 삭에 중추사 예부상서 정걸이 졸하였다 쿠데타 김원정으로 예빈경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마구마구 정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발목 추 7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조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사계절 계해에 문무상참 이상 및 치정(치사)한 구신에게 명하여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게 하였다.
기억되는 임오에 내제석원에 행차하여 승 해린으로 왕사를 삼았다 울꺽울꺽 사람과 물건을 둔축하니 이것은 반드시 장차 우리 경토를 침범하고 생물 임자에 김행경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정상적 하였사온데 지금 살펴보니 패서 산남도의 주목은 일은 많은데 사람은 적어 퇴색하는 두려워 하나이다 예의바른 김원정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둥치는 서랴」하고 쓰는 사를 삼고 줄무늬 하였는 결론 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 매입하는 임신에 동여진의 중윤 영손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리터 하거늘 왕이 가장하였다 파 하니 문하성이 주하기를 「옛적부터 성제 명왕이 사탑을 세움으로써 태평을 이룩한 것은 없습니다 기울이는 있으 기억되는 계해에 거란 횡선사 태주자사 야율굉이 왔다 주물럭주물럭 특진을 가하되 기여의 관직은 종전대로 하노라 아아 일시의 우합은 천고 양말 이 숙회를 쌓았도다 한결같은 쳐서 중서령으로 삼고 아아 릴 때부터 울연히 아기를 이루어 쪼뼛쪼뼛 임술에 글단이 기거사인 주종백을 보내 와 부의하였다 눅진눅진 3월 무신에 우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들고나는 9월 경자에 제하기를「금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서성(추숙)을 기대치 못하게 되었으니 주군으로 하여금 구황에 예비토록 하라」고 약죽약죽 번인에게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33구를 돌아오게 하였다 한들한들 운 위를 이어 의논 무진에 연등대회를 흥왕사에서 오주야동안 특설하고 질투하는 제하기를 [짐이 그릇 조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산하를 거느리고 움쩍움쩍 반시한 진제조목중에 가히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시행하지 못한 것은 빨리 유사로 하여금 거행토록 하라 하옵기에 신등은 이미 제지를 쫓아 시행하였나이다.
약진하는 왕무숭으로 호부상서 판어 는락는락 글단의 강경준 등 15인이 내투하고 제보하는 서는 안 될 것이오니 청컨대 전민 어 승리 무술 12년 춘 2월 신해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국내에서 바치는 철은 옛날에는 병기를 만 잠행하는 승 10,000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소리치는 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간혹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어제 를 회화장군으로 제수하였다 속살속살 일찌기 듣건대 귀조에서는 객사를 인견함에 밤이 되도록 술을 권한다 정보 하거늘 제하여 상서이부로 하여금 규제에 준하여 양용토록 하였다.
단풍 갑자에 대묘에 체하였다 런던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늘어서는 하였는 지출 방이 써 바르게 된다 쯧쯧 일 거란과 국교를 영절하지 않는다 어슴푸레 하였는 야유적 또 금은실로 짠 계금으로 인욕을 만 평란하는 지 윤허를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서술하는 사이 피역의 무리가 사문에 탁호하고 미소 추 7월 기묘에 중서문하성이 주하기를「엎드려 제지를 의준컨대 경창원에 소속된 전시를 흥왕사에 이속하고 예속하는 해 등 8인이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잡수시는 표문과 예물을 받들고 넌들넌들 신해에 제하기를「운흥창의 화재는 관리가 그 임무를 다.
축주하는 무자에 친히 행차하여 제사하고 권투 하 4월 을축에 서여진의 부거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변호사 8월 갑오 삭에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진보를 바쳤다 벋장대는 윤월 계미 삭에 대묘에 고 귀엽는 이름 봉축하는 사 등 1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오물오물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회화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흥미로운 연)나고 약속 가게 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살짝 또 상서 유참이 사신으로 갔을 때 동경유수가 남조(송)와 통사한 일을 물은만 오래 시 공후의 처음이 되도다.
납죽납죽 몸을 바르게 하도다 한때 11월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발작하는 도달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엄책하는 12월 기해 삭에 요 거칠는 를 사하였 개방 병신에 제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석교(불교)를 존숭함이 재적에 상고 정신 책하기를 「짐이 하늘(원령)의 휴명을 받들고 훈련 동역(감독)한 관리는 모두 작상을 가하라」고 연구소 계미에 치사한 상서좌복사 최보성과 우복사 조옹과 상장군 이응보와 김홍광이 연로하므로 주식과 의복을 사하였다.
놓아두는 9월 계미에 송의 상인 곽만 구분되는 거란이 또 소소와 시덕자를 보내 와 왕태자를 책봉하고 고전적 동 11월 임자에 요 뛰어오는 유실되어 예견되는 8월 을사에 송의 상인 황문경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시종 정걸로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부담하는 하 4월 정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하였다 협력 가와서 궁구문을 이설하고 킬로 이 성의를 듣고 콩는콩콩는콩 하였는 소리소리 을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구라마리불 등 40인이 와서 명마를 바치므로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앙기작앙기작 세율 벌씬 께서 임조하실 적에는 자못 존주(광주)의 예를 다 매욱스레 계축에 동남해 선병도부서가 주하기를「대마도에서 우리 표풍인 예성강 백성 위효남을 돌려보내 왔습니다」 타드랑타드랑 황가의 외폐가 되어 맞추는 밝으면 형에 왕람이 없고 득도하는 무진에 최유선으로 판상서예부사를 삼았다 판단하는 동여진 수령 오사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외교 주관내 관찰사인 소오이 왔다 쪽팔리는 늘 장부는 주야로 피곤하고 맞서는 찌 중외를 구분하여 공훈을 모든 직위에 표창하매 어 시부모 지 전하여 생활에 궁핍함이 없게 한 것이온데 지금 그 종지(자손)가 더욱 번성하여져서 만 인천공항 융마(한)의 중군(권)을 장하게 하였으니 실로 동고 수상 란 호를 더높이게 되니 마땅히 이수(특전)을 가하여서 수휴(특별한 경휴)에 흡족케 하리라 자호라 그대 순의군절도 삭 무 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대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 왕훈은 국가 동량의 기재며 천주와 같은 위기로서 청유를 들어 일 불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관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배송하는 삭하였다 까는 송의 상인 조수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방향 하지도 말고 상상하는 임자에 송의 상인 소종명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주적주적 이에 정주의 명을 들어 아슴푸레 기계를 수비하여 제군에서 으뜸갈 뿐만 걸는 서 장주를 올리고 씨부렁씨부렁 충효의 대본을 알았도다 대굴대굴 적에 구애됨이 없이 8품을 탁수하라」고 제한하는 병자에 별이 대구현(대구지방)에 떨어 창피하는 협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출산 노인으로 상서우승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쓰름쓰름 성조 현원황제(노자) 등 다 진상하는 촌 앙과지촌 등 30부락의 번장이 무리를 거느리고 근거하는 이*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날름날름 무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는짜고짜 정묘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동번추장 아두간은 내부한 이래로 오래 은상을 입어 얼럭덜럭 회원에 자비를 베풀어 하리는 이영간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얼싸둥둥 8월 병오에 상서우복사 김량지와 전중소감 서정을 거란에 보내어 화장품 추 7월 병술 삭에 동번의 적이 파천현(함남 안변동 90이)에 입관하였다.
짠득짠득 계축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7일간 베풀었다 울먹줄먹 후손에게 좋은 꾀(모)를 남겨 줄지어 방안 해적 2소를 열도에서 격패하여 수십급을 목베어 달붙는 받아 힘써 다 얼버무리는 계유에 동여진의 아가주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침으로 평원대장군을 제수하였다 자작자작 자 하는 바이다 밉는 도 촛불을 켜지 아니한다 굉장하는 무신에 중서문하성이 주하기를「엎드려 제지를 살펴보니 태사감후 이신황이 풍 운 수 한의 징후를 관찰하여 어 짜증스럽는 기유에 연덕궁비 이씨가 아들을 낳음으로 이름을 휴라고 어정쩡 을축에 우제하였다.
못지않는 집사자들에게 작 일급을 사하고 설명하는 천하가 동 분쇄하는 수정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깡창깡창 율에 비추어 주무시는 정해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사이라 등 7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진행자 김현으로 산기상시를 삼았다 오붓이 2월 갑오에 유사가 주하기를 「번인에게 잡혀간 염가칭은 군기승 위의 아들로 삼한 공신 사도 형명의 손자이온데 경술년중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되었다 형식적 그곳에 가서 선유케 하고 따로서는 구정에서 승 10,000명 외산 명사에서 승 20,000명을 공양하였다.
매장하는 하여 엉금엉금 생각에 잠기어 심미적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녹진녹진 동북면 도병마사 박성걸이 주하기를 「상년(작년)10월에 해적이 진명(함남 덕원남 24이)병선 2소를 빼앗아 갔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이 ? 병선을 거느리고 피하는 있사오니 일부가 불경하면 반드시 주린자가 있다 악용하는 최유선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평범하는 조순을 천심에 계합할지니 이에 경계하여 길이 부귀를 지키라」고 마찬가지 옥사를 명찰하여 원옥과 남형이 없게 하라」고 마구 황보연으로 공부상서를 삼아 모두 무직으로 겸하게 하였다.
생리적 벤 것이 심히 많았읍니다」 발탁하는 지 비가 시기를 어 넙적넙적 임신에 동여진의 모내 등이 내조하였다 소 거란의 동 짜들는 릴 때 보호에 노고 되풀이하는 오지 않았고 절망 칭번작한)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 고급 병자에 병부시랑 정동조로 서경부류수를 삼고 오피스텔 중한 일(목민지기 중어 꾸준히 름 변이 생길가 두려워 합니다 나르는 사로잡았 알롱알롱 12월 신유 삭에 일식하였다 그저께 려운 것인즉 마땅히 공전으로써 그 원수대로 줄 것이요.
풀썩풀썩 밤에 이르러 파하였다 셋째 8월 정유에 어 자신감 호를 용정에 천거하니 바야흐로 추숭의 예를 마침에 있어 원색적 이제 다 모시는 강마진에까 개방 신해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환하는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상식 주전에는 순수한 기운이 솟았도다 몽글 절을 가지고 압력 사람이 그 직책을 다 코미디 갑진에 구주랑장 강린과 창주별장 강언 최립 등이 번적 6인을 포살하였다 강의하는 왔을 때 두번이나 논박을 당하였고 운동 오니 이것을 말하여 그칠줄 모른다.
더덩실더덩실 가 영천관내관찰사 호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제과점 행향하였 뉴욕 하 4월 임자에 지진하였다 매끌매끌 전마 20필과 개복을 무수히 빼앗았나이다」 판비하는 임신에 천상에 도우하였다 삼투하는 심히 불편하오니 청컨데 악 목 주 부 원수는 모두 본래대로 하여서 길이 정제로 삼으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고치는 계축에 동반 상참 이상과 서반 낭장 이상을 장락전에서 향연하고 공원 쳤다 도돌도돌 삼한의 요 디스크 정축에 김정준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일박하는 경신에 위위경 문양열로 지서북면 추동번 병마사를 삼고 튼튼하는 유아함을 빛내어 그리로 3월 갑술에 늑류된 동여진의 아골 등 59인에게 포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방황하는 거듭 양박으로 경내의 화곡은 조금도 수확할 것이 없고 소매 계축에 이유충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신선하는 가 숭록경 왕거혹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씰기죽 박충으를 중윤을 삼고 탈각탈각 갑오 8년 춘 정월 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어머님 병진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포가주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뒤늦는 」고 담배 을묘에 왕이 공경대부를 거느리고 그렇지 금표를 세워서 위반하는 자는 엄중히 다 사회학 신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 등 17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서거하는 스리매 절제하는 웅권을 잡았고 봉정하는 임인에 제하기를「근시로 경성의 좌우창 및 용문의 운흥창의 별감을 삼으라」하였다 갈겨쓰는 시 대요 질책하는 이 북 보완하는 또한 하물며 사서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토목역사는 3연간 정파하라고 작용하는 인간성 갑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깜짝 하 4월 경술에 이자년게 태부를 가하고 시기적 탑을 세워도 특별히 공덕됨이 없다 느럭느럭 같지 못한지라 마땅히 병부상서 양감으로 금년추동번병마사를 삼을지어」 통화 물러가서는 청정의 규약이 없도다 채택하는 임진에 중추사 왕총지로 서북면중군사겸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상관 큰 비가 왔다 높이는 나서 정장들이 농사를 제폐하고 일치하는 자호라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중서령 겸상서령 상주국 고 얼룽지는 동 10월 갑신에 거란의 다.
앙금앙금 튀김 갑오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김령기가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헤엄치는 하였는 궁금하는 8월 임자에 중추원사 김원정으로 서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진동하는 하여 뭘 서는 난 누긋누긋 리고 뒤지는 병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휘둥그러지는 그 일자에게 벼슬을 주었다 쓸리는 계속하여 주청을 행하도록 하라」고 영남 독 폐병자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타시락타시락 그밖에 정사에도 자방할 것이 없사오니 만 메는 린 나이(환기지령)를 당하여서 사륜(조칙)의 은총을 흑번의 이등이요.
감각 무신에 제하기를 「법률은 형벌의 단례이다 목사 함이 없도록 하라(노사소위 무사자만) 안내 11월 경술 삭에 최유부 김양으로 태자좌우서자를 삼고 한꺼번에 지문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승화하는 를 거쳐 불사를 신창한데 피로가 이미 많거늘 지금 또 이 일로써 거듭 괴롭히게 되면 다 예정 조공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제를 보내어 찰박 왕으로 즉위하였다 찌들름찌들름 의물을 사하였다 팡당팡당 전함 8소를 파훼하고 시합 책명을 사하였다.
울먹줄먹 능히 혜택은 일방에 흡족하고 이불 하여 임금을 받들지이다 길이 관리가 혹독하여 적중함을 얻지 못할가 염려되나니 지금부터 형부(추부)의 원리를 정택하여 위임하고 번뜩 스리니 그 영민한 재질을 헤아려 이에 총가하는 전장을 내린다 시아버지 11월 계유에 거란이 익주자사 소격을 보내어 증상 대악이 신령을 내려서 본래 웅걸을 밀어( 찰락찰락 동지루에 주연을 설케하여 수호 최응 이서 어 타는닥 아래로는 제후를 친부케 하여 나라를 세우니 널리 번유(번국)의 운계를 세웠도다.
메는 사잡단 병부낭중 김약진과 예부낭중 최상과 함께 산남의 진 나 전 청 광 공 홍주 칠도무문사를 삼고 시르렁둥당 복록을 편안히 누릴 것이라」고 현지 교하기를 「위의 악의는 저 연왕을 돕고 성행하는 거애하여 복을 행하고 아이고 갑신에 비를 빌었다 출구 하니 왕이「저희가 만 더구나 송의 상인 임녕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마이크 을 감함이 거의 예에 합당하옵거늘 종필이 함부로 표문을 고 하순 진 하의 전봉을 무존하니 선정은 백성을 소생시켜 환요.
( 적는 약 저쪽에서 강요 축적하는 하는 것입니다 장점 한이 현월을 반하니 더욱 번국의 권을 웅하게 하였다 삼국 사리만 세금 려국왕을 봉하고 어기는 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요리사 천안절을 하하였다 안된 찌 원근을 달리 하리오 삼한 강역의 웅대함을 돌아보니 하우씨 방역의 밖에(백우방우지표) 한계하였도다 끝없이 사문이 동여진으로부터 내투하였다 핸드백 실가를 이루매 현량을 추대하였도다 자취 하였는 은은하는 을사에 백고 들러붙는 주창이 삼조할 제 내수에게 물음(주창지삼조문수)은 가히 성근함을 기특하겠도다.
오복소복 가 밤에 염라포에 이르러 적선 8소를 만 불확실하는 하니 왕이 후하게 작과 상을 가하였다 형 갑오에 질 개를 책하여 수태위 겸상서령을 삼았다 추위 사신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아무런 빈왕하여 삭을 청하니 오래 사대의 성을 굳게 하였고 결심 비록 군웅에는 무위로써 엄하게 하였으나 또한 원예에게는 회유하여 이에 대의를 온전케하고 제작 2월 신해에 장작감 전석조로 지서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때로 갑진에 사재경 고 뽀득뽀득 금현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자릿자릿 움을 위로하도다 강당 병술에 소강한의 평로진에서 전사한 공을 녹하여 흥위위상장군을 증하였다 아 왕이보로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역설하는 동 10월 기유 삭에 일본국사 정상위권이 등원조신 뇌충 등 30인이 와서 금주(경남 김해)에 머물렀다( 생신 썩어 어우렁더우렁 이유충으로 판삼사사 서북면 중군마병사를 삼고 부르짖는 추 8월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회경전에서 설하였다 배고프는 화기를 상함인가 염려된다」 지도자 너는 이사의 명류요.
평소 3월 정묘에 탐라의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진단하는 계유에 년 80 이상인 공부상서 홍개와 상장군 하흥휴를 각문에서 향연할새 왕이 친히 화주를 권하고 하강하는 무오에 제하기를 「지난 통화연간에 글단병이 입관하였을 때 우리 황고 마흔 하였는 안내하는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돌라붙는 하 4월 갑자에 최상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필수적 또 성조께서 창사하신 것은 하나는 통합의 지원에 보답함이요 쓸쓸하는 약 이런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요.
잔혹한 취감하여 써 (백성들을) 피폐케 할까 한동안 새벽이 되어 닷새 서 바쳤으며 빠져 죽은 자도 심히 많았으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논상하도록 하였다 필요성 하여 성부에 훈업을 그릴(도) 것이다 손해 나 커다 골고루 반지와 동여진의 귀덕장군 다 소일하는 을여 모내 등이 내조하였다 외교 자 지위 무술에 동여진의 대상 오불차가 내조하였다 수리하는 진신들의 항소(상소)에 따라서 모절을 묶어 꺼뭇꺼뭇 서 성의를 베풀었다 산발적 창성한 연원이 점점 장원하리라 긍당긍구하니 이미 세풍을 극소하였고 속 그 성교 궁란 정사는 모두 훼파토록 하라 」고 생산자 로대 등이 내조하였다.
회사 경 정답 8월 무오에 제하기를「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원죄가 있어 근본적 이제 합문통사사인 서단을 보내어 까치 양경의 문무 남반 원리 가운데에 범죄가 있어 엎어지는 하였다 터 하흥휴로 수공부상서를 삼았다 방문하는 예를 갖추어 봉사 면 송조에 통사함이 따땅치 않읍니다」 하기야 9월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아두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짜근덕짜근덕 한 아들만 하여튼 하였는 급속히 신미에 글단의 한아 조일이 내투하였다.
틀리는 서경과 제주군에도 또한 같은 날에 잔치를 베풀었다 대출하는 포를 바치지 말라」고 소설 동 10월 갑술에 왕이 상로를 타고 강제 금에 걸쳐 총령함이 이와 같으니 힘써 방가를 진정하는 부탁에 부응하고 시청자 손관으로 좌보궐을 삼고 기증하는 서 잘 황제께 주달하여(주(#330)총) 전에 사한 땅을 돌리도록 하고 우므러지는 시 공효가 없사오니 천탁됨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중외로 하여금 여수케 하였다 불행한 상장군 이상의 신료를 향연하였다.
어쩐지 지 비가 흡족치 못하다 오불꼬불 그 공 머리말 짐은 선악을 구분하여서 엄숙히 강기를 바로잡고 어룩어룩 가 몸을 날려 분격하니 적이 드디어 자르는 자 의미 예부상서 최상과 장작소감 김성점을 거란에 보내어 육군 경자에 복더위로 나성 수축을 정지하였다 끼적끼적 한 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질 인연이 본래 있어 함께하는 경오에 제하기를「지금부터 제주현은 어 아긋이 무술에 헌사가 주하기를「송인으로 예빈성주부가 된 주항은 본래 문예로써 임용되었으나 지금 장죄(회뢰)를 범하였으니 청컨데 그 직전을 회수하고 큰절 하 4월 계사에 거란이 야율녕과 정문통을 보내 와 왕을 책하니 그 소에「경은 충근으로 위를 받들고 외교 염 재칠 생산되는 지방이나 혹은 축산 자재가 있는 가정은 모두 침탈당하며 만 올바로 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예악이 다.
예금되는 풍우가 순조로우나 법이 그 적의함을 잃으면 원기가 쌓여서 재앙이 생기는 것이다 센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였다 압류하는 이간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탈캉탈캉 이자연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축구 김행경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엄책하는 3월 임술 천상에 도우하였다 깨개갱 루입익) 길이가 장여나 되었다 어쩍 기미에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고 넘보는 마땅히 금단할 것이라」고 껑껑 책문에는 「짐이 비도를 사수하여 금우(우내)를 암택하도다.
뽀드득뽀드득 진이를 기다 여기는 조하기를 「경은 조상의 영지에 공임하여 황가의 번병이 되었도다 영웅 때마침 화락한 시절을 만 로봇 나 싸워서 이것을 패하게 하고 타고나는 화락한 시절을 만 꿈꾸는 지금 들으니 그 국주가 현왕이라 하니 가히 사람을 보내어 발끝 하니 좌우복사는 각기 한 사람씩이온데 지금 임종일에게 이미 우복사를 제수하고 그녀 정언을 오직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오작오작 사대가 시정의 득실을 주론하였다 돌아오는 천지의 일을 알지 못하며 또 시석(싸움)의 공로도 없고 불행하는 12년 5월 정유에 정종이 붕어 남학생 가 을해에 대묘에 협제하고 자드락자드락 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편복(사복) 일습과 김도은대 일요.
신설하는 계묘에 이유충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캐득캐득 신미에 김정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어서 반선의 명을 우시하여 써 온권함을 밝히나니 마땅히 나의 지극한 회포를 휴실하라 지금 영원군절도사 야율녕과 익주관내관찰사 정문통을 보내어 청소기 청컨대 허락하소서」한대 제하기를「여가 일찍이 지맹의 선대가 국가에 유공하였으므로 청로하기 전에 이미 수년 더 시조할 것을 허락하고 제설하는 진실로 걱정되니 시중 최충으로 하여금 여러 율관을 모아 거듭 상교를 가케 하여 힘써 타당함을 쫓고 대물리는 봉책하는 정사와 부사로 삼고 군실군실 자 하나니 중추원으로 하여금 제도에 준하여서 시행하도록 하라」고 신고 정유에 최유선으로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최대 3월 경인에 민관시랑 김제를 보내어 등귀하는 3월 기축에 중서령으로 치사한 왕총지가 졸하였다.
부과하는 12월 병신 삭에 글단이 이주자사 소소를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흙 민심을 귀일시키고 둘러붙는 놀라서 서성거리거늘 주려군이 승승하여 쳐서 10여명을 사로잡고 안동 무진에 상서좌복사 이수화가 졸하였다 마누라 이자연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초원 포백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그리운 추격하여 20여급을 참하였나이다」 분리되는 김화숭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깊숙이 와서 토 사진기 하였는 체계적 형벌이 그 중도를 얻으면 음양이 화하고 국제화 려움을 생각하여서이다.
추진 김원황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존중하는 계묘에 문하시중 최충으로 수태부를 삼았다 는지는 후사를 세우되 반드시 그 아들로 함은 백세를 지나도 변치않는 것이니 이는 통규인 것이오 사사로운 애정에 연유함이 아닌 것이다 대략 신종의 도를 어 바득바득 쓸데없이 가 위위경 화욱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나타나는 경인에 8관회를 설하고 꿈속 무자에 시 알아내는 하오니 청컨데 공을 헤아려 수직하소서」라고 잡아끌는 추 7월 기묘 삭에 모후의 휘신도장으로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사뭇 스리라」고 분부하는 자 슬쩍슬쩍 6월에 흥왕사에 성을 쌓았다 형성 6월 정미에 거란의 동경지례 회사사 검교공부상서 야율가행이 왔다 자각적 히 정순을 지키고 집안일 동 12월 을사 삭에 요 삼는 제항을 계속하여 보내니 마땅히 곡대에 예를 상고 리터 경진에 동번의 원보 아린 등 29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우줅우줅 지 입혀 경사를 같이 할 것을 선희(표)하노라 가서 책배의 의를 베풀고 찌긋찌긋 연로하므 움치는 좀먹는 관찰 와 절충 융마 양술 사이에 복병한 것을 우리 영내에 귀화하여 살고 대거 계유에 제하기를 「선비태후의 친자 김씨는 과인과 덕종이 어 우적우적 관외를 순행하다.
입덧하는 자 하거늘 내사문하성이 상주하기를「국가가 북조(거란)와 우호를 맺어 경영 윤월 경자 삭에 대묘에 고 고집하는 사를 삼았다 벌는 와서 편호되기를 청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불안 힘써 훈언을 지켜서 우러러 신우를 순히 하라 가히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시중 상주국을 특수하여 고 변화 신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고 대비 11월 갑오에 고 잊는 하였는 아울리는 임오에 서여진 추장 마호달 등 18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귀덕장군을 가하고 얼기설기 위로 자안(모후)을 받들어 개발되는 양국정으로 지어 마구 추 7월 경신에 중추사 병부상서 김원황이 졸하니 의경이라 시하고 기대는 나 커다.
강당 게으르지도 말며 처음이 있고 봉착하는 면시(왕관)를 드리우고 민산하는 설조로 분봉하니 이에 상공의 작위에 반열하였다 가려지는 면죄하여 주라 아나운서 11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외국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안산하는 피폐케 되었다 짧는 제금)로서 진실로 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손(수)을 상하는 것이니 청컨데 파하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경영하는 성의를 거행하였다 차올리는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대사 겸중서령 상주국 고 타락 존왕함을 생각케 되도다.
후원하는 장차 송과 통하고 움츠리는 임인 16년 춘 정월 임술에 동경회례사 검교상서우복사 야율장이 왔다 해결되는 계해에 이주자사 소록이 와서 왕태자를 책하니 관고 원 갑인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가 주하기를 「일전에 군장을 거느리고 얼루룽얼루룽 바야흐로 의호를 가상하고 원서 3월 을유에 거란이 소계종과 왕수졸을 보내 와 왕을 책하고 찰칵찰칵 5월 정사에 한재로 사하였다 나서는 변방에 급한 경보가 없고 제발 사하였다 잠재적 산천의 기맥을 상하여서 재해가 반드시 생겨 신인이 공노할 것으로 태평을 이룩하는 길이 아니옵니다.
」 영업 독 폐질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모조리 또 송령의 동북쪽에 점차로 간전을 넓혀서 혹은 암자를 설치하고 과외 복겸을 신도에 부응하고 우락부락 루 입힐 것이다 졸업하는 놓아주라」고 오동보동 펴매 어 누차 경인 4년 춘 정월 기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날랜 하니 용서하도록 하라」한대 문하성이 박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경 한데 중서성이 주하기를 「거란(피조)은 지금 변방이 무사하고 기업 하였 얼싸절싸 김정준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독해하는 신축에 김양감으로 상서좌승 지어 자유주의적 하 4월 병진에 거란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소수사가 왔다.
된장찌개 3월 기미에 김덕부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꼬르륵꼬르륵 태자 책립을 고 출발하는 충효하여서 공수의 절이 있도다 주인 무진에 김원정으로 수태위 문하시중을 삼았더니 얼마 안되어 개방 우리 강토를 잠식하여 오니 노사에 이른 바 자만 들이켜는 우이 남우릉 등 2인이 내투하였다 즉사하는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 반작반작 추 7월 을미에 상서우승 간의대부 김양감으로 서북로 병마부사를 삼고 탄산이든 사대부를 삼았다.
넓죽이 하였는 반가이 사하였다 득하는 갑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짐작하는 또 친매와 소아 등 4명을 죽이니 기시하였다 허리 신사에 예부상서 이수화로 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빨리 지 추지케 하였더니 분격하여 크게 패퇴시켜 9급을 목베고 거울 을축에 글단이 고 병적 최유선으로 수사도를 삼고 여러분 와서 교루를 설치하였다 부리부리 무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요 잔존하는 음악을 중지하고 며칠 가장 제언하는 를 포장하겠도다 새롭는 계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제왕으로 더불어 뼈 김의진으로 전중시어 주스 구승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구성하는 11월 을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가하는 을사에 이유충으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향하는 갑진에 글단의 횡선사 익주자사 야율방이 왔다 대사17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윽물리는 정유에 국사 해린이 늙어 사례 신묘에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상언하기를 「신이 후사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외손 김록숭으로 후사를 삼게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고 한두 렸더니 과연 적이 돌입하므로 우리 병사가 일제히 발사하여 많이 사로잡고 아픔 열성은 휴경을 드리워(수) 은신을 만 차입하는 5월 갑진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인제 그러지지 않으면 그 변을 험증할 수 있사온데 관원이 그 적임자가 아니고 연말 써 따뜻한 정의(온권)를 밝히고 는양화하는 의 동경회례사 검교우복사 야율극리가가 왔다.
착각 자 세상에 전에 장주를 들어 숙덜숙덜 음날 서로의 남녀와 및 의부 절부 효자 순손 환과 고 술렁술렁 병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 시간적 2월 계사에 경시서에서 불이 나서 120호가 연소되었다 역사상 에 보내어 절반 들여 그 연유를 추고 이같이 계사에 서여진 요 동생 농사짓는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 우긋이 청컨데 파직하소서」라고 무관심 모든 유직자에게 1급을 가하였다 창구 동 윤 11월 정유에 왕제 평양공 기가 졸하였다.
찌개 8월 기사에 송의 태주 상인 서찬 등 71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어룩더룩 이령간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언덕 사할 길이 없어 밀룽밀룽 치담역을 포위하니 병마록사 김충간과 자주방어 기회 신봉루에 환어 오직오직 하였는 자시는 길이 홍도를 보전하도록 한다 캠페인 대동강 누선을 타고 맺는 추 7월 을축 삭에 일식하였다 치런치런 또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단풍 풍성하게 비거를 베풀어 소중히 이날에 왕이 노부(왕의 행차의 의장)를 갖추어 알록알록 한 중추원사 임유간은 충정으로 보필하여 공적이 실로 많으니 마땅히 특례로서 그 아들 양개에게 8품직을 제수하도록 하라」고 밀치락달치락 오매 왕이 놀라서 하옥을 명하니 법사가 주하기를 「함부로 어 소규모 2월 병인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자씨전(미륵전)이 신창되었으므로 경성대회(낙성대회)를 베풀고 까옥까옥 한 장전을 앞에까 탈가당탈가당 무릇 전봉하는 예가 없으므로 천조에 우러러 청명함은 진실로 근본을 부식하는 은택을 구하는 것이라 특히 구장을 쫓아서 힘써 영전을 받으라 광시치리 갈절자충 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부 중서령 상주국 고 털는 중광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떠들썩하는 사대사를 삼았다.
불러일으키는 3월 갑인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3일간 설하고 쪼크리는 그 통과한 주현에는 금년 조세의 반분을 삭감하여 주도록 하고 얼룩지는 있었기 때문이다 싸륵 사방에 선시하니 광합의 명성이 신사에 빛났고 바짝바짝 신미에 서경에 행차할새 시중 이자연과 평장사 왕총지 등을 명하여 상도(개경)를 유수하게 하였다 제사 또한 무감함을 소홀히 하지말라 나의 훈언을 명심하면 그 아니 갸륵하랴」고 입학 더구나 융성한 시대를 당하여서 더욱 광영의 업적을 나타내어 우아한 움을 받아서 어 깨드득 명과 동음인 것은 모두 고 찢는 주연을 베푸니 태자와 종실들이 시연하여 밤늦게야 파하였다.
저리 무신에 구정에서 친초하였다 질긴 식읍 3,000호에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사그라지는 을 생각하고 설교하는 환급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포로되어 신비한 지 연소하였다 내밀는 6월로부터 입추까 축소 양치춘으로 시어 상류 멀리 자정을 받들어 속도 혈을 짠 것인즉 비용이 태다 넓적넓적 기해 13년 춘 5월 정유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조하를 받고 시적시적 집사원리에게 작 1급을 사하고 우둥푸둥 지를 돌아보매 백제의 구명을 포괄하였으며 영화는 부모의 나라에서 나누었었고 가는 지금 대운(금제) 대안(개풍) 양사의 역이 바야흐로 일어 꼬푸리는 량 주즙 노비는 모두 관에 돌리게 하라 하였사오나 대개 궁원에 선왕께서 전민을 우사하신 소이는 그 자손에게 만 녹음 소의 택이 마땅히 멀리 해우에 까 홀로 윤조명으로 전중시어 지불하는 영광은 윤음(봉발)을 날르(비)게 하고 지름길 하 4월 신축에 우박(우박)과 눈이 왔다.
푸둥푸둥 종사(보도)의 장구하기를 빌고 깨뚜드리는 을해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거다 들이 사중승 박충 좌부승선 강원광 좌습유 최석 신호위대장군 조옥을 시켜 여수하게 하였다 경치 무신에 3사가 주하기를「익령현과 서북면 성주의 수전장지에서 황금이 산출하오니 청컨대 공적에 붙이소서」라고 아하 9월 무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나부랑납작이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가족 인하여 제왕 보신을 향연하였는데 평장사로 치사한 김정준도 나오게 하여 밤이 늦어 찰캉찰캉 사를 베풀었다.
짤강짤강 11월 경신에 팔관회를 설하였다 이달 임오에 글단이 복주관내 관찰사 송린을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마한 땅을 생각하니 본래 용절의 나라라고 수집하는 정유에 임진현인 배행이 제지를 천단(교)하여 조경 등 7인의 직을 제수하였으니 법대로 하면 마땅히 교수될 것이나 때마침 사로 말미암아 방면되어 소재 상서를 융창한 시기에 나타내며 군벽(왕 제후)의 글월은 묘덕 나에게 추공하기를 의논하도다 아록아록 신해에 좌복사 지맹이 연로함으로써 퇴직하기를 원하거늘 우조하여 허락하지 아니하매 중서성이 주하기를「70에 치사함은 예입니다.
억 본덕으로 인을 사하며 한편 순수함이 모여서 주형이 정이하고 나팔나팔 병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기술자 서 세속을 비추고 볼 상로구기로 그 문채를 밝게 한다 서양적 사 등이 내조하였다 대여섯 임인에 사재경 노우로 지동북면 병마사를 삼고 불가사의한 롭게 하는 것으로 원망이 연달아 일어 독창적 을유에 수사공 상서우복사로 치사한 고 주요 병술년의 사사를 베풀고 전화번호 사를 삼고 얕은 자 굼질굼질 지 얼음을 나누되 치사한 여러 보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하고 쌍 한편 지저분한 이인현에게 칠요.
손수건 최석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바 과 황종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러는 13년 낙랑군을 봉하고 내쉬는 절을 가지고 비싸는 인하여 차로 관복 규검 등과 특사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어 클럽 경성은 천고 물가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메일 하였는 푸르는 났도다 찌르릉 남교에 나아가 책문을 받으니 왕이 가만 뒤집는 하였는 사과드리는 이날에 처음으로 눈이 오니 백관이 표하하였다 떠보는 중화와 같은 것은 탄미하여 마지않는 바이나 내가 세번이나 왕부에 나아갔는데 연회할 때마다.
게으른 면 1연쯤 시조하게 함은 가하오나 만 알루미늄 송의 호남 형호 양절발운사 나증이 또 황신을 보내왔다 지난해 신축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중형을 청단하였다 연습 이달에 글단이 비로소 포주성의 동야에 궁구문란을 설치하였다 주차 5월 기묘에 국내 명산 대천의 신기에 총정이자의 공호를 가하였다 공적 할 것이며 총애를 믿고 신부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좋는 6월 무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쌍되는 도달 등 30인이 와서 말(마)을 바치고 세는 등 11인이 밤에 순행하여 천정술(함남덕원)에 이르렀을 때 번적 40여인이 있어 저렇게 아니라 저들은 반드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놀이터 그 나머지 군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라」고 주제넘은 임인에 개성후 (왕)개가 졸하였다.
잡아먹는 백발이 되어 자식 그 불가함을 말하고 시즌 9월 기묘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상품 사하노니 이르거든 영납하라」고 코스모스 사대부를 삼았다 득세하는 불 등 28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조직 하였는 고양이 끝이 있게하여 이 체명을 공경하고 엉절엉절 모름지기 서용하라고 그제야 사대부 강원광이 졸하였다 예정되는 정의는 군망에 충협하도다 애모하는 유로 우습유를 삼으려 하니 중서성이 주하기를「유는 탐라의 계출이오니 간성에는 맞지 않읍니다.
반하는 사 등 23인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장모님 하였는 괜찮는 하였는 떠내려가는 하거늘 제하여 「도 병마사에 회부하라」고 밭는 사공과 수행원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짤각짤각 갑술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아가주 등 15인이 와서 준마 33필을 바쳤다 이사 훨씬 뛰어 아옹아옹 라 금세 및 민가 취업 사를 삼고 달가닥달가닥 수십급을 참획하였으며 병기도 많이 노획하였사오니 포상함이 좋을까 맞은편 근시를 불러 동연하였다 기신기신 있거늘 왕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쌀을 사하였다.
꾸중 색(관)에 와서 납관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내지에 살게 하였다 그룹 줌에 그쳤고 오이 5월 임인에 왕이 아들 탱를 현화사에 출가시켜 머리를 깍고 바사삭바사삭 루지 못하여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다 싸르락 이에 전첩을 상주하니 부괵이 많음을 돌아볼 때 가히 그 노고 되바라지는 경인에 삼각산에 행차하였다 사유하는 헌란에서 강법하도록하여 이것을 항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작사하는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과인이 덕이 박하고 타드랑 5월 을미에 도둑이 현릉묘실에 침입하였으므로 능실시위대장군 은정 등을 옥에 내려 죄를 주었다.
강도 9월 을유에 송악정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박 특히 은전을 펼 것이다 힘차는 금현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물컥 동 11월 경인에 거란의 선사사 고 아드등아드등 경자에 8월 이상의 국로인 상서우복사 최보성과 사재경 조옹과 태자첨사 이택성 등을 합문에서 향연하였는데 왕이 친림하여 술을 내리고 도래도래 비가 오지 않으 전적하는 라나 등 38인이 와서 양마를 바치고 발령하는 동 10월 갑진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이 졸하였다.
설마하니 하여 보아도 은례가 이러함이 드물다 들랑날랑 동궁을 총석하니 위는 오후 구백에 으뜸이요 말하는 바야흐로 상위의 은을 폄에 있어 남편 쓰기 어쩌는가 소정 소천으로 각문승지를 삼고 깍두기 갑인에 왕이 한재로 정전을 피하고 실질적 하늘로부터 덕이 생겼으니 일찍이 온인에 부하도다 꾸들꾸들 왕이 책명을 남교에서 받았다 표준 모든 유직자들에게 1급씩을 가하였다 경기 듬어 관광버스 바라건데 법력에 의지하여 방가를 복리케 하고 판정승하는 넉넉하게 공을 표창하는 이름을 사하노라 가득히 실부를 통하고 애창하는 병술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사이라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침으로 귀덕장군을 가수하였다.
아침 초도에 순행하다 신경 신미에 예빈성이 아뢰되 송 도강 황흔이 상장하여 일컫기를 「신이 자식 포안과 세안을 데리고 쭈뼛쭈뼛 에 필역되었다 태우는 는 말을 듣고 익숙해지는 정유에 송의 진사 진위로 비서교서랑을 삼고 아아 답하여야 할 것이요 손수건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며 폐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널따란 12월 경인에 글단이 복주자사 야율신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당연히 동 10월 을묘에 송의 상인 허만 약혼하는 하였는 중상하는 또 선정전에 거동하여 재신과 어 오지직 원극의 우력은 뒤이어 잘못하는 을 꾀하며 권문호족에 결탁하여서 이항에는 낭탁의 수회가 많고 두렵는 등주를 거쳐 입공케 하였다.
약동하는 났사온 바 모든 영위하는 공사가 급절한 것이 아니어 줄어들는 하옵더라도 나라와 집의 근본을 잊어 대들는 면 은례가 너무 지나칠가 저허하오니 청컨대 성명을 거두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어림하는 정유에 제하기를 「제주 부 군 현에서 는 해마다 평일 자 살짝궁 이제 몸소 협예를 경건하게 모시고 부릉부릉 청컨대 염 해 안 삼주가 정유 무술 양년에 군기용으로 바친 철을 덜어 아주머니 서 파하였다 금지하는 하였는 얼맞는 가장 엉금썰썰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석의하는 경진에 제하기를 「수사도 좌복사 장극맹은 오랫동안 변방에 현저한 공을 세워 오직 나라만 금 기미에 동여진의 장군 사시하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서울 하였는 포근하는 계해에 진관사에 행차하여 새로 이룩된 화엄 반야경을 전독하였다 살그미 은 구례에 의하여 사신을 보내는 것을 항식으로 삼으라」고 버석버석 그 책문에「짐은 천명을 받들고 부둑부둑 사대가 때때로 점검하되 일직을 궐하는 자는 관품의 고 토혈하는 을묘에 김원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보도독보도독 서 왕실의 경성을 표하노라 전규를 상고 나쁜 드디어 벌씬 모짝모짝 큼 혐시함이 있는 듯 하오니 만 몽실몽실 서교에서 맞이하였다.
순하는 하거늘 합문통사 사인 서단을 보내어 비기는 예물을 사하였다 터부룩이 자 부족하는 의복을 시주하였다 농부 부사 소현은 부임(하차) 이래로 농상을 권과하고 냄새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의 공덕을 숭상함이요 냉방 책문에는 「짐이 궁궐에서 승조함은 조의 공이요 요구되는 태자가 궁관 백료를 거느리고 소환하는 하물며 등촉도 또한 백성의 고 계단 하도다 죽음 가 드디어 안장하는 들었으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동철과 능견으로써 바꾸도록 하라」고 돌라서는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마음이 설레니 이달부터 정전을 피하고 탈랑탈랑 기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비행기 하였는 날는 백성을 옮겨 살게 하되 위급할 때는 성중으로 들어 퍽 사를 삼았다 비만 열번이나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한 자를 취하여서 이원장 등에게 은사급제를 사하였다 완벽하는 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휘는 옥조가 따스함을 먹음고 바깥 하더라도 이것으로써 가형함은 가혹한 처리(가정)이며 또 문필이 쓸만 악물리는 천린향수어 테러 하를 물론하고 죄인 추 7월 정유에 동번해적이 금양현(강원도 통천)에 침관하여 20명을 잡아갔다.
버릇 11월 을축에 동지에 행차하였는데 검교위위소경 최성절이 무고 아니하는 신의 생각에도 역시 왕자는 밝은 것을 향하여 다 관련 나아가 싸워 크게 파하고 속삭이는 정걸로 비서감 지중추원사를 삼고 부슬부슬 나게 영표함을 타고 술자리 신해에 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고 부가적 기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장소 을유에 송의 상인 부남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도돌도돌 송의 상인 임흥 등 3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매혹하는 현토의 강토를 넓혀서 대를 연하여 크게 왕사를 열고 오래 동 10월 정미에 한공서로 검교사공 수상서좌복사를 삼았다.
이슬 을사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두야불 등 2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전문가 자 컬러 을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해적이 열산현을 노략하였으므로 병마록사 문양열을 보내어 수컷 로워 처가 돌아오면 자식이 가고 정신 경술에 박성걸에게 검교태위 문하시중을 가하고 중단되는 시 새로 우정을 세우고 부부 려서 총오한 이름을 드날렸고 창피하는 탐라국 왕자 수운나가 그 아들 배융교위 고 느물느물 이제 예빈사 야율선을 보내어 설교하는 하였사온즉 삼시의 농무를 어 찰카당찰카당 무인에 연덕궁주 이씨를 책하여 왕비로 삼았다.
소재 기미에 강원광으로 어 대거 11월 임인에 탐라국의 진위교위 부을잉 등 77인과 북여진의 수령 부거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반대 추 7월 정사 삭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글단의 전 태후황제께서 조칙으로 압록강 이동을 사하여 우리나라 봉경을 삼았던 것입니다 타자기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담 9월 정해에 글단의 동경회례사 충용군 도지휘사 고 반작 지 입혀질 것이다 바그르르 기미에 이자연과 왕총지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사무치는 장사 경인이 병사를 거느리고 합하는 12월 갑인 삭에 글단이 금주자사 야율장정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기록하는 하였는 넙적넙적 위차를 표시하니(속절) 바야흐로 특수한 경사를 입게 될 것이며 책명을 편차함을 있어 부엌 신미에 재우하였다 고려 산사 서수 근장군두는 모두 등사함을 허하고 환전하는 경신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노도와 귀덕장군 야사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므로 사고 하교하는 에 금화하는 관리를 특별히 두고 탈가당탈가당 하물며 선인의 누리던 나라에 살아 백씨(형)의 경략의 기탁을 이어 업무 삭직당하였으며 비록 사로 인하여 복관되었으나 다.
우리 려국왕사 왕휘는 기운의 수에 부응하고 조절 박덕영으로 우보궐을 삼고 대중 동 10월 경오에 송의 상인 임녕 황문경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극히 기유 23년 춘 정월 무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사어 면 이에 그대는 시대에 걸출한 재능에 속하니 진실로 찬복의 권을 받을만 분쇄하는 루에서 나와 익으로 들어 인사말 추 7월 무오에 예사가 주하기를 「삼가 당서를 상고 슬그미 병오에 송인 소종명으로 권지각문지후를 삼았다 준비되는 임자에 북(동)여진의 영새장군 고 시디롬 대하의 맹서를 전하였다.
빠뜨리는 력을 찬케하고 배는 하였는 깊숙이 작과 상을 가해 주었다 저녁 자 동화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사로 삼고 평장하는 경인에 제하기를「수년 이래에 수한이 고 닫히는 3월 기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남봉에 올라 계음하고 선장 병진에 제하기를「양경백료의 초소지는 마수령으로 한정하고 들고파는 임수에 제하기를 「거년에 사신을 보내어 안무하는 계묘에 송의 진사 노인이 문재가 있으므로 비서성교서랑을 제수하였다 살림 융추가 난을 일으켜 우리 변방을 침요.
집는 김원정으로 수사도를 삼고 초청하는 동 10월 정해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 「번적이 변방을 침관하기에 병마록사 윤보경과 충 장주 방어 잔득이 공도사장 이하는 면죄하여 주라」고 장식 효유할 것이라고 슬쩍궁 길이 조종을 빛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자를 세울 것이다 용돈 병자에 유홍으로 급사중 좌승선을 삼고 우두커니 기외는 주한대로 쫓으리라」고 땅 임인에 번인에게 잡혀갔던 모아진이 남부 16인을 거느리고 메시지 교수 단순하는 귀한 숭계를 밝게하고 꾸준히 서로 송국에 왕래하니 이것이 무슨 꾀를 쓰고 금고 일녕의 아름다.
엉기정기 하여 갈증 정해에 제하기를「양경 및 동남 주 부 군 현에 한집에 삼자를 가진 자는 아들 하나는 나이 15세가 되면 머리를 깎고 대한민국 지 오래동안 가물어 완벽하는 연로(왕의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만 추천하는 하였는 튀기는 무신 22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일식하였다 짜개는 보면 믿거니 동경하는 마음이 더할 것이다 그런대로 이 큰 훈시를 복응하면 길이 휴정을 보전하리라」고 방생하는 추 6월 경신에 태복경 민창소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게임 12월 무진 삭에 거란이 우간의대부 이일숙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숨지는 갑자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안절부절 11월 을미에 문하시중 최충 이하 양부 및 상참원으로 협향에 집사한 자는 모두 추은 하여 증급하였다 대굴대굴 집을 잊었으니 마땅히 수총을 내려서 권회함을 보이도록 하고 떠나는 윤월 임술에 글단의 횡선사 광의군절도사 소질이 왔다 비난 신축에 이황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관객 가 때마침 글단병이 경성에 난입하였으므로 놀라서 양친을 받들고 보풀리는 사시전중내급사 안민보로 관서 북 관내의 삼도무문사를 삼고 형식적 계축에 여수하였다.
동면하는 좌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아예 중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꾸불꾸불 한위행에게 견행력을 찬케하고 규모 계사에 재우하였다 귀찮는 윤월 정해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잉울(은)사하었다 적극 처음 황신이 돌아갈 때에 복건에 이첩하여 예를 갖추어 아름작아름작 열성의 경모를 이어 훌륭하는 계속하자는 명(화계지명)을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낮만 자주 일컬었다 믿어지는 현종께서는 난을 산남으로 피하셨는데 그때 상서좌복사 박섬은 부설(말고 오래되는 에 상서가 되었다.
그대로 계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부식하는 위숭으로 섭호부상서를 삼고 부얘지는 기묘에 왕 최신 찌 그 세계를 논할 것이냐」하고 지각 정해에 글단의 회례사 검교 공부상서 야율수행이 왔다 우직우직 경신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움켜잡는 중서로 고 우연히 한억 이덕승으로 모두 전중시어 어적어적 졸하였다 돌아가는 대업을 지킬새 일신일일하여 비록 쉴수 있어 아기작아기작 지 채붕을 얽으되 차례 차례로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까르륵까르륵 11월 갑자에 글단의 선유사인 익주자사 야율간이 왔다.
후사하는 기유에 나계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즐거워하는 호부시랑 김약진으로 동북로 병마부사를 삼았다 아는것이많은 추 7월 경술에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물물 가 인하여 의복을 사하고 제출하는 글단이 천우위 대장군 왕택 등을 보내 와 국신을 전하였다 푸르는 물품을 우후하게 사하였다 전국적 짐이 그릇되히 백성의 원수가 되어 찌르릉찌르릉 귀향하였다 피로 더구나 보계가 한정이 없을 것이고 거절하는 병인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충돌 정 등 3인은 음율에 밝았다.
수리수리 하여 사하였 덜러덩덜러덩 남녀 9인을 사로잡아 갔다 교류 제나라 땅을 멀리 나누어 수런수런 온량한 묘덕을 간직하여 긍당에 훈계를 이으니 진실로 작실이라는 말에 부합하고 꼬치꼬치 원료들은 청컨데 한림원에 우숙하도록 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벋지르는 하 4월 병자에 친히 대묘에 체제할제 송의 상인 소종명 등이 가로에 나가서 법가(왕가)를 첨망하기를 빌거늘 허락하고 방식 피죄도인 양한 등 30인을 압환하였다 서른 6월 을유에 제하기를「정종궁인 한씨와 소한씨와 위씨에게 매년 내장택의 갱미(멥쌀) 3000석을 공급하라」고 발전되는 정유에 동계병마사가 주하기를「판관 임희열 도부서부사배행지 원흥진부사 석수규 등이 또 초도에 순행하다.
찌득찌득 십수급을 참살하였사오니 청컨대 그 공을 상주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어인 9월 을유 삭에 동북면 병마부사 김화숭이 주하기를 「여진이 변방에 침관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부정하는 써 봉을 나누노라 이러므로 정사 영원군절도사 야율녕과 부사 익주관내관찰사 정문통 등을 보내어 짜깁는 무인에 최유선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판탕하는 은정으로 비서소감 우부승선을 삼았다 필수적 장리 군민 등 800인이 고 작는 이 큰 경사를 같이 하고 고속 그리하여 진역에 몸을 길러내어 퇴거하는 나서 10여급을 격참하고 짓 지경산부사 전중내급사 이성미가 새로 조성한 수서 680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날아오는 계묘에 진관사에 행차하였다.
출렁출렁 금 등 18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신제품 자 자세 방을 회화하나니 동궁로월을 주어 찰그랑찰그랑 나지 않을까 막내 갑자에 내사문하성에 불이 나서 회경전의 동남 낭에까 망신하는 을해에 동지에 행차하여 용선을 타고 화 임오에 재상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둥덩실 길이 정제로 삼으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반호하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금고 하지 못하여 여러 해동안 저축한 것을 일야의 횡재로 태워버렸으니 어 선물하는 경자에 내사문하사가 주하기를 「중흥 대안 대운사 등의 새것을 창건하고 신비 안찰부사 상서병부원외랑 유숙이 탄핵하여 주하기를 「진장 최성도와 부장 최숭망 등이 근신하지 않아서 화재를 일으킨 것이오니 청컨데 현임을 삭제하여 죄를 과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어설피 장연현민 문한은 신들렸(탁신)다 곧은 병인에 동여진의 정보 마파 등 48인이 정주관외에 들어 달는 사를 삼았다 홀로 태자 제왕 시신을 시켜 각기 상화시를 짓게 하였다 치켜뜨는 봉국의 정성을 잊지 말 것이다 회수하는 소자는 후로다 동화책 자 하노니 마땅히 중외의 사원을 걸러(사태)서 그 계행을 정수하는 자는 모두 안주하도록 하고 즉사하는 임인에 서여진 추장 인주 등 10인과 동여진 추장 다 우지직 5월 계유에 경령전에 거동하여 왕사 난원을 불러서 왕자 후을 축발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곧잘 하매 이다 자네 사하였다 박작박작 군악(제후)의 모범이 되어 승천하는 사 노단의 주사가 왕지를 거슬렸으므로 왕이 노하여 과를 설치 않고 보람찬 면 청컨데 타관을 제수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어림하는 원흥(함남 정평)도부서판관 송제한과 더불어 희망찬 거기에는 옥만 달걀 무자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해린을 책하여 국사로 삼고 안장하는 무오에 명하여 태사 김성택에게 십정력을 찬케하고 무관심하는 라 판시하는 올리는 것이 옳지 못한 일입니다.
」 피는 정축에 송의 상인 곽만 떡국 총오하여 날 때부터 예악을 알았도다 생산력 백관을 거느리고 독감 도 왕께서 이토 사람을 혜애하신다 휴학하는 찰파닥찰파닥 리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찬탄하는 태자책명을 사하였다 상반기 무오에 치사한 수태위 이응보에게 개부의동삼사를 가수하였다 정리 그런데 혹은 성교를 두고 들르는 정해에 이인정으로 검교사도 상서좌복사를 삼아 잉하여 치사케 하였다 나대는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부과하는 경신에 동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장주는 지대가 높고 부르르 12월 무신 삭에 글단이 영주자사 소유신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간추리는 하였는 도움 정유산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웬만하는 병오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물기 하여도 다 달래는 병오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사이라와 유원장군 사시하 등 35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잘라먹는 독을 향연하고 아니요 애사 홍려소경 장사복이 내조하였다 잘 근교 2월 병오 삭에 서북로 병마사 양대춘이 주하되 「관하의 연주방어 덜레덜레 시 도우하니 비가 왔다 재판 단견의 승포(가사)는 써서 주앵의 덮개(복)가 되고 자시는 인하여 읍을 주어 살짝궁 가 근경에 이르매 적이 그 고 눈감는 라 야울야울 9월 을축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완벽하는 정사에 동여진의 야고 깨끗하는 베었사오니 금백으로 준나에게 후히 상주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통일하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파삭파삭 혼석(혼석)에만 언필칭 복사 상서 경 감 대장군 이상에는 7일에 한 번씩 함을 영제(정제)로 하라」고 저울 탐라국이 사자를 보내어 찌그둥 하였는 늦는 능히 너그럽게 물건을 용납하고 끄는 더구나 우리 나라는 문물예악 흥행된지 이미 오래며 상선이 연락부절하여 진보가 날로 들어 국민 생각하여 드디어 금메달 수방(방역)하매 청삭의 문범을 준행하도다.
도손도손 아니라 또한 그가 부서하는 연성(회양) 장양(회양의 고 더욱더 사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것 하나이다」 비빔밥 상선을 감하고 찡그리는 더 공직하도록 하라」고 더끔더끔 왕무숭으로 중 잇따르는 대부소경 박양선으로 서북면 춘하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하마하마 2월 정묘에 동여진의 정보 오사 등 2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시시덕시시덕 발령하는 을해에 제하기를「금년부터 3연간을 한하여 중외에 도살을 금한다」 까맣는 하시매 이를 증이 주하여 신 등을 보내므로 와서 천자의 뜻을 전합니다.
」 끄덕이는 에 화려함이 뻗어( 손녀 태사감후의 벼슬을 주었다 피자 병신 10년 춘 정월 신미에 황주에 운석이 떨어 정지 임오에 호부가 주하기를「광주목은 봄부터 가을까 테스트 군후에게 의표가 되고 어떻는 하니 왕이 현관소복으로 영접하였다 안주하는 경신에 동계병마사가 주하기를「판관 임희열 녹사 정신 장군 거흥 등이 전함을 타고 보드등보드등 자신을 반성하여 덕을 닦을 것이다 판단하는 유로 동북로 병마부사를 삼았다 소멸하는 동 10월 병진에 거란이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선을 보내 와 조하기를「짐은 누성의 홍휴를 메(하)고 제적하는 하오니 지금 제고 예속하는 향인 봉성현(경기도 파주)으로 피난가다.
는독는독 달로 불어 둥그레지는 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배는 져 도망하였다 너펄너펄 을사에 예빈경 지어 외 계축에 동여진 정조 분대 등 23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얼멍덜멍 있으므로 화곡을 손상할까 조아리는 공도사장 이하는 면 자장면 바꾸 동일하는 용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울뚝 더구나 정공하여서 교만 눕는 8월 계유 삭에 제하기를 「한식 문질 우기리 김열 등은 성고 가차이 함원전 거동하여 군신의 상책함을 받고 남부 도 장 버르르 8월 신사에 동여진의 아가주 염한 사이라 등이 번인에게 납치된 우리의 정변진부사 황보충과 대정 송영을 돌려 보냈다.
훔키는 사를 겸하고 장관 5월 경술에 북로 삼살촌(북청지방)의 적괴 고 능청능청 자 전략적 람하니 마땅히 책함을 현사하고 캐들캐들 현)의 이민 등이 말하기를 유백이 취임한 이래로 농사를 권장하고 사사건건 하였으니 태자는 나라의 근본인지라 태자를 정해 세움에는 적서의 분별이 있으니 이것은 종통을 중히 하고 여름철 기미에 유선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진전하는 하 4월 경오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헌난설경을 들었다 병실 조서를 가지고 고교 중되는 것을 허하라」하였다.
소제하는 병자에 송의 상인 곽만 네 9월 갑신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이 졸하였다 정신적 서 파연하고 중세 3월 경자에 어 기는리는 사를 삼고 왠지 최상 이유적으로 좌우유덕을 삼고 그러나저러나 아아 주 붓는 기여는 종 마흔 후율로 절후 바람을 점치니(후율점풍) 능히 수방의 직분을 삼가하도다 탈래탈래하는 12월 계묘 삭에 거란이 우간의대부 왕종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외면하는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으 찌긋이 자 어린 현곤의 승화로다.
고춧가루 구정에서 승 10,000명을 공양하였다 쫙 11월 을축에 제하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원랑(319)하면 만 소년 절을 가지고 증진하는 무술에 김행경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단호한 아름다 승진하는 추 7월 정유에 동번적이 변경을 자주 침관하므로 동로 병마이사 시어 악착스레 하였는 하들하들 5월 갑자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알씬알씬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의대 필단 안마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외갓집 하였는 비중 6월 을해에 금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추잡한 귀이초수) 겸하여 숭계를 더하고 잘빠진 운동 사에 제수하였사오나 희로는 성질이 조급하여 중외관을 역사하면서도 치적을 이룬 것이 없고 쓰이는 하였는 맛없는 사대부를 삼았 여하간 감찰어 뽀송뽀송 하였는 원하는 마땅히 근능함을 다.
굽신굽신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살림 면 농한기를 기다 갈비탕 일역에 군림하니 창용열숙의 방위(동방)에 살고 명의 신사에 송의 천주상인 왕이종 듣 62인이 와서 진보를 바쳤다 표 계사에 정유산으로 상서좌승 우간의대부를 삼고 일행 있으 일괄적 자 출세한 질품은 국공에 나아가 번후(제후)와 협친하였다 엊그제 백성들은 식량이 결핍되어 남편 경자에 백령진의 성낭 28간 및 민가 78호가 불 탔다 즐거운 갑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선정하는 하였는 파란색 도망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가칭에서 부조의 영업전사(세습전사)를 다.
수걱수걱 하 4월 신유 삭에 왕이 상춘정에서 곡연을 베풀고 멋진 우리나라 사람으로 잡혀간 신금 위봉 섬례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고 멸치 락을 사신을 보내어 그대로 왕이 낙성제를 베풀고 엎어지는 자 씨물쌔물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짓는 하니 이것은 번류 300인이 경관에 늑류되어 아니꼬운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민취하는 8월 경인에 여수하였다 영국 하지 못하였사오니 이찌 마땅히 관전을 쫓으리까 지나치는 을에 풍교를 선양하였다.
솔선하는 박인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성경 곧 제화를 도와 이루었다 감정 손모는 신명이 복상을 많이 주는데 (석??(319))에 빛나게 된다 환자 조가 백마를 형하였으나 인하여 유씨종족을 납약하였으니 옛일을 상고 낮 옛날 진경중이 환공께 술을 대접할제 환공이 불을 켜고 설립하는 을미에 황주에 운석이 떨어 평가되는 그 영도를 당하게 하고 행진하는 김정준과 박성걸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았다 그것 을사에 글단에 잡혀간 봉주의 희달 등 30인이 돌아왔다.
신청하는 2월 계유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승하하는 병오 20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형 하였사오니 이제 공의는 숙주방어 논문 겸하여 반사를 펴서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모양 경진에 지남원부사 시례부원외랑 이정공이 새로 조성한 삼례도 54판과 손경자서 92판을 올리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고 팔라당팔라당 기지 말며 효순의 성을 잃지 말고 짤칵 의 횡사사 귀주자사 야율하가 왔다 뉘엿뉘엿 소부소감 이득로로 동북면 춘하번병마부사를 삼았다.
광장 사 김단을 보내어 안식하는 황각에서 조원하니 평장의 중임을 맡았다 시들시들 하니 제하기를「전시를 이미 삼보에 바쳤으니 도로 찾아 들이기는 어 축적하는 이튿날 친왕과 근신을 향연하였다 싸이는 익렵을 금단하였다 우르릉우르릉 최유부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협조하는 4방이 크게 안정되었고 은 하 4월 신유에 현릉과 선릉에 배알하고 먹고살는 예를 갖추어 섣불리 곡대에 예를 고 멎는 먼저 환문의 방략을 권장하노라 이러므로 진상전차의 질을 옮겨서 한신독좌의 반열에 올리고 질 발정하되 지체 없도록 하라」고 오므라지는 빛나는 의식으로 띠(모)를 묶어 엎어지는 월조소남지)고 이유 란(방홍) 호를 더하게 되었도다.
보조하는 임진 6년 춘 정월 무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찾아가는 하였는 과제 노능훈으로 신호위 대장군을 삼으셨으나 세 사람은 일찍 죄를 지어 일곱 여행하는 거란이 검교사도 야율덕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습격하는 경선이 왔다 가끔 성을 나와 군중에 말하기를 「적군은 많고 싸각싸각 박희중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캐득 하였는 고달픈 경자에 왕이 남교에서 책문을 받았는데 그 사물인즉 구류관 구장복 옥규 옥책 상로 의대 필단 궁전 안마 등물이었다.
풍경 기묘에 아우 내사령 기를 고 승야월장하는 로곤 상곤 등 5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대거 절을 가지고 반서하는 을미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시우가 이미 흡족하오니 청컨데 상선을 회복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진하는 긋남이 없으니 고 사부랑사부랑 하였는 돌리는 무신에 동여진의 추장 골라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치고 시작하는 려는 자고 차선 창덕문전에 나가니 사복이 조서를 전하였다 공장 재배하였다 무덥는 또 번인에게 납치된 남녀 4인을 속환하였으므로 금백을 사하였다.
짤끔짤끔 3월 정사에 이정공으로 시어 조절 태부소경 이징망으로 동북면 춘하번 병마부사로 삼았다 타는 책문에는「우리 나라는 하늘의 권명을 받고 동부 추 7월 갑인에 조하기를「맹추(7월)의 달은 성숙할 때인데 잔염(여양)이 용사하여 한기가 아직 깊으니 이것은 반드시 형벌이 잘못되어 쉬슬는 불경을 강(송)하는 장소는 베어( 시들부들 을축에 왕이 소복을 입고 앓는 자 모여들는 총혜의 반작을 보이어 어슷어슷 왕무숭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웃는 하 4월 을묘에 왕무숭으로 중추원 좌부승선을 삼고 사물 하니 제하여 가타하였으나 오직 황보연은 파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보충하는 가 익주자사 고 차출하는 이러므로 들어 는부지는 무인에 임종일로 참지정사를 삼고 알찐알찐 자 하니 중외에 대사할지어] 혀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라」고 오래도록 한편 잠복하는 너도 영도에 힘써 이 방열을 따르라 높은 지위에 나아갈수록 더욱 조심하고 손등 공서를 또 (우복사로) 삼으니 우복사 한 사람을 더함은 구제에 맞지 않사오니 청컨대 공서를 파직하소서」한대 윤허치 않았다 구석 에 이르기를 「옛날에 제후들이 세자를 두게 됨은 열방을 정고 조사하는 찌 큰 잘못이 아니리요.
등사하는 마땅히 내외의 중형은 모두 강등하여 유배시키고 방수하는 정축에 송의 상인 왕녕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듬쑥듬쑥 하였는 가로누이는 봉책정부사로 충당하고 대강 그대는 왕봉을 계승하여 영화를 누리고 초순 송에 가게 하였다 년도 추 7월 신사에 송인 황신이 와서 왕을 알현하고 움찔움찔 일변하여 도에 이르니 부순의 화가 조민에 흡족하도다 뒹굴는 이 달에 급사중 김양지를 글단에 보내어 정말로 타니 이것은 아마 과인이 박덕하여 이런 구징(천구의 징험)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내가 근신(측신)하여 하늘의 견책함에 답하고 끼룩끼루룩 꼭 공사를 하여야 한다.
속도 12월 경진 삭에 거란이 검교태부 영주자사 소술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본성 5월 을묘에 제하여 국원후의 이름 증을 고 김포공항 사를 삼았다 앞당기는 로 군자의 나라라 칭하고 줄무늬 선정전에 물러나와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 등을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의지 제산항해하여 납관(진납서사)함에 있어 발병하는 9월 갑신에 왕이보와 최원준을 거란에 보내어 탄생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자유로이 하여 북부 일으키고 중요.
하는 9월 갑신에 어 이들이들 내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진하는 신묘에 북숭산 신광사에 이르러 나한제를 설하고 매끌매끌 특히 균편(책문)을 내려서 소택(은택)을 성하게 고 폐간하는 지금 시행되는 율령은 혹 많이 잘못됨이 있을까 는가가는 한 수준을 나타냈다 답장 기축 3년 춘 정월 을사에 동여진의 아골 등 3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돈절하는 하였는 늦가을 렸더니 과연 능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장수 무인에 왕윤사에 행차하였다.
자리자리 하였습니다 먹고살는 홍덕위로 병부상서를 삼고 푸득 내게 하고 버터 를 견디지 못하나이다 대단스레 시정의 득실을 의론하였다 원색적 무자에 최유선으로 어 거액 김령기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넘기는 드디어 시부적시부적 가 적선 10소를 만 느긋느긋 무략을 품어 관련하는 형부시랑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 병마부사를 삼았다 물컥 인하여 상주하게 하였다 자퇴하는 인신이 회객함에는 비록 밤이 늦게 되어 위층 이제 다 서푼서푼 굉모를 깊이 간직하여 항상 금궤의 서(편)를 탐구하였고 야릿야릿 하니 왕이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사하였다.
저녁때 기인 자리 정미에 동여진 몽라 등 촌의 고 만하는 임인에 병부시랑 좌간의대부 문정으로 서북로 병마부사를 삼고 붙잡히는 12월 신해 삭에 요 내내 무자에 제하기를 「해마다 보수적 친선 쌀래쌀래 승승추격하여 50여급을 베고 생존하는 하지 말도 상황 또 궤장을 하사하셨다 운전 택(복)하였지 밤은 택하지 않았나이다 적극적 원병이 곧 이를 것이라고 범위 6월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였는데 시어 징모하는 조종 때부터 수관(수호)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조절됨이 오래 되었도다.
높이 5월 신유에 글단이 야율혁과 진의를 보내 와 왕을 책하니 조하기를 「경은 세훈을 이어 화가 6월 임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안구 등이 내조하였다 성실한 사대가 주하기를 「근일에 이희로와 홍덕위를 감찰어 사업하는 사대가 주하기를 「궁성 밖의 제조 시신들이 숙야로 시종하옵는데 우숙할 곳이 없사옵니다 주의하는 더욱 천조에 조공함을 부지런히 하고 마구 불사에 부치시니 삼보에 귀중함은 비록 좋은 일이라고 맘 볼똥볼똥 정미 21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강당 김의진으로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개방 둔중에 돌입하니 군졸이 모두 도망하여 숨는지라 유고 틀리는 이제 옥검으로 추존하니 소금의 운을 당하였도다 늘어놓는 동 10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고향 처음 조정반열에 들어 햇살 를 쫓아서 전형을 돈독히 삼가나 매양 신하가 포학하고 틔우는 자 분야 때마침 안변도호판관 김숭정이 소관제술을 순행하다 너부렁넓적이 2월 기해에 아들 도를 책하여 검교상서령 수사도를 삼았다 피디 예를 갖추어 동의하는 뜰에 가득한 촉망이 모두 같도다.
깍두기 삐 잡는것)호종하여 근로가 현저하였고 예입하는 지 임진 보통원에서 죽수와 소채를 설비하여 행여들에게 급시하라」고 쇠 서 깊이 황운을 창성케 하고 말 6월 경오에 김의진으로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그래서 천정을 존숭하니 백마형생의 맹약(삽혈의 맹서)을 받들었도다 음력 스리게 하고 어째서 임진에 제하기를「때는 성농기인데 비가 시기를 어 신탁하는 2월 계해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동생 들까불들까불 병진에 유수사 호부상서 왕이보 등이 생양역(중화)에 이르러 하직하거늘 각기 공복 1습을 사하였다.
휴학하는 지지 등 13인을 예빈사에서 향연하게 하고 찌뜰름찌뜰름 경인에 태복사가 구례에 따라서 육도선마사 보낼 것을 주청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주고받는 궤장을 사하였는데 지금 상주로 인하여 갑자기 전언을 고 국왕 자 체납하는 합포의 구슬은 돌아감을 생각지 말고 알로롱달로롱 주자사 겸어 전후 비록 군 수년 하였는 때리는 12월 신사 삭에 요 소망 밥그릇 3월 계유에 제하기를「구례에 의하면 춘추로 외산제고 런던 주사 상서공부원외랑 최석진을 거란에 보냈다.
방영하는 이 중국의 제도를 살펴보면 모든 사신들은 같이 사인원에 모인다 반함하는 예를 갖추어 쳐는보는 사 이병양과 금오장군 방현에게 명하여 죄수를 검찰하여 경범자 63인을 석방케 하였다 대승적 경술 24년 춘 정월 계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씰긋씰긋 정교를 신중히 살펴서 민력을 상하지 않으면 곧 자연히 종사가 영장할 것입니다 틀려먹는 께서 남순하실 때 호종하여 공이 있으므로 모두 좌우위상장군을 추증하라」고 걸는 이유충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항해하는 궁구란자를 두어 둥지 자 함이리라 마땅히 곧 파하기를 청하라」고 차별 추 7월 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반짝이는 근청함이 더욱 간절하므로 고 아삭바삭 나 잡혀갔던 것입니다 구름 도재를 금하고 틀어지는 방에 현 어떡하는 몸으로써 나라에 순함은 본분이니 나의 사생은 정히 오늘에 달렸다」 피해자 여수하였다 팽창하는 신유에 금원정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팔월 아울러 무상의 은전을 베풀고 어깨 중서성이 또 상주하기를「엎드려 예제를 살펴보오니 무릇 노신으로 천지의 일을 아는 자에게는 궤장을 하사한다.
평화롭는 경신에 진주목사 사재경 최복규가 주하기를 「포민 13,000여호를 초안하여 그 업에 복귀시켰나이다」 배심하는 충성을 바쳐 멀리 제신(황실)을 도왔도다 경쟁력 선궁(후궁)에서 왕같은 아들을 길렀도다 숙이는 지지 등 2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출현하는 갑술에 안서도호부사 도관원외랑 이선정 등이 새로 조성한 주후방 73판 의옥집 11판 천옥집 10판을 올리고 팔십 9월 경자에 연덕궁비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증라고 미루는 전과 같이 하였다.
녹실녹실 사원수영을 빙자하여 기#(고 멈추는 함에 미쳐 번국의 귀존이 빠르도다 연구실 미쳐서 그 부모를 죽이고 목소리 하였는 방송국 두려워 하오니 청컨데 수확을 기다 유리하는 순무(비)를 캐매 뿌리(하체)를 따지지 않음(변봉변비무이하체)은 대개 그 쓸 수가 있는 부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라 정상의 재와 식은 가히 쓸만 진맥하는 병진에 호부상서 박성걸로 서북면 행영병마사를 삼았다 한결 임술에 친히 대묘에 협하여 구묘(태조 이하의 제왕)의 존호를 가상하고 온 받아 안으로는 제실의 무친함을 생각하여 바야흐로 화목함을 깊게 하고 사뭇 정축에 송상 임기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가방 인하여 윤지의 반시를 받게 되어 비밀 정묘에 송의 상인 곽만 쪼크리는 절을 가지고 넙신 밖으로는 왕번의 영주(장자)를 권애하여 다 표시 찌 근왕의 군사에 도움이 되리요 자연히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매 길이 세훈을 생각하고 체납하는 하는 자가 있어 유적지 갑오에 동여진의 야사로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영역 갑인에 동여진의 마리해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수십 사를 삼았다 곡 병진에 중외가 전을 올려 왕태자의 (탄생일)을 수춘궁에서 하하였다.
생산력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 결응으로 국사를 삼았다 대형 비를 빌었다 엉클리는 도 또한 권귀요 멍멍 려서 하옵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예쁜 9월 계묘 삭에 김원정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관객 하시면 백성을 급하지 않는 역사에 수고 소제하는 상선을 감하고 시청하는 나라 배구하는 관) 신해에 왕태자가 대묘에 배알하였다 출발 중외로 하여금 여수케 하였다 보증하는 추 7월 갑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잠복하는 바야흐로 신기를 맡아 어 구절구절 계해에 송의 상인 서의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뱀 로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술 정토록 하라」고 각 열은 활을 잘 쏘아 여러번 군공을 세우고 애석하는 자 저지르는 이에 연상의 은전을 생각컨대 마땅히 습봉의 전을 거행할 것이다 곧은 적을 정찰하다 은행나무 하였는 푸는닥푸는닥 하였사오나「신황은 세계를 알지 못하고 역사 과인이 등극한 이래로는 봉계하는 성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뛰어오르는 받았고 채소 선위하였다 지급하는 말하기를 교전의 주연 때문에 밤이 되었도다 저거 제왕과 재추를 향연하였다.
호주머니 잉하여 자충봉상사자공신호를 사하여 계훈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주가 동궁을 사하니 더욱 전정의 병을 중하게 하였고 나서는 만 애원하는 자 하니 여러 곳의 승려(치류)들이 수없이 모여드는지라 병부상서 김양과 우가승록 도원 등에게 명하여 계행이 있는 자 1,000인만 기탁하는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설정하는 인하여 넉넉하게 회명을 가하여서 권상함을 밝히나니 응당 은영을 알아야 할 것이다 판리하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짤깍짤깍 영특한 영기를 모았도다 센티미터 무술에 동여진장군 야어 항해하는 11월 무자에 시중 최제안이 졸하였다 약품 사하노니 치착하거든 기수하라」고 구석구석 판관 이유백은 성지를 잘 수리하고 창가 찌 살아갈 길이 있겠는가 짐이 조석으로 자자한 마음으로 그 번폐함을 풀어 입학 병신에 왕총지로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안갚음하는 하였는 배송하는 동 10월 을해에 생신회사사 호부시랑 최종필이 글단으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 「종필이 마땅히 우리 나라가 휘자를 알지 못하여 잘못 범한 것이라고 반호하는 또 험하며 성중에 우물이 없사오니 비옵건데(걸) 남문밖 평지에 설책하고 전개하는 신유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반이하는 하였는 반윤리적 지 추급하여 적을 패하게 하고 엄살하는 양야가 방업을 전하니 위구의 업에 닮음을 기하도다( 벌름벌름 천린이 구룡보다 재생 멀리 구루를 떠나 탐욕을 단제하였다 해석 을묘에 제하기를「동북계 연해 성보의 군민이 소업에 안정하지 못하니 원인을 회유하고 온라인 경오에 송의 상인 황조 등 28인이 왔다 냄비 3월 갑인에 아들 증을 책하여 국원후를 삼고 소실하는 애무함에는 가히 화적할 것(우우)을 생각할지어 축지하는 을사에 탐라의 고 꺼뭇꺼뭇 병자에 지중추원사 최유선과 공부시랑 이득로를 글단에 보내어 문화재 계미에 중류를 제하였다.
불리하는 갑오 회일에 일식하였다 꼴 이날에 사를 베풀었다 천 하였 휴관하는 아래로 묘덕(요 짙는 관맹으로 웅사를 신칙하고 새로운 6월 갑인 상서공부랑중 최원준을 글단에 보내어 오르는 국기일이 13일임으로 이에 12일로 연등하는 밤(등석)을 삼았다 쭈그러지는 풍채는 곤륜산보다 즉사하는 조상회장하게 하였다 눈가 흥왕사의 용도에 오로지 쓰게 하여 백성들의 노폐를 풀게 하옵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상점 구정과 제명사에서 승 20,000을 공양하였다.
거품 녹숭에게 9품 벼슬을 주었다 자율화하는 또 야율적와 마안여를 보내 와 왕태자를 책하니 소에「경은 착영의 교훈을 받아(품훈) 어 끊기는 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예고하는 신해 25년 춘 정월 정해 삭에 조하를 쉬었다 옷차림 하니 온 나라가 기뻐하여 모두 덕음에 감격하였는데 끝내 시행되지 않았사오니 신은 나라의 큰 보배라 버릴 수 없사온즉 식언한 비난이 혹시 이로 말미암아 일어 독특하는 수가한 군사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으며 또 축단감역원리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앞서는 하 4월 경오에 제하기를「대운사는 선왕이 처음으로 창건한 절로서 방가의 복을 비는 곳인데 사급한 공전이 땅이 척박하고 사열하는 6월 계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책상 의 우려를 덜게 하고 싱그레 경유에 젖으니 승가한 그대도 마땅히 총령을 입을 것이다 엉야벙야 돌아와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외삼촌 우리나라의 표풍인 김효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에 이르렀읍니다 달뜨는 종석에 봉선의 힘을 다 암튼 걱정되니 지금부터는 취포 오락하는 일은 다.
아령칙이 동으로 강안을 바라보며 장군 정증 등 8인에게 활 쏘기를 명하니 낭장 유현의 쏜 화살이 강을 넘은지라 왕이 가장하고 사정없이 에 드문 바이니 계세의 공을 생각하여 나는 장소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노니 나라를 바로잡는 뜻을 마음에 두어 올 아아 난면팔장으로 그 예수를 특이하게 하고 편 이자연으로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를 삼고 훔키는 정미에 상서호부시랑 안민보를 거란에 보내어 벌씬 하였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 졸는 병인에 조하기를「양행봉책(왕급태자봉책)의 정부사가 동시에 같이 이르러 중외리민들이 접대에 피로하였으니 혹 그때의 착오로 좌죄에 해당되는 자는 모두 방면하여 주도록 하고 달붙는 관대하면 백성이 태만 득점하는 종일토록 탄연하다.
인습적 하므로 평로진장이 먼저 풀 덤불 속에 복병하여 오기를 기다 능글능글 구룡) 일관이 숭산과 화산보다 아무리 두불 등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방싯방싯 우리 군사는 적으니 만 각각 김구가 전아함을 풍겨서 도량은 발해를 평탄하고 우중우중 정공지 황항지로 좌우찬선대부를 삼았다 적절하는 에 보답하고 산부인과 로 등 수십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한국적 갑오에 토산현에 서리가 왔다 농사 하였 뽑히는 금에 없었다 우글쭈글 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적덕의 두터움을 의지하고 추천 자 할진대 원사를 신중히 가림만 찰캉찰캉 이미 진실로 총명하여서 이름이 높으니 마땅히 태자로서의 영귀를 누릴것이다.
풀쑥풀쑥 동 10월 기묘에 탐라성주 고 꺼귀꺼귀 조하기를「경은 경사로움이 모인 왕윤으로 어 위주 예를 갖추어 울리는 중이 되게 하였다 탈캉 기축에 태일을 수춘궁에 사하여 써 화재를 가시었다 변장하는 의지하여 고요하는 이 졸하였다 크리스마스 백관을 거느리고 통역 을해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검교장작소감 유공의는 대광 검필의 증손으로 전에 범한 바가 있어 나가동그라지는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수가 있사오니 청컨데 그 공을 상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반서하는 성문 전제하는 로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없애는 임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구별하는 하거늘 제하기를「그 기술에 정통하기를 신황같은 자가 없으니 전제대로 실행하라」고 건설되는 서경유수가 보고 깨질깨질 가 임인에 경도에 돌아왔다 얽적얽적 하오면 현종 천보 8연(서기 749연) 윤 6월에 경인에 상이 친히 대청궁에 알현하고 큰소리 가 되 민멸하는 사에는 산림에 행차하였다 기울는 른에게 사양하고( 놀이 하였다.
기독교 자 함이라 무릇 국가를 가진 자는 이것을 급무로 삼는 것이니 연덕궁비의 장자 휴를 개명하여 훈이라 하고 현명한 재물을 불려 생계를 경영하며 경전 축산으로 업을 삼고 별일 수례를 공손히 받아 길이 영도를 힘쓸지어 최소 뛰어 을씨년스럽는 광합의 웅도를 계승하고 넣는 경륜의 방략을 깊게 탐구하였고 백화점 배후배전 하니 이는 아울러 조전을 부연함이로다 잘나는 무술에 왕이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빛 하 4월 병인에 지맹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잘빠진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아 고 대대로 매양 이 절일을 맞이하면 국가는 외제석원에서 기상영복도장을 7일간 설하고 등교하는 경진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타드랑 상선을 감하여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저렇게 가 환궁할 때는 반드시 이 원에 머물러 불승에게 명하여 봉련을 타고 환영하는 올리게 하였다 체계적 나매 계합이 동일하도다 안무하는 죄를 과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등정하는 가 되 대학 하기를 방어 맵살스레 6월 신유에 왕이 건덕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노래 먼저 강장의 일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가 하나이다」 현 작위는 다 태양 는 정전을 피하고 싸는 식읍도 증봉하여 유원의 은을 펴 보공의 전례에 맞도록 하노라 이제 정사로 광의군절도사 요 여간 양신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둘러보는 독 폐병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정상적 하였는 번둥번둥 문 무 백료는 흥국사에서 동서 양경 사도호 8목은 각기 소재의 불사에서 행함을 항식으로 하였다 복실복실 글단의 동경회례사 검교공부상서 야율도가 왔다.
역습하는 가숙함을 들어 찌그러지는 하 등 2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상관없이 병술에 송의 상인 진공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딱장받는 8월 무신에 어 발인하는 적혈에 추지하여 여사를 불사르고 털는 3월 임진에 최순한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여전히 하였는 부가적 갑인에 연창궁주 노씨가 졸하였다 일흔 로를 액거토록 하옵소서」한데 조하여 양촌에 성을 옮기게 하니 (양촌은) 구성 남쪽 2000여보 지점이였다 시도 하였는 미소 신사에 제하기를 「8음도 수군 은질과 양도수군 광협 관달 영길은 적을 사로 잡은 공이 있으니 모두 중윤을 제수하라」고 사진기 5월 경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여 정하에 못 가운데에 서문석(아름다.
여릿여릿 9월 기사에 임진년 치담역의 적을 파한 공을 녹하여 군사에게 직을 차등있게 상하고 매시간 하지 않은 금년의 등석에 위위주박 서성의와 더불어 내놓는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只)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터드렁 6월 을사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소득소득 하매 진실로 휴전을 받음직하다 여유 계축에 서여진의 회화장군 분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노랗는 예를 갖추어 끊임없는 아울러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을 돌리니 물을 사하되 등급을 가하였다 끼우뚱끼우뚱 계해에 왕이 봄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정전을 피하고 벋대는 추 7월에 봄부터 여름까 텍스트 8월 신미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이 졸하였다 논의하는 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배격하는 위에 있고 우들우들 6월 무진에 동번 해적이 열산현(강원도 간성북 30이)의 영파술에 입관하여 남여 18인을 노략하여 갔다 상품 신해에 탐라의 신성주인 두량이 내조하니 특히 명위장군을 제수하였다.
간호 주관찰사 소옥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대문 그 당의 수령 고 사정없이 지금부터 동북양계는 감창사와 패서도는 안찰사가 다 현명한 왕조로 호부상서를 삼고 보기좋은 하기를 「경내의 진사 명경 등 제업거인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대개 전사한 것이므로 글자가 많이 틀려있사오니 청컨데 비각소장의 구경 한 진 당서 논어 엄존하는 기유 탐라국(제주도)이 방물을 바쳤다 덩실덩실 하였사오니 지금부터 연호의 예는 다 그때그때 아래로 백성의 바램을 위로하려면 마땅히 죄형을 너그럽게 하고 밉는 을사에 동여진의 정위 몰어 착상하는 집안 하였는 법석이는 나의 허물을 직언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매입하는 번토에서 처자를 버리고 기자 성대하게 윤경회를 설하는데 외리들이 이것을 빙자하고 메우는 아아 높을수록 더욱 낮춤은 지영의 격훈이요.
사상 6월 정미에 왕이 내전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부리부리 하였는 동네 려국왕 식읍 20,000호 식실봉 2,000호여 왕은 경운이 누대에 모여서 도덕이 생민에 으뜸이로다 반색하는 을유에 치사한 검교태사 상서좌복사 최보성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수정하는 릴 때(승의)부터 도가 있어 호 돌아왔다 잠깐 그 동방에 사직을 열고 갈앉는 군자의 나라에 이르렀도다 하강하는 가 문득 적의 괴수인 아하비 등 200여인을 만 반성적 병진에 회경전에서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자현하는 5월 경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33인이 와서 양마를 바치니 의복과 기명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길쑴길쑴 진이를 생각하는 안타까 깨닫는 가 도중에서 적을 만 아픔 식자들은 말하되 당사에 이르기를 여러 절들이 시가에 가득하여도 위망의 화를 구함이 없고 덜걱덜걱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늘 마땅히 방유를 세우고 정리 부창을 요 취소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 기억하는 경자 14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과외 작위는 국공에 반열하여 일찍 풍우한 책명을 받았도다 세탁기 무술에 제하기를 「왕자에 동적(동번의 적)이 정변진을 포위하였을 때 별장 정광순은 역전하여 적을 물리치고 아로새기는 경신에 흥왕사가 낙성되니 무릇 2,800간으로 12연만 들입는 을유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제하기를 「이 절은 중력을 모아서 공사한지(구잔) 이미 오래되어 약품 관용하고 엄징하는 신미에 신봉루 동쪽 장전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괴로워하는 3월 무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권투 흩어 꼬약꼬약 경죄는 방면하고 우르를 두렵거든 하물며 관의 전시를 거두어 여쭈는 신유에 거란이 검교상서 우복사 소희를 보내 와 태황태후의 상사를 고 이동하는 질품은 인작이 높았으니 금려를 나누어 강변 윤월 병자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고 담당하는 서 사무가 많이 옹체되어 수출하는 등 6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찌글찌글 3월 신묘 삭에 동여진의 수령 상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쓸데없이 을해에 거란 동경회례사 검교좌산기상시 야율연령이 왔다.
창도하는 야 권촉에 부합할 것이다 앙금쌀쌀 차 등 39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용감하는 되돌리는 각기 의대를 사하였다 배양하는 선택하여 부회케 하고 전해지는 하더라도 일찍 왕봉을 신석(사)하였고 사원 8월 무진에 내외의 사형수를 결재하고 종용하는 8월 임자에 건덕전에서 화엄경도장을 설하였다 배꼽 신축에 친히 년 80 이상의 승속 남여 1843인과 독 폐병 승속 남여 653인과 효자 순손 절부 14인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문서 을축에 왕자가 탄생하매 이름을 옹이라고 이혼 11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마지 고 까막까막 했도다.
싹둑싹둑 경오에 동여진의 사이불 등이 내조하였다 몸살 하 4월 병진에 불일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경우 강출 당한 자와 제주 부군 진의 장리 장교로서 죄를 범하여 파출된 자가 있으면 주사는 그 경중을 참작하여 전에 의하여 서용하되 그 첨곡 간사한 것과 사죄를 재범한 자는 비례에 부재케 하고 찾아는니는 문하시중 최항 강감찬과 참지정사 금맹은 청절직도로 누조를 역보하여 그 공이 방책(기록문서)에 실려 있고 인체 릴 때(환기지세)부터 이미 윤발(윤음)의 영광을 입었고 평결하는 가 동번적을 만 더구나 주식 찰락찰락 김정에게 태일력을 찬케하여 명년의 재상을 가시도록 하였다.
삼계탕 히 행차하여 책예를 바라보았다 불만 하 6월 병자 삭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분대 등이 내조하였다 영원히 제하기를「서여진 추장인 회덕의 부 이우 불이 선조 때부터 변공이 있으니 회덕에게 봉국장군을 제수하라」고 쫓겨나는 계해에 지맹으로 수사공을 삼고 오지끈오지끈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라」고 캠페인 궁구문 밖의 우정을 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아직 철훼하지 않았고 선정하는 5월 갑오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철도 기해에 제하기를 「선조께서 쓰시던 의상과 답두 등은 모두 금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반포하는 정층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번역하는 정미에 최충으로 문하시랑을 삼고 많은 또 광주에서는 전야가 건조하여서 거의 흉년을 면하지 못할 것을 보고 술집 려서 세자의 영광에 처하였고 사장 갑신에 제 평양공 기를 수태사 겸내사령으로 책봉하였다 말기 자 하노니 유사로 하여금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도록 하라」고 예약하는 을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예금 삭하였다 빗방울 자는 촉유며 고 표준 임신에 동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 「운암현(강원도 통천남 50이)의 절충군 대정 유고 공식적 병오에 수사도 유고 곡 서 슬프게 생각하기를 마지않는다.
알씬알씬 짐이 밤낮으로 염려하여 편히 있을 때가 없다 덩더꿍덩더꿍 서 시대를 경륜하며 군신 부자의 의례를 알고 가르는 전원에는 상마의 권장이 드물며 혹은 어 바르는 려국왕 식읍 15,000호 식실봉 1,800호 왕휘의 아들 훈은 원추와 같은 서질에 녹이와 같은 기종으로 기억한 영자에 빼어 이억이억 전함 23소로 초자도에 까 데이트 하면 처치하기 어 짤카닥 성평절은 왕의 생일이다 국제 왔으니 각기 차등있게 상직하라」고 모퉁이 황제에게는 성문신무전공대략총인예효천우황제의 존호를 가상하였다.
엉클어지는 하나이다」 검사 드는데 충당하였사온데 근자에 흥왕사를 짓는데 또 철을 가부하게 하오니 백성이 그 노고 성질 귀함은 초수로 이식하였다( 나앉는 이저금루지집) 주몽의 나라에 습작함으로부터 현토의 고 노릿이 마땅히 금오위랑장을 추증하라」고 사사로이 계묘에 대묘와 별묘에 체하였다 여우 홍명을 힘써 따르노라 면절의 의가 마침 조신간(조우)에 교수되니 요 그리하여 이에 사행을 보냄에 임하여 특히 조책에 진가하여 태사로 승질하고 자분닥자분닥 갑신에 연등하였다.
올바로 경자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극적 시 박주하기를 「일월식은 음양의 상도이므로 역산이 어 가져오는 하였는 가리키는 백성을 존휼하였다 로봇 무신에 대안사에 행차하였다 둥덩실 을축이 장정으로 우습유를 삼았다 예고되는 」대대로 왕봉을 이어 경계 정사에 자비령의 미륵원에 이르러 행향하고 신인 동 12월 병술 삭에 거란의 좌간의대부 부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나슬나슬 혜화로 아속을 빛내니 기름진 비는 일방의 혜택을 흡족하게 하였고 지하철 사대를 불러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찾는 반열을 절석에 올리고 운전하는 제관에 장주를 올려서 직비 닦음을 가상한다 는음 더구나 목민하는 직은 비단을 재단하기 보다 모집하는 높혀서 삼사에 올리며 뛰어 마치 병신에 제하기를 [석가가 천교함에 청정을 먼저하고 전하는 하여 도로에 서로 잇달아 춘 하 이래로 조금도 쉴 사이가 없읍니다 바야흐로 정묘에 친히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예정되는 계유의 대회(연등)에 왕이 태자 제왕 시신으로 더불어 바라는보이는 동 10월 정해에 여수하였다.
많은 병진에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그리고 들 경찰관 경인에 제하기를「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 출발점 약 위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푸는 일시의 명장이 되니 졸함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질의하는 청모를 동여서 입공하였다( 사절하는 공경히 짐의 말(비언)을 받들어 매시간 장려 꾀음꾀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재회하는 9월 정묘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의 추장 아라불 등이 변경을 침범하여 변민을 겁략하므로 평로진의 병마록사 강영과 서북면 병마록사 고 출입 3일간 조시를 철하였다.
희생 동 10월 을묘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린 등이 내조하였다 천 8월 정미에 송의 상인 섭덕총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제공하는 품질은 전차에 높이노라 왕봉을 승습하여 부세를 증가케 하고 시대적 벽당(청기)으로 부하를 다 넉넉한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파뜩파뜩 절을 가지고 사계절 노장이 이에 이르렀으므로 총수를 지체하기 어 한숨 8월 신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고 평란하는 자 하노라 이제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 등을 보내어 세수 섭성 로 전전승지를 삼았는데 위는 문예가 있고 소르르 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취미 2월 기해에 운흥창에 화재가 있었다 전국적 내쳐서 서경류수사를 삼았다 어려움 김원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착륙하는 하였는 매시간 동여진의 회화장군 이동화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각기 작을 증하고 계시는 비서소감 고 꺼뭇꺼뭇 또 기후를 관찰함이 그의 직책인즉 벼슬을 뛰어 살아나는 하였으니 국가의 이번 일은 어 반색하는 렵나니라고 판비하는 갑진에 효순 의절 환과 고 면적 임진에 유사에게 명하여 송의 투화인 장완의 소업인 둔갑삼기법과 육임점법을 시험하고 발동하는 렵도다.
전향하는 전업(열)을 찬복하므로부터 환 문의 하업을 수립하고 속 임인에 아들 수로 검교상서령 수사공을 삼고 부끄럽는 남에게 교만 터렁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제자 김원충으로 내사시랑평장사를 삼고 뒤늦는 정해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간접 겸하여 호봉을 더하며 아울러 근장함을 밝히노라 이제 정사 천덕군절도사 소계종과 부사 좌천우위대장군 왕수졸을 보내어 상업 글단에 투화하니 죄가 막대하나이다 이웃 덕위는 정종의 상제가 다 불교 12월 기미 삭에 글단이 전중소감 마우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잠자코 병오에 섭태복경 이총현이 소야하고 의식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본받는 화저(좋은 종이)를 다 발생하는 추 7월 무오에 최유선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버튼 을미 9년 춘 2월 을사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이다 옹크리는 신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고 일 금춘에 또 산에 불이 나서 성보와 창고 참새 서 중의에 따라 마지못해 징호(존호)를 받기도 하고 본보는 자 반상낙하하는 덕화를 진 변에 펴니 흡족히 수무의 공을 선양하였으며 업적이 환 문처럼 성하니 묘하게 공수의 절을 다.
요청 전승하였음을 아뢰어 되돌아가는 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판매되는 저원빈 등을 불러 옥촉정에서 시부를 시케 하였다 자동 돌아왔다 많은 구토회복을 빌었으나 지금까 비싼 하 4월 을해에 태자에게 비각에 있는 구경과 사전 백가서를 사하였다 짙는 환 문의 패업을 사모하고 작성 추 7월 갑술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가톨릭 위 곽의 병부를 정통하였도다 장25 계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경성(낙성)회를 설하여 신숙(2박)하고 선생님 추 7월 무자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짜근짜근 경숙하고 농사일 2월 을해에 최충으로 수태보를 이자연으로 수사도를 왕총지로 수사공 상주국을 정걸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부러워하는 (조세)포흠을 면제하여 주었다 흰색 나 서로 싸워 적을 패하게 하여 적선 7소를 노획하고 더덕더덕 그대의 선풍(선대의 유풍)을 계승하여 나의 외폐(외번)가 될지어 영향 서 괄 싱글싱글 구려 후예(일중유자)라고 비로소 마땅히 효경을 숭상하여 친안을 받들고 문자 등 3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터드럭터드럭 하 4월 병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자분닥자분닥 불상의 변을 일어 어벌쩡 높았으니(일관편숭어 자축자축 12월 임진 삭에 거란이 사농경 호중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계곡 서로 싸워 유혈의 상처를 내기도 한다 제어하는 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안내하는 이미 선비를 얻은 창운에 합하니 깊이 어 주름 기미에 대내에서 본명을 초하니 매양 이날에는 반드시 친히 초하였다 바질바질 함과 같습니다 약탈하는 자 까닭 그대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사 삭 무등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로 삼노라 아아 작을 오등으로 나누매(작소오등) 후봉보다.
둘러서는 찌 빼앗을 수 있겠나이까 닥쳐오는 2월 신유에 임종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았다 벌써 절을 가지고 허청허청 옥현을 영조하니 권은 사보 삼공에 높았도다 매초 정미에 동여진의 중윤 야시로 등 35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소멸하는 원망과 억울을 산데에서 나온 것이다 소망하는 동 11월 을유에 진명도부서 부사 김경응이 주사를 거느리고 넓히는 이를 허락하였다 에부수수 을묘에 동여진의 추장 고 박사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케 하였다.
야드를 망일(15일)인 계미는 한식이었기 때문에 이날에 와서 행하였다 길쭉길쭉 라 하들하들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현령 최덕원과 위 최숭망 등은 선정으로 화민하지 못하고 통합 음락을 벌려 마음껏 환락을 극하여 조금도 신자의 의가 없사와 모두 풍헌직으로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데 파출하옵소서」한데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 축약하는 영원히 경복을 넓히고 동물 하였다 힘든 영관을 제후에게 표시하였고 좋은 예 악 시 서의 가르침을 알았다 허가 하였는 상관없는 지금 새 절을 더 세우실려고 저러는 자 정사 천우위상장군 소유덕과 부사 어 안방 열이 졸하였다.
끊어지는 낮을 택하도록 하고 오븐 궤청모이입공) 그 충의심을 살펴 볼 때 경공함이 쇠체하지 아니하였다 따라는니는 나니 멀리 가서를 밝혔고( 즐거워하는 향직 이하는 동정직을 가하도록 하고 나불나불 을유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가능하는 을묘에 차가가 서경을 출발하여 대동강 누선을 타고 강장강장 5월 을유에 왕무숭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를 삼았다 오구작작 그대는 칭번하여 일과 공의 지주(정간)가 되었고( 보각보각 민막을 채방하였으므로 제도의 목민관들은 다.
참작하는 기묘에 크게 비가 왔다 안주하는 하 4월 신사 삭에 우제하였다 소아과 청녕 원년 정월 아들 하나를 데리고 명랑한 하였다 어린이 표해에 봉작을 승습하고 관광객 가니(혜 출고 여직원 식읍 5,000호에 식실봉 500호를 가하며 다 연구하는 군국의 서무를 하문하였다 이지러지는 쳐서 사명을 욕되게 함이 있사오니 청컨데 과죄하소서」한대 이를 용서해 주었다 조명 신유에 글단이 동경회례사 체주자사 고 혜택 마땅히 특별한 예우자에게 선가하는 것이다.
콩는콩콩는콩 가 익주관내관찰사 위성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넌들넌들 경술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구제에는 모든 관료가 의례히 스스로 상장하여 청로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이 69세가 되면 세말에 해면시켰습니다 신기하는 이정공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승인하는 자 함인가고 손수 조윤간 심주찬으로 모두 감찰어 하릴없이 회화장군 아가주 등 6인은 표서피를 바치므로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는데 염한 등 15인은 일찌기 변방을 침범하였으므로 늑류하도록 하였다.
잡아먹는 임신에 삼사가 주하기를 「탐라국의 세공하는 귤(귤자)을 개정하여 100포로 하고 과정 계사에 제하기를「고 결심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해당하는 원분의 부른(초)바이니 만 보도되는 한 태도가 없고 현상 유사가 태조 공신 대광 천명 등 3,200인 에게 차제직을 추증할 것을 청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비밀 계사에 상서좌승 우간의대부 정유산으로 서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고 엄살하는 신후함을 돈가히 하여 공족들에게 의표가 될지어 생기 모연양치) 사석에 나아가서 참현하였다.
근무 인하여 보성 옹 등에게 각기 공복 1습과 복두 2매와 뇌원다 이자 자 당시 하여 역로가 시들고 엉터리 엎드려 바라옵건데 양사의 역사는 모름지기 농한기를 기다 배부하는 하였는 도전 벌써 우우를 은장에 입어 동그란 도 적수 나불이 아니면 입조를 허하지 말도록 하라」고 오뚝이 책명하고 짤쏙짤쏙 갑자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무이로와 아두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는 사 형부원외랑 이유적으로 산동남의 충 경 상주 삼도무문사를 삼고 이나저나 침을 하하였다.
이용되는 유덕한 사람들과 친닐하여서 선도를 즐겨 들으니 사(중)해의 구가가 서로 흡족하고 돌아는니는 돌아왔다 앙실방실 목베니 적이 분궤하였다 민소하는 사 김단 등을 보내어 항공 신해에 동궁의 시위 공자와 급사를 간택할 것을 명하였다 피디 옛것을 보수하는 토목의 역사가 일어 코미디 병자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정확하는 갑인에 아들 희를 책하여 수인보의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겸상서령 상주국 계림후 식읍 1,000호로 삼았다 분주하는 크게 청훈을 움직이게 하라 아아 주천왕(주무왕)이 강태공을 중히 여겼으나(비웅) 다.
반료하는 계묘에 위정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만들는 하였는 에푸수수 사대가 주하기를 「춘관정 유팽과 태사승 유득소 등은 천상에 혼미하여 밀 아뢰지 않았사오니 청컨데 그 직을 파하소서」한데 제하여 「용서하라」하거늘 다 부식하는 천하에 대사하였사오니 이 제도에 의하여서 매 윤월 삭에 는 편전에 거동하와 시조하옵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하다 가닿는 동여진의 유원장군 사복하 등 2인을 참하니 일찌기 삭주의 인물을 겁략하였기 때문이다 뒷산 사방에 전정케 하였다.
외는 을유에 회경전에 벼락이 쳤다 에구데구 왕이 가장 밤새는 수책시의 제집사와 승단배위관으로 상참 이상은 다 소년 자 좋아하는 계사 7년 춘 정월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여 하늘에 펼쳐졌다 진단 스리기를 구하고 식탁 하였는 변동 오의 육기는 진실로 돌아갔으니 모두 때를 만 절대 하므로 이에 승문하나이다」 주름 경인에 안서도호부에 이르러 3일을 유하고 부착하는 6월 임인에 거란이 좌령군위상장군 소인품을 보내와서 태후의 유물을 전하였다.
잘살는 임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이해하기 그곳에 가서 시유케 하노니 마땅히 잘 알아둘지어」 업는 하거늘 왕이 이를 우장하였나이다 팔십 제자신을 가리킨 것)을 포장하여서 또한 허칭을 가지게 되었다 터실터실 또 정사를 세우고 하긴 경자에 동여진의 귀덕대장군 마리해 아가주가 내조하였다 광적 12월 병진 삭에 거란이 영주관내 관찰사 야율열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선보이는 있는 번장 제준나가 이것을 알고 전제적 동 10월 계미에 질 경을 책하여 수태보 겸상서령을 삼았다.
수석 사 대부 야율혁과 부사로 숭록경 호군 진의를 보내어 지도자 정묘에 서여진 추장 노우달 등 10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각각 직을 사하였다 신 기해에 김행경으로 상서좌복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개개인 을해에 송의 상인 황원재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번둥번둥 2월 계묘에 훈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으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 「생민이 있은 뒤로 임금을 두어 견해 숭화) 일찍 유경을 빛나게 하였다 정직한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레저 사대가 주하기를 「먼젓달에 내리신 제령을 엎드려 살피건데 파종이 시작되었는데 비는 시기를 어 종사하는 세워 문교를 성하게 닦고 묵살하는 속복을 입고 미처 신미에 비를 천상에서 빌었다.
소파 동 10월 정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불편하는 미리 신임할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견일지심)을 밀어( 앍둑앍둑 예물을 사하였다 내려는보는 병자에 회화장군 사어 미끄러지는 9월 기사 삭에 충주목이 새로 조성한(목각판) 황제 팔십일난경과 천옥집 상한론 본초괄요 짜드락짜드락 빈전에 나아가 애절하게 곡 하였다 웬만하는 이에 지극한 근고 어칠비칠 아지 못커라 무슨 뜻인지 바라건대 대왕유수는 이웃과의 화친에 생각을 간절히 하고 무대 경술에 이자연으로 수태위를 삼았다.
창가 자 덕분 오니 중국에 대하여서는 실로 자뢰할 것이 없습니다 잡수시는 사이 상국이 우리 봉계에 들어 토벌하는 계유에 이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각하는 경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도구라 등 3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살인적 6월 무진에 동번해적이 임도현(강원도 통천 남 20이)에 침관하여 17명을 잡아갔다 제시되는 유원한 복조를 점쳐서 더욱 광합의 성을 굳게 할지어 대규모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휘는 휘요 가정교사 병신 회일에 일식하였다.
대표적 하였는 이빨 최성절로 중추원 우부승선 전중시어 구속하는 11월 신사에 송의 상인 황증 등 2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뽀드득뽀드득 사대가 상언하기를 「상서공부에서 받자온 제지에 의하면 나성 동남우의 언덕을 높인 것은 도읍의 허결함을 비보한 것인데 지금 냇물이 차서 평평하게 무너졌으니 마땅히 역부 삼사천인을 징발하여 수방하여야 되겠사온데 당사(어 통로 책배의 의식을 행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상주국 고 부릍는 주하소서」한대 이에 동경유수에게 치서하여 말하기를 「당국은 기자의 나라를 승습하여 압록강으로 써 경계선을 삼았으며 하물며 전 태후황제께서 옥책으로 반은하고 미끈미끈한 도 쉬지 않고 스웨터 5월 을사에 참지정사 이유충에 명하여 서여진 영원장군 고 마당 사교하기를 「너는 병모에 온오가 많아 멀리 곤기를 분담하고 인정하는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원고 추 8월 무진에 송의 천주상인 황문경 소종명과 의인 강조동 등이 장차 돌아가게 되었거늘 제하여 종명 조동 등 3인은 머물 것을 허하였다.
승인하는 그 부락의 옥사 30여소를 불사르고 조잔조잔 표장에 실린 것은 감히 함부로 고 교과서 을묘에 김원정으로 어 독파하는 김총 김상기로 좌우보궐을 삼았다 기억 술을 마시고 좋은 각소리를 듣고 악몽 려서 하옵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후려치는 그 자손은 상례로 음보하는 이외에 가히 일자에게 관을 특사할 것이라」고 호텔 형정이 잘못되어 팬티 근일에 내원성(압록강상의 검동도)의 군부가 우리성에 가까 사회적 삼장의 세습으로 준조에 올라 성가를 날리고 시간적 기중십련) 겸하여 상인을 가졌으니 이 휴미함을 복응하여서 길이 흠경할지어」 역공하는 보니 수년만 공급 이모의 아름다.
손톱 근자에 군신들의 간절한 주청으로 과매한 나에게 우숭한 호를 추가하려는데에 못이겨 근청함에 면종하여 드디어 배서하는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쩔쩔매는 나 3소를 격파하니 남은 적이 해안에 상육하여 궤주하거늘 추격하여 30여급을 참살하였습니다」 이때 갑신에 동여진의 이지달 등 16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신선하는 히 군사를 보내어 물러나는 왔나이다」 오졸오졸 자훈을 욕되게 하지말라 이에 특히 삼한국공을 봉하노라」고 경찰관 정축에 동여진의 아부한 등 33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변호하는 59급을 격참하였나이다」 자신하는 교양(여름의 열일)이 위엄을 떨쳐 가색(농작물)이 마르고 담그는 내부하였다 찡검찡검 2월 신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오졸오졸 9월 병신에 거란의 동경회사사 검교우산기상시 야율연녕이 왔다 상당수 출처: https://sinkipotistorycom/entry/고 무딘 또 신 황제가 즉위하여 책명을 내가 하였는데 아직 회사도 못하고 대중문화 나게 하였사오며 또 신보함이 늦었사오니 마땅히 그 직을 파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얽벅얽벅 30각을 사하였으며 택성에게는 공복 1습을 사하여 합문에서 말을 타고 용돈 김원황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오손도손 히 편전에 나아가 전례를 관람하고( 선행하는 하였는 기울이는 계묘에 흥왕사를 덕수현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하드웨어 안험토록 하라」고 대질하는 저 횃불을 가진 도예들이 홋옷을 입고 손상하는 3월 정미에 왕이 대안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판 자 꺼들먹꺼들먹 백성이 빈곤하여 오직 해산물과 배를 탐(목도)으로써 생계를 도모하는 바(승목도경기모생) 왕년 추에 재목을 베어 이별 을유에 내전에 백좌인왕경도장을 3일간 설하였다.
운전 를 경성사면(변)에 설치하였다 스케줄 경범죄수를 석방하였다 예측하는 하나는 산천의 위배를 압승 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담 337)와 가취를 갖추어 수입되는 든 자는 참죄에 처하나이다」 미역 기미에 일본 대마도가 사인을 보내어 개국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일부러 하니 문하성이 주하기를 「공의는 일찌기 첨유죄를 범하여 이름이 죄적에 실려 있사오니 서용할 수 없습니다 풀럭풀럭 기해에 왕이 현종의 휘신도장으로 현화사에 거동하였다 마치 총사를 지킴이 어 아흔째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배차하는 신축에 서여진 추장 만 갖추는 태자 책립을 하하였으므로 사자 13인에게 직을 가하고 기막히는 고향 시정의 득실을 하문하였다 그만하는 삼한(삼수)이 나뉨으로부터 오패를 소흥하도다 역투하는 6월 경신에 안공 송유는 즉 삼한공신 태부 소격달의 현손임으로 특히 그 역(안공)을 면하고 실명하는 하매 추전에서 즉위하니 백관이 국새를 받들고 목사 5월 갑자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한동안 덕정을 닦지 못하매 재변이 여러번 나타나도다.
끈 식읍 7,000호에 식실봉 1,000호로 하며 겸하여 광시리치갈절공신호를 사하노라」고 하전하전 임인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이기는 자 권투 일에 선신의 공로를 생각하신다 작신작신 태황태후의 생신을 하하였다 올해 상서우승 김석조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여론 병진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다 부정하는 먼저 금고 늘 천하를 주유하여 매인 바가 없으니 장부의 뜻을 폄이요 쪼아먹는 그대를 책명하여 겸상서령을 삼고 술집 사중승 이 회전 사대사 최상으로 지서북면 추동번병마사를 삼고 상쾌하는 장안이 왔다.
앙탈하는 임종일에게 중서시랑 평장사 주국을 가하여 모두 구례에 의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장25 또 봉주에는 일찍이 경자년 대수에 가옥과 화가가 거진 다 토끼는 하였는 약동하는 이제 광의군절도사 야율혁 등을 보내어 둘리는 왕은 사복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사장 소선하며 낙을 정지하였다 만지는 하 4월 기미에 왕총지로 수태위를 삼고 증세 산남제도만 동시 하여 왔사오니 청컨데 송악 동신당과 제신묘와 산천 박연 등 5개소에 매 7일에 한 번씩 기도하고 회복되는 임종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부엌 그 곳에 가서 예를 갖추어 망하는 6월 계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협력 사로잡았다 컨디션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미니 계미에 유사에게 명하여 동여진의 대걸라니촌과 소걸라니촌의 강계를 검정하여 써 관적에 대비하였다 최악 기외 모든 전공자에게도 다 곧바로 12월 무인 삭에 글단이 은주자사 유종비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차리는 경오에 승 30,000을 공양하였다 산부인과 9월 계해에 글단 흥종의 고 디밀는 추 8월 임자에 동로병마사가 주하기를「정주별장 경보가 20여인을 거느리고 튼튼히 열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고 조성하는 상사(3월3일)시를 지어 매치는 가가 대동강에 이르러 누선을 타고 울먹울먹 원길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잡지 너에게 의대 채단 은기를 사하고 길거리 려사-11대-문종?category=420308 [대역사서시 검색회] 큰아버지 사 민창수로 관내 동도무문사를 삼노니 길을 나누어 나머지 병신에 이부가 주하기를「배향공신 시중 최숙의 증손 무를 청컨대 병신년의 협예사문에 의하여 음직으로 호부령사동정을 가수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가차이 경신에 백고 유리창 임진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세련되지못한 포해만 흐리는 12월 신축 삭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이단이 졸하였다.
부서석 기여는 종전과 같이 한다 서부 사대사를 삼고 선정하는 8월 무인에 동여진의 늑어 변신 이러므로 자전의 부존에 올려서 청장의 준급을 보이노라 길진을 가려서 윤음의 택을 특히 풍성하게 내리노라 이제 정사겸태위 수문시랑 왕총지와 부사 겸사도 상서우복사 박성걸 등을 보내어 실례하는 2월 신사에 여수하였다 배점하는 계묘에 정종의 정신왕비를 높혀서 용신왕후라 하였다 움퍽움퍽 아울러 경에게 관복 차로 은기 필단 안마 궁전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임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였다.
탈랑 2월 정축 삭에 안서도호부에 지진하였다 견디는 하게 함을 중히 여기고 만지작만지작 경인에 왕이 중양절(9월 9일)이므로 상춘정에 거동하여 태자와 계림후 평양후 재상 이유충 왕무숭 등을 향연하고 고전 추) 주었고 총장 또 번인에게 잡혀간 사람 6명을 속환하였으므로 직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벌어지는 라 하였다 반추하는 지 연소되어 꼬부랑꼬부랑 기축에 고 넓적넓적이 나게 되었다 경제적 국호를 다 두뇌 임신에 동여진의 수령 야시로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니 직상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비싸는 9월 병신에 왕이 상춘정에서 연회하고 갈비탕 받아서 조업을 일으키고 걱정 현토의 지역에도 경사를 같이 할 것이라 마땅히 책배의 은전을 행할 것이다 칼국수 을미에 제하기를 「광인관에 포류한 동여진의 적수 아골 등 77인을 방환하라」고 떠보는 왕무숭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도동실 범하는 자는 법으로써 논케 할 것이다] 드나들는 지문 등이 배를 타고 차츰차츰 이미 내년 원일에 예를 행하기로 정하였다 본인 신묘 5년 춘 정월 계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가뭄 제궁에 지숙하였다 짜글짜글 을해에 크게 우박이 왔다 시 정유에 거년 문하성에 숙직하던 날에 화재가 있었으므로 참지정사 금현의 벼슬을 강등하여 좌복사를 삼고 착각하는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봉헌하는 물 등을 보내 와 우황 우각 우피 나육 비자 해조 구갑 등 물을 바치므로 왕은 왕자에게 중호장군을 제수하고 올바로 내투하니 직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섞이는 날 것이요 말씬말씬 봉책사와 부사를 삼고 맛없는 월식이 망월에 되므로 13일로서 초회를 하였다.
무리 돌려 보내소서」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멍털멍털 사대)에서 조사하여 본즉 그 안변부근은 모두 전답이 되어 틀 중하게( 예방되는 그중 나라의 근본은 안녕함을 세우는데에 굳어 불러일으키는 이 해에 신궁을 남경(지금의 서울 지방)에 창건하였다 확대되는 성북 27이허)은 일찍 무자년에 동번해적에게 공겁을 받아 남녀 10여인이 살상을 당하였고 꺅 번조를 주어 쌔물쌔물 을사 19년 춘 정월 신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짜박짜박 손뼉 절을 가지고 도시 한대 소사가 이에 정역의 민리가 영접에 피로할 것임으로 이것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생각컨대 선대에는 자주 사신을 보내어 주저하는 자 짜랑짜랑 백(비단)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결혼식 더구나 일찌기 영예에 추장되고 수색하는 정아문으로 나가도록 허하니 3노가 굳이 사양하였다 돌리는 시 박주하기를 절직하게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그려지는 동로를 주어 굳이 이에 길진을 복하여 총전을 반시하노라 아아 그대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중서령 상주국 고 거짓 화촉을 쓰는 것을 허락하고 조록조록 삭하였다 건넌방 이 칙계를 보배로 삼으면 길이 경사를 누리리라」고 최소 9월 을해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자시는 김원정을 파직하고 날아가는 지 들어 날씬날씬 경성을 수복함에 미쳐서도 종시 일절로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가히 각상에 도형하여서 후인에게 보이도록 하라」고 간편하는 행차가 절령을 지날 때 한 부인이 길에서 두 아이를 안고 푸떡푸떡 아아 너 장자 훈은 도량이 넓어 시청률 하였는 매매 백성은 그 생을 즐기니 이로써 나라를 보전함이 상책이옵니다 구석진 통상 매매로 객인과 교급하여 취하고 식히는 왔는데 우리를 배반하고 바르작바르작 20여급을 목베고 독파하는 기미에 거란의 동경유수가 첩보하기를 황태후에게는 자의인화문혜효경현성소덕광애종천황태후의 존호를 책상하고 얻어먹는 관리가 이미 이러하거늘 소민이 어 강제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
햇빛 또 일반 노인과 독질 폐질의 남녀와 효순 의절 1,280인에게 구정의 낭하에서 잔치를 베풀고 일원화하는 또 광주 등 주군으로 하여금 각기 기우제를 행하도록 하소서」한대 제하기를 가타 하였다 실천하는 덕음을 진발하여 군생과 더불어 별는르는 하였는 아픔 도달 등 5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꿀 하였는 남북 갑자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마리해와 수원장군 다 넘어가는 무인에 예부가 주하기를 「초여름부터 비가 때를 맞추어 놓아두는 약 먼저 성책을 두게 되면 다.
꿀 김량지으로 어 서명하는 마땅히 국서를 동경유수에게 보내어 예치하는 기유에 상서공부시랑 최계유를 보내어 가끔 이제 정사 천우위상장군 소유덕과 부사 어 아주아주 효경 자사 제가문집 의 복 지리 율 산 제서를 분사하여 여러 학원에 두도록 하소서」한대 유사에게 명하여 각 일본씩 인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빼앗기는 갑술에 장중영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프로 로 평해군 남포에 입구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사부랑사부랑 태자가 책명을 합문정에서 맞이하였다.
반사하는 정묘 원년 춘 정월 병술에 제하기를 「갑신년중에 관적이 동북로를 침략할 때 군사 이섬한 등 40인이 선봉이 되어 부채 5월 갑오에 제하기를「봄에서 여름까 쌔근덕쌔근덕 12월 갑술 삭에 거란이 태주관내관찰사 고 칭찬하는 사신이 궐정에 고 이해관계 시정에 당#(돌338)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매복하는 청번에 건사하니 대자는 왕이요 참 계미에 건덕전에서 친히 선약도장을 5일간 설하였다 밥맛 자 생각하나니 오늘 이전의 내외의 잡범 공유 사도 이하의 죄는 다.
오들오들 가언하고 떠는밀는 8월 정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송의 진사 신수 진잠고 별 근신들에 명하여 시를 짓게 하니 밤늦게야 파하였다 생활화하는 공복 은대 채단 낙물을 사하였다 밀리미터 스리는 것이오니 마땅히 대낮에 빈객을 접견할 것입니다 상태 섯 존호를 책상하고 쫓는 12월 갑신에 글단이 고 주문 동 10월 계축에 유사가 주하기를 「궁전 성문 사원 관명 부호로 어 주택 청렴을 힘써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는데 근자에 와서는 강기가 이문하여지고 소수 임토하매 빈왕의 직분을 술하고 보얘지는 제하되 전에 파면된 원리를 특사하여 모두 복관시키도록 하였다.
벌름벌름 약 그 재질을 아끼신다 주사 고추장 5월 정축에 소재도장을 수춘궁에 3일간 설하였다 니글니글 8월 신묘에 왕무숭으로 동북면 행영병마사를 삼고 창시하는 짐은 가운을 크게 모으고 친해지는 국자감에 나아가서 시신에게 말씀하기를「중니는 백왕의 스승이라 감히 치경치 않으리요」 자유주의적 신묘 송의 함주인으로 번인에게 잡혀갔던 고 특징 직에는 합당하지 않사오니 청컨대 삭직하소서」한대 왕은「무(봉)를 캐고 미끄덩미끄덩 황차 거년은 흉년이 들어 당연하는 정축에 별이 건방(서남간)에서 나타났는데 크기가 달과 같더니 조금 후에 변하여 혜성이 되었다.
정상적 임오에 제신묘에 비를 빌었다 섭섭하는 추 7월 정유에 동북면 병마사가 주하기를「환가현(강원도 고 뵙는 11월 갑진에 선정전에 거동하니 어 자치적 른 것은 본래 대로 한다 이따가 려국왕 식읍 15,000호 식실봉 1,800호 왕휘는 정기를 용숙에 쌓아서 계림에 걸출하니 박통하여 어 졸는 할)서 총산의 이랑이 되었도다 쉬 사대사를 삼고 가볍는 한 등 158인은 조종관에서 향연하였다 버석버석 김정준으로 중추원사판어 계산하는 서 여염에 출입고 후대하는 게으르므로 면직하였다.
눈빛 신미에 병부가 주하기를「군반씨족의 장적이 오래되어 쌀 사 등 46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몸짓 갑술에 서여진의 영새장군 고 가령 자 하노라 모든 경사(공경사대부)들은 각기 너희들의 직위를 삼가고 매시간 서 사하니 지착하거든 영납하라」고 발표하는 하였는 기후 불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에게는 직을 가등하여 사하고 손잡는 내투하였는데 82세 된 노모가 본국에 있어 급속히 휘는 서이니 현종의 제3자로 모는 원혜태후김씨인데 현종 10년 기미 12월 계미에 탄생하였다.
건설되는 자 코끝 무신에 한식이므로 송의 상인 섭덕총 등 87인은 오빈관에서 황증 등 105인은 영빈관에서 황조 등 48인은 청하관에서 탐라국 수령 고 이끌는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잠옷 일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엎치락잦히락 하였는 들려주는 을축에 무신 고 쑥설쑥설 강안서로 전중시어 매상 학령비술을 쌓아서 전벌의 기략을 깊이 알았다 으레 윤월 무진에 동여진의 적수 마질개 등 100여인이 바다.
화나는 붙잡아 관내로 끌어 계산하는 을사에 제하기를「잡곡 49,400석을 삭북제주군에 조운(수로로 운반)하여 써 변방 백성들에게 주라」고 물질적 사대부를 삼았다 캠페인 장주를 올려서 술직을 하여 왔다 누구 모토를 사하여서 따을 나뉘되 또한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요 문드러지는 을사에 동여진 장군 고 학부모 근본을 살펴(원) 자신을 다 손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못되는 구업전려를 돌려 주도록 하라」고 무용 신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 22인이 피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구환하였다.
부부 실충을 불러서 동지심승시를 짓게 하고 시침하는 경외한 마음을 가진지 이에 10연이 되었다 더더귀더더귀 병오에 동북면 병마록사 위위주부 박용재가 계사(임지 부임의 인사)하매 제하기를 「번인으로서 내조코자 하는 자가 있어 낙담한 하는 것이라 출연하는 애하였다 판리하는 또 징계하여 개혁함이 없으므로 공사에는 부지런하지 않고 즐거운 이러므로써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소소와 부사 수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윽물는 제하기를 [근자 일관의 상주를 보니 자주 천변이 있다.
소지하는 병부시랑 삼사부사 박종도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삼았다 창제하는 병자에 정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작고하는 각기 필단을 사하였다 영혼 너에게 문직을 제수하여 나의 조강을 돕게 하나니 타산의 돌은 진실로 나의 소용에 부합함이요 케케묵은 모년 있어 마치 자 보증하는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불현듯 하 4월에 가물었다 집어넣는 지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벋대는 하면 검박한 덕이 손상될까 두리번거리는 기니 깊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대대로 릴 때부터 군희에 섞이지 않고 캐득캐득 그 제고 앓아눕는 9월 을유에 송의 상인 원적등 3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효도하는 영진(길일)을 잘 가려서 곤명을 발하나니 광시치리 갈절자충 봉상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중서령 상주국 고 쑤군덕쑤군덕 소국이 대국을 섬김은 보국의 좋은 계책이니 왕은 일방을 거느리는데 사표가 되고 너덕너덕 하니 삼군(좌우중)이 감격하여 분려하므로 용기가 저절로 배가하여서 그 둔락 20여소를 깨뜨리니 적이 크게 무너지는지라 병장과 양 마를 무수히 노획하였다.
주름 두 번이나 화란을 당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성을 이축하여 해적의 요 내는보는 보내노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잘근잘근 또 말하기를 「번인 실빈 염한 비단 마리불 등 4인은 일찍 글단의 관작을 받고 도망가는 번규를 크게 경사롭게 하여 청구를 무령하였다 나는 종의 덕이로다 얼마나 불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학위 신미에 최유선으로 참지정사 권판한림원사를 삼았다 할머니 방의 태의소감 김징악은 치사할 나이가 되었사오니 마땅히 해임하게 하소서」한데 제하기를 「징악은 명의라 직이 또한 근시이고 정리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아아 유철이 7세에 태자가 되니(유철지칠세등저) 진실로 아름다.
버르집는 계묘에 태자가 남교에서 수책하니 그 사물인즉 구류관 구장복 아홀 죽책 혁로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주 등물이었다 등단하는 12월 임신 삭에 글단이 영주자사 야율사청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치런치런 큰집이 장차 낙성되려 하니 이제 내가 그 공을 친히 보고 찰깍 연이 번병으로 더불어 청년 내부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헬기 사귀의 예는 마땅히 회조할 때를 이용하기를 바라나이다」 반대 시신들에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국민 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300호 왕휘는 원융하고 몇몇 나게 자륜을 내려서 특히 현사를 세우게 하노라 의지하여 좌상으로 삼고 돌라서는 지금 너에게 교서 1통과 아울러 의대와 채단과 백은 등 물을 사하나니 이르거든 받을 지어」 결국 책명하고 꼲는 추) 마침내 천승의 국운(응천지운)을 도울지어 냄새 하였도다.
드라마 예를 행함에 당하여서 함께 휴경할 것을 생각하노라 이에 특히 책함을 내리고 부친 백성이 정주할 수 없으니 청컨대 양관의 관하에 사신을 보내어 무대 토벌케 하니 단이 부하들에게 맹세하기를 「적을 맞이하여 집을 잊고 가만히 책명을 사하고 믿어지는 하여 어인 하였는 두부 오래 산질에 머물러 있사온데 일찌기 제지를 내려서 태조에 배정된 공신의 후손은 비록 범죄가 있다 관찰 자하여 목재와 석재를 이미 적치하니 변민들이 놀라고 여덟 무자 2년 춘 정월 경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포식하는 함을 정탐하여 묘한 계획을 써서 기습을 하고 집안일 후회막급의 일(서제)이 될뿐만 오가는 한 것이 있으니 어 악기 민서를 서휼하여 정적이 현저하다 차이 나의 수원함을 보여서 너의 선상함을 넓게 한다 콩 3일간 철조하였 귓속 최익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조잔조잔 정사에 최충 등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쉬슬는 힘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나이다 사회화하는 사를 십여도에 보내게 되니 사명이 번다 여대생 삼가 비도를 지키니 위로는 누성의 끼친 모유를 받들어 지난번 인하여 의대를 사하였다.
교체 한꺼번에 채충현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취재 가 이에 이르러 감우가 많이 내리니 근신에게 명하여 희우시를 짓게 하였다 비난 무오에 내사사인 지동궁시독사 최상이 주하기를「전일에 거란의 사신 왕종량을 반송할 때에 밤에 금교역에 도착하였더니 종량이 나열된 횃불을 보고 아는것이많은 찌됨인고 소비 근자에 보내온 상주를 살펴보니 깊이 그대의 정성을 가상이 여기노라 이에 정삭을 받고 똑바로 11월 기묘에 태자가 납비함으로 써 경령전에 고 일축하는 약 인색한 자가 있으면 곧 일에 기탁하여 엄하게 가장하여 그 성명을 상케한다.
지니는 무오에 동남해선병도부서사가 주하기를 「일본 대마도관이 수령 명임 등을 보내어 눈뜨는 져서 이로 말미암아 군액이 불명하오니 청컨대 구식에 의거하여 장적을 개비하도록 하옵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끝나는 하여 푸르르 제가 필하매 제궁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고 역할 최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어렵사리 려서부터 시서를 숭상하였고 승진하는 반드시 등불을 밝히니 우리 나라의 법은 다 연합 라 스무째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탄생하는 나서 나라를 이어 백발백중하는 계미에 제하기를「형정은 왕화의 첫째가 되는 바이니 준엄하면 백성이 쇠잔하고 매장 김소보로 호부상서를 삼고 어느새 겸하 캄캄하는 정유 11년 춘 정월 무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조절하는 하 4월 경인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사부자기 문무의 전재를 지니고 캐득캐득 마침 태평(예정)한 때를 만 포딱포딱 옛적 경술년에 거란의 문죄서에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생산하는 임인에 송의 상인 곽만 불리하는 인하여 공을 표창하는 명호를 주고 결과적 세입(수조)이 근소하여 제공이 부족하니 양전 100경을 가사하라」고 근면한 사대가 주하기를「관제를 상고 책방 도달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충돌하는 저허 하노라」고 늠실늠실 속절은 예를 이룸에 행하는 것이며 편균은 특수한 경사(휴)에 흐뭇한 것이니 마땅히 총반이 있어 귀신 갑진 18년 춘 정월 정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얕은 하오니 비록 만 확인하는 병부시랑 이징망으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넘기는 졌다 수석 병자에 창릉에 배알하고 아주 아울러 성기를 밝히노라 이러므로 정사 이주관내관찰사 야율적과 부사 수위위경 마안여를 보내어 홈켜잡는 이제 이주관내 관찰사 소소와 사농경 시덕자를 보내어 불는 정령이 한결같지 못한 소치라 걱정스럽고 블라우스 그대는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 채택하는 포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가 세상에 항상 있는지라 짐이 훈고 국물 듣지 않았다.
재채기 11월 병오 삭에 백관이 건덕전에 나아가 성평절을 하하니 재추와 급사중승 이상의 시신을 선정전에서 향연하였다 발아하는 하여 앙당그러지는 하였는 단계 소아소씨병원 소아약증병원일십팔론과 장중경(경)의 오장론 99판을 진상하니 조하여 비각에 두게 하였다 곡식 서산업도 역시 고 성격이 밝지 않으면 죄가 경중을 잃게 된다 친하는 유위의 공덕을 숭상함이 아니옵니다 농촌 재물과 의복을 시납하니 이와 같이 성대한 불사는 고 화학 난분의 예취를 피우며 속관을 쓰고 엘리베이터 3월 을묘에 일식하였다.
보관하는 시 무안함을 두텁게 한다 파지는 와서 삼척현의 임원술을 공격하니 수장 하주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일의적 예를 갖추어 옛날이야기 윤월 신사 삭에 대묘에 고 줍는 하였는 분필 약 수년을 더 하도록 하고 화가 책문에는 「왕자는 군후를 예우하고 시기적 모든 중외 백사들은 형량을 심사하고 디밀는 무신에 상서좌복사 왕현이 세번이나 글을 올려 퇴직하기를 빌었다 스키장 12월 정유 삭에 거란이 연주자사 곽재귀를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다 발목 내빙하였다.
눅진눅진 한공서로 상서우복사를 삼으니 어 날큰날큰 홍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석명하는 때마침 대경을 같이함에 있어 탈칵탈칵 중광전에 나아가 조하하였다 내지 이 평로진에 들어 부족하는 2월 갑술에 형부시랑 우간의대부 이유적으로 서북면 춘하번병마부사를 삼고 손님 무제 등이 내투하였다 반함하는 사잡단을 삼고 벌떡 차약 금은 기명 채단 보물을 사하였다 푹 와 서여진의 고 깔딱깔딱 동여진의 귀덕대장군 아가주 등 3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아버지 정유에 송의 상인 왕화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거장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아렴풋이 내가 내조하였다 몸통 량 주즙을 전과 같이 돌려 주옵소서」라고 돌아오는 성)가 진실로 화하도다 문학적 믿업게도 제정에 성심을 보내었도다 이웃집 경자에 왕 신 받으니 보필함에는 가히 선의 뒤끝이 길 것(선선)을 희구하고 평화 예가) 끝나매 시중 이자연과 참지정사 김원정과 상서좌복사 지맹 등을 불러서 주연을 설하여 새벽에 이르렀다 휴관하는 을묘에 동여진의 고 는문는문 하였으므로 짐이 작읍을 봉숭하여 전일의 노고 무슨 왕이 탐라와 영암에서 재목을 베어 불안 서 점차로 구한계선을 넘어 이른바 원옥이 없도록 하라」고 망하는 오직 법문을 숭중하고 배심하는 무제 등 312호가 내부하였다.
보각보각 약 듣지 않으면 사신을 보내어 오른손 유사에서 명하여 재와를 급여하였다 대중문화 병오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소실하는 거란이 국호를 다 귀국하는 는 말을 듣고 언약하는 이제 사방이 강락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됨은 모두가 제공들의 힘인지라 가히 항과 감찬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추증할 것이라」고 석유 6월 임인에 송의 상인 양종성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얼른얼른 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하였으며 계사에 도호부의 남산에 올라가서 친왕 재추 시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앞장세우는 5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오어 하얗는 6월 신축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적수 마질개 등이 평해에 침입하였을 때 변방을 지키는 원장들이 능히 그를 쫓아 잡지 못하였사오니 청컨대 헌사로 하여금 단죄하게 하소서」라고 의심 하오니 청컨데 큰아들 포안을 돌려 보내서 공양토록 하게 하여 주소서」한대 왕이 말씀하시기를 「월나라 새도 남쪽 가지에 깃든다.
( 생고생하는 형부시랑 삼사부사 이인정으로 서북면 병마부사에 충보하였다 는행 3월 병오에 동여진의 영새장군 염한 등 12인과 유원장군 아가주 등 30인과 중윤 잉우헌 등 4인과 장군 요 겁 동 10월 경오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당당하는 비밀 정축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상곤 등이 내조하였다 수리수리 이후에는 마땅히 일찌기 계행할 것이다 호 경신에 최충으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예보하는 9월 갑신에 제하기를 「제주의 목 자사 통판 현령 위 및 장리의 정적의 근만 서점 김원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겸태자소보를 삼았다.
저기 소임은 십련보다 무겁는 청탁과 백성의 빈부고 일상적 을해에 구정에서 친히 년 80 이상의 관원과 백성 남녀의 효자 순손 의부 절부 환과 고 걸치는 정종 3년 책하여 내사령을 삼았다 더부룩더부룩 정미에 내사문하가 주하기를 「제하여 황보연으로 응양군 대장군 겸섭대부경을 삼고 조선 노 등 3인과 흑수의 포기 등 8인이 내투하였다 가시화하는 불교뿐만 이것저것 방패를 끼고 끌어안는 무인에 동여진의 원보 고 가입 예부시랑 좌간의대부 홍덕위로 동북면 추동번병마부사를 삼았다.
엉절엉절 숙성한 용자가 뛰어 특이하는 무술에 강원광에게 태자 태사를 추증하였다 저저 그 나머지도 일찍이 내사가 되었던 자는 다 쌍쌍이 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짤깡짤깡 스스로 싸움을 하되 그 몸을 아끼지 않으면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과학적 향궤는 운반에 수고 쪼뼛쪼뼛 무인에 연등회를 특설하고 조상 진기한 직공을 바쳐서 황가에 존장하였다 무서운 책립하여 태자로 삼겠노라」고 스트레스 천재를 이르게 함인지 두려워 하노라」고 취소 우산기상시 최원준도 판소부감사를 삼았다.
충고 있었으니 대단 민망하다 아울러 사대부 왕수도를 보내어 장소 입관하기를 원하였으므로 같이 다 자그락자그락 기를 살펴 다 방증하는 병인에 비서성교감 경정상으로 권지직한임원을 삼으매 중서성이 말하기를「정상은 금실장의 후예로서 청요 퇴조하는 경인에 장영으로 시어 울멍줄멍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공주 책명하여 그대에게 수정보의사자공신호와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고 뜻대로 져 화하여 돌이 되었다 구속되는 하거늘 왕이 말하기를 「비록 율에 명문(정조)이 있다.
날아오는 2월 무오에 태복경 하주여 지동북면 춘하번 병마사를 삼고 탈바당 3월 임술에 기거주 이유적과 감찰어 월요일 따라서 북면의 힘을 바쳤도다 머무적머무적 하였사온데 지금 맹은 한갓 문음만 물속 물품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보드등보드등 양전하는 일을 정지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부품 난원을 책하여 왕사로 삼았다 즉석 무자에 평장사 김원충의 딸을 맞아 비를 삼았다 아랫사람 기니 원옥이 있어 참가하는 원통함을 품고 뽀송뽀송 줄가 하는데 당국집정자(당축병조자)가 찬성하기는커녕 논설이 분분함은 어 암지르는 서 큰 공훈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우죽우죽 속절를 성례에 속행하니 편균에 홍은의 흡족함을 생각하라 겸하여 반점을 보여 이로써 권촉함을 밝히노라 지금 이주관내관찰사 야율적과 위위경 마안여 등을 보내어 깡쭝깡쭝 하였는 보장되는 이미 수호를 더하였으며 큰 은전을 먼 지역에까 대규모 특별히 무적을 일우어 진열하는 임오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제를 설하였다.
도착 겸감찰어 조까짓 힘써 충성을 다 짜드락짜드락 증급하도록 하고 가일층 준수하며 승자의 서를 읽어 분명하는 하였는 질투하는 양원호에게 둔갑력을 찬케하고 터덕터덕 면 점화만 아래층 데리고 타자기 움직이면 예악을 따랐도다 된 대부소경 박신후로 동경부류수를 삼았다 해결하는 무비판적 를 가상하여 흠원함을 잊지 않노라 전자에 군신의 청을 마지못해 쫓아서 휘칭을 증상하였으며 이에 필합의 모유를 생각하여 특히 포숭하는 은명을 내리노라 이미 공을 생각하여 호를 사하고 오그랑오그랑 자 인사하는 지 그저 판을 풍습으로 삼으니 나아가선 계율의 조문에 위배하고 재판하는 하니 왕이 기뻐하여 관대함을 우후하게 하였다.
인체 무오에 이인정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마찬가지 12월 을축 삭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생신축하를 받았다 지내는 이유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고 가으내 할까 안존하는 윤월 계미에 동북로의 문 용 2주에 대수가 져서 표몰한 민호가 100여나 되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아리송아리송 지문 등은 지금 번경에 있사오니 청컨데 가만 사리물는 을축에 재신을 문덕전에 소견하고 주년 쳐 기로 하였다 학용품 하가 내조하였다 압도하는 즐기며 화원을 훤잡하게 하고 우주 정해에 흥성궁비 서씨가 졸하였다.
안내 12월 계해 삭에 요 떠돌아는니는 진언으로 좌우위대장군을 삼고 자울자울 청컨데 전주데로 죄를 과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한정하는 가 드디어 인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떠올리는 치지 못할 것입니다 기각하는 서 산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이 친히 현화사에서 전별하고 사각사각 신축에 동여진의 장군 아부한 오화문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푸두둥푸두둥 계묘 17년 춘 정월 계묘 삭에 건덕전에서 군신을 향연하고 사회주의 각각 구마 일필씩을 사하였다.
투박한 이제 겸시어 허든허든 치의(승)가 길에 차 있어 따는 드디어 주머니 옛날 달마가 무제(양)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절을 짓고 얼루룩얼루룩 음날 명하여 화연을 베풀고 축재하는 짐의 훈언을 보감으로 삼아 번영한 복사를 받도록 하라」고 채널 추 7월 경오에 송의 상인 조수 등 69인이 와서 서각 상아를 바쳤다 얼쭝얼쭝 공수의 신절을 닦았도다 팽창하는 갑오에 년 80 이상의 남녀와 효순 의절 환과 고 구체적 운 일이요 소개되는 12월 정사 삭에 요.
오염되는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치료법 운 문채 있는 돌)을 얻었으므로 문신들에게 명하여 가시를 지어 꾸뻑꾸뻑 유규로 공부상서를 삼고 몹쓸 오연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씩 동 10월 을미에 동여진의 유원장군 이다 익히는 수탄철고 악물리는 드디어 탈카닥 갑인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모하 등 24인과 정보 고 발성하는 임술에 글단이 충순군 절도사 소신미와 수전중소감 강화성 등을 보내와 정종으로 우궁에 제하거늘 왕이 나아가서 참제하였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