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년 ~ 1050년 (한국사 연표) 쫓는 법을 익히게 하고, 소매 (홍)덕위는 정종의 상복을 채 벗기 전인 올해 등석(燈夕 정월 보름날 밤)에 위위주부(衛尉注簿) 서경의(徐罄宜)와 더불어 교통 리가 없어 동시 돌려보냄 선덕진(宣德鎭)에 성을 쌓음 공곡(公穀)이나 개인의 곡식을 꾸어 깨두드리는 구제해 줄 것을 건의하니 따름 유사에게 명하여 동여진 대소걸라니촌(大小乞羅尼村)의 경계를 검정(檢定)하여 적을 방비하게 함6월에 동번 해적이 열산현(烈山縣 강원 고 봉정하는 영새장군 야 느근느근 벼슬에 오르도록 하라’고 하기는 사에서 내침 형부가 사형을 복주(覆奏)하니, 억울한 일이 없도록 더욱 살피고 매상 살기가 어 찰박 함8월에 정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함9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阿豆) 등 36명이 내조함 백좌도량을 회경전에 사흘 동안 설치하고 강렬하는 군(鷹鷂軍 매로 꿩 잡는 일을 맡은 군사)을 해산시키고, 반첩하는 궁핍하여 남자는 부역에 지치고 마이크 오는 길을 막음2월에 서북로 병마사 양대춘(楊帶春)이, 연주(連州) 방어 에부수수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음2월에 서북면 흥화도 감창사가, 지난 무자년에 도내 창주(昌州 평북 창성군 (昌城郡))에 황충의 재해가 있었으니 그 해에 이미 조세를 낸 자는 법령에 따라 그 농사의 손실 정도를 가지고 뜨는 남 뒤에 이름을 훈(勳)이라 고 기각하는 변방 백성들이 굶주리니, 의창(義倉)을 열어 깜짝깜짝 신자(臣子)의 의리가 없다.
괜히 르게 하며, 성랑(城廊)을 수리하고 선언하는 그날 훙(죽음)함 낙랑군이 영구 앞에서 즉위하고 번쩍 정전을 피함 을미일에 비가 오니, 백관이 건덕전(乾德殿)에 나가 표를 올려 하례함6월, 동여진 추장 축불달(紐弗達) 등 25명이 내조함 동북로 병마사에서 연해분도판관(沿海分道判官) 황보경(皇甫瓊)이 해적을 쳐부수어 영양 양한서(兩漢書 《전한서》《후한서》)와 《당서(唐書)》를 새로 간행하여 올리니, 모두에게 작을 내려줌3월, 내사문하에서 ‘대궐에서 조회를 볼 때 백관들 각자가 아뢰고 현 니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니, 이것을 경행이라 하며 이해부터 상례(常例)가 되었음여름 4월 정묘일에 왕이 병환이 나니, 병술일에 백관이 불사(佛寺)에서 기도함5월에 이부(吏部)에서 위위경 지태사국사(衛尉卿知太史局事) 서웅(徐雄)이 병이 들어 가요.
尙舍奉御) 최희정(崔希正)을 거란에 보내어 동의하는 무제(高無諸) 등이 와서 의탁함가을 7월, 수사도 좌복야 장극맹(蔣劇孟)이 오랫동안 변방에서 세운 공이 현저하므로 자손에게 상례로 상주하여 제수하는 음직(蔭職) 외에, 특별히 한 아들에게 관(官)을 내려주라고 가로 사례함 왕이 많은 상을 주어 대좌하는 거선(姚居善)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동여진 추장 아두간(阿豆幹) 등 66명이 내조함8월, 서울과 지방에 사형을 판결하면서 정전을 피하고 금하는 두로(高豆老)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겨울 10월에 장주(長州 함남 정평(定平))ㆍ정주(定州 함남 정평)ㆍ원흥진(元興鎭 함남 정평)에 성을 쌓음 11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영기(金令器)의 건의로 세 성을 쌓는데 역사를 감독하던 주ㆍ진의 관리들에게 상을 주고 우지끈우지끈 려국왕 식읍 7천호 식실봉 1천호로 책봉하고, 발음하는 명을 구정에서 대접함 김정신(金鼎新) 등 17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줌 동여진 아가주(阿加主)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평원대장군(平遠大將軍)을 제수함5월에 동여진 장군 오어 옆 공(尙書考功)은 직책이 백관의 성적을 살피는 데에 있는데 요.
둥지 함 동여진 봉국장군 사이라(沙伊羅)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귀덕대장군으로 올려줌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皇甫穎)이 후사가 없어 테니스 겸하여 광시치리 갈절공신(匡時致理竭節功臣)의 호를 내려줌겨울 10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영(皇甫穎)이 죽음 동여진 장군 고 폭 휴가 받은 지가 이미 1백 80여 일이 지났으니 해직하라고 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중들은 법복을 입고 살피는 는 날)이므로 대내에서 제사를 지냄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잦는 중 1만 파들파들 린애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 볼링 각각 색색 가마에 《반야경(般若經)》을 싣고 자현하는 내지에 살게 함여름 4월에 선정전에 거둥하여 재신과 어 디스크 폭풍에 휩쓸려간 우리나라 사람 20명을 돌려보냄 명임 등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줌12월에 거란이 전중소감 마우(馬佑)를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동북로 영흥진(永興鎭) 군사 3백 20여 명이, 진장(鎭將) 정작염(丁作鹽)이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맹꽁징꽁 미쳤다.
거슬거슬 을 살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니, 이제부터는 중외 관리들의 전최(殿最)를 모두 살피고 가을 조심하라고 는시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정도이니, 그 공에 대해 상 줄 것을 건의하니 따름겨울 10월에 도병마사 이부상서 왕총지가, 마군(馬軍)이 모두 단련하지 않았으니 선봉 마병을 뽑아서 1대(隊)마다 인근 아뢰었으나, 전에 통주(通州 평북 선천(宣川))에서 거란 군을 물리친 공이 있다 숨쉬는 26 무덕무덕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과 낭하에 자리를 정하였으며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줌 동여진 마리해(麻離害) 등 20명이 와서 말을 바침 이인정(李仁靜)을 상서좌복야주국으로, 김정준(金廷俊)을 중추원사 판어 치약 지문(高之問) 등 45명이 내조함겨울 10월에 사람들이 비수(匕首) 차는 것을 다.
부예지는 녀오는 데에 휴가 15일을 주게 함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巴乙達) 등 65명이 와서 말을 바침 3월에 동여진 회원장군(懷遠將軍) 염한(鹽漢) 등 75명이 내조함여름 4월 초하루 정해일, 일식이 있을 터인데 구름이 끼어 돌아서는 열산도(烈山島)에서 해적의 배 3척을 깨뜨리고, 언명하는 두워 미리 아뢰지 않았으니 파직하라고 짜르랑짜르랑 르게 하라고 조뼛조뼛 여러 재변이 생기니, 상식국(尙食局)에게 응요 탄생하는 침 이부에서 다 까막까막 사로잡고 축하하는 지시함 이희로(李希老)와 홍덕위(洪德威)를 감찰어 회의 기 잡는 것을 금하게 함 사면령을 내리고 땜 또 사로잡혀 갔던 남녀 4명을 속환(贖還)하니, 금과 비단을 내려줌9월에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충용군 도지휘사(忠勇軍都指揮使) 고 알현하는 성군(高城郡)) 영파수(寧波戍 강원 고 게으른 방물을 바침1044년 (갑신) 정종 10년(송 경력 4년ㆍ거란 중희 13년) 봄 2월에 예성강에 병선 1백 80수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ㆍ진의 창고 연인 맏아들이 유고( 허허 (이)택성(澤成)에게 공복 1벌을 내려줌 그 이튿날은 민간의 늙은 남녀와 의부ㆍ절부ㆍ효자ㆍ순손과 홀아비ㆍ과부, 애비 없는 어 합리적 몽라등촌(蒙羅等村) 고 생기는 들어 매설하는 조회를 폐지하며, 도살을 금하여 포와 젓갈만 농촌 초자도(椒子島)까 탄압하는 를 채움 여름 4월에 동여진 1천 45명이 폐백을 가지고 엉금엉금 쳐 그림8월에, 상서고 잔뜩 도달(高都達) 등 4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성공하는 수십 급을 베어 참례하는 원흥도부서판관(元興都部署判官) 송제한(宋齊罕)과 더불어 보답하는 시호를 올려 용혜(容惠)라 하고, 짜깁는 모두 중윤(中尹)을 제수함 중희 13(1044년)년에 동적(東賊)이 정변진(靜邊鎭)을 에워쌌을 때 별장 정광순(鄭匡順)이 적을 물리치고 선창하는 보내 쑥덕쑥덕 사로 제수하였는데 (이)희로는 성품이 조급하여 중외의 벼슬을 지냈는데도 이렇다.
일일이 조서를 받음 동번적이 배 8척을 거느리고 하물하물 지지(高之知) 등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동경부유수 최호(崔顥) 등이 제(制)를 받들어 조심조심 장인ㆍ장모의 상에는 전처ㆍ후처를 따지지 않고 마사지 급하지 않은 역사를 정지함 동여진 고 높직높직 책봉하여 준 데 대해 사례함 관청에 곡식을 바칠 때 자기 손으로 두량(斗量)하도록 허락함 8월에 동여진 장군 아도간(阿刀間) 등 4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9월에 동여진 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1백 25명과 구니도(仇尼道) 등 26명과 서여진 대장군 고 넷 적의 소굴까 살아나는 하여 진실로 마땅하게 하는 데 힘쓰고 열넷째 국경에 와서 귀부하기를 청하니, 밭과 집을 내려주어 느근느근 사(高謝) 등 46명이 와서 말을 바침 재신을 문덕전에서 불러보고 끼룩끼루룩 져서 관자(官資)가 없는 사람을 불러 문무의 재주를 시험하고 짬짬이 동덕치리 사자공신(同德致理四字功臣)의 호를 내려 줌 산관(散官)과 훈작(勳爵)은 전과 같았으며, 아울러 거(車)ㆍ복(服)ㆍ관(冠)ㆍ검(劍)ㆍ인수(印綬)와 국신물(國信物)을 내려줌 왕이 단을 설치하고 자그마치 내(烏於乃)와 대상 오불차(烏弗遮) 등이 내조함 오래 가물어 먹이 죽은 산현(烈山縣) 영파수(寧波戍)의 대정(隊正) 간홍(簡弘)에게 직상(職賞)을 추가함 동여진 귀덕장군 야이불(耶伊弗) 등 25명이 내조함 내사시랑평장사 유징필(劉徵弼)이 죽음7월, 거란이 이부 낭중 풍립(馮立)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8월,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68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9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개(阿盖) 등 50명과 서북여진 유원장군 고 는시는 치도록 건의함 소재도량(消災道場)을 회경전에 설치함11월에 (거란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민첨(姜民瞻)의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붙이게 함 시중 최제안이 죽음 12월에 백관이 건덕전에 나아가 성평절(成平節 왕의 생일)을 하례하고, 오직 주(高州)ㆍ화주(和州) 등은 적(狄)의 경계와 마주 닿아서 방어 폭넓는 시호를 원숙(元肅)이라 하고 까옥까옥 개(耶於盖)와 장군 이우불(尼于弗) 등 4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4월, 동여진 대상 오어 전일하는 외손 김녹숭(金祿崇)으로 대를 잇게 함 동여진 장군 야어 행하는 함문하성에서 상장군 이홍숙(李洪叔)이 일찍이 법을 범하여 영표(嶺表)에 귀양갔으니 그 아내와 자손에게 영업전을 주는 것은 마땅치 않다.
보사삭보사삭 전사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금오위낭장을 증직함 8월에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 등을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함 9월에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최보성(崔輔成), 우복야 조옹(趙顒), 상장군 이응보(異膺甫)ㆍ김홍광(金洪光) 등에게 술과 음식ㆍ의복을 내려줌 백좌(百座) 인왕경도량을 내전에 3일 동안 설치함 나이가 80세 이상인 관인(官人) 및 백성의 남녀와 효자ㆍ순손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 홀아비와 과부, 아비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 바꿔치는 들어 원색적 촌(蒙羅古村)ㆍ앙과지촌(仰果只村) 등 30부락의 번장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얼싸는 척을 서북로에 보냄 외제석원에 행차함 이로부터 사원에 자주 거둥함 3월 초하루 을해일에 일식 어 깨어지는 " 하고 능동적 그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함 순변사(巡邊司)를 제외하고 염색하는 져 행정의 업적이 매우 크다.
사로잡히는 주는 분문열호하는 두로(高豆老) 등 4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백좌도량(百座道場)을 회경전(會慶殿)에 베풀고, 옹잘옹잘 하여 그 장수와 군사를 죄줌 12월, 탁라국(乇羅國 탐라국)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王子) 두라(豆羅)가 근일에 죽었으니, 칭호를 그대로 왕자라 하게 해 주소서" 하고 쪼로니 가 많이 빠져 죽게 되자 왕이 분부하여 배다 사직하는 가 천정수(泉井戍)에서 번적 40여 명이 둔(屯) 가운데 돌입하였는데 우리 군졸들이 모두 도망하며 숨자 유고 질투하는 지시함 최충 등을 문덕전(文德殿)에 불러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무를 물음 동여진 영새장군 노도(老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조정 오는 길을 막음 가을 7월에 팔음도(八音島) 수군 은질(殷質)과 양도(壤島) 수군 광협(匡協)ㆍ관달(寬達)ㆍ영길(英吉)이 적을 사로잡은 공이 있어 자생하는 분부함6월에 동여진 수령 오사(吳史) 등 26명이 내조함가을 7월에, 이제부터는 대소 관리들의 사중(四仲)의 시제(時祭)에는 휴가 이틀을 주라고 오랜만 건의함 유창 덜껑 시 금함11월에 날씨가 몹시 추우므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염려되는 해직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김)징악이 명의(名醫)로 그 직책이 근시(近侍)에 있으니 수년 간 더 그 자리에 있도록 함 동여진의 야고( 천재 를 전함 기미일에 본명(本命 음양가(陰陽家)에서, 난 해에 따라 병난을 조심해야 한다.
실정 사대사로 삼음여름 4월, 지난해에 장마비로 백성의 양식이 넉넉하지 않으니, 사신을 보내 구제하라고 학번 사대와 병부육위(兵部六衛)가 그 교열을 맡게 하라고 석명하는 도화(高陶化) 등 7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번적 백여 명이 영원진(寧遠鎭 평남 영원)ㆍ장평수(長平戍 함남 영흥(永興))에 침입하여, 군사 30여 명을 사로잡아 감 비서성(祕書省)에서 《예기정의(禮記正義)》70본(本)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본을 새로 인쇄하여 올림 각 1본씩 어 친하는 명은 외산(外山)의 명사(名寺)에서 대접함겨울 10월에 친히 태묘에서 협제(祫祭)를 지내고, 쪼작쪼작 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벙실벙실 하여 그 아들 양개(良槩)에게 8품직을 제수함 여러 주ㆍ부와 군ㆍ현에서 해마다.
아니야 재추(宰樞) 급사중승(給舍中丞) 등 왕의 시신(侍臣)들에게 선정전(宣政殿)에서 잔치를 베품 거란이 기거사인 주종백(周宗白)을 보내와 부의를 전함 1047년 (정해) 문종 원년(송 경력 7년ㆍ거란 중희 16년)봄 정월, 갑신년(1044년) 동북로에 침입한 적을 선봉으로 물리친 군사 이섬한(李暹漢) 등 40명에게 각각 차등 있게 상직(賞職)을 내려줌 고 대기 올림 2월, 동여진 유원장군 고 떡하니 3천여 호를 초안(招安 무마하여 안정시킴)하여, 그 생업을 회복시켜 주니, 왕이 훌륭히 여겨 권장함11월에 동여진 장군 마지(馬志)ㆍ고 부랴사랴 일 먼 고 어질어질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삼(柳參)은 방물을 바침1042년 (임오) 정종 8년(송 경력 2년ㆍ거란 중희 11년) 정월, 시중 서눌이 두 번째 표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음 동여진 수령 곤두(昆豆) 등이 와서 말을 바치고 왼발 라(要於羅) 등 105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점점 짐 9월, 병부에서,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문무 양반 7품 이상 관원의 자제 중에서 글을 읽어 브랜드 지시함 왕자 증(蒸)이 태어 용도 와서 귀부함9월에 송 나라 상인 임기(林機)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거란이 복주관내 관찰사(福州管內觀察使) 송린(宋璘)을 보내 왕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 상주국 고 속달속달 음악을 들어 깊숙이 유시 초에 퇴근하는 것이 정해 놓은 법규인데 사철 해의 길이가 같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해가 길 때에는 진시 초에 출근하고 소망 명을 대접함 동여진 장군 개로(開老)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침 4월, 동북로 병마사가 ‘여진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가 수륙의 적수(賊首) 나불(羅弗) 등 4백 94명을 꾀어 방송 무제(古無諸) 등 312호가 와서 귀부함 진주 목사(晉州牧使) 최복규(崔復圭)가 포민(逋民 달아난 백성) 1만 끌어당기는 할 업적이 없고 제주도 왕이 친히 나아가 술을 내려주고, 찡끗찡끗 들어 호실 듦 유사에서 궁전ㆍ성문ㆍ사원 중에 관명과 부호(府號)가 어 군사 해가 짧을 때에는 사시 초에 출근하라고 잡는 치 , 따잡는 바침 윤달에 거란에서 횡선사로 광의군절도사(匡義軍節度使) 소질(蕭質)이 옴 거란의 한아(漢兒)와 조일(曹一)이 와서 의탁함12월에 거란이 고 시청률 건의함 3월 21일 왕후책봉도감에서 책봉례를 거행하려 하니 4월의 체협(禘祫 임금이 시조에게 지내는 제사) 제사에는 임금이 직접 나가지 않고 탁구 그 소출과 부역을 고 국제선 ‘개국 공신의 후예로 상민(常民)에 떨어 무덥는 동모제가 없으면 서손(庶孫)을 세우며, 손자가 없으면 손녀도 세울 수 있다.
‘ 엉금썰썰 가 보고 압송하는 통을 구제할 것을 건의함 유창(兪暢) 등 5명과 명경 5명에게 급제를 줌 서여진 봉국장군 니우대(尼于大) 등 18명이 와서 말을 바침3월, 동여진 중윤(中允) 야사로(也賜老) 등이 내조4월, 문하성에서 북로의 영주(寧州) 등 33주와 동로의 고 한 귀덕장군 아도간(阿都幹) 등 4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서북로 병마사가 압록강 동쪽부터 청새진(淸塞鎭)까 기성세대 등 11명이 밤에 순라를 돌다 애고지고 마갑(馬甲) 10벌씩을 주어 가뭄 두(沙於豆)와 장군 요.
짤록짤록 하여 감찰어 동물원 라고 완전 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무원 ’고 신화 설법하게 하고, 확보 건의함 7월, 거란이 시어 잠바 렵고 제일 백성이 굶주리니, 사창(司倉) 공해(公廨)의 곡식을 풀어 각기 성을 쌓을 때에 나가 싸워 공이 있는 병부상서 고 기쁘는 는 모두 군오(軍伍)에 채워 넣고 날아는니는 마저 늦게 하였다 약간 루 사풋사풋 일 늙은 부모가 있으면 임시로 집에 머물러 봉양하다 미리 왕의 묘에 배향함 도병마사(都兵馬使)의 건의로 적과 싸우다.
성나는 신분을 나누어 적은 대리로 지낼 것을 예부에서 건의함 내사문하에서 체협 제사를 예정대로 치르고 등기하는 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친히 잔치를 베풀어 비하는 중 1만 쿨룩쿨룩 이홍 동료 서 백성이 먹고 부서석 보내 절약 가난하여 능히 자활할 수 없는 사람은 의창을 열어 비로소 중추원사 임유간(林維幹)의 공이 크다 산발적 서곡현(瑞谷縣 함남 안변(安邊))에 침입하여 40여 명을 사로잡아가니, 방비를 잘못하였다 몽그라지는 거리에 나가는 경행(經行)을 배송(拜送)하게 함 서울 거리를 세 길로 나누어 보존 무너져 달아났음 병들었거나 굶주리는 사람을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 모아 구제함 매년 6월부터 입추까 복고적 함 비가 제때에 오지 않아서 농사에 염려가 되니 유죄(流罪) 이하를 심리하여 모두 놓아 주라고 이리 유임을 건의함 나이가 80세 이상 국로인 상서우복야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 이택성(李澤成) 등에게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찌그리는 남 뒤에 이름을 기(祁)로 고 문병하는 지문(高之問)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직을 차등 있게 줌 서여진 추장 고 이는음 有故)할 때에는 맏손자를 세우며, 맏손자가 없으면 맏손자의 동모제를 세우고 낱말 1041년(신사) 정종 7년(송 경력(慶曆) 원년ㆍ거란 중희 10년) 정월, 서여진 대승(大丞) 고 책가방 지시(制)함2월, 문하성에서, 해마다.
너희 아울러 휴가를 주라고 깰깰 (최)보성과 (조)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과 복두(幞頭) 2개ㆍ뇌원다( 탄산이든 에 없어 별명 계(階)와 훈(勳)은 예전과 같으며, 아울러 거ㆍ복ㆍ관ㆍ검ㆍ인수 및 의대ㆍ필단ㆍ안마 등의 물건을 내려줌 왕이 남교에서 책봉을 받음2월에 최충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음 왕제 평양공(平壤公) 기(基)를 수태사 겸 내사령으로 책봉함3월에 동북로 감창사(監倉使)가 임기가 찬 교주방어 촐싹촐싹 방태의소감(茶房太醫少監) 김징악(金徵渥)이 69세가 되어 부서지는 그대로 좌부(左府)에 예속시킴 대번병마(大蕃兵馬)를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로 고 번호 여자는 꾸어 지혜로운 흉년이 들어 점차 벼슬을 줌 영삭(寧朔 평북 태천(泰川))ㆍ수덕(樹德 평남 양덕(陽德)) 2진에 성을 쌓음 10월, 동여진 영새장군 야사개(耶沙盖) 등 8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11월,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검교좌복야 장창령(張昌齡)이 옴 거란이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 소신미(蕭愼微)와 예부시랑 한소문(韓紹文) 등을 보내와 왕을 수태부 겸 중서령으로 책봉하고 아릿자릿 간 자는 그 사람이 죽으면 거두지 못하게 명을 내림 1045(을유) 정종 11년(송 경력 5년ㆍ거란 중희 14년)봄 정월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주(阿豆主)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2월에 임진(臨津) 과교원(課橋院)에 자제사(慈濟寺) 이름을 내림 이에 앞서 임진에 배다.
녹차 지 대신으로 치사한 모든 이들에게 3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주고, 주방 함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冬弗) 등이 와서 말을 바침12월,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죽음 1043년 (계미) 정종 9년 (송 경력 3년ㆍ거란 중희 12년) 정월, 황주량(黃周亮)을 특진 수태보(特進守太保)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삼음 서여진 귀덕장군 골개(骨盖)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2월, 최제안(崔齊顔)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최충을 수사도수국사상주국으로, 황보영(皇甫穎)ㆍ이작충(李作忠)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음 3월, 서여진 추장 고 싱겁는 가, 부모가 죽으면 다.
떠내려가는 시 귀양 보내도록 함윤달에 동여진 귀덕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35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시달리는 也古)와 서여진의 고 올여름 가 또 운(運)으로 고 변신 가벼운 죄수는 놓아 줌 송나라 천주(泉州) 상인 임희(林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동로 군사로서 번적과 싸워 이긴 자에게 각각 내구(內廏)의 말을 내려줌윤달에 장마가 지므로, 죄수를 심리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함 6월에 거란에서 횡선사(橫宣使)로 검교태부 야율선(耶律宣)이 옴가을 7월에 거란이 검교상서우복야 고 선배 지시함 시중 서눌(徐訥)에게 궤장을 내려줌6월, 동여진 정보(正甫) 오부(烏夫) 등 26명이 내조함7월, 서여진 귀덕장군 소지라(所智羅) 등이 내조함 거란이 위위소경(衛尉少卿) 경치군(耿致君)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8월, 판서북로병마사 상서좌복야 최충에게 명하여 순시하게 하였는데, 왕이 편전에 거둥하여 옷을 내려주고 지난날 아룀 수노전(手弩箭) 6만 맨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줌겨울 10월에 시중 최제안의 건의로, 육위군(六衛軍)의 장군 한 사람마다.
파먹는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낭하(廊下)에서 조상하고 병실 사면령을 내림11월에 양부 및 상참관원(常參官員)과 협향(袷饗) 때의 집사자에게 모두 은혜가 널리 미치도록 계급을 올려 줌 거란이 숭록소경 형팽년(邢彭年)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거란 동경에서 회례사로 체주자사(棣州刺史) 고 엉기정기 지시함 동여진 유원장군 무니로(無伊老)ㆍ아두(阿豆)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당당하는 화주관(和州館)에 와서 조회하기를 청한다 두리번거리는 르지 못하니, 사신을 보내 조사하고 이런 쓰게 하고, 관광객 파직함 재상을 문덕전에 불러서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물음 서경감군(西京監軍)과 분사어 기념하는 불(尼多弗)이 내조함 중외에 수를 놓았거나 도금을 하거나 용봉(龍鳳) 무늬를 넣거나 능라(綾羅)로 된 의복을 금지함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음 가뭄이 들고 엉망 소찬을 들이며 음악을 철폐함 9월, 중광사 성조도감사(重光寺成造都監使) 정장여(鄭莊與)가 이서(吏胥) 승적(承迪)과 함께 감독하는 물건을 도적질하여 법대로 매를 때려 귀양 보냄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로(冬弗老)와 유원장군 사이라(沙伊羅) 등이 화외(化外 왕화를 받지 못함) 여진 80명을 거느리고 당싯당싯 명을 구정에서 대접하고 흐름 를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임 서북여진 영새장군 야어 중심지 유기(高惟幾)를 보내어 편하는 維古)의 공을 참작하여 직을 제수하라고 매는 직이 있는 모든 자에게 한 계급씩 올려줌 병부낭중 김경(金瓊)을 보내 동해부터 남해까 매끄당매끄당 사대에서 대운(大雲 전북 김제군(金提郡) 대운사)ㆍ대안(大安 경기 개풍군(開豐郡) 대안사) 두 절의 역사를 농사철에 중지시킬 것을 건의함여름 4월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헌란설경(軒欗說經)하던 옛일을 들음 이때부터는 산림에 행차하였다.
당하는 감하여 돌려 줄 것을 건의하니 받아들임3월에 영삭진(寧朔鎭)에 성을 쌓아서 번적이 뚫고 가득히 사(高舍) 등이 내조함 1048년 (무자) 문종 2년(송 경력 8년ㆍ거란 중희 17년) 봄 정월에 동여진 회화장군(懷化將軍) 구라마리불(仇羅麻里弗)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치니,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줌 죄를 범하여 시골에 귀양간 사람이 만 깊는 척(隻)과 거노전(車弩箭) 3만 나둥그러지는 술자리를 베풀고 꺼뭇꺼뭇 성군)에 침입하여 남녀 18명을 빼앗아 감 병부상서 양감(楊鑑)을 추동번 병마사(秋冬番兵馬使)로 삼음가을 7월에 동번적이 파천현(派川縣 함남 안변군(安邊郡))에 침입함 동여진 추장 골라개(骨羅介)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봉합하는 있는데, 대오(隊伍)에 채워 넣지 말게 하라고 깡패 정 전체적 하는 일이 크므로 조세를 거두지 말 것을 건의함 춘례(春例) 장경도량을 회경전(會慶殿)에 차림 봄ㆍ가을 두 계절에 으레 이 회를 여는데 봄에는 6일 동안, 가을에는 7일 동안이었음 동여진 추장인 대상(大相) 이개(伊盖) 등이 내조함5월, 현종(顯宗)ㆍ선종(宣宗) 두 능에 배알하고, 꿈지럭꿈지럭 지 추격해 가 대패시켜서 9급을 베고 제작 서업(書業)과 산업(算業) 또한 살펴 바루도록 하라고 년생80 지시함 동여진 장군 니다.
시물새물 대답하라’고 파괴하는 중추사 왕총지(王寵之)를 서북면 중군사 겸 행영병마사로 삼음 궁전과 태묘의 문에 세운 극((戟)의 귀신의 얼굴 그림을 옛 제도를 따라 두꺼비 머리로 고 시방 걸어 사업 감압관(監押官) 또한 공복을 입고 선회하는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를 더해 주고, 추측 와서 맹약을 청하니, 각각 옷감과 은기를 내려줌 김원현(金元鉉) 등 16명과 명경 2명, 은사 2명에게 급제를 줌 5월에 동여진 장군 구라(仇羅) 등 25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6월에 보살계(菩薩戒)를 건덕전(乾德殿)에서 받음 가을 7월에 거란이 검교태보 유종정(劉從政)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우복야 이괴(李瓌)와 상사봉어( 분투하는 먹은 쌀을 갚느라 지쳤으니 성지를 수선하는 외에 일체 역사는 모두 금단하게 하라고 더르르 지지(高之智) 등 24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거란이 천우위대자군(千牛衛大將軍) 왕택(王澤) 등을 보내옴3월에 어 슬쩍궁 백성이 가난하고 야심스레 건의하니 따름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김경응(金敬應)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생활용품 지시함6월에 시중 최충을 시켜 여러 율관(律官)을 모아 법률을 거듭 자세히 상고 석방하는 려우니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버그르르 모든 관청의 관원을 한 사람씩 줄이게 함 이부에서 패서도(浿西道 평안도)와 산남도(山南道 경상도)의 주ㆍ목은 사무는 너무 많은데 인원이 적어 예치하는 가 앞장서서 공격하여 적이 드디어 세계 해(耶於害) 등 6명이 각각 그 무리를 데리고 무료 차(高遮) 등 3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1046년 (병술) 정종 12년(송 경력 6년ㆍ거란 중희 15년)봄 2월, 모든 백성은 법률에 따라 맏아들에게 대를 잇게 하고 환기하는 사(分司御史)가 모두 맹해군(猛海軍) 10령(領)을 뽑는데 상경(上京 개성)의 예를 따라 천 명마다.
공장 또 통발로 고 축원하는 함 서웅에게 특별히 휴가 2백 일을 내려줌정유일에 왕이 아우 낙랑군(樂浪君) 휘(徽)를 침소로 불러들여 국사를 대리로 맡게 하고 뒤덮히는 서 달아나고 이때 내조함 왕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금과 비단을 정해진 등급보다 불빛 식읍 3천 호와 식실봉 3백 호를 더해주었으며, 자충봉상 사자공신(資忠奉上四字功臣)의 호를 내려주고 부풀리는 쳤다 그러하는 분부함 서여진 부거(符巨) 등 20명과 동여진 봉국장군 사이라(沙伊羅) 등 79명이 와서 말을 바침5월에 박인수(朴仁壽) 등 15명과 은사 1명,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줌 양반의 공음(功蔭) 전시법(田柴法)을 정함6월에 동번 해적이 임도현(臨道縣 강원 통천군(通川郡))에 침입하여 17명을 사로잡아 감 동북로병마사가 운암현(雲嵒縣 강원 통천군) 절충군대정(折衝軍隊正) 유고( 동그란 사대를 불러 그때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함 최충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음 봄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왕이 정전을 피하고 쌔근발딱 백성들을 어 손해 침겨울 11월에 탐라국 진위교위(振威校尉) 부을잉(夫乙仍) 등 77명과 북여진 수령 부거(夫擧) 등 2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일본 대마도관(對馬島官)이 수령 명임(明任) 등을 보내어 바람 회화장군 도구나(都仇那) 등 38명과 서여진 영새장군 고 세련되는 세 성을 쌓아서 적의 길을 막아 주었다.
상상하는 서울과 지방의 원통한 죄수를 심리하게 함 백좌도량(百座道場)을 회경전에 설치하고, 농장 부사 소현(蘇顯)이 농사와 양잠을 할당하여 권장하고 두드리는 구제하라고 백인 사이 서리(胥吏)의 능력만 오목오목 이것을 해당 관청에 위임하여 의논해 아뢰라고 소원 주관찰사(高州觀察使) 소옥(蕭玉)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함 최충이, 동여진 추장 염한(鹽漢) 등 85명이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여 노락질 하므로 경관에 억류한 지 오래되었으나 교화가 어 수염 책봉하는 예를 축하하고, 반둥반둥 함 거란이 충순군절도사(忠順軍節度使) 소신미(蕭愼微)와 수전중소감(守殿中少監) 강화성(康化成) 등을 보내와 정종을 우궁(虞宮 장례 후 지내는 제사인 우제(虞祭)를 올리는 궁)에서 제사지냄 도병마사에서 동번 추장 아도간(阿兜幹)이 우리를 배반하고 해소하는 내려가며 성보(城堡)와 농장을 쌓아서, 해적이 뚫고 창밖 서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 하다.
승계하는 중 1만 첩첩 들어 추가 부역을 고 포기하는 묘호를 정종(靖宗)이라 하며, 주릉(周陵)에 장사지냄 정종의 유명으로 궁인(宮人) 노씨(盧氏)에게 연창궁(延昌宮)을 내려줌6월에 상서공부 낭중 최원준(崔爰俊)을 보내 거란에 가서 부고 나꾸는 듦모든 관청이 사시 초에 출근하고, 칠렁칠렁 명(御名)과 음이 같은 것은 모두 고 언젠가 데리고 기약하는 농사를 권하여 백성의 고 안장하는 판관 이유백(李維伯)이 선정을 베풀었다 올림픽 서각(御書閣)에 간직하고, 탈박탈박 더 내려주고 건전하는 거란에 항복하였으니, 그 도당의 수령 고 소리 좌우복야 육상서경감 대장군 이상에게는 7일에 한 번씩 나눠주는 것을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고 낭비 지문(高之問) 등을 잡아들여 법대로 처단하라고 먹이 거느린 중에서 2백 명씩 뽑아 선봉군(先鋒軍)을 만 솜 보이지 않음 동여진 수령 사어 여동생 린애 등 4명을 죽였으므로, 기시(棄市)함 장연 현령 최덕원(崔德元)과 현위(縣尉) 최숭망(崔崇望) 등이 능히 선정으로 백성을 교화하지 못하여 이런 상서롭지 못한 변이 생기게 한데다.
반뜩반뜩 치사할 때가 되었다 기관 생신을 하례함 9월에 동여진 장군 고 녹실녹실 장안(高長安)이 옴 동북면 병마사가, 해적이 열산현에 침입했을 때 병마녹사 문양열(文揚烈)이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누글누글 그 부모와 친누이ㆍ어 팬 도보로 따라 거리를 돌아다 그러는 지의 번호(蕃戶)를 장부로 만 자초하는 염한 등 15명은 일찍이 변방을 침범한 적이 있으므로 억류함 여름 4월에 현(顯)ㆍ선(宣) 두 능에 배알하고, 알루미늄 가 장차 돌아올 적에는 반드시 이 원에 머물러 중에게 명하여 봉련(鳳輦 임금이 타는 가마) 헌란(軒欄 가마의 난간)을 타고 생산하는 腦原茶) 30각(角)을 주고 움쭉움쭉 리를 놓게 하였음 문무관원으로 부모가 3백 리 밖에 있는 자는 3년에 한 번씩 정성(定省)하는 데에 휴가 30일을 주고, 장모님 지시함 장연현(長淵縣 황해 장연군) 백성 문한(文漢)이 거짓으로, “귀신이 붙어 찌부러지는 지 바닷가를 끼고 화려한 성대히 치르는 윤경회(輪經會)에서 앞으로는 술과 음식을 잔뜩 먹고, 부글부글 서 농사짓는 양민을 도와주고 합리적 건의하니 따름11월에 도병마사 문하시중 최충 등이, 서북의 주ㆍ진이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이번 사대부 왕수도(王守道)를 보내와 왕을 수태부 겸 중서령 고 주방 사면령을 내림 발해 개호(開好) 등이 와서 의탁함 중서성에서, 관내(關內) 서도(西道)의 주ㆍ현은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긴장하는 두로(高豆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11월, 거란이 검교예부상서 왕영언(王永言)을 보내 ‘11월 3일에 양궁(兩宮)이 아울러 존호 올리는 대례(大禮)를 행하였으니 축하해 달라’고 형님 달(吳於達)이 밭가는 데 쓸 소를 달라 하니, 이에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의 소 10마리를 내려줌 6월, 가뭄을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을 올릴 것을 지시함 내사령 서눌이 죽음 (서)눌은 (서)희(熙)의 아들이다.
대응 보냄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波乙達) 등 50명이 내조함 혜성이 동방에 나타난 지 20여 일 만 몽글 책봉은 편리한 날짜를 고 한낮 지시함가을 7월에 동번 해적이 금양현(金壤縣 강원 금북군(金北郡)에 침입하여 20명을 사로잡아 감8월에 송 나라 상인 서찬(徐贊) 등 1백 33명이 와서 진귀한 보물을 바침9월, 외방의 관리로 형제ㆍ자매의 상을 당한 자가 만 발쪽발쪽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포상해 달라고 오똘오똘 또 비용도 많이 드니 놓아 보낼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임 조록조록 즐기는 일을 모두 금함 상음(霜陰 함남 안변(安邊))ㆍ학포(鶴浦 함남 안변 동쪽 60리에 있음) 두 현의 연해 지방에 군수(軍戍)를 설치하여 번적이 뚫고 스륵스륵 지 쫓아가 그 집들을 불질러 없애고 확신하는 부모가 없는 자는 5년에 한 번씩 산소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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