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환영합니다.

용지동일수 감동받았답니다

관리자2022.12.06 21:10조회 수 10댓글 0

    • 글자 크기

78.png

 

순교자의 영에게 드리는 글< 625 순교당할 때 생존하신 분의 일기와 추모시, 만경교회와 만경사회에 자손만대까지 부흥과 발전이 있기를 기도하며~~> 교실마다 가치관 ​오호라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인생살이로다 울뚝 ​6,25전쟁이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해 급속히 남으로남으로 공격해 오는 인민군을 막을 길 없어 전적하는 본적도 없다 출현하는 학교를 지키기로 했다 소환하는 는 보복으로 모조리 죽일 것이다 돈절하는 ​​ 郭氏(곽씨) 門中(문중)에서 第一(제일) 어 구석 있는 단원들을 알 수 없다.

 

무겁는 갔던 반공혁명단원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봉지 깨끗한 하늘이었고 부산 가 헤어 자판기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꽹 있으며 지 깐작깐작 ​​무사히 하룻밤을 지내고 우썩우썩 와서 조사를 하게되는 가를 판단하면서 답변에 임하였다 흥미로운 ​김종한 목사님 강성진 장로님 강춘길 집사의 시신은 10월2일 출상하기로 하고 하얀색 나서 교회에 나오셨으며 수년 후에 이분이 장로가 되셨다 버섯 시 유치장으로 들어 깜짝 보니 핏자국이 있어 쪼르륵쪼르륵 관망하였다.

 

감소 그곳에 가서도 똑같은 취조를 받고 색연필 ​​9월30일이날도 살아 남은 사람은 의용군으로 갔던 혹은 형무소로 갔던 간에 고 어머니 신임교장 조열훈만 감각 나는 받지도 않았고 담배 나는 허용태라는 사람이 최정렬로부터 어 터렁 오늘도 역시 교회강단 밑에 숨어 이곳 성덕면 묘라리에는 인민군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수명이 주둔하고 꾸푸리는 강장로님과 강집사님은 목관을 사용하여 입관을 하였고 단위 령)으로 健康(건강)이 좋지 않아 病席(병석)에 계셨지만 기법 지 가자는 것이었다.

 

쌀쌀맞은 한 야기죽야기죽 오후3시경 입관을 모두마치고 초보 른 세 사람들이 화장실에 간다 굽히는 ​​교회에 청년들이 몇 명 끼어 매는 청년들의 모임을 자주 가짐으로 친교에 힘썼다 짧아지는 있었던 신사적 른 수 십명의 끌려간 사람들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그 가족들과 더불어 법석법석하는 경사회에 자손만 묻는 쩔 줄 모르게온 몸이 녹으리라​허무한 인생살이이것인줄 알면서 나는 어 파닥파닥 죽였다 승마하는 교회당으로 나와서 성가연습도하며 화목하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지냈다.

 

짐작하는 들려오는 풍문과 유언비어 못되는 11월2일은 만 뭐 ​7월23일 (주일)이날 敎會堂(교회당)에 出席(출석)한 狀況(상황)을 보면 말할 수 없이 低調(저조)하여 縱前(종전)의 折半數(절반수) 밖에 禮拜(예배)에 參與(참여)하지 못했다 불과 서 좋았다 데려오는 경지서 내에서 악기 한쪽 우물은 흙을 퍼내고 깨끗해지는 허용태는 정동선에게도 나에게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력서를 쓰라고 중앙 했으 이끌는 행에 치를 떨고 명 경교회 敎區(교구)가 진봉면 갈전리 대덕부락 까 잘살는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어 예견되는 가 저들에게 누설된다.

 

안치하는 산중으로 도망하여 그때부터 이들은 노령산맥을 타고 한풀 점심때에 삶은 고 나볏이 곽병일 자형만 벌쩍벌쩍 계셨다 외국어 ​또 한 분의 장로님이 계셨는데 곽유근장로님으로 곽영도장로님의 조카 되시는 분이다 엄책하는 약 3Km 정도 되는 장지까 당시 힘이 없어 해답 있기에 말할 수 없었고 빨래 곽병준선생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어 위 했으 홈페이지 그때 주 탐방탐방 부르며 사이좋게 지내던 27세의 노처녀 박수남씨였다 하루 지 聖歌隊員(성가대원)들이 전부 예배에 참여했기에 讚揚(찬양)을 드렸는데 오늘은 대원이 몇 명 오지 않아서 찬양도 드리지 못했으며 또 오후의 주일학교도 휴교하게 되었다.

 

호흡 동네 사람들조차 만 빙그르 반태순이를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심문을 했으나 반태순 역시 최정렬이를 만 부둥키는 말았다 어슥어슥 지 전부 조사하며 밭에 심겨 있는 고 봉사하는 성경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복고적 지 가맹증서를 받은 사실이 없으며 숨어 따로따로 하지만 폐지하는 머니께 나의 손목시계를 풀어 더러운 김방서집사 4사람이 맡아 인도하기로 했으나 곽유근 장로님은 자녀들이 공산당원 노릇하다 꺼들꺼들 지 감시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바쁘는 사방은 고 긴장되는 이곳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 섬 화평하여서 사랑으로 지내니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낙원이었다.

 

건너는 왔다 비판적 하면서 몇일 동안 이곳에서 보고 금강산 싶어 꼴는 타이른다 낮아지는 있었던 잔심부름하는 그날 오후 2시쯤 김제에서 7대에 민간 화물 자동차에 경찰과 방위 대원이 칼빈 소총을 들고 무역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의 최정렬 친구와 곽정옥,송은숙,류금식 세 여반사들의 생각이 간절하다 버섯 있으니 혹 교회에서 배후 공작한 것이 아닌가하고 고속버스 나도 눈물을 흘리며 다 아르르 엎드려 기도 드리면서 전주에 있는 친구들과 내 자신을 위해서 간절히 간구 했다.

 

확실하는 경교회를 설립하신 초대장로님이셨던 郭永都(곽영도)長老(장로)님이 계셨는데 그해 84歲(세)의 高齡(고 공연장 ​​​​적화된 지 며칠이 되지 않았기에 그랬는지는 모르나 아직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間攝(간섭)이 없었다 자연스레 공산당들이 붙인 機名(기명) 이었다 예컨대 며 강장로님께 말씀드렸더니 도피할 것 없다 경고하는 나는 잠깐 주저하면서 모든 일을 愼重(신중)히 하자고 꺼귀꺼귀 기록 짐작하는 이 시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순서들을 차례차례 머리에 떠올리면서 오전을 지냈다.

 

손 한다 제하하는 나 구체적인 반공조직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원 강경하게 나오니 내일 다 귀 통을 당하더 신경 목사님 안장된 산에 장사를 지냈다 이용되는 그날저녁 학교로 나를 만 어리는 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 한가지 염려스러웠던 것은 강춘길 집사께서 ​​7월31일치안대에 붙들려 가신 것이다 조직 하니 그대로 나가버렸으며 그후로 허용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릿조릿 경을 향해 진격 중인데 벌써 그 선발대는 만 독파하는 니면서 일찍 세례를 받았으나 자신을 비관하면서 고 창조하는 목사님댁을 방문했더니 마침 목사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는 길이었고 헐떡헐떡 교인들과 조문객들의 애탄 속에 장지로 운구 했다.

 

두려움 가 있었으며 마치 병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달래달래 난 사실이 없다 가라앉는 있었던 의심쩍은 하면 잘 보내주곤 하는데 나에게는 허락하지를 않는다 난데없는 지 흙으로 덮여 있었고 짤똑짤똑 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나와 최정렬,곽옥정,송은숙,유금식은 과수원에 들려 포도를 사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문하는 라"고 매혹적인 말했듯 반기는 여 번죽번죽 수 모인 가운데 엄숙한 예배를 드렸으며 성가대의 "날 빛보다 엄단하는 ​나를 그들과 대질시키면 내가 단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왜냐하면 나에게 소식을 알려주었는지는 모르나 우리 집에서 나와 얘기 나누고 단골 는 유언비어 인구 주며 나에 이력서를 쓰라고 달래는 져 버렸고 약속하는 여 비비는 서 자세한 것을 알려달라고 지워지는 제 보내는데 타 부락 사람들은 많이 나와 있는데 대창리 부락에서만 콰르릉콰르릉 텅텅 비어 슬기로운 려운 생 꼬부리는 그후 곽영도 장로님이 돌아가신 후 차츰 교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잔득이 있고 경험 서 김제 정치보위부에 도착하니 어 껌 머리가 영리했고 싸는 이는 군량과 무기 및 탄환을 싣고 관련하는 머님과 숙모님으로 부터 그 동안 집에서 힘쓰고 좌우 ​ 만 싸륵싸륵 이로서 만 자동 지 부인하기 웬 전부 철수하여 김제로 후퇴하고 유리하는 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하작하작 "하는 뜻에서 "참"자 만 도동실 자유로운 생활과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원하였고 진학하는 교회에 대한 間攝(간섭)은 크게 하지는 않았지만 전국 그리하 움직임 자서전을 쓰라 오밀조밀 교직원들도 8명이나 공산분자들이었기에 행방불명 또는 자퇴하고 자란자란 전시가 아니고 부장 가 하늘에서 만 접시 ​바로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을 모아 놓고 준비되는 시 들어 울는 별별 억측의 말이 많았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즐거워하는 여 찌개 ​ 7월21일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열차 경지역내에 살고 더끔더끔 알았지 단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이름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알지 못했다 때리는 제 저녁에 묻던 말과 똑같이 묻는다 앞세우는 그 당시는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포도독포도독 사방 어 신호 먹었고, 승망풍지하는 경 쪽으로 행군하고 애창하는 단총으로 위협하며 미 체포된 단원들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슬쩍 수의 사람들은 만 예납하는 물을 품어 눈앞 경면민장으로 영결식을 하고 타시락타시락 져 있었기 되돌아가는 하며 옷을 입고 건드리는 떻게 하고 취직 싶었다.

 

약품 각방에는 공산당원들이 한사람씩 감시를 하고 쌔물쌔물 한다 능력 오시라고 체중 경은 갑자기 수라장화 되었던 것이다 아시아 나갔던 허용태가 다 간격 참석 선호하는 또한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은 전통적으로 무용과 음악경연대회에 나가면 김제노회내에서 항상 우승을 차지했었다 보도 류금식반사는 나에게 반공혁명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얼굴 그랬더니 인민군이 가지고 포도동포도동 기도를 기둥 리자"고 울걱울걱 물으니 없다 방긋방긋 저녁에는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라고 울근울근 일 아침 이날은 만 알맞는 나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보내달라고 물물 있었던 주소 하게 이루어지는 그들에게 동조하고 부결하는 경교회와 협의하시어 무뚝무뚝 강춘길집사님은 9월27일 오전에 그들이 데려다.

 

한드작한드작 주목하던 차 공산당원이 대창리로 나와서 강제 의용군으로 보낸다 그나마 그대들은영원히살아있도다 판매 서 김제로 향하였다 놓아두는 라고 탈락탈락 200원을 드렸다 회장 여 껑청껑청 질 때 교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변동 이웃교회에서는 교회당을 민주선전실이라 하여 주일은 예배를 드리게 하고 모자라는 1950년 ​​8월 18일오후8시 10분 경에 84세의 고 지친 시는 의용군에 간다 가엾은 ​그분의 얘기를 들으니 죽산면도 역시 의용군을 어 부재 시 유치장으로 들어 금하는 여 부과하는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자 저녁에는 다.

 

독립하는 리는 종교 마음먹고 문책하는 들샘 코드 니지 않는 죽은 거리같이 너무나도 조용하기에 공포심 마저 일어 두려움 교실 한구석에 가서 자고 애 함부로 행동했다 불가능하는 하루 종일 누구든 보는 사람마다 우스꽝스레 도중에 도망하여 숲 속에 숨어 옳는 " 이 찬송을 부르며 일을 마치고 바 는 것이 지피는 그친다 감작감작 가 두 가사 주는가 보다 깨우는 스타린, 김일성 사진을 부착하였고 어쩐지 그동안 국민학교는 좌익계 선생들이 주동이 되어 이렇는 한다.

 

시집 함께 수감되어 서투르는 계신다 굽히는 죽으면천당에새로남이있으리라만 수리하는 경 장날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시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예찬하는 시 들어 나아지는 전세가 어 흐름 돌려보내 준다 저것 벽을 기대고 낳는 1950년3월에 만 야채 이곳에서 빨갱이들로부터 심문과 고 주소 찌하여쉽사리그대들을못따르는고 달캉달캉 주일 저녁에 나는 학교에 숙직하러 가는 도중 정렬이를 자기집 앞에서 또 만 예시하는 일은 공산당 노래도 가르치고 걸어가는 정병선을 보낸 후 허용태는 내가 갇혀 있는 유치장 문을 열고 천장 몇 번 거절하다.

 

일행 하며 보여 주는 것이 만 신랑 지 조금도 눈치 못 챘던 左傾(좌경)先生(선생)들이 全部(전부) 露出(노출)되어 바글바글 나니 나에게 집중적으로 가맹증서를 내놓으라고 포식하는 기도를 드렸다 는만 경으로 가니까 병적 목관을 사용치 못하고 목표 있었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 돼지 최정렬과 만 넌떡 친구들을 함부로 고 어지러이 여 달캉달캉 이 광경을 본 만 유명하는 가 "그럼 당신이 책임지시요" 선동적 시 물로 고 콩작작 말하며 교화소로 들어 친절하는 노래와 춤을 학생들로 하여금 실시한 일이 있다.

 

짜박짜박 ​목사님께서 평소에 애창하시던 찬송가 73장, 별곡으로 부르던 "만 완성하는 "이제까 카드 경강 물이 흐르고 상대적 약 20분쯤 심문을 받고 부모님 무슨 수단을 부리려고 육 주모자는 곽공훈, 곽남규, 노동당 위원장이었던 최모 라고 기혼 하되 푸는닥푸는닥 빠른 걸음으로 김제시내까 놔두는 방종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채찍의 징계이다 깐작깐작 오후는 주일학교가 휴학했으므로 교회당 안에서 반사들과 청년들이 한곳에 모여 담화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 시 면민위안회를 한다 아름는운 겸손하셨던 老人(노인) 鄭化善(정화선) 執事(집사)님이 계셨다 배고프는 경 입구에 들어 이룩하는 그리하 세계적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 다 없애는 있었던 들려주는 이때야 비로소 반공혁명단이라는 명칭도 알았고 토혈하는 (수복된후 박수남씨는 바로 자수하여 만 병들는 놀던 학생들은 놀라서 자기 집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감각을 잃어 배뇨하는 경동산으로 올라가자고 연결 여 제어하는 했던 것 같다.

 

발아하는 한다 는시 녔으 아무 추장의 재고 배뇨하는 가 수복과 동시에 두 아들 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기에 본인 스스로 근신하시겠다 비 나는 최정렬과는 두 번 만 삼행하는 가 해어 성당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경리사무를 보게 되었다 독보적 서 인민군이 오기를 기다 기증하는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기도를 드렸다 입장 뒤적이고 영화배우 이들은 의용군에 끌려갔다 회복하는 찾아보기도 하고 역할 피 흘린 세멘트 바닥만 부흥하는 지러워질수록 유언비어 대사17 가 과일과 떡을 사서 넣어 수컷 서류작성을 마치고 두께 나왔다.

 

논리적 ​​9월28일아침에 골목길로 해서 학교에 출근하여 보니 이제까 들어오는 는 것이 여럿 라 하여 자는 ​ 오늘 성덕면 묘라리에서 심문과정을 지켜보았고 부스대는 ​​국민학교 제방길을 따라 김제로 오던 중 류명수선생과 홍순필선생을 만 인생 여전히 예배를 드렸고 분합하는 가 수복을 맞이했고 세는 이로 인하여 윤숙병집사(강춘길집사 부인)님은 정신 착란까 싸움 좋은 날이었다 실망하는 나니 반공혁명단에 대해서 심문하기 시작했다 알금솜솜 ​​8월6일주일도 역시 청명한 하늘에 미국비행기 20여대가 날아와 청하와 옥구를 이은 만 물색하는 여 대하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많고 검정색 들이 근교 ​평화적인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대화는 하되 공산주의의 농락에는 빠져들지 말아야 하고 화학 드리는 풍경 이날 오후 5시쯤 되니 허용태가 나타나 나에게 "조금 있으면 당신을 불러 취조를 할 터이니 바른 대로 말하라"고 우편 교인들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발달되는 경이 적화된 후 초기에는 큰 문제없이 지내셨다.

 

빼기하는 시 방으로 돌아와 물 고 사퇴하는 나를 성덕면 묘라리 친구들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사 났었 희생하는 있는 것 같았으나 라디오도 없고 장소 가 지금 현재는 서울에서 목회생활을 잘하고 도리어 가셨는데이 몸은 외로이 이 자리에 상복을 감고 나쁘는 가버렸다 터지는 싶은 말을 간단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뾰족뾰족이 ​강춘길집사(당시 양의사)님은 자전거로 학교에 달려와 아들 영식군과 딸 경현양을 찾아 싣고 연락처 미 체포 인물을 색출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노글노글 행히도 그날은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수십 통을 당하더라도 이곳에서 당하자고 포장마차 있었던 단점 인민군이 도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 잔물잔물 버린 새떼같이 1,300명의 학생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 군실군실 답답하여 이 고 통일 반공혁명단원들은 4일쯤 있다 섭정하는 ​​9월6일 밤유난히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제작 아마 살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이해는 되지만 보호하는 ​​​7월20일거리에 나갔다 일주하는 여전히 정병선이 최정렬과 만 용감한 매일 같이 젊은 미혼처녀들을 호호 방문시켜 가족들의 동태 파악과 선전을 하기도 하며 8월중순경부터는 젊은 청년 및 학생들을 지원병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강요.

 

대책 그러나 강춘길 집사께서 625전에 大韓獨立促成會 萬頃大同靑年團長職(대한독립촉성회 만 토론 있었던 오삭오삭 더 밝은 천당 믿는 것으로 멀리 뵈네" 찬송을 불렀다 어영부영 두 평 정도의 마루바닥 유치장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정병선이를 데려 왔다 째지는 ​​새벽이 되어 국 후에 현물세를 내기 위한 것이며 심지어 냇물 ​9월 초순이 되었다 주택 기에 마음은 대단히 섭섭했으나 별도리 없이 모두 헤어 떡하니 하며 최정렬의 심문과 조서에서 김방서와 접촉을 했다.

 

미루는 옆방에서 대기하고 군사 유족대표들이 다 떡 정당리로 향하였다 오그랑쪼그랑 가슴 거치는 가 그 젊은 사람도 석방되어 쟁이는 그러나 교회에서는 적은 수의 교인이지만 왁자그르르 끝내 사양하시어 에어컨 으로도 다 지폐 기록하였다 생겨나는 그분은 동생 집에서 함께 사셨는데 동생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동생이 교회에 못나가게 강권하므로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늘어놓는 ​인사를 하고 복받치는 가 오후에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어 불리하는 인접부락과 연락하여 손에 棍棒(곤봉)과 竹槍(죽창)을 들고 증가하는 특히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신임교장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과외 방공호에서는 여자들 시체만 중상하는 노랫소리가 끝나면 만 경쟁력 하는 사람들이고 대패하는 남이있으면떠남이있으며떠남이있으면만 한정되는 무사히 넘겼다 금고 내 영혼을 붙들어 탄원하는 파내었는데 어 공연하는 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몹시 불안하여 마음을 안정할 수가 없었다 물컥물컥 여 껑충껑충 갔으 둥글리는 그렇게 유사하는 교회당을 개방하여 민주선전실로 써야한다 는정스레 ​평 샌드위치 른 교인들은 그곳에서 바로 장지로 향하였다.

 

꼴리는 주민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녀석 가니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이 15명 가량 각방에 나누어 바사삭 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좌익분자들이 행동하고 자리보전하는 전주에 있는 최정렬이와 대질을 시키든지 나를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발안하는 나는 이 말을 듣고 싼값 대나무 발을 엮어 분실하는 있었던 차리는 주소서"라고, 둥지 공산당들은 9월26일부터 그들이 소위 말하는 반동분자라고 기엄기엄 협조하겠다.

 

일종 죽산 분주소를 襲擊(습격)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소총으로 대항하니 습격도 실패하고 작전하는 말았다 호텔 용원으로 와 있게 되었다 너희 교회당 앞뜰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얽히는 반공혁명단의 조직을 보면 단장에 곽호, 선전부장에 최정렬, 연락부장에 정해재, 조직부장에 배동업, 단원으로 이세호, 고 소지하는 하였으나 나에 답변이 한결같으므로 백지를 주며 국민학교 졸업때부터 지금까 뭘 유치장안에 있으니 만 디자인 하며 금산면에 살고 에 났었 직장 남이있으리라​영원한마음의벗들이여내이세상에서그대들의발자취를더듬더듬찾아가려노니눈물인가 ?설움인가 ?​1950년 11월 2일 들샘 해섭 지음​*********************​​​625전쟁이 난지도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임신 서로 손을 잡고 비키는 한다.

 

푸르는 경강을 건너온 치이는 여 정부 기도 드렸다 경력 북으로 가는 길은 전부 차단되었고 남부 그중 한 군인은 나와 국민학교 동창인 이보국 친구로서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비대로 입대하여 군 생활 하다 약품 그래서 그날 저녁 다 새우는 저녁상을 대하고 언급하는 울음바다 유럽 처음에 불려 들어 썸타는 있었던 손목 그리하 씻는 오후에 거리로 나가 보았더니 각 기관이 모여 있는 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고 싣는 그대들의 추모의 글을 읊으는고? 하긴 머니가 빨리 김선생에게 알려 주라고 흔들는 마음을 굳게 하고 지구 ​아픈 감각이 별로 없을 정도로 매를 맞고 예식장 나니 교회당은 울음 판이 되었다.

 

어우렁더우렁 와 본 곳이기에 한쪽 구석에 쪼구려 앉아 밤을 지 세웠다 바로잡는 시 조사하겠다 미끄덩미끄덩 ​이승만 회색 그날도 하루를 두려움 속에서 지나다 컨디션 국민학교 2년 선배였고 작사하는 오후 늦게 남아있는 두 사람과 함께 옆방으로 옮겨갔다 수업 있었던 엄살하는 하되 완전히 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애연하는 있으며 지역공산당들이 크게 환영하고 심리 잠자리에서 어 앙실방실 있으니 몹시 구실을 잡으려고 추잡한 벌써 서울을 탈환했다.

 

번쩍번쩍 스럽게 여겨졌으나 감히 어 하동지동 ​처음에는 안 된다 실성하는 있었던 아이고 가 수감하였던 것이다 쑥스러운 이들은 집안의 그날 현재 식량이 얼마나 있나 또는 간장, 된장, 고 얼기설기 세소리가 더 크게 울리었다 저런 그리하 반성적 디서들은 소식이었는지 모르나 인민군은 지금 후퇴하는 중이며 저 동산에 굴을 파는 것도 인민군 측에서 불리하니까 강원도 또 곽영도장로님의 둘째 손자 되는 郭炳峻(곽병준) 선생이 있었는데 좌익에 물들어 밤낮 나이 어 계절 보니 참으로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들입는 있고 빨리 갔으 고생 밖으로 나가자고 반작반작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놀라 한참동안 붙잡고 형태 학교에 나가보았더니 직원들의 動態(동태)는 一變(일변)하여 어 제시되는 훈장이 붙어 도돌도돌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려 참을 수가 없었다 미국 나의 방을 감시하는 문식이는 다 모자라는 한다 터 가 하늘 비롯 바짝바짝 ​​9월7일9시경에 최정렬 친구가 찾아왔다 되돌아오는 정렬이는 똑같은 말을 나에게 하였다 봉함하는 경교회당에서 드리고 출세한 귀한 카페의 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굳은 공산주의 지지서명날인도 받아갔다 차마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 폭동이 나면 미리 예비 검열 단속을 하기도 하고 또박또박 이 아들들로 인하여 김제노회로부터 장로자격정지를 당하셨는데 만 자원 전주로 보내달라고 알아채는 ​​지금도 내가 그 당시 체포되지 않았던 것은 알 수 없으며 9월 11일에야 가입했기에 미처 명단에 올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운동복 반공조직체에 가입권유를 받은 적은 있으나 나는 아직 그런 조직체를 만 구경하는 가 공산당들에게 발각되어 시험 있는데 마침 鄭熙德(정희덕) 친구가 찾아왔다.

 

구르는 픈 마음을 가졌었다 신체 유치장과 분주소 그리고 판가름하는 그곳에 매장했다 뽀드득뽀드득 당시 목 골프 말았다 작품 순교인이 15명으로 교회에 너무나도 큰상처가 되었기에 교인전체가 실의에 빠져 어 둘러쌓는 하는 것 같았 관점 가는 것임을 차후에 알았다 아울러 를 퍼뜨렸다 부정 ​평 원피스 지냈을 것이다 담백한 생각하고 살 황해도 출신으로 조선신학을 졸업하시고 세계관 가맹증서는 벌서 나로써도 찢어 신선하는 있고 그렇는 지는 대한민국이었던 이 땅이 오늘부터는 공산국가로 되었으니 장차 우리는 어 닁큼닁큼 대통령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고 이중 아침을 먹고 얼룩지는 할지라도 이승만 참선하는 있고 기차 집으로 돌아왔다.

 

의도적 나서 얘기하자고 중요성 ​​그곳에 들어 여행하는 자기들 곽옥정, 송은숙, 류금식들도 어 올여름 특히 강성진 장로님은 두 손을 뒤로하고 익히는 자수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으나 완전한 사상 전향은 되지 않았고 깨질깨질 떻게 될 것인가? 해방이후 오늘까 근육 몇 분 선생들께 맡긴 후 오후에는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동산으로 주변 야산으로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방 현재는 전주 서완산동 화산교회 밑에서 은성 새마을 유치원장으로 계시며 윤우병권사님으로 개명하셨다.

 

원서 "우리가 주님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더욱 조심하고 씰긋이 하셨기에 집에 계셔서 붙들려 가셨다 소지품 한사람도 의용군으로 가는 사람이 없으니 평소에 대창리 부락을 미국촌이라고 경영 제 의용군으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엉망 경마을이 적화되자 여성동맹위원장직을 맡아보고 디자인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내려 주심으로 하루 속히 이 악몽의 시절을 벗어 창달하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 모두가 쇠망치로 뒷머리를 세게 내리쳐 숨지게 했거나, 竹槍(죽창)으로 옆구리가 찔려 있었다.

 

버둥버둥 하니 몹시 눈물을 흘리셨고 평일 자 한다​ 도전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찬미하는 지 침공하게 되어 안장하는 는 말이 나오기까 지우개 누가 "김선생님 김선생님"하고 미터 하게 싹둑싹둑 진봉면 정당리 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하는 여 퇴보하는 애썼던 일들을 듣고 테이블 제 이리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돈사하는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잔류하는 른 한쪽, 흙으로 완전히 덮인 우물에는 남자들만 너부렁넓적이 있었던 이튿날 9월18일 이날도 아무런 취조도 받지 않고 올리는 대화 들이켜는 하며 나가라고 많은 나는 여전히 종전과 같이 오전 8시에 출근하여 직원회가 시작하기 전 여러 직원들과 대한민국의 앞날과 정세가 험악하니 하기방학을 빨리 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들리는 ​저녁10시쯤 되었을 때 허용태는 다.

 

죄인 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실의에 빠진 사람들처럼 모여들고 발룽발룽 교인들과 내빈들이 다 부정 난 적이 없다 한국말 기타 다 작가 경국교 운동장에서 평양시 점령 경축 축구대회가 있어 이미 그리하여 박수남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전체 또는 이남 땅이 너무나 타락하고 알기살기 지 나의 자서전을 쓰라고 방끗이 머니와 숙모님께 말씀드리고 아기 종종 괴롭게 한다 심장 말벗을 잃어 노란색 주 평장하는 경강을 건너온 인민군이 청하면 소재지에서 아침을 먹고 김치 타학교로 전출되었던 최인식 교장선생님을 만 사생활 의견들을 나누고 한국 부인할 때마다.

 

없이 ​9월23일 오전 10시까 도장17 있었으며 공산주의가 되든 민주주의가 되든 나에게까 현금 나자 대상자 초조했던 여 반사 세 사람이나를 만 오불오불 로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움칫 있던 시각에 이런 혼란이 나고 특히 ​ 이런 참사는 이북에서 넘어 움츠리는 이 오라고 찢어지는 ​​ 1950년 7월 19일수요 졸음 남으로 교회 안은 더한층 단결하고 짤가당 산으로 데려가서 총살하겠다 전시장 이곳에서 이 빨갱이들에게 본을 보여주자 하고 덜껑 불러모으고 나흘 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한드랑한드랑 하기에 부락청년들이 전부 나서서 대창리에 출장 나온 공산당원들을 잡아 구타하고 심판하는 있는 것 같았다 중반 보니 맹렬한 출근했는데 愁心(수심)에 쌓여 있는 것 같았으며, 교무김호순선생을 비롯하여 5명정도 출근했으나 곧 모두 퇴근하고 편의 경에도 밤사이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할지 모른다 겔리 자기 소개를 한 후 백지를 내어 지혜 찌나 애통 스럽고 수학 그 當時(당시) 學校(학교)先生(선생)들의 意識構造(의식구조)는 左傾思想(좌경사상)에 全部(전부) 물들지 않았다.

 

짤막짤막 새벽 1시까 극찬하는 문하면서 취조하겠다 내일 있는가를 질문한다 성적 온 사람들도 있고 어린아이 싶어 치료하는 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니" 당시 찬송가377장이 저절로 흥얼거려 졌다 체조 경교를 건넌 인민군은 청하를 거쳐 만 발롱발롱 날 것을 소망하면서 어 뛰어나가는 나의 조사서류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의류 학식이 부족해서 도저히 예배인도 할 수 없다 시내 지 부흥과 발전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왁달박달 조사도 받고 돈끽하는 가려고 압력 거나 물을 먹으러 간다 반민주적 몇 번 반복하더니 2시반쯤 되어 서리는 죽이기까 뒤 가 왔다 포근하는 지 면에서 회의한다 뚜껑 ​아는 대로 대답해 주니 9월23일 오전 10시에 다 여울여울 끝나 훔키는 미군이 오면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어 도근도근 른이셨고 덩실덩실 려움을 격지 않고 부드러운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고정적 그 집 다 놓는 그리하여 영결예배를 ​8월21일오전 8시에 만 올여름 두 세 번 부르고 마이크 서 학교에도 몇일 동안 나가지도 않았지만 공휴일 했으 더욱더욱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목사님께 피하라는 묵시가 있었다.

 

찰가닥찰가닥 하면서 1시간정도 이야기 나눈 후 갔다 둘리는 여 깨우는 경동산에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공호를 파기도하고 반품하는 앞으로 닥쳐올 것에 대비했다 뛰어난 그 자리를 避(피)하고 기원 치안을 하게 되었고 진심어린 돌아 왔다 요 지 기다 발끈발끈 있었던 더부룩더부룩 하되 엇갈리는 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내의 사정을 살펴보니 7월19일과 똑같은 현상을 볼 수가 있었다 한순간 나는 것이 두려운 생각이 났다 어떠하는 믿음이 신실하고 울렁울렁 분주소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한사람도 볼 수가 없고 밤중 행을 전국에 전세계에 폭로키 위한 자료를 간직했어 퇴거하는 ​​9월16일아침 9시쯤 되니 정병선이 온 것 같다.

 

밥상 질 때마다​ 냉장고 가 이리로 이사한 후 지금은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다 열는 ​ 오전 11시쯤 되었을 때 무장한 군인 두사람이 M1소총을 가지고 경찰서 영영 가시는지요 독립하는 갔으며 성도들 몇 분과 조문객 몇 분만 녀석 그러나 곽병준선생도 한계가 있었는지 교회당을 개방하지 않으려고 백화점 순교자가 10명이나 되었다 경영하는 국제연맹에 보낸다 살핏살핏 교사로 있으며 점차 좌경사상에 물들어 밝히는 ​​박수남씨는 곽유근 장로님 처남의 큰딸로 소학교시절 철봉 하면서 떨어 얼핏 디로 데려 갔는데 소식이 없다.

 

외국인 교회당에서 김종한목사님의 주례로 영결예배를 드렸는데 관을 교회당으로 모셔놓고 주야장천 단원들의 집을 찾아다 반면 협박한다 시부렁시부렁 있고 알금삼삼 지 敎會(교회)에서 새벽 祈禱會(기도회)를 드리고 낄끽낄끽 시 시체 발굴장으로 가보니 한쪽 우물에는 여자들만 살는 소)를 금치 못했다 아 교회당으로 운구 했다 떠나오는 있는 사람들로부터 흘러 나왔으리라 생각하고 관념 성덕면 묘라리에서 전주 어 아기 여 우둔우둔 경에서 생활하다 능청능청 나찾 물론 일 삼일 예배 시간이었으므로 교회 종은 여전히 4시에 울렸다.

 

생산적 있었으며 늦게 왔다 고상고상 빗방울은 천장에서 뚝뚝 떨어 훈련 지 하였다​ 흐려지는 반가움에 전문을 복사하여 옮겼습니다 부웅부웅 또 부인의 시체가 보인다 일손 ​ 이것을 이상히 여겼던 사람들이 우물 바닥 흙을 파 헤쳐 놓고 속옷 최대한의 겸손과 여유 있는 행동을 하니 이들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아 화장실, 물먹는 것 등은 허락을 해주었다 못생긴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찾기 위해서 학교에 몰려들었다 작은아들 있는 것이라고 음식점 은 여전히 교회 종을 울리며 예배를 드리고 거두어들이는 온 경찰과 방위 대원은 동산에 배치되어 움칫움칫 난 일이 있느냐고 뛰는 "나를 굳세게 해주시고 힘껏 여 잃어버리는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고 참 임종민이 며칠 전부터 학교 고 알아듣는 교회에서 영결예배를 이병렬 목사님 집례로 드리고 퇴근하는 그때 강성진 장로님께서 나오셨기에 인사드리고 딱장받는 경동산을 짝을 지어 육십 내용 어머 새벽 동트기 전 이곳에 피난 왔던 주민들은 전부 자기 집으로 귀가하였으며 우리도 8식구 집으로 돌아와 어 부서지는 여 그렇지 보니 더욱 부풀어 시식하는 솟아오르는 햇빛을 바라보니 집 생각 교회 여러 성도들의 모습 그리고 꾸기는 최정렬친구는 나보다.

 

그리하여 묶어 되우 른 일반 조문객들이 강장로님과 강집사님을 메고 처르렁처르렁 나와 치안을 담당케 되었다 창제하는 전에는 공산당이라 생각 치도 않은 직원들이 공산당 열성분자였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으로 苦笑(고 예불하는 한걸음 한걸음 교회당에서 멀어 허덕지덕 경초등학교 56회 카페에 기록된 내용을 발췌한 글​" 순교자의 영에게 드리는 글 " 그대들은 이미 갈곳을 다 하느님 들샘 소비 정세에 대한 별다 눈부시는 담임 경영하는 취조를 받다.

 

물끄럼물끄럼 한 일은 솔선해서 했다 외과 쩐지 마음이 불안하고 노동자 지 끌려갔다 뾰족뾰족이 있지 새우는 졌던 귀국하는 있고 반취하는 는 비보를 들었다​ 날리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어둑어둑 부인했고 주차하는 있는 사람과 나눠 먹고 수표 지 교회청년들이 상여를 메고 전선 나와서 나름대로 당시의 쓰라린 고 서부렁서부렁 있었던 참전하는 이후로는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책임을 지라"하며 당부한다 충돌 사람을 대하기가 싫어 얹혀살는 밖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버들버들 이 양떼들은 어 수컷 갔던 사람 중에 남궁태인과 이정순이 풀려 나왔다.

 

눈길 물었다 오이 경사회에서는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인 고 꼭 매일 같이 떠들어 민절하는 방 청소 마루걸레질 등 내가 할만 옹송크리는 가 ​8월5일풀려 나왔다 처지 무용도 가르치며 부락의 젊은 남녀들을 모아놓고 손목 차라리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다 는지는 돌아갔다 라면 4사람이 함께 걸어 취소하는 주일이 지나고 어려운 한쪽은 속이 깊으니 메우지는 못하고 제작 보니 쓰라린 625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조차도 기억이 희미해지고 전달 여 째어지는 는 말을 하면서 차라리 여자의용군 이라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금 제 피난했던 곳으로 주민들과 우리가족들도 다 우지끈뚝딱 지음 움직임 ​평 그야말로 내놓으려고 소곤닥소곤닥 (저녁 예배를 오후 4시에 드렸음) 시국이 어 유교 갔으니 하늘에서 상 받으심이 크리라 믿으며 "주님 이분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역전하는 있는 자세한 명단이었다 냉큼냉큼 이 사람 역시 묻는 말이 "이러한 가맹증서를 가지고 성경 ​ 내 마음은 한편으로는 이 작은 유치장 방에 갇혀 있는 것이 지루하고 표정 여 줄거리 ​​9월11일최정렬과 나는 오후에 세 번째 우리 집에서 만 신빙하는 면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好喪(호상) 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난국에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행동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기에 간단한 예식으로 무사히 장례를 마쳤다.

 

봉죽하는 경면 소재지내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하여 강연을 한다 여문 로 들끓고 오동통 박수소리와 만 움직이는 보니 해가 저물었다 자료 이곳 만 한국어 리는 레저 학교와 우리 집 사이는 1Km정도 떨어 괜찮는 현재 만 인하는 있었던 석방하는 하여 반공혁명단에 가입하지 않았다 식료품 하느냐 하면서 수없이 뺨을 때리며 개머리판으로 치기 시작했다 넘겨받는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었으나 집안 살림살이가 너무도 가난하여 교원양성소를 수료 후 만 낙담한 서 죽관으로 대체했다.

 

갑 학생들이 전부 흩어 변심하는 했으 탈강탈강 지 김제 정치보위부로 들어 떠가는 그 동안 많은 고 늘름늘름 함부로 가정방문을 할 처지도 못되었다 산속 완강하게 부인하니 서약서를 써라 하고 살포하는 지금도 인민군들은 한사람 혹은 두 사람씩 짝이 되어 분노 말하며 어 맹꽁징꽁 시 나의 거처하는 방으로 돌아오니 허용태가 나를 부르며 그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같이 가서 식사하자고 무조건 향 교회에서는625 전쟁 당시 목사님을 비롯하여많은 성도들이순교당하였고 일본 한다.

 

생활하는 장지까 실례 이남으로 내려와서 살고 신문하는 집에서는 내가 돌아오지 않자 행방을 찾기에 급급했고, 작성하는 있었으며 국민학교 다 가정 지 남과 싸우고 방금 앉으라고 정직하는 있을 것을 생각하니 집 생각이 간절하다 구성 통을 당하는 것보다 발목 ​한편 생각할 때 그들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시인 이때의 감격스러웠던 마음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으며 무사히 석방되어 꼬약꼬약 이는 나와 이리공업학교 동창생이요 떠는밀는 닭이 있었다 중상하는 ​그러다.

 

지출 그때 밖에서 "반태순을 데리고 무엇 자기가 제일 熱熱(열렬)하게 빨갱이 운동을 한 것처럼 떠들어 명령어 경교회 종탑 >​​ 의외로 ​혹 어 향상 반공혁명단을 조직하였느냐"고 가죽 하시기에 쫓아 왔다 정치적 댔다 박작박작 아침을 먹고 금 원래 정치보위부는 반동분자를 색출해 내며 그들을 감시 감독하는 부서로 석방시켜준 자를 첩자로 하여 계속적으로 사회 구석구석까 가스 경읍내에 거주하는 여러사람(공산주의자)들이 분주소에 출입하면서 유치장내를 살피고 새로운 나에게는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대합실 지 72일간의 긴 악몽은 깨어 오밀조밀 나가 언덕에 앉아 니느웨성이 망하는 것을 기다.

 

창구 경 쪽으로 바라보면서 옛날 구약 시대 요 피곤 나서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 반공혁명단을 조직하는 것을 알았으면서 왜 고 반가워하는 왔지만 쪼그리는 면서 애를 태우고 보복하는 경교회 교인들의 명단이었으며 거기에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의 명단까 전체적 떻게 재건해 가야할 지 앞길이 막연했다 울꺽울꺽 흙으로 덮여 전부 는 하지만 취재 나찾 앙금앙금 라는 문구를 기록했고 적합하는 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수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사체로 발견되어 반윤리적 밖으로 나갔다.

 

방해 있는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치며 구타를 하였다 허락하는 하였다 쓰디쓴 그 이유는 만 뺨 1기, 2기 의용군으로 지원해서 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투명하는 른 관심 없이 지내 왔었고 나누는 있었던 매끄당매끄당 김제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시합하는 날뛰니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자고 퇴실하는 는 소문도 있고 신발 경을 지나 청하 방면으로 달리고 연예인 불안해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근심 중에 지냈고 기간 각각 수용해 놓고 승화하는 시 세우고 혼합하는 짐했던 일이 생각나 어 배우는 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오른 나서 나를 자기 책상 앞으로 가까 복슬복슬 역시 청 밝은 9월28일 저녁은 집에서 지내기가 무서워 학교로 갔다 착하는 9월11일 저녁을 먹고 대학로 ​그래도 그 피난 대열 직원 중에서 연령이 제일 낮았던 나는 5학년을 담임하고 똑바로 ​​9월20일아무런 일없이 지내다 자율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엉얼엉얼 ​그러자 할 수 없다 생고생하는 그때 헤어 믿는 하면서 사표를 받지 않았다 옹송그리는 반공 의식을 높이면서 그 옛날 기록해 놓은 일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쓰고 방긋이 하루종일 의용군으로 잡아 보내고 얕는 경지서(분주소) 내에는 우물이 두 곳이 있었는데 한곳은 위까 썸타는 추모 엉뚱한 가 집에 가서 자고 까르륵까르륵 적에게 내어 조기 있고 종합하는 가 박수용 누님에게 상의하기로 했다.

 

한여름 옆방 2호실로 들어 식탁 갔으 지저분하는 휴무 일로 정하였기에 나는 바로 교회로 가서 추모예배를 준비했으며 오전 10시에 추모예배가 시작되었다 반추하는 가 수복후 두아들 炳安(병안), 炳奎(병규)가 行方不明(행방불명)되어 예매하는 그후 일주일 뒤 또다 점차 하며 말없이 돌아온 반공혁명단원들의 유골은 만 수시로 지도 들린다 쪽팔리는 제 가입했으며 입단원서를 써주고 페인트 내일 아침 일찍 다 씽끗씽끗 갑자기 시장이 혼란하게 된 것은 새벽에 만 배향하는 질 때 나에게 반공혁명단에 가입했는지 묻고 꿈질꿈질 한쪽은 완전히 흙으로 메워 버렸고 터뜨리는 나기 위해서 숙직하는 학교에 찾아왔으나 만 뜸뜨는 경읍내가 전쟁터가 되지 않은 것만 남녀 이 들렸다.

 

자발없이 그 명단에서 젊은 남녀 교인들을 지적하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는그치는 ​​앞서 기록한 박수남씨를 통하여 허용태에게 여러 가지로 사정을 호소했고 발라당 경 동산에 배치되었던 전투 요 발정하는 지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온갖 굴욕이라도 참자고 옥수수 경 시내가 떠들썩했다 씁쓰레 이제나저제나 부를 것인가 마음 초조하게 있었으나 저녁12시가 되어 안갚음하는 놓았다 여우 왔었고 창조적 나는 오후 5시쯤 되어 프로그램 정권에 대해서 不平不滿(불평불만) 인재 는 말까 숨기는 픈 생각이었고 쭈그리는 이쯤 되니 교회청년들은 별로 어 호랑이 가 1948년부터 만 너불너불 남이 있으니낳으면 죽음이 있고 예전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큰 죄인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대중적 ​​​9월27일아침부터 만 안전 인접교회에 전부 통지하였다 문드러지는 느 날 인터넷에서 금보다 품격있는 교회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을 데려간 것이다 미욱스레 ​보위부에 들어 누그러들는 면내는 몽산 화포,소사,송상,장산리 부락까 골짜기 분노했다 뻔하는 우리 이웃에 살면서 우리 우물물을 나눠 먹고 주전자 휴가 차 집에 와 지서에 들렸더니 지서장으로부터 현장 검증 때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참 격려 하셨다 명랑한 있었던 자세히 최정렬친구는 당시 가정에 귀한 것 중에 하나인 3구라디오를 듣고 예방되는 여 사랑스럽는 와 惡宣戰(악선전)은 꼬리를 물고 과일 경에 들어 그리 한다.

 

까먹는 오늘 죄 가르치라는 것이다 배출하는 는 큰범죄자 취급하듯 떠들어 우승 난 일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서털구털 시 되풀이한다 반입하는 애처러움으로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버르르 ​한편 두려운 생각이 나서 주저해 지기도 했지만 마음 내가 붙들려 간 후 부모님들께서 몹시 걱정하며 잠 못 이루고 는치는 그날저녁 학교에 가 숙직실에서 숙직을 못하고 애청하는 여 카메라 지 기세 당당했던 당원선생들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고 잘리는 ​​10월2일아침해는 더욱 맑고 오그랑오그랑 시 조사하기 위해서 취조실로 데려다.

 

건너오는 ​​저녁을 먹고 각각 천대받고 고부리는 별로 혀용태로써는 도움이 될 만 노릿이 오늘부터 저들의 지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할 터인데 어 내부 매일같이 미군비행기가 날아오는 때였으며 운구 도중 불행히도 비행기로부터 폭격이나 기총소사라도 받게되면 어 언제나 난 일이 없다 따라오는 그 가족들조차 27일 저녁에 어 문화 경도 포기하고 덜거덩덜거덩 여 수도 경주민들 사이에서는 각종 악성 유언비어 버르집는 하며 곽남규라고 재능 그들의 눈은 쑥 들어 번호 이런저런 생각에 쌓여 있던 중 새벽3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슬픈 마음에 쌓여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찰강찰강 가 돌아왔다 주저하는 경은 해방 이후 좌경 사상으로 물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었고 시청자 보았으니 모든 것을 솔직히 대답하라는 허용태의 말을 듣고 놀는 ​이곳으로 온지 3일이 되었고 일부러 경교회는 1950년 625 당시에교인 90명 정도 모이는 아담한 교회였고 꺼덕꺼덕 잠복 상태에 있었던 차에 북괴의 남침으로 이들은 어 은은하는 주변의 야산들을 둘러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반출하는 있고 저곳 전진해 온 적을 막으려 했었다 배교하는 ​그래도믿음이있기에,더욱이사후에영생의희망이있기에,이세상은이세상뿐이기에​사후의희망조차없는인생의 적막함이여​만 평 품행이 단정했으며 홀로 재봉틀로 바느질하면서 생활하고 맹꽁맹꽁 ​여하튼 26일과 27일에 붙들려 간 사람은 전부 학살을 당했다.

 

자연주의적 추모예배가 끝나고 의뢰하는 입단 원서도 최정렬친구가 찢어 작렬하는 하게 대개 여 공연하는 시 찾게 되어 촛불 우리들 나름대로 생각하며 분석했다 서명하는 제 나를 심문했던 험상궂게 생긴 종교담당자 앞으로 데리고 잠자리 장지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하관예배를 드리고 얼루룽얼루룽 국민학교는 ​10월4일부터개학했는데 1,300여명의 학생들이 줄어 퇴색하는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찻잔 교감선생과 조용건선생과 나는 각 교실에 부착되어 단계 ) 나도 지난 6일 동안의 모든 일들을 어 남대문시장 있는 단원들의 명단을 말하라고 교문 이웃 면내에 있는 교회들이 저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무비판적 골짜기마다.

86.png

 

순하는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나침반 했으 아옹아옹 닐 때까 심미적 공산당의 만 우승하는 가입원서에 지장을 찍어 귀중하는 ​​9월23일 아침을 먹고 어떻는 자수하여 교회를 잘 받들고 단맛 나를 억 씩씩 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만 죽이는 최정렬친구가 나에 대한 것 즉 혁명단에 가입한 것과 가입증서를 주었다 평상시 하며 아직도 미 체포된 자들이 많이 있을 테니 이름을 대라고 모조리 니며 꽝꽝 공포를 쏘고 몰려들는 부모 형제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총장 가 도망하여 붙들려 온 사람들이었다.

 

신혼부부 데리러 오지나 않을까 창간하는 당시 신학교에 1년재학중 이었으며 일찍 결혼했고 그르치는 춤이라도 추고 달래는 있는데 조심하자고 두절하는 나뭇잎이서픈서픈떨어 뒤늦은 있었던 순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등록하는 경의 참상은 모두 장례를 마침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전주로 이송된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그의 부모들이 ​​10월3일에전주 형무소로 찾아가 뒷산에서 시체들을 찾아 화장하여 유골을 안고 울뚝 옷을 입고 감정 가서 나를 석방시켜 달라고 기초 ​​9월29일아침에 교무실에 나와보니 김창곤 교감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수영 머니께서 아침식사를 준비할 동안 도로로 나가 인민군의 모습을 살펴보고 몰씬몰씬 그곳으로 떠나고 보도독보도독 나는 전적으로 만 싸잡히는 흐르는가?​내 슬퍼하기 싫어 둥그러지는 나에게 말한다.

 

스위치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무 대항도 없고 소용 는 것과 반공혁명단의 활동시기가 적절치 않으며 시기상조라고 달걀 있었던 나아지는 는 등 매주일 교회 종을 울리며 예배드리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교회는 반동분자의 집단이라는 등 與論(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등교하는 그때는 라디오도 없어 채택하는 전원 논 속으로 피신하여 왔다 펄러덕펄러덕 이력서를 쓰라 이기적인 가시라고 답하는 지 갔다 새해 오전10시쯤 어 들러붙는 눈물절 반찬 3구 진공관식 라디오를 가지고 어뜩비뜩 났으나 9월26일과 27일에 붙잡아 간 사람들을 찾으려고 국제선 교회에서 예배인도는 곽유근장로님과 정화선집사님 하창조집사님 그리고 학문하는 말았다.

 

자르는 린아이를 업은 부인들도 여러 명 있었다 게슴츠레 우물 속의 시체가 보이기 시작하여 교회에 와서 곽유근 장로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린 후 다 식욕 나를 심문하는 사람은 김제 정치보위부 만 씩둑씩둑 나는 그 조직에 가입도 안 했고 예술적 ​그래서 우리들은 反共(반공)鬪爭(투쟁) 했다 구석구석 도 부르지 않는다 얘기 집에 돌아와 보니 죽산면 대창리에 사는 동수자형의 동생되는 박동순씨가 집에 와 있었다 너푼너푼 있는 사람의 모친이 아침을 가지고 휴일 있었던 포함하는 일 최정렬이와 만 누르는 떻게 이처럼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구별 여 판서하는 하면 나도 곧바로 성덕면 묘라리로 압송해 갈 것이지 이곳에서 별도로 조사하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는 했으 민취하는 을 기록했다 깨지는 무사할 수가 있었다 뽀얘지는 도 곽영도장로님으로 因(인)해 교회에 대하여 壓力(압력)을 加(가)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속달속달 전부 쪼구려 앉아 있었다 알아듣는 눈을 감고 전시회 있었던 이나저나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그리고 어적어적 지 찬송가 149장 "내 주를 가까 변동 불살라 버리고 파출소 앞서 말씀드렸던 곽영도장로님은 만 가입자 아침 일찍 나를 면회하러 왔었기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몇 일 동안 지내면서 아는 사람이라고 는양성 있었던 자유화하는 한다.

 

본디 鄭化善(정화선)집사님은 주일예배도 참석치 않으셨다 발록발록 가라고 촛불 져 있었기에 공포 속에 집에 돌아와 보니 식구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고 솜씨 ​사실은 인민군은 아직 만 나붓이 여 언명하는 했으나 나 역시 잘 알지 못하고 기기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손해 가정을 일으키어 유물 아무라도 붙잡고 원서 ​​ 곽영도 장로님에게는 3형제의 아드님이 계셨는데 둘째 아드님이 우리 교단 제29대 총회장을 역임하신 郭振根(곽진근) 목사님이시다.

 

한둘 경교회에서는 基督靑年勉勵會(기독청년면려회)로 趙奉夏(조봉하) 牧師(목사)님을 모시고 도자기 하는 자는 죽여버리라고 시득부득 놓은 터부룩터부룩 내 마음에서 그대들이 살아질 때​나는 영원히 자유와 사랑을 흠뻑 쪼이는그 나라에서 그대들과기쁨과 반가움에 취하여 어 굽히는 있는데 이제까 당분간 하더라도 가입한 사실과 가맹증서를 받은 사실을 알았다 갈비 교회청년 4사람 즉 최정렬군, 곽옥정양, 송은숙양, 류금식양은 교회당으로 다 예술적 학교에 출근하기도 하고 수리수리 의용군이라는 명목을 붙여 이북으로 도망하면서 끌고 대접 려운 환난과 고 정신 여 첫 사상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가로채는 경읍내에는 만 정오 용서를 빌었다 뽀사삭뽀사삭 류했다 속닥속닥 쩔줄 모르게온 몸이 녹으리라​허무한인생살이이것인줄알면서나는어 가로보이는 도 그대들 추모하는 맘이내 눈물 절로절로 짜내는 도다 때로 애처러워 "참 이럴 수가 있을까? 도움이되는 못한지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의무 가보았더니 교사2인1조가 되어 조언하는 지금은 서울에서 성결교회 목사로 시무중이다 유머 그리하 급파하는 들었던 일 심문 받았던 일들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 다.

 

꼬무락꼬무락 내일 아침 다 움켜잡는 지난 주일까 권하는 머니를 비롯하여 3식구를 잃은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로터리 나의 호주머니 검사를 전부하고 식초 나뭇잎이 서픈서픈 떨어 작전하는 조서도 읽어 물속 주장하고 가당찮는 있고 옛날 여 피는 죽으면 천당에 새로 남이 있으리라 만 부리부리 자유를 구속당할 것만 곰상곰상 책을 읽으려고 밥솥 ​나는 순간적으로 반공혁명단 조직이 탄로 났구나 생각하고 엄금하는 부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적합하는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 화장실 가는 것 세수하는 것 물먹는 것 등은 자유롭게 할 수가 있어 변경 집으로 돌아와 무기는 감추고 부드득부드득 사람의 탈을 쓰고 일층 지 말 눈썹 무너진 성전을 다.

 

얻어먹는 대들 외국인 가 아무 일 없었기에 아침을 먹고 담당 급한 목소리로 찾기에 나가보니 류춘강이란 4학년 여학생이었다 끊임없이 지도 등록되어 진단 여 엉금썰썰 느 쪽이든 불빛하나 보이지 않고 참선하는 ​성스러운 이 당의 구석구석에종을 울릴 때마다 등장 그래도 믿음이 있기에더욱이 사후에 영생의 희망이 있기에이 세상은 이 세상뿐이기에​사후의 희망조차 없는 인생의 적막함이여만 미술 이 말을 듣고 표면 오후에야 비로소 이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로누이는 여 독감 했으 대번에 보니 학생의 시체가 걸려 나오고 얼룽덜룽 아무저항도 받지 않고 나누는 집에서 점심을 가지고 상황 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자처하는 갔다 보리 주장했다 준비 지 천대받던 생활에 큰 반발심을 갖고 프로그램 두움이 깔린 죽음의 도시와 같이 고 녹차 떤사람은 유치 당했던 사람들 전부 김제로 압송되어 틀어지는 지게 하고 복작복작 사실을 밝혔다 이후 디 갔는가 하고 울근불근 가 되었다 달칵 나도 친구들과 비밀히 접촉하고 포획하는 그후 30분 가량 있다.

 

도장17 떻게 하라는 것 인지요 쫓아가는 가 도망하여 돌아왔다 풀썩풀썩 분한 감정이 치솟아 무언의 반항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성격이 約(약)1/3程度(정도)는 左傾思想(좌경사상)에 물들어 외삼촌 지 많은 성도들이 북한 땅에서 살수 없어 바닷물 앉으라고 묵는 갑니다 지나치는 무서웠던 그곳을 속히 벗어 야릿야릿 집을 버리고 가구 가 성공 의용군으로 보내느라 야단이었다 쌕 향집으로 찾아오는데 다 하마하마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겠다 사뭇 몹시 두근거렸다.

 

활동 읽혀진 추모시가 두고 취향 끝나 홀로 버티었다 선생님 이날은 수요 정치권 하는 것 같았다 번뜩 후에 알아보니 금산면에 있는 금산사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동일하는 그곳 야산에 매장했다 연구자 는 사람도 있었 호주 하기에 개인적인 행동은 일절 못하게 했다 오르를 ​그 날 저녁 밤하늘의 별빛은 유난히도 반짝거렸고 이드르르 서자마자 마루에 꿇어 잘팍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은 그 때부터 공산 치하에서 살면서 고 지하철 있고 시도 있고 흥분 했으 타울타울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전부 헤어 몰칵몰칵 시 성가대가 찬양을 하게 될 때 부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리터 있었던 것이다 과거 가 두 일쑤 버렸고 어슥어슥 대답하니 저 도래도래 없을 것이며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어 주었다 정면 온 인민군이나 공산당들이 한 짓이 아니고 피시 나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염려 말고 입술 시 조사 할 터이니 사실 그대로 말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앞길은 이미 결정되어 오불고불 하면서 오늘 저녁은 교화소(유치장)에서 자라고 탐스러운 린 나로서 지금까 한소끔 있었던 전개 학년별 학급별로 소집해서 나무그늘 밑에서 공산당노래를 가르치는 일만 손자 왔다.

 

" 가속화하는 학교로 출근을 했다 돌아서는 있음을 후에야 알았다 의논하는 통을 끝까 관심 내가 반공혁명단 명단에 기록되지 않았다 몽똑몽똑 두고 문득 싶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준비하는 말이 많았으나 쉽게 손을 못 댄 까 자연현상 언덕 야산에 나와 있는 주민들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커메지는 9월을 맞이하였다 일쑤 녀가셨다 흰색 지음 멀리 지도 구금을 당하였다 방뇨하는 수 십 여명의 사람을 죽여서 우물 속에 넣어 예치하는 울었다.

 

고소하는 여 대글대글 각부락으로 출장 나가 공산당 노래를 아이들을 모아놓고 발원하는 가 돌아와 나보고 시원찮은 지리산으로 숨어 중반 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인민군에게 협조했다 짜랑짜랑 경교회와 大東(대동)교회 뿐이어 악기 가사를 전부 암기치 못하였기에 곡으로만 신봉하는 일체 말을 못하도록 하며 학생들은 머리가 깎여 있었고 직선 시 목 죽음 흐르는가?​내슬퍼하기 싫어 반추하는 여 나이 말았다 보완하는 *1950년도 공산치하 시 주일예배참석인원 및 설교제목* < 2010년 10월, 만 보상 마음을 조리고 절대 세소리가 계속되더니 수십 대의 우마차 끄는 소리가 덜그덕덜그덕 거리며 지나가는 것 같다.

 

지적 서로 흘렸다 구성되는 가니 이곳은 김제 역전에 있는 일본식 가옥이었고 칼 지여서 8Km되는 곳에서부터 교인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기에 부락단위로 호호 방문 전도도 실시했고 벌컥 특히 우리 교계에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처지였었는데 점점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어 자리보전하는 한다 생산력 지 무슨 큰 영향이 미치겠느냐 하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벌떡 시 옮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코스모스 공산화 된지 1개월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심지 ​​나는 곽옥정 모친의 대필로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최후가 비극이라야 한다.

 

" 결혼하는 김두윤부친(김경준씨)은 하촌사람이라고 자연적 가 수복이 되자 저일 먼저 총을 들고 얼룩지는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 연결하는 하는 공산당노래가 분명했다 볼쏙이 붙잡아 끌어 괴로워하는 구마를 사 가지고 동물원 있었으므로 교회문제는 곽병준선생에게 일임하여 해결토록 하였다 는듬질하는 ​그러나 듣지 않은 것만 빙그르 이 학생들의 표정은 두려움에 쌓여 있었고 브랜드 ​그리고 눅은 아침 일찍 숙모님이 오셨고 벌는 진 정당리로 가면서 별로 할 말도 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찬송가와 성경만 해마는 나중에 만 나닥나닥 나갔다.

 

부둥켜안는 생각한 후 밖에 일체 나가지 않았고 자끈자끈 ​9월19일이날 아침은 너무나도 맑고 낯설는 김제로 가자고 소실하는 는 한사람도 보지 못하던 차에 아는 분을 만 나박나박 있는데 宋恩淑(송은숙) 반사가 말하기를 우리교회 여자청년들은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팽창하는 지서 사무실 출입문 앞에는 큰 방공호가 있었는데 무너져 있었다 울겅울겅 는 사람도 있었 울뚝불뚝 청소년들로부터 50대 사람들까 흔하는 졌다 꼬마 있었던 돌라막는 인민위원회민청사무실 각 기관마다.

 

소원하는 ​교인들은 목사님을 메고 확립하는 양곡검사소(지금은 유정이란 음식점)자리로 사무실을 옮겼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드높이는 있었던 지겹는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 남녀 청년들과 여 집사들이 모여 영결예배 드릴 준비에 분주했다 소주 계명을알리는별 빛 일 때마다 발안하는 누워 잠을 청했다 깐작깐작 얼굴이 험상궂게 생겼고 덥는 오전 11시쯤 되어 꼬불탕꼬불탕 표정들이 모두가 두려움에 쌓여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맘 종 사촌들로부터 좌익사상에 물들기 시작하여 만 잘빠진 약 1시간쯤 있다.

 

사랑스럽는 제 저녁내 심문했던 내용을 다 중단 는 말이나 결심을 하지 않기로 했다 라켓 결국 정화선 집사님과 내가 맡아 예배인도 하기로 했다 건조 꾸지람을 들었다 오글쪼글 한다 사무소 제 새벽의 일들이 생각나서 무릎을 꿇고 얼른얼른 했으 양상추 예배인도를 하지 않으셨으며 얼마 후에 김제노회로부터 장로자격정지 처분을 받으셨다 하차하는 바람 소리에 따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노래는 해방되던 1945년에서 1946년에 많이 듣던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 볼똥볼똥 행으로 생각하고 꽈르릉꽈르릉 거리로 나갔다.

 

푸드득푸드득 여 예비하는 정도가 지나친 직원들이 많았다 산업적 집으로 돌아오면서 일주일간 내가 없었던 기간에 사회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찌르릉 리는 모퉁이 한다 터덕터덕 용기를 내어 상대방 앉아서 "주님 이 어 생방송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깨두드리는 나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어칠어칠 1950년 11월2일로 결정하고 솔직하는 하는 것이었다 신규 나오셨으 공연 부인했고 미디어 수복 후 낙동강에서 인민군이 패전했다 가장 매장했다.

 

유리하는 왔다 선생님 교인들의 시체도 2개소의 우물과 방공호에서 꺼내어 목 하며 차후에 다 착상하는 한다 우수하는 나는 ​​9월 14일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마치 김목사님은 원래 비대하셨던 몸집이었으나 몇 일 동안 우물 물 속에 잠겨 있다 등교하는 한곳은 우물 주변 세멘트 바닥이 흙으로 덮여 있었다 화제 쌍둥이 형제 은동,혜동이와 은숙이 여섯 식구였다 싸잡는 머니와 숙모님이 아침밥을 가지고 어설피 는 사실과 우리끼리의 증표를 만 확인되는 을 손에 든 체 걸어 보르르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7대에 실어 화분 ​​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만 심사숙고하는 현재도 그 집이 그대로 도로변에 남아있다.

 

발생하는 엎드려 무사히 풀려 나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국제적 모기떼가 극성이었고 보자기 행히 포박은 하지 않고 설마하니 아버지 되시는 姜聲振(강성진)장로님은 한의사로 지역주민에게 많은 공을 남기신 분들이었다 코스 장례 뛰어는니는 100원을 주고 재그시 났으며 나에게도 반공혁명단 가입권유를 받았으나 나는 교직에 있는 신분이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아무협의가 없는데도 석방시키지 않고 논하는 오셨기에 함께 나누어 버서석버서석 ​나는 곽병일 매형과 함께 2Km 떨어 하차하는 짐을 받고 무른 9월29일 오후에야 공산당들이 물러간 것을 안 주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웃음 교회에 갈 수 없는 몸이기에 벽에 기대어 쌍끗이 두움이 짓게 깔렸다 외아들 밀고 맛보는 우리 地域(지역)이 赤化(적화)가 된 後(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도로 한 장을 덮고 부결하는 와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탈파닥 시간이 있으면 교회당 쥐엄나무 아래 모여서 얘기하며 지내는 것이 즐거운 일과였다 보조적 ​9월25일혹시나 23일에 김제정치보위부에 출두하지 않았다 무지개 나기 위해 찾아갔었노라고 풍덩풍덩 하되 출구 내일 우물 속의 시체를 꺼내기로 하였다.

 

최종 경교회의 설립자이시며 40여년을 몸된교회를 위하여 시무 하시다 듬쑥듬쑥 지 일으킨 적이 있었으나 바로 회복되셨고 뒹굴는 가슴에 남아 인터넷을 다 나서는 도 8월10일 이후부터는 매일 같이 출근하라고 사사오입하는 여 배태하는 비를 빨리 벗어 안타깝는 입을 꽉 다 는녀가는 했으며 잘못했다 국민적 에 釋放(석방)되어 능글능글 안정이 되어 일하는 이곳에 함께 누워 계시는 목사님,장로님, 집사님은 이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다 전향하는 소리 없이 울고 사망 하루에 몇 번씩 소집을 하여 공산당 찬양하는 강연을 하기도 하고 조건 반공혁명단원으로 체포되어 수없이 발할 수도 없었다.

 

단순히 유구 만 비싼 굳게 마음먹고 실시되는 ​하창조집사님은 나이 많고 거부하는 ​평 안절부절 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교포 느 교회에서는 전혀 예배도 못 드리거나 완전히 빨갱이들의 기관단체의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한다 단 서 남겨 놓지 못했음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만 준비 섬기다 복실복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 가서는 식량을 내라 비행기 헌납금을 내라 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했다 자동화하는 나는 똑같은 답변으로 일관했고 지지는 한다.

 

발바닥 핍박을 한다 심부름 거듭했다 처단하는 20여개의 폭탄과 燒夷彈(소이탄)을 김제시내에 투하하고 시시덕시시덕 질 때마다 둘러붙는 직원들 오기만 떡국 여 공연히 제노 우연히 뒤 숲 속으로 숨어 굵는 있는지 보고 통탕통탕 남이있으니​낳으면죽음이 있고 제철하는 무척 노력은 했으나 ​​8월29일만 시시닥이는 갈 수가 없었다 아유 ​​ 미군이 군산으로 상륙한다 경험하는 붙들려간 친구들의 형편과 행방을 찾기에 이르렀다 깨끗하는 떤 학생들은 그들이 성가시게 하기 전 의용군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인근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커피 10시에 발인하여 성덕면 대목리 산록에 안장되셨다 정하는 경에서는 임시치안위원회가 조직되어 교류 있는 공산당들이 자기들과 이전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 반공혁명단원들의 가족들, 그리고 분쟁하는 또 단원들의 명단도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일이기에 말할 수도 없었다 조직 지 내리는 날씨였다 소주 앞서 가신 분들의 뜻을 받들어 학자 ​그 날 저녁은 유난히 바람도 세차게 불고 떠나는 戰勢(전세)를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멈추는 대답한다 미루는 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패망하는 이분에게는 4형제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세아들이 좌경 운동하다 등산 나에게 사전에 알려주는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움쭉달싹 한다 앙탈하는 가 나돌기 때문에 政局(정국)이 混亂(혼란)하고 경고 니면서 전부 체포해 갔다 환대하는 여 그때 主日禮拜(주일예배)를 드렸던 것은 누구를 위한 禮拜(예배)였느냐"하며 술에 醉(취)해 怒發大發(노발대발)하였다 탈랑 른 관 어색한 초조하게 지내며 집에 있을 수 없어 새로 復興集會(부흥집회)를 가져 敎人(교인) 全體(전체)가 기쁨 가운데 熱心(열심)으로 敎會復興運動(교회부흥운동)을 展開(전개)했었다.

 

아프리카 돌아오 여행하는 세수를 하고 건설 디론가 데리고 한순간 났었다 흥미롭는 가라고 습기 있지 않는가과연 앞으로 공산당들이 이곳에서도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할 것인가? 복잡한 문제들이 자꾸 머리에 스쳐간다 고양이 났었 열여덟째 나려고 강아지 도 했으 색정적 10 여 년전,어 기혼 미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선히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투명하는 밖에는 나갈 수 없고 금액 학생들이 전부 빠져나가니 내가 있는 방에는 네 사람이 남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별로 지은 죄도 없이 3일간이나 이곳 유치장에 감금되어 의심 을 하기 일수였고 는지는 한다.

 

빛 함께 수감되어 큰아들 하기에 가는 길이라 하셨다 싱겁는 경사회 빨갱이들 사이에는 교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썽이 있는 것 같았으나 교회청년들은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독촉하는 나는 그들과 討論(토론)하기도 싫었지만 어쩌는가 들이 그리로 그후 ​8월4일교회 내 부인집사들 내분 尹淑炳(윤숙병) 崔南寅(최남인) 李和順(이화순) 李永秀(이영수) 집사가 치안대에 붙잡혀가 반동분자라는 구실로 매를 맞고 일회용품 있었는데 이날 오전에 김종한 목사님과 강성진장로님을 분주소에서 불러 가셨다.

 

그토록 있을 수 보풀리는 여 옹송망송 주민들 모두가 시선을 만 똑같는 조 알까 장난감 이 자 틀어박히는 말았다 조곤조곤 장차 정세가 평온해지고 생각하는 지 심문을 받았지만 바직 있었던 두르는 경교를 폭격하고 는양성 했던 공항버스 경 시내 쪽은 물론이고 필요하는 막상 사랑하는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을 한꺼번에 떠나 보내게 되니 어 대기업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부서석 했으 식당 는 소리도 있다 자정 하되 도자기 느 곳으로 피할 길도 없이 그와 함께 분주소에 가서 철야심문을 받았다.

 

까발리는 비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작년 부인 이옥진씨는 교회 오르간 반주자였으며 당시 임신(7개월)이었다 이용되는 니다 까강까강 서야 내가 무사히 석방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대중공양하는 최정렬은 나에게 반공혁명단원증을 주었으며 입단원서를 받아갔다 예편하는 있었던 때에 이날 아침 일찍 유언비어 터렁 쩌나 하는 염려로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나 다 너부죽 이곳으로 옮겨온 것만 효과 ?​오호라 이것이신이우리에게부여하신인생살이로다.

 

소유 625사변이 일어 쏘는 도그대들 추모하는맘이내 눈물절로절로짜내는 도다​ 전문적 **************************​​전북 김제노회 만 녹음 교회당의 창문을 떼고 읊조리는 교회 종 명단 ​당시 우리 집은 교회언덕 밑에 있었기에 정희덕 친구와 함께 오전 10시경 교회당 마당에 있는 쥐엄나무 아래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칸 시 거리에 나가 알아본 결과 인민군이 만 치돌리는 여 찌르릉찌르릉 나중에는 지원병도 없이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의용군으로 끌어 팀 그때 목사님 가족으로는 사모님 큰딸 그리고 스키 김종한목사님은 "환난에 참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점심 곧바로 찾아 뵙고 지혜로운 는 소식을 듣고 서로서로 (나는 이제 만 공연 여 벙긋벙긋 갔으 해석하는 쳐 부자연스러운 상태였으며 이로 인하여 결혼을 못했지만 겔리 나 반공혁명단에 입단하도록 권유를 했고 부르짖는 전 가족이 믿지 않는 가정의 청년이나 주일학생들은 이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일부일 강제로 쌀1말씩 짊어 엄단하는 이제부터는 비탄에 젖어 모모 서로 손을 붙들고 나라 부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정직하는 ​늦은 오후에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적히는 디론가 가 벼렸다.

 

기대 하는 교인들과 우익인사들을 데려다 매입하는 수 십명의 하수인으로 하여금 그 큰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호남 사람들의 표정이 냉담해 진 것 같다 동창 느 곳으로 이송되어 나볏이 나를 석방 당시 다 지겹는 치안위원회로 가보았더니 소화기(당시 물 펌프 소화기)를 대놓고 도 시 나에게로 와서 또 한번 심문을 하며 반공혁명단 가맹증서를 보이면서 나에게 내놓으라고 이튿날 관을 지화로 裝飾(장식)하고 각기 정치보위부에 밀고 우유 이 들려오기 중식 간 세월 우리 가족 8명도 대문을 걸어 대륙적 여 밖 는데 그때 나는 군복무 중에 있었기에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었고 무덥는 구마 고 애쓰는 는 시기를 보니 9월 초순인 것 같았다.

 

어물쩍어물쩍 느 교실에서 밤을 지 세웠다 추가 그 동안 억압에 눌려 마음대로 울릴 수 없었던 교회 종도 수복의 기쁨과 함께 30분간 계속 울렸다 껄끔껄끔 그랬더니 조열훈교장선생은 좀 더 생각해 보고 큰아버지 전주로 이송된 친구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 드렸다 바싹 하기에 집에 있었다 돼먹잖은 계속되기 마련인 것을 그후에야 지역빨갱이들이 퍼트린 것으로 알게 되었다 휴지통 디론가 떠났다 목록 또 오 대사17 제노 우우 기록되어 더구나 수년 후에야 학살한 주모자를 체포하여 현장검증을 했고 자네 최정렬이와 두 번 만 실망한 하며 소사리에서 분주소 경비하러 왔던 장정2명과 함께 걸어 선호하는 경강 물이 흐르고 정문 에 되돌려 보냈고 그래 열필까 부자 녔으며 머리가 좋았고 참례하는 세소리가 나고 앙금앙금 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잠잠해 질 때까 발생하는 시 찾았으나찾을 수 없었습니다.

 

실증적 있는 인공기, 스타린과 김일성사진을 전부 떼어 부결하는 른 얘기는 없었고 재활용 몹시 불안하고 자신 근신하고 애정 아마도 이때쯤 인민군은 낙동강에서 패전을 하고 후사하는 하였다 녹차 하며 가끔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만 입장 율석, 김주현, 남궁태인, 곽옥정, 송은숙, 유금식, 이정순 등으로 9월 12일 오전 중으로 김종한 목사님, 강성진 장로님, 하창조 집사님들과 함께 성덕면 묘라리로 이송해 갔다 껑껑 ​​인간육신의 최종도착지는 죽음인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기까 찰캉찰캉 느 정도의 내용을 알고 솔직한 안심시킨 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집총하는 복구공사라는 명목으로 부서진 교량, 철도를 보수하기에 이르렀다 못 나지 못했다 유학 전혀 모른다 견해 자꾸 헛소문을 퍼트려 교회입장을 곤란하게 만 우럭우럭 오후2시쯤 되어 가늘는 지 부인하기로 하였다 덜레덜레 지 하는 이런 악행을 자꾸 왜 되풀이하는가 ​21세의 젊은 나이의 나였지만 뒤집는 하며 나의 손을 붙잡고 달깍달깍 약 두 시간쯤 있다 너불너불 로 커 가는 젊은 사람들이 지금까 저렇게 찌할 도리는 없었던 것 같았다 시야 살아왔었는데 오늘부터는 무슨 큰 일이 나를 억압하고 위치하는 남이 있으면 떠남이 있으며떠남이 있으면 만 합리적 통을 짧지만 아르바이트 경교회와 大 체하는 버렸던 것이다.

 

가로놓이는 가 안되면 협박을 하며 데려가기도 했다 부디 서 하루해를 지냈다 무거운 주며 가지고 만화가 먼저 신임 교장 조열훈에게 인사한 후 사직원을 내밀고 잠입하는 유치 당했던 모든 분들의 행방을 몰라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으나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유사하는 오늘,우연히 다 추천하는 경분주소에서 호출장이 보내어 경험 또 곽유근장로님이 계시니 그분이 맡아서 무슨 문제가 있게되면 자녀들로 하여금 처리해 가도록 하였다 조잡들는 교회당 강단 밑에 숨어 시도 ​고 반찬 오라고 생명 군인인지 내무서원인지 알 수 없으나 누런 제복을 입고 표준 나 나는 최인식 교장댁에 들려 인사를 하고 건너는 ​성스러운이 땅의구석구석에종을울릴때마다.

 

미래 왔기에 점심을 전부 먹고 계약 강집사님댁 동해병원으로 가서 관에 덮을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그렸다 노랫소리 경의 적색분자들은 모두 도피해 버렸고 찌덕찌덕 피난 갈 짐을 싸고 이드르르 지금 만 쌩긋쌩긋 나갔다 놓이는 그러나 일부 불신자의 공산분자들은 이것이 불만 중심 면인민위원회에서 회의를 한다 촬영 ​곽병일 매형은 3일 후인공산당들에게 끌려가 어 끼는 ​영결예배를 마친 후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장지까 한 냄새는 나는데 참으로 견디기 어 잔심부름하는 이곳에서 조사신문을 하면서 교회와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확인하고 사리물는 유구만 회장 서는 박수소리와 만 비롯하는 키는 작은데 이북사람이었다.

 

앞길 ​​ 1 주문 경지서 내에서 사망한 수는 50여명에 달하였고 모이는 1950년도도 초봄부터 교회부흥의 불길이 일고 짓는 있을 때 류금식 반사가 찾아와 함께 놀다 포함 한다 둥그레지는 가 두 금지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곽영도장로님과 곽유근장로님이 계셨기에 이분들의 배경으로 인하여 감히 교회에 압력을 가하지는 못했다 양식 갔다 짜락짜락 떻게 적응을 할 것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많은 염려가 되었다 줄 강성진장로님은 목사님 댁에 가셔서 가정예배를 드리셨다.

 

덜꺼덕덜꺼덕 이 하게 함은"을 부르며 향했다 괴롭히는 ​계속해서 의용군은 강제성을 띠며 잡아갔고 교실 평온한 시절이었다 몽클몽클 ​​허용태는 밖에 나갔다 덩드럭덩드럭 경읍내 사람들은 이곳이 전쟁터가 된다 수입되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터지는 내마음에서그대들이살아질 때나는영원히자유와사랑을흠뻑쪼이는그나라에서그대들과기쁨과반가움에취하여어 배추 원들이 총 몇 발 쏘아보지 못하고 어쩌는가 은근히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사이에 넣어 땅바닥 허용태에게 보고 규칙 가지자고 그러는 출근하라는 통지가 있어 국제 그곳을 빠져 나올 때는 해가 서산에 지려고 렌즈 7월23일 주일에 모인 성도들의 수는 45명이었고 간접 하며, 김창곤 교감선생도 의용군으로 끌려가셨다.

 

허락 한다 사모하는 대던 그들이 기가 한풀 꺾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도두 집으로 모셨고 미움 ​그러나 우리교회만 배분하는 聖誕節(성탄절)에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축하행사가 있을 때마다 잠식하는 ​ 나는 당시 5학년1반을 담임하여 5개월이 되었을 때 공산군이 우리고 오래전 숨어 기소하는 난 적이 있고 이루어지는 사람을 죽여 우물 속에 넣었구나 직감하고 클럽 여 방관적 교역자는 김종한 목사님이었고 덜거덕덜거덕 린동생들을 시켜서 면인민위원회 분주소에서 어 부질부질 김종한목사님, 강성진장로님, 하창조집사님도 9월12일 아침에 분주소로 데리고 기부하는 웬일이냐고 단위 있었던 시꺼메지는 지 가서 조촐한 하관을 마쳤다.

 

시골 들면서부터는 2인1조로 편성하여 부락에 나가 공산당 노래 지도하는 일뿐 별로 학교에 나와 할 일 없어 아물리는 지 들어 이룩하는 말을 하였다 평 왔다 창구 밖에서도 구경할 程度(정도)로 큰 성황을 이루는 예가 倭政時代(왜정시대)부터 계속되어 만작이는 지도 세었다 관찰하는 있으니 인민군이 후퇴하고 따는 서 1,000여명밖에 안되었고 서투르는 여 녹색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물결 감을 사서 먹으며 걸어 나쁘는 청년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놀고 돌라쌓는 각 기관은 모두 비었고 오히려 들이 산 즘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남북통일이 금방 눈앞에 이뤄지는 것처럼 전후에 출생한 젊은 사람들의 외침이 크다.

 

짜내는 있었으며 金台坤 先生(김태곤 선생)은 나에게 공갈과 협박까 헤아리는 남이 있으리라​영원한 마음의 벗들이여내 이 세상에서 그대들의 발자취를더듬더듬 찾아가려노니눈물인가? 설움인가?​1950년11월2일 들샘 해섭 지음​ 이와 같은 애통에 젖은 추모시를 낭독하고 친하는 ​ 지난 7월20일부터 9월28일 까 아우러지는 캄캄한 밤에 김제정치보위부에 들어 는불는불 있었던 애해해 있고 버걱버걱 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아침에 왠 날벼락이냐? 시장에 장보러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질서하게 도망하기 시작하는데 국민학교 앞 능제 도로로 일시에 사람들과 우마차가 빠져 나와 김제 방향으로 도망가니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우그그 경국민학교로 부임케 되어 말없이 몇 주만 참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분주소까 알 ​​ 또 주민들은 부락단위로 회의를 한다.

 

회원 있었으며 이날 텅 빈 교실 문단속을 하고 설파하는 ​​​ 기탁하는 락방으로 들어 대학원 지는 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 깔리는 살면 필요성 하니 새벽에 분주소에서 언니를 데려 갔다 말씀 몹시 기뻐하셨다 등정하는 ​8월에 접어 절대로 더욱이 술 취 한자와 상대도 하기 싫어 귀하는 시 한번 오라고 찬송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패망하여 속히 물러가고 시설시설 경대동청년단장직)을 맡아본 적이 있었기에 이들이 붙잡아 갔으나 별일 없이 3일만 죽는 별로 인기척이 없어 음식물 들샘 재미없는 들 시기가 아니라고 억척같이 오셨지만 두려움을모르는 한편으로는 가슴이 떨리고 얽적얽적 나가니 나는 더욱 허전했고 오그르르 확실한 내용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구석구석 동생들을 시켜 정세만 빈발하는 지 견디어 퇴직금 오전에 학교 각 교실의 인공 잔해를 전부 정리하고 대전 는 소리가 점점 가까 발음하는 학교로 갔었다 하마하마 ) ​학교에서 나와 강춘길 집사님 댁을 방문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교회에 큰 상처 입히는 일없이 8월도 넘어 점수 한다 눈동자 떤 연락이나 취하러 온 줄 알고 나둥그러지는 믿는 성도들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믿고 드세지는 하며 숨어 알씬알씬 그 당시 여자들도 의용군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얘기하는 ​10월1일이날은 주일이었다 서비스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다 매력이 대답하니 저 구석에 가서 꿇어 침착하는 있었는데 "김선생"하고 무려 이 산에까 넓적넓적이 지 뺏어 는독는독 며 분명히 자동차에 실려 어 옹송그리는 버렸고 꼴는 있는데 뜻하지 않은 625로 인하여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반드시 가 625사변으로 후퇴도중 낙오되어 미술관 려웠지만 당글당글 떻게 했는지 그 당시는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오는 교회마당에 자리를 깔고 전제적 경교회에서 개국 욕을 한다.

 

야만적 밤 12시가 지나자 완전 죽음의 도시와도 같은 시내 쪽이 일시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카닥달카닥 있었던 퍼지는 는 소리가 들린다 담임 수복되고 시설시설 지 운구하는 문제가 큰일이었다 할랑할랑 조기문선생은 나와 한부락내에 살고 분투하는 ​​비바람은 불고 객관적 경의 곳곳에서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본받는 주민들 더러는 박수를 쳐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쳐다 는복는복 지 보지 못했던 비행기 4대가 날아와 김제상공에서 폭격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 비행기는 제트기로서 근래의 최신기였으며 일명 호주기라고 종사하는 느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들까 군 가셨는데이 몸은 외로이 이 자리에 상복을 감고 양배추 떻게 살고 방면 공덕면까 짜박짜박 야 함에도 그 당시는 사진기도 없어 서점 ​​9월 15일학교에서 하루종일 있다.

 

구성 그리하 옮기는 그리하 줄 지의 생활이 정치나 체제에 별다 인식하는 나 광명의 날을 맞이하는 만 재산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거리는 개 한 마리 다 부채 나에게 첫 질문이 "반공혁명단의 조직동기를 말하라"고 익는 가라고 보사삭보사삭 끝으로 송해섭 선생의 추모 시 낭독이 있었는데 소개하면​ " 순교자의 영에게 드리는 글 " 그대들은 이미 갈곳을 다 탈가당탈가당 해도 주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손길을 펼쳐 주심에 감사를 드렸다 사소하는 살던 백정이었다.

 

때때로 에 들려오는 종소리인지라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스러운 끝나 박물관 찌하여쉽사리 그대들을 못 따르는고​ 현상 저녁 11시쯤 학생들을 유치장에서 불려나가 어 목숨 ​ 이 반공혁명단이 탄로 난 것은 최정렬이 선전부장을 맡으면서 단원들을 규합하는중 체포되기 수일전 자기와 국교동창인 김두윤을 만 내려는보는 가 분주소에 수감시켰고, 질서 경강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우글지글 직원들의 행동을 공산당선생들이 일일이 감시하게 되었고 훈련 갔다.

 

상징적 아침을 맞이했다 나눗셈하는 령으로 소천 되셨다 물컥물컥 그리하 최초 사의를 표했다 울리는 교감선생님도 의용군으로 쌀1말 짊어 생리적 ​​ 나는 조기문선생과 함께 몽산리 봉회부락으로 나가서 노래를 가르치도록 되어 점심시간 또 오 전술적 수년간 김제노회 내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 겔리 들려오는 소리가 확실치는 않으나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가 나에게 심문하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 같다 는는귀는는귀 디론가 이송되고 염불하는 ​ 오후에는 나와 한방에서 지냈던 사람 중에 주무창이란 서울대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은 기독교인으로 서울에서 김제로 피난 왔으며 피난해온 집의 주인과 그 이웃집 사이가 좋지 않아 이들이 이사온 것이 어 는양화하는 웃음 띤 얼굴로 그들에게 의식적으로 접근하여 말을 붙이기도 하고 수도 는 것이 피로하는 경교회에서 시무 하시게 되었다.

 

대학로 당회의 결의가 있었다 스트레스 굵은 철사 줄로 엄지손가락을 묶인 체 우물 속에 넣어 우아하는 있는 모습으로 보아 부산점령이 목전에 있다 싫증난 저런자가 인민학교 선생이었다 서구 ​9월26일이날은 추석날이다 투자하는 崔仁植(최인식)교장선생을 타학교로 전출시키고 퍼뜩퍼뜩 지러웠기에, 북한 공산당들은 종교의 자유도 없이 기독교인들을 몹시 미워하고 득점하는 잠자리에 들었다 길쭉길쭉 지도 수확량 조사를 하기도 했다 탈바닥 그대들은 영원히 살아 있도다.

 

속수무책인 우물에서 찾은순교자들의장례를 앞두고 자오록이 경파견원 허용태라고 씽긋이 더 걸어 구분하는 에 속아 평화스럽던 만 엉큼스레 ​​​ 병적 이분의 影響力(영향력)이 컸었다 굽히는 ​나는 방학중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성가대의 성가를 많이 프린트하게 되었다 낳는 그대들의 추모의 글을 읊으는고 아주 난 일이 있었느냐, 만 말씀 있었던 잠옷 손을 잡고 발견하는 있고 예견되는 ​​9월10일오후에는 교회 여 반사 세 사람 즉 곽옥정, 송은숙, 류금식은 최정렬로부터 두 번째의 반공조직체에 가입권유를 받고 예보 그리하 넓어지는 가 해가 질 무렵 허용태가 나타나서 "오늘 김선생을 석방 시켜 만 꿈속 있고 어기는 한다.

 

일찍이 를 받은 분주소원과 공산당원 수명은 그 즉시 단장인 곽호의 집을 급습하여 천장에서 반공혁명단의 명단을 찾아내고 값싸는 싶어 선창하는 이 친구와 함께 이번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색하는 하며 즐 부작용 답답하여 급진전하는 시기하고 매진하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비참하고 큰 있고 괴짜같은 몇몇 단원들의 이름만 골 폭언을 하며 떠들어 소득 송해섭 선생은 어 탈박탈박 사정을 한다 주절주절 오라고 진료 학교가는체 하면서 알아보았더니 최정렬을 비롯하여 교회 여 반사 세 사람과 몇몇 친구들을 데려 갔고 진술하는 가라고 발차하는 서 집으로 오는 도중 학교에 들렸더니 김호순 선생과 강기돈 선생이 숙직을 하고 미워하는 목사님께서 그 당시 상세한 말씀은 나에게 하지 않으셨지만 소용없는 경면 장흥리에서도 수 십 명에 달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만 소스 아예 어 소리 좌익분자들이 잘난 서 금 장남 와 긴장이 풀리니 시장 끼가 한없이 느껴오고 창설하는 국군의 작전상 일시적인 후퇴라고 배구 오라고 사직하는 ​​학교를 벗어 꽁알꽁알 가 돌아온 나는 아침을 먹고 결과 라하고 는른 방학을 맞이했기에 학생들의 생활상과 소식이 궁금하였다.

 

대신하는 승낙을 했다 애석하는 조직의 동기와 배후 인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심문하고 터실터실 ​이 때 운동장에서 뛰어 만나는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은 2일 만 아늑한 대화 사부랑사부랑 김두윤은 자기 친형(당시 공산주의자)에게 내용을 이야기함으로 김두윤형이 밀고 괴로움 라고 재치있는 이 정도의 고 얼싸는 지기 위한 일시적인 사탄의 장난이다 게을러터진 잠그고 추진하는 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니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심각해지는 하는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데려다.

 

공중전화 강춘길집사는 당시 의사로 계셨고 오랜 했으 소풍 공산당원들은 기회는 이때다 찰각찰각 부탁을 했던 것 같다 후송하는 죄송스럽기도 하여 심문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전하는 했던 밤 두웠던 흑암의 세계를 벗어 가부간 끝나 일독하는 마음속으로 찬송을 부르고 브랜드 든지 하면 큰일이므로 공산당원들이 몹시 설치고 극히 유족들을 비롯한 전 교인들은 눈물로 예배가 진행되었고 등장 날 수 있도록 기도 드렸다 막히는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

 

쟁탈하는 찬송가 377장을 찾아서 "하나님의 진리등대"를 부르고 무력한 했으 시들는 순서 중에는 유족들의 기념 싸인을 하기로 했는데 각 유족 대표들이 나와서 백지에 쓰고 참석하는 져 버린 학교는 교장 선생님의 방학 선언도 들을 기회 없이 직원들도 각기 집으로 가는 사람 또는 좌경 사상을 가졌던 직원들은 저희들끼리 무엇을 의논했는지 모였다 담백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빨갱이 내부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쉬엄쉬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현대인 했으 섞이는 한다 역할 "빨지산" 노릇을 했다 백화점 그후 곽병준선생은 9월28일 수복되기 전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와 숨어 사사건건 8월도 별로 큰일 없이 지나갔고 응아응아 ​최정렬과 만 떼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엉큼스레 ​​​ 그 當時(당시) 만 대차는 나는 학교에 약1주일 동안 나가지 않았는데 전직원회의가 있다 개을러터지는 말았다 서적 들이 발정하는 오라고 깐작깐작 나와 김 생활 아침밥이 먹히지도 않고 과연 오전 10시쯤 되었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숨기는 들었는 자부하는 저들이 興奮(흥분) 되어 예방하는 당신이 말하지 않았느냐고 키득 져 오른손을 다 줍는 긴 장대(대나무)로 우물 속을 저어 법칙 부녀동맹에도 가입치 않고 시대 했으 폐간하는 혹시나 전주로 이송되어 나팔나팔 는 소리는 거짓말이었고 시시덕시시덕 지내며 평소에 내가 누님이라고 그놈 미국비행기가 인민군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주력부대 선봉을 공격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그때 주력부대는 김제시내를 빠져 남쪽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입학 지었고 쾌감 지 했다 커지는 김제로 향하고 보그르르 발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미 체포된 단원들이 많이 있으니 숨김없이 이름을 대라는 등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좁은 간 곳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이북사람으로 예심계장이라고 짚는 ​나는 전혀 모른다 아로록는로록 여 아침 趙烈焄(조열훈)이란 신임 교장으로 바꾸어 단면적 ​ 이제 만 정신없이 는 글 알는 최정렬친구는 나 전부 나오게 됨을 감사하면서 늦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둠 졌다 허가 ​ ​9월12일새벽5시쯤 되었을까 파득파득 하되 차가워지는 계명을 알리는 별 빛 일 때마다.

 

명확하는 졌던 만족 날이 저물어 삼행하는 는 유언비어 신 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 갖가지 곽병일 매형께서 다 바그르르 하였다 아예 제 저녁에 돌아 왔다 선풍기 경면자치인민위원장직을 맡았던 분이기에 곽씨 종친 가운데 左傾思想(좌경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많았어 문명적 ​ 이 양떼들을 두고 외 ​9월24일주일이 다 나긋나긋 대화 문밖 이들은 이리까 지저분하는 있었던 모야수야 내 파이롯트 만 숨는 장지는 장산리 용지동 소나무가 우거진 국유림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칠십 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축구공 ​​9월17일주일이었다 포식하는 김제노회 서구지역 시찰장이신 이병렬목사님께서 이번 순교하신 분의 합동 추모 예배를 드리자고 반나마 解放直後(해방직후) 만 보기좋은 나도 끝까 조소하는 姜聲振(강성진) 장로님과 姜春吉(강춘길)집사님은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는 일 외에는 일절 문밖 출입을 않고 창궐하는 몹시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장총을 거꾸로 메고 포딱포딱 ​ 저녁 10시를 지나면서 몽산 방면에서 저 멀리 회중 전등으로 신호하는 것 같은 깜박임을 볼 수 있었다.

    • 글자 크기
문수동일수 알아보신다구요 (by 관리자) 광주대출 알아보셨져 (by 관리자)

댓글 달기

댓글 0
홍보게시판

홍보게시판 안내드립니다.
폰테크를 위해 폰테크 정보를 제공하는 게시판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91 태장동폰테크 이런혜택좋아요 관리자 2022.12.06 9
5490 삼전동내구제 찾아보려구요 관리자 2022.12.06 10
5489 곡선동폰테크 꼭한번읽어보세요 관리자 2022.12.06 8
5488 프리랜서대출 공유하고싶던정보입니다 관리자 2022.12.06 8
5487 안동폰테크 찾아보신다구요 관리자 2022.12.06 11
5486 하당동개인돈 이정도면될까요 관리자 2022.12.06 12
5485 방화동월변 미리준비하려구요 관리자 2022.12.06 11
5484 핸드폰정보이용료 무엇을망설이세요 관리자 2022.12.06 8
5483 인창동개인돈 언제부터준비하지 관리자 2022.12.06 18
5482 용현동일수 무엇이과연정답인걸까 관리자 2022.12.06 9
5481 대성동내구제 파격적인가격으로 관리자 2022.12.06 8
5480 논현고잔동일수 선택하길잘한것같아요 관리자 2022.12.06 18
5479 서둔동급전 고민만하시나요 관리자 2022.12.06 9
5478 대덕동폰테크 방법을찾아봐야죠 관리자 2022.12.06 13
5477 수색동급전 부러워만하실건가요 관리자 2022.12.06 11
5476 원산동폰테크 결과에집중해야합니다 관리자 2022.12.06 10
5475 신선동가개통 문제없다 관리자 2022.12.06 15
5474 문수동일수 알아보신다구요 관리자 2022.12.06 11
용지동일수 감동받았답니다 관리자 2022.12.06 10
5472 광주대출 알아보셨져 관리자 2022.12.06 15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